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심원 안병무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교회와현장 (2022년 12월호)

 

  심원 안병무 탄생 100주년 기념 대담: 안병무의 삶과 신학적 흐름
  

본문

 

김명수 경성대학교 명예교수
박경미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김희헌 향린교회 담임목사
서진한 대한기독교서회 사장
• 일 시 2022년 10월 27일
• 장 소 대한기독교서회

서진한 안병무 선생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독교사상」에서 마련한 대담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명수 교수님과 박경미 교수님은 한국신학연구소에 근무하시면서 안병무 선생님과 직접적인 인연이 있고, 김희헌 목사님은 안병무 선생님이 설립한 향린교회의 현재 담임목사이자 민중신학회 회장이라, 안병무 선생님에 관해 심도 있는 대화가 오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사실 그동안 안병무라는 분을 놓고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이 자리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분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을 가진 사람도 점점 없어지니, 이후로는 안 선생님의 글, 남겨진 텍스트만 놓고서 토론을 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저는 안병무를 그분이 남긴 글로만 읽고 해석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안 선생님의 글은 권력의 탄압과 민중의 저항이 벌어지는, 그야말로 전장 같은 곳에서 짓밟히면서 끝내 항거하는 이들을 두둔하며 쓴 글들이잖아요? 현장성이 강한 글이지요. 따라서 아카데믹한 눈으로만 읽게 되면 오독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안병무를 직접 만났던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그의 글이 신학적 텍스트로만 읽힌다면 참 불행한 일일 것 같아요.
김명수 그렇지요. 안 선생님의 글을 그 시대의 현장과 안병무라는 인물과 분리해서 읽기 어렵지요.
서진한 김명수 교수님이 ‘안병무 평전’도 쓰셨으니까, 그분의 기본적인 삶의 궤적을 짧게 정리해주시지요.

gisang2212_01.jpg

안병무의 삶과 신학

김명수 안 선생님은 1922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한의사 안몽식의 아들로 태어났고, 1923년에 간도의 들미동마을로 온 가족이 이주함에 따라 거기에서 성장하게 되죠. 당시 일본군이 마을을 점령했는데, 밤에 몰래 독립군들이 찾아오곤 했어요. 그래서 선생님의 모친 선천댁이 밤이면 독립투사들에게 입을 옷과 먹을 것을 자주 지급했고, 그래서 안 선생님은 어렸을 적에 독립투사들 무릎에 앉아 그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성장한 거죠.

gisang2212_02.jpg

그리고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를 다니게 되는데, 그때 거기에서 문익환, 윤동주, 강원용 이런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김재준을 만났는데, 당시 김재준은 평양 숭인상업학교 성경교사를 하다가 은진학교로 왔어요. 김재준은 안병무의 선생이었고, 나머지는 안병무의 친구였어요. 강원용은 안병무보다 두 살 위였고요. 거기서 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에 어머니 선천댁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됩니다. 일본 대정(다이쇼)대학 문학부 예과에 입학했고, 1943년에 와세다대학으로 전학을 가서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했고요.
해방 이후 1946년에 귀국하여 서울대 사회학과를 다니면서, 지금 향린교회 장로이신 홍창의 장로와 함께 서울대학교 기독교학생회를 결성했지요. 이들을 중심으로 1946년에 ‘하나의 하나님, 하나의 신앙’이라는 의미로 ‘일신회’를 조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유무상통의 신앙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평신도 공동체를 꿈꾸고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어떻게 더불어 살 수 있겠는가를 고민했어요. 그것이 ‘향린원’이 되고 향린교회로 이어지게 됩니다.
안 선생님은 1956년에 독일 유학을 결심하게 되는데, 독일 유학 가서는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그리고 불트만에게 아주 심취했습니다. 특히 제가 안 선생님 강의를 들을 적에 실존주의에 대한 개념들이 상당히 매력적이었어요. 하이데거의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 또는 ‘실존’(Existenz), ‘현존’(Dasein), 또 ‘선택적 삶’(Entweder-oder) 그리고 ‘가능성(Möglichkeit)과 현실성(Wirklichkeit)’ 이런 개념들이었지요.
안 선생님은 불트만 신학의 특징을 ‘신학은 인간학이다.’라고 정리하셨어요. 저는 이 말에 아주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리고 ‘신앙은 이성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또한 ‘신앙과 지식, 신앙과 앎이라는 것은 서로 동시에 같이 추구돼야 한다.’ 또 한 가지는 ‘물음이 답을 결정한다.’ 이러한 불트만의 신학을 안 선생님이 전해준 것이죠.
안 선생님은 독일 유학 후 1965년에 귀국하게 됩니다. 이후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970년에 김정준 학장의 요청으로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 교수가 됩니다. 바로 그해 11월에 전태일 분신 사건이 있었어요. 이때 선생님이 충격을 많이 받았죠. 안 선생님은 전태일 사건에서 하나의 예수 사건을 보게 되고, 실존적인 신학의 방향에서 사회·역사적인 신학의 방향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의 관심이 개인의 실존이 아니라 사회 역사적인 실존으로 전이된 것입니다. 2,000여 년 전 예수 사건이 바로 전태일 사건에서 재현된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전태일 사건을 통해서 안병무는 ‘사건’이라는 것을 발견했죠. 사건이라는 것은 집단적인, 공동체적인, 복수적인 개념입니다. 사건의 신학의 단초는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1969년 「현존」이란 잡지를 창간하여 계속해서 발행해오고 있었는데요, 현존에 대한 개념으로서 ‘탈향’(脫向, Aus Auf Sein)이라는 개념을 아주 많이 쓰셨어요. 그리고 인간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어떤 길을 가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길 위의 존재’(Unterwegssein)를 말씀하셨어요.
그러다가 1975년에 유신헌법 반대 투쟁, 삭발 이런 걸 통해서 정부의 가시 같은 존재가 됐고, 1975년 6월에 문동환 교수, 안병무 교수가 대학에서 해직을 당합니다. 1976년 3월에 민청학련 사건에 관계됐던 김동길, 김창욱 교수의 석방 환영 강연회가 새문안교회에서 있었어요. 이때 저도 그 현장에 있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새문안교회가 완전히 꽉 찼습니다. 그때 안 선생님이 “민족, 민중, 교회”라는 주제로 두 시간 정도 강의를 했던 것 같아요. 전태일 사건을 언급하시고 2,000년 전의 예수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 온다면 그건 전태일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완전히 충격적인 발언이었죠. 예수의 현재화로서의, 화신(化身)으로서의 전태일 사건은 예수 사건이고 동시에 자기초월적인,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이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후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약 10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집행유예로 나오게 됩니다. 그때 감옥에서 협심증을 얻어서 결국 그것 때문에 나중에 돌아가시게 되었지요.
1984년에 학교에 복직하게 되셨는데 “예수 사건의 전승 모체”라는 주제의 논문을 그때 발표를 하셨어요. 그 논문에서 개인적인 실존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사회역사적인 실존으로서의 예수를 강조하셨어요. 그리고 예수 사건의 전승을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하셨어요. 예수 사건의 ‘담지자’ 민중, 그리고 예수 사건의 ‘전달자’ 민중, 그리고 예수 사건의 ‘해석자’ 민중 이렇게 구분했던 것이죠. 그래서 초기는 예수와 함께 살았던 담지자들, 그다음에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말씀을 전승했던, 아마 그때 안 선생님이 구체적으로는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Q(예수 육성 말씀)의 떠돌이 카리스마적 예언자들을 염두에 두고 계셨던 것 같아요. 마지막 세 번째는 마가복음의 단계에서 마가복음은 철저하게 예수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라는 것이죠.
안 선생님은 1973년에 독일교회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셨는데요. 세계 신학의 흐름을 한국교회에 소개하는 일과 한국교회의 민중선교운동을 세계에 소개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그때 한 달에 한 번씩 민중을 주제로 한 교수들 모임이 신학연구소에서 있었어요. 그게 민중신학의 새로운 산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병무의 신학적 주제들은 한 곳에 머물지 않았어요. 실존주의 신학에서 출발하여 역사적 예수, 민중 사건, 살림, 생명, 자연으로 옮겨갔어요. 특히 제가 1996년 8월, 안병무 선생님 돌아가시기 두 달여 전 우면동 자택에서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는 자연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어요. 자연의 침묵 속에서 생명의 영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인류의 구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안병무 신학의 흐름

