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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심원 안병무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교회와현장 (2022년 12월호)

 

  영과 진리 안에서: 21세기 대승적 민중신학의 길
  

본문

 

* 이 글은 “한국 민중신학의 새로운 목소리”를 주제로 열린 심원 안병무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2022. 10. 17.,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마지막 강연자로 나선 김경재 교수의 강연 원고이다.-편집자

심원 안병무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 민중신학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오늘 회집된 공동주관 학술대회에서 좋은 연구논문을 발표한 신예 소장 학자들과 대회를 기획하고 준비, 추진한 임원들에게 심심한 감사와 경하를 드린다.
오늘 학술대회의 마지막 시간인데, 자격 미달에다가 민중신학자가 되지 못한 사람에게 이 중요한 행사의 마지막 강연을 맡긴 것은 잘못되었다고 뒤늦게 후회하였다. 앞서 발제한 분들보다 연장자인 탓에 민중신학 제1세대들과 동시대적으로 1970-80년대의 삶을 살았다는 특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폐회예배를 겸한 강연의 제목 “영과 진리 안에서: 21세기 대승적 민중신학의 길”을 제안한 사람은 정경일 박사이고, 나도 동의하였다. 제목을 그렇게 정한 동기를 잠시 말하고 본론에 들어가려 한다.
‘영과 진리 안에서’(en pneuma kai aletheia, 요 4:24)는 쉬운 개념이 아니다. 영(靈)이란 사실 ‘하나님의 존재양식’이자 ‘생명을 주신 이’로 고백되어 왔다. 진리(眞理)란 ‘정의와 진실’에 가깝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씀은 ‘생기(生氣)와 진실(眞實) 안에서 예배하라!’라는 말씀이다. ‘대승적’(maha+yana, 大乘的)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이 탈 수 있는 큰 운반체 수레’를 의미한다. 줄여 말하면 ‘생기와 진실 안에서,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참여하는 민중신학’을 지향하자는 의미인 것이다.

민중신학, 그리고 민중의 ‘삶의 자리’

민중신학은 형성 과정에 있는 ‘살아 있는 신학담론’이지만, 민중의 ‘삶의 자리’는 크게 변했음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교회사 혹은 신학사에서는 민중신학의 태동기를 1973-75년으로 잡는다. 그리고 민중신학은 1970-80년대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군부독재 시대에, 중앙집권적 근대화 혹은 산업화를 서두르고 군부 정치세력을 영구화하려는 야망에서 희생당하는 민중들의 인간화를 위해 싸운 특정 시대의 ‘정치적 상황신학’이기 때문에, 그 임무와 사명이 이제 끝났고 따라서 민중신학을 과거의 신학담론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서진한이 “민중신학의 태동과 전개”1라는 논문에서 명쾌하게 정리한 것처럼 1970-80년대 당시 민중신학의 열쇳말은 민중 고난의 ‘현장’, ‘체험’, ‘연대적 투신’, 그리고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운동성’이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성찰하기를,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중신학의 가장 큰 문제로서 ‘기독교 신학으로서 자기정체성 위기’와 ‘민중신학의 청중의 상실’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안병무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고 인용구로 전한다.

