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나의 목회 수기]
교회와현장 (2022년 12월호)

 

  지나온 길 돌아보니
  

본문

 

유년 시절

나는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시골 농부의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51년생이니,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이다. 태어난 곳은 전북 완주군 화산면에 있는 성가막골이었다. 우묵한 웅덩이처럼 생긴 지형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빼꼼히 하늘만 바라보이는 작은 동네였다. 지리산 자락인지라, 어린 시절에는 인민군들이 이따금 밤에 내려와 식량을 약탈해가곤 하였으므로 어른들이 모이면 ‘빨치산’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내가 태어나기 바로 전에, 아버지는 탄약을 나르는 노무자로 징발되어 전투 현장에 투입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탄광 노무자로 끌려가 갖은 고생을 하다 해방이 되어 구사일생으로 귀국하였는데, 이제는 전쟁의 노무자로 붙잡혀 간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내와 어린 두 자식이 눈에 밟혀 탈영을 했다. 집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언제 경찰에게 붙잡혀 갈지 모르는 불안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솜니(이리, 오늘날의 익산)의 어느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가 일을 해주고, 가끔 밤에만 수십 리 떨어진 집에 잠깐 왔다가 돌아가곤 했다.
전쟁이 끝나고 아주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생계를 꾸려갈 일도 막막했다. 아버지는 살길을 찾아 암중모색하던 중 충남 논산의 한 시골마을에 살고 있던 이종사촌 형을 의지해 살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우리 가족은 이사를 떠났다. 이삿짐이라야 장정 두 사람이 지게 두 개에 짊어진 짐이 전부였다. 낡은 장롱 하나, 무쇠 솥단지와 그릇 등 단출한 살림살이, 농기구 등이 전부였을 것이다. 지금은 차로 30분도 걸리지 않는 16km의 가까운 거리이지만, 교통수단이 없던 당시는 산을 넘고 들길을 지나 시냇물을 건너, 걷고 또 걷는 머나먼 길이었다. 지게로 짐을 지고 가는 어른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길이었겠지만, 서너 살 된 나와 두 살 위 형에게는 까마득히 먼 길이었다. 가다 지쳐서 “얼마나 남았어요?” 하고 물으면, “십 리만 가면 된다.”라는 대답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완주의 성가막골에서 논산의 병암리까지 이삿길의 반은 전라도 사람들이, 나머지 반은 충청도 사람들이 짐을 날라다 주었다. 마련된 집이 없으니, 어느 할아버지 댁 사랑채에 이삿짐을 풀었다. 지대가 낮아 장마가 시작되면 집 앞 도랑이 넘쳐 방안에까지 물이 차는 그런 집이었으니, 부모님의 고생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 집의 출애굽이 일어났고, 우리 가족에게는 새로운 삶이 펼쳐졌다.
9살에 가야곡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집에서 5km쯤 떨어져 있는 학교였는데, 큰 산을 하나 넘고 진흙 길을 지나 개천을 건너야 하는 험한 길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험한 등굣길을 매일매일 다니는 일은 어린아이에게 고된 일이었다. 배가 고프니, 집에 돌아오는 길에 토종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구워 먹고, 밀이나 보리 이삭을 잘라 모닥불에 그슬려 먹었다. 초겨울에는 농부가 캐다 놓쳐 땅속 깊이 숨어 있는 고구마를 들쥐가 먼저 찾아내 파먹은 흔적이 있는 곳에서 남은 고구마 조각을 캐냈고 그것으로 허기를 달랬다. 산딸기, 오디, 삘기, 찔레 순, 칡뿌리는 시골 아이들에게 자연이 제공하는 요긴한 간식거리였다. 초여름에 소나무의 연한 순을 잘라 겉껍질을 벗겨내고 그 밑의 부드러운 껍질(송기)도 벗겨 먹었는데, 떫어서 맛은 없었다. 덫을 놓아 잡은 쥐의 껍질을 벗겨 장작불에 구우면 최고의 별식이자 영양식이 되었다. 제 살만 아니면 무엇이든지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요즘 세대는 상상도 못하겠지만, 60여 년 전 이 땅은 그렇게 궁핍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어려움을 버티고 이겨내며 삶을 이어갔다.
그 시절, 아이들은 너나 없이 하얀 콧물을 줄줄 흘리고 다녀서 초등학교 입학생은 앞자락에 손수건을 차고 다녔다. 아이들의 머리 한 부분이 헐어 머리털이 뭉텅 빠지기도 하고, 몸에 종기가 생겨 고름을 짜내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단백질 부족으로 인한 영양결핍과 비위생적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독교와의 만남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점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에는 옹기 공장이 있었는데, 옹기를 구울 때는 가마에서 푸른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희뿌연 연기가 장관이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와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논산평야를 가로질러 가는 기다란 증기 기차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바라보는 것 외에 볼거리라고는 없는 깡촌에서 옹기점 불 지피는 날은 대단한 구경거리가 있는 날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을까?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초가집만 있는 마을의 옹기 공장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색다르고 아담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이 있고, 벽이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제법 번듯한 양옥 건물이었다. 