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운이 좋았다
인생의 기억이 시작되는 곳에 학교가 있다. 어머니의 출근길을 따라 학교에 가고 어머니의 수업 시간에 창문에 걸터앉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책을 따라 읽다가 선생님들의 틈에 끼어 점심을 먹고 교무실 책상 밑에서 잠들면 퇴근하는 어머니에게 업혀 집에 돌아왔다.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덕분에 당시 7-8세의 나이에 입학하던 관행을 거슬러 6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3-4학년이 되어도 한글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는 이들이 상당수였음에도,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오랜 선행학습을 했으니 초등학교 입학 후 줄곧 1등은 내 차지였다. 학급 반장, 웅변대회, 글쓰기, 만들기 등 무엇이든 만능이었다.
무엇보다 큰 혜택은 학생들이 드나들기 꺼리는 교무실을 편안하게 드나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교무실에는 여러 개의 책장에 1천여 권의 다양한 책이 있었고 누가 담당자이든 나에게는 아예 열쇠를 주고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특권이 묵시적으로 부여되었다. 그 시절 나는 만화책을 포함하여 책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3-4학년 때에는 교과서 진도를 따라가기도 허덕이던 학우들과 달리 『소공자』, 『소공녀』, 『뤼팽 전집』, 『로빈슨 크루소』, 『타잔』, 『철가면』, 『로빈후드』, 『해저 2만 리』 등 번역 소설을 읽다가, 12권이나 되는 『한국의 역사』(이상옥)를 읽고 단군신화에서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의 설화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책가방만큼이나 크고 두꺼운 『의학대사전』을 밤새워 읽으며 양의학, 한의학, 민간요법, 법의학을 읊어대는 괴짜 어린이였다.
시골 학교를 다녔음에도 시군 단위와 도내 경연대회, 웅변, 글짓기, 만들기 등 학교 대표로 출전하였고 많은 상을 타왔다. 그때마다 기껏 상장 하나와 공책 몇 권인 상품에 비해 어머니는 동료 교사들의 축하에 답례하느라 지출을 많이 하셨다.
지금의 세대는 지식이 정보의 양과 속도로 대치되고,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정당화되면서 철학이 퇴조한 시대를, 또한 역사를 통한 교훈과 미래 예측이 불가능해진 불확실성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세계관과 가치관이 분명하고 평생 철학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 온 나에게 인문학적 교양은 반드시 필요했고, 이는 때마다 나의 사고의 기초가 되었다. 지금 세대와 달리 초등학교에서 그것이 충분히 마련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식민지 해방 이후, 전쟁이 그치고 가난을 극복하던 시절에 선생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 시골 학교 교무실 장서 속에서 자란 것, 이제 돌아보니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행운이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반장이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순영아, 너 나와 함께 교회에 가지 않을래? 곧 학생부흥회가 있을 텐데 너를 초청하고 싶다.”라고 말해 집 주소를 알려주었더니 며칠 후 등사기(謄寫機)로 제작한 초청장이 집으로 배달되었고 나는 마치 특별한 사람이 된 양 초청장을 들고 제천중앙성결교회의 예배당을 찾아갔다.
난생처음 참석한 부흥회에서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 세 번씩 매번 두 손을 높이 들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새찬송가 143장)라고 찬양했다. 나는 부흥회 내내 못마땅했다. 수많은 비유 대상 가운데 ‘왜 하필이면 벌레냐?’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흥강사는 시간마다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진수를 마음 다해 전했다. 부흥회 마지막 날, 부흥강사는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오른손을 드세요!”라고 간곡히 초청하였다.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앉아있던 나는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해 겨울, 학생회에서는 성탄 전야에 올릴 성극을 준비하였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어 대담하게 뮤지컬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기획하였다. 뮤지컬이란 말도 모를 때이니 학생 찬양대가 찬송을 부르면 무대에서는 배역을 맡은 사람이 대사 없이 그 가사에 해당하는 동작만 하고 내려오는 식이었다. 나를 교회로 인도한 친구는 동방박사를,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나는 양치는 목자를 맡았다. 동방박사는 어른 찬양대 가운을 입고 찬양대의 노래 “베들레헴 대왕께 나는 황금 드리네 영원토록 모든 백성 다 살려 주소서.”하는 가사에 노란 보자기에 싸인 상자 하나를 아기 예수께 드리며 절하고 퇴장하였다. 목자인 나는 나무로 만든 지팡이 하나를 집고 교복을 뒤집어 안감이 밖으로 나오도록 입고 찬양대의 노래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구세주 났네.” 세 마디의 가사에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내려왔다.
