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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이달의추천글 > [한글 성서의 번역 보급과 한글 문명의 대전환]
이달의추천글 (2019년 2월호)

 

  한글 문명의 시작과 간략한 중국어 성서 번역사
  

본문

 

한글 문명의 시작과 언문 사용 양상

1443년에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1446년 반포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우리글은 누구나 즐겁고 행복하게 받아들여서 쓰던 문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당한 반대가 있었고, 그 바탕에는 새로 창제한 말에 대한 멸시의 태도가 깔려 있습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의 상소문을 보면 반대 이유가 잘 나타납니다. ‘중화 사모’에 거슬리고,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이기 때문이고, ‘언문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1이기 때문입니다. 언문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태도가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1882년 존 로스 목사님이 최초의 한글 성서를 번역하여 출간하던 시기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도 언문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태도는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로스는 이렇게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조선인들은 자국의 문자가 있다는 사실을 낯선 사람들에게 인정하기를 꺼리며, 늘 한자를 쓴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존재가 알려진 후에도 가르쳐 주기를 내켜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글로 말을 쓰는 것은 더욱 싫어한다.2

그 당시의 양반 지식인들은 언문에 대해서 말하는 것조차도 수치스럽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오군란으로 평안도로 좌천되었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집안현 한인촌으로 망명을 와 있던 사람들이 1883년에 로스를 찾아왔습니다. 당시의 일을 로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모자 중의 한 사람으로 양반이며 최고의 문학적 교육을 받은 자는 조상의 음덕으로 사형을 모면했다. …이곳에서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한문 기독교서적들을 탐독했다. 그는 한글보다 한문에 더 능숙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한글은 읽기조차 싫어했다.3

언문을 멸시하는 조선 지식인들의 태도는 확고했으며, 개화기까지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1926년 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 및 성서공회 설립 30주년 기념식 때 윤치호 박사가 말한 축사 중에, 한말의 외부대신 김홍집은 미국 공사가 정부 공식 기록 문서를 언문으로 하자고 하니까, 화가 난 얼굴빛으로 ‘나는 언문을 모른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朝鮮人(조선인)이 朝鮮文(조선문)을 얼마나 輕視(경시)하엿는지 한 가지 目睹(목도)한 事實(사실)은 三十年(삼십년) 前(전)에 其時(기시) 外部大臣(외부대신)으로 改進派(개진파)에 屬(속)한 金弘集(김홍집) 閣下(각하)가 美國 公館(미국 공관)에셔 談話 中(담화 중)에 美國 公使(미국 공사)가 發言(발언)하야 今後(금후)로는 照會(조회)에 어려운 漢文(한문)을 쓰지 말고 簡易(간이)한 朝鮮文(조선문)을 쓰기로 提議(제의)하니 金 大臣(김 대신)이 變色(변색)한 怒顔(노안)으로 말하기를 本人(본인)은 諺文(언문)을 不知(부지)라 하엿다4

말하던 때를 기준으로 30년 전이라 하였으니, 김홍집의 발언 시기는 1896년경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문화적 환경 속에서, 위에 제시한 예문처럼 당시의 지식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한자를 혼용한 문장도 아니고, 그들이 비웃고 멸시했던 언문으로 성서를 번역한 일은 그 자체로 엄청난 도전이자 혁신이었고, 사실상 문명사적 혁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 학자들의 비평은 현재로서는 거의 가치가 없는데 유럽인들의 지도를 받는 자들을 제외하면 이들은 한문만이 학자용 언어라고 믿고, 고유어(한글)로 된 글은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한국인 학자들이 본토어로 된 책의 단순성을 비웃을지라도, 한국의 모든 여성들이 읽을 수 있는 언어라야 성경 언어입니다.5

