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한국 사회와 교회의 길을 찾는 신학대화 10]
교회와현장 (2021년 12월호)

 

  성서와 바울에 빠져든 만년 지각생, 김창락 교수
  

본문

 

* 새길기독사회문화원, 크리스챤아카데미, 「기독교사상」은 “한국 사회와 교회의 길을 찾는 신학대화”를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신학대화는 한국 기독교가 일구어온 사회참여적 신학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함으로써 교회가 다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려는 시도로 기획되었다. -편집자

대담자 소개 / 김창락 교수는 1936년 경상북도 경산에서 출생했고,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과 중앙신학교를 마쳤다. 독일 마인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84년부터 2001년까지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신약학회 회장, 한국민중신학회 회장,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다마스쿠스 사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귀로 보는 비유의 세계』, 『성서주석: 갈라디아서』, 『새로운 성서해석과 해방의 실천』 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논문과 역서가 있다.
정혜진 박사는 이화여대에서 국어국문학 및 기독교학을 전공한 후, 동 대학원 기독교학과에서 성서신학으로 석·박사를 마쳤다. 현재 이화여대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기독여민회 연구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 『여성, 존엄을 외치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저항』, 『여성들을 위한 성서주석』이 있으며, 공저로 『한국적 작은 교회론』이 있다.
이 대화는 2021년 9월 7일 경동교회에서 진행되었다.



‘성서 번역자’ 김창락

gisang2112_05.jpg

정혜진 신약성서학과 민중신학의 길을 먼저 걸으신 선생님을 뵙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은퇴 후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할 독자들을 위해서 최근에 하시는 활동을 중심으로 먼저 여쭙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하비 콕스의 『종교의 미래』나 게리 윌스의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저를 포함해 재밌게 읽은 분들이 많아서 ‘번역하시는’ 김창락 선생님은 독자들이 익히 알고 계실 듯합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현재까지도 ‘성서 번역자’로서 꾸준히 활동하시는 것은 모르는 분들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대한성서공회 총무를 지내셨던 민영진 목사님께서 선생님의 고희기념 논문집에 쓰신 글을 보면 갈라디아서의 한 구절을 번역하기 위해 며칠씩 고민하셨던 일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오랫동안 성서 원문 번역에 애정을 가지고 참여하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김창락 성서 번역은 공동 작업이니까 개인적 이야기보다 성서와 한국 개신교회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계 개신교 선교 역사에서 한국은 교회가 생기기도 전에 한글로 번역된 성서를 들고 선교사들이 입국했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소위 만주에서 번역한 ‘존 로스 역’이 그것이지요. 한글만큼 과학적이면서 익히기 쉬운 문자가 매우 드문데도 한문을 중시하던 풍토 속에서 한글은 천시를 받았는데, 한글로 성서가 번역된 것은 이후 한글의 대중화는 물론, 한국교회의 성장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신구약성서 전체가 한글로 처음 번역된 것은 1911년의 『셩경젼셔』입니다. 이후에 이것을 개정한 ‘개역’이 1938년에 나오면서 1911년 번역은 ‘구역’이 됩니다. ‘개역’은 1950년대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표기상의 수정을 거쳐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 되었고, 이 성서가 오래 쓰였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한글로만 표기했을 때 이해 불가능한 한자어들이 많다 보니 꼭 필요한 것을 수정해서 1998년에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사실 기존 번역이 ‘구역’에 의존한 번역이다 보니 1950년대부터 젊은 세대들도 이해할 수 있게 성서를 현대어로 번역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약만 작업을 해서 『신약전서 새번역』이 나온 것이 1967년입니다. 성서 번역사에서 1960년대에 일어난 또 다른 중요한 일이 있는데, ‘제2바티칸공의회’에서 모든 신자가 성서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번역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것을 계기로 가톨릭과 개신교가 성서 번역에 협력하자는 결의가 이루어져 1977년에 『공동번역 성서』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특별히 놀라운 것은 당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현대어로 신구약 전체를 번역한 것을 넘어서, 신구교 간 차이와 긴장이 없지 않은 한국 상황에서 가톨릭과 개신교가 연합해서 번역을 이뤄냈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공동번역 성서가 제일 먼저 나온 것이 한국이고, 아직도 공동번역이 없는 나라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랑스러운 역사이지요.
가톨릭교회 입장에서는 이 『공동번역 성서』가 신구약 전체를 담은 첫 성서다 보니 나중에 가톨릭주교회의가 펴낸 『성경』이 나오기 전까지 표준으로 사용했는데, 안타깝게도 개신교회에서는 몇몇 진보적 교회들 외에는 통용이 안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개신교 측에서는 1967년에 나온 『신약전서 새번역』을 교정하면서 구약도 마저 번역해서 한글세대가 이해할 수 있게 하자는 뜻에서 번역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유학 마치고 돌아와서 합류한 것이 바로 이 사업이었는데 추진 과정에서 신약도 1967판을 교정하는 수준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 번역하자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출간된 것이 『성경전서 표준새번역』(1993)이고, 이 성서가 개정의 과정을 거쳐 지금은 『성경전서 새번역』(2001)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요즘도 새로운 성서 번역 프로젝트에 함께하고 있는데 일단 여기까지 이야기하지요.

