* 이 글은 지난 2022년 10월 16일 향린교회 임시 예배처소인 서울YWCA 강당에서 열린 심원 안병무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강연 원고이다. 분량상 3회에 나누어 실을 예정이다.-편집자
글 싣는 순서
1회 내 삶은 우리의 삶이다
2회 근대성은 조선사상에 내재되어 있었다
3회 안병무는 조선사상사의 아포리아를 근본적으로 해소하려 했다
내 삶은 우리의 삶이다
1) 웅혼한 기운
안병무는 1922년 6월 23일, 평안남도 안주군(安州郡) 신안주면(新安州面) 운송리(雲松里)에서 태어났다. 안주는 청천강(淸川江)변에 있는 도시이고, 청천강이라 하면 수양제의 30만 정예대군을 치밀한 작전을 통해 거의 전멸로 휘몰아간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을 연상케 한다. 현대사학의 쟁점 중에, 과연 살수가 청천강인가, 또는 살수에 짧은 시간 안에 댐을 설치했다가 그 보를 터뜨려서 대군을 휩쓸어버리는 작전이 진실로 가능했을까 운운하는 논의가 있지만, 아주 명백한 사실은 수양제가 고구려를 향하여 일으킨 백만대군(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대군의 숫자는 113만 3,800인이요, 치중대를 다 합치면 400만 인에 이른다. 인류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대군이었다.)이 완벽하게 궤멸되었고, 수나라가 멸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중원의 판세가 바뀐 것이다.
이러한 사건 하나만 해도 왜 수나라가 그토록 막대한 출혈을 감행하면서 고구려를 치려 했는지, 고구려는 과연 어떤 나라이길래, 당대 세계 제1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수나라를 그토록 처절하게 궤멸시킬 수 있었는지에 대한 총체적 견해가 지금 우리의 상념을 뛰어넘는 어떠한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인식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연도 아니고 미스터리도 아니다!
하여튼 안병무는 실존적 자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웅혼한 태허(太虛)의 기(氣) 속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두 살 때 어머니 선천댁의 결단에 의하여 만주 북간도의 하늬바람 속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광활한 고조선의 흙내음새가 몸에 배이기 시작한 것이다. 20세기의 개명과 더불어 일찍이 기독교를 수용한 사람들 중에는 심원 안병무와 대강 비슷한 삶의 역정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 함석헌, 김재준, 문익환, 문동환, 강원용……. 이들을 규정짓는 공통된 특질을 이야기하라면, 기존의 틀에 안주하기를 거부한다든가, 기독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토착적인 자기색깔을 지닌다든가 하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인간의 내음새가 좀 스케일이 크다는 것이다.
나는 안병무보다 한 세대를 격하여 남쪽의 안온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나의 부친은 우리 집안의 원적이 충북 제천에 있었다고 하는데 나의 증조부가 제천을 탈출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높은 벼슬까지 오르는 바람에 본거지가 전라도 해남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나의 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가 신학문교육을 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나의 아버지는 할아버지 금고에서 당시로서는 큰돈인 300원을 움켜쥐고 해남을 탈출하여 휘문고보에 들어갔다. 전형필, 이마동, 이태준과 친하게 지냈다. 아버지는 세브란스의전을 들어갔고 쿄오토제국대학 의학부에 유학까지 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대갓집에서 태어난 사람이지만 자수성가하여 독자적으로 의사가 되었다.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휘문고보 시절에 본인의 의지에 의하여 묘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 인생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실은 나의 엄마 풍산 홍 씨와 결혼한 사건인데, 나의 어머니야말로 진실하기 그지없는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개업의로서 여러 곳을 누비다가 결국 천안에 정착하였다. 아버지는 의술이 탁월하였고 충청도 일대에 이름을 떨친 병원을 만들게 된다.
