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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한국 사회와 교회의 길을 찾는 신학대화 08]
교회와현장 (2021년 10월호)

 

  역사학자 이만열, 그에게 역사와 삶을 배우다
  

본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크리스챤아카데미, 「기독교사상」은 “한국 사회와 교회의 길을 찾는 신학대화”를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신학대화는 한국 기독교가 일구어온 사회참여적 신학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함으로써 교회가 다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려는 시도로 기획되었다.-편집자

대담자 소개 / 이만열 교수는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로서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 실천하는 지성인이다.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거쳐 동 대학 대학원에서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 신군부에 의해 1980년 7월부터 1984년 8월까지 4년 동안 해직되었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했으며, 프린스턴신학대학 등 미국에서 수집한 한국교회 관련 사료를 바탕으로 1982년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한국기독교사연구회(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전신)를 만들었다. 복직 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희년선교회 대표, 남북나눔운동 연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대표 저서로는 『한국 기독교와 역사의식』, 『한국 근대 역사학의 이해』,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한국 기독교와 민족의식』,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 『한국 기독교와 민족 통일운동』,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 『한국 기독교 의료사』, 『역사, 중심은 나다』 등이 있다.
최상도 교수는 장로회신학대학교 학부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죽음의 정치학으로서의 기독교 순교 담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호남신학대학교에서 역사신학과 교회사를 가르치며 한국에큐메니컬연구원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죽음, 폭력, 화해와 평화, 에큐메니컬 운동 등을 연구하며 최근 “5·18민주화운동과 한국교회”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공동 편저로 『손양원 목사의 옥중서신』, 『삼일운동과 장로교회』, Church and State 등이 있다.
두 역사학자의 대화는 2021년 7월 1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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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도 이만열 교수님은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사를 연구하신 학자시면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 실천하는 지성인으로 학계만이 아니라 교계와 사회에서도 존경받고 계십니다. 오늘 학문과 인생의 후배로서 교수님과 대화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고맙습니다.
이만열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아온 인생 이야기 편안하게 나누면 좋겠습니다.
최상도 코로나19로 인해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요?
이만열 평소 출입이 많지 않은 편인데, 코로나 상황이 되니 외출 빈도가 더 줄었습니다. 그래도 이전보다 더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평상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생각만 하고 있던 공부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런 개인적 변화보다 사회적 변화가 더 굉장합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사회경제적 부조리가 많이 드러났습니다. 가령 콜센터 집단 감염으로 코로나19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열악한 노동환경이 드러났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일자리 문제 등 노동 양극화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학생들의 등교가 불규칙해지면서 취약 아동 돌봄 시스템의 약점도 드러났고, 아이들이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가정 폭력, 아동 학대도 심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변화도 분명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에 따른 교회 집합 제한으로 예배가 온라인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코로나19 상황만이 아니라 앞으로 인공지능(A.I.)이 더 발전하면 기존의 교회 형태가 변화될 거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회복, 주일의 회복으로부터

