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 탈진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었다. 마음에 우뚝 세워놓고 섬긴 금송아지 우상을 찍어버리시고 심령을 새롭게 하신 주님께서 내게 백의종군할 기회를 허락하셨다. 그 기회는 2012년 경기도 포천에서 주어졌다.
포천에서 작은 교회를 섬기는 동안 나의 눈에 자꾸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 바로 외국인노동자들이었다. 주말이면 포천 시내, 특히 지금 포천이주노동자센터(평안교회)가 있는 송우리는 마치 동남아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이주노동자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곳에서 2018년부터 나는 이주노동자 선교에 전념하고 있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온 이곳에서 하나님은 예수께서 자신과 동일시한 지극히 작은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셨다. 그 이야기를 잠시 하려고 한다.(이주노동자 선교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의 저서 『파랑, 검정, 빨강: 코리아의 내부식민지, 이주노동자 이야기』에 담겨 있다.)
포천에서 처음 만난 이주노동자들
2018년부터 포천에서 외국인노동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과의 만남을 시도한 곳은 산재지정병원이었다. 포천시에 있는 한 병원을 방문해 산업재해를 입은 이주노동자들을 만났다. 나는 그 병원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일터에서 다친 그들을 위로하며 돕기 시작했다.
하루는 병실에서 덩삐(가명)를 만났다. 그는 입국한 지 6개월 된 22세의 미얀마 청년이었다. 취업비자(E9)로 들어와 비닐공장에서 일했는데, 밤샘 노동을 하다 그만 손목을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날카로운 기계 부품에 손목을 찔린 것이었다.

그는 한국어는 물론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우리는 번역기를 이용해 간신히 소통할 수 있었다. 그에게 산재보험 보상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상당수의 이주노동자들은 산재보험 보상에 대해 잘 모른다. 실제로 이주노동자가 일터에서 다치는 상황이 발생하면, 기업주들은 산업재해로 신고하기를 싫어하며, 적당히 치료나 해주고 만다.
며칠 뒤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병상에 앉아 페이스북으로 외부와 소통하고 있었다. 한국어를 거의 못하는 그에게 SNS는 유일한 소통 도구인 듯했다. 나는 그와 페이스북 친구를 맺었다. 작은 키에 야무지게 생긴 그는 나와 친구를 맺고는 밝게 웃었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의 임금에 대해 묻게 되었다. 그는 사고가 나기 전까지 한 달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고 했다.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매일 반복적인 일을 했다. 간식은 빵 한 조각뿐이었다.
그렇게 사고가 나기 전 한 달 동안 일한 시간은 모두 390시간이었다. 가히 살인적인 노동시간이다. 2018년 당시 최저시급은 7,530원이었다. 덩삐의 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을 초과한 노동, 야간노동, 휴일노동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기본적으로 최저임금만 적용하여 계산해도 그의 한 달 급여는 400만 원이 넘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받은 돈은 220만 원이었다. 생산 노동을 하는 과정에서 그가 당한 부당한 일들을 굳이 말하지 않고 단순히 최저임금만을 기준으로 계산하더라도 그가 당한 착취가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그에게는 일터를 옮길 자유가 없다. 외국인고용법의 고용허가제가 그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제도에 따르면 취업비자를 받고 입국한 외국인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하려면 고용주의 동의를 받아야만 한다.
한국 사회의 착취 구조는 3겹, 4겹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처럼 치밀하게 짜여 있다. 하청 공장은 원청으로부터 착취를 당한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으로부터 착취를 당한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차별을 당한다.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차별을 당한다.
덩삐는 우리 사회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에서 착취당하는 존재다. 재벌왕국 코리아에서 착취 구조의 정점에는 재벌이 있다. 상위 10% 기업이 전체 기업 이익 가운데 90%를 독식한다. 그러니까 재벌의 빨대가 덩삐 같은 노동자에게까지 꽂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는 130만 명 정도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착취 구조의 출발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덩삐를 보며 야고보서 5장 1-6절 말씀을 되새겼다.
죽음의 현장에서 함께한 기도
죽음의 현장에서 드린 기도 이야기를 잠깐 하려 한다. 2020년 1월 31일에 양주시의 한 가죽공장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공장의 대형 보일러가 폭발하는 바람에 2명이 죽고 10명이 크게 다친 중대 재해였다. 이 사고로 한 명의 이주노동자가 목숨을 잃고 다섯 명이 부상을 당했다.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사고가 난 작업장에는 법적으로 있어야 하는 안전관리사와 안전시설이 없었다.