서진한 안 선생님의 신학은 몇 단계가 있는데, 크게 보면 하나의 흐름이지만 좀 자세히 보면 각 시기 신학 사이에 약간의 결절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마지막 시기에 ‘생명’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그전과 확연히 달라요. 저는 실존주의적 신학자로서 ‘탈향’을 이야기할 때와 이후 전태일을 보고 예수 사건을 말한 시기 사이의 논리는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존주의적 사고구조가 끝까지 남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철학의 이론이나 학문의 이론보다는 그분의 삶의 자세로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학문에서는 해명이 필요하잖아요? 아마 그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인 것 같아요.

gisang2212_03.jpg

생명에 관한 신학적 성찰에 대해서도 민중신학과 자연스런 연결인지 물어볼 수 있겠죠. 말년에 안 선생님은 ‘생명’을 말씀하신 건데요. 이건 민주화운동이 치열할 때의 민중신학의 경향과 다소 다르게 느껴지지요.
안병무가 민중신학을 시작하면서 생명사상에 기반한 함석헌 등과 사상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이 생기잖아요? 함석헌의 씨ᄋᆞᆯ에 비해 안병무의 민중은 훨씬 더 사회정치적인 차원에 치중해 있었지요. 그런데 말년에 다시 생명을 말한단 말이에요. 되돌아가는 듯 보이는 측면이 있어요. 민중을 말하던 다수의 사람들이, 이 사회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은 뒤로는 생명, 생태로 사고를 넓혀갔습니다. 자연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학자로서는 그 사이의 변화에 대해 논리적으로 해명해야겠지요.
김명수 안병무의 사상을 보면 단계적으로 실존주의, 역사적 예수, 민중신학, 생명신학으로 나눌 수 있는데, 어떻게 보면 논리적인 비약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불연속적인 연속성’(unkontinürliche Kontinuität)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박경미 안병무 선생님이 보른캄의 제자였잖아요. 보른캄은 후기불트만 학파 중에서 가장 온건한 사람이고 불트만의 사상에 가장 가까이 머물러 있는 학자였어요. 안 선생님이 그분한테 배운 거죠. 그래서 안 선생님은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 결국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을 확실하게 배워 오셨어요. 당시 한국 성서학계의 수준에서 보면 우선 일차적으로 문자주의를 벗어나야 했는데, 그런 점에서 불트만의 역사비평 등이 굉장히 유효했죠. 특히 불트만의 ‘탈신화화’(demythologization)라는 게 성서 텍스트를 실존의 자기 이해로 받아들인다는 거잖아요. 그 점에서는 안 선생님이 실존주의를 받아들였다고 할 수도 있어요. 제가 보기에 안 선생님을 평생 추동해온 실존주의적 흐름이라는 것은, 사상 사조 측면에서보다는 안병무 선생님 자신이 끊임없이 자기 실존에 충실하려고 하는 측면에서 봐야 할 거 같아요. 그분은 시대의 부름과 하나님의 부름 앞에 실존적으로 충실하게, 끝까지 임하고자 하셨어요.