목자 역할을 맡은 나는 15년 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동방박사 역할을 한 친구는 20년 후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모교 경제학 교수로 ‘백성을 먹여 살리는’(經世濟民) 강의와 제자 양육 끝에 총장이 되었다. 중학교 3학년 성탄절 행사에 우리는 비록 단역이었지만, 각자 목사 고시를 치르고, 박사 학위 전공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많은 중학교 3학년 8반 급우 가운데 내가 초대를 받은 것은, 거기에서 십자가 복음을 듣고 손을 든 것은, 성극의 여러 배역 가운데 내가 목자가 된 것은 내 의지와 노력, 연기력, 또는 선택이 아니라 오로지 행운이었다.
재정의 자립에서 의식(意識)의 자립으로
3년의 군 복무 후 신학교로 복학하였다. 이후 1980년, 소위 ‘서울의 봄’을 지나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고, 나는 군부의 지시로 징계를 받았다. 그 기간 독일 간호사로 일하다가 귀국한 지금의 아내를 다시 만나 결혼을 했고, 고향 교회의 교육전도사로 사역하다가 두 번째 복학을 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보수적인 교회공동체와 교단으로부터 평생 ‘운동권 출신’이란 이름을 주홍글씨처럼 달고 살아야 했다.
1982년 12월 성탄절을 며칠 앞에 둔 한겨울, 태어난 지 한 달 남짓한 첫 아이를 데리고 부임한 경기도 양평의 계전교회는 주일 출석 40명, 1년 경상비 약 300만 원, 교역자 생활비 매월 10만 원을 지급하는 농촌교회였다. 열 명 정도 되는 집사님들과 첫 직원회(장로교의 제직회, 감리교의 임원회와 유사)를 하는 자리였다. 전임자들이 재정적 지원을 받았던 사례를 언급하면서 전도사님은 아이까지 있으니 할 수 있는 대로 도시의 큰 교회에 후원 요청을 하여 생활비를 해결하라는 충고 아닌 충고를 해주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교회의 자립은 재정문제가 아닌 목회자와 교인들의 의식이 먼저입니다. 나는 계전리의 사람으로 여러분과 함께 살려고 왔습니다. 10명의 집사님들이 온전한 책임 의식으로 교회를 섬기고 십일조 생활을 하면 목회자와 교회가 함께 자립할 수 있습니다.”
일절 외부 보조 없이 한 해를 견딘 끝에 가을 추수 때부터 교인들은 수확한 쌀이나 다른 작물, 혹은 수매대금 수입의 십일조를 내며 책임 의식을 가지고 헌신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자립적인 교회 운영을 단기간에 이룰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평생 도움받지 않고, 도와주며 목회할 수 있었다.