민중신학이 당시 땅 위에 드러난 나무에만 집중해서 말한 것은, 그 당시의 급박한 현실 상황에서의 당연하고 필연적인 담론 형식이었다.2

그러나 사실 살아 있는 나무를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는 땅 위에 드러나지 않는 나무의 뿌리,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과 생태환경을 동시에 말해야 한다. 오늘 이 폐회 모임에서는 안병무의 민중신학 활동 말년에 언급한 문제, 곧 민중신학이라는 살아 있는 나무의 뿌리와 생태학적 환경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으며, 민중신학이 태동하고 창조적으로 전개되던 1970-80년 이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좀 더 깊이 성찰하고자 한다. 그래야 21세기 민중신학이 나아갈 길의 방향을 희미하게나마 보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의 변화 속도를 감안할 때, 민중신학 초창기인 1970년대 중반과 올해 2022년 사이 50년이라는 기간, 그 변화의 질량적 무게와 의미는 엄청난 것이다.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가? 종교계 혹은 신학계 밖 시공간 역사 현실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 핵심 변수는 무엇이었는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정치·경제 이념논쟁의 상대화, 그리고 민중의 깨어남
1991년 고르바초프의 소비에트연방 해체와 1992년 중국 등소평의 사회주의적 시장개방 정책은 ‘사회주의 대 자유주의’라는 정치경제적 선악 이념논쟁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정치·경제·사회제도는 인간 공동체가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이고 방법일 뿐 선악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류는 체험했다. 한국의 민중신학은 광주민주항쟁(1980), 제주4·3특별법 국회 통과(1999), 그리고 시민평화 횃불혁명(2017)을 통하여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오랜 민중항쟁사의 기본 명제를 결정적으로 확정하였다. 이는 역사적 전환의 이정표이자, 루비콘강을 건너는 밑바탕 힘이었다.

2) 기술공학 및 문명의 발전으로 인한 대중적 정보화 실현
안병무, 서남동, 현영학 선생이 1975년 민중신학을 발표하던 때와 지금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모든 사람이 핸드폰을 사용하여 순식간에 정보를 교환하고 소통하며, 부당한 권력을 감시·고발하는 정보화 사회이다. 동시에 기술공학 및 문명의 발전은 알게 모르게 대중의 행동을 감시, 조종, 선동하며 의식의 마취를 가능케 하였고 ‘민중 현실’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단세포적 개인주의, 그리고 비판적 의식이 마비된 맹목적 ‘군중’ 시대가 현실화되었다는 말이다.

3) 생태계 파괴, 기후붕괴,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문명 종말의 위기 상황
민중신학이 태동·발전하던 50년 전과 비교하면 생태계 파괴, 기후붕괴, 바이러스 팬데믹이라는 지구촌의 세 가지 종말적 위기 현상은–50년 전 선각자들의 경고가 이미 있었으나–우리의 피부에 닿는 현실 문제로 다가왔으며, 인류는 문명과 지구 종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에 의해, 국가 권력을 휘두르는 광기의 정상배들과 금융산업으로 불로소득을 얻는 이들의 권력이 더욱더 강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사례에서 보듯이 방위산업체의 무기 판매량은 늘어가고, 미·중 패권 싸움과 남북 정권 사이의 냉기류는 젊은이들의 생명을 전쟁터로 몰아내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갈등은 50년 전에 비해 더욱더 심각하다. 남영동 안기부 고문실로 끌려가는 젊은 민주열사들은 없어졌는지 몰라도, 그 숫자보다 훨씬 많은 청장년과 민중 시민들이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는 대형 컵 속에서 죽어가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개구리와 같은 형국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4) 종교적 권위의 상실과 신휴머니즘(neo-humanism) 대두, ‘종교에서 영성’으로 관심 이동
마지막 한 가지 더 큰 변화는 계몽주의 이후로 당연시되던 세속화 과정이 절정에 도달하여 기존의 전통 종교들의 권위체계가 붕괴되었고, 기계론적이고 생물학적인 인간 이해가 득세하는 상황에서도 인간 심성 내면의 자기초월적 의식, 곧 영성체험과 삼경사상(三敬思想)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민중신학의 동반자였던 씨ᄋᆞᆯ사상, 동학사상, 대승불교사상, 인간의 초심리학 등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고 대화해야 함을 의미한다. 민중신학을 단순한 정치경제학적 해방신학 관점에서 보던 좁은 시각과 인식의 지평을 극복하고 확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21세기 대승적 민중신학이 구체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길

