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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아시아 기독교] 중국 기독교, 무슬림을 만나다 02
교회와현장 (2022년 10월호)

 

  기독교에 대한 중국 이슬람 지도자의 첫 반응- 마덕신(馬德新)의 『거리질증』(據理質證)을 중심으로
  

본문

 

이전 글에서 소개한 것처럼, 19세기 초 중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예상 밖의 방대하고도 독특한 회교도 집단을 만났다. 이에 첫 중국 개신교 선교사인 모리슨을 비롯하여 많은 선교사들은 중국 무슬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해와 연구를 지속하였다. 선교사들은 우선 유럽 계몽주의 시대 연구를 통한 간접적인 문헌 이해에 주로 의존했고, 그다음 단계로는 각 지방에 있는 이슬람 사원을 방문하거나 개별적인 중국 무슬림과의 짧은 교제를 통해 직접적인 이해를 넓혀 갔다. 그러면서 주로 The Chinese Recorder[「敎務雜誌」(교무잡지)]에 자신들의 이해와 연구를 발표했다. 이 매체는 영문으로 된 선교잡지였기 때문에 주된 독자층이 선교사들이었다. 따라서 중국 무슬림들은 선교사들의 이러한 일방적이고 주관적인 이해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 선교사들이 알지 못하던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1886년 천주교의 한 주교와 중국 무슬림 최고 지도자가 깊이 있는 종교적 대화를 서한으로 한 차례 주고받은 일이다.

천주교 윈난 교구의 주교 휀넬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영국을 비롯한 여러 서방 국가들과 굴욕적인 조약들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들로 인해 서방 선교사들의 지역 이동에 대한 제약이 많이 완화됨에 따라 선교사들의 활동 영역도 중국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 맞닿은 중국 남서부의 윈난(雲南)은 일찍부터 천주교 선교사들이 기반을 잡은 곳이었다. 윈난 교구는 1696년에 설립되었고 로마 교황청에서 직접 관할하였다. 1755년에 윈난 교구는 쓰촨(四川) 교구에 병합되어 사라졌다가 1842년에 다시 윈난 교구로 독립되었다.
윈난 교구의 활성화는 당시 윈난과 인접한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한 시대적 상황과도 직결된다. 처음부터 윈난 교구를 장악한 선교사들은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Socie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M.E.P.) 소속이었는데, 베트남을 통해 윈난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욱 편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1851년부터 윈난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1881년 윈난 교구의 주교로 임명된 휀넬(Jean-Joseph Fenouil, 古若望, 1821-1907) 역시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이었다.1
윈난에서 휀넬 주교의 영향력은 매우 막강하였다. 이 사실을 증명해주는 한 사건이 있는데, 사료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동치 5년(同治五年, 1866년) 신임 총독 노숭광(勞崇光)이 회민(回民, 중국 무슬림을 칭함)들의 드높은 기세가 두려워 구이양(貴陽)에 머물러 있으면서 감히 윈난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윈난) 지역 유지들은 노숭광이 서양인들과 관계가 좋음을 알고 고신부(古神父, 휀넬을 말함)에게 직접 구이양에 가서 노숭광을 영접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노숭광은 (휀넬의 안내를) 흔쾌히 받아들여 원난으로 출발하였고, 드디어 (윈난에) 도착하여 취임하였다. 그리고 평정거리(平定街, 윈난 쿤밍의 중심가)의 한 공관 부지를 교회에 기증하였다. 그때는 곧 동치 9년(同治九年, 1870년)이었다. (휀넬) 신부의 명성은 크게 소문이 나서 모든 관리들 중에 극진히 환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2

