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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나의 목회 수기]
교회와현장 (2021년 8월호)

 

  딸깍발이 목회
  

본문

 

거지반 마흔 해 동안 목회를 하기는 했지만, 햇수에 비해 내세울 게 없다. 겉으로는 고고한 선비(?)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실상은 옹졸한 남산골딸깍발이 샌님의 길마저도 걷지 못했다. 어느 곳에서도 머물겠다고 버티거나, 떠나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지도 못했다. 교육전도사, 부목사, 농촌목회, 도시목회, 기관목회 등 큰 교회 빼놓고는 여기저기 많이도 기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공부도 열심히 못했고, 기도도 간절히 못했고, 어떤 모임에도 꾸준히 참석하지 못했다. 그나마 동료 목사 몇 명이 매주 한 번 모여서 하는 교회력에 의한 성경공부에 지금까지 거의 스무 해 동안 참여한 게 전부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친구 목사의 말마따나 바보 비슷하게 그리 지냈나 싶다. 다만 내 나름대로 정의하자면, 목회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얘기라고 생각한다.
1979년으로 기억한다. 친구인 정기열이 미국 유학을 간다며 장기천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던 평동교회 교육전도사 자리를 내게 물려주었다. 거기서 나는 맛보기 목회를 체험하고 담임목사님으로부터 목회가 무언지를 배웠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담임목사님을 따라 심방을 갔다. 간단한 심방 예배를 마치고 그 집에서 잘 차린 식탁을 대접받았는데, 식사 도중에 사레가 들려 그만 내 입안에 있던 음식물이 밥상 여기저기에 다 튀어버렸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그때 심방에 함께한 한 장로님이 음식물 파편이 튀어버린 그 반찬들을 하나하나 드시며 “하나도 안 튀었네.”라고 말하시며 그 위기를 넘겨주었다.
그 시절에 경험한 또 다른 심방을 잊을 수 없다. 어느 집사님 댁에 버스로 한가득, 말 그대로 대(大)심방을 한 적이 있다. 사연이 있는 심방이었다. 그 집사님은 가난한 데다가 자식이 많았다. 오죽하면 부유하게 지내는 친정오빠가 아들 넷 중 둘을 대신 기르고 가르쳐준다고까지 했을까? 그걸 뿌리치고 자식들을 양육하느라 집사님은 갖은 고생을 했을 터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어느 성탄절에 얼마간의 성미를 집사님 댁으로 보냈는데, 그게 고마운 집사님이 담임목사님과 교우들을 심방을 빌미로 초대해 집에서 식사대접을 했더란다. 전후사연을 익히 아는 장 목사님은 당시 차마 수저를 들지 못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집사님의 큰아들이 공고를 졸업하고 취직이 돼서 “어머니, 원대로 쓰고픈 데 쓰세요.” 하며 첫 월급을 내놓았고, 그 덕에 수십 명이 몰려가 그 집사님 댁에서 식사대접을 받은 것이다. 물론 장 목사님도 그때는 맛있게 식사를 하셨다.
1981년 1월 첫 주에 남양주 섬말에 있는 성산교회에 부임했다. 버스를 타고 ‘장자터’라는 곳에서 내려 걸으면 2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였다. 그런데 그 길이 왜 그리도 춥고 바람이 불던지, 눈과 코에 고드름이 생기고 귓밥이 얼어붙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내가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무언가 수틀리면 목회를 안 한다고 혼자 장자터로 나가 버스를 타고 줄행랑을 놓으려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그럴 때면 오대근 집사라는 분이 어찌 알았는지 오토바이를 타고 뒤쫓아 와 나를 구슬렸다. “전도사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나는 마지못해 오 집사님의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교회로 되돌아가곤 했다.
