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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22년 10월호)

 

  여수의 풍난을 겪고 와서
  

본문

 

*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의 항명과 여기 호응한 시민들의 봉기를 목격한 김형도(金瀅覩)가 「기독교가정」 창간호(1948년 12월호)에 기고한 글이다. 「기독교가정」은 이 사건 발생 두 달 후에 기독교서회가 창간한 잡지이다. 글쓴이는 10월 17일부터 30일까지 여수를 방문했다가 이 사건을 목격했다. 그 무렵 그는 서울대 교원과 서울YMCA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1948년 10월 당시의 여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1차 자료이다. 함흥 출신의 김형도는 1951년 2월 군목에 지원하여 1954년 제1대 군종감이 되었다.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여 옛 표기 방식으로 기록된 원문을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최소한의 수정을 하고 오늘날의 맞춤법을 적용하였다.(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은 그대로 두었다.) 대괄호([ ])로 표시된 부분은 편집자가 덧붙인 것이다.-편집자


동란의 여수! 피비린내와 화약내가 서로 엉켜 파도치는 죽음의 거리! 우리 겨레가 일찍이 구경 못한 동족상잔의 대 비참극이 전설 아닌 현실에 연출된 여수! 내가 이 여수의 변란의 풍랑을 타고 헤매어 본 것은 지금 생각하면 미상불 내 생애를 통하여 값비싼 체험일 것이다.
사실 나는 무슨 일이 있으리란 아무런 예감도 없이 여수에 내려갔었고, 어느 순간에 내 목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그 기약 없는 공포의 기간에 삶의 모든 미련을 버리고 마음으로 이제 죽어도 좋다 할 모든 준비를 다 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죽지 않고 또한 이 모든 소름끼치는 경험을 오히려 요행으로 여기게끔 되리라고 생각조차 못했다. 사람의 일이란 실로 미리 헤아릴 수 없다.
내가 여수에 가게 된 것은 지난 11월 17일.[10월 17일의 오기임] 와서 본즉 이 여수라는 곳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한적했다. 전체 인구가 8만 명가량 되는데 이들 대부분이 고기잡이로 생계를 삼아 사나이들은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고 여인들은 그걸 기차를 타고 다니며 판다. 하여튼 이곳 어업조합에 1년 매상고가 40억 원이라는 걸 보아 여기 어업이 얼마나 성한지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수 사람들은 사상(思想)이니 신앙(信仰)이니 하는 데는 실로 무관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반란이 무슨 사상을 토대로 한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불평을 말하는 군인

내가 여수호텔에 여장을 풀고 대강대강 용무를 마친 19일이었다. 어떤 이의 알선으로 무슨 인연이었든지 여수에 주둔해 있는 국군 제14연대를 견학하게 되었다. 내가 군대에 들어가 본 것은 물론 해방 후 이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여기서 어딘지 모르게 군대의 규율이 뚜렷하지 못한 듯한 무엇을 느꼈다. 그들의 훈련에 탄력이 없고 더군다나 발에 안 맞는 미군 고무장화를 신고 걸음을 걸을 때마다 풀석풀석 하는 데에는 보기에도 가빴다.
그래서 군인들이 상사가 있을 때는 아무 말도 없다가 외딴 곳에서는 우리 일행에게 “글쎄 이게 뭡니까. 이 꼴이 됐어요” 하며 스스로 쓴웃음을 웃는 것이었다.

