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YWCA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며
김흥수 4월 20일에 YWCA(이하 Y)가 창립 100주년을 맞이합니다. Y의 100주년은 한국 여성사, 한국 기독교사, 한국 시민운동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해이며, 한국교회와 사회가 같이 축하해야 할 일입니다.
1920년대 신문을 보다가 Y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1923년 기사였는데요, 오늘날 수시로 단체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유명무실하다, 설립만 해놓고 활동은 없다, 새로 조직된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는 그런 단체들과는 다르게 장차 여자 사회를 위하여 목적을 관철하기를 부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3·1운동 이후 1922년까지 조직된 청년단체는 577개나 됐습니다. 그런 기대를 Y가 어떻게 충족시켜 왔는지 말씀해 주시고, 또 한국 사회에서 어떤 존립 의미가 있는지 돌아가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우선 회장님께서 100주년을 맞이하는 감회를 말씀해주시지요.
원영희 당시 거의 580개에 이르는 그 단체들은 아마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Y의 경우, 우선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숫자 면에서 Y는 시작부터 다수의 여성 청년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Y의 정신을 온전히 담아 운동을 하겠다는 진지함이 시작부터 특별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 당시는 모두 젊은 사람들이 참여했으니까 YWCA의 ‘Y’(Young)는 문제가 아니었고, ‘C’(Christian) 정신으로 모였으니까 그것 역시 당연하게 여겨졌지요. 또 사람들이 함께 모였으니까 ‘A’(Association)도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W’(Women)였어요. 그야말로 열악한 20세기 초반에, 과거로부터 내려온 유교 전통, 각종 사회적 굴레 때문에 여성들이 설 곳이 없던 시절이잖아요. 기독교 정신으로 연합해서 여성의 권리와 가정 내에서의 위치를 스스로 찾고 그런 측면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자는 구체적이고도 당당한 움직임이었지요.
당시 이 일에 많은 후원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선교사님들이, 나중에는 유지들이 도와주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로 건강한 시민운동, 물론 그때는 ‘시민운동’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여성들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그 일에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어요. Y는 시작부터 많은 기대와 신뢰를 안고 시작한 단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흥수 100주년 준비단 공동위원장도 맡고 계신 서다미 대학청년YWCA전국협의회 회장께서 청년으로서 100년을 맞는 생각이나 감회를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서다미 여성으로서, 또 청년으로서 100년의 감회를 말씀드리자면, 사실 또 다른 시작점에 서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지금껏 제가 이런저런 활동을 해오면서, 청년보다는 여성운동 위주로 활동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제 청년의 중요성을 Y에서 많이 강조하고 있고 그 일환으로 청년에게 다양한 자리가 생기다 보니 이번 100주년은 청년들이 비전을 그릴 수 있는 진정한 시작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시작점에 서서 비전을 세워나가고 있는데, 감사하는 마음도 있고, 또 그에 따라 책임감도 많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김흥수 사무총장님께서는 여러 기념사업을 준비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100주년 사업들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해 주시지요.
