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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아시아 기독교] 중국 기독교, 무슬림을 만나다 04
교회와현장 (2022년 12월호)

 

  기독교에 대한 중국 무슬림의 반론- 왕정재(王靜齋)의 반기독교 문서들을 중심으로
  

본문

 

앞 글에서 필자는 1912년부터 1916년 사이에 상하이 ‘상현당’(尙賢堂)에서 길버트 리드 선교사가 주도하여 이루어진 이슬람과의 종교 대화를 소개하였다. 이처럼 선교사들과 중국 무슬림의 대화와 접촉이 날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일부 개명한 무슬림들은 기독교와의 종교 대화에 호의적인 자세로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대다수 무슬림 지도자들은 부정적인 태도로 관망하였다. 일부는 선교사들의 이러한 종교 대화 시도를 이슬람에 대한 공격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왕정재(1879-1949)와 같은 중국 무슬림 지도자는 공개적으로 반기독교적인 반론 문서들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종교 대화, 즉 호교론(護敎論)을 중심으로 한 종교 대화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이 글에서는 왕정재의 활동을 중심으로 중국 선교 초창기에 중국 무슬림이 가지고 있던 종교 대화의 태도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무슬림 대학자 왕정재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

왕정재는 중국 이슬람 역사에서 현대 중국의 ‘4대 이맘’(四大阿訇)으로 칭송받는 네 사람 중 하나이다. 1879년에 텐진 청진사의 이맘 가정에서 태어난 왕정재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아라비아어와 이슬람 경전을 배웠고, 1922-23년에 홍콩, 싱가포르, 인도의 뭄바이, 이집트의 수에즈를 거쳐 알아즈하르대학에 입학하였다. 1923년 가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성지순례를 마친 후 아라비아 여러 나라와 이스탄불 등지를 순례하면서 근현대 이슬람교 개량주의 사상을 배웠다. 그리고 아라비아어 경전 600여 종을 수집하거나 필사하여 나중에 위대한 경전 번역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반을 닦았다. 1927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텐진에서 「伊光」(이광, 이슬람교의 빛)이라는 월간지를 창간했는데, 이 잡지는 당시 중국 무슬림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이슬람 종합간행물이 되었다.
왕정재는 무슬림 가정에서 성장한 중국 이슬람 성직자이지만, 처음부터 기독교에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기독교를 존중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우며, 특히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한 체계적인 호교론을 잘 알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고 말하기도 했다.1
그러나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과 무함마드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상황을 목도한 후 왕정재의 태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에 분노하기까지 하였다. 처음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교를 배척하고 비방하는 원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 답답함을 이렇게 호소하기도 했다.

예수교도들이 우리 종교를 배척하는 일에 모든 힘을 다 쏟고 있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구나! 우리가 과연 그들의 선교를 방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의 종교적 열심이 너무 뜨거워서 우리 종교와 싸우려 하는 것인가? 우리 종교를 그들의 종교에 합병시켜 예수의 도(耶道)의 행복을 함께 누리게 하려는 것인가?2

그리고 얼마 후 왕정재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교를 비방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를 비방하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종교는 세상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번성하여 모든 성인 중 가장 큰 성인인 무함마드에 이르기까지 이미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고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으며(風靡) 많은 믿는 자들이 일어났다. 오늘날 거친 파도가 강물을 하늘에까지 치솟게 하듯 서로를 도태(淘汰)시키려는 시대를 보면 그 원인이 복잡하여 일일이 언급할 수 없지만, 우리 종교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틈만 나면 비집고 들어와서 제멋대로 공격하고 우리 종교를 점점 사라져 없어지게(消滅) 하는 것을 자신들의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다.3

왕정재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 대선지자 무함마드를 비방하고 쿠란을 모독하는 행위에 대해 특히 분노하였다.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이래로 선교사들은 이슬람교에 대해 입을 다물고 전혀 언급하지 않다가, 최근에 와서는 예전의 그런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오히려 이슬람교에 대해 아무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이렇게 저렇게 말한다. 오호라! 참으려고 해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4

이때부터 왕정재는 이슬람 입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비판과 공격에 반박하기 시작하였고, 당대 중국 무슬림 중에서 가장 앞선 호교론자가 되었다.