1) 한국 민중전통과의 합류, 특히 씨ᄋᆞᆯ사상과의 깊은 지평 융합
1970-80년대 군사정권 당시 민중신학은 인간에 대한 정치경제적 억압과 수탈, 인권이 말살당하는 현실을 해결하려 했다. 향후 민중신학은 당대의 시각을 더 넓혀서 한국 민중전통의 큰 흐름과 대화해야 하며, 특히 민중신학의 선구자 격이었던 씨ᄋᆞᆯ사상과 깊은 대화를 통해 민중신학의 ‘지평 확대’를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민중도 인간인 한, 정치경제적 소외만이 아니라 인간성의 자기초월 능력을 갈망하는 영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3
흔히 “씨ᄋᆞᆯ사상은 인간을 개인적이고 존재론적인 시각에서 보고, 민중신학은 인간을 집단적이고 정치경제적인 시각에서 본다.”라는 말로 ‘씨ᄋᆞᆯ’과 ‘민중’ 이해의 시각 차이를 강조하는데, 이 말을 오해하거나 과장해서는 안 된다.
함석헌의 씨ᄋᆞᆯ 이해는 유교 경전 『대학』의 첫 구절을 유영모가 우리말로 옮긴 것, 곧 “한 배움의 길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알어뵘에 있으며, 된데 머무름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線)에서 유래함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다석이 ‘친민’(親民)을 ‘씨알어뵘’이라 번역했고, 함석헌은 ‘씨알’을 굳이 ‘씨ᄋᆞᆯ’로 쓰자고 주장하면서 ‘ᄋᆞᆯ’ 글자 해설에서 맨 위 ‘o’은 극대 혹은 초월적 하늘을 표시하고, 아래 점 ‘ㆍ’은 극소 혹은 내재적 하늘 또는 자아를 표시하고, ‘ㄹ’은 활동하는 생명을 표시한다고 설명한다.4 계속해서 말하기를 “씨ᄋᆞᆯ은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것을 믿고, 그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압니다.”라고 천명한다. 다시 말해서 씨ᄋᆞᆯ사상의 씨ᄋᆞᆯ 이해는 단순히 인간의 존재론적·관념적 심성론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주체의식을 갖고 자신의 성장과 성숙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정치·경제·사회적 존재’라는 사실 또한 강조하는 것이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에서도 민중이라는 나무의 뿌리는 보이지 않지만 나무(민중 생명체)를 떠받치고 있는 “존재론적 지반과 능력”(파울 틸리히)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특히 한국 민중사에서 근대 한국의 주체적 민주운동 곧 동학혁명을 가능케 한 수운의 ‘시천주’ 사상이나 해월의 ‘사인여천’, 그리고 손병희의 ‘인내천’ 사상과의 더 깊은 대화와 교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한국 민중 전통에서는 서구적 의미에서 말하는 근대화 개념이 인간, 자연,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에서 생명의 신성함과 경이로움을 무시하고 ‘탈신성화, 탈종교화, 계량화, 물질화’해버린 것에 저항해왔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21세기 민중신학은 유교 전통이 갖고 있는 ‘인성론’과 불교 전통이 지닌 ‘연기론적 만물동체의 보디사트바론’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인간 이해의 지평을 더 확대 심화시켜 가야 할 것이다.

