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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나의 목회 수기]
교회와현장 (2021년 12월호)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림
  

본문

 

어느 날 「기독교사상」으로부터 목회 수기를 써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소위 말하는 성공한 목회자도, 유명한 목사도 아니니 다른 분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겠다고 사양했으나, 페이스북(facebook)에 올린 내 글들을 보니 성공하거나 유명한 목사님들이 할 수 없는 이야기들, 목회 현장에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담아낼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며 재차 부탁하여 차분히 목회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 지면에 담지 못한 목회 철학 등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들에 녹아 있다.
우선 간략히 나 자신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3대째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났다. 대학 졸업을 앞둔 1970년 겨울에 김치영 목사님(당시 대구 동산기독병원 원목)께서 인도하시던 성서공부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로마서 강해』를 공부하면서 은혜를 받고 거듭남의 체험을 하였다. 나의 믿음의 스승이신 김치영 목사님에 대해서는 기회가 될 때 상술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우선 그분의 둘째 아들 김동건 교수(영남신대)가 쓴 『빛, 색깔, 공기』를 읽으면 그분의 삶과 신앙, 그리고 신학의 편린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971년 대학을 졸업한 후 아무런 직업도 갖지 않고 계속 김치영 목사님의 성서공부 모임에 참석하며 지내던 중, 아무런 직장도,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이 지내는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걱정이 커져갔다.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급한 마음에 우선 집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기숙사가 있다는 장신대 신대원에 1976년 입학했다.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마친 후 조직신학을 전공(Th.M.)하였다.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본부의 세계선교위원회(World Mission Committee)에서 일하며, 1985년 서울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84년부터는 서울장신대학교에서 시간강사로 강의를 하다가, 나중에는 전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신학교에서 계속 가르치기 위해서는 박사학위가 필요해서 1986년 에든버러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의 신학부인 뉴 칼리지(New College)로 유학을 떠났다. 에든버러에서 바르트를 연구하여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 나타난 소명의 교리”(The Doctrine of Vocation in Karl Barth’s Church Dogmatics)로 철학석사(Maste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하지만 영어권에서 바르트의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1991년 바르트가 가르치던 스위스 바젤대학교(Basel University)로 옮겨, 바르트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오트(Heinrich Ott) 교수의 문하생이 되었다. 바젤대학교의 신학부에는 오트 교수가 조직신학(교의학)을, 로흐만(Jan Milic Lochman) 교수가 기독교윤리학을 가르치고 계셨는데, 나는 두 분의 강의와 세미나, 박사과정 콜로키움을 수강하면서 영어권과는 다른 깊이를 배웠다.
마침내 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서울 서대문에 있는 봉원교회를 창립하신 이원태 목사님께서 46년을 목회하시고 일찍 은퇴하시며 후임을 물색하던 중, 나에게 청빙이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당시는 오랜 유학 생활로 인해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였다. 또 한편으로는 신학교 교수가 내 적성에 맞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The Theology of the Word of God)을 가지고 교회 현장에서 교인들과 직접 부딪쳐보자는 생각이 들어 청빙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2000년 4월, 박사 학위를 마치지 못한 채 오랜 유럽 생활을 중단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봉원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나는 한국교회가 ‘신학의 빈곤’(poverty of theology)을 넘어 신학의 빈혈증(anaemia)을 앓고 있는 현실을 절감했기 때문에, 신학이 있는 목회를 하고자 했다. 첫 설교에서 목회의 목표와 방향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밝혔다.

•근본주의(Fundamentalism) 신학의 지양-미국 선교사들이 전해준 근본주의 신앙과 거기에 내포된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 등을 지양하겠다.
•기복주의 신앙의 폐기-물질적 축복과 성공의 신화, 가족 중심주의에 따른 건강과 출세 등에 집착하는 보수 신앙을 극복하겠다.
•복음의 율법적 이해 극복-우리나라 교회가 복음을 율법적으로 이해하며 실행하고 있는 주일성수, 십일조 등 헌금의 강요, 새벽기도회와 부흥회 등 성회를 하지 않겠다.
•역사(정치)와 신앙의 분리 극복-영혼은 중요하고 귀하며 육체는 천한 것이라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생긴, 정신과 물질의 분리하는 비성서적 이원론과 그에 따른 역사(정치)와 신앙의 분리를 극복하고 예언자적 증언에 힘쓰는 교회를 세우겠다.
•에큐메니컬 정신과 세계 교회와의 연대-한국교회의 폐단인 개교회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에큐메니컬 정신에 따른 아시아와 세계 교회들과의 협력에 힘쓰겠다.
그렇게 시작된 첫 목회에서 일어난 몇 가지 일들을 젊은 목회자들의 미래의 목회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여 나누고자 한다.

