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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22년 10월호)

 

  처음 교회를 찾아서(1)- 아르메니아 방문기
  

본문

 

1. 캅카즈 3국을 여행하였다. ‘캅카즈’는 영어로 코카서스 지방을 가리키는데,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산악지역으로 유럽의 동쪽과 아시아의 서북쪽을 말한다. 이번에 방문한 나라는 ‘캅카즈 3국’이라 불리는 아르메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세 나라이다.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오랫동안 지녀온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순례지와 다름없었다. 주로 방문한 곳이 교회와 수도원이었기 때문이다. 십자가 수집을 위해 벼르던 방문이었다. 독일 복흠한인교회 초청 일정 사이에 여행 프로그램을 찾았는데, 한 여행사를 통해 7월 26일부터 8월 8일까지 꼭 2주 동안 다녀올 수 있었다. 7명이 함께한 단출한 그룹이었다.
2년 반 동안 코로나19로 막혔던 하늘이 모처럼 감염병이 느슨해진 틈을 타 비로소 열렸다. 그런데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인력을 줄이고 업무마저 축소한 까닭에 갑자기 늘어난 항공 수요를 감당하기 버거워 보였다. 변화된 디지털 티켓과 자동탁송 시스템이 낯설었다. 게다가 항공사(루프트한자) 노조의 하루 파업 경고와 여전한 코로나 감염 위협으로 인해 아르메니아로 가는 길은 험난하게 느껴졌다.
오스트리아 빈 공항에서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으로 가는 비행기를 환승하였다. 빈 공항은 서유럽 밖 동부와 중부 유럽, 발칸과 캅카즈, 그리고 중동으로 가는 많은 여행객들이 환승하는 허브 역할을 한다. 유럽연합(EU)에 속하지 않은 주변 나라의 국민에게 빈은 서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처럼 인식될 것이다.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붐비는 승객은 대체로 서유럽의 눈으로 보면 변두리 나라와 도시들로 가는 동쪽 사람들이었다.
한때 서유럽을 지키는 방어벽과 같았던 빈은 오래도록 유럽에서 동서를 구분하는 경계 도시였다. 과거 오스만튀르크가 신성로마제국을 침략하자 서방 세계는 위기의식을 키웠고, 이슬람 포비아에 휩싸였다. 이슬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고 초승달 빵을 씹어먹었다는 말도 있다. 크루아상을 비롯해 초승달 모양의 빵들의 연원이 오스트리아 빈인 배경이다.
여행의 목적지 아르메니아는 튀르키예(옛 터키)나 우크라이나처럼 유럽을 지향하는 나라보다 훨씬 더 먼 동쪽에 존재하였다. 예레반 공항에 도착한 때는 한밤중이었다.

2. 아르메니아는 현실 국가 중 하나였다. 예루살렘 성지순례에서 처음 들은 아르메니아란 이름은 성묘(거룩한 무덤)교회를 후견하고 관할하는 여러 교회 중 하나였다. 그리스정교회, 가톨릭교회, 시리아정교회, 콥트교회, 에티오피아정교회와 더불어 아르메니아사도교회는 예루살렘 최고의 성전에서 어엿한 주인공이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도 마찬가지다. 가로세로 1㎞인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유대인, 무슬림, 그리스도인(가톨릭), 아르메니아인 네 구역으로 나뉜다. 긴장과 조화가 병존하는 이곳은 멀리 로마 시대부터 7세기 이슬람의 출현, 십자군 전쟁 등 전쟁과 평화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 아르메니아사도교회 총대주교좌도 있다.
아르메니아는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멀고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나라이지만, 2013년 11월 부산에서 열린 제10차 WCC 총회에서 아르메니아사도교회의 수장 가톨리코스 카레킨 2세가 개회예배 설교를 하면서 이 나라에 대한 필자의 인식이 구체화되었다. 당시 부산 벡스코 전시장에서 ‘세계의 십자가 전’을 열었던 필자는 나무로 빚은 소박한 두 개의 아르메니아 십자가도 전시하였다. 어느 날 누군가 복도에 놓인 화이트보드에 우아한 곡선으로 연결한 아름다운 십자가를 그려 놓았는데, 바로 아르메니아 십자가였다. 자연스레 아르메니아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고, 세계 최초의 교회가 있는 그곳 예레반에 가 보고 싶었다.
아르메니아는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소아시아 안디옥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만날 수 있다. 성서에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1세기경 바돌로매와 다대오(막 3:18)가 아르메니아에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후 301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국교화한 나라가 되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로마의 경우 313년에 비로소 그리스도교 신앙이 자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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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마이클 콜린스 외)에 따르면 황제 티리다테스(Tiridates) 3세는 교회를 박해하였는데, 당시 조명자(照明者)로 불리던 설교자 그리고르(Grigor, 257-332)가 황제를 설득하여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왕은 백성들에게 신앙을 장려하였고, 전국적으로 개종이 이루어져 국가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 이런 방법은 이후 유럽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수용한 일관된 방식이 되었다.
아르메니아사도교회는 ‘동양정교회’(Oriental Orthodoxy)에 속한 교회이다. 에베소공의회와 칼케돈공의회 결의를 거부한 서아시아와 인도의 시리아정교회, 이집트콥트교회, 에티오피아테와히도정교회가 동양정교회의 일원이다.

