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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나의 목회 수기]
교회와현장 (2021년 9월호)

 

  45년의 목회를 회상하며 새 출발을 다짐하다
  

본문

 

필자는 2020년 5월 21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제23회 경기연회에서 아내인 고(故) 강명순 목사와 함께 은퇴함으로써 45년간의 목회를 마쳤다. 돌아보니, 처음 목회를 시작하면서 가졌던 비전을 이룩하지 못한 듯하다. 그리하여 지금은 못다 이룬 꿈이 성취되기를 소망하면서 새 출발을 다짐하는 원년으로 삼고 있다. 지난날 실패할 때마다 그 빈자리를 채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을 감사하며 그간의 목회를 잠시 되돌아본다.

목회자로 성장하다

나의 고향은 경기도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이다. 나는 1950년에 감리교 목사인 고 정병기와 유복님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감리교 목사가 되었으나, 처음부터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목회자 가정은 매우 가난하다는 점을 어렸을 때부터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청소년 시절 우연히 아버지 서재에 있던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전기를 읽었다. 나는 이 전기를 통해 훗날 의사가 되어 가난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고등학생 시절 이공계를 선택하여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그러나 육신의 질병으로 휴학할 수밖에 없게 된다. 고등학교 3학년 초에 신장염 진단을 받은 것이다. 아버지의 권유로 나운몽 장로가 원장으로 있는 용문산기도원에 치료차 입산하여 그곳에서 약 7개월을 머물렀다. 건강을 온전히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나에게는 한 가지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하산하여 학교로 돌아간다면 신학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용문산기도원은 나의 첫 번째 회심이 이루어진 장소였다.
197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사실 신학대학에 입학할 당시에는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1년 동안은 주로 학교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데 열중했다. 그러다가 11월의 어느 가을날, 청년 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분신 소식을 접했다. 이 사건은 신학대학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혀 지내던 내가 처음으로 사회 현실을 직면하게 만들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을 계기로 싹튼 사회적 관심, 그리고 이어진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활동은 나의 신학교 생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대학 2학년 때부터는 현장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다. 학생사회개발단 활동을 통하여 당시 도시화로 인하여 확산되기 시작한 도시빈민 사역 현장(청계천 활빈교회 등)에 직접 참여하며 빈민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했다. 당시 이화여대 사범대학 학생회장이자 훗날 아내로 인연을 맺은 고 강명순을 만난 것도 이때였다.
대학을 졸업한 해인 1974년 1월부터 서울 구로구 독산동에 위치한 경수산업선교회(총무 안광수 목사) 소속 갈보리교회에 파송되어 산업노동자들을 위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인 1974년 4월 3일에 긴급조치 4호가 발령되고, 소위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된 많은 학생들이 잡혀갔다. 이 일로 나는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었고, 검찰에 기소되어 군사재판에 부쳐졌다. 그 결과 1심에서 10년, 2심에서 7년의 실형을 언도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상고를 포기한 후 안양구치소와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어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1975년 2월 15일, 수감 10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다니던 감리교신학대학원에서는 제적을 당했고, 군종장교후보생 자격 역시 박탈당했다. 당시로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선교국 국장으로 새로 부임한 김준영 목사님을 통하여 관악구 사당동 산24번지에 도시빈민사역을 위한 희망교회를 세우셨고, 그해 9월에 나는 실무자 겸 사역자로 파송되었다. 그곳은 서울 도심지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철거로 인해 이주하여 정착한 변두리 산동네였다.