지방회의 배려로 미국 워싱턴에 있는 한인교회로부터 매달 선교비를 지원받았다. 이 선교비로 유아원을 개원했다. 면사무소에서 나오는 지원금은 간식을 비롯한 운영비로 쓰고, 선교비는 교사 월급으로 책정했다. 동네 미취학 아이들이 전부 나왔다. 처음에는 원생들이 하나같이 시커먼 땟국물이 졸졸 흐르는 게 영락없는 구구락지 모습이었다. 엄마들이 농사일에 바쁘다 보니 애들을 씻기고 차려입힐 겨를이 없었던 탓이다. 그런데 그중 한 아이만은 예외였다. 그 아이는 외지에서 이사 와 소를 기르는 목장 집 아이였는데, 엄마가 아주 멋들어지게 차려입혀 보냈다. 하루, 이틀 그걸 본 원생들 중 한두 명이 깨끗한 옷으로 차려입고 오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원생들이 전부 다 깔끔한 옷차림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엄마들이 자녀로부터 목장 집 아이의 모습을 전해 듣고 자기 아이들의 성화와 시샘 때문에라도 신경 써서 보내준 거다.
한번은 마을 반장 일을 보는 집사가 이런 말을 건넸다. 전도사 한 달 사례비는 8만 원인데, 유아원 교사 월급은 12만 원이라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거다. 그러면서 조정을 하잔다. 그래서 나는, 전도사 사례비는 교회가 책임지고 유아원 교사 월급은 후원받은 선교비로 하는 게 당연하다고 설득 아닌 설득을 해야 했다.
1982년 여름에 화성 장안에 있는 장안중앙교회에 부임했다. 첫 주일예배를 드렸는데 성미부장을 맡은 집사님이 나를 좀 보자고 하더니 대뜸 하는 말이 성미부장을 맡을 수 없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성미가 떨어질 때마다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쌀 동냥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못하겠단다. 나는 딱 1년만 더 해달라고 통사정을 해야 했다. 한 해쯤 지났을까, 그 집사가 내게 와서 갑자기 교회에서 떡을 해 먹자고 했다. 성미가 남아 성미 통 밑바닥에 있는 쌀이 그냥 두면 썩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하라니까 하는 말이 성미부장 더하겠단다. 성미부장 하는 게 제일 편하다나 뭐라나.
부흥회를 마친 다음 날 저녁, 교우들이 은혜를 나누자며 모였다. 교우들은 저마다 부흥회 때 받은 이런저런 은혜를 이야기했다. 그런데 모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부흥회에 제대로 참석도 하지 않은 집사가 앞으로 나서는 게 아닌가. ‘괜히 엉뚱한 말이라도 끄집어내면 어쩌나?’ 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말인즉슨 이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부흥회에 꼬박꼬박 참석해서 은혜를 받으리라고 다짐을 했단다. 그래서 내가 일러준 대로, 부흥회를 시작하기 일주일 전부터 믿지 않는 남편에게 끔찍하게 잘해 주었다고 한다. 남편의 기분이 좋아야 자기가 교회에 오는 걸 따따부따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부흥회를 시작하는 날에 돼지가 새끼를 낳으려는지 요란을 떨더란다. 그래도 성경책을 들고 집을 나오려는데, 돼지새끼 안 받고 어디 가느냐고 남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부흥회 첫날을 빼먹고, 그다음 날부터는 남편이 밉고 김이 새서 그만 쭉 안 나왔단다. 그래도 부흥회 마지막 날에는 자기가 명색이 집사인데 얼굴도 안 비치면 되겠냐 싶어 조금은 멋쩍은 발걸음으로 교회에 왔는데, 교회 문을 여는 순간 찬송을 열심히 인도하는 내 얼굴이 퍼뜩 다가오더란다. 그 순간에 어느 날 사택에 들렀다가 내가 달랑 김치 한 보시기 놓고도 밥 한 그릇을 다 비우는 모습을 봤던 게 떠올랐고, 그러면서 나에게 쇠고기 뭇국을 끓여 대접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란다. 그때 대접받은 그 쇠고기 뭇국이 천하진미였다. 그 후로 그 어떤 진수성찬도 그 맛만은 못하다.