구정혜 올해 100주년 사업들은 사실 95주년 때부터 준비를 본격적으로 해온 거나 마찬가지예요. 저희가 창립기념일로 지키는 4월 20일은 1922년 정동 이화학교에서 열린 두 번째 발기회의 날짜입니다. 지난 95주년 기념식을 이화여고에서 진행하면서 ‘고백’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습니다. YWCA 초기정신을 되새기고 회복하자는 뜻의 ‘과거를 돌아보다’(Go Back), 지금의 역사가 있기까지 우리 모습을 회개하고 성찰하자는 뜻의 ‘오늘을 고백하다’(告白), 내일을 향한 비전과 희망의 행진을 시작하자는 뜻의 ‘100년을 향해 나아가다’(Go 100)라는 세 구호 아래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Y가 창립 이래로 정말로 많은 여성 지도력을 배출했고 많은 사회운동을 해왔지만, 내려놓고 회개해야 할 일이 있음을 고백하고 또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앞으로 100년을 향해 나아갈 것을 여러 사업을 통해 계획했어요. 먼저는 ‘YWCA 여성평화순례-한라에서 백두까지’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어요. 95주년에는 95명의 여성평화순례자들이 한라산에서 평화를 외치고, 그다음 해에는 지리산, 태백산, 금강산, 그래서 100주년인 2022년에는 백두산까지 기획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계속 등반하지 못하고 태백산까지밖에 못 했어요. 그래서 2020년부터는 ‘홀로걷는 평화순례’로 바꾸어 진행했어요. 원래 100명의 여성평화순례자들이 백두산을 가는 게 이번 100주년의 큰 행사였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진행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기념사업으로 100주년 기념 화보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100주년의 역사를 정리하는 역사책 편찬은 조금 뒤로 미루었고요. 또 95주년 때부터 ‘1922 장학금’이라는 이름으로 청년들, 청소년들을 위해 장학금 모금을 시작해서 100주년까지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을 위해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활 속의 작은 실천을 지원하는 ‘세상을 살리는 100개의 프로젝트’를 기획했어요. 1억 원을 모금해서 하나의 프로젝트에 100만 원 정도 지원할 계획입니다. 청년들이 국내외 멘토들을 만나는 ‘사람책방’이라는 프로그램이나 아시아 지역 청년들과의 만남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또 100주년 역사포럼을 비롯하여 평화포럼, 청년포럼 등 다양한 포럼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여러 제약이 있지만, 상황에 맞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흥수 창립기념일이 4월 20일인데 그날은 무슨 행사를 준비하고 계신지요? 코로나19 때문에 어려움도 많고 아쉬움도 있겠습니다.
원영희 4월 20일에는 100주년 기념 감사예배와 비전선포식을 포함한 기념행사를 하기로 했고, 시상식을 비롯하여 감사의 의미를 담는 행사는 올해 하반기로 미루었어요. 100주년 행사 자체를 둘로 나누어서 하는 셈입니다. 대면과 비대면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하루 종일 행사를 진행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따르기도 하거니와, 100주년 기념행사가 내부 활동가에 대한 시상이 중심이 되는 형식으로 흐르게 될 가능성이 많아서 그렇게 결정했어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비전선포니까 비전을 중심으로 하는 기념식을 기념일에 진행하고, 하반기에 코로나19 회복 단계가 되면 그때는 다 오셔서 참여하는 감사축제의 장을 여는 것으로 미뤄두었어요. 그 사이에 포럼이나 학술대회 등 많은 프로그램을 준비 중입니다.
청년 이사인 서다미 위원장과 대담을 하고 있으니 옛 생각이 나네요. 10여 년 전쯤, 실행위원 10년차, 막 세계YWCA 이사에 당선되었던 즈음 기억입니다. 늘 그랬듯이 모든 회의에 대부분, 대선배들이 많이 계시던 회의 시간, 문득 청년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답답했지요. 그래서 ‘청년을 보내주십시오.’ 하고 혼자 기도하던 어느 날 회의 자리에서-아마 정책회의 직전 준비회의로 기억합니다만-기타 건의사항을 이야기하라는 회장님의 말씀에 저는 다소 뜬금없이 “청년 부회장을 세웁시다!”라고 말했어요. 그러면 청년 부회장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좀 모이지 않을까 해서 말이죠. 선배님들께 많이 혼났어요. “청년이 부회장을 하면 뭘 한다고!” 하셨어요. 그때 옆에 변호사 한 분이 계셨는데 규정상 안 된다고 거드셨어요. 저는 상처를 받고 청년 얘기는 그 뒤로 꺼내지도 못했지요. 제가 좀 더 용감했으면 반박했을 텐데 워낙 대단한 선배들이라 그러지 못했죠. 규정이 그러하다면 고치면 되는데, 그때는 감히 그런 생각도 못 했어요. 그래도 어떻게 하면 청년을 살릴까, 어떡하면 되나 고민했습니다. 그 고민이 100주년을 맞으면서 조직구조 개편 과제로 나왔습니다. 2019년부터 시작해서 5년 계획으로 2023년 말에 다 끝내려고 합니다. 그 재구조화 속에는 청년을 살리자는 마음이 들어 있어요. 그거 들으셨어요? 올해 청년 부회장도 뽑았습니다.
김흥수 Y연합회에 부회장이 모두 몇 분이신가요?
