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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나의 목회 수기]
교회와현장 (2022년 8월호)

 

  김달성 목사의 민중교회 이야기(1)
  

본문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른바 ‘양과 염소의 비유’에 담긴 이 말씀은 나로 하여금 민중교회를 섬기도록 견인하고 추동한 힘이다. 이 지면을 빌려 그 민중교회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과 동일시한 사람들을 교회의 중심에 세우며 새로운 사회를 도모한 이야기이다.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한 나의 선교활동은 1979년부터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민중교회 이야기를 풀기에 앞서, 이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나는 1979년 2월에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했다. 노동자와 함께 하는 목회, 노동자를 섬기는 선교를 하기로 작정한 나는 졸업논문을 학교에 제출하자마자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 졸업식을 하기도 전에 뛰어든 그곳은 구로공단이었다. 평생 노동을 하려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를 섬기는 일을 하기 위해서 1-2년 정도 노동체험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내가 공단에 들어가면서 가슴에 품은 말씀이 있었다. 빌립보서 2장 1-11절이었다.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의 ‘자기 비움’을 역설했다.
그러나 노동체험은 내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들어간 곳은 3,000여 명 되는 생산직 노동자가 하루 열두 시간씩 주야 2교대로 돌아가며 일하는 공장(대한광학)이었다. 그곳에서 3개월 만에 각혈을 하고 말았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육체노동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노동이었던 것이다. 과거에 앓았던 결핵성늑막염이 악화되어 오른쪽 폐에 결핵균이 퍼져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퇴사한 뒤 고향 청주에 있는 집으로 내려가 약을 복용하며 요양을 했다. 시간이 흘러 건강을 조금 회복한 뒤, 희망교회의 부름을 받아 상경했다. 1979년 10․26 사건 직후였다.

