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의 일부는 한국선교연구원(KRIM)에서 발행하는 저널 「현대선교」에 게재된 필자의 논문에서 일부 발췌되었음을 밝힌다. “예수는 누구인가(Who is Jesus)?: 지구촌기독교(World Christianity) 역사의 시각에서,” 「현대선교」 14 (2012): 67-90.
기독교 신앙의 핵이라고 한다면 바로 ‘예수’에 관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이 질문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아마도 예수 자신이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끊임없이 대두된 질문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기독교 전체의 역사, 더 구체적으로 선교 역사는 과연 각 시대와 지역별로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인식의 역사로 재조명될 수 있다고 하겠다.
본 연재는 예수에 관한 인식을 요사이 회자되고 있는 소위 ‘지구촌기독교’(World Christianity)적 시각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지구촌기독교’는 단순히 지리적으로 온 세계에 편만히 확장된 기독교의 모습을 의미하기보다는 복음의 전파 및 수용 과정에서 기독교 복음이 본질적으로 드러낸 세계적(global)이며 지역적(local)인 특성이 동시적(glocal)으로 발현된 기독교의 모습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구촌기독교의 담론에는 최근에 작고한 앤드루 월스(Andrew F. Walls, 1928-2021)의 공헌이 적지 않다. 월스는 선교의 역사를 기독교 복음이 지니는 번역성(translatability)에 근거하여 ‘선교 역사는 곧 복음의 문화간적 이행과정’(cross-cultural process)으로 보았다.1
세계선교의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듯이, 복음 전파는 단순히 시공간적 확장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복음은 지리적으로 확장하며 각 시대를 거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과 언어, 종교와 문화권을 관통해 왔다. 이러한 다양한 맥락만큼이나 각각의 시공간에서 생겨난 신학적 질문 또한 차별성을 갖는다.
이 연재에서는 각 시대와 문화권을 거치면서 던져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중심 질문에 대한 단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유대, 헬레니즘(그리스, 로마), 동방(시리아, 페르시아), 바바리안(켈트, 게르만), 서구(유럽, 북미), 비서구(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맥락에서 나타나는 양상들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역사를 관통해 형성된 지구촌기독교가 예수 이해에 있어서 얼마나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나타나는지 그 총체적인 풍성함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 첫 번째 연재글은 그 첫 맥락을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한다.
유대인의 기원
인류의 조상 아담, 그리고 이후 노아로부터 여러 민족과 나라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났지만, 성서에서는 유독 한 민족만큼은 의도를 가지고 생겨났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다. 이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약속의 자녀로 이삭을 주신다고 한 약속의 성취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의 자연적인 생산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하시어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허락하셨다. 이후 애굽에서 그 민족을 번성하게 하셔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 애굽을 빠져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 특히 유대인이 존재하게 된 특별한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해 말해주는 구약의 두 중요한 책인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그 핵심을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 12장 1-3절의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은 한 개인, 한 민족, 한 국가적 차원을 넘어 전 세계적인 비전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하나님의 ‘글로벌 비전 선언문’(Global Vision Statement)과도 같다. 그리고 애굽을 빠져나온 이스라엘 자손을 시내산에 불러 온 세상에 대하여 그들이 ‘제사장 나라’(출 19:6)가 될 것을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후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함으로 인해 남북 왕국으로 갈라졌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열 지파로 구성된 북왕국은 앗수르라는 잔인한 제국에게 점령당한 후 혼혈 정책으로 인해 민족적 정체성이 거의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들이 거한 사마리아는 이방족들과의 혼인으로 인해 피가 섞인 자들이 살던 곳이다. 한편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된 남왕국 유다는 강력한 바빌로니아에게 정복당하고 70년간 포로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후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나마 이스라엘 민족의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붙여진 이름에서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유대주의(Judaism)가 나온 것이다. 예수 당시의 유대주의는 사두개, 바리새, 에세네, 열심당 등의 이름을 가진 집단으로 표출되었다.
유대주의의 특징이라 한다면 성전 중심, 율법 중심, 이스라엘의 독립과 회복에 대한 갈망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 거대한 제국들의 압제와 흩어짐 속에서도 그들을 붙들어준 소망이 있었다. 그 소망은 바로 메시아에 대한 기대였다. ‘메시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이를 헬라어로 옮긴 것이 곧 ‘그리스도’이다. 구약의 전통에서는 왕, 선지자, 제사장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다. 하지만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점점 더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는 왕권을 가진 민족적 구원자로 그 의미가 강화되었다.
