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부조리
부조리한 역사는 무심하게 한반도를 짓밟고 지나갔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뭇 미물들이 치이고 애먼 생명들이 스러져갔다. 한국전쟁 중에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육군은 1951년 2월 7일부터 11일까지 공비 소탕을 빌미로 경남 산청-함양-거창 산간 부락에서 양민을 학살했다. 산청에 살던 우리 가족도 뜻하지 않게 화를 입었다. 우리 가정은 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아버지와 삼촌은 지리산으로 피신하여 ‘산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이념과는 상관없이 생존을 위해 남부군(南部軍)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산중에 퍼진 돌림병에 걸려 거의 죽은 몸으로 하산했다. 삼촌은 전향하여 나중에 경찰이 되었다. 세상이 좌우로 나뉘어 반목하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어느 쪽에도 서지 못했다.
마을에서 인심 좋은 사람으로 알려진 아버지는 가족에게는 박정했고 무책임했다. 전쟁이 끝나도 아버지는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집에 있는 처자식은 끼니를 굶었다. 급기야 우리 가정은 해체되어 뿔뿔이 헤어졌다. 생활고로 인하여 엄마는 연고도 없는 서울로 올라갔다. 엄마와 헤어진 나는 남의 집에서 천더기로 살았다. 어려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다섯 살 때는 무턱대고 엄마를 찾아 나섰다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 적도 있었다. 되돌아보면, 죽을 고비에서 ‘보이지 않는 손길’ 또는 ‘알 수 없는 임’이 나를 지켜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친척 집을 떠돌다가, 일곱 살부터 아홉 살까지 함양에 있는 외가에 얹혀 지냈다. 외로움과 서러움을 겪으며 눈칫밥을 먹었다. 힘에 부쳐도 꼴을 베고 솔가리를 긁으며 밥값을 해야 했다. 자연은 내 벗이었다. 외숙모가 꾸중하거나 외사촌들이 때려도, 꼴망태를 메고 산으로 올라가면 마음이 편안했다. 골짜기에 흐르는 물소리와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이 나를 위로했다. 산을 오르내리며 나무와 대화하고, 길섶에 핀 야생화를 관찰했다. 삘기를 뽑아 먹고, 송기를 씹으며 허기를 달랬다. 건너편 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가 애잔했고, 청승맞은 멧비둘기의 울음은 구슬펐다. 내 유년기는 무채색에 가깝다. 슬픈 추억이었지만, 다행히도 그 시절이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나는 ‘우연’(偶然)과 ‘부조리’(不條理)를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우연과 부조리는 세계를 해석하는 주요 개념이 되었다. 그것은 나의 실존과 무관하지 않다. 왜 전쟁이 일어났고, 우리 가정은 해체되었는가? 나는 왜 태어났고, 어째서 버림받게 되었는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한 사건이다. 내 과제는 부조리에 성실하게 반항하는 일이다. 우연히 태어나 거기에 내던져진 ‘현존재’(現存在)인 나는 운명 앞에서 결단하고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이 나를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의 신비와 자연에 대한 경이가 나를 구성하고 있다. 자연은 내 안전기지요 치료소이다. 존재의 신비와 경외는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기초를 이룬다.
출애집기(出愛執記)
생의 목표 없이 방황하던 나는 1977년에 입대하여 3년간 전방에서 복무했다. 군대라는 폐쇄적인 조직에서 갖가지 부조리를 경험했으나, 군대 생활은 주체적으로 부조리에 반항하는 계기가 되었다. 야전병원에서 부비강염 수술을 받다가 의료사고가 나서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했다. 1979년 가을 어느 날, 병실 침상에 앉아서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병실 안에 가득했다. 회심 체험일까? 갑자기 회한이 솟구치며 눈물이 났다. 이제껏 인생을 낭비한 죄를 지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자리에서 내가 지켜나갈 준칙을 만들었다.
• 무자기(毋自欺): 나를 속이지 말자.