안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여 창밖에서 발돋움을 하고 들여다보니, 생소한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훗날 그 그림들이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진 예수, 성모 마리아, 성만찬 예식 등을 표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으나, 그때에는 그 특이한 그림들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역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조선 시대에 천주교가 커다란 박해를 받자 독실한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깊숙한 시골로 들어가 옹기를 만들며 생계를 꾸려갔는데, 바로 그곳이 그렇게 생겨난 ‘점촌’ 신앙인들이 미사를 드리는 공소(公所)였던 것이다. 아이들은 도공이 발로 물레를 돌돌 돌리며 진흙으로 그릇의 모양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마냥 신기하여 그곳에서 쭈그리고 앉아 그 과정을 구경하곤 하였다.
가을이면 어머니와 함께 산에 올라 도토리를 주웠다. 도토리로 묵을 쑤어 가족들이 먹기도 했고, 점촌에 가지고 가서 묵을 내어주고 옹기를 받아오는 물물교환을 하기도 했다. 후한 인심 덕에 크고 작은 옹기를 여러 개 받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면, 장독대에 진열해놓고 흐뭇해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난다.
당시 시골에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그것으로 끝이었다. 도시의 중학교로 진학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지만, 초등학교마저 제대로 마치지 못하는 친구도 있을 정도였다. 나는 도시로 나갈 형편도 못 되고 도시에 사는 친인척도 없어 엄두도 못 냈고, 면사무소 근처에 그리스도인 선각자 강인수가 세운 인수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중학 과정을 가르치는 고등공민학교였는데, 교목은 없었지만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한 학교여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게 했고, 찬송가도 가르쳤다. 그때 자주 부른 찬송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580장)이었다.
중학교 등굣길 역시 5km쯤 되었다. 평지길이라 험하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다니기에 외로움을 느꼈다. 무료함을 달래려고 휘파람을 불며 다니다가 나중에는 하모니카를 사서 열심히 불고 다녔는데, 당시 유행하던 뽕짝 노래를 다 부를 수 있었다.
어느 날, 이모네 집에 갔다가 그 집 삼촌들이 보던 셰익스피어 전집을 받아 왔는데, 만화만 알던 내가 비로소 독서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원래 책을 좋아하던 터라 학교를 오가는 길에 전집을 다 읽었는데, 한 장 한 장 책장 넘기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꿀맛이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는 햄릿의 고민은 나의 고민이었고, 오필리아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소년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교에 다녔으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영어와 수학은 지레 겁을 먹고 아예 포기했다. 그러던 중에 중학교 졸업 때가 다가왔고 진로를 정해야 했다.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배우지 않으면 바보 된다.’, ‘사람답게 살려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에 꽉 차올랐다. 아버지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며 딴생각 하지 말라고 하셨으나, 나는 지긋지긋한 가난과 무지, 내일이 보이지 않는 농촌의 삶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담임선생님의 주선으로 공주에 있는 영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미국 선교사 월리엄이 세운 미션스쿨이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그 학교에서 나는 기독교를 제대로 만날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전체 학생들이 모여서 드리는 채플이 있었고, 성경 과목도 정식 교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은 학급에서 진행하는 아침 기도회가 있었는데, 나는 그런 기독교적인 분위기가 마냥 좋았다. 주일예배, 학생회 예배는 물론 새벽기도까지 열심히 다니니, 학급 친구들은 나를 대단한 신자로 여겨 기독대의원으로 뽑아주었다. 실은 기독교적 배경에서 성장한 것도 아니고 교리나 성경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는 논산 촌놈인데 말이다.
기독대의원은 아침 공부시작 전에 학급예배를 주 2회 인도해야 했는데, 맨 처음 예배 인도를 위해 급우들 앞에 서니 교실을 꽉 메운 60여 명 급우들의 120개의 눈이 내게로 모아져 ‘저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쳐다보는 듯했다.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눈앞이 캄캄해져 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중언부언 뭐라 말하기는 했는데, 무슨 말씀을 전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학급예배 인도를 거듭할수록 청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점점 조리 있게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신학의 길로