왕정재와 『回耶辨眞』, 그리고 『回耶雄辯錄』

왕정재가 본격적으로 반기독교적 변증을 시작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자료는 『回耶辨眞』(회야변진,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진리 분별)이라는 책이다. 1910년 왕정재는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던 무슬림 대학자 왕관(王寬, 1848-1919)을 방문하여 그의 서재에서 이 책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무슬림 인도학자 라하마트(Mawlana Rahmat Allah Kayranawi, 1818-91)와 독일 선교사 판더(Karl Gottlieb Pfander, 1803-65)가 1845년 인도 콜카타에서 진행한 ‘기독교 대 이슬람’의 격렬한 논쟁 내용을 그 현장에 있었던 무슬림들이 아랍어로 기록하여 정리한 책이다.5
이 책을 얼핏 살펴본 왕정재는 그 자리에서 “이 책이야말로 기독교에 맞설 강적(敵)이로구나.”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흥분 속에서 이 책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중국인들에게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참 모습(眞相)을 밝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나중에 왕정재는 『回耶辨眞』의 “역자의 글”에서 이 책을 처음 접할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저에게 낯선 종류의 책이라 호기심에 펼쳐 읽기 시작했는데 크게 놀랐습니다. 내용은 회교(回敎)와 예수교 두 종교가 서로 쟁론하는 문제였고, 문제들에 대한 논의의 범위가 남김없이 철저하였습니다. 내려놓기 아쉬운 나머지 떠날 때 갖고 나왔습니다. 제 나름으로는 음식을 먹듯이 경전들을 탐닉한 지 여러 해 되었지만 오늘 우연히 이와 같은 진기(珍奇)한 보배를 얻었으니 제가 얼마나 기뻤을지(忻忭)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경전을 한 오리 한 오리씩 분석하였는데(條分縷析) 구절구절마다 정곡을 찌르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일갈하고 있습니다.(當頭棒喝) 그래서 이 책을 번역하여 이 세상에 상대방과 우리(彼我)를 명료하게 알리고 중상모략의 망발(言)에 현혹되지 않게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6

무슬림과 그리스도인들의 극렬한 분쟁을 야기하지 않으려고 왕정재는 아랍어 『回耶辨眞』 전체를 완역하지 않고 그중에서 쿠란과 성경의 정경(正經)에 관한 논쟁 부분만 발췌하여 『回耶雄辯錄』(회야웅변록, 이슬람과 기독교의 웅변록)이라고 제목을 정했다. 그리고 이 책의 역자 서문에 “우리 종교(이슬람교)의 신앙인의 마음(人心)을 굳게 붙잡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종교적 범위에서 논하려고 한다.”라고 출판 목적을 밝혔다.7 『回耶雄辯錄』은 1914년 텐진에 있는 신종신문사(晨鐘報館)에서 출판되었다.
『回耶雄辯錄』이 출판될 즈음에 상하이 광학회(廣學會)에서 『回敎考略』(회교고략, 회교에 대한 간략한 고찰)이라는 책을 재판(再版)하는 일이 있었다. 『回敎考略』은 1900년에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길리브레이(Donald Mac Gillivray, 季理斐, 1862-1931)가 편역하여 출판한 책인데, 이슬람교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를 담고 있다. 이슬람교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일부 있지만, 문제는 대부분 부정적인 시각으로 이슬람교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무함마드는 시리아 등지에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만나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 그리고 예수에 대해 들어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들은 것이 참되지 아니하고, 무함마드 또한 무식하여 책을 읽을 수 없었으니 진리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여 잘못된 이해가 너무나 많았다.
무함마드는 권세를 가지고 독단하였기에 공정하게(一秉大公) 통치하지 못했다. 민정(民情)을 관리한다고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전권(全權)을 혼자 잡고 제멋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았다. 한 남자가 4명의 아내를 취할 수 있다고 규정을 만들었지만 자기는 후궁 안에서(內) 아홉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첩(九妻二妾)을 두었다. 어떤 사람이 이 문제로 추궁하자 그는 하나님이 허락한 일이지 자기 뜻이 아니었다고 핑계를 대기도 했다.
(무함마드는) 종교를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종교(이슬람교)는 심히 부흥했고, 그 종교 신자들은 대부분 용맹하고 전투에 능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종교를 따르지 않으니 곧 온 가족을 학살하기도 했다. 이로부터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종교가 부흥한 것이 실질적으로는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무함마드가 전도할 때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칼로 다스렸기에 백성들이 심히 무서워했다.8


