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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추천글 (2018년 6월호)

 

  제주4・3사건, 70년이나 머뭇거린 만남과 화해
  

본문

 

광화문 광장에서 ‘4370’이라는 숫자를 보았을 때,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옆에서 누군가, 제주4・3사건을 70년 만에 전국적으로 추도하는 기회를 맞게 되어 조합된 숫자라고 일러주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두 세대가 넘게 걸린 셈이다. 또한 제주교회가 4・3을 대면하는 데도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다. 도대체 4・3이 뭐길래?

4월 3일에 제주에서 벌어진 그 사건
1999년 말에 국회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였다. 다가오는 새천년에 이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거기서 4・3은 이렇게 규정되었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일제 말기에 많은 수의 군대가 제주에 배치되었고, 그곳을 군사기지로 삼아 최후의 항전을 계획하던 일본은 패망하였다. 저들은 철수하였지만, 일본에서 거주하던 약 6만 명의 제주인들이 귀향하였다. 극심한 실업난, 콜레라의 창궐, 흉작으로 인한 식량난 등 여러 악재가 이어졌다.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쉽게 해결되지 못하면서, 제주 사회는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서 배움을 통해 사회주의에 경도된 젊은이들이 귀국하면서 곳곳에 중학원이 설립되었다. 이 배움의 터전은 지금의 학제로는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 아우를 수 있는 종합교육기관이었다. 커리큘럼도, 교재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의욕에 찬 교사들은 고향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나라의 꿈을 심어주었다. 당시 제주는 어느 지역보다도 교육열이나 의식수준이 높은 곳이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일어난 경찰의 총기발사로 인해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 전국 주요 도시에서 충돌과 인명피해가 있었지만, 그것은 좌익과 우익의 시위대 간에 일어난 불상사였다. 이에 비해 제주에서는 경찰의 발포로 인하여 살상이 일어났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사망한 6인은 젖먹이를 안고 있던 엄마, 국민학생, 노인 등 시위 주동자들이 아닌 구경꾼에 불과하였다. 이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등 뒤에서 사격한 총탄에 의해 절명하였다. 다친 사람도 8명이었다.
이에 도민들은 민과 관이 연합한 총파업으로 진상규명과 관계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조속하고도 적절한 수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긴장은 고조되었다. 경찰력을 증강하고, 소요세력들을 구금하여 주모자를 격리 및 처벌하여 해결하려는 상황은 오히려 더 큰 저항을 일으켰다. 2,500명을 수용한 포화상태의 유치장에서는 긴장이 고조되었고, 가혹 행위로 인해 3인이 사망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1948년 2월 제주도 인민위원회 대표들이 신촌에 모여 격렬하게 토론한 끝에 12대 7로 무장저항 봉기를 결정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하여 5・10 총선거를 거부한다는 명분도 작용하였다. 장년층이 주저하는 사이에, 청년층이 거사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약 300명의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단(서청) 등을 상대로 탄압을 중지할 것과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반대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촉구하였다.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는 남제주군에서만 국회의원이 선출되었고, 북제주군 두 지역에서는 이듬해가 되어서야 선거가 실시되어 의원을 선출하였다.
미 군정과 이승만, 조병옥은 강경진압을 택하였다. 4월 말에 제주도 향토연대인 국방경비대 9연대와 무장대 사이의 평화협상이 시도되었으나, 실효성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쉽게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적절한 판단은 아니었다. 중간지대는 오히려 더 위험한 상황이었고, 살상되는 주민들 주위에는 더 많은 입산자가 생겨났다. 국면은 악화되었으며, 토벌작전은 목표를 쉽게 달성하지 못하였다. 무장대장 김달삼(본명 이승진)을 비롯한 지도부는 섬을 탈출하여 북한으로 향하였고,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 회의에 참석하였다. 두 번째 무장대장으로 이덕구가 항전의 구심점이 되었다.
1948년 11월 17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그해 겨울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었다. 무자년(1948)과 기축년(1949)에 까닭 없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한 결과, 2만 명이 넘는 비무장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이전에 전투나 피습으로 인한 사망자는 모두 1,000명 정도였다.
1949년 1월 10일 의귀국민학교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는 무장대 주력부대를 거의 궤멸시켰다. 1949년 6월 7일 무장대장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국면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귀순 혹은 하산을 거부하고 무장투쟁을 이어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조직은 와해되었고 명분을 잃은 생존투쟁에 지나지 않았다. 1954년 9월 21일이 되어서야 한라산 입산이 허용되었다. 1957년 4월 2일에 마지막 산사람이 생포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혹은 예비검속으로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는데, 제주 지역에서는 4・3과 관련하여 입산한 전력이 있는 사람 2,0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육지의 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2,500명의 제주인들도 대부분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
