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한국 사회와 교회의 길을 찾는 신학대화 07]
교회와현장 (2021년 9월호)

 

  물리학자 장회익의 인생 공부, 예수 공부
  

본문

 

* 새길기독사회문화원, 크리스챤아카데미, 「기독교사상」은 “한국 사회와 교회의 길을 찾는 신학대화”를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신학대화는 한국 기독교가 일구어온 사회참여적 신학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함으로써 교회가 다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려는 시도로 기획되었다.-편집자

대담자 소개 / 장회익 교수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30여 년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했고, 현재는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다. 물리학 교육과 연구 외에 과학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의 이해, 동서학문 비교연구 등에 관심을 가져왔다. 저서로는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물질, 생명, 인간』,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공부 이야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등이 있다. 지금은 충남 아산에 거주하며 자유로운 사색을 통해 통합적 학문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다.
신익상 교수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감신대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한 후 동 대학원에서 “실존론적 사유와 대승불교의 불이적(advaya) 사유를 통한 변선환 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학교 열림교양대학 교수, 한국교회환경연구소 소장, 기후위기 기독교신학 포럼 공동집행위원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객원책임연구원이며, 인문학 밴드 대구와 카레, 한국기독교교양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변선환 신학 연구』, 『이제 누가 용기를 낼 것인가?』, 『바울 해석과 한국 사회 주변부』, 『낮은 곳에서 열리는 삶, 종교』 등이 있다.
두 그리스도인 학자의 대화는 2021년 6월 15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에서 진행되었다.



gisang2109_01.jpg

신익상 선생님 밑에서 물리학 공부를 한 게 30년 전인데, 다시 뵙고 말씀을 듣게 되니 가슴이 벅찹니다. 오늘은 ‘인생 공부’의 기대를 품고서 이 자리에 임했습니다. 우주, 생명, 신앙, 그리고 신학에 관한 선생님의 말씀 속에서 인생을 깊이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장회익 이렇게 다시 만나니 반갑네요. 이번에는 인생 공부를 함께 해보자고 하니, 내가 배워야 할 차례가 아닌가 합니다. 신 박사님은 그 후 내가 잘 모르는 신학과 철학 방면 연구를 깊이 하셨으니 들려줄 이야기가 많지 않겠어요? 나는 다만 개인적 신앙을 가지고 좀 더 오래 살아온 사람이니 그런 뜻에서 내 생각을 검증해볼 기회가 되면 좋겠네요.

공부란 무엇인가

신익상 선생님은 ‘공부 전문가’, 『공부의 즐거움』에 나오는 선생님의 표현을 쓰자면 ‘야생 공부 전문가’ 아니실까 합니다. 그래서 공부란 무엇인가를 첫 번째 질문으로 드리고자 합니다.