성서신학자가 되기까지

정혜진 선생님께서 번역 과정에 참여하신 표준새번역은 제가 공부하면서 가장 많이 참조하고 인용하는 성서인데요, 그 배후에 이런 역사가 있다는 것을 듣게 되니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 선생님께서 어떻게 성서신학자가 되셨는지 그 여정이 궁금해집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하셨지요?

gisang2112_06.jpg

김창락 내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만년 지각생’입니다. 자랑 같아 미안합니다만, 우등상은 따놓고 받으면서, 개근상은 지각을 많이 해서 못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학문을 하는 데도 만년 지각생을 못 벗어났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기 전 신앙생활부터 이야기하면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 성서를 읽고 중요한 대목을 외우는 분이셨는데,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영향으로 시편 23편 같이 귀에 못이 박힌 구절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아버님이 외우시던 ‘구역’의 구절로 떠오릅니다. “오직 성신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런 식으로 부모님이 가르치신 데다 기억력도 좋아서 글도 깨우치기 전에 신구약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흡수할 정도였고, 기독교 신앙과 내 삶을 분리할 수 없이 하나로 생각하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니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는데 신학과를 가지 않은 것은 나름의 사연이 있습니다. 그건 함석헌 선생의 영향이었는데, 함 선생이 일본에서 사범학교 나와서 선생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서인지, “어떻게 사범학교 나와서 선생을 할 수 있느냐, 선생이 되는 학교라는 게 있을 수 있나”라는 취지로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나는 그걸 내 식대로 해석해서 신학 바깥에서 자유롭게 신학을 하겠다는 생각에서 영문과를 갔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신앙이 독실하달까, 맹목적이랄까 철저히 문자주의적으로 사고하도록 훈련받아서 내가 성서를 많이 안다고 생각하며 살았지요. 그런데 대학 2학년 마치고 군대 생활을 하는 중에 신앙과 현실이 괴리되는 걸 느꼈습니다. 대학교에서도 전공인 영문학보다는 신학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고전어와 종교학 과목을 더 많이 공부할 정도였는데, 이때 신학 공부를 넘어 기독교 자체에 대한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이런 공백 상태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유학 가겠다고 하면 미국에서 장학금 주면서 모셔갈 것이라 막연히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것도 다 거절당하면서 여기에 대한 절망도 더해졌지요.
같이 교사 생활 하던 친구 중에 서울대 철학과 나온 이가 있었는데, 무슨 토론만 했다 하면 내가 백전백패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 날 학교를 그만두고 장신대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것이 자극이 돼서 나도 철학을 공부해야겠다 결심하고 대학원을 알아보니 서울대는 학부에서 전공을 안 해서 자격이 없다고 하고, 고려대는 학부 학점을 더 따는 것을 조건으로 입학이 가능하다고 해서 철학과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들어갈 때는 실존주의에 관심이 많아서 하이데거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지도교수 조언이 있고 해서 사르트르로 주제를 바꿨고, “사르트르 자유의 형이상학적 근거”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쓰고 졸업을 했습니다.