나의 장형 김용준(金容駿, 1927-2019)은 어머니의 엄격한 기독교 신앙교육 속에서 자라났고, 경기고를 나와 서울공대 화공과를 나온 유기화학자이다. 젊을 때는 매우 래디컬한 좌파사상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에 뿌리박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지사형의 인간이었다. 6·25 때는 참전하여 압록강까지 올라갔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낙향하여 천안농고의 교사가 되었다. 당시 워낙 학교사정이 빈곤하고 선생이 부족하여 여러 과목을 도맡아 가르쳤다. 영어, 수학, 화학, 물리, 독일어의 다섯 과목을 가르쳤다고 했다. 천안의 많은 학생들이 나의 형을 존경하고 따랐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나의 장형은 그들의 로맨스였고 꿈이었다.
우리 병원 2층은 곧 천안의 청년지사들이 모이는 교실이 되었고 장형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열심히 지도했다. 큰형은 새벽 4시면 꼭 일어나서 아랫집 우물에서 냉수마찰을 했다. 여름, 겨울을 변함이 없이 찬물을 몸에 퍼부었다. 나는 그러한 형의 모습에서 몸의 디시플린이라는 것을 배웠다. 나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의 모습을 대견스럽게 여기고 새벽마다 숯불을 지피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우리집은 천안의 지적 센터가 되었고, 놀라운 사실은 당시 천안농고와 여고에서 10명 정도의 학생들이 서울대학을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우리집의 고사를 꺼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2) 함석헌과 씨알농장
큰형이 천안에서 르네상스를 일으키고 있을 즈음, 때마침 천안에는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함석헌 선생이 그가 존경하는 마하트마 간디가 아슈람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했던 것을 모델로 하여, 천안에 씨알농장을 시작했다. 정만수 장로라는 사람이 천안에 있는 자기 땅을 기증하여 농장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때 마침 천안에는 김용준이 있었다. 우리집은 천안재빼기라는 언덕 위에 있는 큰 집이었는데 서향의 툇마루에 앉아 내려다보면 그 앞으로 경부선 열차가 칙칙폭폭 하면서 내려가고, 그 건너에는 천안 큰 냇갈이 흐르고, 그 건너 벌판 끝에 도립병원 건물이 있었는데 그 옆으로 전개되는 누런 벌판 위에 씨알농장이 있었다. 우리집 툇마루에 앉으면 석양에 물든 하늘과 함께 황토빛 씨알농장의 모습이 항상 눈에 들어오곤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함석헌 할아버지가 씨알농장 황토흙 이랑 사이로 한 손에 호미를 들고, 또 한 손에는 헬라어 성경을 들고 앉아 있다는 매우 신화적인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이런 얘기는 결국 나의 청춘의 로맨스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나는 기실 어렸을 때 놀러다니기를 좋아했고 논두렁에서 함석헌 선생을 가끔 만났다. 물론 나는 함 선생과 대화할 상대는 아니었다. 멀리서 쳐다만 봤다. 그때 내 기억에 남는 떠도는 소리는, 저 사람이 저렇게 수염을 길게 기르고 다니는 이유는 북한에서 도망쳐 내려올 때 미처 수염 깎을 겨를이 없었는데 남한으로 와서도 그냥 기르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걸어다닐 때 매우 빨리 걷는데 그 이유는 할 일이 많은 인생인데 어슬렁거려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소신 때문에 그토록 빨리 걷는다는 것, 그런 소리였다. 실제로 함 선생은 휙휙 날 듯이 빨리 걸었다. 나도 함 선생님을 모방하여 어려서부터 빨리 걷는 습관을 길렀다.