구정혜 원래는 두 분이었는데, 올해 정기총회에서 청년 부회장을 새로 세워서 총 세 분이에요. 그리고 Y연합회의 법인이사가 상임이사 제외하고 총 20명인데, 그중에 청년이 6명입니다. 저희는 35세 이하를 청년이라고 부릅니다. 지역 중심의 이사 7명, 연합회 중심의 이사 7명, 그리고 청년 6명, 이렇게 20명입니다.
원영희 우리 서다미 청년은 법인의 회계이사도 맡게 되었습니다. 변화가 급격해서 얼떨떨합니다. 옛날 이야기지만, 서울Y에서 연합회 실행위원을 하라고 해서 연합회에 참여하게 됐는데, 그때 서울Y에서는 청년들을 많이 봤는데, 연합회에 나가니까 젊은 스태프들을 제외하고는 도대체가 청년을 볼 수가 없었어요.
세 명의 창립자가 조선YWCA를 시작하다
김흥수 100주년을 맞으면서 청년 여성들이 Y 활동에 여러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는 것도 정말 새로운 느낌이겠습니다. 이제 옛날로 돌아가 보지요. 한국Y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떻게 만들어졌고 무슨 일을 했는지 역사를 돌아보는 말씀을 해주십시오.
원영희 한국Y의 시작을 말할 때는 항상 세 분의 선생님을 이야기합니다. 우선 정신여고에 근무하던 김필례 선생님과 유각경 선생님입니다. 미국Y는 아시아에도 Y를 개척하려고 인도Y를 돕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선교사가 많이 가 있던 조선에도 Y를 개척해보려던 무렵이었죠. 그때 장로교 소속이던 미국Y의 한 간사가 파송을 받아서 조선에 들어왔고, 장로교 재단 정신여고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 간사가 똑똑한 두 교사를 추천받았는데 그 두 사람이 바로 김필례, 유각경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화학당에서는 김활란 선생님을 소개받았지요. 당시 김활란 선생님이 두 분보다 일곱 살 정도 어렸어요. 그렇게 세 사람이 Y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팀워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22년 4월 초 중국 북경에서 열린 WSCF(세계기독교학생총연맹) 대회에 감리교 여성대표로 김활란 선생님이, 장로교 여성대표로 김필례 선생님이 참석했는데, 바로 그 회의에서 일본Y 총무 가와이 미치코(川井道子) 선생을 만납니다. 이야기를 나눈 후 우리나라에도 Y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이죠. ‘봉건 사회 체제 속에서 집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아이들을 키워야 하고, 유교적인 문화 속에서 자신의 존재는 돌볼 겨를 없이 남편과 어른들 공경하는 삶만이 전부였던 우리나라 여성들을 우리가 깨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돕고 격려하는 삶을 나누어야겠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유교적으로 다니고, 교회에서도 주도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하듯이 하는 그런 여성을 위해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서 여성들의 기량과 능력을 마음껏 펼칠 기회를 주자는 의도가 담겨 있는 움직임이 이 세 분을 통해 시작된 건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일제강점기였으니, 일본Y에 속한 지부의 개념으로 세계 조직에 가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세 분이 그렇게는 못 한다고, 독립 조직인 조선Y로 창설했으니 독립된 국가 YWCA로 세계 조직에도 가입하겠다고 주장했고, 이 문제를 설득하는 데 1년 정도 걸렸답니다. 결국 조선Y가 1924년 세계Y에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어요. 참 대단한 분들이에요.
김흥수 말씀하셨듯이 WSCF 북경대회에 다녀와서 4월 20일 Y가 조직되고, 그해를 기점으로 100주년을 기념하게 되었군요. 첫 번째 발기인 모임은 1922년 3월에 있었고요.
구정혜 4월에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가 만들어지고, 그해 11월에는 광주에서, 또 12월에는 서울(경성)에서 지역Y가 만들어졌어요. 광주는 김필례 선생님이 중심이 되어서, 서울은 유각경 선생님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지역 조직들을 늘려가기 시작했어요. 여기서 우리의 큰 특징 하나를 말씀드릴 수 있어요. 다른 단체의 경우 여러 지역 조직이 모여서 연합회를 만들었다면, 우리는 연합회를 중심으로 지역을 확장해나간 특이한 구조이지요. 지금은 전국적으로 52개의 지역Y가 조직되어 있습니다.
