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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이달의추천글 > [교회와 현장] 나의 목회 수기
이달의추천글 (2019년 4월호)

 

  스승을 넘어 주께로 더 가까이
  

본문

 

나에게는 두 분의 스승이 계신다. 한 분은 홍정길 목사님이고, 한 분은 박철수 목사님이다. 하지만 스승이 두 분뿐이라고 말하면 우선 이만열, 손봉호 교수님과 내가 졸업한 신대원(합신) 교수님들이 섭섭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다. 손봉호, 이만열 교수님은 내가 총신대 학부 시절에 철학과 한국사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이다. 그 후 지금까지 두 분에게 빚진 것은 헤아릴 수가 없다. 또한 합신에서 나에게 신학의 기초를 가르쳐주신 고(故) 신복윤, 김명혁, 윤영탁, 박형용 교수님 역시 나의 마음속에 잊혀지지 않는 존경하는 스승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의 스승을 두 분이라 말하는 것은 그분들이야말로 나에게 영적인 부모와 같고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나를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음이라.”라고 말했다.(고전 4:15) 그렇다. 홍정길 목사님과 박철수 목사님은 나에게 영적 아버지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박철수 목사님을 만났다. 당시는 집사님이었다. 그때 나를 곱게 보셨는지 고등부 안에서 좀 똘똘한 친구들을 함께 불러서 성경공부를 시켰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겨자씨 모임’이라는 기독동아리가 형성되었다. 겨자씨 모임은 절대신앙, 절대사명, 절대우정으로 하나 되어 ‘사회구조의 복음화’를 목표로 한 신앙운동이었다. 여기서 ‘사회구조의 복음화’는 복음의 통전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겨자씨 헌장을 여기서 다 소개할 수 없지만 그것이 나의 신앙과 목회의 뿌리이기 때문에 그 일부를 여기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겨자씨 헌장은 하나님나라에 관해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세계를 생각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now), 여기서(here) 구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학적 입장(identity)도 분명했다. “우리는 성서가 지닌 생명력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가능한 한 신학적 배타성과 편협성을 배제할 것이나 원칙적으로 개혁주의적 입장을 표방한다.” 이런 입장 때문에 우리는 칼뱅주의에 대해 많이 공부했다. 비록 번역된 책을 놓고 머리로 하는 공부였지만, 칼뱅의 관점으로 사회문제를 조명하고 개혁하려는 의지만은 부족함이 없었다.
이런 관점이 이미 형성된 후 필자는 아주 늦게 총신대학교(학부)에 입학했다. 1970년대 총신의 분위기는 사회문제에 관해서는 완전히 담을 쌓고 신학적 스펙트럼도 한심할 정도로 편협했었다. 학부에 입학하기 전부터 「기독교사상」의 애독자였는데, 총신대에 입학해보니 「기독교사상」은 완전히 불온문서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천성적 게으름에 가정형편 문제까지 겹친 나는 학부를 장학생(長學生)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에야 겨우 합동신학원에 입학했다. 돌이켜보건대 학부 시절이나 대학원 시절이나 신학적 통찰력을 새롭게 해주는 교육은 받지 못했다. 내가 성경 원어나 외국어에 어눌해서 스스로 신학의 저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당시 합신 신학의 분위기가 개혁주의에 근거한 현대신학에 착념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19세기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도 컸기 때문이었다.
나의 신대원 졸업논문은 “하나님나라와 사회변혁”이었다. 가까스로 졸업은 했지만 논문이 하도 논문 같지 않아서 내가 소장하고 있는 졸업논문은 지금 없다. 다만 그때 이런 내용을 쓴 기억은 남아 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전도는 영혼구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강조한다.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은 새의 양 날개와 같은 것이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사회 봉사(social service)와 사회적 행동(social action)이 함께 가야 한다. 사회적 행동은 사회 구조의 복음화를 요구한다.’
아마 이 정도의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이미 로잔언약(1974)이 한국에 소개된 이후였기 때문에 로잔언약을 기초한 스토트(J. S. Stott)의 입장에 의존해서 사회변혁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돌이켜보니 신대원 논문에서 주장한 신학적 입장이 지난 나의 목회 여정에 그대로 투영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그간의 목회생활은 매우 단순명료한 신앙의 여정이었다. 단순했다는 말은 4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초심을 잃지 않고 심지가 굳은 목회를 했다는 뜻도 되고, 한편으로는 신학적 성찰이 부족했다는 의미도 된다.
앞에서 대략 언급한 대로 나의 목회 여정에 신학적으로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이는 박철수 목사님이다. 그분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난 후 50년이 넘도록 숱한 토론, 눈물과 애환을 나누면서 한 길을 걸어온 스승이요, 형제요, 동지이다.