어느 해 겨울, 교회 초등부 6학년 향숙이가 입술이 새파랗고 숨이 가빠하는 것을 눈여겨보던 아내가 여주에 있는 고려대학교 부속병원에 심장전문의 순회 진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아이를 데리고 갔다. 선천선 심장병이라는 진단 결과와 심장 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은 당시 부천에 있는 세종병원뿐이며 수술비가 1천만 원 정도나 된다는 말에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생명이 달려있는 일에 낙심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교회에서 직원회를 열어 내 한 달 생활비 10만 원을 내놓고 모금을 시작했다. 우리 마을에서 이웃 마을로, 학교에서, 군수에게까지 찾아가 호소하였고 마침내 온 마음으로 협력한 지역사회의 정성으로 2백만 원의 성금을 모을 수 있었다. 양평군 보건소에서는 ‘영세민 의료보호카드’를 발급해 도움을 받게 해주었으나 이제 모금은 한계에 부딪혔다. 이때 양평 로터리클럽 회장이 호소문을 보고 같은 클럽 회원인 세종병원 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병원에서는 지금까지 모금한 금액만으로 심장 수술을 해주었다. 성공적인 수술 끝에 향숙이는 잘 회복하였고 중학교 입학에 맞춰 퇴원할 수 있었다.
성격 차이
이후 지방 중소도시에 있는 교회의 부목사로 부임하였다. 3년 동안 부목사 시무를 마치고 다른 교회로 떠나기 전날, 만찬을 준비하여 초대하신 장로님께서 식사를 마친 후 나에게 “박 목사님, 목사님은 못하는 것 없이 다 잘하는데 딱 한 가지, 성질 좀 고쳐요.”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분과 참 많이 부딪쳤다. 담임목사님을 대하는 태도도 못마땅했고 젊은 교역자들이나 교인들 대하는 고압적인 태도도 싫었다. 항상 누군가를 평가하듯 시시콜콜 간섭하며 나무라는 말도 듣기 싫었다. 나는 옳고 그분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책상에 놓인 고무판 밑에 사표를 써놓고 언제든 그만두겠다는 각오로 대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항상 그분은 한 발짝 물러나시면서 아들뻘인 나에게 “그만둡시다. 다음엔 의논 좀 하고 일하시지요.”라고 양보했다. 지나고 보니 평생 공무원으로 일하다 정년 퇴임한 그분은 꼼꼼하고 합리적이며 신중한 업무 스타일로 평생을 살아온 분이셨고 나는 정의감과 오기가 뒤엉켜 있고 열정과 과시욕, 사명감과 우월감이 뒤섞인, 아집 가득한 목회 초년생이었으니 사사건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보하고 기다려 주었기에 내가 무엇이든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만일 모진 마음을 가진 분이었다면 나는 목회 초반부터 좌절을 맛봤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목회 여정을 돌아보면 사역과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일 대부분이 옳고 그름의 문제인 것 같지만, 사실 성격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까지 참 좋은 분들을 만나 용서받고 위로받고 이해받고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그러던 내가 이후 목회대학원 과정에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에 대하여, 성서에 대하여,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에 대하여 백과사전처럼 흡수하고 축적하던 내가 정작 인간에 대하여 너무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남을 향하던 시선이 나의 내면을 향하게 되었고, 나를 온전히 성찰할 수 있었다. 나의 아집과 편견, 독선적인 태도 때문에 가족과 교회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상처받았을까. 나를 알고 남을 보니 이해가 되고 관계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고 남을 변화시키려 하던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것이었다.
지는 해가 아름다운 곳
서해의 노을이 아름다운 부안 바닷가의 줄포중앙교회 담임목사(1988. 11.-1996. 4.)로 부임하였다. 그곳은 온전한 가정을 찾아보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지역에는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어른들, 그런 가정에서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들을 위해 아내와 나는 학교와 면사무소, 경찰서, 병원, 법원까지 지역사회의 연결고리를 자원하였다.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을 위해 우리집 쌀통과 주머니를 열었고, 학교 선생님들에게는 조건 없이 방과 후 과외 공부를 부탁했으며 면사무소 복지사에게는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절도 혐의로 재판받는 아이를 위해서는 국선변호사를 만나고 탄원서를 썼다. 때마침 참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해직 교사들과 농민회가 연대하여 부안민주화운동연합을 결성하였는데, 내가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호남지역의 애환을 함께 겪고 누리면서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기 시작하였고 교단의 각종 교육교재를 집필하였다. 또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목회대학원의 석사, 박사 과정을 공부하며 학문적 사고를 함양하고 목사로서의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였다. 30대 초반에 “찬란한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지고 난 뒤에도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듯 내 인생의 노년도 떠나고 난 후에 사람들의 마음에 붉게 남아 있으면 좋겠다.”라고 쓴 수필 『지는 해가 아름다운 곳』은 회갑이 되어서 출판한 단행본의 제목이 되었다.