3. 예레반의 첫 방문지는 마테나다란(Matenadaran) 박물관이다. 이곳은 아르메니아 문화의 심장과 같은 곳으로 아르메니아사도교회의 성서 사본을 전시 중이다. 아르메니아어 성서는 어법의 아름다움과 번역의 정확성 측면에서 비할 데 없이 탁월해 ‘번역본 중의 여왕’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5세기에 수도사 메스로프 마쉬토츠(Mesrop Maschtoz)는 아르메니아 알파벳을 만들어 가르쳤는데, 그 노력의 결과 최초의 아르메니아어 성서가 번역되었다.
문화의 심장이라고 한 까닭은 성서를 옮긴 아르메니아어에 대한 자긍심 때문이다. 성서 사본들은 저마다 캘리그래피의 미학을 자랑했다. 컬러 삽화와 꼼꼼한 제본은 덤이었다. 성서를 옮겨 쓰는 데 대한 애경심은 아일랜드 트리니티대학교 박물관에서 본 ‘켈즈 성서 사본’(The Book of Kells)과도 비교되었는데, 모두 필사에 기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모국어에 대한 사랑을 알파벳으로 다양하게 표현했는데, 십자가 작품에도 예외는 없었다.
박물관의 또 다른 주요 전시품은 아르메니아교회의 성유이다. 아르메니아 전역에서 거둔 꽃과 허브들을 가지런히 모아 표본전시를 해두었다. 대표적인 꽃과 허브 40여 가지는 7년 동안 묵혀 성유로 거듭난다. 성별한 기름은 축성 후 전국의 교회로 배분하는데, 이전에 보관 중인 성유와 반반씩 섞어 종유식에 사용한다. 성유 제작은 아르메니아사도교회의 일체감과 함께 역사적 교회와 오늘의 교회가 신앙적 일치를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민족의 사랑을 받는 꽃들과 흔천한 풀들로 빚은 거룩한 기름은 얼마나 복되고 친근한가?
아르메니아 땅은 오랫동안 성서의 고향처럼 여겨졌다. 에덴동산의 근원을 따지면 아마 자기들이 살고 있는 그 땅이 창세기가 말하는 에덴동산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믿는다고 한다. 사실 그곳은 아라랏산이 가까이 있으니 성서의 지리와 친숙하다. 그러니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상상력도 터무니없지는 않은 듯하다.
그런데 아르메니아를 에덴동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황무지였다. 마치 영화 〈바그다드 카페〉의 황량함을 느끼게 하는 이곳이 에덴이라니, 과연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어떤 믿음에 근거해 자신들이 사는 그곳을 에덴동산이라고 상상하였을까?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에덴은 자연과 사물이 고루 갖춰진 완벽한 공간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인류가 애초에 받은 선물은 인간이 그저 놀고 먹는 데 만족스러운 삶의 자리가 아니라, 조화와 질서 그리고 건강한 노동과 수고를 통해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4. 아르메니아는 예레반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예레반에 있는 모교회 에치미아진(Edschmiatsin) 대성당은 그 중심이다. 모든 예배당과 수도원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열이면 열 모두 아라랏산에 십자가를 얹은 모양의 건축 양식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또 거룩한 공간의 중심과 주변 어디서든 돌십자가가 있다. 이를 ‘카치카르’(Khachkars)라 하는데, 십자가를 뜻하는 ‘khach’와 돌을 뜻하는 ‘kars’가 합쳐진 단어이다. 이 돌십자가는 아르메니아만의 고유함이다.
세계 첫 교회라는 명예를 지닌 에치미아진 대성당은 독생자 교회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곳은 ‘아르메니아의 바티칸’이란 별명으로도 불린다. 그 역사는 기원후 3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러 예배당 건물 중 최초의 예배당은 수리 중이어서 들어갈 수 없었지만, 예배당마다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평일인데도 예배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열린 예배당의 모습에서 아르메니아교회의 건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기 세례를 받으려는 가족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열 명 남짓 규모의 가족 행렬은 넓은 경내를 마치 퍼레이드 하듯 줄지어 다녔다. 명절을 맞이하듯 잘 차려 입었는데, 맨 앞사람은 흰 수건과 세례초를 담은 바구니를 들었다. 관광객도 자연스레 드나드는 예배당에서 열린 세례식 장면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 사제는 아기를 안고 마치 세수를 시키듯 얼굴과 이마를 씻겨 주었다.
근처 립씨메(Hripsime)교회에서 본 결혼식 장면도 인상깊었다. 정교회는 의자 없이 대개 서거나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는데, 마치 천장이 높은 동굴 안에서 구유를 경배하는 느낌이었다. 사제는 친밀한 미소로 신랑과 신부를 이끌었다. 드나드는 하객들은 부지런히 성호경을 그었다. 예배당을 조심스레 뒷걸음질로 나서면서 정면을 향해 예의를 표시하는 태도는 공경 그 자체였다. 아르메니아에서 예배당은 일상의 자리이고, 또한 천상의 공간이었다.