신학공부의 여정은 험난했지만,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로서의 경험은 비교적 행운의 길을 걸었다. 첫 임지로 남영동교회에서 3년 반 동안 중고등부 전도사를 했고, 그 후 3년은 새한교회에서 대학부 전도사를 했고, 그 후 남서울교회에서 10년 동안 부목사로 섬겼다. 남서울교회에서 홍정길 목사님을 만나면서 나는 내 인생 여정에서 고난의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은 행운을 맛보았다.
남서울교회 청년부를 맡게 될 때 나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전임자는 아주 유능한 목사님이었다. 그분이 목회하던 자리를 아직 신대원을 마치지도 못한 놈이 승계했으니 한편으로는 영광이었고, 한편으로는 큰 부담이었다. 합동신학교의 윤영탁, 박형용 교수님의 부탁으로 나를 기용하셨지만,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운이었다. 훗날 알게 된 이야기지만 홍 목사님이 나를 발탁하실 때 총신대에 가서 내
4년 동안의 성적표를 열람하셨다고 한다. 외국어 성적은 모조리 C나 D, 그 외의 과목은 모두 A였을 것이다. 외국어를 못해도 정신만 올바르면 목회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곧 전임이 되었고, 전도사 2년, 목사로서 8년 동안 홍 목사님의 목회를 도왔다. 본격적으로 목회가 무엇인지 배운 것이다. 또 총신대에서 오랫동안 나를 보아오신 손봉호 교수님이 그러셨다. “홍정길 목사님도 대단하셔…. 강 목사 같은 야생마를 이런 목회자로 만드셨으니….” 어째서 야생마라 하셨는지 잘 모르겠는데 학부 시절 박정희 퇴진 데모를 주동했던 기억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일은 총신대 역사상 사회적 이슈로 시위를 한 첫 번째 사례였고, 그때 나도 2-3명 안에 들어가는 주동자였기에 그런 이미지가 생겼나 싶다.
남서울교회에서 청년부를 지도할 때나 그 이후 목회행정을 담당할 때도 나는 홍 목사님이 감당하기 어려운, 좀 귀찮은 존재였다. 교인들은 어느새 나를 운동권 목사라 불렀고, 이런저런 방식의 비토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홍 목사님이 나를 변호한 논리는 우리가 그런 부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강 목사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남서울교회 재직 시절에 나는 나의 목회 여정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일을 하게 되었다. 1986년에 ‘복음주의 청년연합’(복청)을 탄생시킨 것이다. 발대식이나 창립총회 장소도 남서울교회였다. 당시 총신대 신대원에 재학 중이던 박철수 님, ESF 목자 김호열 님, IVF 대표간사 고직한 님, ESF 목자 김회권 님, 합신에 재학 중이던 이문식 님, 그리고 내가 주축이 되어 복음주의교회 청년들의 사회참여를 위해 연합체를 결성한 것이다.
많은 신학생과 청년대학생들이 함께했다. 복음주의 쪽에서는 처음으로 결성된 사회참여운동 단체였다. 복청은 3년 동안 많은 청년학생과 함께 많은 세미나를 하면서 우정을 다지고 사회변혁을 위한 신학적 공감대를 형성해갔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는 대학 캠퍼스의 동아리들을 찾아가서 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변혁에 앞장서야 하는가를 알리고 교육하는 일에도 열심을 다했다.
1986-87년에는 복청과 함께 대학생 중심으로 사회참여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1987년 6월 항쟁과 그해 대통령 선거 감시활동에는 어느 운동단체보다도 복음주의권 청년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역사적 이변이 일어났다. 복음주의 청년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사회와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게 된 것은 딱히 누구라 할 수 없는 집단지성의 영적 각성 때문이었지만, 그 중심에 복청이 있었고 이를 조직하고 활성화시킨 일에 나 또한 한몫을 한 것은 하나님의 무궁한 은혜였다. 그때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지금까지 성서한국, 복음주의 청년연합,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를 통해 연대하면서 일편단심으로 한국교회의 개혁과 하나님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내가 복청운동을 시작했던 시기는 1986년 봄이었고, 그때 나는 남서울교회 청년부 담당 전도사였다. 그때도 나의 목회는 여전히 파격적이었다. 당시 민중신학자 계열로 분류된 서광선 박사(이화여대)를 초청하여 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강의를 들었고, 강남 5개 교회 연합강좌를 만들어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한 강좌와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으며, 신림동 산동네에 ‘섬김의 집’을 만들어 청년 중심의 사회봉사 활동을 펼치기도 했었다. 섬김의 집은 후에 교회의 전폭적 지원을 얻어 크게 확대되었고, 교회적 사업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홍정길 목사님의 인격 덕분이었다. 