원영희 1922년 4월 초에 WSCF 북경대회에 참석하여 일본Y 총무를 만나고 돌아온 다음, 4월 20일에 2차 발기대회를 할 만큼 추진력 있게 일이 진행되었어요. 3월 27일 1차 발기대회에서는 유각경 선생님이 임시회장을 맡으셨고, 4월 20일 2차 발기대회에서 김활란 선생님이 회장으로 결정되었지요. 구 총장님이 이야기했듯이, 그 직후에 김필례 선생님이 전국 17개 지역을 순회하면서 Y를 세우는 운동을 진행했어요. 그래서 그해 서울Y와 광주Y가 조직되고, 대구는 그 이듬해인 1923년에 조직되었어요. 그래서 서울Y와 광주Y는 연합회와 마찬가지로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고, 대구Y는 올해가 99주년입니다.
김흥수 YMCA의 경우 선교사들이 YMCA를 소개했고 만들었어요. 그런데 당시 YMCA를 반대하는 선교사도 있었어요. YMCA가 만들어지면, 교회 청년들이 다 YMCA로 빠져나가서 교회 청년 조직이 약화될 것이라며 반대했지요. YWCA 초창기에는 교회와의 관계가 어땠는지요? 반대하는 선교사도 있었나요?
구정혜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한국YMCA나 다른 나라의 YWCA 같은 경우는 말씀하신 대로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세우는 과정을 거쳤는데, 조선YWCA는 순수하게 우리 지도력, 조선의 기독 여성들이 모여서 이런 운동을 출발시킨 거예요. 일제 치하의 어두운 여성의 현실을 어떻게 깰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Y가 민족만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한 조직인데, 우리 조선에도 이 조직이 필요하다고 정말 자발적으로 시작하신 거예요. 이것이 한국Y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선교사나 교회의 지원 없이 Y가 조직됐고, 학생Y 그러니까 학생기독청년회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초창기에는 하령회(여름 캠프)에 참여한 대부분의 지역 조직은 학교, 특히 미션스쿨을 중심으로 모인 학생기독청년회 조직이 연합회에 들어와서 활동했어요. 물론 지역을 기반으로 한 Y의 성인 조직도 김필례 선생님의 순회로 세워지고 활동했지만, 초창기 활동의 주역은 소위 ‘미션스쿨’이라고 불리던 기독교 재단 학교 학생들 중심의 청년 조직이었지요.

김흥수 일제 시기에 서울뿐 아니라 대구나 광주에도 지역Y가 설립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지역Y가 중심이라기보다는 미션스쿨의 학생Y가 중심이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원영희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3월 27일 1차 발기대회 때 30명 정도가 모였는데 조선여자교육회를 도왔던 많은 유지들이 Y를 세우는 일도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기록이 나와요. 그 유지들이 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도왔는지, 또 그들의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어요. 조선여자교육회를 지원할 정도라면 그분들은 여성교육에 대한 의식이 있는 분들이었을 테고, 여성의 문제들을 드러내지는 못했어도 그 부분에 대한 문제를 깊이 느끼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아마도 Y를 세우는 일에 앞장선 세 젊은 여성을 보고 이들이 여성의 미래를 위한 훌륭한 리더들이라는 공통의 마음이 있었기에 Y를 지원하지 않았을까 추측해요.
구정혜 아마도 YMCA 관계자들이 많이 지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조선에 이미 YMCA가 있었지만, YWCA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많이 지원하시지 않았을까 해요. 제가 알기로는 1970년대까지 YMCA와 YWCA가 하령회를 같이 했는데, 그때 YMCA 리더들이 오셔서 강의도 많이 하셨습니다. 개인의 신앙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활동하는 교회와는 달리, YMCA나 YWCA 같은 조직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사회적으로 체화하는 사회선교의 차원을 강조하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으니까요.
김흥수 학생Y가 적어도 초창기에는 한국Y를 이끌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셨는데, 학생Y는 일찍이 WSCF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기도 했지요. Y가 조직된 이후 국제적인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요.