한국인 학자들의 비평은 거의 가치가 없다고 한 로스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적・문화적 환경에 전혀 동화되지 않은 혁명적 발상입니다. 1888년부터 약 20년 동안 서울에서 활동하던 존스 선교사는 1916년에 『1910-1911년도 조선의 개혁과 발전 보고서』(경성: 총독부, 1912)를 참고하여 당시 우리나라 인구를, 상류 귀족층인 양반은 5만 5,000명, 중류층은 약 100만 명, 하류층은 1,300만 명 이상이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6 이 시기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사실상 문자를 알고 사용하던 사람들은 중류층과 양반층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양반과 중류층이 모두 언문을 알았다 해도 8% 정도인데, 당시에는 양반가 여성들 중에도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을 것입니다.
1928년 「동아일보」 사설에서 문자를 아는 사람을 최대한으로 계산하여 1할로 보고 있는데,7 그보다 50년이나 앞선 시기라는 점을 생각하면 문자를 아는 사람은 이보다 훨씬 적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인구를 대략 1,400만으로 보더라도 문맹률을 90%로 생각하면 전체 인구 중에서 140만 명 정도만 문자를 알고 사용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인 1,260만 명의 사람들은 문자 세상 밖에서 살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언문이든 한문이든, 문자를 아는 사람이 약 10% 수준은 되었다고 해도, 실제로 당시 사회에서 언문이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문맹자들은 ‘책’이라는 물건조차 보지 못하고 한평생을 산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가 보급되면서, 이들에게 대대적으로 ‘책’이라는 물건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로스가 번역한 성서는 1882년부터 1893년 사이에 9만 4,040부가 발행되어 여러 경로로 보급되었습니다.8 이 책들은 양반이나 중인들만의 전유물이던 문자 세상을, 매킨타이어의 말대로 ‘무식한’ 사람들에게까지 열어주었고, 로스의 말대로 ‘여성들’에게까지 열어주었습니다. 로스는 30분이면 조선어 문자를 익힐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알파벳은 너무나 아름답고 단순하여 30분 안에 충분히 통달할 수 있다. 그리고 피트먼(I. Pitman)의 속기법과 마찬가지로 발음을 활용했으며, 널리 알려져 있어서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모두 사용한다. 이렇다 보니 ‘–한자를 포함하여–문자를 단 한 글자도 모르는’ 사람이 「요한복음」의 원고를 들고 앉아서는 한 글자도 빠짐없이 모두 읽고 일어섰다.9

또한 언더우드는 『한영뎐』 영어 서문에서, 한국어 문자는 하루면 다 익힐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10 로스의 말대로 ‘남녀노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국어로 출판한 책이 한국인들에게 충격을 주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새로운 한글 문명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입말과 글말

‘글’은 입에 있는 말을 문자기호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글말’의 뿌리는 글을 쓰는 사람의 ‘입말’입니다. 그러니까 입말이 글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말은 살아 있어서 변화를 거듭하지만, 글말은 기록되는 순간 고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면, 같은 지역에서 기록된 글말이라 하더라도 살아 있는 입말과는 달라집니다. 이렇듯 입말과 글말의 차이와 속성은 유교의 경전들을 기록한 고전 한문의 글말과 현대 중국의 입말에서 잘 나타납니다. 『논어』, 『맹자』 등 유교의 뿌리가 되는 기록들은 모두 기록된 지 2,000년이 넘은 책들입니다. 그때의 기록자들도 그 이전의 어떤 글들로부터 글말을 배우고 익혔겠지만, 이 책들 속의 글도 기록될 당시에는 기록자들의 입말에 뿌리가 닿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2,00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사람들의 입말은 달라졌는데, 고정된 책 속의 글들은 변화되지 않았고, 입말과 글말의 거리는 그만큼 멀어졌습니다.
조선시대 정조 임금 때 일어난 문체반정(文體反正) 사건은 글말과 입말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유가의 서적들을 통해서 문장으로만 글말을 익힌 조선시대 학자들의 글말은 기본적으로 『논어』, 『맹자』를 기록하던 시대의 글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달라진 당대의 중국 사람들의 입말들이 반영된 기록들을 읽으면서 조선 지식인들의 글말이 달라지는 와중에 정조는 모범이 되는 옛 기록들을 문장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훈민정음의 창제를 통해서 사람들의 입말을 담을 수 있는 글 곧 문자가 생겼지만, 입말은 사람마다 또 지역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당시 그 말을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은 사람들에게 없었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훈몽자회』와 같은 옥편의 한글 표기나, 한문을 공부하기 위한 교재였던 각종 유교 경전의 언해서들이 언문 학습의 교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문을 공부하던 양반 지식인들에게는 언문의 사용이 중요한 과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언문을 어떻게 적을 것인지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자기 입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으면 그만이었고, 기록된 것을 말로 읽어낼 수 있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바른 표기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체계적인 한문 교육의 영향권 밖에 있던 여성들은 언문을 익히더라도 입말을 글말로 올바로 적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양반가를 중심으로 『언간식』이라는 언문 서책이 한글 교과서처럼 사용되면서 전승된 것은 특히 바른 한글 철자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언간식』은 편지 예문들을 모아놓은 예식문으로, 사실상 조선시대 양반가 여성들의 언문 학습 교과서 역할을 했습니다.11 혼인 예식을 하고 신부가 신행을 해서 시집으로 갈 때까지 1-2년 또는 그 이상 몇 년씩 걸리기도 했는데, 그동안 신부는 시댁 어른들께 언간 편지를 보내서 문안을 올렸습니다. 그 언간 서식의 한글 표기가 잘못될 때는 흉이 되기도 했는데, 특히 아래아 표기가 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필자가 1902년생이었던 할머니로부터 들은 말로는 아래아를 잘못 쓰는 것이 흔히 허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언문 사용자들에게도 바른 철자법에 대한 긴장이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언어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말 표기에서도 자음이 잘못 표기될 가능성은 비교적 적습니다. 입에서 소리 나는 대로 연철 표기를 할 경우에 대부분은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래아 표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그 이유를, 서울말 또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역에서 아래아 모음이 실제 발음에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처음 한글 성서를 번역할 때 로스와 매킨타이어에게는 두 가지의 우리말 문장 모범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친 의주 청년들의 ‘입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손에 있던 『중용언해』와 『삼략언해』의 ‘글말’이었습니다. 『중용언해』를 비롯한 언해서들의 표기를 보면 구개음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표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기는 서북 청년들의 입말과 같았을 것입니다. 이 입말은 로스가 성서를 번역하기 위해 우리말을 배우면서 1877년에 출판한 Corean Primer라는 한국어 문법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물 깃넌 사람 어디 잇슴마 데 마당에 이서 일함메 물쥬 어디 잇슴마 데 집안에 잇디 안슴마12