4・19혁명 직후 참혹한 일을 정리하려던 노력이 잠시 있었으나, 5・16 쿠데타로 국면은 다시 원위치되었다. 국내의 피해자들은 숨죽이며 세월을 보냈지만, 재일 제주인들은 진상규명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다. 사건 당시 1만 명 정도가 제주 땅을 다시 떠나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이들을 중심으로 증언과 기억투쟁이 지속적으로 펼쳐졌다.
1978년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으로 잊혀진 과거는 되살아났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열기에 힘입어, 증언들이 수집,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1988년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를 본 제주인들은 크게 힘을 얻었다. “광주 사건에 비하면, 우리가 겪은 일은 훨씬 참혹했고 오래 지속되었다.”라는 판단이 피해 당사자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증언 청취 작업은 진전되어 가시적인 성과를 나타냈다. 제주의 일간지에서 피해자들 혹은 유족들의 증언이 연재되었고, 이는 후에 연작 『4・3은 말한다』로 간행되었다.
엉킨 문제를 풀어야 하는 오래 묵은 숙제는 쉽게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제15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는 이 과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약하였으며, 당선 이후인 1999년 11월 16일에는 국회에서 특별법이 채택되었다. 이듬해 1월 11일에 대통령은 제주인 대표 8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특별법에 서명하였다.
2003년 10월 15일 특별법에 따른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출간되었다. 10월 31일에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를 찾아와 희생자와 유족, 도민들에게 사과하였고, 이듬해에 추도식에 참석하여 거듭 위로하였다. 제주시 봉개동에 4・3평화공원이 조성되었다. 희생자 개인에 대한 배상 대신에 유족과 제주도민 모두를 위한 추모사업으로 위로하였고, 명예회복의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2014년에는 4월 3일이 국가추념일로 지정되었다. 제주도에서는 이날을 지방 공휴일로 지정하려 노력하고 있다. 2018년 4・3은 제주를 벗어나 대한민국의 역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어두운 역사를 확인하는 발길
근래에는 역사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려는 행렬이 늘고 있다. 세계에서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 한국에서도 중요한 현상으로 떠올랐다. 어두웠던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현장을 찾아 확인하고, 반면교사로 삼아 더 나은 미래를 구상하려고 일부러 흑역사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순례이다.
올해 제주에서는 이러한 발걸음을 만나는 일이 드물지 않다. 한국신약학회, 바른목회아카데미 등 학회가 올겨울과 봄에 제주에서 모여 평화공원과 4・3의 흔적을 확인하고 제주의 슬픈 역사를 새기며 그 아픔에 공감하였다. 3월 14-15일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제주NCC, 한국기독교장로회 제주노회가 공동으로 제주 고난의 현장을 찾는 사순절 순례가 있었다. ‘2018 부활절 맞이 제주4・3 평화기행’으로 모인 순례단 60여 명은 제주NCC와 기장총회 정의평화위원회의 안내에 따라 짧은 일정에도 불구하고 4・3의 핵심을 마주할 수 있었다. 특히 기장 제주노회는 이 과제를 지난 10년 동안 선구적으로 진행하여 왔다. 그 중심에서 사역을 감당해온 송영섭 목사는 혼신의 힘과 열정으로 기행단을 안내하였다.
제주4・3평화재단 양조훈 이사장은 담담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사실을 중심으로 사건의 진행과정을 설명하며 참가자들을 사건 당시의 현장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중앙감리교회 권사이며, 4・3취재반을 지휘하는 취재반장이었다. 그리고 진상보고서의 집필자로서 사건의 전모를 가장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연구자이다. 금년에 평화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바쁜 일정을 보내는 중에서도 교회의 대표들과 신앙인들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했고, 많은 배려로 일행을 도와주었다.
사순절 평화기행 순례단은 봉개동의 4・3평화공원을 출발점으로, 조천읍 북촌리의 너븐숭이, 남원읍 의귀리의 현의합장묘와 송령이골, 그리고 모슬포 인근의 섯알오름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너븐숭이 학살에서 운이 좋게 살아남은 고완순(1939년생)은 현장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마치 살아 있는 ‘순이 삼촌’인 양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 내용을 조리 있게 이야기하였다. 둘째 날에는 NCCK 이홍정 총무도 합류하였다. 아프리카에서 막 돌아온 일정이었지만, 제주의 학살 현장을 돌아보는 대열에 함께하였다.
전형적인 제주의 날씨가 일행을 괴롭혔다. 오락가락하던 비는 섯알오름을 찾은 마지막 시간에 폭우로 돌변하였다. 그곳은 보도연맹 사건 혹은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된 현장이다. 보도연맹 사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좌익활동 전력이 있는 전향자들을 서둘러 학살한 사건이다. 지금의 용어로 말하자면 그들은 블랙리스트였던 셈이다.
3월 28일에 NCCK는 다시 제주를 방문하였다. 제주4・3평화재단과 업무협약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기 위해서였다. 계획으로는 바로 평화재단으로 향하는 일정이었지만, 정세균 국회의장이 재단을 방문한다고 하여 부득이 일정이 변경되었다. 먼저 남원읍 의귀리를 방문하여 현의합장묘와 송령이골에 동백나무를 심는 기념식수 행사를 진행하였다. 진실을 규명하고 잘잘못을 가리기에 앞서서, 어려운 시대를 만나 까닭 없이 희생된 사람들, 양측으로 나뉘어 총을 겨누어 전투를 벌이다가 희생된 젊은이들을 위로하는 뜻을 담았다.
그날 오후에는 양조훈 이사장과 이홍정 총무가 양해각서에 서명하였다. 배석한 4・3희생자 유족회의 양윤경 회장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지금까지 침묵함으로 어색한 관계였던 개신교에서도 4・3의 진실을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확인하니, 큰 힘이 된다고 고마워했다.

