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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한국 사회와 교회의 길을 찾는 신학대화 11 (마지막회)]
교회와현장 (2022년 1월호)

 

  길희성 교수의 영적 휴머니즘
  

본문

 

* 서남동은 “신학은 함께하는 것”이라고 했다. 새길기독사회문화원, 크리스챤아카데미, 「기독교사상」이 ‘한국 사회와 교회의 길을 찾는 신학대화’를 공동으로 기획한 것은, 기독교 원로 학자들과 소장 학자들의 대화를 통해 세대 간 소통의 모델을 만들어보고 창조적 한국신학의 연속성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린 마음으로 이 대화에 참여해준 한완상, 최만자, 김경재, 이삼열, 서광선, 이경숙, 장회익, 이만열, 김윤옥, 김창락, 길희성, 그리고 김희헌, 최순양, 정경일, 이상철, 이숙진, 박지은, 신익상, 최상도, 송진순, 정혜진, 박재형에게 감사드린다. 이 신학대화가 마중물이 되어 더 깊고 풍요로운 대화가 한국교회와 신학계에서 샘솟기를 소망한다.-공동기획자 일동
대담자 소개 / 길희성 박사는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비교종교학)를 받았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서강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불교학)이며, 강화도에 있는 심도학사에서 종교의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영적 휴머니즘을 추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종교에서 영성으로』, 『종교 10강』, 『일본의 종교문화와 비판불교』, 『인문학의 길』,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인도철학사』, 『일본의 정토사상』, 『보살예수』, 『지눌의 선(禪)사상』, 『영적 휴머니즘』 등이 있다.
박재형 박사는 한신대학교 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학교(Ludwig-Maximilians Universität München) 신학부에서 “안병무의 민중 개념과 판넨베르크의 하나님 형상 개념에 대한 신학적-인간학적 대화 모색”을 주제로 조직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신대, 감신대, 협성대, 인천대 외래교수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한국민중신학회 총무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들꽃향린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생명과 평화를 여는 정의의 신학』, 『장공 김재준의 신학세계 2』,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혐오와 여성신학』, 『민중신학의 여정』,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 시대, 생물다양성에 주목하다』(이상 공저) 등이 있다.
이 대화는 2021년 10월 14일 심도학사에서 진행되었다.



박재형 길희성 선생님, 이렇게 귀한 자리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최근 저서 『영적 휴머니즘』을 읽고 나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오랜 학문 여정의 성과들을 종합, 정리해 주셨는데요. 저희 후학들이나 기독교 신학에 관심이 있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됩니다.
길희성 네, 제 평생 연구의 마무리 작업 같은 거죠. 그런 분들에게 조금 자극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박재형 저 자신도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선생님께서 탐구하신 신학적 주제들이 현재 신학자로서, 또 목회자로서 제가 깊이 고민하는 관심사이기에 더욱 많은 가르침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목회하고 있는 공동체에서 그런 주제를 가지고 강좌나 말씀 나누기 등을 통해 나름대로 대화하고 고민해 왔습니다. 한국 학계에서 신학과 종교학을 아우르며 인문학적 작업을 해주시는 선생님과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사실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학을 넘어서 다시 신학으로-신학의 틀을 깨고 신학의 진리를 추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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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형 선생님은 처음에는 기독교 신앙에 입문해 신학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다가 철학으로, 종교학으로 관심을 옮기셨습니다. 상당히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좀 더 추상적인 영역으로 관심을 넓혀 오신 것 같습니다. 어떤 과정과 전환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길희성 그 얘기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의 책 『영적 휴머니즘』을 이해하는 데도 적잖은 도움이 될 겁니다. 저는 신학으로 출발했는데, 미국 유학을 떠났던 이유도 사실 신학을 공부하러 간 겁니다. 예일대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수학했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은, 기독교는 좋긴 좋은데 너무 좁다는 것이었습니다. 유학 중 많은 책을 읽는 과정에서 일반 종교사가 하나님 계시의 역사라는,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사로 역사를 이해하는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이런 신념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 지금까지 온 것이죠.
제 책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반감을 갖는 분들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이게 무슨 기독교냐?”, “이게 무슨 정통신학이냐?” 정통신학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신학적 대안을 마련하는 게 제 고민인데, ‘정통’ 입장이 아니라고 비판하면 할 말이 없죠. 그 비판에 동의할 수밖에 없어요. 알면서 의도적으로 그런 거니까요. 하지만 공감하려는 자세로 읽는다면, 그런대로 귀에 들어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제 연구를 단순히 ‘신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철학적 신학’ 아니면 ‘종교 철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좁은 범주의 신학은 아닙니다. 적어도 소위 ‘정통신학’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정통신학적 사고와 기독교 전통의 틀을 넘어서려고 노력하고 있고, 또 어느 정도 넘어섰다고 생각합니다.
박재형 방금 말씀하신 문제의식과 관심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소위 ‘정통신학’을 과감히 벗어나게 이끌었고, 선생님의 대표적인 최근 저작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와 『영적 휴머니즘』 이 두 권을 저술하게 한 것이겠네요.
길희성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는 책 제목을 ‘신앙과 이성의 새로운 화해를 향하여’라는 좀 더 적극적인 제목으로 바꾸려고 생각 중이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지성사적인 연구였지요. 『영적 휴머니즘』은 저의 문제의식이 모두 반영되어 있습니다.