이슬람교에 대한 비판을 담은 『回敎考略』은 출판되자마자 중국 무슬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그래서 당시 광학회 대표 리처드(Timothy Richard, 李提摩太, 1845-1919) 선교사는 이 책의 인쇄판을 폐기하고 다시는 출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이 책이 1914년에 재판되어 발행되니 중국 무슬림들은 다시 반발하며 일어났고, 왕정재는 특히 격분하였다. 그리하여 왕정재의 『回耶雄辯錄』 출판은 『回敎考略』에 대한 적극적인 반격이 되었다. 아울러 기독교의 도발에 자극을 받은 왕정재는 아랍어 『回耶辨眞』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번역 작업에 박차를 가했고, 1920년에 완성한 원고를 가지고 베이징의 청진서보사(淸眞書報社)와 출판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3월에 중국어로 완역된 『回耶辨眞』이 출판되었다.

왕정재의 기독교 비판

왕정재의 『回耶雄辯錄』은 “라하마트와 판더의 종교 변론의 발단”, “라하마트와 판더가 주고받은 각각의 편지 9통”, “변론의 수정”, “제2차 변론” 등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왕정재의 중국어 『回耶辨眞』은 총 6장으로 되어 있는데, 제1장은 “신구약을 논함”, 제2장은 “신구약 원문의 변형”, 제3장은 “쿠란의 폐지 주장을 논함”, 제4장은 “삼위일체론을 반박함”, 제5장은 “이슬람교의 중요 문제들을 논함”, 제6장은 “무함마드의 신성함과 기독교도들의 각종 비방 모독을 논함”이다. 왕정재가 편역한 이 두 권의 책은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요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왕정재는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獨存)하는 성질(性質)과 준수하는 범위가 있다. 그러므로 서로 통합하거나 서로 다툴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로 통할(通一) 이유는 절대로 없다.9

둘째, 왕정재는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성경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슬람교와 기독교 신자들은 서로가 상대방이 엄격하게 지키는(嚴守) 종교 경전을 인정하지 않는다. 저들(그리스도인들)은 쿠란이 무함마드를 주(主)로 계시하는 참 성경(眞經)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 종교(이슬람교)가 저들의 신구약을 성경으로 믿지 않는 것과 똑같다.10

왕정재가 볼 때, 신구약성경은 거듭되는 수정과 변형을 거쳤기에 이미 최초의 원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교의 신구약은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천하에 호소하지만 서로 모순되는 것이 많고 거짓되거나 틀린(譁錯) 부분이 너무나 많아서 우리 종교는 그것을 믿기를 거부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마치 뜨거운 숯불과 차가운 얼음처럼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두 종교를 하나 되게 하려는 것은 그 경계(畛域)를 허물려는 것인데 도저히 어렵지 않겠는가?11

왕정재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고치는 행위가 현재진행형으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의적으로 성경을 고치는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민국 7년(1918년) 여름 내가 텐진 기독교청년회에 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 미국인 총간사 혁서만(赫瑞滿, Hall Raymond, 1884-1966) 씨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혁 씨는, 성경은 그동안 다듬고 고치는 작업들이 있었고 이후에도 수시로 변경될 수 있으며 마땅히 끊임없이 바뀔(更易)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했다.12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수정하고 바꾸는 행위는 기독교 경전의 본래 모습을 엄중히 훼손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하나가 되는 것’(合爲一體)에 방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셋째,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비논리적 교리라는 것이다. 왕정재는 자신이 1927년에 창간한 월간지 「伊光」 제4기에 “사람이 만들어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미신에 대한 변증”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왕정재는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무슬림은 종교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모두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 교리가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융합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주장하였다.13 그리고 상현당의 종교 대화를 주도하던 선교사 길버트 리드(이가백)가 주창한 ‘모든 종교가 하나로 귀결됨’(萬敎歸一論)을 강하게 배격하였다.