그곳에서 사역을 이어가던 나는 1976년 11월 1일 강명순과 결혼하였다. 강명순은 결혼 전 희망교회 창립부터 도시빈민선교를 위한 동역자로서 여러 가지 사역에 함께했다. 예배와 교육 활동은 물론이거니와 어린이 선교를 위한 유치원을 개원하여 원장으로 봉사하였다. 학교에 다니지 못한 청소년들을 위해 중고등 야간학교를 운영했고, 주민들의 건강과 치유를 위해 의료팀을 운영했다. 또한 희망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주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고 철거에 대비하게 하였으며, 유치원 아동 및 지역 아동 부모들을 위한 상담 및 교육활동, 철거 대책을 촉구하는 주민조직 활동 등에 발 벗고 나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결혼 6개월 만에 나는 감신대의 ‘민주구국헌장 배포’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당시 감신대 재학 중이던 희망교회 청년회장 김정택 전도사와 함께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었고, 서대문교도소에 재수감되었다. 나의 구속으로 인해 희망교회 사역과 아내 강명순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희망교회의 빈민사역은 감리교 도시선교회(총무 전용환 목사)에 의해 유지되었으나,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을 아내가 대신해야 했기 때문에 약 1년 2개월 동안 아내는 많은 고생을 했다. 석방된 후에 희망교회로 복귀하여 도시빈민 사역을 계속했으나, 당시 서울시에서는 변두리 무허가 판자촌 지역을 철거하고 새로 개발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에 나는 현장에서의 목회 활동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때 나의 목회적 관심은 산업화시대를 살아가는 도시 노동자들을 위한 사역에 있었던지라, 1979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노동자 사역 등 도시산업선교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당시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총무 조화순 목사와 실무자이자 나의 신학대학 선배였던 김동완 목사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1979년 10월 초 광야교회(인천 부평)에 부임했다. 광야교회는 부평 지역의 노동자들을 위해 설립된 교회였는데, 이곳에서 나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목회하며, 그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는 일에 나섰다. 동시에 어린이들을 위한 선교회(원)를 개설하여 아내가 운영하였고, 지역민을 치료하는 의료선교 봉사활동을 조직하는 등 활동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면서 일반 지역주민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인천 부평에서 전개한 3년여의 노동자 목회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선교국의 사회정책 담당 간사로 부름을 받으며 일단락되었다. 현장 목회자로서 8년간 목회를 마치고 기관목사로 부르심을 받아 교단의 사회선교 정책을 세우고 실천하는 행정 사역자로 부임했는데, 당시 선교국에는 실무자가 부족하여 다양한 사역에 과부하가 걸렸다. 그렇게 3년여가 지나자 신장염이 재발하고 간염까지 앓게 되어 나는 더 이상 실무자로 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다행히 당시 선교국 총무(김준영 목사)의 배려로 약 2년간 영국 셀리옥(Selly Oak Birminham)과 미국 유니온(Union College) 등에서 해외 훈련을 받을 기회가 주어졌다. 게다가 후반부 1년은 아내와 함께 훈련을 받는 행운까지 주어졌다. 아내는 해외에 체류하는 동안도 항상 국내에 있는 빈곤 아동들과 이들을 위해 사역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지 고민하여 적극적으로 해외모금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초창기 부스러기선교회의 사업이 건전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해외 선교활동을 모두 마치고 1988년 3월에 귀국했다. 그러나 선교국 총무가 바뀌는 바람에 복귀가 지연되고 임시직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교단의 제18차 총회(1988년, 광림교회)에서 72명의 교역자들과 함께 총회 강단을 점거하고 교단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연좌농성을 하였다. 그 결과 나는 여러 사람들(특히 평신도 지도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한 선교국 총무의 제안을 받아들여 서울 은평구에 있는 불광중앙교회에 부임하였다. 기관목회를 하다가 다시 갑자기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가 되었지만, 나는 예배와 전도, 심방에 최선을 다했다.
이 기간에는 교회 목회에 힘을 쓰면서도 감리교 내 민주화를 추구하는 목회자 운동을 튼튼히 할 수 있는 모임과 활동을 강화하였다. 신학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감신대 대학원에 편입하여 공부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제18차 총회의 후유증은 나 같이 지역 교회를 섬기는 힘없는 목회자에게 한없는 짐이 되었다. 나는 당시 젊은 목회자로서 정의감에 행동에 나선 것이었지만, 합법적인 총회 진행을 물리적인 방법으로 저해한 행위는 분명 잘못이었다. 뜻이 정의로울수록 정당한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총회 강단 점거 농성 사건’은 감리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리고 은퇴 후 지금까지 감리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을 깨우쳐준 잊을 수 없는 사건이기도 하다.
약 3년 6개월간의 교회 목회 이후 나는 대학생 시절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운동과 관계된 연고로 총무로 부르심을 받았고, 아내는 이전부터 관계했던 부스러기선교회로 복귀하였다. 앞으로 기관 목사로 한평생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안산제일교회에서 목회하던 친구 남봉식 목사가 갑자기 소천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남 목사의 장례식에 참여하였다가 동료 목회자들의 권면과 그곳 교인들의 청빙을 받아 안산제일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이때도 나와 아내는 이 부르심에 순종하기로 결심하였다.