큰형은 천안농고의 학생들을 데리고 함 선생의 씨알농장집회에 빠짐없이 나갔다. 이 세상에 함 선생을 따르고 존경한 사람으로 우리 큰형만큼 극진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함석헌은 큰형의 신이었고, 가치관의 모든 원천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향심이 한결같았고 죽는 그날까지 함석헌에 대한 로열티는 추호의 변화가 없었다. 함석헌이 영면했을 때도 「동아일보」에 “함석헌 없는 대한민국, 어쩔 것이냐”는 식의 글을 썼다. 그런데 함석헌이 김용준을 바라보는 시선은 나에게는 매우 차가운 듯이 느껴졌다. 함석헌이 퀘이커교도들의 추천으로 노벨평화상 후보가 되었을 때 하버드대학에 왔다. 큰형이 나에게 전화 걸어 잘 모시라고 해서 함석헌 선생은 나의 집에서 일주일간 기거를 하셨다. 그리고 그레고리 헨더슨과 같은 하버드 주변의 인물들을 소개시켜 드렸다. 나는 큰형이 함석헌 선생의 제1의 수제자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함석헌 선생이 김용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전혀 무게감이 없었다. 나는 함석헌이 좀 의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물론 이것은 함석헌의 잘못이 아니다. 김용준의 과도한 로열티에서 내가 상대적으로 느끼는 감정일 뿐일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함석헌을 미친 듯이 흠모하며 살아가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무교회주의는 신앙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일본 제국대학에 유학을 한 분이라 그런지 우찌무라 칸조오도 별것 아니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함석헌을 흠모하고 따르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당시 천안에 함석헌과 김용준이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을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어머니는 씨알농장을 위해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함석헌 선생은 씨알농장에서 과일을 수확하시면 직접 과일을 지게에 담아 우리집에 가져오시곤 했다. 나는 늦잠을 자다가 여러 번 우리집 안방 윗목에 앉아 계시는 함 선생님을 쳐다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느낀 것은 함석헌 선생이 보기 드문 미남자라는 것이었다. 수염을 거두고 보면 그 골격에 이남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는 대륙적 기상이 서려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사상」이라는 위대한 교섭의 장, 한 글자 한 글자의 공간이 소중하기 그지없는데 내가 너무 신변한담과도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만 같아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신앙이라고 하는 새로운 가치의 정착이 이루어지는 데는 한 사람 개인의 결단도 중요하겠지만 그런 결단을 연출하는 화엄적인 연관구조, 인간관계나 시대정신이나 공동체의 지향성, 이런 모든 것이 이해되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을 읽을 때도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의 양태를,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79, 괴팅겐대학의 성서신학자)가 파고들 듯이, 다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가장 초기의 인물들도 독립적 개인으로서 독존한 것이 아니라 패밀리공동체로서 연관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세자인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정약용의 매부(누이의 남편)이며, 공조판서를 지낸 이가환의 조카이다. 가장 열렬한 기독교교리 전파자였던 이벽(李蘗, 1758-85)은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부인의 동생이다. 그러니까 큰형수의 남동생이다. 그리고 제사 문제로 참형을 당한 윤지충은 다산의 외사촌형이다. 그리고 초기 천주교 이론가인 권철신, 권일신은 모두 다산의 큰형수의 동생인 이벽에게서 천주교를 배웠다. 『주교요지』를 쓰고 당당하게 서소문 밖에서 순교당한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은 다산의 셋째 형이며,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철상, 정하상은 정약종의 아들들이다. 이들은 학맥으로 말하자면 모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 문하에서 직접 배웠거나 사숙한 제자들이요, 당파로 말하자면 모두 남인이다.
미켈란젤로의 화풍과 비교되곤 하는 그 유명한 자화상을 그린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 윤선도의 증손)의 다섯째 아들의 후손이 다산의 외가를 이루었고, 그 집안이 곧 윤지충의 아버지 집안인데,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덧붙이자면 나의 친할머니 해남 윤 씨가 바로 같은 집안(윤두서 셋째 아들의 후손)의 종녀라는 사실이다. 해남 녹우당을 가면 윤형식 종손어른이 다산이나 도올이나 같은 집안의 외손임을 잊지 말라고 순순(諄諄)히 타이르신다.
많은 사람들이 도올 김용옥이 크리스천이냐 아니냐 하고 따져든다. 나를 기독교 교인이라는 잣대에 의하여 존재론적으로(ontologically) 규정하려 드는 것이다. 그것은 또다시 정약용이 크리스천이냐 아니냐 하고 따지는 것과도 같다. 정약용이 과연 기독교 신앙을 가졌는가, 배교를 했는가, 이런 질문 자체가 근원적으로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정약용이 하느님을 믿었다면 그 하느님과의 해후가 그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따져보기도 전에 크리스천이라는 상표를 붙였다 떼었다 하는 것은 최소한 신학이나 진지한 학문의 영역에 속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또 질문할 수 있다. 과연 안병무가 기독교인인가 아닌가? 이런 말을 하면 모두가 나를 황당한 눈초리로 쳐다볼 것이다. 아니 20세기 한국신학의 세계적인 이정표를 수립한 안병무에 대하여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를 운운하다니 도올 너는 돈 놈이 아니냐? 그러나 안병무는 나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김 군! 나에게 기독교인이라는 굴레를 씌우지 마시오. 나는 기독교인이라는 명사에 갇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오. 나는 오직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았을 뿐이오.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냐 아니냐? 이런 것도 나에게 묻지 마시오. 나의 그리스도는 오직 민중사건 속에 있소. 김 군! 나는 김 군이 부럽소. 이런 아폴로지에 구애될 필요가 없는 자리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으니 말이오.”