이웃 츠바르노츠(Zvartnots)에 있는 옛 원형교회 유적지는 여전히 발굴 중이었다. 전통이 깊은 아르메니아답게 교회는 구체적인 현실과 역사적인 유물로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는 오랫동안 로마, 아랍, 몽골, 페르시아, 오스만튀르크 등의 침략을 당했고, 최근까지 소련의 지배 등 이웃 민족으로부터 고통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튀르키예가 자행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은 아직도 진상이 온전히 규명되지 않았다. 소련 시대에 곡물창고로 쓰인 예배당은 1991년 12월 이후 비로소 복원되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교회가 신심과 전통을 지켜온 일은 기적같은 일이다.
정치적으로는 지금도 옛 소비에트를 계승한 독립국가연합(CIS)의 일원이지만, 지나가는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정치적 유산은 눈꼽만큼도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 예레반 시내 중심에 있는 공화국 광장에 레닌 동상이 우뚝 서 있었는데, 철거 후 빈 자리에 대체물을 고민하다가 그냥 비워 두기로 했다고 한다. 어디를 가나 가장 소중한 곳에 어김없이 자리한 생명나무 십자가들은 무신론적 지배를 거부한 고난과 부활의 산 증인과 같았다. 아르메니아사도교회의 신앙적 자부심이다.
예레반에서 멀지 않은 동굴 수도원 게가르트(Geghard)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4세기에 절벽 위에 처음 기초를 놓았는데, 현재 예배당은 1215년에 건축한 것이다. 곁에 있는 바위산 내부의 동굴 예배당은 수도사들이 직접 파서 만든 것으로 무려 천년이 걸렸다고 한다.(4-13세기) 동굴 예배당 제단 쪽으로 두 개의 문이 나 있다. 왼쪽 문은 예배당을 향하지만, 오른쪽 문은 깊고 캄캄하기만 하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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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가르트 수도원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창 십자가’ 이미지가 있었다. 듣자니 현재 여러 교회 전통에서 창 십자가의 저작권을 서로 주장하고 있으며, 최초라는 명예를 얻기 위해 경쟁 중이라고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수도원으로 손꼽히는 곳은 코-비랍(Khor-Virap)이다. 코-비랍 수도원은 아르메니아의 신앙적 뿌리와 정체성을 품은 가장 대표적인 성소이다. ‘코-비랍’은 ‘깊은 갱(坑)’이라는 뜻인데, 성스러운 감옥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수도원의 가장 큰 장점은 아라랏산을 배경으로 서 있다는 점이다. 턱 아래 튀르키예 국경선이 내려다보이는 그곳은 아슬아슬하게 경계에 위치한다.
인근 산 위에 세운 노라방크(Norawank) 수도원도 유명하다. 천년 넘게 수도원 안과 외벽에 새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카치카르(돌십자가)는 민족의 상처와 고통처럼 느껴졌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아라랏산에 대한 애정은 가히 ‘경외’(敬畏)라고 할 만하다. 대홍수가 끝난 후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다는 바로 그 산을 말한다.(창 8:4) 아르메니아 고원에 홀로 우뚝 선 아라랏산은 한여름에도 만년설을 이고 있는데, 해발고도는 5,165m에 이른다.
유감스럽게도 아라랏산은 아르메니아 국경 밖 튀르키예에 속한다. 코-비랍에서 가장 잘 볼 수 있지만, 국경선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에 튀르키예 사람들과 종종 시비거리가 된다. 튀르키예 사람들이 묻는다. “너희는 우리나라 땅에 있는 아라랏산을 왜 너희 것처럼 사용하느냐?” 그동안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아라랏산은 신앙의 산이며, 마음의 고향으로서 가장 위대한 상징이었다. 심지어 국가 상징물에도 쓰인다. 그러니 아르메니아 사람들도 할 말이 많았다. 튀르키예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꾸한다. “그러면 초승달이 너희 것이냐? 왜 너희 국기에 초승달을 사용하느냐?” 국기에 초승달과 별을 사용한 튀르키예의 전통에 대해 “초승달은 너희 것이냐”고 멋지게 응수하는 셈이다. 튀르키예가 국기 속에 초승달을 독점할 수 없듯이, 아르메니아 고원의 아라랏산이 오롯이 튀르키예만의 것이 될 수 없다는 해석이다.
아르메니아 북쪽, 조지아로 가는 길에 있는 사나힌(Sanahin) 수도원과 아흐파트(Haghpat) 수도원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두 개의 수도원은 마치 공중 정원처럼 보이는데, 알라베르디 도시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벼랑 위 평탄한 지대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수도원까지 이동 수단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어디를 가나 순례자 차림의 아르메니아인 방문객들로 붐볐다. 가족 단위 방문과 청소년들의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두 수도원은 오래도록 왕궁에 속하였는데 특히 대학 구실을 하면서 아르메니아 학문의 산실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놀랍게도 수도원의 바닥은 묘비를 밟고 다녀야만 이동이 가능할 정도로 돌십자가 카펫과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수도원 예배당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선한 영의 기운을 얻고자 하는 듯하였다.