• 무소유(無所有): 비우고 내려놓자.
• 위대우(爲大愚): 큰 바보가 되자.
파란곡절 많은 청소년기를 보낸 나는 제 발로 걸어서 교회에 나갔다. 교회 청년부에서 있었던 일이다. 새해가 되어 새내기들이 청년부로 올라왔고, 그 가운데 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연약하고 예쁘장한 그 여학생을 보면 가슴이 설렜다. 사귀고 싶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나는 고등학교 중퇴생이고, 그는 연세대학교 신입생이었다. 이른바 ‘넘사벽’이었다. 오를 수 없는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했다. 그런데도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다. 지독한 집착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귈 수 없는 내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후레아들의 신세가 서러웠고, 대물린 가난이 한스러웠다. 나는 세상에 반항하며 운명에 절규했다. 어찌하여 나는 활과 화살이 없는 사냥꾼으로 태어났는가? 그러면서 맨손으로 ‘독수리’를 잡으려 했을까? 당시의 치기 어린 행동이 부끄럽고 미안할 따름이다.
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생존한다. 욕망이 삶의 원동력일까, 아니면 괴로움의 뿌리일까? 욕구는 생존의 원동력이나, 조절되지 않은 갈애(渴愛)는 화근이 된다.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행복할 것인가? 욕망에는 끝이 없고, 인간에게는 욕망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 제한 없는 소원성취는 도리어 재앙이 될 수 있다. 존재를 향유하려면 소유와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행복을 원한다면 행복을 단념하라. 쾌락을 좇지 말고 적절한 고통을 선택하라. 고통 속에 병든 욕망을 치료하는 약이 숨겨져 있기에.
국군병원에서 수술 후 요양하던 어느 날, 산책하다가 길가에 피어 있는 패랭이꽃을 발견했다. 한참 동안 쪼그리고 앉아서 그 꽃을 들여다보았다. 화단에 자리 잡지 못하고, 철 지나서 핀 꽃이 애처로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것을 꺾을 뻔했다. 가지고자 함은 괴로움을 가져온다. 가질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꽃을 꺾어 가지지 않는다. 나는 그 야생화를 그곳에 내버려두고, 오가며 그냥 바라보기로 했다.
나에게 무소유는 ‘출애집’(出愛執)을 뜻한다. ‘애집’이란 애정과 소유에 대한 집착이다. 문득 까닭을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마음이 시려온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가슴 깊이 배어 있다. 어떻게 해야 애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외로울 만큼 외로워하고, 그리울 만큼 그리워하며, 아플 만큼 아파하다가, 마침내 ‘홀로서기’를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인간관계에 집착하지 말자. 감정에 충실하되, 감정에 속지 말자. 인연을 소중히 여기되, 인연에 매달리지 말자. 마음을 다하여 만나고, 미련 없이 떠나보내자. 오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출애집기’를 쓴다.
진리가 무엇이냐
1980년에 제대하여, 한동안 삼각측량 현장에서 일했다. 측량기를 메고 산을 오르내리는 일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내가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자기(毋自欺), 무소유(無所有), 위대우(爲大愚)를 실천하는 길은 수도 생활과 신학 연구라고 생각했다. 진로를 고민하다가 현장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수도원을 동경했으나, 마땅한 개신교 수도원을 찾지 못했다. 일단 신학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남산에 있는 국공립 도서관에서 1년 남짓, 허리를 동이고 공부했다. 대입 학력고사를 치르고, 그토록 원하던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자유롭게 사유하며 비판적으로 신학을 탐구했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과연 기존의 진리가 참인가?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의 기원을 이해하려면 역사-지정학적 고찰이 요구된다. 이스라엘 종교가 형성된 범위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까지 고대 근동 전 지역을 포괄한다. 가나안의 다신교적 족장종교와 미디안 광야에서 발생하여 이집트에서 형성된 야훼 신앙이 융합되고, 왕정 시대의 통치이념을 거쳐서 포로기 예언자들이 제시한 유일신 야훼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신관은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발전하였다. 유다왕국 멸망 이후, 유대교는 바빌로니아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로부터 유일신관, 내세사상 등을 수용했다.