당시의 서북 방언 입말이 그대로 문법서의 예문으로 올라 있습니다. 글말이 입말의 보조적인 기록 장치라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상 가장 이상적인 글말은 입말을 살린 글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위의 입말 그대로 성서가 번역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이 말을 사용하는 서북 지역의 사람들은 가장 친밀감 높은 자기들의 ‘입말’을 바탕으로 한 ‘글말’로 번역된 성서를 만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번역된 성서의 글말은 위 문법책의 글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초기 한글 성서 번역의 일차적 대본이 된 중국어 번역들

『예수셩교누가복음젼서』(1882년, 고종 19년)는 중국 심양에서 로스와 매킨타이어, 그리고 서상륜과 이응찬 등이 협력하여 번역되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 번역자들이 고전 한문으로 번역된 중국어 문리 성서를 보면서 우리말로 번역하였고,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그 번역문을 그리스어 성서와13 대조하면서 수정하는 방식으로 번역을 완성하였습니다. 또 그리스어 색인사전을 들고 여러 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를 찾아가면서, 특정 의미의 단어가 우리말로 정확하게 그리고 항상 같은 말로 번역되었는지 확인했습니다.14 이 과정에 사용된 중국어 성서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간략한 중국어 성서 번역사15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Gisang_201902_5.jpg

마쉬만은 인도 세람포어에서 중국어로 성서를 번역했습니다.16 중국에 들어가서 처음 성서를 번역한 사람은 모리슨입니다. 모리슨은 1814년에 신약을 출판하고, 1823년에 밀른과 함께 구약을 번역 출판합니다. 그리고 1837년 미드허스트, 귀츨라프, 브리지만과 존 로버트 모리슨이 함께 번역한 신약을 미드허스트가 출판합니다.
그 후 선교사들이 위원회를 구성하고 함께 성서를 번역해서 출판한 것이 대표역본 또는 위원회역본이라고 하는 문리 성서입니다. 신약은 1852년에, 구약은 1854년에 출간됩니다. 이 성서가 1882년에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될 때 대본으로 쓰인 번역본입니다. 흔히 이들 번역을 ‘문리역’(文理譯, Wenli-Bible) 또는 ‘문리체’(文理體) 성서라고도 하는데, 이는 고전 한문의 문체로 번역했다는 뜻입니다. 대표역본은 중국어풍에 맞는 고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며, 아주 수려한 중국어로 번역되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17
이 번역이 나온 후에 브리지만과 컬벗슨은 위원회역본이 원문으로부터 많이 벗어났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번역본을 출판합니다. 원문대로 충실하게 직역한 번역으로, 위원회역의 개정판에 가깝습니다.18 이 성서가 후에 일본에서 이수정이 우리말로 성서를 번역할 때 대본이 되었습니다.
중국 안에서도 학자들은 주로 고전 한문을 글말로 사용했습니다. 초기에 번역된 중국어 성서들이 대부분 고전 한문으로 번역된 것은 당시 중국에서도 널리 사용되던 글말이 유교 경전을 기록하던 시대의 옛 글말들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당대의 중국어인 남경관화나 북경관화로 번역된 성서가 나온 것은 시기로 볼 때 문리역이 나온 다음이었습니다. 1857년 미드허스트와 스트로낙이 감독하여 펴낸 남경관화역 신약이 발행되었고, 1878년에 쉐레쉐브스키(Samuel I. Joseph Schereschewsky)는 북경관화역 성경전서를 상하이에서 펴냈습니다. 중국어 성서 번역에 사용된 용어들이 한글 성서 번역 과정에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19