5. 아르메니아 여정의 끝은 조지아로 통하는 국경선까지다. 여행의 1차 종착지가 아르메니아-조지아 국경에 위치한 사다클로 검문소에 맞춰져 있는 셈이다. 조지아를 향해 북으로 이동하는 중에 실크로드 카라반 숙소를 구경하였다. 예전에 25km 지점마다 있던, 낙타와 말들을 보호하고 대상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여인숙이었다. 어느덧 세림 고개(2,410m)를 넘었고, ‘파란 진주’라 불리는 세반 호수를 지났다.
하이라이트는 노라투스(Noratus) 공동묘지 관람이었다. 여기에서 돌십자가의 진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소인국의 거석 문화를 보듯 붉은 빛을 한 묘비석들은 천년을 지켜 온 다른 세상이었다. 중세시대 9세기부터 17세기까지 계속 이어온 800여 개의 돌십자가는 믿음의 증인처럼 보였다. 한결같이 아르메니아 생명나무 십자가를 새긴 비석의 크기와 문양은 제각각이었다. 게다가 돌 속에 담긴 철분이 붉게 녹아내린 십자가 묘비는 모습만으로도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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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의 비석들은 단순히 무덤만을 알리는 표식이 아니었다. 때론 예배당을 잃은 곳에서 거룩한 공간을 의미하는 거룩한 표지석이었다. 마을의 예배당이 파괴되어 예배할 공간이 없을 때 사람들은 돌십자가 둘레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런 돌십자가들을 노라투스 공동묘지에 가져다 둔 것은 나중 일이다.
어떤 묘비석에는 당시의 긴박한 뉴스가 연속된 만화의 장면처럼 새겨져 있었다. 뉴스는 비극의 지점에서 멈춰 여러 세기를 이어 진실을 전해주고 있었다. 어느 혼인식 장면이었다. 상 위에 푸짐한 음식이 차려져 있고, 그 앞에서 사돈이 된 두 집안의 부모가 춤을 춘다. 그때 외부에서 침입한 창을 든 마병은 신혼부부의 단꿈을 무참히 파괴하였다. 이는 아르메니아 역사의 비극적인 단면을 돌비에 새겨 고발하는 것이었다.
아르메니아에 있는 5만 개가 넘는 돌십자가는 똑같이 생긴 것이 하나도 없다. 저마다 독자적인 문양이 자유롭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돌십자가 제작법은 가족을 통해, 또는 전통적인 공예 기술과 문양 예술을 전수하는 도제 수업을 통해 계승되었다. 이러한 신앙 유산은 아르메니아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진 아르메니아인 공동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아르메니아는 온 나라가 십자가 보물창고였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신앙유산이지만, 무엇보다 조형미가 뛰어난 세계문화유산이다. 내 방식으로 아르메니아 십자가를 이해하였다.
① 기본 모양은 라틴 십자가를 원형으로 한다.
② 사방 가지 끝마다 세 봉오리 형태로 삼위일체를 고백한다.
③ 전체적 의미는 생명나무이다.
④ 십자가 위는 하나님, 하늘, 파라다이스를, 아래는 땅과 인간을 표현한다. 그리고 십자가는 이 둘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⑤ 십자가 밖의 공간은 창작자가 자유롭게 장식하되, 시작도 끝도 없는 조형미를 표현할 수 있다.
⑥ 돌십자가는 기념비, 묘비, 부조 등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⑦ 나무로도 생명나무 십자가를 조각하여 만든다.