한 해에 2,000여 명을 산재로 죽이는 기업국가 한국에서 산재로 인한 사망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하루 6-7명이 산재로 목숨을 잃지만, 이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은 많이 무뎌진 듯하다. 정부는 산재로 인한 사망자 숫자도 억지로 줄여 엉터리 통계를 발표한다. 정부가 산재에 포함시키지 않는 산재 사고가 많은 것이다. 엄연히 노동자이지만 노동자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아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산재 신고율이 3분의 1 정도밖에 안 된다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 사고 현장에서 기도회를 열었다. 포천이주노동자센터와 예수살기(기독교사회선교단체)가 주관한 기도회였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이 모일 수 없는 실정이었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20여 명이 모여 기도를 드렸다. 죽음의 현장에서 함께 기도하며 다시 떠올린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의 말씀이었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 10:10)
이는 새 시대, 새 사회-세상을 열겠다는 열망이 담긴 말씀이다. 즉 이제까지 역사는 소수의 사람이 다른 인간의 생명을 마구 죽여가며 탐욕적 목적을 이루는 것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만인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역사를 만들자는 이야기다. 오늘날에 이 말씀을 적용한다면, 자본의 이윤과 착취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람의 생명을 마구 억압하거나 죽이는 시대를 접고, 이제 만인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소수의 탐욕을 위해 지난 20년 동안 노동자 4만여 명을 산재로 죽인 우리 사회의 경제구조를 이제라도 헐고 새로 지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이윤 극대화를 노리며 노동자를 마구 죽이고 착취하는 기업이나 기업주를 강력히 처벌하는 법(중대재해기업처벌법 혹은 ‘기업살인법’)을 제정하라는 요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선거에서 맘몬의 마름 노릇을 해온 정당이나 의원들을 솎아내고 새로운 일꾼을 세워야 한다. 동시에 돈이 왕 노릇 하는 사회에 길들여진 자신의 마음을 죽이고 새롭게 거듭나는 것이 필요하다. 기도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간구했다. 자본의 이윤과 착취를 극대화하는 것보다 생명을 극대화하는 사회가 속히 세워지길 바라며 기도했다.
이렇게 나는 현재 포천이주노동자센터(평안교회)를 중심으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지원하는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주일에는 이주노동자들과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한다. 평일에는 노동 현장의 문제로 고통당하는 이주노동자들을 돕는 활동을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사업주와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돕는다. 필요에 따라 이주노동자 단체나 시민단체들과 연대하는 활동도 한다.
재벌왕국 한국에서 착취당하는 이주노동자들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130만 명 정도다. 그들이 생산과 소비로 한국 경제에 미치는 효과는 한 해에 80조 원이 넘는다. 그러나 그들의 노동 조건과 환경은 열악하기만 하다. 1:99의 세습 자본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는 이 나라,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이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은 동물 같은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다. 주로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온 그들은 자기 나라에서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임금을 받지만 비인간화된 삶을 강요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국가가 개입해 만든 구조적인 악 속에서 심한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극심한 노동 소외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심하게 훼손당한다.

그들이 한국에서 5년 내지 10년 정도 살면서 가장 긴밀하고도 깊은 관계를 맺는 사람은 고용주이다. 그 관계에서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고용주와 이주노동자는 철저한 주종관계이다. 국회가 만들고 정부가 집행하며 사법부가 뒷받침하는 법과 제도하에서 이주노동자와 사업주가 맺는 관계가 그렇다. 이 철저한 주종관계는 이주노동자의 모든 기본권, 인권, 노동권을 침해하는 근본 원인이다. 앞서 언급했듯, 합법적으로 들어온 이주노동자의 경우에도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는 일터 이동의 자유조차 없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한 인간을 고용허가제를 통해 심하게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이다.