아직도 숨어 있는, 이제야 마주하는 진실
3월 30일 오후에는 제주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제주4・3 70주년 기념 증언본풀이 17번째 마당이 펼쳐졌다. 4・3 연구자들이 최근에 찾아낸 증언자들을 세워 대중 앞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자리이기에, 모든 행사 중에서도 놓칠 수 없는 시간이다. 마침 홀로 현장을 찾아 제주에 내려왔던 이근복 목사(크리스챤아카데미)가 함께 자리를 잡고 경청하였다.
이 마당의 증언자로 참여한 송복희(1931년생) 씨는 서귀포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도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오사카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당시 잡힌 무장대원을 효수하여 목을 걸어놓았는데, 바로 살던 집 앞이었다. 일본에서 잘 적응하고 살다가 최근에 글을 배우면서 겪은 일들을 글로 엮었는데, 제주에 그 소식이 전해져 연결되었다고 한다.
노형리가 고향인 또 다른 증언자 이삼문(1941년생) 씨는 당시 모든 가족이 다 사망하여 고아가 되었다. 토벌대의 해군장교가 불쌍하게 여겨 키워주었다. 해군장교가 제주를 떠날 때 그는 고아원에 맡겨졌고, 이후에 목포로 가게 되어 박씨 집안에서 살게 되었다. 자녀가 많은 집안이어서 1953년생 박삼문으로 호적에 올랐다. 근래에 아들 내외가 제주를 다녀가면서 고향의 동정을 알게 되었고, 평화공원을 찾게 되었다. 모든 가족이 희생자로 등재되었는데, 자신도 사망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또 다른 생존자 양농옥(1931년생) 씨의 사연과 아픔도 소개되었다. 난리를 만나 가족이 모두 사망하는 일을 겪은 그녀는 같은 처지의 남편을 만나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남편은 4・3후유장애자로 일을 할 수 없었고, 8년간 앓다가 별세하였다. 1970년에 고향을 떠나 경기도에 정착하였다. 역사의 격랑에 시달린 삶을 살았지만, 민족통일의 꿈을 소중하게 안고 있는 분이다.
그날 저녁에는 제주성안교회에서 연합기도회가 있었다. 70년 만에 사상 첫 4・3합동예배로 모인 것이다. 제주도 내 17개 교단 450여 개 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제주기독교교단협의회의 주관으로 비로소 제주 개신교는 4・3의 역사적 현실과 마주하였다. 600여 명이 모인 기도회에서 협의회장 신관식 목사(법환교회)는 설교를 통해 “오늘의 예배는 제주의 교회가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던 그 70년을 기억하며 이 땅 제주를 오랜 고통으로부터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는 자리”라면서, “70년 전 이 땅에 피의 학살이 발생했지만, 우리는 그 아픔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 아픔과 함께하려고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시간 제주의 교회들이 4・3을 기억하며 그 고통을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교회에서 금기사항으로 여겨지던 4・3이 늦게나마 양지에 드러났고, 목회사역의 새로운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4·3은 대한민국의 역사
4월 3일 오전 10시는 제주도민들에게는 추념식이 열리는 시각이다. 요일이나 날씨에 상관없이, 희생자 유족들이 평화공원으로 모여든다. 예전에는 종교와 문화행사를 포함하여 두 시간이나 소요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사들을 앞 시간으로 배치하여, 이제는 한 시간 동안 국가제례가 진행된다.
올해 추념식은 화창한 날씨에 많은 사람이 집결한 행사였다. 사상 두 번째로 대통령이 참석하는 4・3행사이기에 큰 기대가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족들을 위로하며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새로운 희망을 선언하였다. 소설가 현기영이 “4・3 70주년 평화를 기원하면서”라는 글을 낭독하며 시작된 추념식은 대형합창단의 <잠들지 않는 남도> 노래로 마무리되었다. 논란의 초점이 되었던 이효리는 세 번에 걸친 담담한 시 낭송에서 제주 이주민을 대표하는 시각으로 4・3을 정리하였다.