6. 아르메니아 북쪽 딜리잔은 휴양도시였다. 초록의 숲으로 가득한 이곳은 그동안 본 아르메니아의 풍광과 전혀 달랐다. 골짜기를 따라 길게 형성된 평화로운 마을을 멀리서 구경하였는데, 러시아 소종파 공동체인 몰로칸(Molokans)이었다. 그들은 19세기 러시아 차르 체제에서 이단자로 처벌을 받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 등지로 추방된 러시아 그리스도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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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미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재세례파 공동체 아미시와 메노나이트를 연상하게 하는 몰로칸은 평화주의, 공동체 조직, 영적 모임 등 비슷한 관행에서 서로 통한다. 스스로를 영적 그리스도인으로 불렀으며,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러시아정교회와 같은 제도화된 형식주의를 거부하였다. 이를테면 사순절 금식 기간에 우유 소비가 가능하다고 허용한 정교회 전통을 거부하였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 이민자라 할 수 있는 몰로칸을 받아들였지만, 숫자로 따지자면 실은 모국 아르메니아를 떠난 사람들이 훨씬 많다. 아르메니아는 디아스포라 대국으로도 유명하다. 수천 년에 걸친 시련과 고통 속에서 아르메니아인은 스스로 난민의 길을 선택하였고, 평화를 찾아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앞서 언급했듯,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형성된 아르메니아인 구역이 대표적인 예이다. 현재 300만 인구가 모국 땅에 머무는 반면, 인구의 3배 규모인 800만 명이 나라 밖에서 살고 있다.
어느덧 4박 5일간 우리 그룹을 안내한 아르메니아인 하콥과 작별하였다. 그는 자신이 제작에 참여한 가이드북 Armenien을 소개하며 서명해 주었다. 그리고 더 깊이 아르메니아를 공부할 사람을 위해 아르메니아 연구서 목록 복사본도 나누어 주었다. 자기 조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이국의 여행자들에게 진실을 알리려는 그의 모습에서 가이드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이후 세 나라 국적을 지닌 우리 일곱 명은 사다클로 검문소에서 조지아 입국심사를 마치고 국경을 넘었다. 국경 건너편에는 조지아인 가이드 에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송병구|색동감리교회 담임목사이다. 십자가에 담긴 거룩한 상징에 주목하여 오랫동안 십자가를 수집하고 연구하였다. 저서로 『십자가 순례』, 『송병구 목사가 쉽게 쓴 십자가 이야기』, 『상징: 성경을 보는 눈을 뜨다』 등이 있다.

 
 
 

2022년 11월호(통권 7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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