이 기록의 배경은 1856년부터 지속된 윈난 무슬림 무장봉기이다.[중국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雲南回民起義’(운남회민기의)라고 부른다.] 두문수(杜文秀), 마덕신(馬德新), 마여룡(馬如龍) 등의 무슬림 지도자들이 이끄는 봉기군은 청나라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하며 윈난의 여러 성읍을 점령하는 기염을 뿜어냈다. 윈난성 총독으로 임명된 노숭광(1802-67)이 감히 윈난 쿤밍의 총독부에 부임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휀넬 주교가 멀리 구이저우성(貴州省) 구이양까지 가서 노숭광을 설득하여 원난에 부임하게 하고 난국을 진정시킬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휀넬 주교가 무슬림 무장봉기가 일어난 심각한 상황에서 이러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노숭광이 윈난 총독으로 임명되기 직전 양광(兩廣, 광둥과 광시 지역) 총독으로 있을 때 서양인들과 많은 친분을 쌓았다는 배경도 있지만, 휀넬이 윈난 무슬림 지도자들과 넓고 깊은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증거는 1866년 프랑스 정부 과학탐험팀이 메콩강 지역을 탐험할 당시 기록에 드러나 있다.3

휀넬은 윈난 정부 관원들과의 친분을 통해 이번 탐험팀의 활동에 실질적인 공헌을 하였다. 휀넬의 적극적인 로비로 마장군(馬將軍)은 후원금을 내어 탐험팀의 탐험을 완성케 하였다. 동시에 회교도의 장로파파(長老)의 전폭적인 지원과 보호를 얻어냈다.4

이 기록에 언급되는 ‘마장군’은 당시 윈난 제독(提督) 마여룡이고, ‘장로파파’는 윈난 무슬림들이 ‘아빠’라 부르는 종교적·정신적 지도자 마덕신이다.5

윈난 무슬림의 지도자 마덕신

마덕신[馬德新, 자는 복초(復初), 1794-1874]은 윈난 따리(大理)의 유명한 무슬림 학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가정에서 엄격한 이슬람 교육을 받아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에 능통하였고, 청년이 되어서는 시안(西安)에 가서 당대 유명한 무슬림 이맘 주양준[周良俊, 자는 묵재(齋), 1770-1850]의 제자가 되어 이슬람 경전을 공부했다. 두 번이나 메카로 성지순례를 다녀왔고, 10년 동안 이집트, 수리아, 오스만,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싱가포르 등지에서 이슬람 경전과 철학, 역사, 천문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그리하여 당대의 ‘回, 儒, 釋, 道, 耶’(이슬람,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5대 종교를 섭렵하고 정통한 중국 이슬람 대가(大家)로 추앙받았다. 다시 윈난 린안(臨安)으로 돌아온 마덕신은 이슬람 경전 교육을 통해 훗날 중국 무슬림의 지도자가 된 마안예(馬安禮), 마개과(馬開科), 마련원(馬聯元) 등을 포함한 1,000여 명의 제자들을 양성하였다.6 그 당시 마덕신은 ‘장로파파’라고 불릴 정도로 중국 이슬람 최고의 성직자인 동시에, 무슬림들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특별한 인물인 마덕신과 휀넬 사이의 교제는 단지 인간적인 친분을 쌓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각각 서로 다른 종교의 지도자인 두 사람의 교분에 대하여 『新纂雲南通志』(신찬운남통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휀넬은) 또한 회교도와 종교에 관하여 논하기도 했다. 동치 4년, 회교 학자 마복초 덕신 씨는 『據理質證』(거리질증), 일명 ‘천주교 주교에게 보낸 서한’이라고도 부르는 책 한 권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고씨(휀넬)에게 보낸 서한이었다.7

다시 말하면 휀넬과 마덕신은 종교적 대화를 나누었고, 그 종교 대화의 내용으로 휀넬에게 보낸 편지를 『據理質證』이라는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 ‘진리를 근거로 한 질문과 논증’을 담고 있다.