1) 첫 설교를 듣고 대부분의 장로님들은 나의 목회 방향을 받아들이고 따랐지만, 고려파 교회에서 자란 어느 장로님은 ‘성서무오설’을 기반으로 한 근본주의 신학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겠다며 교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후 대학교수로 일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수요 성경공부 모임을 마치고 장로님 댁을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장로님께 “건축학도 발전합니까?”라고 먼저 여쭈었다. 그분은 말하기를 좋아하는 분인지라 한 시간이 넘도록 건축학의 이론과 그 변천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결론은 건축학은 발전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신학도 마찬가지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면서, 1900년대 초에 영미를 중심으로 일어난 근본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반작용으로 일어났지만, 정작 자유주의 신학은 칼 바르트를 위시한 ‘변증법적 신학’ 혹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에 의해 와해되기 시작했고, 이후 신정통주의 신학, 해방신학, 여성해방신학, 정치신학, 생태신학 등으로 발전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만약 건축학에서도 한때의 이론을 절대화해서 그 이외의 것을 이단 학설로 치부해버린다면, 그 학자를 모두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겠냐고 하면서, 신학도 1920-40년대의 근본주의 신학만 올바른 신학이라고 절대화하면 마찬가지 경우일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장로님은 내가 설교에서 니체를 인용하면, 신도들의 믿음을 북돋아줄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는데, 하필 무신론자인 니체를 인용하느냐면서 장문의 편지를 보내오시곤 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사도행전에는 좋은 설교를 들은 후 사람들이 보인 두 가지 반응이 등장한다. 하나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행 2:37)라고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묻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대답을 실천한 것이다.(청중이 죽는 경우) 다른 하나는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귀를 틀어막고 돌로 쳐 죽인 경우(행 7:54-60)이다.(설교자가 죽는 경우) 두 경우 모두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마음이 찔렸지만”(행 2:37, 7:54), 좋은 설교의 결과는 설교자가 죽거나 청중이 죽는 둘 중 하나로 나타났다고 성서 이야기를 비교해서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의 설교가 장로님의 신앙과 신학에 맞는지 아닌지 매주 검증만 당하고 있다면, 더 이상 이 교회에서 목회할 수 없노라고 말씀드렸다. 이에 장로님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고 말씀하셨다. 그 교회를 떠난 지 15년이 되었지만, 그 장로님과는 오늘날까지도 서로 존경하는 가운데 많은 교제를 나누고 있다.