원영희 제가 2011년부터 4년간 세계Y 이사로 섬겼고, 2015년부터 현재까지 공천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 Y는 1922년에 조직되었는데 1924년 8월에 세계Y에서 개척회원국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2년 만이지요.
구정혜 ‘개척회원국’은 정회원 되기 전 준회원 개념이지요.
원영희 네. 이후 1930년에 한국Y를 정회원으로 승격해 주었어요. 나라는 일본에 강제합병된 상태였지만, Y에서는 정식으로 독립된 정회원국이 된 겁니다. 세계Y는 회원 자격을 대충 승격시키지 않습니다. 당연히 여러 심사를 하는데 그 당시에도 우리 Y가 활동을 워낙 조직적으로 잘했으니까요. 세계Y에 보관되어 있는 역사자료를 보면 그 당시에 어쩌면 그렇게도 일목요연하게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네바로 보냈는지, 놀람을 금치 못할 정도입니다.
일본YWCA에 복속된 안타까운 역사
원영희 스위스 제네바에는 세계Y 본부가 있고 사무실 곁에 아카이브가 있어요. 한번은 세계Y 이사회에 참석했다가 이틀 정도 시간을 내어 조선Y의 초기 역사자료를 찾아봐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늘 궁금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1938년에 한국Y가 어떻게 일본Y에 편입되게 되었는지, 그 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는지 찾아보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자그마한 사료관에 나라별로 자료들을 모아 놓았는데, 우리나라에 관한 사료들도 정확히 1922년도 자료부터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1923년인가 1924년부터 회원의 수가 계속 보고되고 있었는데, 그때는 북한 쪽의 숫자가 훨씬 많았어요. 북한에 함흥 등 다섯 개 조직이 있었고, 남한은 오히려 조금씩 커가고 있었죠. 당시에는 회원이 당연히 모두 다 청년이었는데 그 숫자가 1,600명이 넘는 거예요. 2-3년밖에 안 되었는데 그렇게 활성화가 된 것이지요. 1929년 무렵부터는 일본 경찰들이 방해를 시작했더라고요. 마침내 거의 12시간 만에 제가 제일 궁금해하던 1938년 관련 자료를 찾았어요. 영어로 기록된, 독립된 국가 YWCA에서 탈퇴해 일본의 지역 조직으로 편입한다는 협약서(agreement)였고, 서명자도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어요. 유각경, 김활란 두 분의 서명은 있는데, 김필례 선생님은 없더라구요.
구정혜 1938년에 일본Y의 지부로 들어가게 된 상황은 당시 교계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요. 물론 한국Y의 활동 자체는 교회를 기반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Y의 회원들은 제각기 교회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권 아래에 있다고 볼 수 있지요. 1938년에 장로교가 신사참배를 결정하면서 Y에도 신사참배 요구가 들어왔어요. 그때 회의록에 ‘궁성요배’(宮城遙拜)를 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이미 교계가 신사참배에 찬성했기 때문에 마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때 Y의 청년 조직들과 지도자들이 많이 떨어져 나갔어요. 김필례 선생님도 신사참배를 거부하셨으니 당연히 발길을 끊으셨고요. 사실 ‘복속’(服屬)을 결정할 당시의 지도력들은 이렇게라도 해서 조직을 유지하는 게 맞다고 찬성하신 분들만 남아 계신 현실이었어요. 그 숫자가 많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그분들이 남아 있다가 일본Y에 ‘우리는 당신네들 밑으로 들어가겠다.’라는 요청을 스스로 한 것이에요. 일본의 압박으로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었으니 차라리 일본의 지부로서라도 조직을 유지하고 활동해야겠다는 목적이었지요.
기록에 따르면 일본Y 측은 조선Y의 이러한 요청에 굉장히 놀랐어요. WSCF 총회에 참석한 김필례 선생님이 일본의 침략 만행을 알리겠다고 협박해서 독립된 형태의 조선Y가 생겨났는데, 1938년에 갑자기 일본 지부가 되겠다고 하니 놀란 것이죠. 일본에서 현황을 파악해보니, 많은 조직이 이미 죽어버린 것을 알고 이를 받아들였지요.