비판을 넘어서 대안으로: 영적 휴머니즘

박재형 선생님의 신학 작업 중에 일반사와 구원사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일반사’와 ‘구원사’, 이 두 역사관은 역사에 관한 인식의 도구, 즉 두 개의 렌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 역사와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구원 역사 사이의 배타적 대립과 괴리가 기독교 지성을 흔들리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죠.
길희성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특징이고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입니다. 사실 최대 단점이라고 할 수 있죠. 일반 역사를 독일어로 ‘알게마이네 게쉬히테’(Allgemeine Geschichte)라고 하고, 성서적 계시, 구원 역사를 ‘하일스게쉬히테’(Heilsgeschichte)라고 하며, 서로 배타적으로 구분합니다. 나도 젊은 시절에는 이런 관점에 기울어졌던 사람이지만, 종교학을 하면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더 굳어졌습니다. 이제는 “과감하게 한 번 소리를 발하고 죽어야겠다.” 하는 제 나름의 비장한 각오로 『영적 휴머니즘』을 썼습니다.
박재형 어떻게 보면 소위 이원론에 대한 해소 혹은 극복의 문제로부터 출발하셨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길희성 창조와 구원,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의 문제, 계시와 이성, 성서문자주의 신앙과 기복신앙의 문제, 철학적 신관과 성서의 인격적 신관, 신앙 언어의 문제, 신학과 철학, 종교와 과학, 배타적이고 편협한 성령론, 진화론적 창조관, 그리고 데카르트적인 이원론과 딜타이가 제시한 이분법적 학문론, 자연과 초자연을 나누는 신관, 이신론(理神論), 범재신론 등 다양한 신관, 영적 인간관을 백안시하고 종교를 민중의 아편 혹은 인간 욕망의 투사 내지는 환상의 산물로 간주하는 세속주의 사상이나 세속적 휴머니즘, 보편적 성육신 사상 등을 다 탐구했습니다.
박재형 그래서 선생님께서 이 책에서도 밝히셨듯이 서구 사상사와 신학의 주제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신학 전통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저는 소위 이원론이나 일원론이라는 것이, 우리가 세계를 관찰하는 도구일 뿐이지 세계를 규정하는 언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점을 정확하게 짚어 내셨는데요, 이원론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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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 그 주제가 결국 오늘 대화의 핵심일 것입니다. 저는 이원론적 프레임의 문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이 프레임을 뛰어넘으려고 애를 썼는데, 아직 만족할 만한 대안이 없어요.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나 틸리히(Paul Tillich) 정도가 중요한 기여를 하긴 했지요. 특히 틸리히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제가 지금 기독교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 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예요.
하지만 이런 신학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틸리히에게는 한 가지 제약이 있었어요. 그것은 그가 세계 종교를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서구 지성사와 철학사에는 정통한 사람이죠. 훌륭해요. 나도 그에게 신앙과 학문 여러 면에서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그러나 틸리히 자신도 인정하고 있듯이, 그에게는 ‘세계 역사’(global history), ‘세계 종교사’의 입장에서 신학을 하는 안목이 없어요. 서구 기독교만 알고 신학을 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기는 종교학을 했으니까 그렇지’, ‘한 종교도 알기 어려운데 어떻게 세계 종교들을 다 알 수 있겠는가’ 하며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동양의 신학자들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제대로 된 토착화신학이 필수적입니다. 아직 우리는 토착화신학의 방법론이나 당위성을 선교의 방편 정도로 논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것은 남의 종교를 더 알고 배우려는 자세가 아니지요.
박재형 소위 ‘정통신학’이라는 규정조차도 인간이 이성을 통해 판단하고 정의하기 때문에 정통이라는 것 안에도 이성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정통신학이 절대화되면서 모든 사고의 틀을 그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길희성 저는 ‘이것이 정통이다’라는 주장들에 대해 문제 삼을 생각이 없어요. 이미 지나간 시대의 신학이지요. 저 자신도 젊은 시절 루이 벌코프(Louis Berkhof)의 『조직신학』을 통해 정통 보수 신학을 공부했고, 그 신학적 토대를 제공한 종교개혁자 장 칼뱅(Jean Calvin)의 『기독교 강요』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직접 읽기도 했어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너무 방대해서 제가 감히 다 안다고 장담하지 못하지만, 아퀴나스에 관한 서적들도 많이 읽어봤어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를 몰랐다면 지금 저의 기독교 이해나 신앙이 크게 달라졌을 거예요. 에크하르트를 발견했을 때 제가 가장 후회한 것 중 하나는 중세철학, 중세신학, 스콜라 철학을 너무 단편적으로만, 그 초기 사상에만 집중해 연구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중세 천년의 사상들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너무나 부족했다는 점을 실감했던 것이지요. 서울대 철학과 재학 시절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만 공부하고 곧바로 데카르트로 건너뛰었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중세의 찬란했던 문화와 사상을 모르고 건너뛴 것이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철학적 신학’이 없었던 것입니다. 