최상도 말씀대로 코로나19로 사회와 교회가 변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 주일학교가 점점 없어지고 있습니다. 저출산에 따른 인구 절벽도 원인이지만,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하락도 주일학교를 사라지게 하는 한 원인입니다. 여기에 코로나19 상황이 겹쳐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아직 이 부분을 신경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주일학교에서 신앙교육만이 아니라 민족교육, 애국교육도 받으셨다고 책에 쓰셨는데, 주일학교 시절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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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제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어릴 때 받은 주일학교 교육 덕분입니다. 저희 집안은 할머니 때부터 예수를 믿었는데, 해방 전에는 교회에 다닌 기억이 없습니다. 저희 시골 경남 함안에는 1897년에 호주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있고, 또 1909년에 세워진 제 신앙의 요람 군북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세울 때 우리 할머니, 아버지, 삼촌들이 힘을 많이 썼습니다. 그 옆에 있는 시내에서 돌을 가져와 시멘트하고 버무려서 만든 참 좋은 교회당이었습니다. 해방되면서부터 그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해방 때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아침에 일본인 교장 훈시를 듣고 학교 내 신사 앞에서 묵념하는 의례가 없어진 것만 의식했지 해방의 의미가 뭔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교회 주일학교 교육을 통해 해방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모세와 출애굽 이야기, 삼손, 다윗, 다니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식민 치하에서 투쟁을 통해 해방을 얻게 되었는가를 배웠습니다. 제가 역사 공부를 하게 된 것도 주일학교 교육의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주일학교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요인들이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케케묵은 보수 측 얘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저희 때만 하더라도 주일성수를 매우 강조했습니다. 저희 집에 땅이 열댓 마지기가 있어 1년 계약으로 일해주는 머슴들이 있었어요. 어릴 때 주일성수 교육을 받고 집에 와서 머슴들이 일하는 걸 보고, “어머니, 저 사람들 오늘 일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정도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을 철저히 교육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는 주일성수 교육을 별로 안 하거든요. 대학 다닐 때 사학과는 학기에 한 번씩 고적 답사를 했습니다. 4년 동안 여덟 번 답사가 있었는데 답사 일정에 늘 주일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답사를 다녀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철저히 주일성수 교육을 받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목사, 장로 자녀들까지도 주일학교 가서 예배하는 것이 공부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하죠. 이런 상황에서 주일학교가 잘될 리 없죠. 한국교회에서 주일 회복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일은 예배하고 휴식하는 날입니다. 한국교회가 주일을 가정의 날, 종교 교육을 하는 날로 만들지 않으면 주일학교를 통해 이루어졌던 한국교회 성장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어린 시절, 여름성경학교 때가 되면 동네 애들이 막 교회에 왔거든요. 그때 한 번이라도 교회 와서 예수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이후에 도시에 가서도 교회에 다녔어요. 주일학교 교육이 그만큼 중요한데 지금 주일학교 교육이 거의 중지된 상태라서 앞으로 한국교회가 어떻게 될지 우려됩니다. 주일성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일의 회복이 없으면 한국교회는 앞으로 더 어렵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복음주의-에큐메니즘 지평의 융합

최상도 주일학교 교육을 통해 교수님의 인생 방향이 결정됐군요. 교수님은 이후 중고등학교 시절 복음주의권에서 학생신앙운동(SFC, Student for Christ)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는데 그때 경험을 말씀해주십시오. 그리고 1999년에서 2001년까지 에큐메니컬 조직인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이사장을 역임하시면서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즘을 넘나드는 활동도 하셨습니다. 교수님의 고신파 복음주의 신앙과 에큐메니즘이 융합된 계기가 있을까요?
이만열 초등학교 마치고, 마침 마산에 삼촌 두 분이 계셔서 중학교를 그쪽으로 갔습니다. 그때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전국 모든 학생이 국가고시를 봤습니다. 시험 성적에 따라 전국 어디든 진학할 수 있었는데, 제 성적이 좀 좋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학교가 좋은지 시골에서 알 리가 없으니, 삼촌들 계시는 마산으로 그냥 간 거예요. 당시 마산은 고신파 신앙 운동에서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거기에 조수옥 권사, 손명복 목사 등 출옥 성도들이 몇 분 계셨습니다. 마침 그때 고신파가 생기고, 고신파 내에 학생신앙운동인 SFC가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이 SFC가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조직되었습니다. 지역별로 수련회를 하고 여름과 겨울에 전국 수련회도 했습니다. 시골에서 주일학교를 통해서 교육받다가 중고등학교 때는 마산에서 SFC를 통해 신앙훈련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마치고 대학 진로를 고민하는데, 저를 새벽기도에 데리고 다니셨던 숙모님이 저더러 “너는 하나님 일을 해야 될 사람이다.”라고 하셨어요. 목사가 되라고 하셨죠. 저도 목사가 되는 게 옳은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 중에 아주 가까운 선배가 바로 신학교에 가기보다는 일반대학을 마치고 가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신학 공부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학과, 철학과, 종교학과 중에서 사학과를 선택했습니다. 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해 서울로 올라왔죠.
서울 와서 YMCA를 통해 함석헌 선생, 서울대 김기석 교수 등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 연세대 김형석 선생의 신앙 강의도 매 주일 오후에 남대문교회, 정동교회, 새문안교회 등에서 들었습니다. 이런 분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아주 보수적인 고신의 신앙에서 벗어나 많이 깨어나고 넓어졌습니다.