gisang2212_04.jpg

안병무 신학의 연속성/불연속성 문제에 관해서, 저는 안 선생님이 우리 세대와 굉장히 다르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안 박사님 하면 ‘민중신학자’를 떠올리지요. 그리고 서구 신학자들도 자기의 업적과 관련된 신학적 브랜드를 전부 갖고 있거든요. 그런데 안 박사님은 한 번도 그런 데 머물러 있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저는 안 박사님을 인생주의자라고 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이념이나 윤리적 당위 이전에, 진정으로 기쁘고 진실되게 살고자 노력했던 분이고, 상투성을 넘어 삶의 속살에 다가가고자 했던 분이죠. 그리고 ‘인생주의자’ 안병무의 가슴속에 평생 자리잡아서 언제나 살아 펄펄 뛰는 삶의 현장으로 달려가게 만들었던 것이 상투성을 넘어선 풋풋한 인간, 맨 사람 ‘갈릴리 예수’였고요.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말씀드리자면 1982년도인가 대학원 논문을 쓰면서 신학연구소에 들어갔는데, 그때 안 박사님이 무슨 주제로 논문을 쓰냐고 물어서, 역사적 예수에 관해서 쓰고 있다고 말씀드렸거든요. 그랬더니 안 박사님이 저를 지긋이 쳐다보시면서, “역사적 예수는 내 평생의 질문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는 사실 그때 굉장히 당황했어요. 당시 저는 학부 티를 채 벗지 않은 그런 어린 학생이었는데, 어른이 너무 진지하게 묻기 시작하는 거예요. 지금 돌아보면 결국 안병무 선생님을 평생 지배한 건 ‘예수’예요. 예수를 따라서 살겠다는 거거든요. ‘예수를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그 질문이에요. 유학 가서 서양의 역사비평 등의 방법을 도입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평생 추구해온 질문은 ‘예수 따라 살겠다’ 이거 하나예요.
여기에서 생명신학이 발전했을 수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미 1990년대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의 마지막 증상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안 박사님은 굉장히 예민한 분이셨고 신학적 성찰을 하는 분이셨기 때문에 결국 시대의 도전에 신학적으로 응한 것이라고 봐요. 예수 따라 살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기본적으로 그러한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무슨 신학을 한다, 민중신학을 한다, 실존주의 신학을 한다, 생명 신학을 한다 등의 개념은 사실 안 박사님에게 굉장히 부차적이었을 것 같아요.
서진한 전적으로 공감하고요. 제가 좀 다르다고 말씀드린 것은 우리가 안병무의 신학은 각 국면마다, 사회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든 자신의 경험 때문이든, 다소 다른 측면에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안병무의 신학을 특정 국면에서 통용된 몇 개의 단어로 규정하고 그것을 상징화하는 경향은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어요. 박 교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를 제대로 알고 싶고 예수를 따라 살고 싶은 열정과 노력이 안병무를 관통하는 일관성이겠지요.
박경미 그게 참 신기해요. 한국 사람이 말이에요. 그 시대에 예수를 그렇게까지 믿다니요. 그리고 안 박사님이 마지막에는 자신이 전통적인 의미의 기독교를 벗어났다고 말씀하시잖아요. 이뿐 아니라 서양의 인격신으로서의 하나님이라든가 예수를 하나의 개인 인격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신단 말이에요. 근데도 평생 예수거든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요? 저는 그게 참 신기해요.
김명수 아버지가 한학을 하셨잖아요. 그런데 아들이 예수쟁이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막 화가 나서 한번은 “너 동양 사람 아니냐. 그런데 왜 서양 사람한테 그렇게 미칠 수가 있냐. 예수보다 훨씬 훌륭한 공자도 있고, 맹자도 있고, 노자도 있고 그런데 왜 하필 예수를 믿냐?” 그렇게 비판했다는 거예요.
서진한 저는 독일로 유학 가기 전에 이미 안 선생님의 삶의 목표나 방향이 결정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분의 삶과 신학이 변주곡처럼 상황에 맞게 다양하게, 또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면서 변화되었지만 초기에 가졌던 예수에 대한 지극한 열정이 말년까지 관철된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예수에 대한 안 선생님의 그 열정이 매우 래디컬했다고 생각해요. 급진적 기독교, 급진적 신앙 말입니다. 일신회를 만들거나 향린공동체를 세운 뜻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기교회 공동체처럼 그대로 살겠다는 거잖아요. 그러한 열정이 그분의 삶 내내 이어진다는 측면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점에서 향린교회가 안병무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굉장히 크다고 생각해요.
1953년 5월에 향린교회를 세웠잖아요. 목사 안 두고, 제도교회 안 만들고, 초대교회처럼 살자는 거였죠. 굉장히 급진적이죠. 신앙으로 삶을 새롭게 하고 싶고,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거기에는 실존적 결단이 다 들어 있고, 사회적 함의가 다 묻어나요. 예수를 따라 개인의 삶의 변화만 아니라 공동체적 변화를 꿈꾼 거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이 가정을 가지고 사적 소유의 영역으로 빠져드는 걸 보면서, 자신은 결혼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결국 나이 드신 어머니의 부탁 때문에 46세에 늦게 결혼한 거였잖아요. 그러니까 그분의 사고는 사적 소유와 관계에 기반한 자본주의 사회의 사람이 아닌 측면이 있었던 거지요.
인상적인 것은 젊은 시절 안 선생님은 정말 예수처럼 소유에 얽매이지 않으며 살고 싶어했다는 거예요. 안 선생님 말씀으로는, 당시 선생님은 어머니를 모시고 단칸방에서 옷가지 넣을 사과 궤짝 하나 놓고 살았다고 해요. 세간 살 돈도 없었고 옷도 양복 딱 한 벌 있었고요. 그게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결의였을 거예요. 그분의 삶에 대한 평가는 또 다를 수 있겠지만, 그 지향은 삶의 마지막까지 이어졌다고 봅니다. 안병무에게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이런 점이 아닐까 싶어요. 그 위에 그의 신학이 놓여야지 ‘안병무의 신학’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안병무의 실존적 삶

김명수 이제 아무도 모르는 안 선생님의 에피소드 두 개를 얘기해볼게요. 제가 전두환 시절에 감옥에 갔다 왔잖아요. 전두환 정권 때 언론기본법이 만들어졌어요.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은 절대 출판사 근무를 못 하게 하는 시절이었어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저를 채용했어요. 제가 연구소에 있으니까, 감옥에서 나온 신학교 후배들이 자주 찾아왔지요. 선생님은 감옥 다녀온 후배들이 인사차 들르면, 저를 통해 금일봉을 전해주도록 하셨어요.
또 다른 한 가지는 제가 독일에서 박사 논문을 쓸 때였어요. 부심을 맡았던 교수가 민중신학에 대해서 이해가 없는 분이었는데요. 제 논문 주제가 예수 말씀(Q)을 전승했던 초창기 예수공동체의 구성원을 갈릴리 민중과 연결시키는 일이었는데요. 그는 큐(Q)를 민중공동체로 본 것을 문제삼았어요. 제가 이 사실을 선생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제자의 어려움을 들으신 선생님께서 독일까지 직접 오셨어요. 제가 속해 있던 장학재단인 선교아카데미(Missonsakademie)에서 신학부 교수들과 함께 장시간 동안 민중신학 좌담회를 가졌고, 그래서 제 논문이 통과되었지요.
서진한 그 시대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와 그에 맞선 독립운동, 또한 참혹한 전쟁과 이산의 아픔, 그리고 재건의 격랑을 몸소 겪은 분들이라,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람을 챙기고 키우며 돕는 일이 몸에 밴 분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요즘 시대와는 많이 다르죠?
박경미 맞아요. 그러니까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대하신 거예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시민운동이나 진보 운동을 큰 틀에서 살펴보면, 모두 개인의 권리와 개인의 자유에 사상적 바탕을 두잖아요. 근데 안 박사님이나 그 시대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그게 참 달라요. 요즘 화두가 된 ‘공정’의 의미 또한 자기 권리 주장이거든요. 그런데 안 박사님은 개인이 아니라 끝까지 공동체를 추구했어요. 손해 보는 거 다 감수하고 하는 거니까, 서양적으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기본적으로 ‘덕’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거잖아요. 그건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러니까 근대적 휴머니즘이 아니라 전통적인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사람들이 한 인간으로서 훨씬 고결한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의 지구적 상황 속에서 더 요구되는 품성이기도 해요.