십수 년 동안 기독교 목사 이가백 등이 만교귀일론(萬敎歸一論)을 부르짖으며 우리 종교과 연락하는데, 특히 주의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 종교에 인물이 없고 농락하기 쉽다고 생각하며 나와 같은 무슬림들을 눈 안의 가시같이 여긴다. 그리고 회유(懷柔)의 수단으로 우리를 예수교에 꼬이려 하여 교류를 제안하기도 하는데, 이는 미친 사람이 꿈 얘기를 하듯 억만 년을 그렇게 한다 해도 아무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 두 종교는 숯과 물과 같아서 각자 추구하는 바도 다르고 서로 반대의 길을 달린다. 천만 가지 단서를 제쳐놓고서라도 삼위일체설은 두 종교가 하나로 통일되는 데 막대한 장애물이 된다.14

왕정재와 송즉구의 종교 대화

비록 왕정재는 이슬람교에 공격적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반감을 가졌지만 그래도 종교 대화의 문을 완전히 닫아놓은 것은 아니었다. 1924년 6월 8일, 왕정재는 지인의 소개로 당시 유명한 그리스도인 사업가 송즉구(宋則久, 1867-1956)를 만나 텐진신교육출판사(天津新敎育書社)에서 한 차례의 종교 대화를 나누었다. 송즉구는 텐진에서 으뜸가는 방직회사를 소유한 성공한 사업가일 뿐만 아니라 텐진상공회 이사장, 텐진국민회의촉진회 회장 등을 역임한 사회활동가였으며, 1921년에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할 정도로 독실한 그리스도인이기도 했다.15
왕정재와 송즉구의 종교 대화에는 12명의 그리스도인과 3명의 무슬림이 동석하였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왕정재는 송즉구에게 “담론(談論)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변론(辯論)으로 할 것인지”를 물었다. 왕정재가 ‘담론’이라면 각자 자유롭게 주제를 정하여 자기의 견해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변론’이라면 각자 상대방의 약점을 지적하고 그 약점에 대해 반론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자 송즉구는 ‘변론’ 형식으로 진행하자고 대답하였다.
송즉구의 발언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송즉구는 “기독교는 일신(一神)을 믿고 이슬람 역시 일신을 믿는다. 따라서 이 둘 다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다신(多神)을 믿기에 종교라고 치부할 수 없다.”라고 발언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종교란 무엇인지에 대해 송즉구는 “종교는 정신적·이상적인 신앙에 속한다. 이를 통해 자연계의 부족함을 미봉하기에 일종의 초자연적인 성질(性質)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이어서 노자(老子)는 중국의 대성인(大聖人)이라고 말하면서 현장에 있던 무슬림들에게 혹시 노자와 『도덕경』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무슬림 회중들은 자신들이 『도덕경』을 연구한 바가 없기에 감히 뭐라고 답변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송즉구는 이어서 기독교의 영혼, 영성수련 등의 교리를 이야기하였다.
송즉구의 발언이 길어지자 왕정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청진사에서 예배드릴 시간도 다가오니 짧게 발언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때 왕정재와 동행한 아홍 장공수(張孔修)가 송즉구에게 “노자도 일신을 믿는가?”라고 질문하였다. 송즉구는 “그렇다. 노자가 말하는 도(道)가 바로 우리가 믿는 유일신(獨一神)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왕정재와 송즉구의 대담은 다음과 같이 기록된다.

귀하의 말씀에 따르면, 노자가 믿은 유일신이 곧 도(道)이고 유일신을 믿는 것은 언제나 종교입니다. 그러면 유일신을 믿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유일신을 믿지 않는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면 기독교는요?
유일신을 믿습니다.
신은 유일(獨一)이라고 하셨는데 왜 또 삼위가 있습니까?
또 일체(一體)도 있잖아요? 비록 삼위를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체입니다.
기왕 ‘일체’라고 하면 되는데 왜 하필 삼위를 말합니까? 삼위일체, 어디에서 말하는 겁니까?
당신들이 『도덕경』(道德經)을 탄복하는지 여부를 떠나서 저는 우선 그(『도덕경』)에 따라 삼위일체를 해석하려 합니다. 노자의 『도덕경』을 따르는지 아닌지를 떠나서 우선 들어봅시다.
네. 말씀해보세요.
『도덕경』 14장에서 말합니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없음’(夷)이라 한다.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드묾’(希)이라 한다.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숨음’(微)이라 한다. 이 세 가지는 끝까지 따질 수 없는 것으로서 결국 합하여 하나(一)가 된다.”(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남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夷’(이)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리는 것이 ‘希’(희)이며, 만지지 못하는 것을 만지는 것이 ‘微’(미)입니다. 이 세 가지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당신도 나에게 묻지 마세요. 저도 당신께 묻고 싶으니까요. 그러므로 하나로 혼합되어 결국은 하나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입니까? 노자는 예수교입니까? 그가 어떻게 삼위일체를 알게 되었습니까? 노자는 어느 시대이고 예수는 어느 시대인데 말입니다.
당신들은 삼위일체를 잘 모릅니다. 저는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귀하께서 신구약을 인용하여 입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신구약으로 진리를 발휘(發揮)해야 하고, 회교도는 마땅히 쿠란으로 역할을 발휘해야죠. 『도덕경』은 도교의 것입니다.
노자는 우리 중국의 대성인입니다. 당신들이 그의 『도덕경』을 탄복하지 않으면 우리도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다음 기회에 다시 논하시죠.
우리는 진실로 『도덕경』을 연구한 바가 없습니다. 우리 회교(이슬람교)는 유일신을 믿습니다. 유일신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교에서 말씀하신 바도 준행합니다. 팔 일이 차니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고 그 이름을 예수라 지어주셨잖아요?
(격분하며 큰 소리로) 당신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기독교를 왜곡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귀하가 하신 말이지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16