희망교회 이야기

희망교회는 판자촌에 있었다. 그 판자촌은 행정구역으로는 서울 동작구 사당3동 산22번지, 서울국립묘지 뒷산 너머에 있는 산비탈에 형성된 동네였다. 1970년대 후반 인구 약 3만 명이 살고 있던 사당3동은 모두 33개 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중 14개 통이 무허가촌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서울 각지에서 삶의 터전을 철거당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 사유지 야산에 판자나 벽돌로 집을 지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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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희망교회에 부임한 때는 1979년 11월 말이었다. 사당동 총신대 입구 대로에서 조금 들어가 남성초등학교 옆 좁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1km가량 올라가면 보이는 초라한 건물에 교회 이름이 적힌 작은 간판이 달려 있었다. 그 조그마한 간판이라도 없었다면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주택 건물을 교회로 사용하고 있었다. 면적이 10평 정도인 교회 건물 역시 벽돌 벽에 기와를 얹은 무허가 건물이었다. 길옆에 일자로 길쭉하게 서 있는 건물 한쪽에는 작은 방 하나와 부엌이 꾸며져 있고, 나머지는 교회 모임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 작은 방에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야 고작 옷가지 등을 넣은 가방 1개와 책이 담겨 있는 라면박스 몇 개가 전부였다. 짐을 풀자마자 교회 바로 위에 붙어 있는 판자촌을 둘러보았다. 북향인 산비탈에 게딱지처럼 달라붙은 수백 채의 판잣집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빼곡히 박혀 있었다. 태어나서 이런 동네를 처음 보았다.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물지게로 물을 길어 가파른 골목을 힘겹게 오르는 사람, 식사 준비를 하느라 쌀과 콩나물 봉지를 양손에 들고 퇴근하는 아줌마, 새끼줄에 끼운 연탄 두 장을 들고 언덕을 오르다 추운 날씨에 손을 호호 불며 서 있는 꼬마, 그리고 좁은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아이를 볼 수 있었다.
1975년 말에 희망교회가 그 지역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교회 주변에는 약 600세대, 3,000명 정도의 주민이 판자촌에 살고 있었다. 그동안 당국의 철거 종용과 재개발을 노린 외부인들의 투기 때문에 많은 집이 철거됐다고 했다. 그 지역조사에서는 역시 빈곤 문제가 가장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민 중 70% 이상이 완전 실업자이거나 불규칙한 단순노동 혹은 행상 등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실정이었으며, 한 달 평균 수입이 5만 원 미만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90%를 넘었다. 그다음으로는 주택 문제가 중요했는데, 무허가 건물에서 늘 붕괴 위험을 안고 불안하게 살면서 지속적으로 철거 압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무허가 판자촌에서도 세를 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무허가 판잣집마저도 소유하지 못한, 훨씬 더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희망교회에 부임한 첫 주일에 15명의 성도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첫 주일을 보낸 뒤 성도들의 가정을 돌며 심방을 했다. 성도들은 대개 맞벌이를 했기 때문에 주로 밤에 집으로 찾아가 예배를 드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년과 어린이들의 집도 방문했다.
판자촌에 사는 날이 더해지면서 나는 우리 교회가 가난한 지역 주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겨울 동안 준비하여 이듬해 봄부터 시작한 사업들은 세 가지였다.
첫째, 야간학교다. 교회 주변 지역에는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거나 중퇴한 뒤 공장에 다니거나 집에서 놀고 있는 청소년이 많았다. 야학의 주요 대상은 바로 그들이었으며, 교사는 주로 대학생 혹은 대학원생이 맡았다. 희망교회에서 운영하는 야학은 흔히 볼 수 있는 검정고시를 위한 야학은 아니었다. 학생들이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올바른 의식을 갖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었기에, 수업 과목은 한문, 생활영어, 시사, 역사, 경제, 근로기준법, 음악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야학은 희망교회가 그 지역에 세워진 초기부터 추진해 온 사업으로서 잠시 중단되었다가 재개된 것인데, 그해 봄에 30여 명의 학생이 모여 함께 공부했다. 1년 과정으로 교회에서 매일 저녁에 진행되었으며, 강의식과 토론식 수업을 병행하였다.
이렇게 1년 정도 지나자 학생들 가운데 변화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의식과 생활이 변화된 것이다. 집에서 할 일 없이 빈둥빈둥 놀면서 말썽만 피우던 아이가 직장에 들어가 성실하게 일하게 되었고, 중학교를 중퇴한 아이가 검정고시 공부를 하여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직장에서 자기 권리를 되찾는 등 변화가 생겼다. 전라도 순창이 고향인 이진호(가명)는 길거리에서 야학 모집 포스터를 보고 야학에 들어온 학생이었다. 특히 한문을 전혀 몰라 신문 읽기가 어려웠던 그는 생활에 불편을 느끼다가 마침 한문을 가르친다는 광고 내용에 이끌려 야학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한문만 배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사회와 세계에 대하여 점점 눈을 뜨게 되고, 나아가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는 어디이고,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3년 만에 상경하여 선반 기술을 배운 그는 직장에서 노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노조를 만들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동료와 준비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자취방을 옮겨 다니며 근로기준법 등을 직장 동료와 함께 공부하고 회사의 실정을 서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모임이 회사 측에 알려지면서 그는 회사 측의 요주의 인물로 주목을 받았고 결국에는 회사에서 쫓겨났다. 5·18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전두환 정권 시대의 노동사회 분위기가 그랬었다. 살벌한 공안정국은 노동사회의 민주화의 싹을 애초부터 자르고 노조 운동가들을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버리는 매카시즘적 광기를 부렸다.