나의 경우만 해도, 나는 갓난아기로서 눈을 떴을 때 이미 세례를 받았고 세상일이 궁금할 때쯤 이미 함석헌을 만났고, 김용준을 만났고, 나의 어머니 손을 잡고 흰눈 쌓인 먼동 길을 꼬드득꼬드득 밟으면서 새벽기도에 나갔다. 기억나는 일은 큰형이 그토록 애절하고 충직하게 함석헌을 모셨는데, 함석헌은 그가 받은 사랑을 모두 안병무에게 쏟고 있는 듯했다는 것이다. 안병무도 가끔 씨알농장에 다녀가곤 했다.
3) 허혁의 미소
나의 기독교 신학과의 인연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사람을 더 언급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불트만 신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허혁(許, 1919-97)이라는 특이한 캐릭터에 관한 것이다. 허혁은 감리교신학교를 다녔고, 그때 칼 바르트의 사상에 도취하여 독일 유학을 갔다. 여러 대학을 전전하다가 뮌스터대학에서 “Gesetz und Evangelium”(법과 복음)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얻고 싼 화물배에 몸을 싣고 귀국했다. 그는 갈 곳이 없었다. 낯선 친구의 소개로 얻은 자리가 보성고등학교 독일어 교사 자리였다. 보성은 사립학교였고, 그곳의 서원출 교장은 자유당 때부터 좌·우익에 구애됨이 없이 교사들의 사상적 자유를 보장했기 때문에 매우 굵직한 인물들이 교사로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대학 박사학위를 소지한 인물이 고등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사태였다.
그가 처음 출근하여 첫 수업을 행하던 날, 나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1962년 봄이었고, 나는 보성고등학교 1학년생도였다. 나는 허혁을 보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학자집안에 태어나 해외유학을 하고 대학자가 될 꿈을 꾸던 소년이었는데, 내 눈앞에 나타난 독일박사는 너무 초라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좀 낯설었는지, 자기에 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다짜고짜 일어나서 질문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고작 고등학교 선생이 되자고 그 어려운 유학을 하셨습니까?”
이렇게 철없이 당돌한 질문을 들은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창밖을 내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허혁 선생의 독일어 시간을 음미하면서 들었고, 그분으로부터 신학강의는 못 들었어도 독일어의 심미적 구조에 관해서 배우는 바가 컸다.
나는 고교를 졸업하고 고대 생물학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너무 무술운동을 심하게 하다가 극심한 관절염에 걸렸다. 온 관절이 부어서 활동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천안 집에 쑤셔박혀 고통을 잊기 위해 책읽기에 몰두했다. 당시 내가 읽은 책은 주로 소설이었지만 상당량의 세계문학을 섭렵했다. 나는 천안에 있으면서 나홀로 씨알농장을 복원했고 큰형 흉내를 내면서 매일 새벽마다 천안의 남녀 고교생을 상대로 바이블클래스를 진행했다. 내가 그들의 영어 실력에 얼마큼 도움을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는 참으로 위대한 성경공부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어머니가 빠지지 않고 들으셨고, 어머니는 내가 영어성경으로 해설하는 것이 매우 명료하게 성경을 이해시켜 준다고 좋아하셨다.