gisang2109_02.jpg

장회익 저 말고 진짜 공부의 달인 얘기를 조금 소개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중 한 분이 바로 아인슈타인이죠. 아인슈타인은 사실 공부가 뭐다 딱 부러지게 제시하진 않았는데, 만년의 자전적 노트에서 자기 경험을 통한 공부에 대해 언급한 적은 있어요. 거기에 재미난 표현이 있어요. “Enjoy well-ordered thoughts.” 공부란 잘 정리된 생각을 즐기는 거다. 새겨들을 만한 점이에요. 특히 ‘즐긴다’는 말을 하는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라는 말과 통해요. 이 말을 공부에 적용하면, 공부의 중요함을 아는 것은 공부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공부를 좋아하는 것은 공부를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거죠. 좋아한다는 것은, 이건 내 해석인데, 마음이 그리 간다는 거죠. 그러면 즐긴다는 건 뭐냐? 온몸으로 즐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부를 머리로 재미있어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 몸이 공부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일단 공부를 즐기기만 하면 그다음은 저절로 굴러가는 거예요. 좋아서 밤새워 책을 읽을 수 있지만 몸은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어요. 온몸이 자연스럽게 함께 즐겨야 진정한 공부가 되는 거예요.
신익상 공부란 삶에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즐거움, 그러니까 삶과 밀접하게 결부되어야 참된 공부라는 말씀으로 새기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선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선생님도 공부를 즐기신 거 아닌가요?
장회익 그쪽에 가깝다는 생각은 들어요. 하지만 정말 아인슈타인이나 공자가 말하는 그런 경지에 갔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나는 그저 공부를 즐기면서 산 사람이다.’ 하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지금도 기회만 닿으면 공부를 희망하고, 알고 싶어요. 사실 그걸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고, 그런 사람도 많지 않아요. 본래 사람은 알고 싶어 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어, 그 욕구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 저절로 공부를 즐기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공부가 어떤 작업이나 성취의 한 과정이 되어 있으면 욕심을 부리게 돼요. 그러면 결국 즐거움을 빼앗기죠.
그럼 어떻게 해야 즐거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공부하고 싶은데 못 하게 해보는 거예요. 이것이 혼자 공부할 힘을 내적으로 키워줘요. 제가 ‘야생의 공부법’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자기 힘으로 자라는 것, 옆에서 가꿔주지 않는 그런 성장 방식이에요.
신익상 공부하는 삶의 과정에서 만나신 특별한 선생님과 도반이 있었겠죠?
장회익 고등학교 첫 담임선생님이 공과대학 기계과를 졸업하고 갓 부임하신 분이었는데, 그분이 나를 특별히 생각해주셨어요. 난 공업고등학교를 갔어요. 그 선생님이 공고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혼자 더 공부하라시면서 외국 사람이 쓴 미적분학 번역서를 구해주셨어요. 그 책을 읽었더니 미적분이라는 게 뭔지 알겠더라고요. 미적분을 혼자 공부해서 알았다는 것에서 굉장한 자신감을 얻었죠. 앞으로 공부할 내용을 혼자 이해해본 것, 그것이 두고두고 감사해요.
도반이라면, 같은 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해 4년 내내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며 가까이 지낸 친구가 있어요. 사실 대학 4년 동안 학교에서 얻은 것은 별로 없었어요. 그 친구와 계속 대화한 게 공부에 굉장한 도움이 되었어요. 대화를 통해 생각하는 것이 공부에 아주 중요한데, 딱 그런 친구였어요. 그 친구는 칼텍(Caltech)에서 교수로 있다 퇴임한 임원규 박사예요. 그 친구가 은퇴 후에 철학과 신학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와 어쩌다 만나거나 이메일을 통해 여러 가지 깊은 생각을 나눴어요. 그 친구와 늘 가까이하면서 정신적 발전을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대학생활 4년 외에는 그렇게 가까이 못 지내서 아쉬워요. 어떤 창의적인 생각을 위해서는 가까운 사람과 터놓고 얘기할 기회를 찾는 것, 특히 젊을 때, 그게 대단히 중요해요.
신익상 자기 ‘스스로’ 하는 공부지만, 그것 또한 소통을 통해 함께 만들어가는 공부군요. 물리학은 어떻게 공부하시게 되었나요?
장회익 사실 고등학교에서는 물리학을 거의 배우지 못했어요. 과목은 있었지만 선생님이 안 계셨어요. 할 수 없이 스스로 교과서를 공부했어요. 당시 두 권짜리 고등학교 물리 교과서가 있었어요. 근데 이거 보니까 이해가 돼요. ‘아, 이게 진짜 학문 아니냐. 제일 재미있는 학문이다.’ 이런 생각이 탁 들어요. 졸업 무렵까지도 공과대학 기계과로 진학하려고 했는데, ‘아예 물리학 쪽으로 가야 옳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대학 지원서를 쓸 때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 적어버렸죠.
그 시기 대학에는 물리학을 알고 가르치는 분이 별로 없었어요. 사실 자기가 이해하고 얘기해 줘도 우리는 이해가 쉽지 않은데, 자기도 소화 안 된 거를 아무 교과서나 그냥 베껴서 전해요. 교재 구하기도 힘들었어요. 책 없이 칠판에 적은 걸 베껴가며 공부했어요. 그러다 보니 가르치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뭐 공부를 하는 척 마는 척하면서 지낸 거예요. 많이 방황했어요.
그러다 문득 물리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철학적 바탕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서 철학 강의를 좀 들었어요. 문리과대학에 철학과도 있었으니까요. 특히 과학철학이라는 과목을 적어도 세 학기 들은 것 같아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헤겔의 『정신현상학』 등도 들었고요. 하지만 기대했던 결과는 못 얻었어요. 그래도 철학 분야에서 어떤 말이 오간다 정도는 알 수 있었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수강한 이유는 그 핵심 내용이 시간-공간론이기 때문이었어요. 상대성이론의 핵심도 시간-공간이잖아요. 시간-공간이 4차원이라는 것이 상대성이론의 핵심이죠. 양쪽 모두 시간-공간이 핵심적이니, 둘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지 않겠나 싶었어요. 하지만 여기서도 실제로 얻은 내용은 많지 않아요.
신익상 그래도 끝까지 물리학을 공부하시고, 물리학을 하시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학문과의 연결점을 계속 찾아가셨군요.
장회익 초기에는 그런 이유로 철학에 관심을 가졌는데, 기독교인으로서의 동기도 있었죠. 대학에서 과학을 접하면서 신앙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느꼈거든요. ‘내가 믿는, 또는 교회에서 얘기하는 걸 그대로 따라가도 되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실존철학 얘기를 많이들 했어요. 삶의 길을 찾는데 신앙만으로 되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죠.
물리학에 대해 뭔가 딱 손에 잡히게 정리하게 된 건 대학 졸업 이후였어요. 졸업 후에 병역의 일부로 공군에 입대해 공군사관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때에야 비로소 물리학의 내용을 정리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어요. 내가 배울 때는 만족스럽게 못 배웠지만 가르치는 것은 철저히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어요. 그런데 그게 물리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계기가 된 거예요. 내 경우 공부는 결국 스스로 정리한 거지, 강의 들어서 도움받은 건 많지 않아요.