그렇게 점점 기독교 신앙에 눈을 떠갔다. 일주일 내내 책 속에 묻혀 살다가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중을 깨우치는 목사의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또한 목회를 성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크게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신선놀음’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신학교에 가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성적이었다. 수학과 영어가 바닥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수학은 포기해도 될 것 같고, 영어만 열심히 하면 될 듯했다.(수학이 빠진 학문 탐구는 그 자체로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오랜 후에 깨달았다.) 그래서 제일 쉬운 영어 교재를 하나 사서 마음먹고 공부를 시작했다. 단어와 문장을 소리내어 반복해서 읽고 외우니, 처음에는 생소하던 단어들이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점점 영어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자신감도 생겼다.
1972년에 목원대학(대전감리교신학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신학교 시험 보는 날, 낯선 숙소에서 홀로 자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거의 죽다 살아났으니, 그 후 인생은 어차피 덤인 셈이다. 신학의 세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틈날 때마다 도서관에 들러 신학서적은 물론 사회과학책을 탐독했는데 「기독교사상」, 「신학사상」, 「씨ᄋᆞᆯ의 소리」, 「사상계」, 「신동아」는 신학생 시절부터 월간 필독서였다.
대학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1970년대의 척박한 현실에서 농어촌 출신 학생들이 감내해야 하는 경제적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대학 시절의 낭만을 노래하며 즐길 여유가 없었다. 기숙사는 냉난방이 전혀 되지 않았다. 한겨울에 연탄난로조차 없는 방에서 잉크병이 얼어 터지기도 했다. 학교에서 제공한 ‘유담쁘’(미식축구공처럼 생긴 플라스틱 물통으로 ‘물돼지’라고도 했다.)에 더운물을 채워 끌어안고 겨우 잠을 잤다. 2학년 때부터 대전 선화동에 있는 선화교회(이준용 목사)에 나가 주보를 편집하고 학생회 교사로 일하는 등 목사님의 목회를 도우며 교회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기숙사 식비를 해결하며 견뎌냈다. 경쟁률이 꽤 높았던 군목 시험에 도전하여 합격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유신이 선포되고, 학교 내에 무장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대학가에는 독재에 항거하는 데모가 그치지 않았고, 학교 분위기는 뒤숭숭하여 학업에 전념하기가 어려웠다. 어떤 학기는 학교 문을 아예 닫고 조기 방학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목회 인생 46년