어느 집사의 고등학생 아들 호관이는 심성이 착하고 잔정이 있어서 나의 어린 딸내미를 귀여워해주며 잘 돌봐주었다. 그런 호관이는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었다. 늘 입술이 새파랗고 숨이 가빠 활기가 없었다. 수술만 해주면 된다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시골 살림에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는데, 당시 정부에서 만든 심장재단에서 지원하는 수술을 받을 기회를 얻었고, 부천의 세종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수술할 때 필요한 혈액을 구해달라는 요청에 나와 교우들이 동참했다. 그게 그나마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늘 새파랗던 호관이의 입술은 수술 후 발갛게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우리의 혈액이 더해져서 더 의미 있는 일로 기억에 남는다.
1984년에 동대문교회 장기천 목사님 밑에서 교육 담당 부목사로 일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도 나는 버릇이 없었다. 한번은 당회를 준비하는데, 장 목사님이 새 임원 명단을 미리 보여주셨다. 그런데 그 명단에 있던 한 청년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앞뒤 재지 않고 그 청년을 집사로 세우는 건 좀 그렇다고 말씀드렸다. 아직 결혼도 안 한 총각이고, 평동교회에서 목사님을 따라온 지 얼마 안 된다고. 그러자 장 목사님은 “네가 담임목사냐, 내가 담임목사지. 너는 평동교회에서 안 왔느냐?” 하며 역정을 내셨다. 그랬던 장 목사님은 정작 당회를 할 때, 새 임원 명단에서 그 청년의 이름을 빼셨다. 그 바람에 그 청년은 다음 해에야 집사가 되었다. 그때 나는 어른들에게 입바른 소리를 해도 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후에 내가 만난 어떤 어른도 젊은 사람의 입바른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으셨다. 그런 걸 보면 장기천 목사님은 내게는 진짜 큰 어른이셨다.
나는 교육 담당 부목사로서 교회에서 운영하던 야학인 재건학교를 교장 장로님과 함께 돌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재건학교는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든 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윤리를 가르쳤다. 시험을 볼 때면, 야학 학생들이 왜 그리도 정답을 못 맞추는지 솔직히 말해 답답하기도 했지만 나이 많은 그 학생들과의 만남은 감동 그 자체였다. 입학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과 장로님들과 나눈 악수가 그리도 고마웠단다. 그게 당신들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받아본 사람대접이었다고 한다. 졸업예배 답사 시간에는 졸업생들이 눈물콧물 흘려가며 어찌나 울어대는지…. 모든 게 형식적으로 끝나고 마는 요즘 세태에서는 맛볼 수 없는 감동이었다.
1988년에 동대문교회는 추수감사헌금으로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개척교회를 내가 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장 목사님께 말씀드렸더니, 개척교회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며 나하고는 안 맞는다고 하셨다. 그래도 내가 거듭 요청한 끝에, 당시로서는 달동네인 도봉동 중랑천 변에 흥인문교회를 시작했다. 나는 교회를 세우면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주일은 어찌어찌해서 몇 명이라도 모이는데 주일 저녁과 수요기도회는 아무도 오지 않는 거다. 그러면 헛헛해진 나는 중랑천 변에 나가 흘러가는 물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어떤 분이 권사와 전도사 내외라며 전화를 걸어 주일 저녁예배와 수요기도회도 모이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얼씨구나 그렇다고 했더니, 그 내외분에 아들, 며느리, 사위, 딸, 손자, 손녀까지 한 무더기로 나오는 게 아닌가. 그리고 건물 아래층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청년들도 나오게 되어 교회 꼴을 갖추게 되었다.
1989년 3월에 인천간호보건전문대학(현 안산대학)에 교목으로 갔다.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학생회 주최로 농촌봉사활동을 했다. 충남 서천으로 농활을 갔을 때의 일이다. 도착해서 교회에 짐을 풀고 있는데, 마을회관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온 학생회장이 동네 어르신들과 노인회에서 농활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그냥 되돌아가라는 말을 우리에게 전했다. 농촌봉사활동 한답시고 의식화니 뭐니 하면서 동네만 어지럽힌다는 이유였다. 나는 학생회장과 부회장에게 노인회장님을 찾아뵙자마자 일단 큰절부터 올리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 농활을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농활을 끝낸 얼마 후 그 동네에서 고맙다고 감사장까지 보내왔다. 그때는 나도 학생들과 같이 낫으로 풀도 베고 하면서 몸으로 함께했었는데….