과학과 철학

신익상 선생님은 과학과 철학을 연결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셨습니다. 과학과 철학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장회익 과학과 철학은 본래 하나의 학문이에요. 동양에서는 ‘학문’이 하나죠. 전문 분야로 갈라진 게 없죠. 그건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지금도 원칙적으로 학문은 하나예요. 그 하나 중에서도 바탕이 되는, 본질적인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물리학이고 철학이에요. 그런데 어느 시기에 물리학이 학문적으로 성공해 놀라운 결과를 내며 엄청난 설명력을 가지게 되니까, 별개의 전문 분야가 되어 철학에서 빠져나가 버렸어요. 지금은 하나는 인문학, 하나는 자연과학이라고 해서 아주 멀리 떨어진 것으로 취급하는데, 그 둘을 다시 하나로 이루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나는 서울대에서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 과정을 만드는 데 힘을 좀 보탰는데, 그것은 과학과 철학을 연결하는 연구 또는 교육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어요. 그런데 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어요. ‘과학철학’이라는 또 하나의 전문 분야가 생겨버린 거예요. 과학철학은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생각했던 건, 적어도 물리학과 철학의 핵심 내용과 문제는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과학철학이 철학의 한 소분과로 굳어질 게 아니라 과학과 철학의 중간에서 그 둘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해주었으면 해요.
신익상 하나의 원리를 파악하면 세계의 모든 걸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시는 건지요?