또 이 시기에 같이 교사 생활을 하던 분 중에 내가 종교에 관심이 있고 이쪽으로 강의도 많이 들은 것을 알던 분이 있었어요. 하루는 이분이 “김 선생, 시간 있습니까?” 묻더니, 나를 데리고 청계천5가 세운상가 건물로 가서는 거기 몇 층에 있던 강의실로 밀어 넣어요. 그때 강의를 하고 있던 분이 바로 허혁 교수였어요. 나는 당시 그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거기가 중앙신학교(강남대학교 전신)인지도 몰랐어요. 허혁 선생의 수업을 들으면서 신학이 저런 거라면 신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수업 끝나고 나와서 바로 입학 등록을 했어요. 허혁 교수를 통해서 실존철학과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이 연결되니까, 그때는 모든 걸 해결하는 답을 얻었다는 기분이 있었어요. 물론 독일 가서 새로운 신학을 만나면서 방향이 달라지긴 했습니다만, 이때 허혁 선생의 영향으로 불트만을 더 공부하고 싶어서 독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지요.
정혜진 선생님께서 보수적인 신앙에서 허혁 선생님을 만나고, 불트만 같은 신학자들을 알게 되면서 근대신학으로 돌아서신 선회의 이야기가 너무 흥미롭습니다. 독일 유학 시절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서, 특별히 바울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신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창락 ‘만년 지각생’답게 늦깎이로 서른여섯에 독일로 유학을 떠났어요. 독일에서 박사학위 받으려면 지도교수 만나는 것이 제일 중요한데, 당시 중앙신학교 학장으로 계시던 안병무 선생이 독일에 있는 친구를 지도교수로 추천도 해 주시고, 외국 선교사를 통해서 장학금도 받을 수 있게 주선해주셔서 순조롭게 독일 마인츠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큰 특혜지요.
처음부터 바울을 연구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처음에 지도교수가 무엇에 대해서 논문을 쓰고 싶냐고 묻는데, ‘역사적 예수’라고 이야기하니까 바울에 대해 쓰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더라고요. 역사적 예수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고 겁도 없이 뛰어든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요. 당시 나는 잘 알지 못하면서도 바울이 교리적이라는 편견이 있어서 바울을 싫어했습니다. 지도교수가 절충안으로 ‘바울 설교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상’을 제시한 게 계기였고, 이 주제로 논문을 꽤 많이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운명적이랄까, 고린도전서 15장,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연구해서 논문의 두 장 이상을 완성한 상황에서 변화가 생깁니다.
당시 내 지도교수는 독일 보수주의 신학의 대표쯤 되는 분이었는데, 이분이랑 상극인 진보 신학의 대표 격인 루이제 쇼트로프 교수도 마인츠에 있었어요. 내가 유학 간 1970년대가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이 격렬할 때니까 독일 한인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그런 모임이 많았지요. 서울대 다닐 때 아는 친구들도 많고 해서 나는 특별히 의식이 없었는데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식으로 함께 어울리면서 민주화 운동 분위기에 눈을 뜨게 됐지요. 또 마인츠대학에는 쇼트로프 교수가 주관하는 모임들도 있었는데, 그런 데도 참석하면서 자연스럽게 진보적인 의식에 물들게 됐어요. 해방신학도 이런 자리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내 지도교수가 뮌헨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돼서 나한테 따라가겠냐 묻는데 안 가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그분이 나를 또 다른 교수한테 인계를 했는데 이분도 보수적인 분이었어요. 이때가 갈라디아서를 가지고 논문 3장을 쓰고 있을 땐데, 국내에서는 박정희가 죽고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던 때였지요. 언론 통제가 없는 독일에서 한국 소식을 더 많이 들으니 한국 사회의 문제를 비롯해서 정치적 태도가 분명해지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런데 이 교수도 내 논문이 너무 진보적이랄까, 정치적이랄까 그랬는지 지도를 못하겠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루이제 쇼트로프를 찾아갔더니 이미 여러 집회에서 만난 외국 학생이어서인지 허락을 해서 지도교수를 바꾸게 되었지요. 쇼트로프 교수로 말하면, 좌파 교수이고 물질적 성서해석, 또는 사회사적 성서해석의 대가이지요. 쇼트로프 교수에게 옮기면서 논문의 방향을 완전히 틀게 되었는데, 이미 작성한 두 장을 지우고 갈라디아서만 가지고 새로 써서 학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상황과 이방인 선교