결국 대화는 이렇게 서로 기분이 상한 채로 끝나버렸다. 비록 이번 종교 대화는 실질적인 진전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상대방의 종교적 사상과 주장을 알게 되었고, 보다 많은 교류와 대화가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대화 이후로 왕정재는 중국 무슬림들뿐만 아니라 중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이 알려지고 영향력도 더 확장되었다. 일부 선교사들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기도 하고 그와 교류하며 선교사들이 주최하는 강연회에 초청하기도 하였다. 영국 선교사인 메이슨(Isaac Mason, 梅益盛, 1870-1939)과도 이즈음에 서로 알게 되었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교류하기도 했다.
다음 글에서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국 무슬림을 대상으로 어떻게 문서선교를 전개했는지 집중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주(註)
1 王靜齋, “譯者自序,” 賴哈麥圖拉, 『回耶辨眞』, 王靜齋 譯 (北京: 淸眞書報社, 1922), 1.
2 王靜齋, “譯者自序,” 亞布敦拉, 『回耶雄辯錄』, 王靜齋 譯 (天津: 晨鐘報館, 1914), 1.
3 王靜齋, “譯者自序,” 賴哈麥圖拉, 『回耶辨眞』, 王靜齋 譯 (北京: 淸眞書報社, 1922), 1-2.
4 王靜齋, “譯者自序,” 賴哈麥圖拉, 『回耶辨眞』, 王靜齋 譯 (北京: 淸眞書報社, 1922), 2.
5 Mawlana Rahmat Allah Kayranawi, Izhar-ul-Haq (The Truth Revealed, 1864).
6王靜齋, “譯者自序,” 賴哈麥圖拉, 『回耶辨眞』, 王靜齋 譯 (北京: 淸眞書報社, 1922), 2
7 王靜齋, “譯者自序,” 亞布敦拉, 『回耶雄辯錄』, 王靜齋 譯 (天津: 晨鍾報館, 1914), 1.
8 季理斐 編譯, 『回敎考略』 (上海: 廣學會, 1900).
9 王靜齋, “譯者自序,” 亞布敦拉, 『回耶雄辯錄』, 王靜齋 譯 (天津: 文秀齋, 1914), 3.
10 王靜齋, “譯者自序,” 亞布敦拉, 『回耶雄辯錄』, 王靜齋 譯 (天津: 文秀齋, 1914), 3.
11 王靜齋, “譯者自序,” 賴哈麥圖拉, 『回耶辨眞』, 王靜齋 譯 (北京: 淸眞書報社, 1922), 2.
12 賴哈麥圖拉, 『回耶辨眞』(上), 王靜齋 譯 (北京: 淸眞書報社, 1922), 85.
13 王靜齋, “人造上帝耶蘇基督迷信辨,” 「伊光」 第4期 (1927年 12月).
14 賴哈麥圖拉, 『回耶辨眞』(下), 王靜齋 譯 (北京: 淸眞書報社, 1922), 12.
15 宋則久, “吾爲什作基督徒,” 中華續行委辦會, 『中華基督敎年鑒』 第6輯 (北京: 商務印書館, 1921), 248-249.
16 “王靜齋阿衡與宋則久先生的對話,” 「明德月刊」, 第6期 (1924).


문영걸|목원대학교(교회사)와 북경대학교(종교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 지식계층의 기독교 이해” 등의 논문이 있다. 제주반석감리교회 담임목사이며, 미도(美道)중국선교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2023년 1월호(통권 7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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