4월 4일 정오에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제주4・3 역사정의와 화해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NCCK의 정의평화위원회와 인권센터가 주최한 행사로 150여 명이 모였다. 기도회는 박승렬 목사(인권센터 소장)의 인도로 진행되었으며, 남재영 목사(정의평화위원장)는 설교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민중의 역사’라는 시각으로 4・3을 이해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70주년이 되도록 자기 이름을 가지지 못한 제주4・3은 이제야 폭도요 빨갱이라는 야만적이고 불의한 국가권력이 붙여준 이름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가지는 구원의 역사로 다시 부활하고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목회자를 대표하여 고일호 목사(영은교회, 예장)가 기도하였다. “가해자는 말을 하지 않고, 피해자는 말을 할 수 없었던 세월이 흘러 70년이 되었습니다. 가해자는 피해자라 주장하지만 피해자는 피해자라 말할 수 없었기에, 그 진실과 실체조차 드러내기 힘든 긴 어둠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 지도자들은 떳떳하게 ‘십자가의 피를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돌리라.’는 만용이라도 있었지만, 그날의 사람들은, 아니 현재의 우리들은 비겁하고 소심하여 뒤로 감추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주여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4・3을 주제로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20여 명이 주진오 박물관장의 배려로 이야기 마당을 펼칠 수 있었다. 참여자들을 끝까지 괴롭힌 주제는 서북청년단이었다. 영락교회의 김성보 집사는 오랜 세월 사료 관리와 홍보를 담당한 입장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사실을 증언하였다. 교회의 청년으로 제주에 간 사람은 극소수였고, 교회에 들어오면 안전하게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전도한 것이 전부였다는 이야기였다.
한경직 목사가 말하는 서북청년회와 4・3을 겪은 제주인들이 기억하는 서북청년단은 전혀 다른 조직인가? 새로운 질문이 생겨났다. 서북청년단 중에서 교인들이 군대나 경찰에 투신하여 제복을 입고, 공권력 집행자로서 학살의 주역이 된 경우는 있다. 서청과 개신교를 연결하여 연구한 자료에서는 한결같이 유니폼을 입고 변신한 서청 기독교인을 지적한다. 그러나 민간인 복장으로 행패를 부리며 주민들을 괴롭히고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서청에는 기독교인이 거의 없었는가? 더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한 지점이다.
개신교 지도자로 행세하던 인사들 중, 제주에서 큰일을 직접 행했다는 고백이나 증언도 더러 나왔다. 그러나 이를 실증할 수 있는 자료로 확인된 경우는 드물다.
반면 현재 개신교 주류가 견지하는 반공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성향은 당시 빨갱이들을 사냥한다고 만행을 저지르던 토벌대의 입장을 그대로 수긍한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법적으로는 책임을 면한다 하더라도, 도덕적 혹은 신앙적 측면에서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안식일 논쟁에서 새로운 도전을 준 예수의 질문을 원용해본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국민이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김인주 | 서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독일 본 대학교와 에얼랑엔 대학교에서 종교개혁사, 개혁교회신학을 연구하였다. 제주에 있는 봉성교회 목사로 사역 중이며 제주NCC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제주기독교백년사』가 있다