당신과 생각이 다르지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수용할 줄 아는 그의 포용성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모든 일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홍 목사님과의 이견 때문에 교역자회의에서 부딪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일반적인 대형교회의 경우 담임목사와 부목사가 공개석상인 교역자회의에서 부딪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모두 홍 목사님의 포용성으로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다. 다만 나는 할 말은 하되 마지막 결정은 담임목사의 몫이라는 자세를 초지일관 유지했다.
남서울교회 전임사역 6년을 마치고 7년째에 가족과 함께 1년 동안 미국으로 안식년을 가게 되었다. 부목사로서 가족과 함께 외국에서 1년 동안이나 안식년을 가지는 것은 한국교회 100년 역사상 내가 처음일 것이라고 농담 반, 진담 반 늘 자랑하곤 했다. 그 후 내 후배들도 계속 안식년을 가졌다. 그 1년은 아마도 나의 인생 여정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야말로 아무 걱정 없이 안식했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그 광활하고 웅대한 자연을 마음껏 즐기고 찬양했다.
안식년을 마치고 귀국한 후 1년 만에 신도시 일산에 교회를 개척했다. 남서울교회가 개척을 한 것이다. 1995년 11월이었다. 사실 일산에 거주하던 성도 50여 명과 교회를 시작했으니, 개척교회라 할 수는 없었다. 신도시가 이미 자리잡은 후라서 여느 교회들처럼 급속한 성장은 없었지만 교회는 알뜰하게 성장해갔다.
교회를 세우면서부터 지향해야 할 목회 방향을 예수한국, 성서한국, 통일한국, 선교한국으로 정했다. 예수한국과 선교한국은 민족 복음화의 꿈과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자는 전통적 선교비전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고, 성서한국과 통일한국은 내가 청년 때부터 꿈꾸어온 복음의 통전성(Whole Gospel)에 대한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순수한 전통과 새 시대의 요구가 자연스럽게 혼합돼 있는 셈이다.
남서울교회는 예산의 50%를 외부를 위해 사용한다는 목표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나 역시 교회 예산은 밖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했다. 남서울교회처럼 4,000명이 넘는 교회는 그 일이 가능했지만, 100명 안팎의 교회야 사정이 달라도 너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아무쪼록 예산을 밖으로 내보내기에 힘썼고, 그 결과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교회 예산의 30-40%가 구제와 선교를 위해 쓰이고 있다.
성서한국과 통일한국의 비전은 주로 설교를 통해 선포된다. 우리 교회 설교는 한국교회와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교인들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나라를 위한 거대 담론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높아서 자신들이 경험하는 삶의 이야기, 상처받은 심령에 대한 위로 등 자신들이 원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이 잘 다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토로한다. 맞는 말이다. 성도들이 요구하는 것들은 틀린 것이 전혀 아니다. 삶이 그래야만 하듯 설교의 주제도 균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목회철학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성도들이 교회와 가정과 사회를 성서의 빛을 따라 균형 있게 섬기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나라가 오늘, 여기에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는 교회요, 가정이요, 사회라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엡 5:18-6:9)
그래서 목회 초기에는 말씀의 빛으로 가정을 세우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교회만 잘 섬기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는 전통적 관념의 틀을 깨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예컨대 우리 교회의 공식 집회는 오직 세 가지다. 주일예배, 주중에 한 번씩 소그룹으로 모이는 목장모임, 수요일에 연간 3차례 진행되는 수요 성서학당이 전부이다. 연초(1-2월), 봄(3-4월), 가을(9-12월)에 열리는 수요 성서학당은 보통 8-10주 코스이기 때문에 1년 52주 중 대략 25주 진행하고 그 외 주일 오후예배, 수요모임은 아예 진행되지 않는다. 금요 철야기도회도 없다. 다만 새벽기도회는 월-토까지 빠지지 않고 모인다. 이렇게 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이 교회, 가정, 이웃을 균형 있게 섬겨야 한다는 나의 목회철학 때문이다.