학업을 마치고 1970년에 숙명여대 전임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그런데 1972년에 ‘10월 유신’이 있었습니다. 대학교수로 사회의식이 많이 생긴 때인데, 이때는 못 견디겠습디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완전히 후퇴시키는 유신인데, 역사를 공부한다는 젊은 교수가 한마디도 못 했으니까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역사 속에서 시대적 발언을 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973년에 쓴 글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이라는 기독교사 관련 논문입니다. 박정희 유신을 직접 비판하지는 못했지만, 초기 우리 신앙인들이 사회변화에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연구한 것이지요. 그 논문이 주는 함의가 굉장히 컸던 것 같습니다. 논문을 읽은 사람들이 그걸 한말, 1910년대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그 논문을 읽은 진보적 교회 인사들이 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한국기독교장로회 김상근 목사, YMCA 강문규 회장 등 진보적 인사와 교제했습니다. 그 후 이 논문과 관련하여 강연하면서 진보 측 기독학자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었고요. 그게 원인이 됐는지는 모르지만, 1980년에 같이 해직된 이문영, 안병무, 서광선, 현영학, 서남동 교수 등과도 가까이 지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을 떠밀려서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자교수협의회가 예언자적 활동을 많이 했는데도 자료를 모아놓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회장 때 그동안의 자료를 모아 자료집을 냈습니다. 그때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석사를 마친 천현주 선생에게 조교를 맡겨 자료를 수집하게 했습니다. 얼마 전에 들으니 그 자료집을 가지고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나왔다고 합니다. 얼마나 보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을 했으니까 자연스럽게 KSCF와 연관이 되었고 이사장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해직, 인생이 바뀌다

최상도 1980년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교수님은 숙명여대 재직 중에 신군부에 의해 1980년 7월부터 1984년 8월까지 4년 동안 해직되셨습니다. 40대 초중반으로 왕성히 활동할 시기에 겪은 해직이 교수님 인생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당시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해직교수협의회 서기로도 활동하셨는데, 그 이야기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만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서울의 봄’이 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두환 신군부가 12·12를 일으켰죠. 10·26 이후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어 간다고 생각했는데 12·12가 일어나면서부터 분위기가 확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5·18까지 이르게 되었죠.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저녁에 요시찰 인사들과 대학 학생회장과 간부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 학내에서 학원 민주화 노력이 있었습니다. 성명을 발표하고 대학별로 교수협의회를 조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니까 신군부는 어떻게 해서든 지식인, 학생, 교수, 언론인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습니다. 그 때문에 학생회 간부들을 그날 저녁 마구 잡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요시찰 인사들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몰아갔죠. 아마 그때 한완상 선생 등도 잡혀 들어갔을 겁니다. 우리가 잡혀 들어가기 전에 1차로 그분들이 체포됐죠. 그다음에 대학교수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7월 초로 기억하는데, 제게도 연락이 왔어요. 어떤 사람이 자기 직책을 얘기하면서 치안본부 근처 서울역에서 만나자고 해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죠. 그때 함석헌 선생의 무저항에 관한 글을 읽고 있었는데, 포켓 성서 하나를 갖고 나갔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역 근처 어느 다방에서 만나 몇 가지 묻더니만 그 사람이 “우리 사무실로 가서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라고 해요. 그 사무실이 지금의 경찰청 본부였습니다. 당시 치안본부 뒤 건물에 무슨 수사본부가 하나 있었는데, 저를 거기로 데려갔어요.
들어가니까 아는 사람들이 있어요. 주로 대학교수들이 그쪽으로 많이 왔다고 해요. 당시 요주의 인물들을 치안본부, 중앙정보부, 계엄사 등에서 잡아들였는데, 치안본부 쪽에 들어간 사람들이 해직을 가장 많이 당했습니다. 치안본부가 제일 힘이 없는 조직이니까 신군부에 충성을 보이기 위해 교수들 사표를 더 많이 받은 거예요. 거기서 후에 숭실대 총장 하셨던 조요한 교수, 서광선 교수 등 몇 분을 만났어요. 같이 얘기도 나누고 그랬는데, 뭐 하는 일이 없어요. 매일 어떻게 지냈는지 자술서를 쓰라고 해서 쓰고 또 쓰고… 사나흘 동안 맨날 그것만 시킬 뿐 다른 말이 없어요.