히브리 종교와 그리스 철학을 융합한 기독교 신학에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중세 신학의 머릿돌인 ‘사도신경’은 로마제국의 권력과 교회 정치의 산물이었다. 아무래도 사도신경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리스의 존재론에 근거한 신론은 하나님을 실체적 존재로 규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고의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틸리히)이다. 존재 자체는 존재자가 아니기에 하나님은 ‘실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없이 계신 분”(유영모)이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본회퍼) 살아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인가? 초기 교회 신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경배했는가? 일찍이 나는 ‘역사적 예수’에 관심했다. 예수가 참 하나님이며 참사람이라는 것은, 신의식으로 충만한 이가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충실히 증거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모범적으로 대변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기적, 부활, 재림 등은 방편이고, 타자를 위한 존재인 예수의 믿음과 사랑의 삶 그리고 가르침이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스승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올바로 믿어야 한다. 기독교의 내세관은 타계와 영생을 강조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원한 현재, 곧 오늘의 구원이다. 천국에 들어간다 함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뜻한다.
절대적 진리는 없다. 종교와 학문에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그쳐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독선이 진리를 대신한다. 교권을 장악한 김홍도 감독이 1992년에 개최한 감리교회 종교재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를 이단사상으로 규정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를 단죄한 것은 그릇되고 부끄러운 일이다. 근본주의든지 자유주의든지 신학은 하나의 의견이다. 편견과 아집을 경계하자. 당연하게 여기는 진리가 순응 편향에 의한 집단착각일지도 모른다. 득의망언(得意忘言), 뜻을 얻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 강을 건너면 배에서 떠나듯이, 언젠가 진리에 이르면 종교와 신학마저 버려야 하리라.
예수 목회를 꿈꾸며
1989년 1월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담임목회를 시작했다. 그곳 ‘덕다리’(德多里)라는 지명은 ‘외딴곳’을 뜻하는 ‘넉다라지’라는 사투리에서 유래하였다. 목회 환경은 어렵지만, 수행하기에 적당했다. 어떻게 목회할 것인가? ‘자본이라는 종교’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소유와 쾌락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나는 수도사 영성과 혁명가 정신으로 살기를 바라며, ‘예수 목회’를 실험하기로 했다. 예수 목회란 내가 죽고 예수가 사는 것이며, 역사적 예수의 얼과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례비를 적게 받고 검소하게 생활했다. 교세가 약했지만, 우리 교회는 반전평화 운동에 참여하고, 한미행정협정(SOFA)과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며, 자본을 위해 생명을 죽이는 4대강 개발을 막고자 기도했다. 나는 부근에 들어선 산업폐기물 처리공장을 감시하고, 주민을 괴롭히는 미군 폭격기 훈련장을 철폐하는 운동에도 참여했다.
한 교인 가정에 우환이 연이어 발생하자, 그 가족이 낙심하여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주일을 지키지 않고 우상숭배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어느 교우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명기신학을 오해하고 있다. 신명기와 신명기역사서에서 기조를 이루는 인과응보는 이스라엘의 반성과 회개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다른 한편, 지혜문학인 욥기는 인과응보를 해체시켰다. 욥기에 따르면,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이다. 그런데 사탄은 신앙에 ‘조건’을 내건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고난을 징벌로 여기는 태도는 이른바 ‘거래신앙’ 또는 ‘기복신앙’에서 기인한다. 참된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한국의 교회와 목회자들은 대체로 수구적이다. 기복신앙과 반공주의에 길들여진 교인들의 인식은 조선-중앙-동아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정의와 민주주의를 설교해도, 선거 때가 되면 대중들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수구 집단에 투표한다. 분명 교회의 신학과 신앙에 문제가 있다. 오늘날 교회에 만연한 신앙은 ‘4영리’로 집약되는 기독교 근본주의, ‘삼박자 축복’을 내세우는 번영신앙, ‘예수 천국, 불신 지옥’에 표출된 타계신앙 등이 혼합된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현세에서 복을 받고, 죽은 다음에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신앙이 과연 예수의 가르침이고, 기독교의 본질일까? 아니다! 그것은 값싼 은혜고, 물신 숭배며, 사이비 복음이다. 그런데 ‘4영리’와 ‘삼중 구원’ 그리고 ‘예수 천국’을 거부하고 목회할 수 있을까? 목회에 한계를 느낀다. 한국교회가 싫어지려고 한다.