2) 부임 후, 첫 부활절이 다가왔다. 부활절 다음 주일에는 요한복음 20장 19-23절의 말씀을 가지고 “부활의 평화”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요지는 이러하다.
부활하신 주는 제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현실 한가운데에 오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19, 21) 하시면서 우리에게 평화를 나누어주신다. 성서의 평화는 ‘샬롬’이다. 이는 전쟁이 없는 소극적인 평화가 아니고, 종교적이고 정신적이며 내면적인 평화도 아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는 입을 맞추는 현실(시 85:10), 모든 불의가 극복된 상황에서 복지(well-being)와 안녕이 실현된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신문에 보도되었듯이 재벌가에서는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있고, 신자유주의 경제하에서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며, 착취와 수탈에 기반한 특권 계층은 그들의 이익을 위한 카르텔을 공고히 하고 있다. 샬롬과는 거리가 먼 이 사회에 우리들은 성령을 받고 죄의 용서를 통해(23절)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아(21절) 그리스도의 부활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사명을 지닌 삶을 살아가기를 다지는 부활절을 맞이하고 보내자는 의미의 설교를 했다.
예배 후, 장로님들과의 커피를 마시는 시간에 어느 장로님이 다음 주일부터 교회를 쉬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장로님은 신앙심이 깊고 교회 봉사와 섬김에도 열심이었으며 어려운 교인들을 돕고 계신 중후한 인품의 사업가였다. 따로 만나서 깊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나중에 장로님께 전화를 드려 약속을 잡고, 반월-시화공단의 사업체로 찾아뵈었다.
당신의 사업체가 현대그룹에 납품을 하고 있는데, 정주영 회장은 “내가 여러분을 돕는 길은 외국에서 많은 사업을 따서 여러분에게 일거리를 나눠드리는 것”이라고 하면서, 1억 미만은 현금으로 지불하고, 더 큰 돈은 어음을 끊지만 대개 3개월 이내에 지불해 주어 현대로서는 큰 손해를 무릅쓰고 하청 업체들을 살려주는 방향으로 사업하고 있는데, 목사님이 ‘왕자의 난’이니 그런 설교를 하면 교회에 더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회사 경영이 어려울 때는 노모를 포함한 온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을 경험하곤 하는데, 위로를 받으러 간 교회에서 목사님이 그런 설교를 하시면 어떻게 교회에 다닐 수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이처럼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삶의 자리’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는 항상 숙제로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고 설교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그리스도 복음에 대한 대원칙을 선언했다. 나는 이 원칙을 목회와 설교에 지키기로 했다. 그러나 교인들에 대해서는 그 누구든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지켜주고, 겸손과 존중의 마음으로 대했다. 장로님께도 성의를 다했지만 결국 교회를 떠났다. 그럼에도 장로 은퇴 때는 모시고 은퇴예배를 거행했고, 서로 존중과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3) 목회를 시작하면서 심방을 진행했다. 장로님들이야 그간 믿음이 좋아서(?) 장로까지 되었으니, 그분들은 제외하고 일반 교인들을 심방했다. 그랬더니 장로님들 사이에서는 새로 부임한 목사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장로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가 생기기도 했고, 새로 온 목사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은 마음에 만나서 대화하자는 제안을 해오기도 했다.
그중 한 장로님은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국내 유수의 대학에서 석좌교수를 하고 있었다. 그 장로님은 유학을 하던 어려운 시절에 성결교 출신의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부인을 통해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한 분이었다. 봉원교회를 창립한 목사님은 한신대에서 공부하셨고 또 역사의식을 가진 분이어서 현실비판적인 설교를 하곤 했기 때문에 새로운 목사는 좀 뜨거운 분이 오기를 바랐다고 하셨다. 그래서 교회를 오순절 교회처럼 뜨겁게 하기를 기다렸는데, 좀 엉뚱한 분이 왔다고 하면서 조용기 목사님처럼 설교해달라고 요구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국내 굴지의 대학에서 교수를 하는 장로님이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처럼 설교해달라고 하셔서 나는 충격에 빠졌다. 가장 이성적인 신앙을 추구하며 그에 맞는 설교를 요구하리라고 생각했던 분이 가장 반이성적인 설교를 바라다니….
본회퍼 목사의 말처럼, 교회는 ‘값싼 은혜’를 지양해야 하며, 인간들의 종교성(religiosity)이나 영성(spirituality)에 호소하는 신앙이 아니라 맑은 이성과 합리성을 갖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붙잡는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9)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는 신앙과 신학이 내게는 너무나 확실했다.
나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고, 결국 오래지 않아 그 장로님 부부도 교회를 떠나갔다. 훗날 그 장로님께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생겼으나, 나는 교회를 사임하는 날까지 그분들을 위해 심방을 다녔다.

4) 칼뱅의 말처럼, 목회를 하는 동안 ‘듣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설교만이 아니라 ‘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만찬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차원에서 1년에 여섯 차례(신년주일, 부활주일, 교회창립주일, 성령강림절, 가을이 시작하는 9월 첫 주일, 종교개혁주일) 성만찬을 정기적으로 거행했다. 장로님들이 성찬기에 담긴 포도주와 떡(빵)을 들고 예배당 1층과 2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시행되는 것이 너무 형식적이라고 느껴, 영국과 스위스 교회에서 배운 것들을 참고하여 다른 방식으로 시행해보고자 했다.
그리스도의 몸이자 한 공동체를 상징하는 빵은 덩어리로 준비했으며, 포도주는 커다란 사발에 담았다. 그리고 장로님 두 분만 앞에 세워 빵과 포도주를 들게 한 후, 전 교인이 차례로 앞으로 나오게 하여 목사가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나누어주는 방식을 택했다. 목사가 “이것은 형제(혹은 자매)를 위해서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고 말하며 빵을 조금 떼어 주면, 교인은 “아멘!”을 한 후 먹게 하고, 포도주 역시 “이것은 형제(자매)를 위해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하면, 교인은 “아멘!”을 한 후 사발에 입을 대어 조금 마시게 했다.
성만찬에서 장로의 역할이 줄어드니 장로님들의 반발이 심했다. 어느 장로님은 총회에 고소(질문)하겠다고 했다. 세계 교회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리마 텍스트(Lima Text), 즉 “세례와 성만찬과 목회”(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라는 문서를 발간한 이후, 세계 교회 간의 다름을 넘어 성만찬 의식에서도 일치를 향해 수용의 과정을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다면, 제발 고소하시라고 했더니 결국은 그냥 지나갔다. 나는 오히려 그분이 교단 총회에 문제를 제기하기를 바랐다. 우리 교단의 성만찬 신학이 새롭게 정립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장로님은 새로운 성찬의식을 거부하여, 성찬예배에 오지 않겠노라고 통보했다. “성찬거행은 장로님의 의무이고, 권리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권징’(discipline)이 모두 사라졌는데, 장로님이 정당한 사유 없이 성찬예배에 오시지 않겠다면, 당회를 열어 장로님을 권징하고, 장로를 권징한 목사가 계속 시무하는 것은 무의미하므로 나는 사임하겠노라.”고 말씀드렸다. 장로님은 타협적인 자세를 가지고 처신했고, 교회의 건덕을 위해 권징을 유보했다.