5일쯤 지났을까? 김형규라고 저를 심문하던 사람이 와 머리를 긁적이면서 “선생님 아무래도 사표를 써야 되겠습니다.” 해요. 그 사람 이름이 제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 성함과 같아서 기억합니다. 그가 처음에 저를 보고는 “KBS에서 강의하신 선생님 아닙니까?” 물었어요. 제가 1975년에 석 달 동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KBS에서 한국사 강좌를 해서 그때 많은 사람이 저를 알아봤는데, 그 사람도 그 강의를 들었나 봅디다. 여하튼 사표 써달라고 해서 그냥 썼죠. 쓰면서도 형식적이겠거니, 괜찮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에요. 사표 쓰고 풀려나와 학교에 갔더니 사표 쓴 게 학교에 곧바로 통보됐어요. 이튿날 학교에서 연구실 빼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때 실감이 났습니다. 해직! 그다음에 연금, 의료보험 등 여러 가지가 바로 중지되었어요. 연구실에서 짐도 다 뺐어요. 당시 저 같은 사람이 특별히 정치적 발언을 많이 해서 해직됐다기보다는 학교마다 본보기로 몇 사람씩 추려서 내쫓아 학교 당국에 경고를 주기 위한 조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해직 전에 학교에서 세 가지 정도 일을 했어요. 우선 교수협의회를 조직할 때 회장은 아니었지만 뒤에서 좀 도왔습니다. 그리고 CBS 방송에서 칼럼을 통해 신군부 비판을 좀 했습니다. 그걸 듣고 저를 해직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전국적 성명서 발표에도 좀 관여한 일이 있고요. 아무래도 해직시킬 인사를 학교별로 배당해서 눈에 띄는 저 같은 사람을 해직시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최상도 해직교수협의회 활동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이만열 그때 대학에서 해직된 사람들이 86명인가 그랬습니다. 그중에 30여 명은 해당 학교의 분규로 해직되었고 50여 명이 시국 관련으로 해직된 사람들이었어요. 해직된 사람들이 처음에는 만나지를 못했어요. 해직 교수들을 뒷조사하고 도청하고 감시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친구들도 못 만나고 전화도 자유롭게 못 했어요. 담당 형사가 집에 전화도 하고 그랬어요. 처음에는 움츠려 지냈습니다.
해직되고 서너 달 후에 서로 어떻게 연락이 되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중앙일보 옆 ‘남강’인가 하는 냉면집하고 평창동 ‘평창면옥’인가에서도 만났습니다. 만나서 냉면 한 그릇 먹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 안부 묻고, 서로 살아있다는 것만 확인해도 굉장히 힘이 됐습니다. 이영희, 이문영 선생이 자주 나왔고 변형윤 선생도 가끔 나왔습니다. 처음 모일 때는 한 10여 명 정도밖에 안 나왔는데 나중엔 한 20여 명씩 모였습니다. 만나서 서로 정보도 나누게 되고, 그러는 동안 야당 국회의원들이 해직 교수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는지 국회에서도 문제를 삼아서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해직된 학교는 안 되고 다른 대학으로 갈 사람들은 복직시켜 주겠다는 안이 나왔습니다. 이때 몇 사람이 다른 학교로 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교수들은 끝까지 요지부동으로 해직된 학교로의 복직을 주장했죠. 그 무렵에 해직교수협의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해직교수협의회는 복직되기 1년 전 즈음에 조직되었던 거예요.