130만 외국인노동자는 오늘 착취공장형 재벌왕국 한국 사회의 먹이사슬 끄트머리에 처해 있다. 그들은 한국 사회·경제의 하부구조를 떠받치는 존재들이지만 현대판 노예처럼 취급받는다. 이주노동자 없이는 농사도 짓지 못하고 중소기업도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지만, 우리 사회는 그들을 일회용품처럼 취급하며 이윤 극대화를 위한 도구로만 사용한다. 내가 지난 4년간 매일 만나며 함께 울고 웃는 사람들이 바로 이 이주노동자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나는 1980년대에 우리 사회 먹이사슬 끄트머리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선교활동을 했다. 우리나라에 이주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초부터였기에 그 이전에는 이주노동자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당시 우리 사회 먹이사슬의 끄트머리에 있던 사람들은 한국인이었다. 주로 도시빈민과 하층 노동자들과 농민들이었다. 당시 이들이 감당했던 자리의 상당 부분을 오늘날 이주노동자들이 감당하고 있다.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위한 교회
예수께서는 자신을 지극히 작은 사람들과 동일화했다.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이른바 ‘양과 염소의 비유’를 설파하면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강조하셨다. “지극히 작은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마 25:40) 이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지난 1970-80년대에 ‘지극히 작은 사람들’은 도시빈민과 하층 노동자들이었다. 오늘날에는 이주노동자들이 지극히 작은 사람들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사람들로서, 그 범주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희망교회와 인항교회는 1970-80년대에 지극히 작은 사람들 속에서,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주체로 세우며,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했다. 평안교회(포천이주노동자센터)는 오늘 지극히 약한 사람들 속에서 그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은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지구촌 전체에 퍼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한국은 중간자의 위치에 있다. 핵심부 국가들의 지배를 받으며 동시에 주변부 개발도상국들을 지배한다. 전시작전권을 일찍이 미국에 상납한 한국은 이제 미국의 그늘 아래에서 해외에 넓은 경제영토를 확보하고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해 억압·착취한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130만 이주노동자를 내부 식민지 백성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1987년 이후에 구축된 자본독재 체제는 점차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졌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되었다. 우리 사회는 1:99의 사회, 세습자본주의 사회를 완성하기 위해 전력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더욱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있을 자리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 사는 삶의 자리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민중교회 운동이 더욱 필요하다. 교회가 그들의 공동체가 되고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의 사회적, 내면적 해방을 도모하는 일은 그들의 자기 해방을 이룰 뿐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를 바로 잡는 일이기도 하다. 그 일은 곧 보편적인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극심한 격차 사회에서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 사랑을 베푸신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일치, 연합하신다. 그럼으로써 성령은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을 도모하신다. 노동하는 대중 가운데 지극히 작은 사람들의 해방은 곧 인간 보편적인 해방이자 진정한 사회의 평화를 이루는 길이다. 이 길을 교회가 걸어갈 때 진정한 속죄인 사회적 속량(social redemption)도 도모하게 된다. 동시에 그것은 사회적 칭의(social justification)도 도모한다. ‘의’의 본질은 관계이다. 인간이 주님과 올바른 관계(의로운 관계)를 맺는 지름길은 예수께서 자신과 동일시한 지극히 작은 자들과 선한 관계를 맺는 데 있기에, 교회가 지극히 작은 자들과 하나가 되고 선한 관계를 맺는 일은 개인의 차원을 뛰어넘는 사회적 칭의를 도모하는 일이다. 돈이 왕 노릇 하는 현상이 지구촌 전체에서 점차 강화되고, 기후변화로 인하여 인류의 종말이 예고되는 이 시대에 지극히 작은 자들과 하나가 되는 교회는 사회적 속량과 칭의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 수단의 사유화(국유화가 아니라)를 통하여 노동 소외를 궁극적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다.
대다수 한국교회가 갈수록 예수 없는 교회로 전락하고 있기에 민중교회는 자기의 정체성을 계속 고수하며 새로운 상황에서 발전적으로 자기갱신을 할 필요가 있다. 기복 신앙, 소원성취 신앙, 성공주의 신앙으로 무장한 숱한 교회들은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지극히 큰 자가 되기를 갈망하고 소원한다. 이런 교회는 예수가 없는 교회, 아니 예수를 대적하는 거짓 교회로서 신을 스스로 만드는 교회이다. 이 교회들은 기독교라는 간판 아래서 금송아지 신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 절하며 열심히 빌고 춤추는 집단이다.(나의 저서 『예수 믿지 않는 기독교인』, 『교회에서 신을 만드는 사람들』에는 주류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예수 없는 교회가 한국교회의 주류 행세를 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더욱 지극히 작은 자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섬기는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교회는 더욱 많이 생기고 번성해야 한다.
지극히 작은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한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한 사회는 사도행전 2장과 4장이 거듭 소개하는 공유공동체 사회이다. 교회는 그 공유공동체를 지구촌 전체에 확대해 실현하라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 사회는 곧 하나님 나라로서 큰 자도 작은 자도 없고, 강자도 약자도 없고,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없고, 억압자도 피억압자도 없고, 착취자도 피착취자도 없는 사회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이 연대해서 만든, 형제애가 충만한 사회이다. 맘몬(자본)과 주먹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나 능력에 따라 부지런히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지구촌 마을공동체를 궁극적으로 세우시기 위해 오늘도 일하신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극히 작은 사람들 속에서 예수와 더욱 동행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김달성 목사님의 민중교회 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편집부
김달성|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청주에서 자랐다. 1979년 감신대를 졸업한 후 서울과 인천에서 빈민선교와 노동선교를 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평안교회 목사이며, 포천에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facebook.com/dals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