‘교회’를 가리키는 독일어 ‘Kirche’와 영어 ‘church’는 헬라어 ‘퀴리오스’(κύριος)에서 유래했다. 다시 말하면, 교회란 ‘주님의 집’ 또는 ‘주님께 속한 것’을 뜻한다. 원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막 11:17)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찾아간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의 소굴”로 변해 있었다. 오늘날 교회는 과연 주님의 집인가? 도리어 주님이 교회에 소속된 것은 아닌가? 화려한 교회의 벽면에 금관을 쓴 예수가 매달려 있다. 심판은 은혜의 다른 표현이다.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렘 1:10) 복음이 왜곡된 현 상황에서,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교회가 망하는 것도 주님의 은총이리라.
길이 끝나는 곳에서
그동안 나는 작은 교회에서 ‘한 영혼을 위한 목회’를 추구하며 소신껏 목회했다.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성서를 연구하여, 교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내용을 전달했다. 역사적 예수를 가르치며, ‘믿음이’에서 나아가 ‘따름이’가 되자고 권면했다. 하지만 인습에 젖은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장기적 안목에서, 맹지(盲地)인 교회 부지를 도로와 연결하고자 두 차례에 걸쳐서 토지를 매입했다. 어려운 형편에서 교인들을 독려하여 예배당을 리모델링했다. 교회 여건상 재정을 긴축하여 사례비는 장기간 동결되었고, 퇴직금도 적립하지 못했다.
교회가 확장되면서 교인도 다소 늘었다. 그런데 2012년 부활절에, 외부에서 들어온 사이비로 의심되는 교인들이 교회에 사달을 일으켰다. 그들은 내 설교에서 트집을 잡아 교인들을 꼬드겼다. 내가 사후(死後) ‘천국’과 ‘부활’을 부인했다는 것이었다. 유력한 교인들이 그들에게 넘어갔고, 밖에서 나를 비난했다. 나를 견제했던 감리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방회에서 특별조사위원회를 소집하고, 내가 급진신학을 추종하며 내세를 부정한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을 추진했다. 나는 소외감과 모멸감으로 밤잠을 설쳤다. 나보다 아내가 더욱 힘들어했다. 내가 매를 맞았는데, 아내가 통증을 앓았다. 이제껏 내가 발을 딛고 있던 터전이 흔들렸다.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비바람은 그치지 않고 불빛은 보이지 않는다. 애타게 동트기를 기다리는 파수꾼의 심정이다. 아니, 아니다!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밤이 깊어야 비로소 별들이 영롱하게 빛난다. 깊은 어두움 속에서 별을 그린 반 고흐처럼, 구덩이 속에서 고통의 의미를 찾아야겠다. 백창우 시인이 노래하듯이,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리라.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 그 길 위로 희망의 별 오를 테니 - 백창우,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이 밤을 통하여 가슴에 별을 품을 수 있다면, 어두운 밤은 징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다. 나에게 밤을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하자.