부부 공동목회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다

1995년 연초에 우리 부부는 두 가지 특별한 경험을 했다. 하나는 정무장관실과 「여성신문」이 공동으로 주최한 ‘평등부부상’을 장관으로부터 받은 일이다. 결혼을 하고 꼭 10년차를 맞이하는 해였다. 그때까지 상과는 먼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 우리에게는 너무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또 다른 경험은 그해 2월에 교역자 부부가 함께하는 성지순례 프로그램에 아내와 참여한 일이다. 성지순례 중에 아내는 평생을 목회자로 살겠다고 서원했다. 동 트기 전 어두컴컴한 시내산 정상에 올라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그렇게 서원한 것이었다.
이 두 가지 경험을 통해 나는 1995년 6월 안산제일교회 부임 이후부터 부부목회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아내는 이미 ‘부스러기선교회’라는 아동복지단체의 총무로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였다. 목회의 터를 안산으로 옮기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자녀들은 당장 안산으로 전학을 와야 했고, 아내는 서울과 안산을 오가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환경적 장애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안산제일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지난날 나의 목회 생활을 반성했다. 목회자의 우선순위는 교회이기에 장기 목회를 계획하며 교회가 품어야 할 커다란 비전을 세우는 일에 힘쓰되, 나의 목회와 교회의 영향력이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안산 전 시민의 삶의 영역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목회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아내도 나의 목회적 입장에 협력했다.
그 무렵 아내는 감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처음에는 직접 현장 목회에 나서려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나, 감리회 안산지방에 목회자가 공석인 교회가 있어서 아내와 의논한 끝에 아내가 담임목회를 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이 과정도 쉽지 않았다. 우선 내가 섬기는 교회의 교우들을 이해시켜야 했다. 그동안은 아내가 사모로서 역할을 해왔지만, 이제 교역자의 위치가 되기 때문이었다. 교우들의 이해 속에 아내는 1997년 가을부터 예은교회에서 단독 목회를 시작하였다. 실질적으로 우리 부부는 두 교회를 섬긴 것이다.
아내가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예은교회는 후임 전도사를 새로 모시고 아내는 내가 섬기는 교회에 부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2000년 2월, 이때부터 본격적인 부부 공동목회가 시작된다. 두 사람이 교대로 설교하고, 교회를 치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목회자에게 사례비를 각자 주는 것도 아닌데, 교회 안에서는 여성 목회자에 대한 거부 현상도 있었다.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2017년 9월까지 약 18년간 부부 공동목회를 하면서 교회와 성도들을 섬겼다. 안산에서의 공동사역은 개교회의 목회에 국한되지 않고 안산 지역 모든 시민의 문제에 관심하였기에, 지역의 빈곤 노인들, 결손가정의 어린이와 청소년, 빈곤 여성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갖고 복지 목회를 실천하였다. 빈곤 노인들을 위한 원곡동 경로식당, 결손가정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지역아동센터 ‘신나는 집’, 빈민여성교육선교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복지 목회를 시작하면서 우리 부부는 사회복지사 자격을 갖추는 것이 선교 사역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강남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공부하였다. 나는 노인복지학을, 아내는 아동복지학을 전공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부부의 사역은 안산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차원으로 확장되기에 이른다. 안산제일교회 부임 이후 사회복지기관과 연대하여 활동을 이어가면서 주로 안산 지역사회 및 시민사회와 밀접하게 동역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교단 내에서는 경기연회 안산지방 감리사, 감리교사회복지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에큐메니컬 운동 차원에서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회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대 및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으로도 일했다.
아내 역시 사역을 계속해 나갔다. 2000년에는 ‘(사)부스러기사랑나눔회’와 ‘신나는조합’을 창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2005년에는 ‘2020년까지 빈곤아동 결식아동이 한 명도 없는 나라 만들기 운동’(빈나 2020운동)을 창립하여 디딤돌 대표(2005-20)에 취임했다. 물론 이 기간에도 우리 부부는 안산제일교회 공동목회를 병행하며 사역을 감당하였다. 이 시기 아내는 현장 활동은 물론 공부에도 힘썼다. 2005년부터 일본 고베 기비대학교 부성래 교수의 제안을 수락하여 사회복지학 박사과정에 등록하고, “한국의 빈곤아동과 지역아동센터 법제화에 관한 이론과 실천”이라는 논문으로 2007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복지 현장의 경험을 학문적으로 완성한 시기였다. 우리 부부의 모든 공동사역은 교회 안과 밖에서 빈곤 퇴치에 이바지하려는 피나는 노력이었다.
2006년과 2007년은 우리 부부에게 그 동안 전념해온 사역이 공적인 평가를 받은 뜻깊은 해였다. 2006년 안산제일감리교회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사회복지위원회로부터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 상’을 받았고, 2007년에 나는 경기연회에서 성역 30주년을 기념하여 축하패를 받았다. 아내는 같은 해 5월 31일에 모교인 이화여대 창립 기념식장에서 대학을 대표하여 이화여대 총장이 수여하는 ‘제11회 자랑스런 이화인’으로 표창을 받았다.