기독교학교에서는 축제가 문제였다. 그 당시는 어느 학교나 할 것 없이 신학교까지도 축제는 고사(告祀)로부터 시작하던 때다. 학생들은 고사를 지내야 학교와의 기 싸움에서 이기는 것 같고, 학교는 고사를 막아야 기독교학교의 위상을 지켜내는 양 여기던 때였다. 교목으로 처음 맞은 축제에서는 그야말로 얼떨결에 고사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다음 해 축제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고사를 막아낼 뾰족한 수가 없었다. 천생 몸으로 부딪혀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고사가 시작되려 할 때, 나 홀로 운동장으로 나갔다. 학생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돼지머리가 차려진 고사 상을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고 몇 마디 했다. 정말 맞부딪히고 싶으면 만만한 학교 건학정신을 건드리지 말고 거대한 군사독재정권과 맞씨름을 하라고.
대학교회를 창립했다. 지방회에서 정식 절차를 밟아 창립예배까지 드렸다. 그런데 연회에서 대학교회는 안 된다는 거다. 교목으로 있으면서 대학교회를 담임하는 게 합당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교회를 시작해 지방회에서 창립예배까지 드렸는데 안 된다니…. 그렇다고 시작한 걸 말 수도 없고 참 어정쩡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새로 선출된 연회 감독이 학교 강당에서 연회를 개최하게 해달라고 요청이 왔다. 그때 대학교회가 아직도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사정을 말했다. 그랬더니 오히려 연회에서 학원선교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줘야 마땅하다는 거다. 그리고 지방감리사가 해도 될 회의를 감독이 직접 와서 주재하고 도장까지 찍어주고 갔다. 어째서 어제까지는 안 되고, 오늘은 된다는 것인지 나는 지금도 그걸 모르겠다. 그 법리적인 해석의 차이를 영 모르겠다. 대학교회를 출발하면서 표어를 “작지만 위대한 교회”라 했다. 처음 출발이라서 적당히 그냥 해본 소리였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던 어느 교수의 꼬맹이 딸이 교회에 올 때마다 ‘작지만 위대한 교회’ 가자고 하더란다. 그걸 보면 말이란 참 무서운 거다.
간호학과에 재직하던 모 교수는 실력 있고 성실하고 선하신 분이었다. 여의도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밤중에 불이 나는 사고로 부부가 함께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화재로 내외가 저세상으로 가고 두 자녀는 중상을 입었다. 부부가 불길 속에서도 아이들은 살리려 얼마나 몸부림을 쳤을까. 그 몸부림으로 부부는 가고 아이들은 목숨을 건진 거다. 조문을 갔을 때, 부부의 영정과 관이 양쪽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관이 둘 놓인 걸 난생 처음 보았는데, 그게 부부라니 황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1999년 12월에 인천성도교회로 왔다. 수요일이었다. 수요기도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한 권사님의 손자가 행방불명이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중학생 아이인데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애타하던 아이였다. 물론 그 권사님에게는 애지중지하는 손자였다. 동암역 주변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다기에 역 주변을 이리 돌고 저리 돌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 아이가 가끔 도봉역에 간다는 말에 교회 장로님에게 기도회를 부탁하고는 전철을 탔다. 도봉역까지 가서 이곳저곳 뒤져봐도 그 아이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 아이를 동암역 근처에서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되돌아왔다. 그랬더니 누군가 이러는 거다. 목사가 기도회가 중하지 아이 찾는 게 중하냐고. 그래도 나는 만약 그런 일이 다시 생긴다면 그때도 기도회는 장로님께 맡기고 아이를 찾아나설 것 같다.