마덕신의 『據理質證』

1865년에 발행된 『據理質證』의 저자는 유성(楡城, 윈난 따리의 다른 이름)의 ‘복초’(마덕신의 字)로 표기되었다. 즉 ‘윈난 따리 사람 마덕신’이라는 것이다. 이 단행본은 총 21페이지, 3,700자 정도의 적은 분량이다.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11페이지, 약 1,750자이고, 두 번째 부분은 10페이지, 약 1,950자이다.8 역사 기록에 보면 이 책은 아랍어판과 중국어판 두 종류가 있었는데, 현재는 중국어판만 보전되어 전해오고 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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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장난이라고 할까? 이 책은 실로 꿰매는 제본 방식을 사용했는데, 처음 발행할 때부터 제본 과정에 오류가 있었다. 첫째 부분의 9쪽 이하와 둘째 부분의 9쪽 이하가 뒤바뀌어 묶인 것이다. 이로 인해 『據理質證』의 첫 부분 마지막 페이지에 있어야 할 “愚弟復初馬德新頓首拜”가 두 번째 부분의 마지막에 있고, 오히려 진짜로 『據理質證』의 마지막인 “1865년 4월 14일 윈난성 따리 복초 마덕신 씀”(同治四年四月十四日 省楡城 復初氏馬德新敍)은 첫 부분의 마지막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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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 책에 관한 중국 연구자들의 논문들을 살펴보면 전부 잘못된 제본에 대한 세심한 고증을 거치지 않고 두 부분이 서로 섞여 있는 그대로를 원문으로 삼고 연구를 진행하는 우를 범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흔히 이 책은 두 통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10 하지만 실제로는 첫 부분만 마덕신이 휀넬에게 보낸 편지이고, 두 번째 부분은 천주교 교리에 대한 마덕신의 논문이다. 이에 필자는 제본상의 문제를 처음 지적하며 이 책의 원문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논문을 2016년에 발표한 바 있다.11
그 편지에는 “천주교에게 보내는 편지”(致天主敎書)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新纂雲南通志』의 기록처럼 필자 역시 이 제목은 인쇄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이며 “천주교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致天主主敎書)라고 해야 정확하다고 판단한다. 이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古신부(司鐸, 휀넬을 뜻함) 대형대인각하(大兄大人閣下, 여기서 ‘大兄’은 종교 지도자를 뜻함), 귀교(貴敎)의 책을 어제 읽었습니다. 그 이치의 논함이 정교하고 심오하며, 그 뜻을 세움이 성실하고 진지하였고, 예전에 어떤 이들도 말한 바 없는 참뜻을 선포하였으니 이는 실로 우리나라에서 얻기 어려운 귀한 것이었습니다. (천주교는) 사실 유교, 회교와 겉으로 나타내는 것이나 안에 담고 있는 것 모두 비슷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많은 지혜를 깨우쳐 줌을 얻었습니다. 참으로 이제야 만나게 됨을 원망할 정도입니다.
특히 그중에 천국후세(天國後世), 상선징악(賞善懲惡), 천당지옥(天堂地獄), 그리고 주(主)에 대한 모든 말씀들은, 아!(吁) 여기에 더 보탤 것이 없는 바 그 선포하심이 조금의 유감도 없어서 저는 이미 손에서 내려놓기를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빼어난 부분들을 취하여 저의 경전의 해석에 보탤 수 있으니 이후부터는 표준으로 삼을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12


극찬으로 시작되는 마덕신의 편지는 단지 예의상의 미사여구가 아닌 것 같다. 선을 상주고 악을 벌하는 천당과 지옥의 말씀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하며 자신의 이슬람 경전 해석에도 ‘표준’(圭)으로 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덕신은 기독교에 대한 칭찬에 이어 이해되지 않는 대목들을 차분하게 서술한다.