아내 강명순 목사의 빈곤 퇴치 운동

2007년 12월, 이명박 후보가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얼마 뒤 2008년 3월 아내를 급하게 찾는 전화가 왔다. 아내는 당시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으로부터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에 출마해보라는 권면을 받았다. 당시 우리가 빈곤 퇴치 운동을 하면서 직면하게 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다시 말해 빈곤 아동 문제를 해결할 법안과, 마이크로파이낸스(빈곤층을 위한 소액 금융)를 실천할 예산과 법률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이 문제를 당시 아는 국회의원들에게 청원하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어 낙심하던 중이었다. 생각하던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될 수 있겠다고 판단하여 나는 아내에게 적극적으로 출마를 권면했다. 아내는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출마했고, 2008년 4월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2008년부터 2012년까지 4년 동안은 아내가 국회의원으로서 빈곤 문제와 본격적으로 씨름할 수 있던 기간이었다. 대신 나는 아내가 그동안 해왔던 일, 특히 신나는조합의 이사장을 담당하기로 했다. 그렇게 지난 12년 동안 빈곤 퇴치에 초점을 맞추어 오로지 외길을 걸었다.
안산 지역사회의 일과, 전국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신나는조합의 일, 그리고 빈나 2020운동을 병행하기란 쉬운 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국회의원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음지와 양지에서 협력하며 각자의 역할을 조정해야 하는 일은 결코 편안한 길이 아니었다.
처음 감당하는 국회의원이라는 자리는 아내에게 특히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내는 국회에서 새롭게 ‘국회 골방 기도회’를 시작했다. 아내는 매일 아침마다 일찍 국회에 출근하여 6시 40분부터 성서를 묵상하며 국가와 지도자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당선된 2008년부터 제18대 임기가 다 끝나는 2012년까지 4년 동안 1,000일을 쉬지 않고 기도했다. 이뿐만 아니라 성서묵상집 스무 권을 만들어 보급하기도 하였다. 국회 골방 기도회는 18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도 4년 동안 계속되어 새로운 1,000일 동안 여러 사람들이 함께 기도의 동력을 이어나갔다.
아내는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고 원외에 있으면서도 빈나 2020운동을 계속했다. 국회의원 임기가 종료될 즈음 국내외의 지구적 차원에서 빈곤 퇴치 운동을 좀 더 넓혀야겠다는 생각에 새로 법인을 등록했는데, 이것이 바로 (사)세계빈곤퇴치회였다. 아내는 이 조직을 창립하고 이사장 겸 상임이사의 책임을 맡았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전국에 있는 지역아동센터의 실무자와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생명을 살리는 운동을 전개했다. 어린이·청소년의 교육과 후원을 하며 복지를 구축하는 데 집중했다. 안산에 자살예방 상담센터를 개설하여 자살예방교육을 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전국에 시범지역 6곳을 선정하여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시범적으로 조직하고, 창업을 지원하는(교육·대출) 사업을 실천하기도 했다.
세계빈곤퇴치회의 활동은 계속되었고, 사무실은 사당동에서 안산으로 이전하였다. 이후의 활동은 빈나 2020운동의 가치를 정책적 차원에서 제시하려는 노력이었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국회의 협조 속에서 현장 실무자들의 경험을 통해 문제를 발굴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이야기를 국회 회보, 헌정 회보 등 언론에 홍보하였다. 부스러기사랑나눔회, 세계빈곤퇴치회, 빈나 2020운동이 공동으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매년 국회에서 ‘빈나 2020운동 정책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베트남과 미얀마 등 여러 나라에 한국의 아동 빈곤법 및 지역아동센터의 사례를 소개하고 부룬디에 사회적 기업을 확산하려는 시도를 한 일도 있다.