단독목회를 시작한 지 벌써 23년이 지났다. 그동안 동역하던 김형수, 배오진, 최재석, 김진명, 남오성 목사 등이 분립개척 내지는 아주 약한 교회를 담임해서 교회를 떠났다. 오랫동안 동역한 목회자들을 떠나보내면서 대략 교회 예산이 10억 가까이 들었다. 마지막(2015년)으로 분립개척한 교회인 주날개그늘교회(남오성)는 재정적인 지원보다는 사람들이 함께했다. 어린아이 포함 90여 명이 그 교회로 옮긴다는 것은 교회로서 여간 큰 부담이 아니었지만 교인들이 기뻐했다. 나 역시 교회가 지금의 규모(아이들 포함 700여 명) 이상일 필요가 없으며, 교회는 가능한 한 분립개척의 전통을 지속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생각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교우들 마음속에도 공유되어 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통일한국의 비전을 이루어가기 위한 활동도 지속하였다. 북한이탈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와 탈북 대학생들을 지원하는 ‘하나로장학회’의 창립 과정부터 꾸준히 동역해 왔고, ‘남북나눔운동’과 ‘평통연대’ 또한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주요 멤버로 참여하고 있다. 교회가 있는 고양시(일산)에서도 평화통일운동을 위한 ‘고양평화누리’와 민주화운동을 위한 ‘고양자치연대’를 창립하고 운영하는 데 주요 역할을 감당해왔다.
때로는 교인들이 이런 일들을 가리켜 목사님이 왜 정치를 하느냐고 반발하기도 하지만, 목사이기 때문에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한다. 어쩌면 외로운 목회 여정을 걸어왔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이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라는 하나님나라 원리를 설득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났다. 성도들이 교회를 떠날 때 어느 목사인들 가슴이 쓰리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5년 전부터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김근주 교수가 청년2부를 담당하면서 매월 1회씩은 주일예배 강단을 맡는다. 그는 성도들에게 인기가 대단하다. 담임목사인 나보다 설교가 깊다.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란다. 어떻게 담임목사보다 더 설교 잘하는 사람을 정기적으로 강단에 세우냐고. 내가 그만둘 때가 가까우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대답하고 말지만, 덕분에 교회 전체가 얼마나 큰 유익을 얻는지 형언키 어렵다.
내가 복청을 결성할 때 서울대 2학년 학생이었던 김근주 목사는 옥스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마쳤으며, 지금은 한국교회 개혁을 위해 온 몸을 바치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라 할 수 있다. 나 또한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으니, 나의 신학적 선생이기도 하다. 한국교회가 신학자들을 협동목사로 세워 한 달에 한 번 설교케 한다면 교인들이나 목사 자신에게 아주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스승을 넘어 주께로 더 가까이”라는 이 목회 수기의 제목은 사실 너무나 도전적이고 건방진 제목이다. 그래서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홍 목사님께서 나를 일산에 보내시며 단 둘만 있는 자리에서 두 가지를 부탁하셨고, 그의 부탁은 진실이었음을 확신했기에 그 뜻을 담았다.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섬길 것인가를 보여주는, 롤 모델이 되는 교회를 세워달라.” “나보다 더 위대한 목회자가 되어달라.” 내가 어찌 그분의 인격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복음의 통전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는 스승보다 한 걸음 더 주께 가까이 왔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홍정길 목사님과 박철수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나의 목회는 두 분이 흘린 눈물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강경민 | 총신대학교와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저서로 『운명의 사슬에 도전하라』 등이 있다. 현재 일산은혜교회 담임목사이며, 성서한국 이사장, 여명학교 총무이사, 남북나눔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 4월호(통권 7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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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선유문안』(忠淸南道宣諭文案) (1)