 
 
 

2018년 10월호(통권 7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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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별 총회를 돌아보며

한국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대표적 교단인 예장 통합과 합동, 고신, 대신, 기장 등 장로교회들과 침례교회는 해마다 9월에 정기총회를 연다. 감리교회와 성결교, 순복음교회 등 다른 시기에 총회를 여는 교단들도 있지만, 한국교회에서 장로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대체로 9월 총회들을 통해 한국교회의 ...
권혁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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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선유문안』(忠淸南道宣諭文案) (1)

* 한자로 쓰인 『忠淸南道宣諭文案』은 감리교 목사 최병헌이 충청남도에서 했던 선유 활동을 기록한 글이다. 선유(宣諭)란 임금의 훈유(訓諭)를 백성에게 널리 알리는 것을 말한다. 최병헌(1858-1927)은 충북 제천에서 출생하여 과장(科場)에도 여러 차례 나갔던 한학자 출신의 인물로 교회 일을 현순 목...
최병헌 (한규준 역주, 오세종 감수)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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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불가 작곡가 나운영을 어찌할꼬- 한국교회 예배와 음악의 마지막 과제

교회가 존재하는 한 예배가 있고, 예배가 존재하는 한 음악이 있다. 한국교회의 예배와 음악은 많은 과제를 극복하며 13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의 갈 길은 멀고,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는 기독교 문화의 폐쇄성을 극복하는 일이다. 한국의 교회문화는 수직...
문성모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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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힘으로 모두가 행복한 나라

블랙리스트로 막을 내린 문화융성 정책 새 정부가 들어섰다. 예정된 국내 정치 일정보다 7개월 앞선 대통령 선거였다. 2016년 가을부터 터져 나온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헌법재판소 탄핵으로 결판나고, 제19대 대선은 문재인 후보의 당선으로 결정됐다. 문화융성을 국정목표로 제시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박...
김기봉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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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군사주의와 한반도 평화- 에큐메니컬 애드보커시 대회(EAD 2017)을 다녀와서

에큐메니컬 애드보커시 주간: 혼돈에 맞서고 공동체를 강화하자 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미국 땅에서 우리가 해오고 있는 투쟁은 본래부터 매우 명백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트남)전쟁이 흡혈귀처럼 파괴적으로 모든 기술과 돈과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한, 미국 정부는 ...
이기호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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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독일교회의 종교개혁 400주년 기념을 되돌아보며- 종교개혁 기념의 정치적 도구화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 기념 2017년, 500주년을 맞이하는 종교개혁은 교회와 신학을 새롭게 변화시킨 종교적 사건인 동시에 종교 영역을 뛰어넘는 세계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1 이 종교개혁은 루터가 95개 논제를 세상에 알린 사건에서 출발한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마그데부르크와 마인츠의 대주교인 알브레...
권진호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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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론은 왜 종교개혁의 주체가 되었는가

필자가 「기독교사상」 699호(2017년 3월)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루터의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교회의 면죄부 장사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시작되었다. 면죄부 장사 수입의 절반은 마인츠(Mainz)의 대주교 알브레히트(Albrecht)가 취하고 나머지 절반은 교황이 취했는데, 당시 루터는 이를 몰랐다고 1545년 그의 라틴어 전집 제1...
김균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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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 과연 정직한가

이 짧은 글에서 「기독교사상」 편집진이 요구한바, “한국교회 과연 정직한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적 다양성은 무수한 교파만이 아니라 개체 교회의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시각에서 한국교회의 정직성을 가늠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
박충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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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론이 종교개혁의 동인인가

세계사적 사건이었던 루터의 종교개혁 올해 2017년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계 많은 나라가 오래전부터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독일은 10년 전부터 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독일개신교회총회(EKD)의 신학백서 외에 수많은 문...
김균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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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초상 - 그림으로 비유 읽기

텍스트 ‘텍스트’(text)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일차적으로 우리는 종이에 기록된 어떤 문서를 떠올린다. 요즘에는 시대가 좀 달라져서 전자책이니 전자신문, 전자저널과 같은 각종 컴퓨터 워드 프로세서를 통해 만들어진 것들이 ...
양재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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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땅을 갈아엎자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 호세아 10:12 - 여러분은 이 추운 겨울날, 무엇하러 이 광장에 나왔습니까? 하필이면 예배당이 아닌 이 광장과 거리에서...
신경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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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호(통권 7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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