부부 사역의 아름다운 마무리

2017년 9월, 내가 담임하던 안산제일교회는 다섭리교회와 통합하여 ‘새로운교회’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아내가 치매를 앓기 시작하여 사역을 내려놓아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안양에 거주하기로 하고 두 교회의 온전한 통합을 위해 통합기념주일에만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목사로서 교회 일선에서는 한 걸음 물러났지만, 2017년과 2018년은 나의 대외적 목회 활동이 정점에 오른 해였다. 우리는 감리회사회복지협의회 회장과 훈련원장으로서 “감리회 100만 전도를 위한 복지와 영성” 세미나를 열었다.(2017. 4. 27-28, 서산 엘림하우스, 기독교대한감리회 100만전도운동본부·감리교전국부흥단·감리회사회복지협의회 공동주관) 또한 2017년 9월에는 감리회사회복지협의회 회장으로서 아내가 이사장으로 있던 부스러기사랑나눔회와 공동으로 전국 감리교 지역아동센터 실무자 워크숍을 일영 샬롬 유스호스텔에서 개최하였다. 2018년 3월에는 아내와 함께 탄자니아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전도및선교위원회(WCC-CWME)가 주관하는 제 14차 선교대회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그동안 한국에서 전개하였던 빈곤 퇴치 및 생명나무 운동을 홍보하였다. 2018년 7월에는 아내와 함께 한국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세계감리교협의회 대의원대회 준비를 위한 모금 관련 실무를 자청하여 봉사하였다. 2018년 11월에는 미국 애틀랜타에 소재한 미연합감리회 선교본부(GBGM)와 지미 카터 센터에서 개최된 ‘제3회 한반도 평화를 위한 라운드 테이블’에 한국감리교회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그 후로 기독교사회봉사회 사역과 신나는조합에 집중적으로 헌신하다가 2020년 2월 말에 신나는조합과 기독교사회봉사회의 이사장직을 내려놓았다. 그해 5월 21일, 나는 아내와 함께 목회를 내려놓고 경기연회에서 자원 은퇴하였다.
코로나19로 모임이 힘든 상황이지만 2020년 5월 목사직을 은퇴하고도 아내는 12월 사임하기까지 부스러기사랑나눔회의 이사장으로 충실히 사명을 감당하였다. 나는 다만 아내와 함께 빈나 2020운동의 공동대표직(디딤돌)을 2020년 12월까지 수행하였다.
아내의 건강을 위해 섬기던 교회에서 자원 은퇴한 후 나는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와 함께 지난날의 사역을 정리할 수 있었다. 2020년 5월에는 나의 은퇴를 기념하는 신앙 칼럼 『꽃잎이 지는 것은』과 『빈나 2020운동 보고서』를 정리하여 출판하였고, 2020년 9월 둘째 주에는 나의 고희를 기념하는 글 모음집 『역경을 통하여 얻은 지혜』와 아내의 목회 은퇴를 기념하는 글 모음집 『부스러기 사랑과 생명나무』를 썼다. 함께 사역에 음양으로 참여하고 후원해왔던 사람들에게 아내와 함께 이 책들을 보냈다.