그렇게 지내다가 나는 결심을 한다. 사울의 다메섹 도상의 회향을 생각했고, 또 육체에 주어진 가시(고후 12:7)를 생각했다. 가자! 가자! 신학대학으로 가자! 나는 신의 사도로서 내 몸을 바칠 것을 맹세하게 된다. 그러나 그토록 신앙이 돈독하고 평생 번 돈을 모조리 교회에 퍼부은 나의 아버님과 어머님은 나의 신학대학행에 관해서는 완고하게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자신들의 막냇자식이 목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참사였다. 당신들의 삶의 헌신에서 건진 보람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때 내 머리에 스친 미소가 바로 허혁의 미소였다. 나는 나의 실존적 정황을 소개하는 장문의 편지를 허혁 선생님께 보냈다. 허혁 선생님은 나의 학문적 가능성을 예지하고 계셨다. 결국 허혁 선생님과 나의 장형이 나의 문제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둘은 친구가 된다. 나는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했다.
혹자는 또 물을 것이다. 지금 그대에게 주어진 화두는 안병무의 삶과 사상인데 왜 네 인생이야기를 하고 있으냐고. 옳다! 나 도올은 지금 내 삶의 생생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삶의 이야기는 안병무의 삶의 이야기와 얽혀 있다. 내 삶의 이야기와 안병무의 삶의 이야기를 합치면 곧 “우리의 삶의 이야기”가 된다. 이 “우리”를 확대해나가면 “민중”(Minjung)이 된다. 안병무는 분명히 말했다. “민중은 우리다. 나의 실존이 아닌 우리의 실존이다!”
4) 유동식의 주체의식
내가 살고 있는 집, 바로 한 집 건너 옆에 유동식 선생님이 살고 계셨다(최근 작고). 성품이 워낙 젠틀하시기 때문에 나는 소금(素琴)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랐다. 나는 귀국하자마자 유동식이 쓴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1)라는 대저에 관하여 그 방면의 전공자로서 보완적 비평을 가하는 매우 신랄한 글을 「세계의 문학」이란 잡지에 발표하였다. 그 글 속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우리는 예수라는 무당을 무당으로 쳐다볼 때만이 그 무당을 무당 됨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유 선생님은 한국무교 전반에 관한 유 선생님의 견해를 분석하는 나의 통렬한 비판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셨고 나를 특별히 귀한 인물로 사랑해주시었다. 그리고 정년퇴임을 하실 때, 그 퇴임연설을 광화문 새문안교회에서 행하셨는데 나 보고 한번 와보라고 하셨다. 그 자리에서 유동식 선생은 기독교가 과연 한국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었다.
최초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 알렌이 인천부두에 정박한 높은 배에서 계단을 밟고 내려올 때, 그 뒤에 서양종 강아지 한 마리가 따라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전파하는 하나님이나 예수가 모두 선교사가 전파함으로써 비로소 이 민족에게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는 알렌 강아지 뒷꽁무니를 따라 들어왔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나의 신학자로서의 일생은 바로 이 아이러니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예수나 하느님은 전도(傳道)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알렌이나 천주교 신부들이 가져오기 이전, 저 고조선 태고로부터 이 민족을 감싸고 있었던 영성이요, 풍류다! 기독교는 서양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다.
“알렌 강아지 뒷꽁무니”라는 신랄한 표현 속에서 이미 종교를 논하는 시공성(時空性)의 대전환이 일어난다. 기제(旣濟)와 미제(未濟)가 맞물려 돌아간다. 유동식의 강연은 정말 진실하게 대답되어야만 하는 화두이다. 성서읽기는 삭제되어서도 아니 되고 발췌되어서도 아니 된다. 있는 그대로의 그 전체를 진실하게 대답해야 한다.
오늘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안병무의 민중신학이 안병무 개인의 창안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단지 기독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민족 문제의식의 한 변양(變樣)이라는 것, 기독교라는 통시태에 들어 있는 보편적 공시태는 우리 조선사상사의 모든 단면에 이미 내재한다는 것, 즉 “근대”(Modernity)라는 개념이 기독교와 결부되어야만 한다는 모든 사유의 오류성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한국 기독교의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는 것을 새롭게 선포하려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도올 김용옥|1967년 3월 수유리에 있는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였다. 2011년 2월 한신대학교는 그의 사회봉사와 신학 활동을 기리면서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그의 신학 저작으로는 『기독교 성서의 이해』, 『도올의 로마서 강해』,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도마복음 한글역주』(전 3권), 『큐복음서』, 『나는 예수입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