야학이라는 장에서의 변화는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에게도 일어났다. 대구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모범생으로 고교를 졸업한 뒤 서울의 명문대학에 진학한 김세진(가명)이 우리 야학에 교사로 들어온 것은 1980년 가을학기 때였다. 처음에 그가 들어온 동기는 단순히 시혜적인 입장에서 가난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야학에 들어와 그들과 부대끼며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목격하자, 자신이 부끄럽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이제까지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 야학 학생들과 같은 가난한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점점 시혜적인 입장이 아니라 섬기는 자세로 야학에 임하게 되었다. 고향에서 매달 부쳐 주는 돈으로 편하게 하숙을 하던 그는 자취로 생활을 바꾸면서 남는 돈으로 야학을 도왔으며, 이러한 사실이 이듬해에 알려져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는 학교에서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공부와 취미활동에 몰두하던 그가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되었고 3학년 2학기에는 학교에서 징계 처분을 받아 군대에 강제 징집을 당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정권이 바뀐 뒤 그는 복학해 뒤늦게 졸업을 했다. 야학에서 우리는 음악시간은 물론이거니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래를 많이 불렀다. 〈사노라면〉은 그 가운데 하나다.
희망교회가 지역주민을 섬기고자 전개한 또 하나의 프로그램은 의료진료 사업이었다. 이 역시 희망교회 설립 초기부터 실시했던 사업이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교회에서 진료를 했다. 진료 내용은 일반 진료와 치과 진료였다. 진료는 의대, 약학대, 간호대, 치과대의 자원의료봉사단체들이 맡았다. 서울대, 가톨릭대, 연세대에서 특히 수고하였다. 진료비는 받지 않았다. 다만 진료에 대한 신뢰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주민의 자존감을 고려해 약간의 약값만을 받아 약을 구매하는 데 충당하였다. 당시에는 지역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되기 전이었고, 또한 지역주민이 다니는 직장은 대개 작은 규모여서 의료 혜택이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형편상 큰 진료는 하지 못하고 사소한 진료만을 할 수밖에 없어 늘 안타까웠다. 물론 중환자를 대학병원 등으로 연결하여 치료받도록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항상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희망교회 설립 초기에 교회에서 주관하여 지역의료보험조합운동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지만 정착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되기 이전에 가난한 지역에서 의료조합운동을 시도한 일은 매우 의미가 크다고 본다.
희망교회가 실시한 세 번째 사업은 판자촌 지역주민의 요청에 따라 시작한 어린이집이었다. 어린이 교육 장소 역시 교회였다. 7-8평 정도의 공간이 예배당, 야간학교, 어린이집, 진료실 등 그야말로 다용도로 쓰인 것이다. 어린이집 교육비는 간식비 정도만 받았으며, 교사들의 월급은 감리교 본부 선교국의 지원으로 충당하였다. 주민들은 늦은 저녁시간까지 아이들을 보살펴주는 일종의 탁아원을 간절히 원했으나, 시설 미비로 도저히 불가능해 항상 안타까웠다. 오전에는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오후에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초등학생들을 위해 공부방을 개설하여 그들을 돌봤다.
이 외에도 주민의 요청으로 어머니교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주부들에게 한글, 한문, 생활영어 등을 가르쳤다. 이것 역시 지식을 가르침과 동시에 의식의 변화를 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가령, 한문 시간에 ‘撤去’(철거)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 한자 자체를 익힐 뿐만 아니라 자기 동네의 철거 문제를 놓고 토론하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을 기획하고 총괄한 나는 교회 한쪽에 꾸며진 방에서 생활했다. 그 방은 숙소이자 교회 사무실이었다. 생활비는 교단 본부 선교국에서 지원하는 5만 원이 전부였다. 가끔 교인이나 유치원 자모들이 김치나 밑반찬을 갖다주기도 했지만, 평상시에는 스스로 모든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교회 청년들과 야학 학생들은 나와 함께 자취방에서 식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엔 그들이 음식을 장만하거나 설거지를 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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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교회 교인들의 숫자는 적었지만, 가난한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순간은 일주일의 생활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랑하는 교우들과 함께하는 성경공부 시간은 또 다른 은혜의 시간이었다. 청년 노동자들과 소수의 대학생으로 소그룹 성경공부를 진행했다. 먼저 참여자들이 성서 본문을 돌아가며 읽고, 그 본문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해설을 들었다. 이후 자유롭게 토론하며 생명의 떡을 나누었다. 마지막에는 참여한 사람들이 돌아가며 기도한 뒤 준비한 간식을 먹고 헤어졌다. 나의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진지하게 고민하던 당시의 대화를 간략히 정리해본다.(토론자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주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