2021년 새해가 밝았지만, 아내의 병세는 이전과 다르게 변화되어갔다. 아내는 우리 아이들과 함께 2021년 2월 20일, 69세가 되는 생일잔치도 함께했다. 3일 뒤인 2월 23일에는 비대면으로 진행된 부스러기 총회를 마치고, 후임자에게 사무인계를 완료하고, 지난 35년간의 부스러기사랑나눔회의 사역도 마무리하였다. 그해 3월 26일, 아내 강명순 목사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훨훨 천국으로 날아가 내 곁을 떠나갔다. 나는 그렇게 아내와 동역한 삶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함께 생활하고 있을 때나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지낼 때나 항상 공동의 사역을 하였다. 첫 번째 이별은 결혼 후 1년 2개월 동안 내가 감옥에 구속되었던 일이고, 두 번째 이별은 영국에 해외훈련차 출국한 것이었다. 그렇게 몸이 멀어진 동안에도 우리는 항상 함께 사역을 했다. 한 예가 부스러기사랑나눔회를 통한 빈곤 아동을 지원하는 사역이었다. 이 공동사역은 1986년 12월 9일에 시작하여 2020년 12월 30일까지 35년 동안 계속할 수 있었다.

새 출발을 다짐하며

지난 7월 5일은 아내가 내 곁을 떠난 지 100일이 된 날이었다. 이 원고의 청탁을 받은 5월 10일부터 글을 쓰는 두 달은 지난 45년의 목회사역을 곰곰이 돌아보고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나의 목회는 공식적으로 2020년 5월 21일에 마무리했지만, 2020-21년은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워하는 후배 동역자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마주하면서 가슴앓이를 한 기간이었다. 그런데 지난 3월 26일 갑작스러운 아내의 소천을 계기로 은퇴자로서 나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지난날의 목회여정은 끝났지만, 앞으로 다가올 나의 목회사역은 새로 시작된다고 마음을 다졌다.
나에게 새롭게 주어진 자유(?)는 지금까지 고난의 역경 속에서도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앞으로 건강이 유지되는 동안은 지금의 삶의 현장(한반도와 세계 그리고 나아가 우주)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과제와 씨름하려고 한다. 먼저 현재 내 신앙의 모태였던 감리교회의 갱신과 변혁이라는 과제가 있다. 아직도 빈곤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 동시에 좀 더 평등한 세상을 세워나가는 데 필요한 ‘사회적 경제’를 현실 세상에서 구체화하는 일, 그리고 분단을 극복하여 평화로운 통일 민족을 이룩하려는 민족운동과의 연대 역시 중요한 과제이다. 또한 생태계의 오염과 기후변화로 야기되는 지구와 우주 환경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 운동을 만들어 나가고, 지금까지 억압받아 온 여성들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사역에 집중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내 삶과 사역 위에 성령으로 함께하시기를 기도하고 소망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정명기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은퇴목사이다. 감리교사회복지협의회 회장,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회장, 신나는조합 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2021년 9월호(통권 7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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