1970년대 초반만 해도 목회자가 많이 부족해 농촌의 경우 신학생 시절에 이미 청빙되어 목회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1975년 4학년 여름에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구로감리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아 첫 목회를 시작하였고, 1977년도에는 인근 지역인 부적면에 세워진 개척교회였던 부황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만 해도 농촌에 어린이와 청년이 꽤 많아서 교회학교와 여름성경학교, 청년회가 성황을 이루었다. 목회를 하면서 동시에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을 모아 중학 과정을 가르치는 대명고등공민학교에서 지리와 사회 과목을 가르치기도 했다.
1979년 4월 13일, 남부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군종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하였다. 4개월여 교육과정을 거쳐 육군 중위로 임관하였고, 전방 27사단 78연대 군목으로 배치되어 가슴 뛰는 군종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특히 연대장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사역에 많은 힘이 되었다. 그해 10월 26일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부하의 총격을 받아 서거했다. 이후 박정희를 아버지라 추앙하던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했는데, 민주화를 부르짖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등 지독한 군부독재를 이어갔다. 집권의 정당성이 없었던 전두환은 보안부대 요원들을 동원하여 민·군을 감시하고, 협박하는 정보정치를 했다. 보안부대 중사가 보안을 빙자하여 연대장과 군수 앞에서 안하무인 횡포를 부렸던 것이다. 그들은 첩보기관을 촉수로 이용한 전두환의 충성스러운 졸개들이었다. 그들은 종교행사(예배, 미사, 법회)마다 출석하여 설교나 강론 내용을 상부에 보고했고, 권력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시비를 벌였다.
로마 황제를 주로 고백할 것인가, 예수를 주로 고백할 것인가 기로에 섰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상황이 1980년대 대한민국 군대에서 되풀이되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불의한 권력의 개가 될 수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지만, 더러는 그 권력에 순응하며 승승장구한 이들도 있었다. 군부는 권력에 대한 비판을 두려워했기에 종교행사를 껄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전투 휴일’이라는 제도를 통해 아예 주일을 없애려고 했다. 요일을 돌아가며 하루씩 휴일로 정해 종교활동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그 일을 주도한 인물이 나의 모교이자 조병옥, 유관순 등 애국자를 배출한 영명고 출신의 보안대 준사관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후 그는 민정당 국회의원까지 되었다. 당시는 권력에 충성을 다하면 하급 군인도 벼락출세를 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당시 병사들에게 선거는 중대장에게 기표한 투표지를 보여주고 투표함에 넣는 공개투표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정훈장교 이지문 중위가 이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비로소 민주적인 비밀투표가 시행되었다. 또한 정보부대에서 복무하던 윤석양 일병은 주요 정치인을 사찰한 기록이 담긴 파일을 공개했는데, 이로써 진정한 민주주의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이렇듯 역사는 낮은 자리에 있으나, 할 말을 하는 한두 사람에 의해 변혁된다.
대부분의 동기 군목들은 ‘전두환에게 충성할 수 없다.’며 의무 연한만 마치고 전역했으나, 나는 군대 밖이나 안이나 상황은 그다지 다르지 않으니, 군대 안에서 견뎌보자고 오기를 부렸다. 그렇게 1981년 8월 원주 ○○사단 예하 대관령 ○○○연대로 발령이 났다. 휴가 갔던 연대 병사가 부산의 어느 다방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18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는데, 사고 예방을 위해 군목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군 사령부에서 나를 그리로 보낸 것이다.
당시 ○○사단의 주요 임무는 삼청교육대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훈련을 마친 삼청교육대원들은 대관령 ○○○연대로 보내졌고 훈련과 함께 대관령 요소요소에 참호 파는 일에 동원되었다. 나는 인격 지도 교관으로 그들에 대한 교육과 위문을 맡았다. 삼청교육은 전두환이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국민의 인권을 무참히 유린한 국가적 폭력행위였다. 몸에 문신이 있으면 무조건 잡아들였고, 심지어 16세 소년까지 잡아 왔다. 사단에 가면 악을 쓰며 목봉체조를 하는 삼청교육대원과 그들을 걷어차는 조교들을 볼 수 있었고, 나는 ‘이 암울한 시대가 언제 끝날까.’ 탄식하며 한숨을 쉬곤 했다. 차마 불의를 고발하지는 못했고, 위로의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무력감으로 견디기 어려운 날들이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51후송병원, 공병학교, 5사단, 50사단, 11사단, 8군단, 9군단을 거쳤다. 국군의무사령부를 마지막으로 20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1999년 4월에 소령으로 만기 전역했다. 전역할 날이 다가오니 그 후의 목회가 문제였다. 인천의 모 교회 목사가 나에게 청빙을 제안했으나, 나의 이상과 맞지 않는 대형교회라서 응하지 않았다.