gisang2212_05.jpg

동양 사상에 기반한 한국적인 신학, 서양의 주객도식 탈피

박경미 그러니까 안병무 선생님은 예를 들어 ‘물의 신학’, 즉 마르크스주의를 적용해서 민중신학 하는 것을 내심 절대로 동의하지 않았을 거라고 봐요. 그거는 그냥 달라요.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가 안 선생님에게는 그냥 기질적으로 안 맞고요. 단지 그 모든 논의를 할 수 있는 장을 펼쳐준 것은 유교적인, 전통적인 품성, 너른 품으로 놀이터를, 마당을 만들어준 것이지, 안 박사님은 신학을 그렇게 하지 않았거든요. 신학하는 태도가 달랐어요.
서진한 맞아요. 기본적으로 이분이 그런 성품에다가 민중신학이 사실 제도권에 있지 않고, 서남동 목사님의 말로 하면 방외신학, 광야의 신학이었잖아요. 그래서 누구든 ‘민중’이라는 단어를 놓고 말하면, 가능하면 품고 보호해주려고 한 거 같아요. 박 교수님이 말씀하신 그 부분, 유물론적 방법을 적용하려던 특정 시도에 대해서는 저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딱 잘라 부정적으로 말씀하셨지만, 공개적으로는 표현하지 않으셨지요.
개인적으로 저는 당시 안 선생님에게 혼자든 두셋이든 자리가 있을 때, 신학이 소위 정치경제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자주 말씀을 드렸고, 유물론적 논의의 수용에 대해서도 말씀을 나눴어요. 말씀을 잘하시던 안 선생님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듣기만 하고 대답을 안 하셨어요.
사실 그분이 민중신학을 하면서 ‘주객도식’(主客圖式)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 것은 서구적 방법론을 버리겠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이론 구조로서의 실존주의를 벗어난 거였어요. 실존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성 아니겠어요? 주체는 객체를 전제한 개념이고요. 주객이 분명하게 있는 구조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무슨 서구의 정치경제학, 마르크스주의를 들이미니,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당신은 여기에 대답을 끝내 안 하셨던 것 같아요.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안 선생님은 향린교회 설교를 하면서 ‘공의 신학’을 말하셨고, 그게 「신학사상」에 실려요. 저나 저와 비슷한 사람들의 요청에 답하신 거라고 생각해요.
요새 학자들은 안병무의 ‘공의 신학’을 최근에 유행한 미국의 ‘공공신학’과 관련지어 논하는 경우도 있던데, 저는 안병무를 잘못 읽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미국의 공공신학은 과거 유럽의 정치신학의 격랑에 비켜 있던 미국에서 지금에야 일어나는 정치신학의 컨서버티브(conservative)한 새 버전으로 보이기도 해요.
안 선생님의 ‘공’(公)은 그 당시 제자들이 던진 소위 사회주의적인, 한편으로는 서구적인 도전에 대한 그분의 응답이라고 생각해요. ‘공산주의’에서 ‘공’(共)은 생산 수단을 공유하는 거잖아요. 부(富)는 생산 수단에서 나오니까요. 근데 그런 것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공’(公)이라는 동양적 개념을 들고 나오신 거죠. 그 공의 근거는 하나님이에요. 공의 신학은 끝내 한국적, 동양적이려고 한 안 선생님의 사고를 보여준다고 봐요. 그리고 이것은 향린공동체를 세우던 초기의 신념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해요. 그 사고와 논리가 성공적이었나 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에요.
박경미 맞아요. 우리가 민중신학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씨알사상 함석헌, 유영모, 그리고 안창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계보예요. 그러니까 민중신학의 기원이라고 하면 1970년대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은 3·1운동 그리고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리고 안 선생님이 민중신학을 주창했던 1970-80년대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식민사관을 탈피하여 민족사관, 민중사관이 막 나올 때였거든요. 신학자가 한국 사회의 지식 담론에 비판적 주류가 돼서 당시 강만길, 한완상, 변형윤 등 해직 교수들과 더불어 논의를 한 거예요.
김명수 당대는 민족과 더불어 민중이라는 개념이 사회과학, 역사학, 예술 분야에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할 때였죠.
박경미 그것을 같이 호흡하면서, 그 사람들하고 같이 만나고 토론했던 거죠. 서남동 목사님 같은 경우는 김지하 영향을 좀 많이 받기도 했지요. 아무튼 한국 지성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고 역동적인 때였어요. 그것이 기독교 신학계의 움직임과 맞물려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맥락을 잊으면 안 되죠. 그러니까 나이로도 안 박사님이 40-50대로, 그때 한창 활동하실 때였고, 그렇게 해서 그때 신학이 정말 아름답게 꽃피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또 함석헌 선생님 책을 읽어보면 주객의 분리나, 정신과 물질의 분리나 이런 게 없어요. 그 사고방식이 서로 굉장히 비슷해요. 저는 안병무와 함석헌은 기본이 같다고 봐요.
서진한 그 전통이 내려오다가 1980년대에 사회운동이 급격하게 폭발하면서 그 언어가 살짝 낡게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어요. 그때 서남동과 안병무가 큰 범주로 보면 그분들과 같은 생각 안에 있지만, 좀 더 사회정치적 방향으로 가면서 차이가 발생하지요.
하지만 크게 보면 3·1운동 때부터 이어진 정신사적 흐름이 유영모와 함석헌 등 우리 근대사의 기독교 지성으로 이어지고, 1970-80년대에 사회적으로 민중 담론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 민속학 등의 논의가 특히나 활발한 가운데에서 그 모든 사상적 흐름과 당대의 학문 논의가 어우러졌는데, 바로 그 바탕 위에서 그 논의들을 수렴하면서 민중신학이 꽃을 피운 거죠. 기독교는 당시 운동들의 바람막이 역할을 했고 다른 사상의 울타리가 될 수 있는 때였지요. 그래서 저는 민중신학이 그 시대의 꽃이라고 생각해요. 단지 신학만이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그 시대의 꽃이었다고 생각해요.
김희헌 선생님들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여기 계신 분들처럼 안병무 선생님과 직접적인 인간관계를 많이 갖지 못했어요. 그분이 진행한 대학원 세미나 ‘누가복음서 연구’에 학생으로 참여한 정도입니다. 이번에 안병무 탄생 100주년 기념학술대회를 준비하고 개회 강연을 맡으면서, 안 선생님 논문 800여 편 중 300여 편 정도를 정독했는데요. 읽으면서 많은 물음이 생겼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안병무의 삶 전체를 통전적으로 살펴보고, 그분의 발자취가 오늘 우리에게 남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과제였어요.