유대인의 핵심 질문
언제 메시아가 오며 그 메시아는 과연 누구인가? 이는 유대인들의 역사적 맥락에서 그들만이 물을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들에게는 구약이라는 신앙적, 문화적 전통이 있었다. 언젠가는 조상 때부터 약속된 메시아가 오시리라는 기대였다.
이러한 메시아 대망 사상은 당시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인물에 적용되어 ‘나사렛 청년 예수가 과연 그들이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아인가’라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핵심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고린도전서에 언급된 유대인의 특성, 즉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고전 1:22)라는 말은 메시아로서의 표적을 의미한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확인하고 입증할 수 있는 표적을 구했다.(마 12:38, 요 4:48 참조)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당시 그를 주목한 유대인의 중심 질문이었다. 예수 자신도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물으시고 또 직접적으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라고 연이어 물으신다. 이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말은 베드로 개인의 단순한 대답을 넘어 기독교 전체의 결정적인 신앙고백이 되었다.
베드로는 당연히 유대인으로서 예수의 메시아 됨을 적시하였다. 하지만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유대적 전통의 범주를 뛰어넘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한 삼위일체적 신앙고백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이를 칭찬하시며 이것을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 16:17)라고 할 만큼 이 고백은 계시적인 사건이었다.
가장 유대적이라 할 수 있는 메시아 사상과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의문은 또 한 사람의 질문에서 극명하게 확인된다. 바로 세례요한이다. “오실 그이가 바로 당신이오니이까?”(마 11:3, 눅 7:19) 누구보다 예수를 잘 알고 그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었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고 한 이가 예수에 대해 이러한 의문을 갖고 질문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예수가 메시아 곧 그리스도임을 염두에 두고 묻는 질문임에는 틀림없을 것으로 본다. 우리는 메시아에 대한 대망이 얼마만큼 유대인들의 뼛속까지 자리잡은 것인지를 성서 곳곳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최초의 신앙고백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이 중심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왔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 단순한 답은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원초적인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선교 역사의 첫 국면이었던 유대인의 맥락에서 나타난 유대인의 신앙고백이다. 예수는 곧 그리스도라는 것은 유대인에게 전해진 복음이요, 유대인이 아니고서는 그 진정한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행전을 보면 유대인들은 동료 유대인들에게 이 핵심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2)
예수는 바로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네 복음서 중에서도 마태복음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마태복음은 그 서두부터 유대적 맥락에서 기술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마태복음 첫머리에 예수의 족보가 길게 기록된 것은 그가 바로 약속된 메시아, 그리스도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최초의 신앙고백은 구약의 역사와 유대인의 전통에서 나온 유대적 독특성이 만들어낸 신앙 결정체이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이미 전 세계에 퍼진 친숙한 용어(global term)이지만, 지구촌기독교적 시각에서 보면 ‘유대’라는 한 지역에서 담아낸 신학(local theology)인 것이다.
복음의 첫 수혜자였던 유대인의 신앙고백은 전 지구촌적 신앙으로, 동시에 예수에 대한 충만한 이해로 나아가는 단초요 시작점에 불과했다. 예수는 한 민족의 메시아로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의 수혜자는 이스라엘을 넘어 더 많은 민족과 지역을 포함할 것이다. 이는 유대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부르심 속에 이미 내포된 “땅의 모든 족속”(창 12:3)이라는 전 지구촌을 향한 축복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해는 앞으로 전개될 복음의 여정에 등장하는 첫 지표(landmark)가 된 것이다.
구속사와 선교 역사에 끼친 유대인의 공헌과 유산
유대인이 끼친 공헌과 신앙적 유산은 무엇인가? 첫째, 그들은 구속사의 혈통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구세주가 나오리라 약속하셨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저지른 에덴의 현장에서 “여자의 후손”(창 3:15)으로 오실 구세주를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아브라함에게 씨를 약속하셨는데 이 씨가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왕위를 잇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룰 메시아이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는 구속사의 중요한 통로가 된 유대인의 특수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유대인이 단순히 구원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구원사를 이루기 위한 통로가 됨을 말해준다.
둘째,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받아 보존하고 전수한 사람들이다. 바울은 “유대인의 나음”에 대해 언급하기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롬 3:2)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구약 성서 대부분이 유대인들의 손을 통해 기록되고 전수되었다. 구약성서는 서기관이라는 특별한 직책을 맡은 자들을 통해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도록 정교하게 사본의 사본으로 거듭 필사되어 만들어져 내려왔다. 신약의 대부분 또한 그 저자가 유대인이었다. 과연 유대인이 인류에게 공헌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 성서를 기록하여 전해준 것이라 하겠다.