gisang2112_07.jpg

정혜진 쇼트로프 교수님께로 적을 옮기시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너무 좋은 일이었네요.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바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제가 복음서 전공자라서 선생님께서 쓰신 『귀로 듣는 비유의 세계』는 열심히 읽으면서 공부했는데, 바울 관련 연구들을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선생님께서 쓰신 『갈라디아서』 주석, 『다마스쿠스 사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칭의론에 대해 쓰신 여러 논문들을 보면서 정말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칭의론에 대한 선생님의 관점이 그간의 교리적인 해석과 완전히 다른 방향이어서 깊이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김창락 칭의론과 관련해서 쓴 글이 많다 보니 바울의 칭의론 이야기가 먼저 나왔는데, 얘기를 이렇게 시작해 봅시다. 우리가 바울의 신학을 논할 때 칭의론이니, 구원론이니, 그리스도론이니, 종말론이니 하면서 이름을 먼저 붙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벌거벗은 임금님〉 우화에 나오는 어른들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면 그저 벌거벗은 사람인데, 입고 있지도 않은 옷에 이런저런 수사를 붙여서 ‘임금님 최고’를 말하려는 식이지요.
우리의 목표는 있는 그대로의 바울을 만나는 겁니다. 물론 이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기원후 33년경에 등장해서 56년까지 선교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이송된 후 60년대 네로 치하에서 처형당한 인물입니다. 바울을 알 수 있는 1차 자료가 바울이 쓴 편지들인데, 문제는 이 서신들이 바울이 어떤 사상이나 이론을 전개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고 교인들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실제적인 필요에 의해 쓰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편지들로 바울의 체계적인 신학을 도출하는 것은 어렵다는 말입니다.
나는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름을 받은 그 삶의 출발점에 어떤 일이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다마스쿠스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또 다른 자료인 사도행전이라는 기록을 참조해야 합니다만, 사도행전도 바울 시대에 있었던 이방 기독교와 유대 기독교 사이의 치열했던 투쟁이 해결된 시대에 쓰인 것이라 신중하게 또 비판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이 사건이 세 번 보도되는데(9, 22, 26장), 세부적인 서술은 달라도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아들을 보이신 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 뜻이라는 것이 공통됩니다.
사도행전에서 다마스쿠스 사건 전에 바울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시다시피 일곱 집사의 대표 격인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면입니다.(행 7장) 스데반이 순교하는 현장에서 사람들이 사울(바울)의 발 앞에 옷을 벗어두었다고 나오지요. 스데반이 누구냐 하면 헬라(그리스)말 하는 교인들과 히브리말-히브리어는 사어(死語)라 학자들만 아는 언어였으니 정확히 말하면 아람어입니다-하는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어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세워진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한인교회를 가보면 이민 1세대는 한국어로 예배를 드리지만 2세대부터는 영어로 하지요. 이렇게 같은 한인교회여도 언어에 따라 갈라지는데, 스데반 시대에 그리스말 하는 교인은 인종적으로 그리스인이 아니라 해외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그리스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던 사람들이 본국으로 돌아온 경우입니다. 그런데 공동체에서 본토에 살던 토박이들에 비해서 귀환한 사람들이 구제에 있어서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는 불평이 나왔다는 것은 이 두 집단 사이에 차별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해결하려고 집사를 선출했는데, 이름들을 보면 다 헬라파이고 그 대표가 스데반인 겁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전후를 잘 보면 이 스데반이 그저 구호나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교를 하는 전도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순교한 후 박해가 시작되어 사도와 집사들이 흩어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이야기로 전개되지요.(행 11:19) 이 흩어진 사람들이 간 지역으로 여러 곳이 언급되는데, 그중에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안디옥교회도 있지요. 바로 이 이방인 선교의 확장이라는 긴 흐름 속에 다마스쿠스 사건이 있고, 빌립의 사마리아 선교(8장)에서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10장)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나옵니다.