원영희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라도 Y 운동을 지속해야겠다는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협약서에 서명을 한 사람은 모두 8명이었는데, 한국과 일본 각각 네 사람씩이었어요. 협약서의 내용에서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는데, 그 협약서를 읽어내려간 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지요. 독립적으로 설립된 우리나라의 Y를 이렇게라도 유지했어야 했는지 여전히 고민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눈물이 나려 하네요. 당시 제 울음소리를 들은 아카이브 직원이 뛰어와서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했었습니다.
우리가 일본 지부로 들어가겠다고 하니, 세계Y가 곧바로 한국Y에 편지를 보냈어요. 너희들 정말 그렇게 할 거냐고, 괜찮냐고 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러면서 자기네들도 너무 유감이라고, 너희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게 마음이 아프지만 너희의 의견을 존중(respect)하겠다고 했어요. 그 편지 자료를 보고 또 엉엉 울면서 혼자 드라마를 썼지요.
이 일에 관하여 일본 측 자료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나 호기심이 발동한 저는 일본Y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어요. 일본Y의 1938년 자료를 찾아서 하나씩 넘겨보는데, 그 협약서가 없는 거예요. 이것도 참 미스테리예요.
YWCA의 사업을 일군 사람들
김흥수 김필례 선생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그 문서에는 서명을 안 했다는 말씀이지요? 그럼 38년 이후에 김필례 선생은 어떻게 Y에 관여를 하게 되나요?
구정혜 아예 발길을 끊으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김필례 선생님은 연합회 활동은 거의 안 하시고 정신여학교 등 학교 중심으로 많이 활동하셨죠. 재건 이후는 김활란 선생님이 주도적으로 활동하셨고, 사실 38년에 일본에 소속될 때도 김활란 선생님 중심이었어요. 그리고 한국Y가 일본 지부로서의 활동은 사실 거의 안 했어요. 아무튼 그런 상황이 참 안타깝죠.
원영희 재미있는 게, 광복이 되고 1947년 10월에 항저우에서 세계Y 대회가 열려요. 그런데 거기에 한국 대표가 10명이나 참석을 해요. 우리나라 대단해요 참. 이제 막 해방돼서 정신이 없을 법한데 해방이 되자마자 바로 간 것이죠. 중국이니까 그렇게 멀지 않았을 거고요. 거기서 김활란 선생님이 세계Y 실행위원이 됩니다.
이후로 국회의원을 지낸 김현자 선생님, 정무장관을 지내시고 얼마 전 돌아가신 김영정 선생님도 실행위원을 하셨습니다. 유성희 전 사무총장도 청년대표로 참석하여 실행위원으로 활동했고, 그 뒤에 박은경 선생님이 세계Y 부회장을 하셨고요.

김흥수 세계Y에 임원으로 참여한 건 김활란 선생이 처음이네요.
원영희 맞습니다. 하여튼 거의 10년마다 한 명씩 배출한 것이죠. 박은경 선생님 이후에는 제가 실행위원을 하고, 이어서 한미미 선생이 실행위원을 했죠. 지금은 세계Y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지요. 다음에는 세계Y에 청년을 보내서 실행위원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웃음)
김흥수 말씀이 자연스럽게 해방 이후로 넘어가는데요. 1940년대에 전국에서, 특히 분단 이후에는 조치원, 대전 등 남쪽에서 Y가 많이 신설되었습니다. 지금은 현황이 어떻게 되나요? 50개 정도라고 하셨나요?
구정혜 52개예요.
원영희 이 부분도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에요. 1980년까지는 Y가 한 20여 개 있었죠. 그 당시 정말 목적운동에 충실했던 Y예요. 옛날 이야기를 하자면, 제가 1978년에 서울Y 간사로 일하면서 ‘Y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회원인가’ 궁금해지더라고요. 초보 간사가 말이에요. 그때 부장님에게 물었더니 저더러 직접 알아보라고 하며 서류 더미를 이만큼 갖다주고는 이 기회에 조사해보라고 하는 거예요. 조사해보니 너무 놀랍게도 당시 Y 회원의 70%가 파출부를 구하기 위해 회원이 된 것이었어요. 파출부를 쓰려면 회원에 가입해야 하니까요. 저는 너무 실망해서 ‘Y 운동은 누가 하나’ 생각했지요. 시간이 흘러 2000년에 YWCA연합회 실행위원이 되고 다시 3년 뒤에 제가 임원이 되어, 일하면서 자료를 보니, 지역Y의 부속시설이 정말 많더라고요. Y 사역 현황에 따르면 부속시설 사업이 약 70%이고, 나머지 30%가 목적사업 운동이었어요. 그때도 초보 간사 시절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지요. “뭐지? Y가 왜 부속사업을 하고 있나, Y운동을 해야지. 부속시설 운영을 30%만 하고 Y운동을 70%로 해야지, 왜 이럴까.” 하고 말이죠. 또 선배에게 물었습니다. 이게 맞냐고. 그런데 선배는 지금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대답하더라고요.