작은 맺음말

중국어로 성서가 번역되면서 영중사전과 중영사전들이 만들어지고, 서양의 언어를 중국어로 번역하기 위해서 수많은 낱말들이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성서에 사용된 수많은 한자어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새로운 한자어들입니다. 물론 원래 중국에 있던 한자들을 활용했지만,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용어들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사용되었습니다. ‘문학’이라는 말이 롭샤이드(W. Lobscheid)의 영중사전에서 ‘literature’의 번역어로 처음 만들어져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좀 알려진 이야기이지만,20 이외에도 서구 사상 및 문물과의 만남을 통해서 성서 밖의 일상어들 역시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집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중국을 통해 서양 문물이 전해졌지만, 순조 임금 이후 서양의 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조선의 양반 지식인 사회는 극도로 몸을 움츠리면서 폐쇄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세상의 역사가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마침내 망국에까지 이르고 맙니다. 이 시기에 로스-매킨타이어 번역 팀에서 순 한글로 번역한 성서가 계속해서 조직적으로 일반인에게 보급되면서, 일반 백성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주기 시작합니다. 말씀의 빛이 문맹의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빛의 자녀로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1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다,”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1444년) 2월 20일, 1번째 기사(https://goo.gl/WrCUym)
2 존 로스, 홍경숙 역, 『존 로스의 한국사』(살림출판사, 2010), 584.
3 J. Ross, “Corean Convert,” The Missionary Review(1891. 12.): 208; 『대한성서공회사』 1, 107쪽에서 재인용.
4 양주삼・정태응 편찬, 『閔休先生實記』, 1937년 3월 10일, 36-37.
5 옥성득・이만열 편역, “로스가 라이트 박사에게,”(1883. 7. 22.) 『대한성서공회사 자료집 1』, 82-84.
6 헤버 존스(G. Heber Jones), 옥성득 편역, 『한국 교회 형성사』(The Rise of the Church in Korea)(홍성사, 2013), 41. 로스는 앞의 책 『존 로스의 한국사』 581쪽에서 조선 인구를 약 1,400-1,500만 명이라고 추정하였다.
7 “1928년의 「동아일보」 사설에서도 ‘우리의 현실을 보면 문자를 아는 사람이 최대한도로 계산하여 250만에 불과할지니 (여러 가지 통계로 종합 계산하야) 전 인구의 1할여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 「동아일보」 1928년 3월 17일 “文盲退治의 운동”, 노영택, “日帝時期의 文盲率 推移,” 「國史館論叢」 第51輯(국사편찬위원회, 1994. 6, 1995), 122.
8 옥성득・이만열 편역, 『대한성서공회사 1』(1993), 76. 이 통계에는 그 후 국내에서 출판되어 보급된 성서는 포함되지 않았다.
9 존 로스, 홍경숙 역, 위의 책, 585. 1891년에 발행된 영문판 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 with Description of Manners and Customs, Language and Geography의 본문을 확인하여 번역을 약간 수정하였다.
10 언더우드의 『한영뎐』은 전자책의 형태로 원문 그대로 볼 수 있다.(https://goo.gl/KDusJv)
11 김슬옹,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관련 기사를 통해 본 문자생활 연구”, 상명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2005). 이 논문에서는 조선 왕조에서 언문이 사용된 양상을 살피고, 언문이 조선 왕실의 공식 문자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더라도 그 사용은 지극히 제한적인 범위였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언문의 학습 경로는 유교 경전의 언해서들과 양반 가문에 전승된 『언간식』이었을 것이다.
12 김정현, 『한국의 첫 선교사』(계명대학교출판부, 1982), 254 참조.
13 E. Palmer, The Greek Testament with the Readings Adopted by the Revisers of the Authorized Version(Oxford University Press, 1881).
14 옥성득・이만열 편역, 『대한성서공회사 자료집 제1권 로스 서신과 루미스 서신』(대한성서공회, 2004), 38.
15 중국어 성서 번역사에 대해서는, 이환진, “19세기와 20세기의 중국어 성서”, 왕대일 역음, 『말씀의 뜻 밝혀 주시오』(민영진 박사 회갑기념 제2권)(대한기독교서회, 2000), 413-499; 송강호, 『중국어 성경과 번역의 역사』(도서출판 모리슨, 2007) 참조.
16 황예렘, “인도에서 이루어진 한문 성서의 번역, 출판 배경과 경위,” 「성경원문연구」 38(대한성서공회, 2016년 4월), 159-186을 참고할 수 있다.
17 요우빈(游斌), 구향화・이환진 번역, “왕타오, 중국어 성경 번역과 그의 해석학 전략,” 『성경원문연구』 37(대한성서공회, 2015년 10월): 273-291; 이환진, “한문성경 『대표본』(1854)의 동양 고전 읽기–잠언을 중심으로,” 「성경원문연구」 36(대한성서공회, 2015년 4월): 80-98; 이환진, “한문성경 <대표본>(代表本, 1854)의 번역 특징-전도서를 중심으로,” 「성경원문연구」 30(대한성서공회, 2012년 4월), 25-44를 참고할 수 있다.
18 이환진, 위의 글, 449쪽; 송강호, 위의 책, 159쪽 참조; 이환진, “한문성경 『브리지만–컬벗슨역』(1864)의 번역 특징,” 「神學과 世界」 제73호(2012. 3): 7-45을 참고할 수 있다.
19 이 시기에 다수의 영중, 중영사전이 출판되고, 이러한 사전들이 일본에서 복각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근대적 문명어들이 성서 번역 과정에 우리나라로 들어오기도 한다. 신창순, 『국어근대표기법의 전개』(태학사, 2007) 참고. 전무용, “그리스도교 용어와 한자어에서 빌려온 용어,” 「신학비평」 51호(2013 겨울): 48-71 참고.
20 부산대학교 인문한국 고전번역 비교문화학 연구단, 『고전, 고전번역, 문화번역』(미다스북스, 2010), 278.