2) 자력적 민중구원론과 생명
21세기 민중신학은 오해가 많은 ‘자력적 민중구원론’의 본뜻을 바로잡고, 생명이란 그 자체가 고난의 존재, 대속적 존재, 연대적-유기적 ‘한 몸’인 것을 더욱 밝혀가야 한다. 민중신학은 계급투쟁의 자리바꿈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앞당겨서 다 함께 인간다워지는 ‘개벽’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이 비판받는 내용 중 중요한 한 가지는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의 죄성을 말하지 않은 채 미화하고, 예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한 ‘속죄론’을 부정하고 ‘민중 자력구원론, 민중 메시아론’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는 오해가 있지만, 민중신학자들이나 민중교회 목회자들이 이에 대해 좀 더 깊이 설명하지 못했다는 책임도 있는 것이다.
민중신학은 결코 민중을 죄성이 없는 깨끗한 존재라고 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가 당시 오클로스를 바라본 시선, 곧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 5:34),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등의 말씀에서 나타난 것처럼 민중의 인간성이 지닌 본래적 선성(善性)과 자아실현의 가능성(可能性)을 격려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교권과 정통적 교리신학이 ‘원죄론’이라는 도그마를 가지고 인간성을 꽁꽁 묶어둔 데 반하여, 죄책감과 무력감, 자아실현 포기, 역사에 대한 책임성의 상실 등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 민중 구원론이나 민중 메시아론을 말한 것이다.
생명 현실은 그 존재 방식이 누군가의 희생, 고난 위에 꽃피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 현실 그 자체가 누군가의 죄의 업보를 함께 나누어 지고 속량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깊이 보면 여럿으로 나뉜 개체이면서 하나인 전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우리 하나하나 속에 다 있는 것이다.”5 생명의 연대성과 책임성이 기독교 속죄론의 깊은 뿌리요 의미인 것이다.
민중신학이 정통적 속죄론이 범해온 역기능을 극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성급하게 기독교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예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대속적 의미’를 가볍게 처리함으로써 ‘민중 교인’들의 영성을 외면한 것은 잘못이다. 그동안 민중신학은 예수의 ‘대리적 고난’은 인정했으나 ‘대속적인 속죄론 교의’는 부정적으로 보았는데, 정통적 속죄론의 논리 구조가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적 보상 논리 프레임이었기 때문이다. 자식의 죗값을 부모가 대신 받겠다는 요청을 법원이 용납하지 않듯이, 정통신학의 대속론 교리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인격적 인간의 책임성과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에 위배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깊이 보면 전태일은 단지 구조악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당대의 모든 사람이 죽인 것이고, 전태일은 우리가 짊어져야 할 죗값을 죽음으로써 대신 치른 것이다. 미래의 민중신학은 정통적 속죄론 신학을 중세 안셀무스의 속죄이론 해석의 틀을 넘어서서 생명의 연대성과 대속성, 공동책임성, 자기희생적 사랑의 치유 능력 등의 시각에서 다시 새롭게 정립하고 정통 교회와 화해해야 할 것이다.

3) 부활 이해
기독교가 가진 정체성의 핵심은 ‘부활 이해’라 할 수 있다. 성서가 말하는 부활은 인간의 ‘실천이성’이나 ‘역사이성’의 범주와 인식론적 영역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증언한다.(행 3:34) 앞으로의 21세기 민중신학은 이러한 사실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야 한다.
민중신학은 예수의 부활을 민중의 일어섬으로 이해한다. 불트만이 부활을 인간의 실존 안에서 일어나는 ‘의미의 부활’로 내면화시켰다면, 민중신학은 죽임의 세력과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민중의 인간답게 다시 일어섬’ 사건으로 이해했다. 민중신학의 부활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만으로는 초대교회 신도들이 증언하는 부활 체험과 증언의 빛에 비추어볼 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 차원의 진리를 계몽주의적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로 국한시키려는 또 다른 형태가 되어버리는 문제를 낳는다.
물론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증언,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타난 바울의 변증, 사도행전의 첫 설교 등에서는 다양성을 넘어 차이와 모순, 충돌이 발견된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런 현상은 당연하다. 우리는 부활이라는 초월적 사건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두뇌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 영역이 현대 호모사피엔스가 경험하는 실재 경험의 기본구조인 ‘시공 4차원의 세계’에만 있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그렇게 확신하는 것은 자유이고 그 사람의 신앙이지만, 결국은 ‘실천이성’과 ‘역사이성’을 진리 판단의 유일무이한 표준으로 삼는 계몽된 이성주의자가 갖는 실재관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민중과 함께(with), 민중 안에서(in), 민중의 일어섬을 통하여(through)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민중 앞에서(before) 일어난 사건임을 최초의 제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증언하였다. 이 원초적 증언자들의 증언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계몽주의 이후 인간의 ‘실천이성’이나 ‘역사이성’의 한계 안에서만 부활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과감히 넘어서야 한다. 그래야 민중신학은 래디컬하지만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신학으로 복귀할 수 있다. 부활사건은 역사 안에서 일어났지만 ‘역사이성’이 접근하지 못하는 초역사적 사건, 곧 창조주 하나님이 일으키신 ‘창조적 비의’(創造的 秘義)로서의 신앙 대상이기 때문이다.