기독교에 관하여 이해되지 않는 점 열 가지

특히 천주교의 책은 심오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니 이해할 만한 것도 있지만,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천주(天主)가 예수로 태어났다는 강생설(降生說)에 대해서 온갖 생각을 다 쏟아붓고 밤낮으로 골몰히 생각해봤지만 갈수록 더 혼미해집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아우를 용속(庸俗)하고 우매(愚昧)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뜻이 통하는 관계(知心之交)로 삼아주셨기에 아우는 간절하고 번거롭게 묻고자 합니다. 제가 그 뜻을 바로 알아야만 다른 사람들이 저에게 물을 때 명백하게 그 뜻을 전하여서 의심하는 자는 믿게 하고 믿는 자는 즐거이 따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13

여기서 언급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한 이 실토가 어쩌면 마덕신이 휀넬에게 편지를 쓰게 된 동기이자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첫 번째 편지에서 마덕신은 이해되지 않는 열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였는데, 이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4
(1) 예수가 “내가 곧 천주가 강생한 것이다”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천주가 아닌 예수를 보았다는 점.
(2) 예수도 육신을 가진 인간인데, 어찌 천주만이 할 수 있는 ‘세상 구원’을 할 수 있는가.
(3) 천주도 세상을 구원하고 예수도 세상을 구원한다면 천주와 예수가 세상 구원의 공로를 서로 다투는 것이 아닌가.
(4) 예수만이 세상을 구원한다면 그가 태어나기 전에 천주가 세상을 구원했던 것은 또 무엇인가.
(5)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천주가 예수의 태어남을 기다렸다면 인간에게 구원의 권세가 있다는 것인가.
(6) 구원받는 세상은 어떠한 세상인지, 또 어떤 덕(德)과 공(功)과 재(才)와 힘(力)으로 구원받게 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7) 예수가 성인(聖人)으로서 천주의 본체를 보여준다 했는데, 왜 기나긴 역사 속에 다른 성인이 아닌 오직 예수뿐인가.
(8) 윤회설을 반박하면서도 예수를 천주가 강생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9) 예수로 태어난 천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했는데, 예수의 탄생이 시작이고 예수의 죽음이 끝이 아닌가.
(10) 천주는 지존(至尊)이고 거룩하다고 했는데, 육신으로 태어난 것은 비천하고 더러운 것이 아닌가.

기독교에 관하여 마덕신이 제기한 열 가지 의심

마덕신은 열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들을 제기한 후, 바로 이어서 열 가지 의심되는 점들을 제기하였다. 마덕신은 이해되지 않는 점들을 말할 때와는 달리 휀넬에게서 받은 책의 원문을 조목조목 인용하며 의심되는 점들을 지적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5
(1) “천주가 예수로 태어나서 세상 사람(衆生)들의 죄와 허물을 씻어주는 역할을 한다.”라고 했는데, 그러면 천주가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가 하는 것이니 천주가 인간보다도 못한 것인가.
(2) “강생(降生)은 결코 하늘을 떠나 땅에 얽매인(囿)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그러면 예수는 매일 수시로 육신으로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간다는 것인가.
(3) “천주의 본성(本性)이 인간의 몸(性體)과 결합하였다.”라고 했는데, 형체가 없는 무형(無形)의 본성이 어찌 형체가 있는 몸과 결합할 수 있는가.
(4) “거룩한 여자(聖女)의 태중에 임신되어 세상에 태어나 세상을 구원하였다.”라고 말했는데, 천주가 반드시 여자의 태중에 임신되어 태어나야만 세상을 구한다면 천주의 몸이 여자의 몸보다도 못하다는 것인가.
(5) “세상을 구원하는 공력(功)으로 모든 세월(萬世)의 죄를 속하여 준다.”라고 말했는데, 천주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인가.
(6) “수천 년 전부터 천주는 미리 태어날 것을 예언하였고 태어날 때 천사가 소식을 전했다.”라고 말했는데, 이 일로 오히려 영혼이 다른 몸에 깃들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托生) 일이 참(眞)인 것이 아닌가.
(7) “삼위일체는 태어나게 하신 것과 태어난 것이 구별되는 것이며, 태어나게 하신 이는 아버지이고 태어남을 받은 이는 아들이다.”라고 말했는데, 천주가 예수로 태어났다면 예수와 천주가 한 몸인데 어찌 아버지와 아들이 각각 따로 있을 수 있는가.
(8) “태어나지 않으면 밑에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천주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해도 높고 높은 위에 있는 것으로서 서로 닿지 못한다.”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예수가 죽은 후 천주는 또다시 다른 인간으로 태어나야만 이 세상 사람들과 닿는 것이 아닌가.
(9) “땅에 태어나도 하늘에 있는 것이고, 승천하여도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천주는 왜 하필 땅에 태어났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윤회의 수고(輪回之苦)를 겪어야 하는가.
(10) “마치 배나무에 복숭아가 열리는 것과 같이 복숭아는 그 본체를 잃지 않는다.”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사람에 비유하면 손을 잘라서 발목에 붙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마덕신의 종교 대화 태도