철학적 신학은 개신교에서 칸트와 데카르트 이래 종적을 감추게 되었고, 계몽주의, 자유주의 신학, 바르트(Karl Barth)의 신정통주의가 한동안 신학계를 휩쓸었지요. 불트만의 성서 연구와 실존주의, 몰트만의 정치신학이나 희망의 신학 같은 것이 있었지만, 지금의 본격적인 대안은 아니지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 신학’(global theology) 혹은 ‘다종교적-다전통적 신학’(multireligious-multitraditional theology)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적 휴머니즘은 그러한 시도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박재형 선생님께서는 인간과 세계, 신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인 이원론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생소하고 이질적인 인상을 주는 ‘영적 휴머니즘’(spiritual humanis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사실 한국 신학계에서 진보적인 신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이 ‘영적’(spiritual)이라는 단어의 함의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보수 신학계에서는 ‘휴머니즘’(humanism)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고 있고요. ‘영적 휴머니즘’이라는 단어의 조합, 이 개념을 통해 교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길희성 우선 종교와 휴머니즘이 같이 갈 수 있다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지금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당신은 한국 기독교와 교회가 휴머니즘적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면, 어느 정도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탈종교 시대, 휴머니즘이 상식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의 영향을 받아 세속적 휴머니즘과 영적 휴머니즘을 구별합니다. 세속적 휴머니즘이 트럼프 대통령 이후로 미국에서,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유럽 선진국들에서 위상이 말이 아니게 되었고 점점 더 공허한 구호 정도로 전락해가고 있지만, 민주주의, 자본주의, 과학기술과 의학 등의 영향으로 세속적 휴머니즘이 아직도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세속주의적 휴머니즘을 대체할 시스템이 아직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세속적 휴머니즘에 따라 이성적이고 합리적 사고를 잘한다고 해서 사람이 착해지고 사회나 세상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과거 종교 전통의 핵심이고 우리가 발견하고 발굴해야만 할 가장 훌륭한 면을 영적 휴머니즘에서 찾습니다. 영적 휴머니즘이 세속적 휴머니즘과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성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영적’(spiritual)이라는 말의 ‘spirit’은 성령을 의미하는 ‘프뉴마’(, pneuma)를 가리키는 말로서, 흔히 말하는 정신이나 ‘프쉬케’(, psyche, 마음이나 영혼)가 아닙니다. 두 단어는 확실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인간, 즉 영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기독교가 성령을 독점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을 차별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점을 『영적 휴머니즘』에서 불교, 힌두교, 유교, 신플라톤주의 철학 등을 동원해서 자세히 논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적이다’라는 말이 워낙 사람들에게 친숙하다 보니 오해가 많습니다. 영어로는 인간을 영적 존재라고 할 때 ‘spiritual being’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지만, 라틴어 ‘호모 스피리타티스’(homo spiritatis)를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영어로 ‘spirit’은 데카르트적인 몸과 마음의 이원적 대립 뉘앙스 때문에 문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독일 철학자 딜타이(W. Dilthey)의 영향으로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을 구분할 때도 데카르트식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오늘날 데카르트식 이분법을 극복해야 한다는 말은 지식인 대부분이 동의하지만, 실상 우리 모두는 데카르트의 후예들이지요. 온 세계가 과학기술에 미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적 휴머니즘은 건전한 세속적 휴머니즘과 손을 잡아야 하지만,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극복해야 할 현대 문명의 병폐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휴머니즘과 세속적 휴머니즘의 공통적 대전제는 사람은 단지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보편적 인권사상입니다. 저는 세속적 휴머니즘과 영적 휴머니즘을 상반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지금의 세속적 휴머니즘이 계몽주의 시대의 정신을 망각하고 공허한 말의 성찬으로 끝나기 때문에 영적 휴머니즘의 기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영적 휴머니즘이 빛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하여튼 화두를 던지는 거예요. 두 휴머니즘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던지는 화두지요. 현 한국교회의 상황을 보면 왜 우리가 세속적 휴머니즘, 계몽주의, 민주주의와 보편적 인권사상을 포기할 수 없는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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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기중심성과 종교의 의미