당시 제가 제일 젊은 편이어서 해직교수협의회 서기도 하고 연락도 하는 등 역할을 좀 했습니다. 그때 적어놓은 노트를 계속 갖고 있었는데, 이사를 몇 번 하고 나니까 어디에 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당시에는 해직교수협의회를 통해 만나면서 서로 살아 있는 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용기를 얻었어요. 해직교수협의회가 했던 또 다른 중요한 일은 지방의 해직 교수들과 강좌를 개설한 것입니다. 해직 교수들만 와서 강연을 했죠. 대표적으로 인천 가톨릭교회에서 큰 규모로 강좌를 열었어요. 길거리 공개 강연도 했어요. 이러니까 군부 쪽에서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얼마 후에 복직 얘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해직된 동안 감사한 일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고 전에도 가끔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강연도 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저를 자주 청해주었습니다. 청하는 이유야 뻔하죠. 강연 듣겠다는 것도 있지만, 해직된 후 경제력이 없어지니까 강사료를 줘서 생활에 보탬을 주기 위해서였어요. 이런 강연 중 인상 깊었던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5·18민주화운동 1주년 되는 때에 광주 YMCA가 저를 초청해 사흘 동안 강연한 일입니다. 5·18 1주년이 되었는데도 시국 상황으로 광주에서 행사가 하나도 없었는데 YMCA가 그걸 했어요. 또 하나는 향린교회에서 했던 강연입니다. 그때 문익환 목사, 이기탁 교수, 송건호 선생과 제가 이틀 동안 두 사람씩 짝이 되어 강연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건장한 남자들이 꽤 많아요. 나중에 들으니 무슨 일이 있을까 봐 형사들이 와 앉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형사들 앞에서 강연했던 거죠.

신학과 기독교 역사의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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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도 해직 기간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강의하시면서 신학도 공부하셨습니다. 목사안수를 받을 생각은 없으셨는지요? 목회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시다가 목회자가 아니라 역사학자로 계속 사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만열 젊어서는 원래 목사가 되려고 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저의 교단 신학교인 고려신학교에 진학하려고 했는데 학교가 부산에 있었어요. 당시 어머님은 연로하시고 동생 셋을 제가 돌봐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산으로 내려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융통성이 있었으면 서울에 있는 신학교에 진학할 생각을 했을 텐데, 그때는 제가 완전 고지식한 사람이어서 고려신학교만 생각했어요. 대학 여덟 학기 동안 주일성수를 이유로 학과 답사에 한 번도 참여 안 했을 때니까요. 그래서 신학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석사학위를 하고 전임교수를 한 10년 정도 하니까 시간표를 내가 좀 조율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신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그때 해직되었죠.
1980년 해직되었을 때, 총회신학교 교권의 횡포에 못 이겨 박윤선 목사, 신복윤 교수, 김명혁 교수 등 5-6명이 지금 반포 남서울교회에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시작했어요. 우리 집에서 5분 거리도 안 됐죠. 그때 박윤선 목사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박 목사님은 옛날 고려신학교 2대 학장이셨는데, 우리가 껌뻑하는 분이셨어요. 이분이 저더러 신학교를 시작했으니 와서 한국교회사 강의를 좀 해줘야겠다고 말씀했어요. 처음에 저는 신학교를 시작하는 것은 교단을 만드는 것이라며 반대했는데, 이분 말씀에 어쩔 수 없이 강의를 했습니다. 저를 학생으로 받아달라는 조건으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한국교회사로 시작했는데, 1981년에 미국에 1년 반 정도 다녀와서는 기독교, 그리고 동양고전인 논어 강의도 했습니다. 좀 편법이긴 했지만 신학생 신분으로 강의를 한 셈이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열심히는 못 했지만 그래도 이수 과목은 다 들어서 졸업은 했어요. 졸업한 후 해직 중에 강도사 고시까지 합격했는데, 1984년에 복직이 되었죠. 목회를 할 것인지 결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는 한 교회를 맡아 목회하기보다는 전국을 돌며 강연하면서, 전국을 목장으로 삼자는 판단이 생겼어요. 그래서 목사 안수를 받지 않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최상도 역사학에서도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국 기독교사로 학문 영역이 전환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이만열 해직 동안의 변화 가운데 하나는 미국에서 내한 선교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면서 제 학문 영역이 기독교사로 확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도 한국 기독교사 관련 논문을 한 편 썼습니다만, 그때는 일반 한국사 연구가 주였고 기독교사는 부수적인 주제였어요. 미국 프린스턴에 머물면서 운전해 한 시간쯤 걸리는 필라델피아 장로교역사관인 PHS(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다니면서 한국 선교 관련 자료들을 거의 다 섭렵했습니다. 돌아다니면서 남장로교, 캐나다장로교, 감리교 자료도 수집해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그렇게 수집해온 자료들이 지금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로 발전한 한국기독교사연구회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제 전공이 한국사 중심이었는데, 이 자료 수집과 연구회 설립을 계기로 한국교회사 연구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논문도 그쪽으로 더 많이 쓰게 되었습니다.