마덕신은 열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과 열 가지 의심되는 점을 피력한 후 휀넬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자고(自古)로 질문하고 의혹을 푸는 공부는 어떤 종교이든 모두 폐(廢)할 수 없는 법입니다. 열 가지 의심되는 점과 열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을 제기하는 것은 그 깊은 뜻을 밝히 알고자 하는 것이지 결코 귀교(貴敎)의 잘못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교에서 한 권의 책을 간행하여 중국에 널리 유행시키려고 할 때, 어찌 수백 수십 명의 깊은 헤아림(斟酌)을 거치지 않고 옅은 학문으로 지적받을 만한 흠집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다만 아우가 독서의 도를 깨닫지 못하여 식견(識見)이 좁고 미천하여(鄙陋) 그 귀한 오묘함을 살펴볼 수 없어서 신부님께 명석한 설명을 간청하는 것뿐입니다. 아우의 이해하지 못하는 점들을 풀어주심은 곧 배우고자 하는 다른 이들(學者)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고, 천주교 이치(敎道)의 가르침이 부흥하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우는 선생님의 낮은 자에게마저 겸손(謙光下逮)하심과 넓은 포용력으로 깨우치지 못하고 얽혀 있는 저의 마음을 밝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양해해 주시길 빌며 어리석은 아우 복초 마덕신 머리 조아려 인사드립니다.(愚弟復初馬德新頓首拜)16