아름다운 만남, 따뜻한 동행
원로목사께서 개척하여 20년 목회 후 은퇴한 서울교회(아현동)에 제2대 담임목사(1996. 4.-2005. 3.)로 부임하였다. 착한 신자들과 좋은 장로님들의 보호와 지원 덕분에 평안하고 즐겁게 사역할 수 있었다. 아내는 목사 부인이라는 틀을 넘어 기아 대책의 자원봉사자로, 간호사 경력을 살려 터키 대지진 응급구호 요원으로 재난지역 구호 활동을 시작하였고 10여 년을 쓰나미, 전쟁, 선교지 의료봉사에 헌신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장충단교회의 선임 장로로부터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분은 첫 만남의 자리에서 “청빙에 응할 의사가 있는지를 최종 여쭈려고 만나기를 청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몇 분들로부터 후보 추천을 받았는데, 그중 나를 적임자로 선정하여 다음 주에 청빙 결의를 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다소 황당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력서를 비롯한 서류제출과 설교 초청, 어떤 형태의 면접이든 요구하지 않고, 당회에서부터 전교인 사무총회까지 단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결의하여 요청하시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요즘 교회 청빙의 모양새가 직원 채용처럼 진행되는 추세에 나의 대답이 교회 측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 “목사님께서 원하는 대로 얼굴도 보지 않고 만장일치로 결의하였습니다.”라고 연락이 왔다.
이때, 한국교회의 최대 관심과 논쟁은 목회 세습에 관한 것이었다. 49세의 나이에 장충단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할 때 40대 목사 후배들이 장충단교회의 청빙을 보며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목사, 장로의 아들이 아니어도, 유력한 이들에게 줄을 대고 부탁하지 않아도 오직 목회에만 성실하면 목회의 길이 열린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서로 위로하며 함께 기뻐했다는 것이다.
당시 60년 역사에 한 번도 선교사를 파송한 적이 없는 교회에서 정식 후원선교사 파송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교단 안에서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고 교역자 공제회 이사장, 해외선교위원장, 군선교위원장, 서울신대 이사 등의 역할을 맡아 활동했다.
행운의 정체
사람들은 흔히 성공의 조건 또는 비결을 실력과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성공했다는 사람보다 더 머리가 좋은 사람도 실패할 수 있고, 그보다 더 실력을 쌓거나 몸이 병들 만큼 노력했다고 하더라도 실패한 경우가 오히려 더 많을 수 있다.
코넬대학의 경제학 석좌교수인 로버트 프랭크는 저서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에서 실력주의라는 신화의 허구를 벗겨냈다. 실력주의가 우세한 상황에서도 행운이 얼마나 주요한 작용을 하는지 수많은 예화와 구체적인 자료, 컴퓨터 시뮬레이션까지 이용하여 근거를 제시하였다. 성공은 노력과 실력으로, 실패는 불운의 탓으로 돌리는 모순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거둔 성공에서 행운의 역할을 인정하고, 실패에 대하여 운이 좋지 않았다는 핑계를 줄이는 것이 현명한 태도라는 것이다.