이른 새벽의 총소리

20일 새벽이었다. 분명히 2시 25분이었다. 내가 들어 있는 여관에선 이 총소리를 들으면서도 태연했다. 그것은 연습이라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도 시민들에게 아무 예고도 없이 연습을 했으니까 이것도 역시 연습이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총소리는 단순한 총소리가 아닌 것을 나는 알았다. 왜냐하면 그 총소리엔 비스톨, 캬빙, 엠원 이렇게 세 가지 종류의 소리를 넉넉히 분간할 수가 있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리는 조용하고 이따금 군인들의 내왕이 있을 뿐 아무 일도 있는 듯싶지 않았다. 그랬는데 조금 있다가 내 방에서 바라다보이는 건너편 순천병원에 부상병을 실어 오는 것을 보고야 나는 일집[말썽스러운 일이 생기게 되는 바탕이나 원인]이 일어난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한잠도 못 자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그 후에 알았지만 사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19일 오후 10시경이었다 하는데 마침 약 ○○명의 군인이 제주도 방면으로 이송되게 된 직전이었다는바 그들은 자기들끼리 약 두 시간 반 싸운 끝에 완전히 군권을 잡았던 것이었다 한다.
여수에는 경찰이 약 70명 있었으나 이를 알고 비상소집을 했을 때는 불과 30명이어서 그들의 대항은 보잘것없었고 경찰서가 맨 먼저 불탔는데 그 위에 올라갔던 경관 7-8명은 그냥 타버렸다 한다.

인민군 군기대[軍紀隊]에 잡혀가서

그러나 그날 아침에도 여수읍민은 아무 영문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서울로 올라올 작정으로 정거장으로 나갔다. 좌익 폭동이 있다 하는 건 짐작했지만 외지에서 온 사람이야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여관을 나와서 불과 얼마 안 나와서 총부리를 내밀고 “손 들어라!” 하는 고함을 듣고 손을 들었다. 그래서 신분증명을 보이고 서울에서 잠깐 온 사람이라는 말을 해서 겨우 그냥 통과되었다.
그러나 그다음 조금 더 걷다가 이번엔 총소리와 함께 손들라는 고함을 들었다. 4-5인의 반군은 다짜고짜 나를 소위 인민군 군기대인 신한공사 사무소로 끌고 갔다.
거기는 경관이 약 15명 그밖에 합하여 약 20명이 벌써 잡혀 와서 매를 얼마나 맞았는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들은 나를 끌고 들어가서도 역시 곡절 모르는 매질이 시작되었다.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국군이 아니고 인민군이다…”라고 고함친다. 나는 이 말과 경관들이 잡혀 온 것을 보고 이 폭동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신분증명서를 보이니까 “이 자식 예수를 믿어? ×국놈의 앞잡이로구나” 하며 더욱 노기가 등등해지는 것이었다.
이보다 조금 후에 김상두 목사님도 잡혀 들어왔다. 그도 그런 욕설과 매를 아무런 반항과 변명도 없이 어린양처럼 소곳이 받고 있었다.
한참 매를 맞고 구석에 앉아 있노라니까 그들은 또 사람을 잡으러 가는 모양으로 거지반 나가버리고 파수 보는 사람이 두엇 남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실상 신이 나서 덤비는 중람은 불과 네 사람이었고 그 밖의 군인들은 다들 왜 이래야 되나 하는 걸 알지 못하고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좌익 인물로 군인 이외 사람은 불과 한 사람이 드나들었다.
나는 조용한 틈을 타서 우리를 지키고 있는 군인더러 “나는 서울서 온 사람인데 학교 교원이요. 지금 경관을 잡는 모양인데 나 같은 사람이야 왜 잡아오우. 인민을 위해 이런 일을 한다면 애먼 인민을 괴롭혀서야 되겠소” 하고 툭 말해보았다. 그랬더니 그 군인은 “나도 모르겠소” 하고 꽤 동정하는 빛이었다. 나는 그래서 옳다 됐다 하고 그 사람에게 나를 놓아달라고 애걸했다.
그랬더니 그는 자기 혼자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니 동료들이 들어오자 “저런 애먼 사람은 내보냄이 옳지 않는가” 하고 말하여 예상보다도 쉽게 나는 그 무서운 구멍을 벗어났다. 나는 거기서 여관까지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나 잡혔다. 별의별 곡절을 다 겪으며 여관에 오니 주인은 어디로 도망하고 없었다.
거리에는 군대와 학생들이 스피커로 또는 삐라로 “인민군의 위대한 공적으로 38선은 분쇄되었다. 오늘 오후 3시에 인민대회가 열린다” 하는 선전을 요란히 외쳤다.