정혜진 이방인 선교를 둘러싸고 초대교회 내에서 나타난 관점의 차이와 긴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김창락 중요한 것은 이방인 선교에서 단순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느냐 아니냐가 논쟁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그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하는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도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을 막지 않았고, 다만 개종할 때 할례를 받게 하고 구체적인 의무들을 명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예루살렘 원시교회도 별개의 종파가 아니라 유대교의 한 종파였으니까 비슷했습니다. 이방인이 기독교를 믿을 때 유대인과 아무 차별 없이 어우러질 수 있는가 했을 때,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예를 들어 교제의 가장 기본이 식사인데, 유대인들은 그들 나름의 음식 규정을 철저히 지켜야 하니까 같이 식사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내가 보기에 초기 그리스도교 선교에서 문제가 된 것은 이방인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만으로 똑같은 형제자매로 대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스데반과 같은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보다 개방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 그리스도인 측에서 반발이 나오는 겁니다. 스데반이 ‘거룩한 곳(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했다는 것은(6:13) 이런 반발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회에서 스데반이 연설하면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공격하는데(7:51), 여기서 할례가 언급되는 것을 주목해 봅시다. 할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하나의 표시인데, 스데반의 비판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에게 강요하는 의무사항의 핵심인 할례를 문제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다시 말해,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을 아무 차별 없이 대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하나로 할례가 갈등의 핵심이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 갈등을 단순히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일종의 보수파와 진보파 사이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할례를 쟁점의 하나로 봐야 스데반 순교 후에 빌립이 다른 곳이 아니라 하필 사마리아에서 선교를 했다고 하는 서술의 의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면서 어찌 보면 이방인들보다도 더 먼 존재로 여겼는데, 그래도 그들은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할례를 하느냐 마느냐 이게 문제인데,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했을 때는 할례에 관해서 시비를 걸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선교에 이어서 빌립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하는 에티오피아인 ‘내시’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주석을 참조해서 그를 성기를 잘라낸 사람이라고 본다면, 할례에 관한 시빗거리가 원천적으로 없는 경우로 서술된 것이지요. 뭔가 시빗거리 없이 원만하게 진행된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첨예한 갈등이었다고 봐야겠지요.
사도행전의 서술을 실제 역사 그대로라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대결의 맥락에 다마스쿠스 사건 전후의 바울의 모습을 겹쳐 봅시다. 이전에 바울은 유대교의 종교적 기득권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던 사람입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선교하면서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부정하는 요소를 발견했을 때, 바울은 유대인의 특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을 박멸하러 나선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다마스쿠스 사건을 계기로 바울이 박해를 중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박멸하려 애쓰던 그 일에 투신하게 된 겁니다. 이것을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사회적 강자인 기득권층의 처지에서 사회적 약자의 자리로 옮겼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보여준 변화는 종교를 바꾸었다는 식의 ‘개종’도 아니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나 ‘회심’도 아닙니다.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서 ‘소명’을 발견하고 삶의 방향이 180도 달라졌다는 점에서 이것은 바울의 ‘전향’입니다.
그런데 할례 문제처럼 유대인들의 정체성과 특권과 관련된 갈등이 바울의 삶과 선교 전체를 따라다닙니다. 갈라디아서에도 이것이 문제가 돼서 오죽하면 바울은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5:12) 바로 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이 ‘칭의론’이라고 하는데, 이는 추상적인 담론이 아닙니다. 율법을 빙자해서 이방인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1:6-10) 자들을 향해서 반격하면서 휘두른 공격용 무기였다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의 적대자들은 그냥 유대교인들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Judaizer)이라고 해야 합니다. 영어 표현에서는 이 둘이 구분이 안 돼서 독일어 표현을 참조해야 하는데, 독일어는 ‘유대교’(Judentum)와 ‘유대주의’(Judaismus)를 구분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이방인들에게 선교하려면 반드시 할례 받고 음식 규정을 지켜야 된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과 바울이 대결한 것이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갈라디아서이지요.