gisang2109_03.jpg

장회익 그것이 본래 물리학이나 초기 철학자들이 희망했던 학문상이죠. 바탕 학문 딱 하나에서부터 모든 것이 연역되어 설명된다는 건데, 난 생각을 달리해요. 물론 자연과 우주의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본 원리를 파악해야 하겠죠.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공리 체계로부터 연역하기만 하면 모두 끝난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 공리를 어떻게 입증하느냐 하는 문제가 또 생기죠.
오히려 모든 학문이 둥근 형태로 연결되는, 전체가 하나의 원으로 연결되어 돌고 도는 형태로 되는 것이 옳다고 봐요. 예컨대, 자기네가 지구의 중심이라는 ‘중국’(中國)이라는 나라의 이름이 웃기잖아요. 지구에 ‘중’(中)이 어디 있어요? 모든 곳이 다 중일 수 있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는 학문 세계도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디가 중심이다, 또는 기본 공리다, 하는 것이 따로 있지 않아요. 모든 앎을 연결해서 전체를 한눈에 보는 관점이 필요해요.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고 그다음에 생명, 인간, 사회, 문화, 정신, 인식론, 학문 등을 이해하고자 여러 지적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들이 서로 어떻게 맞물려 있느냐가 중요하죠. 나는 이 연결 전체가 하나의 뫼비우스 띠 형태의 위상학적 구조를 지녔다고 봐요. 뫼비우스 띠는 앞면과 뒷면이 있는 띠인데, 두 끝이 중간에서 한번 비틀려서 앞면과 뒷면이 뒤바뀌어 연결되는 구조를 가지죠. 이 뫼비우스 띠가 모든 학문의 연결 구조를 보여주는 좋은 모형이라고 봐요.
뫼비우스 띠의 앞면 즉 바깥쪽은 물리학이 주로 다루는 모든 자연현상, 즉 자연의 기본 원리를 통해 이해되는 우주 전체, 그리고 나아가 생명현상의 물질적 측면을 나타내요. 그런데 생명 안에서 의식, 자아, 곧 ‘나’라고 하는 것이 나오잖아요. 나는 이것을 물질적인 측면 안쪽에 담긴 내면이라고 봐요. 뫼비우스 띠의 뒷면에 해당하죠. 의식하는 존재로서의 ‘나’가 나타나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뫼비우스 띠의 이 뒷면이 외부로 노출되는 것이죠. 이때 의식이 중심이 되는 활동이 사회·문화로 나타나고요. 이것이 뫼비우스 띠가 비틀려서 앞면과 뒷면이 뒤집히는 지점에 해당해요. 이러한 주체가 사물을 인식하고 다시 자연의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 뫼비우스 띠의 뒷면이 앞면과 다시 연결되는 구조에 해당해요. 이렇게 해서 외부인 자연현상에 대한 앎이 내부인 의식현상에 대한 앎과 연결되면서 전체가 하나의 틀로 이어지는데, 이 전체의 틀을 파악해야 제대로 된 앎이 돼요. 우리가 만일 앎을 통해 바른 삶의 방향을 찾고자 한다면, 치우치지 않고 전체가 제대로 그 안에 반영된 형태의 앎에서 찾아야 돼요.
신익상 공부의 세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군요. 지식이라는 것도 온전해지려면 유기체에 맞게 형성되어야 하겠고요.
장회익 먼저 내적인 인과 논리에 의해 연결된 것을 모순이 없도록 자꾸 다듬다 보면 전체가 어느 정도 명료해지죠. 전체가 이러이러하게 연결되는 구조라는 걸 알고, 그 구조 위에서 자세히 밝혀 나가다 보면 점점 분명한 앎에 다가가게 되는데, 그러한 앎이 가장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요즘 전문 분야로 조각난 학문은 조각을 보기는 하지만 전체를 연결하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알지 못해요. 그런데 이 조각들이 전체 중 어느 위치를 점하는지 파악해 연결하면 전체 모습을 보게 되죠. 바로 이런 형태의 앎이 중요합니다. 전문 분야의 토막 지식은 보통 물질적 생활의 어떤 이점을 얻기 위한 도구일 뿐이죠. 그런 지식을 통해 실재의 조각들만 보아서는 삶을 위한 올바른 지침을 얻을 수 없어요.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지속적 시도가 필요해요. 지금 우리가 그걸 해야 할 때예요.