3만 명의 시민대회

오후에 시민대회가 있었다. 여수 고을 사람들보다 근방 시골에서들 더 법석하여 모여들었다. 소위 인민공화국기가 이때에 나타났다. 모두 넷이었는데 셋은 종이에다 그렸고 하나는 헝겊에다 그렸다. 그리고 시골서 오는 사람들도 다들 조그만 깃발들을 들었는데, 특히 눈에 남는 것은 문창지[=창호지]를 뜯어서 기를 만들어 들고 온 것도 있은 것이었다. 프랑카드도 들었지만 그것도 신기한 말은 없었고 그저 늘 하는 정도의 말이었다. 사회를 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개회사는 걸작이었는데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여 시민대회를 하지만 내일모레 또 우리는 어떤 모임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감개가 무량합니다” 하는 말로 시작했었다. 스스로도 은근히 삼일천하를 상상하고 있는 듯싶었다. 축사는 학생연맹, 여성동맹, 노동조합, 남노당 이렇게 넷이 했는데 우스운 것은 이 네 단체의 축사가 전부 한 사람이 같은 말을 이리저리 바꾸어가지고 나가 읽었다. 그중 부녀동맹 것이 가장 박수를 많이 받았는데 그것만은 꽤 민족적인 비애를 지적하고 남북통일이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것인데 지금은 인민군의 과감한 투쟁으로 이것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의장단 5인을 선거하고 ① 내가 들어 있는 여수호텔(이것은 해방 후 노동조합에서 쓰던 건물이라 한다)을 접수한다는 것, ② 시민들이 시위 행렬을 하는 동안에 각 관공청을 접수한다는 것 등을 결의했다.
이 모임에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구경 겸해 모인 것이었다. 그러나 늙은 부인 측과 어린 학생 측이 열광적이었다. 내가 몇 늙은이를 붙들고 무엇이 그리 좋으냐고 물었더니, ‘아××놈들을 다 쏘아 죽인다니 기쁘지 않겠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방에서 민중과 관리의 거리가 이처럼 심각하게 멀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침대 밑의 군도(軍刀)

나는 그들이 호텔을 접수하기 전에 가방을 들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할 수 없이 나의 친척이 하숙하고 있는 집을 찾아가서 몸을 좀 숨겨주기를 빌었다.
그때 내 친척은 없었지만 그 주인은 이를 쾌락하여 내 친척이 있던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이제는 살았나 싶은 생각으로 조금 누워 있는데 문밖에서 총소리가 또 탕탕 난다.
이윽고 몇 사람의 반군 군기대원이 또 들어와서 내가 있는 방에도 문을 벌컥 열고 전지를 드려 비추었다. 나는 물론 아주 태연하려 애쓸 수밖에 없다. 그들은 나를 나오라고 고함지르고는 방 안을 발칵 뒤졌다.
이때다. 내 하늘이 무너지는 듯 놀라지 않을 수 없은 것은. 바로 내가 누웠던 침대 밑에서 길다란 군도 하나가 툭 튀어나오지 않았는가. 이것은 실로 청천벽력이었다. 나는 그래도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나는 이제까지 여수호텔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오. 여기 밥값을 치른 영수증이 있소. 그 군도에 대하여 나는 아무것도 모르오” 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 말을 믿을 리 없었다. 나는 다시 묶여 군기대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손을 묶인 채 하룻밤을 세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소변을 본다는 핑계로 뒤로 묶었던 손을 앞으로 묶이게 되어 조금 숨이 돌았다.