‘투사 바울’의 이론적 무기, 칭의론

정혜진 선생님께서 소위 ‘칭의론’이라고 불리는 ‘신학’보다 바울이 씨름했던 구체적인 ‘상황’으로 관심을 돌려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신 이유를 잘 알겠습니다. 저도 동의하는 관점인데, 그럼에도 여전히 이런 관점이 바울을 이해하는 데 상식이 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gisang2112_08.jpg

김창락 바울이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를 외친 것이 일반적인 구원론이 아닌데, 바울의 진의를 오해해 온 긴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위대한 교부이자 기독교 신학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이러한 왜곡의 역사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청년 시절에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회심한 사람 아닙니까.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선포를 보면서 용기를 얻고 삶을 변화시킨 사람이다 보니, 개인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서 바울을 해석하게 되고, 이후로도 이런 해석이 힘을 받게 되었지요.
또 마르틴 루터의 영향도 적지 않지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모토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입니다. 이것이 개신교에서 교회의 존망이 달려 있는 신성불가침의 무엇이 되어 있다 보니 여기에 도전하면 이단이 될 정도인데, 루터의 맥락과 바울의 맥락은 구분해야 합니다. 죄의 문제로 늘 고민하던 수도사 루터에게는 ‘오직 믿음으로’가 해방이었고, 그것을 종교개혁의 중요한 기치로 내세운 것의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해도, 루터가 이해한 것이 본래 바울이 말한 의도 그대로인가는 다른 문제란 말입니다.
그런데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교리나 교권 같은 모든 전통과 권위에서 벗어나서 이성을 사용해서 성서를 해석하자는 움직임이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역사비평적 해석입니다. 이런 흐름에서 19세기 바울 해석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학자 중에 튀빙겐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F. C. 바우어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울의 적대자들을 규명하는 데 한 획을 그은 사람인데, 그의 연구가 20세기 후반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우어는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관을 바울에 적용해서 연구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고린도교회에 분쟁이 생겨서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졌다고 나오는데, 바우어는 이 넷을 크게 두 개, ‘바울파’와 ‘게바파’로 나누었지요. 후자는 유대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바울파’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대변한다고 본 것인데, 바우어는 이 두 집단 간의 갈등이 정(正)과 반(反)으로 갈등하다가 보편 교회로 종합됐다는 식으로 원시교회의 역사를 재구성했죠. 물론 헤겔의 도식을 고린도교회에 적용한 것이 실제 역사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가는 다시 따져봐야겠지요. 그럼에도 바울 신학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답하기 위해 바울의 적대자들의 문제에 집중한 것은 큰 전환이지요.
결국 바울의 선교 상황에서 바울이 적대자들과 싸우면서 무기가 되었던 말들이 그 맥락을 잃어버리고 추상화, 관념화된 것이 문제입니다. 독일 학자 W. 브레데는 『바울』이라는 저서에서 “바울의 칭의론은 투쟁의 이론이다.”라는 아주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 E. P. 샌더스를 비롯한 학자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는 ‘바울에 관한 새 관점’도 크게 보면 바울이 투쟁한 대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이어가는 거지요. 바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외쳤을 때 바울은 율법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또 그것이 실제로 유대교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관이 맞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구약성서와 유대교 문서들을 뒤지면서 연구합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율법도 원래 그런 것이 아닌데 바울이 헛다리 짚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요.