박재형 얼마 전 글 쓸 일이 있어 ‘신본주의’라는 단어를 찾아봤습니다. 신본주의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온 단어일까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영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 사전을 다 뒤졌는데, 신본주의라는 단어는 한국어 사전에만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곱씹어 보니, 신본주의라는 단어는 한국의 보수적 개신교가 휴머니즘, 즉 ‘인본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조합해낸 신조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속적 휴머니즘과 신본주의가 만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건강하지 못한 휴머니즘은 인간의 자기중심적 경향성을 보이고, 신본주의도 신을 빗대어서 인간의 자기중심적 욕망을 실현하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길희성 맞습니다. 그런 비판을 할 때 틸리히의 ‘신율’(theonomy) 개념이 중요합니다. 그의 신율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틸리히 사상 전부를 이해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율은 보수적 개신교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신본주의가 아니에요. 간단히 말하면, ‘타율’(heteronomy)은 인간의 자율성과 합리성을 무시하는 ‘묻지 마 신앙’ 같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근대 세속적 휴머니즘과 무신론적 휴머니즘의 반발을 낳은 것입니다. 반면 ‘자율’(autonomy)은 계몽주의 이후에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게 된 양심과 이성의 자율성 같은 것입니다. 양쪽 모두 안 된다는 것이 틸리히가 말하는 신율의 참 정신입니다.
박재형 신본주의라고 주장하는 쪽과 인본주의라고 주장하는 쪽이 양극단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자기중심주의를 다른 목소리로 낸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길희성 맞습니다. 그 점에서 똑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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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형 선생님께서는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한국 종교와 개신교의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종교, 새로운 휴머니즘, 새로운 공동체와 신학을 꿈꾸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영적 휴머니즘을 말씀하시면서 인간이 가진 자기중심적 성향, 그러니까 종교든 인간의 자기 이해든 간에 드러나는 이 왜곡된 관점에 대한 대안적 용어로 ‘초월성’과 ‘자연적 초자연주의’를 제시하시는데요. 여기서도 약간 서로 대비되는 개념들을 함께 사용하십니다. 이러한 양면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시는 의도와 목적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길희성 사실 인간관과 신관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특별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지만, 일반섭리와 특별섭리를 ‘신앙주의’(fideism) 안에서 종합하려고 합니다. 특히 초자연주의는 부활 사건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봅니다. 특별섭리라고 여기는 사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부활 사건 아닙니까? 저는 부활 사건은 부활 신앙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봐요. 역으로 부활 사건 없이 부활 신앙 또한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자연스럽다고 봐요. 이런 의미로 저는 특별섭리를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반 섭리가 특별 섭리에 우선한다고 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이신론(理神論)을 지지합니다.
요즘 이신론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영국 신학계가 그런 면에서 앞서가고 있지요.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키스 워드(Keith Ward) 등이 자연과학과 신학적 성찰을 연결해서 신앙의 문제를 파고드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신론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고 믿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사실 신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려면 반드시 자연계에 규칙적인 운동과 조화가 존재한다는 걸 인정해야 하지요.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라는 신앙적 인식이 있어야 자연과학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이신론만 제대로 이해해도 충분히 신앙인으로서 자격을 갖출 수 있다고 봅니다. 이신론의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아브라함과 모세의 이야기와 같이 성서에 가득한 특별섭리의 이야기들을 인정하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일반섭리가 특별섭리에 우선한다’는 입장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부활까지도 그렇게 볼 수밖에 없지요. 부활이 아무리 특수한 사건이라 해도, 이 세계 전체의 프로세스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지, 따로 떨어져 있는 별개의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특별섭리라고 믿는 사건을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입증할 방법은 없어요. 왜냐하면 한 사건이 이루어지려면 전후좌우의 무수한 사건의 상호작용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학자들이 섭리의 문제를 볼 때 불교의 연기(緣起)적 사고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특별섭리는 사실 신앙주의로밖에는 수용하는 길이 없다고 저는 봅니다. 신앙고백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특별섭리는 일반섭리의 일환으로 이루어진다는 원칙,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입증할 방법은 없다는 것, 더 나아가서 입증할 필요도 없고 또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신앙주의의 입장입니다.
박재형 일반섭리 혹은 일반계시가 특별계시, 특별섭리 위에 있다고 보는 선생님의 관점은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쁘고, 더 본질적이고 비본질적이다’ 이런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일반계시 안에서 예수의 사건이든, 그리스도의 사건이든, 하나님의 섭리든 특별한 사건들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결국 결단으로서의 믿음이라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길희성 일부 한국교회와 신학계에서 특별섭리를 너무 강조하고, 그걸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문제라고 보면 된다고 생각해요. 자기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이 하나님의 특별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신앙간증’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체험이 없는 신자를 ‘2등 신자’로 보는 잘못된 생각이 아직도 우리 한국교회에는 매우 강합니다.
박재형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은사를 받았다면서 신앙간증을 하고 다니지만, 착각 아니면 허위의식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길희성 맞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전후좌우의 무수한 사건들이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까 특별섭리 사건을 일으키는 게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인간으로서는 입증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전인수식 논리가 대부분이지요.
박재형 선생님께서는 한국교회에서 ‘영’이라고 하는 단어가 많이 오용되고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시고, ‘영성’조차도 교회가 기술적으로 사용하고 활용하는 모습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술화된 종교를 벗어난 영적 휴머니즘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라는 종교, 그리고 교회라는 종교기관이 세속적 휴머니즘보다도 더 타락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독교와 교회의 현실에서 도구화된 종교, 도구화된 영성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영적 휴머니즘을 제안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길희성 제가 제안한 것이 얼마나 동의를 얻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지금 모든 세계가 과학기술에 목을 매고 있지요.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자본의 논리와 과학기술이 침투하지 않은 곳이 없지요. 그러니 아무리 영적 휴머니즘을 외쳐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기’조차 안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위해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영적 휴머니즘입니다. 영적 휴머니즘이야말로 전통적인 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우리에게 남은 제3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휴머니즘과 사회적 영성