장교와 소고기

내가 누었던 침대 밑에 들어 있던 군도는 그 집 다른 방에 나 밖에 장교 하나가 뒤주 밑에 숨었다가 잡혀 동행했는데 그의 것이던 모양이었다. 그는 잡혀오는 길에 무수한 매를 맞아서 군기대에 닿을 때는 역시 얼굴을 몰라볼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장교다’ 해도 그의 하졸들이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장교는 “너희가 나를 몰라보느냐. 나는 너희들의 재무장관이 아니냐” 했다. 그래도 아들마저 “설마” 하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그곳을 놓여나라보는 자가 별로 없었다. 그는 다시 “너희들이 나를 몰라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혹시 나를 한 번밖에 만나보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난번에 너희들을 먹이려고 소를 잡았을 때 중간에서 그것이 자꾸 없어진다고 하여 내가 직접 너희 하나하나를 만나 사정을 물어보고 다시 소를 잡아 골고루 너희들에게 돌라주지 않았느냐. 이제도 몰라보느냐” 했다. 그제서야 “아, 재정관님. 이게 웬일입니까” 하고 몇 사람의 군인이 그에게 경례를 했다. 그는 다시 “나는 그동안 너희를 위해 한 번도 나쁜 일을 한 기억이 없다. 너희는 왜 나를 이렇게 구박하느냐” 하고 물었다.
그밤으로 그 군인들은 무슨 의논을 하고 그 장교를 새 구두, 새 옷을 입혀가지고 어디로 데려갔다.
이날 밤에 군기대에 잡혀 와 있는 53명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간단해서 선고를 받는 사람 왔다. 그것은 기적적으로 마음이 의젓한 군인의 호의를 입어서였다.
그러자니 내 주제가 말이 아니었을 건 상상할 수 있다. 몸은 온통 흙투성이였고 더욱이 발에는 구두가 없었다.
창피고 뭐고 돌볼 틈 없이 그 하숙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저 살아 나온 것이 기쁘기만 했다.
그러나 돌아와서 발을 씻고 있자 또 나를 잡으러 뒤쫓아 왔었다. 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본즉 내가 그런 꼴로 황급히 나온지라 도망해 나오는 줄 알고 어린애들이 일러바쳤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과히 애쓰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하숙집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인민위원회

나는 어떻게 좀 안심하고 묵을 수가 없는가 하고 생각했으나 도리가 없었다. 여관마다 사람을 받지 않았다. 함부로 사람을 들였다가는 어떤 봉변이 올지 모르니까. 그래서 길에서 어느 군인의 안내로 여행증명서를 얻어볼까 하고 인민위원회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엉뚱한 실수였다. 군인들이란 오히려 단순하여 이리저리 변통이 있었지만 거기는 오합지중[=오합지졸]이 모였기 때문에 그야말로 어떤 캄프라쥬[camouflage, 위장이나 속임수]가 통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내게 심사를 받으라고 고함쳤다. 나는 여기서 심사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군기대보다도 훨씬 조직적이어서 너무나 잔인하고 물샘틈없는 문초였다.
어려운 고비에는 이상한 용기가 나는 모양으로 나는 그 옆에 ‘위원장실’이라고 써 붙인 방으로 문을 쑥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겸손한 목소리로 ‘나는 잠깐 다녀가려고 서울서 왔는데 지금 이런 어려움을 당했으니 좀 편의를 보아 여행증명서를 발부해줄 수 없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점잖게 좀 기다리라 한다. 그래 거기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더니 한 사람이 들어오자 위원장이 그 말을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흥’ 하고 나를 심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곧 장정문으로 나왔다. 파수에게 위원장 동무를 잠깐 보러 왔었노라고 했더니 무사히 통과시켜 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 범의 굴을 다시 탈출한 것이었다.
인민위원회에는 반수 이상이 학생이었다. 앉아서 글을 쓰는 자는 거진 학생이었다. 이걸로도 이쪽 사람들의 문화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 말이지만은 군기대에서 묵는 밤에도 그들은 잡아온 사람들의 명부를 꾸민다는 것을 한 40명 것을 밤을 새웠던 것이다.
하숙집에 들러 걱정을 했더니 김해여관을 소개해주었다. 그래서 간신이 거길 찾아갔다. 가서 사정을 좀 기다랗게 말하며 좀 재워달라고 구청했더니 주인이 웃으며 들어오라 했다. 어떻게 반가웠는지—.