성서 본문 마가복음 6장 34-4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나의 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4복음서, 즉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라고 여겨집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배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41절에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식사기도 모습이고, 37절의 데나리온은 당시의 화폐 단위로서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 정도에 해당합니다. 또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가난한 자나 어린이의 점심 요기 정도 되는 분량입니다. 배불리 먹은 사람이 오천 명이라고 하는데, 이 숫자는 20세 이상 성인 남성을 말하는 것으로 부녀자는 제외된 숫자지요. 그러면 이 정도에서 자유로운 토론에 들어가 봅시다.
박인규 오늘의 말씀을 보면서, 제일 먼저 느낀 점은 예수님이 인간 육체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빈들에 있던 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이 배불리 먹이신 것은 물질적인 떡과 생선이었지요. 영적이거나 정신적인 떡이 아니지요. 교회나 목사님들 중에는 성경을 너무 정신적인 면으로 이해하거나 추상적인 세계로 끌고 가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최기성 저도 같은 생각인데요. 얼마 전에 고향에 내려갔다가, 교회에 들러 예배를 드리는데, 마침 그날 설교의 본문이 오늘 읽은 부분과 같은 것이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배불리 먹은 떡을 영적인 떡으로 설명하여 아주 혼란스러웠어요. 예수님은 정신세계만이 아니라 물질세계에서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인데.
권태호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닌 제가 본 것은 대개의 교인이 너무 물질적인 축복에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돈, 건강, 사업, 진학, 결혼, 아들 낳기 등 추구하는 많은 것들이 현실적인 문제들이었어요. 그것도 문제가 아닌가요?
김은숙 저는 좀 다른 면을 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이 떡을 풍족히 만들어 내신 일보다 그 떡을 질서 있게 골고루 나누어 먹인 사실이에요. 예수님은 떡을 나누기 전에 제자들에게 군중을 오십 혹은 백 명씩 질서 있게 앉게 한 뒤 나누어 먹도록 했어요. 만약 소수의 사람이 그 많은 떡을 독차지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난리가 났겠지요.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은 그 많은 떡을 다시 회수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늘 불안한 이유는 나눔이 잘 안 되어서 그런 것이라고 봐요. 경제성장의 열매를 소수가 독점하고 있어요. 더구나 그 독점도 많은 경우 불법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지요.
저는 지난달에 노동조합의 부장을 맡았는데요, 솔직히 저는 그동안 직장에 다니면서 노조활동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노조활동을 열심히 하려고 해요. 왜냐하면 바로 그 나눔을 위해서지요. 나눔이 골고루 잘 돼야 성장도 잘 된다고 봐요. 일반 시민의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소비가 촉진되고 소비가 잘 돼야 생산 공장도 활발히 돌아가겠지요. 고인 물이 썩듯이 독점자본은 반드시 썩어요. (얼마간 침묵이 흐른 뒤에)
이수영 떡을 골고루 나누어 사이좋게 배불리 먹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예수님이 원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말에 동감하면서, 느낀 점이 있어요. 우리가 그 일을 책임지고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빈들의 굶주린 사람들을 제자들이 그냥 보내고 싶어 할 때,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셨어요.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가 할 일을 발견하고 그 일을 책임지고 잘 감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한국교회는 너무 복 받는 일에 몰두해 왔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나누는 일에 힘써야지요.
박인규 떡을 사이좋게 나누어 배불리 먹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다른 누가 해주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부터 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신 뒤 곧이어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라고 물으시며 그들이 갖고 있던 적은 분량의 음식, 오병이어를 내놓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런 점을 느낍니다. 비록 적더라도 내가 가진 것을 내놓으면서 나눔을 위한 일에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손기호 저는 오늘 세 가지를 새롭게 느끼고 배웁니다. 첫째는 직장생활을 성실히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떡을 많이 만드는 노동을 하셨으니까요. 둘째는 노조활동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많이 만들어낸 떡을 골고루 나누어 먹도록 했으니까요. 노조는 우리 경제의 분배를 이루는 일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봐요. 셋째는 저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너희가 가라’고 하시면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받으셨잖아요. 아까 처음에 전도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오병이어는 보잘것없는 작은 분량의 음식이라고 하셨지요. 사실 저는 살아오면서 저 자신이 보리떡이 아니라 정말 개떡만도 못한 자라고 생각해 왔는데, 오늘 성경을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나같이 별 볼 일 없는 자도 내가 있는 자리에서 주님 뜻을 따라 온 힘을 다하여 살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많은 성과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