전무용 | 한남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집으로 『희망과 다른 하루』가 있다. 현재 대한성서공회 번역실에서 일하고 있다.

[이 게시물은 대한기독교서회님에 의해 2019-03-05 14:18:47 문화·신학·목회에서 복사 됨]

 
 
 

2019년 4월호(통권 7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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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의 아루샤 선교대회, “제자도를 향한 부르심”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맥을 이어 거의 10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에큐메니컬 선교대회가 2018년 3월 8-13일, 아프리카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갈라디아서 5장 25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에 기초한 “성령 안에서 선교-변혁적 제자도로의 부르심”(Moving in t...
최상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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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다시 만나는 예수김동건의 『예수: 선포와 독특성』 대한기독교서회

책의 구성 『예수: 선포와 독특성』은 6부 9장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책으로서 예수의 선포, 가르침, 말씀, 죽음, 부활 등 ‘예수’에 관한 주요 주제들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은 각 주제에 따른 논쟁점과 최근 연구동향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동시에 지금까지 그 주제에서 제기된 문제 중 우리가 ...
김기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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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를 믿지 않았다고 변명한 정약용의 편지

세상이 어지러울 때마다 민중들은 새로운 종교 또는 새로운 구원자를 찾았다. 불교의 미륵신앙도 새로운 미래를 기다리는 신앙이고, 동학이나 증산의 후천개벽(後天開闢) 또한 그러하며, 『정감록』도 시대에 따라 정도령을 재해석하였다. 천주교가 박해를 당하던 시기에도 민중들은 새로운 구원자를 기다리다 천주...
허경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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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여정: 아시아에서 진리와 빛을 향한 예언자적 증언

* 이 글은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지난 2017년 10월 12일부터 16일까지 미얀마 양곤에서 개최된 아시아선교대회(Asian Mission Conference)의 주제강연 원고의 번역문이다. 강연 제목은 “상생의 여정: 아시아에서의 진리와 빛을 향한 예언자적 증언”이며, 이는 아시아선교대회 주제이기도 하...
웨슬리 아리아라자, 한강희 역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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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의 국민교재 『천자문』을 선교에 활용한 『진리편독삼자경』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무엇일까? 유교 국가였으니 당연히 『논어』나 『맹자』가 가장 많이 팔렸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이 팔렸거나 필사된 책이 바로 『천자문』이다. 『천자문』을 다 배우고 난 어린이 가운데 일부가 『논어』나 『맹자』를 배웠기 때문이다. 과거시험 공부나 독...
허경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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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의 로힝야 난민캠프에 다녀와서