신판 데카메론

들어가니까 몇 사람이 앉아서 장기를 두고 있다. 말해보니 모조리 서울에서들 내려온 이들이다. 말인즉 장사를 하러 왔었다고 한다.
우선 이 어지러운 판에 장기를 두고 앉았는데 놀랬다. 하여튼 마음이 놓였다. “2층엔 유탄(流彈)이 위험하니 이리로 내려오우” 내가 가리키는 대로 2층 방에 들어가려니까 그들은 내게 이렇게 친절히 말해주었다.
나는 곧 그들과 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장사하러 왔다는 건 믿을 수 없는 말이고 그들도 바탕이 드러나면 죽기에 마땅한 이들임을 알았다. 그들도 역시 나처럼 아슬아슬한 판에서 애타고 있느니 차라리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고통 없이 시간을 보내자는 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장기뿐이 아니었다. 장기를 두다 말고는 가진 엽기적이고 음탕한 이야기의 꽃이 피는 것이었다.
나도 그것이 싫지 않은 것이 혼자서 애쓰던 때보다는 실상 어떻게 시간이 쉽게 가는지 몰랐었다.
그러나 여기라고 ×××성은 아니어서 이따금씩 군인 혹은 인민위원회에서 조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좌익운동에 좀 가담해 보았다는 ○이라는 친구가 나가서 그들 독특한 용어를 섞어 대꾸해 보내곤 하여 실로 무풍지대였다.
거리 바닥은 점점 반란군의 세상이 되는 듯싶었다. 처음에는 꽤들 꺼림직해 하던 시민들도 그만 그들의 교묘한 선전에 다들 휩쓸리고 마는 듯싶었다.
그들은 우선 쌀 배급을 백미만 3홉씩을 주고 전기를 주야로 보내고 이제는 38선이 완전히 터졌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모든 공장은 노동자의 손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고 모든 농민은 공출도 매상도 없이 살게 되었다고 선전했다. 이 선전은 주로 여학생들이 하였는데 이번 여수에서 여학생들의 역할은 참으로 커서 그들은 집집이 돌며 스파이도 하고 신문도 돌렸다.
신문은 「여수일보」(麗水日報)를 고쳐 「여수인민보」 창간호를 내었다. 그러나 그것은 창간호뿐 그다음은 나오지 못했다.
우리는 이런 가운데서 국군이 진작 반란군을 진압하러 오리라 믿고 기다렸지만 며칠이나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사실 시민들도 이런 기대가 어긋나서 점점 반란군에 협조하는 측이 많아졌다.
20일날 비행기가 내려와 정찰하고는 22일날은 비행기에서 삐라를 살포했지만 그 수효는 극히 적은 데다 반란군은 총을 놓으며 주우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아무도 주워보지 못했다. 반란군은 곧 삐라 내용은 이렇다 하고 발표했는데 “너희 반란군은 순천, 여수 등 호남선 일대와 진주, 마산까지를 점령했는데 내가 장관으로 당장 너희를 쓸 수는 없으나 속히 군무로 돌아가라. 속히 마음을 끌려고 두 시간 이내의 군무로 돌아가라” 했다고 했다. 삐라의 본시 내용은 신문에 난 대로이니까 말할 필요 없다.