신학생 때는 심지어 졸업하기 전에도 청빙을 받을 수 있었기에, 전역하면 오라는 곳이 있으려니 으레 생각하고 군 생활에만 전념했는데, 실상 오라는 데가 없었다. 서울 갈현동의 어느 교회와 연결되긴 했는데, 은퇴 예정인 담임목사는 돈을 요구했다. 후임자에게 돈을 받고 자리를 파는 성직매매가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목회는 못 하겠구나.’ 하고 체념하고, 택시기사를 해야겠다 싶어 서울시 택시기사 자격증까지 따놓았다.
그러던 중 용인의 항공기지 교회에서 청빙이 왔고, 민간인 신분으로 다시 백의종군하였다. 중령, 소령, 준위 등 조종사 신자들이 꽤 있어 재정 형편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예배 환경은 상당히 열악했다. 제대로 된 예배당이 없어서 낡은 창고를 개조하여 예배를 드려야 했다. 건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곧 건축위원회를 조직, 헌금을 시작하고 모금도 했다. 8년간의 준비 끝에 1,600평의 대지 위에 160평의 아담한 교회를 건축했다. 그러나 신축 교회 강단에서 단 한 번도 설교를 하지 못한 채 준공예배 15일을 앞두고 군 사령관으로부터 해촉 통보를 받았다. 사령관의 구차한 해촉 사유를 들었으나, 실제로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껏 교단 일로 수많은 송사에 휘말렸다. 당시도 어느 목사의 어린이집 운영비 횡령 사건에 대해 ‘공교회성을 말하기 전에 개인적 도덕성부터 바로 하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바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 이어 종로경찰서 지능 수사팀으로부터 조사를 받으러 오라는 통지를 받았다. 보통 피고소인의 거주지가 관할서가 되기에 나는 용인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야 했는데, 왜 종로경찰서로 오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서에 가니 고소 건을 조사하는 척하다 ‘왜 대통령을 비판하느냐?’고 다그쳤다. 낌새를 알아차린 나는 ‘관할서 위반’ 사항을 지적하며, 용인서로 사건을 이관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용인경찰서에서 한 번, 용인지검에서 한 번 조사를 받고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졌으나, 무죄로 끝났다. 수없이 고소당했으나 한번도 유죄가 된 적이 없는데, 젊은 검사들은 사건마다 기소하여 사법부에 부담을 지웠다. 정말이지 형사소송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사회문제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인터넷이 대중화하면서 사이버 공간은 활발한 소통의 장이 되었다. 나는 국가와 교단의 현실을 보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단에서 거침없이 말했고, 적극적으로 감리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개혁을 촉구하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국가적으로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4대강에 댐을 막고 뱃길을 만든다고 야단이었으며, 굴지의 회사를 위장 소유하면서 부정 축재를 하고 있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하며, 대중을 호도하던 거짓말쟁이가 대통령이라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장로인 사람이 ‘도덕보다 경제’를 우선시하는 것에 참담함을 느껴 ‘떡(경제)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도덕이 무너지면 경제도 무너진다.’고 군인교회 강단에서 수차례 설교하였고 인터넷에도 올렸다.
감리회 내에서는 K목사가 교단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종교 간 대화와 토착화에 관심을 두었던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 교수를 종교다원주의자로 몰아 종교재판에 붙여 출교시키더니, 또다시 박익수 교수를 감신대학교에서 축출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박익수 교수가 저술에서 대형 교회의 병적인 상태에 대해 언급한 것이 그의 비위를 상하게 한 것이다.
나는 변선환, 홍정수, 박익수 교수와 개인적인 친분도 없고 그분들에게서 배운 적도 없다. 다만 저서를 통해 그분들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학문 탐구가 한국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한국교회 성숙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던 중 공교회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한국교회 현실에 대하여 심히 우려하였다. 나는 일개 목사요 부흥사가 신학교의 학문적 방향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학문의 자유가 보장될 때에만 신학은 교회의 성숙을 위해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에 대해 시비를 거는 이들의 속내는 진보적 학문이 교회의 사유화와 세습에 방해가 될 거라는 거였다. 이를 방치한다면 한국교회는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공교회성을 잃고 있는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을 고발했다. 눈물로 자판을 적시며, 감리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온갖 압력과 비난과 협박이 빗발쳤으나, 굽히지 않았다. 나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격려하는 동지들도 많아졌다. 비판을 견디다 못한 K목사는 ‘자녀들 대학 학비를 지원해줄 테니 그만하자.’며 은밀한 유혹의 손길을 뻗치기도 했다.