온생명

신익상 선생님은 ‘온생명’이라는 개념을 제안하셨습니다. 온생명이란 무엇인지요?
장회익 도대체 생명이라는 건 뭐냐, 여기에 대해 만족스러운 답을 얻을 수 없었어요. 처음에 나는 사람과 토끼가 서로 다르지만 생명이라는 본질은 같은 거 아니냐, 그러면 생명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생명을 가진 가장 간단한 존재를 이해해서 그게 왜 생명이 되는지 알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몇 년 고생해가며 아무리 모델을 세워봐도 생명이라는 것이 나오질 않아요. 그래서 거의 절망에 이르렀다가 결국 깨달았어요. “생명은 살아 있는 생명체 안에 있는 게 아니다. 생명체들과 그 주변이 필수적으로 연결된 전체 시스템이 생명이다.” 이런 판단에 이르게 되었죠.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예로 들어 보죠. 노트르담 성당의 벽돌 하나 가지고 아무리 봐야 거기서 노트르담 성당이 안 나오죠. 벽돌을 포함한 여러 가지가 엮어져 이루어진 것이 노트르담 성당이니까요. 생명이란 그런 거예요. 한 부분만으로는 생명으로서 아무 기능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럼 생명이 되기 위해서 뭐가 있어야 할까요? 더 이상의 그 무엇이 없어도 생명활동을 지속시켜 나갈 수 있는 것, 그것을 나는 ‘온생명’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온생명이라는 건 더는 외부에서 어떤 결정적인 도움을 받지 않아도, 고립시켜 놓아도 생명이 되는 생명의 최소 단위예요.
지금까지 우리는 생명이 온생명 안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개별적인 생명체인 ‘낱생명’ 안에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러나 생명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모든 조건을 갖춘 존재, 즉 다른 모든 생명체가 그것과의 연결 속에서만 생명일 수 있는 그 전체가 온생명이고, 낱생명은 바로 그 온생명과의 연결 속에서만 생명일 수 있는 개별적이고 의존적인 생명체들이에요. 온생명 내에서 낱생명은 주변의 다른 것들과 인과의 관계로 얽혀 있어야 생명이 돼요. 그 인과의 사슬이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밖에서 들어오지도 않는, 인과의 실타래 전체, 그것이 바로 온생명입니다.
온생명을 이해하기 위해 ‘국소 질서’라는 말을 떠올리는 게 중요해요. ‘국소 질서’란 시공간의 국소 부분에 물질들이 모여 형성된 구조물을 말해요. 그러니까 돌멩이 하나, 토끼 한 마리를 모두 국소 질서라고 부를 수 있어요. 그런데 돌멩이와 토끼는 얼마나 정교하냐 하는 데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거예요. 물질 조각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우연히 돌멩이 하나로 굳어지기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물질들이 이리저리 바람에 휩쓸려서 굴러다니다가 우연히 살아 있는 토끼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죠. 하지만 거기에 중간 다리가 하나 놓이면 문제가 달라져요.
여기서 중간 다리란 ‘자체 촉매적 국소 질서’입니다. ‘자체 촉매적’이라는 국소 질서 하나가 만들어졌을 때 이것이 매개가 되어 같은 형태의 국소 질서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을 말해요. 돌멩이든 뭐든 국소 질서가 생기기 위해서는 여러 물질이 뒤섞여 요동치는 ‘바탕 질서’가 먼저 있어야 해요. 그 바탕 질서 위에서 우연히 아주 간단한 국소 질서 하나가 만들어질 수 있겠죠. 그런데 돌멩이와 같이 자체 촉매적이지 않은 국소 질서는 하나가 어렵게 만들어진 뒤에 비슷한 게 또 만들어지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반면 자체 촉매적 국소 질서는 어렵게 하나가 만들어지고 나면 그 비슷한 게 아주 쉽게 다량으로 만들어질 수 있어요. 이 차이가 생명을 이룰 수 있느냐 아니냐를 가르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자체 촉매적 국소 질서는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비슷한 게 쉽게 많이 만들어지는데, 그렇게 되면 그 국소 질서를 바탕으로 더 정교한 새로운 질서로 도약할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져요. 