gisang2212_06.jpg

예전에는 그분의 신학을 ‘민중신학’을 기준으로 삼아 해석하곤 했는데요. 그분의 삶과 논문을 연대기적으로 읽다 보니, 민중신학을 전개할 정신의 토양이 20여 년간 간도에서 가진 삶의 경험에서 비롯되었고, 그분의 민중신학의 특징이라 할 ‘사건’에 관한 사상적 틀 역시 아버지로부터 받은 한학의 영향과 유영모, 함석헌 선생으로부터 받은 노장사상 등 동양 사상과 관련되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동양에서는 인간의 삶의 방향을 묻는 물음에 답하는 ‘학’(學)만이 아니라 그것을 익히고 체화하는 ‘습’(習)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안병무 역시 그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치열한 삶의 궤적을 좇다 보니, 대단히 통전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데, 그것을 가능케 한 필생의 화두가 ‘예수’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안병무처럼 예수를 전혀 모르던 환경 속에 살던 사람이 왜 예수를 그렇게 미친 듯이 좇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병무에게는 특별한 경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민중신학 이야기』에서도 말씀하셨고, 『선천댁』에서도 꽤 긴 분량으로 강조했던 게, 초등학교 4학년 때 자기 마을 떠나서 다른 동네 친척 집에 갔는데, 거기서 교회를 처음 보았다는 거잖아요. 그때 들은 얘기가 ‘저기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렸던 사람을 믿는 곳’이라는 말이었거든요. 그다음부터는 자기 삶의 방향과 배움을 예수에게서 찾았고, 지적인 탐구만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예수를 평생토록 끈질기게 추구하시죠. 그분이 당대의 비판적 지식인이 걸었던 것처럼 사회주의적인 정치투쟁의 길로 가기보다는 종교적 공동체를 계속 실험하는 방향으로 나간 것도 그런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안 선생님이 1941년도부터 45년 초까지 동경에서 공부하고 간도로 돌아오실 때 징집을 피해서 모아산으로 오시잖아요. 거기서 했던 경험이 이후에 예수 공동체 실험을 하는 데 꽤 중요했을 것으로 생각해요. 그곳에서 6개월간 보호받는 사람이 되고, 마을 전체가 공동체가 되어서 신고하지 않고 안 전도사를 해방될 때까지 보호해주었으니, 이 경험의 영향은 꽤 컸다고 봅니다. 이게 공동체적인 생명이고 예수가 가진 힘이다, 이런 경험이지 않았을까요? 모아산에서 6개월간 전도사 일을 하는 도중 맞이하게 된 해방정국에 자치위원회를 구성해서 활동하다가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갈등을 겪고 결국 월남하는데, 이 경험이 안병무의 삶과 사상에 중요한 요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한 가지는 안병무의 사상에 짙게 깔린, 그래서 후기 사상에까지 남아 있는 실존주의의 영향에 관한 것인데, 이게 사실 서양의 철학적·신학적 실존주의와는 다르잖아요? 안병무에게 ‘실존’은 개인과 함께 공동체, 문화적인 면모보다는 사회 역사적인 측면이 강조되었죠. 거기에는 동양 사상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어린시절부터 익숙했던 동양사상의 가르침,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가르침을 예수에 관한 추구와 결합하고, 자기 삶의 모습이 이율배반적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실험했다고 봅니다.
서진한 선생님 말씀처럼, 안 선생님의 신학사상에 조금씩 변주가 있다는 데 동의하면서, 저는 그것을 안 선생님이 발간한 잡지의 변화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51년도부터 1956년까지 12집을 출간한 「야성」은 젊은 시절 동지들과 시행한 초기 실험이죠. 거기에 역사비평 이전의 순박한 청년 시절의 열정이 담겨 있다면, 1956년부터 1965년까지 유학 마치고 나서 1969년도부터 1980년 8월까지 12년간 출간한 「현존」, 이 시기는 실존주의를 넘어가면서 민중과 역사를 신학적 화두로 잡는 시기죠. 그 사이에 1973년 한국신학연구소 창립과 함께 발행된 「신학사상」은 본격적인 민중신학의 통로가 되고, 1988년도에는 폐간된 「현존」을 8년 만에 복간할 때 ‘현존’이라는 이름 대신 「살림」을 지으셨는데요. 이 이름이 뭔가를 말해주는 것 같아요. 「살림」은 실존주의를 완전히 넘어선 거죠. 한마디로 하여, 역사적 실존을 삶으로 꽃펴 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살림’ 시대는 그러니까 ‘현존’ 시기, 즉 1969년부터 1980년까지 경험한 것을 넘어서는 어떤 내용이 있어요.
그분의 논문에서 보니, 1976년도 4월에 「현존」 머리글에서 ‘사건의 신학’을 언급하셨고, 1976년 6월에 그 글을 고린도후서 11장 22절부터 33절까지 본문으로 삼아 ‘사건의 신학’으로 설교하시는데요. 그 지점이 ‘민중신학’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선 때이고, 민중의 ‘사건’이라고 하는 개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해석학적 관점을 펼쳐가시던 때라고 봅니다. 그 바탕에는 유영모, 함석헌으로부터 받은 동양사상의 영향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것이 불트만의 신학을 완전히 넘어서게 한 동력이었던 거죠.
말하자면, 안병무의 실존은 서구의 실존주의적 실존이 아니라 동양적 실존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 동양적 실존에는 ‘학’만이 아니라 ‘습’이 결합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박경미 안병무 선생님에게는 ‘지행합일’이라는 동양사상의 영향이 상당한 것 같아요. 저희 세대만 해도 초등학교 때부터 그냥 서양 학문을 계속 배웠잖아요. 그런데 함석헌, 유영모는 말할 것도 없고 안병무 세대만 해도 그들의 존재 조건 자체가 농촌을 기반으로 한 마을 공동체, 그리고 지행합일을 중시하는 전통 사상이었는데, 이 바탕 위에서 다른 사상, 다른 문화와 만나는 거죠. 이럴 때 항상 창조적인 게 나오잖아요. 새로운 것은 다른 것이 서로 부딪혔을 때 나오잖아요. 안 박사님 경우가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해요.