드디어 국군의 총소리

22일 군함 7-8척이 여수 앞바다에 떠서 돌았지만 총 한 방 안 놓았다. 반군은 정부에서 타협하자고 왔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23일이었다. 때는 오후 2시 “타타타타타타탕…” 하는 기관총 소리가 마구 여수 고을을 흔들었다.
우리들은 ‘이제야 살았구나’ 하고 숨을 죽이고 국군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두어 시간 만에 총소리는 딱 끊기고 말았다. 또 그들은 ‘정부 군대가 왔다가 참패하고 달아났다’고 선전했다.
그날에 인민위원회에 유치되었던 사람은 40여 명이 무조건 학살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24일에는 아무 소식 없었다. 우리들의 의아와 초조는 말할 나위 없었다.
그런데 25일 새벽부터 또 그 요란한 국군의 기관총 소리가 멀리 울려왔다. 그러나 좀처럼 그 소리가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날은 저물고 어두워졌다. 그들은 거리로 ‘사격중지 사격중지’ 하며 고함치며 돌았다. 참으로 그날 밤은 또 시체처럼 조용했다.
그 이튿날인 26일에는 오후 1시부터 시작되었다. 국군의 사격은 실로 맹렬한 바 있었다. 잠시도 숨돌릴 여유없이 마구 퍼부었다. 어디서 어디로 쏘는지 방구석에 앉았으니 알 길이 없지만 참으로 장쾌했다.
거기 덩달아 함포 사격이 시작되었다. 쾅! 쾅! 울려오는 대포 소리는 여수 고을을 들어 뽑을 듯싶었다.

아아, 태극기!

26일 오후 2시 여수 뒷산에는 커다란 깃발이 올라갔다.
반군은 무슨 심사인지 ‘저것 보아라. 정부군이 백기를 들었다’ 하고 선전했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보나 뚜렷한 태극기였다.
“아아, 태극기!” 하고 우리들은 부르짖고 싶었으나 꾹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 날도 물과 바다에서 사격은 계속되었다. 오전 10쯤이다. 2층으로 올라가 형세를 살피던 이가 뛰어 내려오며 ‘아, 백기가 꽂혔다’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우르르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참으로 여수 고을 여기저기 우뚝우뚝한 집마다 백기가 올라간 것이었다.
우리도 이불 속을 뜯어서 백기를 만들어 띄웠다.
얼마 안 있어 태극기가 집집이 올랐다. 국군은 드디어 들어왔다. 요란한 만세 소리에 우리도 뛰쳐나갔다.
거리에 널려진 시체를 나는 비로소 보았다. 반란 군인은 물론 남녀 학생들이 피를 흘리고 꺼꾸러진 시체가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풍파 지난 후의 여수 고을은 그냥 흉흉했다. 여기저기 총소리가 계속되고 이집 저집의 곡성이 낭자했다. 그렇지만 이제야 살았구나 하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여수의 모습은 분명 위대한 교훈을 살리려는 의기가 보였다.
임시 수용소로 정한 국민학교에 우리도 수용되어 밤에는 바다 방파제 차가운 돌 위에서 여수 시민들과 더불어 마지막 떨어 새움으로써 신산스러운 꿈은 드디어 막을 내려 나는 특별 군용차에 편승하고 30일 서울로 향하였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나

나는 차를 타고 오면서 이일 저일 깊이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미친 사람과 같이 상혈[上血, 피가 위로 솟구침]된 눈으로 마구 사람을 때리고 총으로 쏘고 하게 한 자가 누구냐 하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두말할 것 없이 그들을 충동시킨 것은 공산주의자다. 그러나 죄는 공산주의자에게만 있느냐. 우리는 고즈넉이 생각해야 할 일이다.
오랫동안 압박과 착취만 받아온 민중이라 덮어놓고 권세에게 반항심을 품는 게 이 백성의 병이라면 몰라도 왜 이처럼 민중의 마음이 비꼬여졌는가 말이다. 구멍이 있기에 도적이 드는 것이 아닌가. 왜 공산주의자들이 준동할 수 있게 민관[民官] 두 사이가 이처럼 벌어져야 하느냐는 말이다.
미욱한[하는 짓이나 됨됨이가 매우 어리석고 미련한] 듯하면서도 민중은 현명하다. 어서 모리배를, 친일파를 숙청하라. 어서 탐관오리를 내몰라. 이것이 과감히 단행되지 않는다면 여수, 순천만이 아니라 온 나라가 뒤집히게 되리라 하고 외쳐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각 기관에 숨어 있는 공산 뿌럭의 완전한 소탕이야말로 조국 건설의 중대한 과업이다. 모름지기 그들의 전술을 빌려 무자비한 숙청을 잠행해야 할 것이다.

 
 
 

2022년 11월호(통권 7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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