이후 연구사를 길게 말할 수 없으니 이쯤에서 줄이면서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을 시작한 인물로 평가되는 크리스터 스텐달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그가 “사도 바울과 서구인의 내성적 양심”이라는 매우 중요한 논문을 썼는데, 여기서 중요하게 지적한 것도 제가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 이야기를 하면서 지적했던 바로 그 점입니다. 루터를 따르는 개신교 전통이 바울을 서구인들의 내성적 양심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잘못 이해해 왔다는 것이지요. 저도 스텐달의 이 입장을 지지합니다. 바울이 편지를 쓴 것은 구원론같이 조직신학적인 이론을 전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교의 현장에서 복음을 적대하는 사람들과 투쟁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지요.
정혜진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 이래 개인의 구원과 양심과 관련시켜 이해된 ‘칭의론’에서 벗어나 바울 시대의 상황 속에서 제대로 ‘칭의’를 이해한다면 무엇일까요?
김창락 ‘칭의론’을 짧게라도 이야기하려면 ‘의’(義)를 어떻게 번역하고 이해해야 하는가부터 짚어야겠지요. 이 부분에서 신학자들이 문법적, 언어학적 오류를 많이 범했는데, 마르틴 루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의’가 그리스어 ‘디카이오쉬네’의 번역어인데, 흔히 생각하듯 추상명사로 번역해야 하는가도 문제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처럼 다른 단어와 연결될 때 그 2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루터는 ‘의’를 추상명사로 보았고,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 앞에서 통용되는 의로움”(righteousness before God)으로 해석하면서 목적격의 2격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의’가 추상명사가 아니라면 의미가 달라집니다. 사실 디카이오쉬네는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자주 쓰인 단어인데요. 구약성서의 ‘미쉬파트’나 ‘체다카’와 관련이 되어 있지요. 예를 들어 그 유명한 드보라의 노래를 보면 ‘의’가 추상명사가 아니고 여호와의 ‘의로운 일(업적)들’입니다. 여기서 ‘의’는 ‘의롭게 하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인 행위명사입니다. 행위명사로서 ‘의’는 하나님께서 ‘의롭게 행하는’ 구원 행위 자체이면서 행위의 결과도 되지요.
행위명사의 성격에서 볼 때 ‘칭의’, 곧 ‘의롭다고 선언하다’의 의미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의롭게 하다’는 구약에서부터 윤리적 용어가 아니라 법정 용어였는데, 이것이 윤리적 용어로 이해되는 것은 불행입니다. 법정 용어일 때 이것은 인간 사회의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약자들의 편을 들어 그들의 권리를 회복해준다는 의미였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진다’고 하는 선언을 앞서 설명한 대로 유대주의자들과 바울이 투쟁했던 상황과 연결한다면 무슨 의미겠습니까? 바울 역시 구약성서와 이어지는 맥락에서 ‘율법’이라는 미명하에 차별당하는 약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의 차원에서 ‘칭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의 칭의론은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차별당하고 있는 이방 그리스도인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투사 바울의 이론적 무기였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정혜진 선생님께서 바울 칭의론의 의의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불평등의 사회학적 차원과 연결시켜서 설명해 주셨는데요, 말씀을 들으면서 바울의 선포가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에도 중요한 함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요즘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바울이라면 차별과 혐오를 양산하는 일부 보수 기독교의 편이 아니라,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편에 설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김창락 바울은 한마디로 말해서 ‘박해하는 자리’에서 ‘박해받는 자리’로 전향했습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약자들의 종교인데, 지금 시대에는 강자의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 역설이지요. 우리의 상황이 바울의 상황과 구체적으로는 다르겠지만 오늘날에도 차별과 불평등은 엄연히 존재하지요. 바울이 편드는 사람들은 민중신학의 언어를 빌자면 민중일 거고, 억압받는 사람들, 소외받는 사람들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무슨 특권이 되어 약자들을 차별하는 이유가 된다니, 바울이 살아 돌아오면 통탄하고 분노할 일이지요. 이것이 근본적으로는 바울을 교리적으로,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해석하지 않는 경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gisang2112_09.jpg