더 상위 단계의 질서로 넘어갈 수 있는 거죠. 하나의 국소 질서가 나타날 확률이 100만 년에 한 번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것이 하나 있다는 전제 아래, 이보다 한 단계 높은 질서가 나타날 확률이 다시 100만 년에 한 번이라고 생각해봐요. 그런데 자체 촉매적이지 않은 국소 질서일 경우 100만 년에 한 번씩 생겼다가 2-3일 존속하고는 사라져요. 이러한 2-3일들이 모여 다시 100만 년을 채워야 다음 단계의 질서가 나타난다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계산해보면 그다음 단계의 상위 질서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약 100조 년의 시간이 걸려요. 하지만 자체 촉매적 국소 질서가 되어, 예컨대 10만 개의 개체가 계속 유지된다면, 이것 가운데 어느 것을 통해서도 상위 질서로 도약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생겨나기에 필요한 시간이 10년으로 확 줄어들죠. 그런데 이러한 기적 같은 사건이 계속 누적되어 40억 년이 지난다면 4억 번의 기적이 쌓이는 결과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토끼 한 마리가 출현하게 되는 이유지요.
그런데 자체 촉매적 국소 질서는 자기 홀로 자체 촉매적 국소 질서일 수 없어요. ‘촉매’란 외부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뜻해요. 그래서 ‘촉매’라는 말에는 ‘나’ 아닌 것들 속에 내가 끼어 있다는 뜻이 담겨 있죠. 자체 촉매적 국소 질서는 그것보다 엄청 더 큰 질서 체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게 핵심이에요. 온생명이 자체 촉매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모체인데, 이 온생명 안에는 바탕 질서와 더불어 이미 생긴 다른 부류의 자체 촉매적 국소 질서들이 함께 있어서 이들이 협동하여 모체 역할을 해요. 말하자면 전체가 상호 관계를 맺어서 긴밀하게 연결됐을 때 자체 촉매적 기능이 가능해지고 또 그 전체가 계속 성장하는 거죠. 이것을 이루는 전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실체, 그게 바로 온생명이에요.
이 온생명의 한 사례, 그리고 현재로서는 유일한 사례가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지구 시스템이에요. 이것이 온생명이기 위해서는 지구의 풍요로운 물질과 태양이 꼭 필요해요. 왜냐하면 에너지, 더 정확히는 자유에너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 자유에너지를 공급해주는 게 태양이니까요. 지구만으로는 안 돼요. 자유에너지를 받아야 하고 그렇게 하면 정교함이 오히려 증가할 수 있어요. 자유에너지의 공급이 없으면 어떤 국소 질서라도 결국은 다 소멸하죠. 우주 안에 다른 생명이 있다면, 그것 또한 다른 천체에서 이와 유사한 온생명 형태를 지닐 때만 가능해요.
신익상 똑같이 태양에서 오는 자유에너지를 받아도 화성에서처럼 자체 촉매적 국소 질서가 없으면 생명이 안 되지만, 자체 촉매적 국소 질서가 발생한 지구에서는 생명이 되는군요.
장회익 그렇지요. 그리고 엄밀하게 말해서 자체 촉매적 국소 질서 중 일부만 태양의 자유에너지를 직접 받아서 자기네들이 활용 가능한 에너지로 전환하는 능력이 있어요. 그 나머지는 그런 능력은 없지만, 이미 자유에너지를 지닌 다른 것으로부터 자유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예요. 예컨대 녹색 식물은 태양으로부터 직접 자유에너지를 받아서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데 활용하죠. 그러면 초식 동물은 그 녹색 식물을 먹음으로써 자유에너지를 받아요. 이런 식으로 낱생명은 모두 네트워크로 연결된 건데, 이 연결 구조를 먹이사슬이라고 하죠. 먹이는 생물 종마다 달라요. 자유에너지를 다 각각 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짜여 있죠. 모든 낱생명이 자유에너지를 받아서 계속 활동할 수 있는 시스템, 이게 바로 온생명 시스템이에요. 개체 생명 하나하나는 다 자체 촉매적 국소 질서의 성격을 가져요. 우리 눈에는 당장 그것들만 보이니까 이게 살아 있다, 이게 생명이다 하지만, 나머지하고 분리하면 어떤 것도 생존이 안 돼요. 그래서 시스템 전체의 연결이 생명 이해에서 본질적인 거예요.