박재형 영적 휴머니즘의 발현은 개인적 혹은 종교적 영성에서 벗어나 모든 사회 공동체, 특별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 영성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요. 영적 휴머니즘과 사회적 영성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길희성 크게 말하면 방금 언급하신 사회적 영성과 제가 비판한 개인 중심적이고 좁혀진 의미의 영성이 영적 휴머니즘과 세속주의 휴머니즘의 ‘카운터 파트너’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말하는 영적 휴머니즘은 종교의 본질로서 예로부터 존재해왔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자꾸 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종교도 살고 세상도 살고 죽은 신도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붇다(बुद्ध, 혹은 ‘붓다’)와 예수는 진정한 영적 휴머니스트들이었습니다. 이런 선각자들의 생각을 종교가 독점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 불자들이 부처님 모르고 기독교인들이 예수님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 세계에서 종교가 처한 위기를 생각하면, 특히 탈종교 시대에 종교가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종교 속에 묻혀 있는 영적 보화를 발굴하여 힘을 상실하기 시작한 세속적 휴머니즘에 새로운 힘을 공급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재형 선생님께서는 『영적 휴머니즘』에서 유일신 신론에 대한 비판과 그에 더해 유일신의 종말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전 세계가 다종교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한국의 개신교만 배타적 신론, 편협한 종교관을 고집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래 기독교의 유일신은 그런 배타성을 의미하는 신론이 아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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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 제가 생각하는 신관은 ‘유일신 신관’(monotheism)이 아니라, ‘일원론적 형이상학의 신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세계적 지성으로 꼽히는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지요. 아까 언급한 특별섭리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에서 보면 ‘이게 무슨 신관이냐’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또 이런 건 성서적 신관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이것이 성서 전통의 조잡한 ‘인격신관’(theism)과 전통적 초자연주의 신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신관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동양사상은 중국의 성리학과 인도의 ‘베단타’(, Veda¯nta) 사상입니다. 또 불교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화엄사상’이 불교의 최고봉인데, 저는 종말론적 신앙에 따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는 만인과 만물이 보편적 사랑과 화해를 이루는 화엄적 공동체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세상은 아직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의와 싸우고 반대해야지요.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말입니다. 제가 타 종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관이지 종말론적 신앙은 아닙니다. 저는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을 비아론(非我論)으로 해석합니다. 아마도 전통 불교학자들은 반대할 사람도 많겠지만, 저는 붇다가 베단타의 ‘아트만’(A¯tman) 사상을 명확히 아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붇다는 아트만을 명시적으로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불교는 영적 휴머니즘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트만은 만인과 만물의 궁극적 실재로서 결코 이기심과 탐욕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아트만은 오히려 영적 휴머니즘, 영적 인간관의 핵심입니다. 아트만은 개인적 자아(individual self)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무신론이 아닙니다. 저는 화엄사상이 말하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비전을 종말론적 희망으로 품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불교의 아름다움은 신에 대해서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덕이지요. 하지만 저는 붇다가 신을 부정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잘 사는 것(well-living)