권태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음으로써 큰일이 일어난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사랑 안에서 이기심을 극복하고 모두가 함께 나누는 삶을 실천한다면 복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 사람이 갖고 있던 자신의 먹거리가 사랑이신 예수님의 손을 통과한 뒤 수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한 사건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어요. 전체를 위하는 큰 사랑으로 이기심을 극복하면 다 함께 배불리 먹고도 남는 풍성한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가르침이지요. 문제는 이기심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있다고 봐요.
박인규 인간이 이기심을 극복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아니 어쩌면 불가능하기까지 한 일이 그 이기심을 극복하는 문제라고 봐요. 그래서 이 부분이야말로 하나님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더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기심을 경쟁적으로 부추기는 풍조가 가득해서 이기심을 극복하고 함께 더불어 나눔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 같아요. 인간은 이기심을 자극해야 열심히 일하는 속성이 있잖아요. 그래서 회사의 관리자들도 생산량을 더 많이 뽑기 위해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게 하지요. 인간의 이기심은 뿌리가 깊어서 쉽게 극복될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오셔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많은 양의 떡이 만들어진 과정과 그 떡이 골고루 분배된 과정 모두에서 예수님이 개입한 사실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요.
이경희 저 같은 경우는 교회 다닌 지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좀 어리둥절하네요. 그러나 이제까지 예수님과 교회에 대해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점들을 오늘 많이 발견했어요. 성경에 이렇게 귀한 내용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요. 그런데 오늘 성경을 읽으면서 의문점이 하나 있는데 좀 엉뚱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왜 떡을 배불리 먹은 사람의 숫자를 남자만 몇 명이라고 적었을까요. 나는 계속 그게 궁금했어요. 남자, 여자 몇 명 혹은 여자, 남자아이들 몇 명 하든지 할 것이지…. (두어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귀한 떡 잔치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을 말하면서 남자의 숫자만 말한 것은 주님의 생각인지 성경을 기록한 사람의 생각인지 궁금하네요.
경희 씨가 중요한 점을 지적했어요. 사람의 숫자를 셀 때 남자만을 언급하는 것은 유대인의 오래된 관습이에요. 예를 들어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대략 60만 명이었다고 말할 때 그것도 남자 장정만을 센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를 담은 바구니라고 할 수 있지요. 혹은 속에 아기라는 진리가 들어 있는 목욕통이라고 할 수도 있구요.
김은숙 그렇다면 성경 말씀 중에는 인간의 생각도 끼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건가요?
최기성 그런 측면보다는, 남자를 인간의 대표로 보는 생각이 성경의 본래 가르침 아닌가요?
김은숙 그래요? 남자를 인간의 대표로 누가 세웠나요?
최기성 여자를 만들 때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빼서 만들었다고 했잖아요.
김은숙 그게 어떻게 남자를 인간의 대표로 세운 증거가 되나요? 그건 오히려 남녀의 동등함을 말하는 증거라고 보는데요. 여자와 남자는 한 몸임을 말하는 것이지요. 서로를 자기 몸처럼 여기라는 가르침이 오히려 거기에 강하게 있다고 보는데요. 남녀, 혹은 여남은 서로를 대등하게 대해야지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창조주의 경고가 그 속에 들어 있다고 봐요. 물론 남녀의 차이야 있겠지요. (분위기가 잠시 어색해짐)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이런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비유로 얘기해서, 성경은 마치 아기 예수가 누워 있는 말구유와 같다는 것이지요. 말구유에는 여러 가지 오물과 티가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는 분명 진리가 담겨 있지요. 그러나 그 진리를 담는 과정에서 유한한 인간의 흠이나 티가 끼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쉽지만 저녁 시간이 많이 지나갔습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만 만족해야 할 것 같네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돌아가면서 기도합시다. (다음 호에 계속)

김달성|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청주에서 자랐다. 1979년 감신대를 졸업한 후 서울과 인천에서 빈민선교와 노동선교를 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평안교회 목사이며, 포천에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facebook.com/dalseong)

 
 
 

2022년 8월호(통권 7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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