인생 67년, 목회 40년을 돌아보면, 중학교 3학년 8반에 속한 것, 반장이 나를 교회로 초청한 것, 교회 예배가 끝나고 학생회 회원들끼리 겨울 난로 곁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동급생 친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전해준 것, 착실한 교회 청년에 불과하던 나에게 신학교라는 과정이 있고 목사의 사명을 안내해준 선배, 신학교를 졸업하던 해 친구 집에 갔다가 소개받은 첫 목회지가 떠오른다. 특히 고등학생 시절 친척 집 들마루에서 이제 막 배운 통기타 실력으로 〈꽃반지 끼고〉를 부르다가 눈이 마주친 눈이 크고 맑은 긴 머리 소녀와의 사랑이 떠오른다. 10년의 긴 세월이 지나 ‘그 소녀’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녀는 내 인생에 가장 좋은 친구이자 동역자이며 안식처였다. 외롭게 자란 나는 그녀를 만나 아들 둘, 딸 하나 그리고 아들 둘에게서 손자 셋, 손녀 하나를 얻었다. 이런 나에게 친구들이나 선후배 목사님들은 늘 “박순영 목사는 행운아야.”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운(運)이라고 하는 것, 행운이며 운수라고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 보잘것없어지고 가진 모든 것이 허무해지는 한계를 알기 때문이리라. 삶의 신비를,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설명할 수 없을 때 그래도 납득하고 싶은 이유를 찾는다면 행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은 이후 깨닫게 되는 것은 단 한마디 “오직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이리라. 나의 실력과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출발
아내와 함께 오래전부터 의논하며 준비하던 끝에 교회의 새로운 리더십을 세우고, 선교지를 건강하게 순회하며 격려하기 위해 3년 조기 은퇴를 결심하였다. 마침 조기 은퇴를 할 수 있도록 코로나바이러스가 시대를 갈라놓았고 교회에서는 1년 전부터 당회원들이 섬세하게 예우를 준비하여 새로운 삶을 열어갈 수 있도록 주택과 생활비 지원을 해주었다. 은퇴식에서는 모든 형식을 거두어 내고 간단한 예배와 〈송정미 헌정 콘서트〉로 함께했다. 교단에서는 해외선교위원장의 경험을 살려 자유롭게 선교지를 찾아가 상담하고 가르치고 격려하라고 ‘순회선교사’로 임명하여 파송장을 수여해 주었다. 그리고 은퇴식의 순서지에 글을 싣고 짧은 다섯 마디로 인사를 하였다.
살포시 숙인 머리에 작은 별처럼 빛나는 안개꽃 화관 / 가녀린 손끝 한 줌 프리지아의 노오란 흔들림이 / 은은한 향기로 다가오는 순간 / 아름다운 만남은 행운에서 은혜로 / 따뜻한 동행은 순결한 사랑으로 / 운명의 새 출발은 죽음처럼 변치 않는 / 한 다발의 우정이 되었습니다.
은퇴합니다.
교회를 위하여 새로운 리더십의 그늘로(隱) / 선교지를 위해 목회 사역에서 물러나(退) / 만인을 사랑하던 삶에서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삶으로
고맙습니다.
외로운 나에게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주고 / 형과 누이, 다정한 동생, 친구이며 연인이 되어 / 먹여주고 입혀주며 손잡아 주셔서
미안합니다.
너그럽게 품지 못해 마음 상하게 하고 / 찾은 양보다 잃은 양이 많고 / 주는 복에 이르지 못하고 빚진 자로 마치게 됨을
사랑합니다.
받을 자격도 갚을 능력도 없는 나에게 / 사랑으로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신 은혜로 / 먹이고 치라는 사역으로 맡기신 주님의 양들을
행복합니다.
한 번뿐인 삶의 여정에서 당신을 만나고 / 그 만남으로 자식이 되고, 형제가 되고, 친구가 되고 /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고 성도가 되고 목사가 되어 / 이렇게 사랑을 받으며 사역하고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으니
박순영|서울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 목회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하고 박사원을 수료하였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장충단교회 원로목사이며, 은퇴 이후 교단 순회선교사로 파송받았다. 「한국성결신문」 편집위원, 서울신대 법인 이사이며, 지은 책으로는 『연꽃과 십자가』, 『지는 해가 아름다운 곳』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