셋째, 유대 디아스포라의 공헌이다. 유대 디아스포라를 통해 세계선교의 발판이 구축되었다. 고토와 나라는 물론 하나님의 임재와 신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성전도 잃어버린 유대인들은 타지에서 성인 10명만 있으면 회당을 지을 수 있었기에 이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 민족의 글과 신앙과 정체성을 유지해나갔다. 바로 이 회당이 예수의 사역과 바울의 사역의 선교 베이스가 되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위해 특별히 조성된 유대인은 그들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대가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아야 하는 운명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를 위한 준비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유대주의(Judaism)의 위협과 도전
위에서 열거한 대로 복음 전파를 준비하는 데 유대인의 공헌이 있었던 반면, 유대주의적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위협과 도전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사도행전 15장을 통해 볼 수 있다. 바울의 선교사역에 언제나 위협과 도전이 된 것은 바로 ‘할례’ 문제였다. 할례는 유대인의 정체성에 너무나도 밀착되어 있었고, 심지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행 15:1)라는 언급처럼 구원론을 뒤흔드는 논란거리가 되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조차도 유대주의자들로 인해 율법과 전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초대교회를 위협한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다른 견해였다. 유대주의의 철저한 신조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구도 신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독교 정통 신조인 삼위일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특히 베드로가 예수에 대해 고백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이러한 유대주의적 요소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된 예수의 본질과 권위가 성부만큼은 못하다고 보는 군주신론(Monarchianism)으로 나타났으며,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에 대하여는 양자론(Adoptionism)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본래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으나 어느 특정한 시점(세례를 받은 시점)에 하나님으로부터 아들로 여김을 받아 양자와 같이 아들이 되었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아들(Son)이 아니라 아들됨(Sonship)으로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2세기 말 비잔티움의 데오도투스(Theodotus of Byzantium)에 의하면, 예수는 동정녀로부터 탄생하였지만 여전히 본질상 인간이었으며 그가 세례를 받았을 때 하늘로부터 비둘기같이 임한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도 같은 입장이었다. 이러한 입장들은 결국 이단으로 정죄받았다.
특히 유대 기독교 공동체의 하나인 에비온파(Ebionites)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자들’이라는 의미의 에비온파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은 부인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해에 있어 양자론의 입장에 있었으며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를 경외한 반면 사도 바울을 율법의 배교자로 보았다. 또한 마태복음만을 유일한 복음서로 인정했고 율법에 따라 여전히 할례를 행하였다. 이들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고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 난 아들로 보았으며, 그리스도의 선재성(Pre-existence of Christ)을 부인하였다. 이들은 예수가 그리스도가 된 것은 율법을 완전히 지킨 대가였다고 보았다. 따라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예수가 그리스도가 된 것처럼 누구나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나가며
지금까지 지구촌기독교의 시각에서 본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해 유대적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유대인들 중 한 부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였고, 다른 한 부류는 예수가 그리스도 됨을 배척하였다. 복음은 이방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로 인해 복음의 전달자였던 유대인은 종국에는 이방인으로부터 그 복음을 들어야 할 수혜자로 입장이 바뀌었다. 아브라함에게 준 축복의 최초 수혜자였던 이스라엘은 유대의 남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을 기다려야 했다.(롬 11장 참조)
다음 호에서는 이제 복음이 다음 국면으로 전파됨에 따라 예수에 관한 이해가 어떻게 나타나고 그 의미가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를 헬레니즘적 맥락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주(註)
1 월스의 선교 사상을 대표하는 저술로는 다음 세 권을 들 수 있다. Andrew Walls, The Missionary Movement in Christian History: Studies in the Transmission of Faith(Maryknoll: Orbis, 1996); Andrew Walls, The Cross-Cultural Process in Christian History(Maryknoll: Orbis, 2002); Andrew Walls, Crossing Cultural Frontiers: Studies in the History of World Christianity (Maryknoll: Orbis, 2017).
박형진|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선교 역사 및 지구촌기독교(World Christianity) 연구로 박사학위(Ph.D.)를 취득했으며, 지금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선교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저서로 『지구촌기독교 선교 역사 이해의 지평들: 아돌프 하르나크에서 앤드루 월스까지, 선교역사가 8인의 눈으로 본 기독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