5) 공부를 계속하다가 목회를 해서 그랬는지, 설교가 어렵다며 좀 쉽게 설교해달라는 교인들의 요구가 빈번해졌다. 그래서 나는 소위 유명하다는 목사들은 어떻게 설교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한동안 텔레비전에 나오는 기독교 방송 채널들의 설교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시청했다. 그리고 한 달 쯤 후 설교 시간에 이렇게 선언했다. “유명한 목사들이 기독교 TV에서 하는 설교들이 기독교라면, 나는 오늘부터 그런 기독교를 떠나겠다.” 나는 장로님들을 비롯한 여러 교인들로부터 반발과 도전이 있으리라고 각오하고 한 말인데, 아무 일 없이 그냥 조용히 지나갔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마 11:17)라는 말씀처럼, 공명과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교회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목회를 시작한 지 6년이 지나가며, 점점 기성 교회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정신도 지쳐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의미를 잃은 목회를 계속하기 힘들었다. 단지 갈 곳이 없고, 다른 벌이가 없어 사임하지 못한다면, 바로 내가 삯꾼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사임하자니 살 집도 없고, 그간 저축해놓은 것도 없어서 앞으로의 생활이 캄캄했으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시편 23편의 말씀을 뇌리에 새겼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뜻인데, 나의 믿음 없음을 절감하였다. 그렇게 그 교회에서 7년을 채운 후인 2007년 3월 말에 긴급 당회를 소집하여, 아무런 대책도 없이 사임을 통보했다.

2007년 성령강림절에 뜻을 같이하는 몇몇 분들과 “시냇가에 심은 나무 교회”(예장 통합/서울서노회)를 창립했다. 우리나라의 ‘생각하는 젊은 크리스천들’과 함께 (1) 성서 연구 (2) 십자가 정신(속죄 신앙) (3) 예언자 정신 (4) 종말론적 역사 참여를 뜻하는 ‘하나님의 나라’ 운동(바르트가 말한 ‘하나님의 혁명’에 참여하는 신앙), 이렇게 네 가지 정신으로 새 공동체를 시작했다.
나는 교회의 선교 방향이 전환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다. 교회 성장을 위한 개인 전도와 해외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보다, 참여연대나 국민기본소득운동, 국제엠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 그린피스(Green Peace) 등과 연대하여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운동을 미래의 선교 과제와 의무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설교를 통해 교인들의 신앙과 사고를 변화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작은 교회여서 큰 일을 하지는 못했지만,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홍익대에서 청소노동자 해고 사태와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 교회에서 그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헌금을 기부하여 힘이 되어주려 했고, 용산 철거민 화재 사태와 투쟁 때도 그들을 찾아보고, 그들과 연대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어느덧 교회를 창립한 지 13년의 세월이 흐르고, 정년이 되어 은퇴를 맞이했다. 그간의 내 목회를 돌아보자면, 1985년 봄 서울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35년을 “게으르고 무익한 종”으로 지내왔음에 부끄러움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 목회의 중심에는 늘 ‘하나님의 나라’가 있었다. 바르트에게 큰 영향을 준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의 신앙과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warten, 기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서둘러 일함(eilen, 실천, praxis)”이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지(praxis)는 못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삶’(기도)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앞으로의 남은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서둘러 일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 구체적 모습은 첫째, 남북이 종전선언을 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북한에서는 핵무기 개발과 생산을 중단, 폐기하고, 남한에서는 미군을 철수하여 ‘한반도 영세중립국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빈부의 차가 심화되는 현실에서, 피케티(Thomas Picketti)가 주장하는 ‘국민 기본자본’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국민 기본소득 제도’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에 연대하는 삶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힘들(Herrenlose Gewalten)과의 싸움’(K. Barth)을 쉬지 않으려고 한다.

하은규|한국외국어대학교(영어영문학)를 거쳐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후, 에든버러대학교와 바젤대학교에서 조직신학(칼 바르트)을 공부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목사이며, 봉원교회와 시냇가에 심은 나무 교회에서 목회한 후 은퇴하였다. 봉원교회 시절부터 시작한 독서토론 모임을 22년째 이어가고 있으며, ‘목요신학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칼 바르트 관련 공부 모임을 하고 있다.

 
 
 

2021년 12월호(통권 7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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