뒷모습이 아름답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인욕(忍辱)하면서 목회에 전념했다. 사이비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며, 오랫동안 토지와 건축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개발법과 건축법은 왜 그렇게 까다로울까? 시청에서는 기존 건물을 모두 철거해야 개발을 허가한다고 했다. 길을 찾고자 이곳저곳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마침내 교회의 숙원을 이루었다. 기존의 부지와 건물을 양성화했고, 나중에 구입한 토지에 신축을 위한 개발인허가를 받았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 목회한 지 35년이 되었다. 한 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이제 버리고 떠나야 할 때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이형기, 〈낙화〉(落花)
‘아름다운 마무리’가 말처럼 쉽지 않다. 은퇴하면서 노후대책, 후임자 청빙 등으로 담임자와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목회자의 복지구조는 불안정하고, 주거와 퇴직금은 교회의 규모에 따라서 양극화된다. 갈수록 교회들의 상황은 나빠진다. 교단에서 나오는 연금은 점차 감소한다. 고육지책으로 후임자에게서 은퇴자금을 받는 일이 관행이 되어버렸다. 작은 교회 목사로서 가난한 목회자의 사정을 잘 알기에, 다른 사람에 대하여 평가하고 싶지 않다. 노후대책을 세우지 못한 나의 미래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스승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 6:24)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마 6:33)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돈은 힘이 세다. 하나님에 버금가는 돈은 유사전능성을 지니고 있다. 힘센 돈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이 땅에서 예수의 얼을 품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한다. 돈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아가자.
위쪽으로 내려가기
올봄에 목회에서 은퇴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빈손으로 떠났다. 나에게 은퇴는 새로운 시작이다. 노후대책을 세워두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최소한의 비용으로 주거 문제를 해결했다. 아내와 내가 살 공간으로 족했다. 좁은 집으로 이사하면서 대부분의 책을 버렸다. 보물처럼 아끼던 서적을 후배들에게 내놓아도, 아무도 가지고 가려 하지 않았다. 앞으로 책을 소장하지 말아야지. 몇 권이라도 나 자신의 근원적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책을 정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진 것 없이 사는 데는 건강이 관건이다. 노년의 건강관리로 맨손 체조와 맨발 걷기가 적당하다. 내가 사는 집 가까이에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오후에는 오솔길을 따라서 호젓하게 산책한다. 시청 복지관을 통해서 공공근로에 취업하여 새로운 사회생활을 경험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새로 마련한 거처를 나는 마음으로 ‘독락당’(獨樂堂)이라고 부른다. 독락당은 조선 중종 때 활동한 이언적 선생이 정치를 접고 낙향하여 지은 집의 당호다. 나는 그 당호를 차용하여, ‘獨樂堂’을 은퇴 이후의 생활지침으로 삼았다.
• 고독(孤獨): 홀로서기, 그리고 사이좋게 지내기.
• 호락(好樂): 혼자서도 즐겁고 재미있게 놀기.
• 당당(堂堂): 가진 것 없더라도 주눅 들지 않기.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홀로 견뎌내야 할 시간이 늘어간다는 뜻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홀로 천천히 올바르게 걸어가자.
삶은 종종 등산에 비유된다. 그동안 오르려고 애써왔다. 이제부터 내리막길이다. 등산할 때 올라가는 길보다 내려오는 길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 낮아지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뜻을 높이되, 자리를 낮추자. 내려가는 길이 나에게 주어진 선물일 수 있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을 내려갈 때 볼 수 있기에. 믿음은 낮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있음의 바탕’인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아래로 열려 있다. 그분을 만나려면, 심연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할 것이다. 낮은 마음으로 그분에게로, 위쪽으로 내려가자.
김종길|감리교신학대학(Th.B.),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Th.M.), 합동신학대학원(M.Div.), 호서대학교 대학원(Ph.D.)에서 수학했다. 조직신학과 구약학을 전공했고, 감리교신학대학교와 호서대학교 등에서 구약학을 가르쳤다. 수도사 영성과 혁명가 정신으로 살기를 바라며,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예수 목회’를 실험했다. 목회에서 은퇴하고, 현재 독락당(獨樂堂)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