4) 각종 위기 앞에서의 ‘의로운 투쟁’
현대사회의 변화 속도로 미루어보건대,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앞으로 30년 내에, 2050년 내에 인류 문명과 동아시아 및 한반도의 운명이 공멸인가 공생인가 결판날 조짐이다. 특히 수많은 생명을 죽이는 자살적인 전쟁 위기, 생태환경 위기, 시민군중 속에 가려져 있는 소수자 혐오와 배제의 위기를 붙들고 민중신학은 ‘의로운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의 결성으로 그들의 목소리는 커졌으나, 민중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배제와 혐오, 차별을 당하는 소수자와 약자들은 한숨과 절망, 좌절 속에 지내고 있다. 자살하는 사람의 수가 하루 평균 36.6명, 1년에 1만 3,352명이라는 통계청의 발표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OECD 국가 중 1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2년도 대한민국 방위산업 전시회’(DX Korea 2022)–나는 이것을 ‘살상무기 제작 능력 전시회’라 규정한다.–에서 폴란드나 중동 지역 국가 등에 판매하기로 한 무기수출 계약금이 4조 5,000억 원 규모라고 자랑하고, 우리 국민은 이러한 소식에 국력이 껑충 뛰어오른 듯 은근한 자긍심을 보이고 있다. 한편 지난여름 서울과 수원에서 반지하에 살던 일가족이 장마로 인해 참변을 당한 현실에서 드러나듯, 가난한 서민들과 직장을 얻지 못한 청년들과 은행 빚으로 파산 직전인 가정들은 시한폭탄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자기도취적인 정치가들은 입으로는 ‘국민을 위해서!’라고 외치지만, 정파 싸움과 권력 쟁탈에 여념이 없다.
21세기 민중신학이 싸워야 할 최대의 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가주의에 내재한 폭력성이며, 다른 하나는 ‘신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몸을 위장한 금융자본가들의 무자비한 양육강식의 탐욕성이다. 이것들은 이미 유사종교(類似宗敎, quasi-religion) 수준으로 몸집을 불리고 막강한 권위를 지닌 현대판 우상들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지역을 피로 물들이면서 30만 명 러시아 예비병 동원령을 내렸고, 러시아 젊은이들이 국경선을 탈출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바이든, 시진핑, 김정은, 윤석열의 정치가 푸틴처럼 마키아벨리즘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걱정할 만한 충분한 조짐이 있다.

민중신학은 그 사명이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때이다. 민중신학 선구자들의 정직하고 정의로우며 용감하고 탁월했던 유산은 계승하되 오늘날 민중의 삶의 자리가 변화되었음을 직시하고 우리들의 생각의 지평을 보다 넓고 깊게 하며, 신발끈을 다시 동여매고 서로 격려하며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오직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두려워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딤후 1:7-8)

주(註)
1 서진한, “민중신학의 태동과 전개,” 민중신학연구소 편, 『민중신학 입문』(한울, 1995), 9-27.
2 위의 책, 26.
3 이 분야를 다룬 다음과 같은 저서를 참고하기를 권한다. 길희성, 『영적 휴머니즘: 종교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아카넷, 2021); 김용옥, 『동경대전』(통나무, 2021), 전 2권; 한자경, 『한국철학의 맥』(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4 격월간지 「씨ᄋᆞᆯ의 소리」 뒤표지에 실린 ‘우리가 내세우는 것’ 참조.
5 「씨ᄋᆞᆯ의 소리」, ‘우리가 내세우는 것’ 마지막 문장에서 인용.


김경재|한신대에서 문화신학·종교신학 교수로 가르치다가 정년 퇴임했다. 현재 삭개오작은교회 원로목사, 한신대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해석학과 종교신학』, 『이름 없는 하느님』, 『영과 진리 안에서』,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생』, 『틸리히 신학 되새김』 등이 있다.

 
 
 

2023년 1월호(통권 7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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