gisang2212_07.jpg

더 얘기하고 싶은 건, 안 박사님이 ‘사건’ 개념을 자꾸 얘기하시잖아요. ‘사건의 신학’,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고 말씀하시잖아요. 안 박사님은 예수를 평생의 질문으로 삼은 분으로서, 이제 예수를 한 인격으로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한 인격으로서의 예수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 사건을 예수와 민중이 함께한 집단적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럴 때 과거의 예수사건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만나는 사건도 그 사건과의 연속성에서 얘기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안 박사님은 항상 서구적인 주객도식의 극복을 주장하셨어요. 주객도식을 극복해서 과거와 현재의 만남이 가능하고 또 동시에 예수도 하나의 외적인 구원의 대상으로서 또 구원자로서 객관화, 대상화되지 않고요. 그래서 예수와 민중이 하나가 되는 ‘사건’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 같아요. 어떻게 보면 주관주의적인 것 같은데, 아니거든요. 그런 언어들을 통해서 주관과 객관이 그냥 만나버리는 거죠.
그런데 그걸 추진하는 심리적 동력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잃은 양 하나 찾아 나서듯이 사람을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고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어요. 정말 천부적이신 것 같아요.
서진한 아마도 안 선생님이 주객도식 이야기를 하실 때, 그 어간일 텐데, 이분이 해방신학 등 외국 신학 책을 일부러 읽지 않는다고 우리한테 자주 이야기하셨어요. 외국 신학사상에 영향을 안 받겠다는 거였어요. 대단히 한국적이고 싶어 했어요. 그리고 안 선생님이 ‘질문이 답을 만든다.’며 학문에서 ‘방법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어느 날부터는 방법론을 묻지 않겠다는 말씀을 해요. 그러니까 서양과 다른 한국적인 신학을 한다는 생각이 후반에 매우 강했던 것 같아요. 정말 우리 신학을 하고 싶어 한 것 같아요. 그 점은 우리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지요.
김명수 ‘우리’라는 개념을 강조했던 것도 아마 같은 맥락일 거예요. 예수 사건도 개인 예수가 아니라 우리인 예수민중의 사건이었거든요.
서진한 맞아요. 그리고 안 선생님이 불트만의 양식비평을 이야기하는데요, 양식비평은 말씀자료(로기온)가 핵심이고 이야기(아포프테그마)는 로기온을 보호하는 액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안 선생님은 그것을 뒤집어버리죠. 예를 들어 밀이삭을 자르는 이야기는 나중에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자료를 잘 보존하기 위한 액자 같은 것이었다는 건데요, 안 선생님은 이것을 완전히 뒤집잖아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그 말과 배고파서 밀이삭을 자른 이 일은 분리될 수 없다, 심지어 밀이삭을 자른 일이 먼저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죠. 배고프니까 밀이삭을 잘라 먹었고 말, 곧 논쟁의 대화나 선언은 그 뒤에 따라왔다는 거예요.
박경미 역사 개념 자체가 달라지는 거죠. 왜냐하면 불트만은 아무리 그래도 역사실증주의 안에 있거든요. 그런데 안 박사님이 그 장면의 역사성을 얘기할 때는 역사실증주의의 역사성이 아니에요. 저는 그게 더 과학적이라고 봐요.

안병무의 실존주의 이해

서진한 그리고 안 선생님은 ‘화산맥’ 같은 사건의 맥 이야기를 했어요. 크게 진전시키지는 못하셨지만요. 비슷한 차원에서 서남동 목사님은 ‘두 이야기의 합류’ 이야기를 했고요. 안병무의 ‘맥’은 실존주의 구조하고는 완전히 다른 거예요.