최상도 교수님은 한국교회사 연구에서 한몫을 감당하셨는데, 교수님 스스로는 한국교회사 연구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고 어떤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만열 스스로 평가해볼 때, 저는 일반 한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한국교회사를 연구하게 된 최초의 학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전까지는 한국교회사 연구는 대부분 신학하신 분들이 했습니다. 백낙준 박사, 민경배 교수, 송길섭 교수도 신학을 하고 한국교회사를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국사를 공부하고 교회사 연구로 넘어온 셈입니다. 저 다음부터 윤경로 교수를 비롯해서 일반 사학을 전공한 이들 중에 한국교회사를 주제로 학위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됐습니다. 사실 백낙준 박사나 민경배 박사의 경우는 자료를 가지고 실증적으로 한국교회사를 연구했지만, 다른 분들은 주로 구전으로 들은 것을 그냥 강의 시간에 얘기해주는 정도였어요. 엄격한 학문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같이 한국사 연구의 기초를 가지고 한국교회사를 하게 된 사람들은 역사학 방법을 교회사에 도입했습니다.
또 하나는 자료를 공유하면서 공동연구의 계기를 마련한 점입니다. 백낙준, 민경배 박사는 주로 혼자서 자료를 찾고 연구했어요. 그리고 찾은 자료를 공유하지 않고 혼자 소장하면서 개인 연구로 업적을 내고 그랬어요. 제가 후배 동지들과 함께 1982년에 한국기독교사연구회를 만들고 1990년에 연구소를 함께 설립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료 공유를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집체적 연구라 할 수 있지요. 그렇게 자료를 공유하니까 여러 사람이 업적을 많이 내게 됐죠. 한국교회사 연구를 엄격한 사료 검증을 통해서 하게 된 것, 그리고 자료 공유와 공동연구에 제가 조금은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최상도 역사는 사관(史觀)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교수님은 역사를 신앙, 민족, 역사 세 축으로 보고 계십니다. 이 삼각점을 통해 교수님께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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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저는 글을 쓸 때 생각의 초점을 신앙과 민족과 역사에 둡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그게 제 역사관인 것처럼 들릴 수 있는데, 그런 의미는 아니고, 제 생활과 사고의 주 영역이 신앙, 민족, 역사라는 말입니다. ‘민족주의’, ‘역사주의’가 아니라 제 삶의 바탕이 신앙과 민족 그리고 역사의 영역 안에서 움직인다는 뜻이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사관에 관해 질문을 받는데, 답하기 참 어렵습니다. 우선 저는 역사는 시간 속에서 어떤 생동감을 파악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심은 시간입니다. 저는 시간의 변화 속에서 인간, 지역 등의 변화를 파악해내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항상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변화를 어떻게 파악하느냐가 역사가의 중요한 역할이죠. 동양사상에 역학(易學)이 있습니다. 여기서 역은 변할 ‘역’(易) 자에요. 천태만상 변하는 것을 동양 학문으로 엮어놓은 것이 역학이에요. 이 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면 역사의식이 굉장히 높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학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변화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변화는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 발전원리를 따르죠. 젊은 사람들은 저항을 해야만 사회의 변화가 오고 그 변화를 통해 새로움이 올 수 있다고 보죠. 저항이 역사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도 이런 변화를 확신하기 때문에 저항하고, 그 변화를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인격과 사관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인간이 양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역사발전으로 봅니다. 옛날에는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왕이나 권력자 몇 사람밖에 없었는데, 민주화 이후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자유로워진 인간이 양적으로 증가할수록 평등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러므로 역사발전은 자기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인간이 많아짐과 동시에, 주체적인 인간들이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식민지 차별의 경험을 섬김으로 극복하다