* 한자로 쓰인 『忠淸南道宣諭文案』은 감리교 목사 최병헌이 충청남도에서 했던 선유 활동을 기록한 글이다. 선유(宣諭)란 임금의 훈유(訓諭)를 백성에게 널리 알리는 것을 말한다. 최병헌(1858-1927)은 충북 제천에서 출생하여 과장(科場)에도 여러 차례 나갔던 한학자 출신의 인물로 교회 일을 현순 목...
최병헌 (한규준 역주, 오세종 감수)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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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불가 작곡가 나운영을 어찌할꼬- 한국교회 예배와 음악의 마지막 과제

교회가 존재하는 한 예배가 있고, 예배가 존재하는 한 음악이 있다. 한국교회의 예배와 음악은 많은 과제를 극복하며 13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의 갈 길은 멀고,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는 기독교 문화의 폐쇄성을 극복하는 일이다. 한국의 교회문화는 수직...
문성모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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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힘으로 모두가 행복한 나라

블랙리스트로 막을 내린 문화융성 정책 새 정부가 들어섰다. 예정된 국내 정치 일정보다 7개월 앞선 대통령 선거였다. 2016년 가을부터 터져 나온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헌법재판소 탄핵으로 결판나고, 제19대 대선은 문재인 후보의 당선으로 결정됐다. 문화융성을 국정목표로 제시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박...
김기봉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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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군사주의와 한반도 평화- 에큐메니컬 애드보커시 대회(EAD 2017)을 다녀와서

에큐메니컬 애드보커시 주간: 혼돈에 맞서고 공동체를 강화하자 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미국 땅에서 우리가 해오고 있는 투쟁은 본래부터 매우 명백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트남)전쟁이 흡혈귀처럼 파괴적으로 모든 기술과 돈과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한, 미국 정부는 ...
이기호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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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독일교회의 종교개혁 400주년 기념을 되돌아보며- 종교개혁 기념의 정치적 도구화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 기념 2017년, 500주년을 맞이하는 종교개혁은 교회와 신학을 새롭게 변화시킨 종교적 사건인 동시에 종교 영역을 뛰어넘는 세계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1 이 종교개혁은 루터가 95개 논제를 세상에 알린 사건에서 출발한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마그데부르크와 마인츠의 대주교인 알브레...
권진호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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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론은 왜 종교개혁의 주체가 되었는가

필자가 「기독교사상」 699호(2017년 3월)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루터의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교회의 면죄부 장사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시작되었다. 면죄부 장사 수입의 절반은 마인츠(Mainz)의 대주교 알브레히트(Albrecht)가 취하고 나머지 절반은 교황이 취했는데, 당시 루터는 이를 몰랐다고 1545년 그의 라틴어 전집 제1...
김균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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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 과연 정직한가

이 짧은 글에서 「기독교사상」 편집진이 요구한바, “한국교회 과연 정직한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적 다양성은 무수한 교파만이 아니라 개체 교회의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시각에서 한국교회의 정직성을 가늠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
박충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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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론이 종교개혁의 동인인가

세계사적 사건이었던 루터의 종교개혁 올해 2017년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계 많은 나라가 오래전부터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독일은 10년 전부터 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독일개신교회총회(EKD)의 신학백서 외에 수많은 문...
김균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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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호(통권 7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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