gisang2212_08.jpg

키르케고르처럼 실존주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이 갖는 고민은 2,000년 전에 죽은 그 사람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거잖아요. 그 연관을 묻는데, 결국 그것을 묻는 실존의 의미로 현재화하는 어떤 것이 되잖아요. 불트만 역시 복음서의 사화들이 1세기 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자기 실존 이해를 담아놨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화들의 신화적 껍데기를 벗기면 당시 사람들의 실존 이해가 나타난다는 것이고, 그게 오늘날 우리의 실존 이해와 연결된다는 거죠.
그런데 실존은 지금 이 순간을 살지요. 과거와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의 시간. 그 시간에 신의 계시가 혹은 예수가 내 실존에 와 닿는 구조잖아요. 안 선생님이 말한 ‘탈향’이란 이 구조 위에 있어요. 실존주의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모든 관념을 거부하는 거잖아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말은 역사나 신앙 존재에 관해 서구 문명이 규정한 ‘본질’보다 내가, 내 ‘실존’이 앞선다는 거잖아요. 여기에서 실존의 주체성이 중요해지고 그리고 이전의 ‘진리’, 소위 본질에 매이지 않고,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향해 결단하고 자기를 끊임없이 내던져 창조해가는 거죠. 그런 점에서 보면, 아까 김명수 선생님이 말한 안병무의 언어들, ‘탈향’ ‘지금 여기’, ‘결단’, ‘길 위의 존재’ 이 모든 언어는 딱 실존주의를 가리키고 있어요.
박경미 안 박사님이 그 언어를 쓰죠. 어떻게 보면 신학에서 항상 ‘지금 여기, 내가 문제이다.’ 이게 안 박사님이 자기 자신을 추스르는 방법이었죠. 항상 새롭게 자기가 자기를 설득하는 하나의 구조로 작용한 거예요. ‘부름말’(Anrede, 불트만의 안레데)이 되고 싶었던 거죠. 저는 어린 시절 안 박사님을 만났을 때 어떤 ‘간절함’이 느껴졌어요. 이게 어떤 간절함이냐면 나의 한 인격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 거였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같은 나라는 한 사람과 대화하고 싶은 거였어요. 말을 걸고 싶고, 내 인생에 개입하고 싶어 했고요.
실존주의 신학에서, 결국 과거에 있었던 객관적인 예수 사건을 현재의 나를 위한 하나의 안레데로, 내 삶을 바꾸는 하나의 안레데로 만들겠다는 구조 있잖아요. 이게 안 박사님의 인생주의자로서의 기질과 그냥 딱 맞아떨어지는 거예요.
서진한 ‘질문이 답을 결정한다.’는 안 선생님의 말도 제가 대학원 세미나에서나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일할 때는 종종 듣긴 했는데, 당시에는 그게 단지 방법론에 대한 강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나서 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실존의 질문이어야 내 실존에 답이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신앙이 내 실존을 흔드는 힘일 때 내가 신앙인인 거고 내가 나를 던져서 그 신앙의 길을 가는 거죠. 이게 실존주의 구조잖아요?
근데 나중에 ‘전태일 사건 혹은 민중 사건이 벌어지는 여기가 예수 사건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예수 사건이 벌어진다.’라고 말할 때는 이론적 자리가 완전히 달라진 거였죠. 나의 실존의 결단과 관계없이 전태일 사건이 벌어진 거죠. 물론 그것을 메시아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것은 실존의 문제이겠지만 말이에요. 이것은 여러 사람이 관계된 사회적 일이에요. 이건 실존주의적 구조와는 너무너무 달라요. 안병무의 삶의 자세와는 별개로, 이론 구조상으로는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안병무의 민중신학이 ‘탈-향’(脫向)으로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당시 저항한 민중들은 개인 실존의 탈향이라는 구조 속에 있는 게 아니에요. 탈-향의 개념을 확대 해석하면 연결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당시 민중들은 이 자리를 버리고 다른 미래의 자리로 떠나는 실존주의적 차원의 사람들이 아니에요.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힘을 모아 이 사회를 바꾸어야 하는, 무너뜨리고 다시 세워야 하는 사람들이에요. 구조가 완전히 다르잖아요. 이걸 보고서 여기 메시아 사건이 벌어졌다고 증언하는 거죠. 이게 민중신학의 시작이죠.
그런데 지금도 ‘탈향’이란 개념을 가지고 안병무를 표상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점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안병무를 비빔밥으로 만들게 된다고 생각해요.
김명수 한편으로 동양철학과의 연관성에서 보면 안병무 선생님은 ‘상놈’이라는 단어에서 ‘상’(常)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춰요. 다시 말해 노자가 말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의 상도라는 거죠. 노자는 천지만물의 길을 상도(常道)로 보았어요. 여기에서 영감을 받은 선생님은 민중을 ‘상놈’(常者)으로, 민중이 가는 길을 항상 그러한 상도(常道)라고 보았어요.
또 한 가지는 그분이 ‘기’(氣)를 얘기했어요. 구약의 루아흐(ruach)나 또는 신약의 프뉴마(pneuma)를 동양의 ‘기’로 푼 적이 있거든요. 우주만물을 살리는 기를 민중과 연결시켜서 해석했던 민중생명신학도 새로운 흐름이 아닌가 생각해요.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gisang2212_09.jpg

김명수 안병무가 민중을 미화하지 않았다는 점도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서진한 당시 민중교회 하던 목회자들이 와서 민중교회의 목회적 고충을 가지고 고민을 토로하는데, 이분이 거기에 대해서 명쾌한 답을 못 내셨어요.
박경미 안 박사님이 민중교회 목회자들이 말하는 애로사항을 모르고서 그런 얘기를 했다고 생각 안 해요. 안 박사님이 민중구원론 얘기할 때 그 민중과 실제로 민중교회 목회자들이 배신당하기도 하는 그 민중과 갭이 존재한다는 점, 안 박사님이 절대 모르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성서를 일종의 민중 사건, 민중의 사회 전기로 안 박사님도 보시잖아요. 성서에 나오는 민중은 출애굽이라는 극적인 경험을 하고도 계속해서 투덜대는 민중이고요. 그러니까 안 박사님이 생각하는 민중은 민중 한 명, 한 명을 보면 그렇게 거짓말도 하고 쌍스럽기도 하고 이기적이고 이런 모습들이 있지만, 결국 전체로서 보면 민중은 인류 생명의 젖줄이고, 역사를 이끌어가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라는 그런 관념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는 그게 희망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안 박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존재는 가능성이다.’, ‘민중은 가능성이다.’, 즉 가능성이죠. 그것은 궁극적인 희망으로서의 민중이에요.