김흥수 Y가 20여 개 있던 1970년대까지는 목적사업에 충실했다면, 80년대에 와서는 부수적인 사업도 많이 했다는 말씀이군요.
구정혜 한국전쟁 이후에 Y는 구호사업을 많이 했어요. 특히 홀로된 여성과 고아를 대상으로 본격적으로 실시했어요. 복지사업인 셈이죠. 또 여성들을 위해 60년대부터는 직업훈련을 시작해서 파출부 등 여러 직종을 개발하여 남성이 하던 일에 여성들을 투입시켰죠. 이런 것들이 제도화되면서 시설 또는 기관이 된 것입니다. 90년대 이후에 시설이 굉장히 많이 불어났습니다. 복지 사업과 탁아소 사업이 어린이집이 되고, 직업훈련 사업이 여성인력개발센터가 된 것이죠. 80년대 말부터 90년대까지 Y의 조직이 엄청나게 확장되어 명실상부 전국적인 조직이 되었는데, 이는 시민사회가 확대된 시기이기도 하고 민족복음화운동으로 교회와 교인 수가 가파르게 늘어난 시기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때 Y의 수와 회원 수도 늘어났어요. 그렇게 시설이 늘어나 2000년대에는 250개 정도의 시설을 52개 Y가 맡고 있더라고요.
이런 과정 가운데 본부의 프로그램이 시설로 옮겨가고, 본부에서 훈련된 활동가들이 시설로 가면서 본부는 조금씩 운동성을 잃고 위축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Y가 초창기에 견인해오던 여성운동체의 역할을 과연 지금도 하고 있는지, 시설에서 하는 것들이 과연 운동인지를 80년대 후반부터 끊임없이 질문해 왔습니다. Y가 확장되던 시기에는 ‘Y가 하는 게 다 운동이다.’라고 생각했어요. ‘시설을 통해서 하는 게 다 운동이다. 우리는 성폭력상담소를 통해 여성운동을 하고, 여성인력개발센터를 통해 여성운동을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런 상황이 더 이상 지속되서는 안 된다는 내부 협의가 계속 있었고, 시설의 확장을 막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100주년을 앞두고 YWCA가 운동체로 지속가능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바라보면서 전체 법인의 재구조화를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했어요. 이제는 말 그대로 기독여성 운동체로서의 역할을 하자고 해서 재구조화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연합회 지부로 있던 Y들을 다 독립시키면서 자체적으로 또 주체적으로 지역운동을 하는 조직으로 거듭나자는 결단을 2019년에 다 함께 했지요.
김흥수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앞서 1938년에 조선Y가 일본Y에 속하게 된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두 분이 말씀해 주셨는데, 좀 더 연구를 진행해서 Y의 자주성이 어떻게 상실되었는지를 밝히면 좋겠어요. 생각해보면 해방이 되고 Y를 재건해야 했을 때, 일제로부터 독립했으니까 세계Y에 다시 가입했겠군요. 그건 언제인가요?
원영희 그건 1947년 항저우에서 결정되었어요.