최상도 주체적 인간의 증가와 평등한 관계의 확장을 역사발전의 중요한 개념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교수님의 활동 중에 희년선교회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교수님은 25년 동안 희년선교회를 이끌어 오시며 재한 외국인노동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이만열 저는 우리 민족의 식민지 경험을 수치와 오욕의 역사로만 여기지 말고 오히려 중요한 자원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경험을 우리 속에 녹이고 세계사에 투영하는 과정을 통해 더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차별 경험을 통해 외국인노동자를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노력을 더 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3년 한 해 동안 안식년으로 미국에 두 번째로 다녀오면서, 신학을 공부했고 이제 나이도 50이 넘었으니 제 삶에서 봉사 영역을 조금 고정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일마다 한 시간 내외로 갈 수 있는 교회에서 설교하며 교제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구로 지역에서 외국인노동자 사역을 하던 이문식 목사가 강경민 목사와 함께 찾아와서 한국의 외국인노동자 문제를 상의했습니다. 이분들은 구로희년교회를 통해 희년선교회를 운영하면서 외국인노동자를 위해 봉사하고 있었는데, 이 희년선교회를 제가 맡아주면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우선 외국인노동자 선교 목적으로 주일 오후에 무료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크리스천 의사, 의과 학생, 간호학과 학생이 주일 오후에 70-80여 명 노동자를 무료로 진료했습니다. 그때 제가 희년선교회 직원과 봉사자에게 항상 강조했던 것이, 이 일 하면서 소문내거나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 말씀 따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봉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김진홍 목사가 우리와 연결되어 조선족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치료받고 가기도 했습니다. 김진홍 목사 쪽에서는 이런 좋은 일은 방송에 내보내야 한다고 했지만, 우리는 조용히 봉사하겠다고 했죠. 지금까지도 이 신념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1993년에 시작해 2018년까지 25년간 봉사했습니다.
외국인노동자를 도우며 섬기려고 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희년선교회에 있으면 가끔 해외에서 우리 일을 견학하러 오는데, 한번은 일본 사회단체가 온 적이 있어요. 그때 저는 우리가 이렇게 봉사하는 것은 우리의 식민지 경험 때문이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일제 식민 치하에서 노동하면서 인간적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같은 학력을 가지고 동일 시간을 노동해도 일본인 봉급의 2분의 1 정도밖에 못 받았어요. 그렇게 식민 치하에서 차별 경험을 갖고 있는 우리가 한국에 온 외국인노동자를 어떻게 대해야겠습니까? 견학 온 일본인들에게 식민 치하에서 당신들이 우리를 차별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오히려 외국인노동자를 더 섬기려고 노력한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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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강연을 할 때 우리가 일제 때 정신대 문제를 두고 일본에게 사과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것 못지않게 우리가 외국에서 잘못한 것도 반성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베트남 전쟁 이야기예요. 일본을 향해 배상하라, 반성하라 요구하는 만큼, 우리가 베트남에서 한 일을 조사하고 회개하고 보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제가 희년선교회를 섬기는 데 투영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한국 기독교와 통일운동

최상도 세계 유일의 분단 지역인 한반도의 역사는 반미·반제국주의와 반공주의의 대결 구도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남북 모두 분단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특히 남한 교회는 ‘반공주의의 가장 든든한 보루’라고까지 평가됩니다. 또한 청년들은 통일에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립니다. 한국교회의 통일 준비와 청년을 위한 통일교육을 역사 읽기를 통해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교수님의 통일운동 이야기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만열 저는 역사를 공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족사와도 관련이 있어서 분단과 통일 문제를 더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6·25 무렵 간디스토마에 감염되셨는데, 약만 드시면 생명에 지장이 없는 병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통에 약을 못 구해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사촌 형 둘이 참전해서 전사했고, 다른 사촌 형 하나도 군속으로 있다가 전쟁 때 희생되었습니다. 또 막내 자형(兄)도 납북되어 돌아가신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통한 가족사 때문에, 그리고 역사학자로서 민족적 비극을 하루속히 치유해야 한다는 당위 때문에 분단과 통일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통일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해방 직후에는 기독교인 가운데 통일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규식, 여운형은 중도 입장에서 남과 북을 끌어안을 수 있는 노선을 취했습니다. 김구만 하더라도 초기에는 신탁통치 반대 등에서 이승만과 동조하다가 1948년에 와서는 이러다간 분단이 지속되겠다는 우려 때문에 남북협상으로 전환했죠. 북에는 조만식이 있었고요. 노선은 달랐지만 이들 모두가 기독교인입니다. 당시 지도자들이 분단 극복을 위해 좀 더 힘을 합쳤다면 민족상잔의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섭섭한 마음도 듭니다.