마덕신의 편지를 받은 휀넬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아직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편지만을 가지고는 마덕신과 휀넬 간의 대화, 즉 중국 이슬람과 기독교(천주교)와의 종교 대화의 전모를 밝혀낼 수 없다. 하지만 이 편지에서 우리는 적어도 종교 대화를 나누는 모범적인 태도는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據理質證』에서 보여준 마덕신의 종교 대화 태도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우호적인 감정을 기반으로 한다. 마덕신과 휀넬은 비록 서로 다른 종교의 지도자였지만 개인적인 친분 관계가 두터웠다. 특히 무장봉기가 발발한 시대 상황 속에서 서로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등 도움을 주었고, 그러면서도 각자의 종교적 본분을 잊지 않고 종교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둘째,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마덕신은 휀넬이 소개한 종교 교리가 자신의 신앙에 저촉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고 겸손한 자세로 이를 언급하였으며, 자신의 입장을 “이해되지 않고”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분명히 주장하였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극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이러한 태도가 종교 대화를 할 때의 기본적 자세라 말할 수 있다.
셋째, 명철하고 논리적으로 자기주장을 펼쳤다. 종교 대화는 상대방의 주장을 끝까지 듣고 대응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비판적 반응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중단되거나 파국으로 치닫지 않으려면 우선 자신의 주장이 논리적이고 분명해야 한다. 마덕신이 “열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과 “열 가지 의심스러운 점”을 제기한 것은 상대방의 논지와 논리를 충분히 파악하고 나서 자신의 비판 논지를 논리적으로 펼친 모범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결국 『據理質證』은 중국 무슬림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이 1925년 베이징에서 다시 출판될 때 발행자인 손덕춘(孫德春)은 마덕신을 일컬어 “중국 무슬림 중에서 천주교와 종교 대화를 나눈 첫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17
다음 호에서는 천주교가 아닌 개신교 선교사들과 중국 무슬림 지도자 간의 종교 대화가 어떠한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주(註)
1 휀넬 주교의 생애에 대해서는 Gérard Moussay et Brigitte Appavou, Pépertoire des Members de La 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en Chene): 1659-2004 (Peris: Archives des Missions Étrangères, 2004), 耿昇 역, 『1659-2004年入華巴黎外方傳敎會會士列傳』(桂林: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10), 876을 참고.
2 龍雲, 魯漢修 편저, 『新纂雲南通志』, 「宗考八·天主」, 卷一百零八, 考九十二 (昆明: 雲南人民出版社, 2007), 679.
3 1866년 프랑스 정부 과학탐험팀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Marie Joseph Francis Garnier, Voyage D’exploration en Indo-Chine Effectue Pendant les Annees 1866,1867, et 1868 (Paris: Hachette et cie, 1873); 晃西士加尼, 「柬寨以西探路記柬」, 제1, 2권, 王有立 편, 『中華文史叢書』 제13권(臺北: 華文書局, 1968)을 참조.
4 Adrien Launay, Mémorialde La 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Séminaire des Missions-Étrangères, 1912). 乃, 「巴黎外⽅回」, 初 편, 『昆明市志編』 제8권(昆明: 昆明市志編纂委員會, 1984), 7에서 재인용.
5 마덕신은 마여룡(1832-91)의 영적인 아버지였다. 무과 급제(武科 及第) 출신인 마여룡은 윈난 무슬림 봉기의 군사적 지도자였고, 마덕신은 정신적 지도자였다. 1862년 마덕신은 마여룡을 설득하여 함께 청나라 정부에 항복하였고, 그 이듬해 마여룡은 봉기를 평정한 공로로 윈난 제독으로 임명되었다.
6 마덕신의 생애에 관해서는 楊桂萍, 『馬德新思想硏究』, (北京: 宗敎文化出版社, 2004)을 참조.
7 龍雲, 魯漢修 편저, 『新纂雲南通志』, 679.
8 馬德新, 『據理質證』(同治四年, 雲南木刻版), 1-21.
9 白壽 편, 『回族人物誌·近代』(銀川: 寧夏人民出版社, 1997), 174-184.
10 『據理質證』에 대한 중국 학자들의 연구는 그다지 많지 않으며, 잘못 제본된 원본을 기반으로 진행되었다. 그 연구 논문들로는 姚繼德, 「“回耶”對話的一次實踐—馬德新《據理質證》及其文明對話觀」, 『西北第二民族學院學報(哲學社會科學版)』 2007年第3期, 88-95; 楊桂萍, 「阿中伊斯蘭與基督和諧與共的歷史透視」, 『阿拉伯世界硏究』 2007年第5期, 53-60; 馬景, 王建斌, 「淸末民初雲南回族社會對基督傳播的認知與回應—⾺聯元《辨理明證語錄》及其影響」,『西北第⼆民族學院學報(哲學社會科學版)』 2008年第1期, 91-95; 陸蕓, 「伊斯蘭與基督在中國的接觸、 撞和衝突」, 『西北民族⼤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2011年第4期, 34-38; 鄒⼩娟, 「鏡中⽉: 淺析淸末回儒對基督‘耶’的認識—以《據理質證》和《辨理明證語錄》爲例」, 『本⼟經驗—中國伊斯蘭與基督的相遇和對話, 第三伊斯蘭與基督對話學術硏討會資料集』(2013. 10), 107-117 등이다.
11 肖淸和, 文英杰, 「中國回耶對話的典範: 馬德新《據理質證》新考」, 『史林』 2016年第1期, 112-121.
12 馬德新, 『據理質證』, 1.
13 앞의 책, 1-2.
14 위의 책, 1-5.
15 앞의 책, 5-9.
16 위의 책, 9-10.
17 孫德春, 「序言」, 馬德新, 『據理質證』(北京: 光明印書局, 1925), 1.


문영걸|목원대학교(교회사)와 북경대학교(종교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지식계층의 기독교 이해” 등의 논문이 있다. 제주반석감리교회 담임목사이며, 미도(美道)중국선교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2022년 11월호(통권 7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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