김흥수 그렇군요. 그렇게 Y를 재건할 때 박에스더 선생이 귀국해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박에스더라는 분이 Y 재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구정혜 박에스더 선생님은 한국Y가 미국Y에 요청해서 오신 것이에요. 그분은 47년에 오셔서 68년까지 고문총무로 활동하셨고 그 후로는 명예연합위원으로 80년까지 활동하셨습니다. 그동안 아무것도 없고 지도자만 있던 Y에 행정체계를 세우고 각종 프로그램을 도입했지요. 포크댄스 등 ‘소창(消暢) 프로그램’을 많이 도입하면서 ‘영·지·체’ 중에서 ‘체’도 굉장히 많이 신경쓰셨어요.(웃음) 그리고 회원 조직을 정비하고 지역Y를 다시 규합하는 활동을 하셨어요. 박에스더 선생님은 모금 부분에서도 많은 역할을 하셨는데요, 당시 땅을 기증해오는 경우 등을 관리하려고 후원회 법인을 만들었습니다. 연합회를 후원하기 위한 조직이죠. 재단법인으로 준비했는데, 사단법인으로 허가가 나서 지금까지 문화체육관광부에 소속된 사단법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초대 이사장은 김활란 선생님이었고요. 지금 한국Y가 여기까지 온 것은 모든 면에서 박에스더 선생님의 공헌이 컸죠. 당시 서울Y와 Y연합회는 잘 구분되지 않았어요. 거의 같이 활동했지요. 프로그램은 서울Y가, 전국 단위 사업은 연합회가 하는 식이었고 지도자들도 교류를 하며 다 같이 활동한 거죠. 명동에 있는 이 땅을 미군정으로부터 불하받고 서울Y 건물과 연합회 건물을 건축한 것도 박에스더 선생님이 애를 많이 쓰셨어요. 대부분 미국Y의 원조를 받아서 많이 충당했고, 당시에는 생소했던 바자회라든지 자선파티 등을 통해서 모금을 끌어오셨지요. 지금의 행정, 프로그램, 재정적 기반을 박에스더 선생님이 마련하셨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원영희 제가 놀란 건, 박에스더 선생님이 계시긴 했지만 전쟁 중에도 Y 운동을 했다는 사실이에요. 학생Y를 부산에서 모이게 해서 학생운동을 계속했죠. 전쟁 중이던 1951년 10월에는 군산Y를 설립합니다. 놀랍게도 박에스더 선생님은 부산으로 내려가셔서 기술교육을 하셨어요. 전쟁 통에 여성과 아이들이 제일 힘드니까 당시 부속시설을 직영했는데 이름이?
구정혜 ‘동래농예원’입니다. 전쟁 이후 50년대에는 여성인권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죠. 가족법개정운동이나 혼인신고운동, 축첩반대운동 등을 시작했습니다.
김흥수 광복 이후 Y를 재건하던 중에 전쟁이 또 겹쳤지요. 그래서 조직을 정비하면서 구제사업 중심으로 일하다가 시민운동으로, 그런 변화에 박에스더 선생이 어떤 영향을 주셨군요.
원영희 네. 운동의 기반을 세우셨고, 그 기반이 세워지자마자 이태영 박사님이 등장하신 거죠. 이번에 제가 이 대담을 준비하면서 자료를 보는데, 쉬지도 않고 전쟁 통에도 중단없이 여성운동을 하신 선배님의 열정에 감탄했어요. 다 뿔뿔이 흩어질 때 손에 손 잡고 부산에 내려가서 기술학교를 만들고, 여성들을 교육하고, 또 전쟁이 끝나자마자 53년도에 다 함께 돌아와서 다시 Y를 재건하고요.
그런데 이 과정 중에 세계Y가 굉장히 관심이 많았나 봐요. 전쟁이 끝나고 53년 7월에 세계Y에서 대거 우리나라로 와서 재건 돕기를 합니다. 직업기술학교를 세우는 등 할 일이 너무 많았지요. 거기에 이태영 선생님이 바로 혼인신고운동, 축첩반대운동, 가족법개정운동 등을 이끌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서서히 노동 문제, 즉 여성노동권 문제에 깊이 들어가는 거죠. 여성과 소수자들의 활동공간을 만들어주자 하고 말이죠.
김흥수 그때 박에스더 선생이 Y의 중요한 지도력이었고, 이희호 선생은 실무책임자로 일을 하고, 그렇게 60년대로 넘어가는군요. 이희호 선생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50년대 후반에 귀국하자마자 Y에 오신 거죠?
구정혜 이희호 선생님은 59년부터 63년까지 사무총장으로 활동하셨고, 이후 연합회 실행위원으로도 20여 년간 활동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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