gisang2109_04.jpg

신익상 생태학적 관점에서라야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결정적으로 규명할 수 있겠습니다.
장회익 그게 진정한 생명이죠.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낱생명만 생명으로 국한해서 보고 이것이 유지되기 위해서 생태계가 필요하다 하는 정도로 여겼죠. ‘환경’이라고 부르면서요. 환경이 아니라, 그 모든 게 한 몸인 생명이죠. 그러니까 온생명이 기본적인 생명의 틀이고, 이것을 중심으로 생명을 이해해야 돼요. 낱생명의 내부 구조와 외부의 연결 둘 다를 함께 고려해야 그 내부 구조의 의미를 알게 돼요. 내부 구조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죠. 생태계 전체를 봐야 생명이에요. 온생명이 가장 중심적인 존재자이고, 나머지 모든 낱생명은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생존 가능한 거죠.

온생명과 종교

신익상 온생명을 기반으로 하면 신앙에 관한 생각도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장회익 당연하죠. 낱생명, 즉 개체로서의 내가 ‘나’다, 이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죠. 그런데 이런 ‘나’는 외부와 연결된다는 전제 아래 생존하는 거예요. 개체로서의 ‘나’도 나 안에 포함되지만, 온생명이 진정한 생명이고 따라서 진정한 ‘나’예요. 온생명은 하나며 분리될 수 없는 거니까요. 개체는 여전히 존재하고 유한한 시간을 살다 없어지지만, 사실은 온생명 속에 들어 있는 일부예요. 온생명으로서의 ‘나’는 짧은 시간 살다가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고 40억 년 전에 태어나 앞으로도 최소한 몇십 억 년을 더 존재할, 그 존재가 바로 ‘나’예요. 좁은 의미의 ‘나’는 개체로서의 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온생명이 바로 ‘나’라는 거죠.
신익상 그렇다면 선생님은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장회익 온생명과 낱생명을 이해하면 죽음의 문제가 간단해요. 우리는 유한한 ‘삶’을 얻었다는 게 중요해요. 내가 이 온생명 안에 들어와 주체가 되어 의미 있게 활동하며 살 기회를 얻었다는 것,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거죠. 이 기회는 유한해요. 온생명 안에 내가 그런 삶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거고, 그 속에서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죽음은 당연한 거죠. 주어진 기간에 산다는 게 정말 중요한 건데, 반대로 우리는 사는 건 당연하고 죽음은 이상하다고 여기죠.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느끼는 건데, 죽을 때에 가까이 가면 죽는 게 겁이 안 나요. 몸은 노쇠해 활동이 어렵고, 아픈 데는 치유되지 않고, 사는 건 고통스럽고, 의미 있게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들고, 그러면 이제는 좀 쉬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죽음으로써 완전한 안식을 얻는 거죠. 나이를 자연스럽게 먹어간 사람은 죽음 또한 아주 자연스런 거예요. 살 사람은 삶의 의욕이 계속 올라가죠. 올라가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면 삶의 의욕과 죽음의 의욕이 같아져요. 그 이후부터는 사는 게 괴로워지는데, 그 최정점에서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한 거예요.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들은 아직 더 살아야 할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삶의 욕구, 그리고 삶의 본능이 작용해요. 이건 굉장히 중요해요. 사는 동안 자기 삶을 잘 지켜나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 시점에서 죽음을 생각하니 불안한 거예요. 심지어 유한한 시간 후에 죽는다는 것조차도 마땅치 않게 보죠. 그래서 오래 살기를 꿈꾸는 거예요. 그렇지만 모든 생명은 죽어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영생과 부활, 이 두 가지 소망이 그거예요. 살아 있는 사람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꼭 가지고 싶은 소망이에요. 죽음을 거치지 않으면 좋은데, 죽을 수밖에 없다면 부활이라도 있어야겠다는 거죠.
특히, 소중한 사람이 죽으면 그가 다시 살아났으면 하고 바라죠. 그런 것이 우리가 가진 삶의 욕구 중에서 중요한 부분이에요. 정말 그런 것이 있다면 믿고 싶은 거예요. 예수의 경우가 대표적이죠. 예수처럼 놀라운 성품을 가진 성자가 아주 젊은 나이에 죽다니!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못 받아들였어요. 그 상황에서 예수의 무덤에 가니 시신이 없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해석할까, 그래, 부활하셨다! 이렇게밖에는 판단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돼야 옳다는 거예요. 그게 믿음으로 나타난 거죠. 일단 그렇게 믿으면 살아나신 예수가 환상으로 떠오르고, 그것을 서로 전하고, 점점 열기를 끌어 부활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정신세계를 구축하는 계기가 역사적으로 있었던 거죠. 그것을 나는 문명사적인 현실이라고 봐요. 자연사적인 현실로는 부활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입증하기 어렵지만 문명사적으로는 있어야 했던 거죠.
신익상 죽음은 자연스러운 거고 오히려 삶의 문제에 더 집중해야 한다면, 부활도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사적 의미가 있는 삶의 문제이겠군요.
장회익 그렇죠. 이런 분이 그렇게 허무하게 쓰러질 수 없다는 믿음이 힘을 가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믿음이 실제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예수는 온생명 속에서 여전히 살아 활동하기 때문이죠. 많은 사람 속에 예수의 가르침과 넋이 살아 움직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실제로 부활이 의미가 있어요. ‘우리 속에’ 살아 있게 되어 있는 거죠. 여기선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하등의 의미를 못 가져요. 그것을 사실이라고 봤던 사람들의 정신세계, 삶의 방식과 소망, 열망 속에 예수가 살아 움직이는 거죠. 다만 과거의 신화가 역사적으로 우리 삶에 기여할 수 있는 건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사실의 지식 위에서 새로운 옷을 입을 때예요. 당대의 사실과 완전히 격리될 수는 없어요.
개체가 꼭 부활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개체의 의미 있는 삶은 그 생존이 끝난 이후에도 그 삶이 온생명으로서의 ‘나’라는 존재로 계속 성장해나가는 거죠. 복음서의 겨자씨 비유를 볼 때, 예수는 이것을 파악하신 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이 비유에서 ‘나’는 씨 하나를 심어요. 이 씨는 나에게서 떠난 거지만, 내가 심었기 때문에 계속 자라나거든요. 어떻게 보면 내 삶의 연장이에요. 이런 의미에서 내가 살면서 남긴 것이 온생명 안에서 계속 살아가요. 개체인 ‘나’는 온생명과 수명을 같이한다는 의미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어요. 그게 아니면, 한때 가려졌다가 온생명 안에서 다시 나타나는 걸 부활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거죠.