시대에 조응하는 신학, 변화하는 신학

서진한 안병무의 신학이 이후 생명으로 넘어갔는데, 저는 그 말은 ‘생명’이 논의된 한참 뒤라고 생각해요. 김지하가 생명을 말했고 이후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멈추라는 글을 써서 파란을 일으켰지요. 안 선생님은 김지하와도 가깝게 지내셨는데, 그 당시는 생명 이야기를 별로 안 하셨거든요. 1988년 「살림」을 창간할 때 당시 제가 편집일을 했는데, 그때는 이미 한국 사회에 ‘생명’ 혹은 죽임에 맞선 ‘살림’에 관한 이야기가 아주 많을 때였어요. 당시 연구원들을 앉혀놓고 함께 잡지 제목을 짓자며 토론을 했는데, 결국 ‘살림’이라고 지었거든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거죠. 그러나 이분이 신학으로 생명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여러 해가 지나서 같아요.
1989년, 미국 가서 심장 수술을 받고 돌아온 직후에, 우면동 자택에 저와 서너 사람이 앉아서 얘기를 했어요. 안 선생님은 당신이 수술하고 났을 때의 체험을 이야기하셨어요. 마취에서 깨어나기 전이니까, 선생님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꿈을 꾸는데, 어마어마한 망망대해에서 자기가 정자 하나처럼 헤엄을 치더라는 거예요. 바다가 너무 따뜻하고 포근했대요. 그러다 깼대요. 그 꿈을 해석해보자면, 정자라는 것도 생명이고, 어머니의 바다는 생명의 바다이지요. 안 선생님이 직접적으로 설명은 안 하셨지만, 지금 보면 그게 모두 생명의 상징어예요.
그 꿈 이후로 선생님께서 생각이 참 많아졌다고 하시면서, 당신이 “민중신학을 내내 했는데 그건 나무로 치면 나무기둥과 가지와 잎에 집중하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애쓴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면서 나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드러나지 않은 뿌리를 감싼 대지와 햇빛과 비, 바람이 있어야 한다며, 이제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한 거죠. 생명, 생명계 이야기죠.
그러니까 이게 「살림」을 만들 때와는 또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고 봐요. 그 말을 하시던 때는 민중이 완전히 짓밟히던 과거 시기와는 달랐어요. 형식적이긴 하지만 이미 절차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였고요, 민중이라는 언어가 조금씩 빛을 바래가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그리고 어찌 보면 민중도 힘을 가진 자들에게 밟히는 약한 생명이잖아요. 그래서 아마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일 것 같기는 해요.
박경미 지금의 기후위기를 단순히 자연 생명의 문제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잖아요. 이게 사회경제적인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이 사회경제적인 시스템의 변화를 이루기가 참 힘들어요. 결국 우리의 실존적인 삶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데요. 정말 총체적인 위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안 박사님의 민중신학과 또 근원적인 생명에 대한 추구 이런 것들이 다시 맞물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 민중신학적 통찰이 기후위기 시대에 꼭 필요해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사회경제적인 우리 삶의 근본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바꿀 필요가 있어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안 박사님의 마지막 패러다임의 변화를 지금 우리가 계승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한국 민중신학의 새로운 목소리

서진한 이제 이번 100주년 행사, 관계된 후배들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하시고, 미래 과제를 논의하고 마무리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김희헌 박경미 선생님께서 심원안병무기념사업회 회장이셨던 작년 9월부터 이번 행사 논의를 시작했고, 한국민중신학회와 향린교회, 한신대학교가 주축이 되어서 제안하였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한 10여 개 단체에서 열댓 명 참여하는 행사이지 않겠나 하고 예상했어요. 그런데 여기저기서 참가 요청이 있다 보니, 결국 참여 단체만 거의 30개에 육박했고 발표자 26명에 논평자와 토론자 포함해서 참여한 사람들이 50여 명을 훌쩍 넘었죠. 학교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이 70명 이상 왔고, 외국에서도 발표에 참여하고, 유료로 등록한 사람이 180명에 이르렀습니다. 총 250명 정도의 규모였는데, 최근 학술대회치고는 큰 행사였습니다. 행사를 1년간 준비해온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gisang2212_10.jpg

이번 행사의 취지는 과거 언어의 반복보다는 새로운 목소리를 추슬러보자는 것이었어요. 주제도 그렇게 잡았습니다. 영문 이름도 ‘the minjung theology’가 아니라 ‘minjung theologies’로 복수로 표현했고, 그 목소리를 8개 주제와 분과로 나눠 진행했어요.
1분과는 과학과 생태와 관련하여 포스트 휴먼 주제까지 포함하였고, 2분과는 평화와 통일과 관련해서, 3분과는 안병무의 사상을 다른 철학사상의 시각과 접목하여 재해석하는 것이었고, 4분과는 여성신학, 5분과는 노동경제와 해방신학, 6분과는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분들 및 이웃 종교와의 대화, 7분과는 현재 기독교 사회운동 안에 안병무가 여전히 살아 있을 수가 있는지 현장 활동가가 발표를 맡았고, 8분과는 소수자 퀴어신학의 관점에서 접목하는 가능성을 이야기했어요.
주제 자체가 요즘 신학교나 기독교 기관에서 잘 얘기하지 않는 진보적인 주제인데요. 그것을 안병무의 품으로 한번 모아봤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일회적인 행사보다는 장기적으로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모여서 함께 논의하는 기회를 만들자는 생각을 하였고, 마치고 나서도 그런 제안이 확산되는 것을 느끼면서 이번 행사는 한국에서 진보적인 신학 운동을 하는 힘을 서로 확인하는 자리였다고 봅니다.
이번 학술대회의 결과로 논문 25여 편이 나왔고요. 논문 작성의 지침으로 개인의 입장보다는 해당 단체가 고민하는 문제를 집단지성을 발휘하여 쓰자는 원칙을 가졌고, 따라서 그걸 검토하는 별도의 워크숍도 행사 전에 1박 2일로 하기도 했는데요. 완벽하게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서진한 완벽하지 않아도 이런 논의를 할 수 있는 단초가 되고, 그러다가 이제 꽃도 피는 거지요.
김희헌 이번 논문 중에서 적절한 것은 영문으로 번역해서 내년에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매개로 삼을까 합니다. 내년에 향린교회가 신축되면, 그 3층에 안병무도서관이 들어설 예정인데요. 그 개관식을 할 때 해외 학자들을 초청하여 논의하는 자리를 가지려고 합니다. 민중신학의 새로운 목소리가 있다는 걸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서진한 그리고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학술대회 하루 전에 “안병무 민중신학과 조선사상사”라는 주제로 100주년 기념강연을 하셨는데요. 조선사상사의 맥이라는 논리를 가지고 민중신학을 설명했는데, 그것도 민중신학에 기여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신학을 서구에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시아에도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시아기독교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 CCA)가 열리잖아요. CCA가 열리면 거기 온 사람들이 다 민중신학 이야기를 한대요. 에큐메니스트들이 말하기를, 자기들도 민중신학에서 통찰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아시아에 무관심한 거예요. 우리는 자꾸 서구 이야기만 하는 거죠. 마지막으로 김명수 교수님께서 한마디 해주시고 대담을 마무리지을까 합니다.
김명수 안 선생님께서 “내가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 삼은 것은 큰 행운이었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고, 서남동 선생님은 성서와 한민족의 민중전통이 오늘의 민중신학에서 합류된다고 보셨는데요, 민중생명은 인류 역사가 추구해온 보편적인 가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서구 신학의 극복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민중신학이 동양사상과의 접목을 시도하여 외연을 확장시키는 것도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서진한 그럼 오늘 대화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장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2023년 1월호(통권 769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