코로나 팬데믹은 성찰의 기회다

정혜진 신학 공부 시작하실 때는 바울을 좋아하지 않으셨다고 하셨는데, 바울의 진의를 탐구하는 연구를 해가시면서 선생님께서 얼마나 바울에게 매료되었는지를 들으면서 느끼게 됩니다. 바울에서 오늘날의 현실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넘어왔는데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겪으면서 우리가 사는 시대의 전반적인 모순을 뼈저리게 절감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 특히 이 위기 속에서 한국사회와 교회가 보이는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창락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것이 현명하다.’가 저의 모토인데, 코로나19에 대해서는 이 원칙을 어기고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 대재난에 대해서 최선의 방안은 전염병을 퇴치해서 극복하는 것이겠지만,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대로 방역에 최대한 협조하고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인들은 대면 예배를 자제하고 임시방편으로 온라인 예배를 드리기도 하면서 협조하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이 시점에서 무엇을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지를 판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더 고통받는 사람들, 가령 일용직 노동자나 노숙자분들이 있다면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구호활동도 하고, 나아가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메시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런데 일부 보수적인 교회들에서 대면 예배를 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에 ‘종교의 자유’ 운운하면서 반발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일반 시민들에게 기독교가 비난받고 나아가 조롱을 받을 만한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코로나를 통해서 우리 교회의 진면목이랄까, 실상이 드러났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안적인 이야기를 하는 쪽에서도 코로나 시대에 적절한 예배 형태가 무엇인가 정도의 논의에 그치지 말고, 회개와 같이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들을 하면 좋겠습니다. 무슨 해결책도 아니고 막연한 이야기일지 몰라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코로나가 극복되어서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착각부터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얼마나 환경을 파괴했는지, 약자들을 얼마나 돌보지 못했는지부터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그 이전의 삶이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반성하고 성찰해야 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정혜진 막연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옳으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이번 신학대화를 나누는 다른 선생님들께는 죽음과 부활에 대한 생각들을 여쭤봤었는데, 선생님께는 이렇게 여쭙고 싶습니다. 오늘 대화를 시작하시면서 선생님은 스스로를 ‘만년 지각생’이라 말씀하셨는데요. 만일 지금이라도 선생님께 여유가 있다면 하고 싶으신 작업이 있으신지요?
김창락 내가 몇 년을 더 살지 모르는데 미래를 설계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가 맡은 일이 많다 보니 허덕일 때도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긴 합니다. 다만 여유가 된다면 남은 시간 동안 후진들에게 조금이라도 기여할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을 어렵게 무슨 무슨 ‘론’ 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쉽게 접근하자고 말해온 만큼, 신학하는 후학들이 히브리어, 그리스어부터 좀 더 빠르고 쉽게 배울 수 있게 구체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노하우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책을 쓰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그럴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정혜진 선생님께 그런 여유가 꼭 있으시길 기대하면서 이야기를 맺겠습니다. 긴 시간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김창락 좋은 질문, 좋은 대화 고맙습니다.

 
 
 

2021년 12월호(통권 756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