로힝야 난민 및 유혈사태를 뉴스로 처음 접한 것은 올해 2017년 8월 말이었다. 「로이터」에 보도된 내용과 달리 국내 미디어들은 로힝야 난민사태를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테러들과 달리 비중 있게 다루거나 신속하게 보도하지 않았다. 또한 이 사건을 보도할 때 로힝야 난민사태가 왜 발생하였는지 그 원인을 분...
배태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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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별 총회를 돌아보며

한국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대표적 교단인 예장 통합과 합동, 고신, 대신, 기장 등 장로교회들과 침례교회는 해마다 9월에 정기총회를 연다. 감리교회와 성결교, 순복음교회 등 다른 시기에 총회를 여는 교단들도 있지만, 한국교회에서 장로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대체로 9월 총회들을 통해 한국교회의 ...
권혁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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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선유문안』(忠淸南道宣諭文案) (1)

* 한자로 쓰인 『忠淸南道宣諭文案』은 감리교 목사 최병헌이 충청남도에서 했던 선유 활동을 기록한 글이다. 선유(宣諭)란 임금의 훈유(訓諭)를 백성에게 널리 알리는 것을 말한다. 최병헌(1858-1927)은 충북 제천에서 출생하여 과장(科場)에도 여러 차례 나갔던 한학자 출신의 인물로 교회 일을 현순 목...
최병헌 (한규준 역주, 오세종 감수)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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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불가 작곡가 나운영을 어찌할꼬- 한국교회 예배와 음악의 마지막 과제

교회가 존재하는 한 예배가 있고, 예배가 존재하는 한 음악이 있다. 한국교회의 예배와 음악은 많은 과제를 극복하며 13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의 갈 길은 멀고,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는 기독교 문화의 폐쇄성을 극복하는 일이다. 한국의 교회문화는 수직...
문성모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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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힘으로 모두가 행복한 나라

블랙리스트로 막을 내린 문화융성 정책 새 정부가 들어섰다. 예정된 국내 정치 일정보다 7개월 앞선 대통령 선거였다. 2016년 가을부터 터져 나온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헌법재판소 탄핵으로 결판나고, 제19대 대선은 문재인 후보의 당선으로 결정됐다. 문화융성을 국정목표로 제시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박...
김기봉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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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군사주의와 한반도 평화- 에큐메니컬 애드보커시 대회(EAD 2017)을 다녀와서

에큐메니컬 애드보커시 주간: 혼돈에 맞서고 공동체를 강화하자 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미국 땅에서 우리가 해오고 있는 투쟁은 본래부터 매우 명백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트남)전쟁이 흡혈귀처럼 파괴적으로 모든 기술과 돈과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한, 미국 정부는 ...
이기호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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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독일교회의 종교개혁 400주년 기념을 되돌아보며- 종교개혁 기념의 정치적 도구화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 기념 2017년, 500주년을 맞이하는 종교개혁은 교회와 신학을 새롭게 변화시킨 종교적 사건인 동시에 종교 영역을 뛰어넘는 세계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1 이 종교개혁은 루터가 95개 논제를 세상에 알린 사건에서 출발한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마그데부르크와 마인츠의 대주교인 알브레...
권진호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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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론은 왜 종교개혁의 주체가 되었는가

필자가 「기독교사상」 699호(2017년 3월)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루터의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교회의 면죄부 장사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시작되었다. 면죄부 장사 수입의 절반은 마인츠(Mainz)의 대주교 알브레히트(Albrecht)가 취하고 나머지 절반은 교황이 취했는데, 당시 루터는 이를 몰랐다고 1545년 그의 라틴어 전집 제1...
김균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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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 과연 정직한가

이 짧은 글에서 「기독교사상」 편집진이 요구한바, “한국교회 과연 정직한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적 다양성은 무수한 교파만이 아니라 개체 교회의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시각에서 한국교회의 정직성을 가늠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
박충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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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론이 종교개혁의 동인인가

세계사적 사건이었던 루터의 종교개혁 올해 2017년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계 많은 나라가 오래전부터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독일은 10년 전부터 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독일개신교회총회(EKD)의 신학백서 외에 수많은 문...
김균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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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호(통권 7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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