예수, 그리고 성서

신익상 부활에 관한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시는지도 궁금해지는데요.
장회익 ‘예수는 온생명을 파악하고 온생명을 자기 몸이라고 느끼며 살아간 분’이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싶어요. 성서에 그 근거가 있어요. 요한복음에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요 15:1-5)라는 말씀이 있지요. 내가 깜짝 놀란 건, 이게 바로 온생명의 가장 적절한 표상이기 때문이었어요. 포도나무에 가지가 많은데, 모든 생명이 온생명 하나에서 가지로 연결된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하죠. 예수께서는 그런 예를 들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하셨어요. ‘나는 온생명이고 당신들은 거기에 있는 가지, 곧 낱생명들이다. 그래서 모두가 온생명으로서의 한 몸이다. 이 전체를 농부이신 하나님이 거두어주신다.’ 그렇게 얘기하신 거죠. 예수께서 자신이 누구라고 명시적으로 말씀하신 사례가 많지 않아요. 그걸 이야기하신 대표적인 것이 포도나무 비유인데, 이것이야말로 온생명을 나로 느끼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비유죠. 그리고 이 비유에 이어 나오는 것이 사랑 이야기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5:12) 마태복음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19:19)라고 하시죠. 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까요? 온생명의 관점에서 볼 때 이웃이 곧 내 몸이니까요. 낱생명은 이웃이 제 몸이라는 걸 모르니까 내 몸 ‘같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웃은 내 몸이다’, 이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나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이 전부 다 이 안에 있다고 봐요. 예수는 온생명을 파악하고 온생명인 ‘나’로 살아가신 분이죠.
신익상 그렇다면 성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gisang2109_05.jpg

장회익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성서 자체를 뭉뚱그려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신성화하는 거예요. 함석헌 선생님에게 아주 흥미로운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성서를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당신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라는 경우가 있지요. 함석헌 선생님은 그 대목들을 언급하면서, 요즘 기독교인 대부분은 이 말씀들을 ‘옛날 것은 덜 중요하고 예수의 말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데, 그건 예수를 제대로 배우는 게 아니라고 하셨어요.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에게서 배워야 할 자세다, 이러시는 거예요.
예수는 기존 제도 종교의 틀이 바른 삶을,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족쇄가 되니까 그 틀을 벗겨내는 역할을 하신 해방자예요. 그런데 우리는 다시 그 해방자의 말로 또 틀을 만들어서 우리를 족쇄로 묶어놓고 있는 거예요. 그건 예수의 정신이 아니죠. 이 예수의 정신을 새롭게 찾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해요. 왜냐하면 지금은 예수께서 생각하셨던 것과도 다른 새로운 이해를 하고 있기에 거기에 맞춰야 하니까요. ‘예수께서 과거에 이렇게 하셨으니 저건 절대 안 된다.’라는 생각은 오히려 예수의 정신을 따르지 않는 것이 될 수 있어요.
선불교에서 많이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석가를 만나면 석가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바로 이 정신이에요. 석가가 말했기 때문에 중요한 게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에 중요한 거예요. 우리가 더 깊은 진리를 발견하면 전해진 것을 치우고 새것을 택하는 것이 옳다는 정신, 그 정신으로 성서를 읽어야 살아 있는 종교예요.

코로나 이후의 세계

신익상 마지막으로, 코로나19 이후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장회익 과학사학자들은 1666년을 기적의 해라고 불러요. 유럽에서 1665년에 콜레라가 창궐해서 거의 모든 일터와 학교가 폐쇄되었는데, 1666년에 이것이 기적처럼 사라졌거든요. 그런데 과학사학자들이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달라요. 그해 고향에 와서 혼자 연구하던 젊은 뉴턴이 고전역학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이뤘기 때문이에요. 같은 의미에서 저는 2022년이 기적의 해가 됐으면 좋겠어요. 하나는, 당연히 코로나19가 기적처럼 사라졌으면 하는 거고요,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지적 도약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거예요. 아마 팬데믹 이후엔 학문이나 여러 사회활동이 초공간적으로 이루어질 겁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가 사이버 공간에서 순간적으로 연결되는 경험이 비약적으로 확산했잖아요. 물리적 공간이 장벽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번 계기로 현실화할 거예요. 정신적인 교류는 이제 꼭 모여서만 하거나 어느 지역에 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흩어져 있더라도 항상 할 수 있는 초공간적인 문명의 시대가 열릴 가능성이 보여요. 그걸 통해 나타날 지혜의 도약을 우리가 희망해보자는 거예요.
신익상 온생명이 겪게 되는 또 한 번의 새로운 의미와 경험이 될 수 있겠네요. 그것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르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팬데믹 이후의 새로운 희망, 새로운 기적이면 좋겠습니다. 온생명 사상을 중심으로 배운다는 것, 산다는 것, 신앙한다는 것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장회익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 이야기만 주로 하게 되어 안됐네요. 사실 내가 그동안 생각해온 것들을 모두 털어놓고 신 박사님 같은 젊은 세대의 비판을 받고 싶었는데, 오늘은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것 같네요. 앞으로 다른 기회에 좀 더 기탄없는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또 「기독교사상」 독자들의 의견도 많이 들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2021년 9월호(통권 753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