유명 목사들을 공개적으로 고발한 죄(?)로 인하여 20여 회 국가 재판, 교회 재판에 넘겨졌다. 거의 10년간 한 달에 하루 정도는 법정에 출두했다. ‘성직자로 가장 많이 고소당한 사람’ 기네스북에 오를지도 모르겠다. 고소장을 받고 조사를 받고 변론서를 쓰고 정해진 시각에 법정에 출두하는 것은 여간 스트레스받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이 내게 지워진 십자가요 시대적 책무라 여기며 협박이나 회유에도 멈추지 않았다. 은근히 접근하여 제 뜻대로 조종하려 드는 자도 있었으나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욕을 먹으면 오히려 더 힘이 솟았다. 할 말을 제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무수히 고소당했으나, 재판에서 한번도 져본 적이 없다. 승소했으니 무고죄로 고발할 수도 있었고, 손해배상 재판을 걸었다면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도 그리한 적이 없다. 때리면 맞을 뿐, 복수하지는 않았다.
용인의 항공기지 교회에서 해촉된 후 약 2년 동안은 수도권의 유명 교회 50여 곳을 순례하며 강단을 잃어버린 목사의 비애를 깊이 느꼈다. 그러던 중 가려고 탐내는 사람이 없는 가평 산유리교회에 부임해서 2021년 4월까지 약 10년간을 목회했다. 60여 년의 역사가 있는 교회였으나, 젊은이들은 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교회였다. 논과 밭 아니면 교회밖에 모르고 평생을 살아오신 노인 신자들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드리고 싶어 ‘산천유람’이라는 이름으로 동서남북 곳곳에 모시고 다닌 것이 보람으로 남는다. ‘드릴 헌금이 없으니 몸으로라도 섬기자.’며 무더운 여름날, 교회 주변 풀을 깎다가 2m 정도의 벼랑에서 떨어져 크게 부상을 입고 투병 생활을 하다 하나님 품으로 돌아간 장기문 권사는 아름답고 아픈 기억을 내 가슴에 새겨주었다. 또한 평생 교회 종을 치며 충성한 김종훈 권사도 잊을 수 없다.
나는 한때 적극적으로 교단 정치에 뛰어들었다. 감독회장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싸울 때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이라도 택하자는 심정으로 어느 한 편에 섰었다. 감리회 본부에서는 용역까지 동원한 몸싸움을 수차례 반복하였다. 거룩의 표상이 되어야 할 목사들의 언행이 조직폭력배나 시정 잡배만도 못한 것을 보며 깊은 절망을 느꼈다. 한 편에 실망하고 다른 편에 섰는데, 그 다른 편 속을 가까이 들여다보니, 이편이나 그편이나 오십보백보, 오직 교권욕뿐 거룩한 영성이나 공교회를 위한 열망은 양쪽 모두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물러나 다시 혼자가 되었다.
어느 날 ‘그러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예수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믿고, 제대로 전하고, 제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 그럴 즈음 서대문에서 교파를 떠나 목사, 평신도 구분 없이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작은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후로 지금까지 함께 공부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가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 원인은 ‘진정한 예수’를 잃어버리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짜 예수’를 ‘참 예수’라고 전파하며, 사적 욕망을 채우려 하는 데 있다.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바로 알고,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몸으로 살아낼 때 예수의 꿈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다.
나는 2021년 4월, 중앙연회에서 46년간의 목회를 마치고 은퇴했다. 지난 5월부터는 분당 만나교회에서 ‘초교파 은목교회’가 시작되어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그동안 추구해온 한국교회의 공교회성 회복, 일치와 갱신을 위해 무언가 역할을 찾아보려 한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으니, 세상과 교회를 향하여 진리의 나팔 불기를 그치지 않는 은퇴 목사가 되고 싶다.

장병선|기독교대한감리회 목사이다. 목원대학교 신학과와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치유선교학과를 졸업하였다. 군목 및 군선교 사역자로 30년, 가평산유리교회에서 10년간 목회한 후 은퇴하였다.

 
 
 

2023년 1월호(통권 769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