이런 지도자들은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며 통일을 바랐지만, 한국교회는 처음엔 통일운동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38선으로 분단된 후, 그리고 6·25전쟁 때 북에서 내려온 기독교인이 많았습니다. 당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는 남한보다 기독교인이 더 많았는데, 그들 중 지주 자본가 그룹에 속했던 이들이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거죠. 북에서 내려온 많은 기독교인이 공산주의에 대한 포한(抱恨)을 가지고 남한 사회의 반공 대열에 앞장섰습니다. 한국교회는 〈7·4남북공동성명〉 때까지도 통일문제에 대해 열려 있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군사정권이 지속되고 신군부까지 들어서게 되니까, 한국교회의 진보적 그룹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게 되었죠. 그런데 민주화운동을 하면 할수록 분단 문제가 벽이 되었던 거예요. 군사정권이 민주화와 자유의 요구를 북한의 위협을 내세워 막은 겁니다. 여기서 기독교 지도자들, 특히 민주화운동을 하는 지도자들이 분단 상황에서의 민주화운동은 민족통일 문제와 연동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가장 먼저 포착한 사람이 문익환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70년대 말부터 선민주(先民主) 후통일(後統一), 때로는 선통일 후민주, 아니면 둘의 병행 등의 운동이 시작됩니다.
민주화를 위해서라도 분단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군사정권이 너무 강고해서 국내에서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USA)와 독일복음주의교회협의회(EKD)를 통해 이승만 목사, 홍동근 목사 등 해외동포 기독교인들이 힘을 모아 북한과 연락하는 등 통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통일운동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더 촉진하기 위해 시작되었고, 한국 통일운동에서 가장 선도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통일운동가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해요. 여하튼 1981년부터 1991년까지 비엔나,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열렸던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와의 대화’가 해외동포 통일운동가들이 해온 일입니다. 1985년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중심으로 통일선언이 나옵니다. 이게 좀 더 성숙해진 것이 1988년 2월 29일에 나온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인데, 명문이에요. 저는 이 선언의 역사적 의의에 관한 글을 써서 1995년 「기독교사상」에 발표했습니다. 이 선언은 한국 통일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 결국 그해 7월 노태우 정권이 7·7선언을 하게 되는데, NCCK의 2·29 선언이 없었다면 안 했을 거예요. 교회가 선도적으로 하니까 정부도 따라서 하게 된 거죠. 그리고 1986년, 88년, 90년에 세계교회협의회 주선으로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북 교회 지도자들이 만나게 되었죠.
저는 1993년부터 희년선교회에서 외국인노동자 사역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남북나눔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남북나눔운동은 한국기독교 진보와 보수가 힘을 합쳐 만든 조직입니다. 당시 진보 측에서 NCCK 총무 권호경 목사가 방북해 김일성을 만나고 왔어요. 그러고 일을 시작하는데, 진보 진영이 생각은 앞서 있지만 북한을 돕기 위한 물량을 모으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복음주의권과 손을 잡습니다. 남서울교회 홍정길 목사가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홍 목사가 제게 남북나눔운동 연구위원회를 이끌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남북이 인도적 차원에서만 돕는 게 아니라 통일 문제도 다루자며 연구위원회를 구성한 거죠. 15명 정도의 기독인 학자들로 위원회를 구성했고, 제가 위원장을, 윤영관 교수가 부위원장을 맡았어요. 위원회는 매달 모여 통일 문제를 토의하고, 연초에는 북한 신년사도 분석하는 등 연구를 하다가 2000년대에 와서 한반도평화연구원으로 발전했고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한국교회가 통일운동에 선도적 역할을 해온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2005년 전후로 한국교회는 완전히 ‘태극기부대’로 전환되어 잘못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최상도 오늘 긴 시간 동안 코로나19로부터 주일학교, 역사 연구, 통일운동, 그리고 역사 현장에서 실천해오신 삶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역사학자로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책임을 더 깊이 느끼고 다짐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만열 부족한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1년 11월호(통권 7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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