박재형 마지막 질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길희성 안 그래도 요즘 죽음에 대한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보곤 하는데, 저의 개인적 대답이 될 것 같아요. 심도학사에서도 삶과 죽음에 대한 프로그램을 여러 번 했어요. 참가한 사람 거의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죽음 자체는 그다지 두렵지 않은데, 죽을 때 오래 고생하면서 남에게 폐를 끼치다가 죽을까 봐 걱정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좀 의연하고 품위 있게 죽고 싶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디 마음대로 됩니까?
저는 부활신앙과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태어날 때 죽을 고생을 하며 태어나는 것이 우리 인생이고, 죽을 때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죽음에 대해 제가 지금 말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말은 ‘웰 다잉’(well-dying)도 중요하지만, ‘웰 리빙’(well-living)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이 살고 간 삶의 질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죽음을 논하는 것 자체가 죽음을 준비하려는 것도 있지만,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닌가요?
제가 틱낫한 스님을 만나서 제일 물어보고 싶은 것이 죽음에 대한 것이었어요. 그러던 차에 그분이 계시던 프랑스의 ‘자두 마을’(Plum Village)이라는 곳에서 스님과 대화할 기회가 생겨 죽음에 대해 여쭈어보았습니다. 스님은 하늘에 뜬 구름을 가리키면서 삶과 죽음이 마치 구름 한 조각이 둥둥 떠다니다가 다른 조각들을 만나거나 흩어지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많이 들어 본 것이기에 별로 감동이 없었습니다. 저에게 아직도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고가 약간이라도 남아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리 도통한 사람이라도 인간의 죽음을 구름 한 조각에 비유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뿐인 자기 목숨을 바친 무수한 무명의 용사들, 아무것도 모른 채 도도히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끼어 죽은 수많은 희생자를 생각해볼 때, 만약 그들 인생이 복권될 길이 영영 없다면, 그것이 우리네 인간 삶의 실상이라면, 우리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다 가는 것이 상책일 것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쉽게 이야기할 일이 아닙니다.
박재형 우리가 신을 탐구하고 종교에 심취하며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모두 ‘잘 살기’(well-living) 위한 삶의 여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귀한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길희성 먼 곳까지 찾아오시고 좋은 질문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2022년 4월호(통권 7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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