내 아들과 동갑내기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은 사리분별력이 조금 모자랐고, 그 아버지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정신도 온전치 못했다. 이 청년이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떤 아가씨의 가슴을 건드렸다나, 어쨌다나? 그 일로 이 청년이 구치소에 들어갔다. 그래서 청년의 아버지와 교회 장로님과 함께 검찰청으로 찾아갔다. 사무실로 들어갔더니 수사관이 우리를 만나주었고 우리는 불쌍한 청년이니 잘 봐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런데 거기서 청년의 아버지가 수사관 앞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며 당신 아들 잘 좀 봐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거다. 그걸 보고 나는 자식이 뭔지 그때 알았다. 아버지 덕인지 그 청년은 얼마 안 가 피해자와 합의를 보고 풀려났다.
2006년 초여름에 강릉 만민의교회로 갔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최 집사, 송 집사 부부의 아들 최 군을 만났다. 춘천의 한 성결교회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단기선교를 가는 데 동참한다기에 무사히 잘 다녀오라고 격려하고 기도했다. 그런데 수요기도회로 모일 때쯤 연락이 왔다. 최 군이 현지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수영을 하러 갔다가 변을 당했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수색 중이란다. 목요일 새벽기도 시간에 송 집사가 전화를 하더니, 아들이 결국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고 전했다. 당장 댁으로 찾아뵙겠다고 했더니 남편인 최 집사가 지금은 아무도 만나기를 꺼린다고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남편이 아들 일로 동사무소에 갔다고 해서 그 사이에 심방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최 집사를 만났다. 그래서 그의 손을 부여잡고 함께 집으로 가서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위로를 건넨 후 결례인 줄 알면서도, 어렵지만 의연하시라고 말씀을 드렸다.
춘천의 성결교회에서 목사, 장로 분들이 왔다. 내게 먼저 들러서 최 군의 부모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그 부모가 무슨 요구를 할런지 한걱정이길래 나도 함께 최 집사 부부를 방문했다. 그런데 최 집사가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의연할 수가 없었다. “우리 애가 그리된 데는 우리 애 책임도 있다. 군대도 갔다 온 대학생이니 성년인데 사려 깊지 못해 그리된 거다. 다만 우리 애 시신을 수습해서 인천공항까지 데려오는 건 성결교회 측에서 책임져주면, 그 이후 모든 장례 절차는 부모된 도리로서 당연히 감당하겠다.”
공항으로 최 군의 시신을 맞으러 갔다. 나갈 때는 헌헌장부의 모습이었는데, 들어올 때는 화물로 들어오다니…. 참으로 어렵사리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마친 후 첫 주일이 되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서 최 집사 내외가 나를 보자고 했다. 나는 솔직히 덜컹했다. 무슨 요구라도 하시려나.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부의금이 남았단다. 그건 부모가 써서는 안 될 거란다. 단기선교이긴 했지만, 선교를 나갔던 아들의 뜻에 맞게 써야겠단다. 그러면서 남은 부의금 400만 원을 그 성결교회와 우리 만민의교회에 나누어 헌금했다. 나는 그 헌금을 베트남 선교에 쓰도록 했다. 그때 목사인 나보다 더 훌륭한 믿음의 인격자 부부가 있음을 절감했다.
2009년 정월 첫 주일 강화 초지교회로 왔다. 한 권사 부부는 세상 착하고 일밖에 몰라, 평생을 돈 한 푼 허튼 데 쓸 줄 모르고 아끼고 아껴가며 시골에서 살아온 분들이다. 그런데 자식이 문제였다. 아들 하나가 사업한다면서 부모의 피땀이 서린 집, 땅 일체를 날린 거다. 교회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해드리려 했지만, 그분의 자존심이 그걸 용인하지 않았다. 왜, 착하고 성실한 이들이 80이 넘은 노년에 오갈 데 없는 고생을 해야 하는지, 그 아들도 원망스럽고 세상도 원망스럽고 하늘도 원망스러웠다.
2019년 10월까지 목회를 했다. 정년은퇴까지는 조금 남았는데 장로 두 분이 나이든 목사가 부담이 되는지, 부흥이 안 된다나 어쩌나, 이런저런 말을 하며 갈 곳을 알아보란다. 그때는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내 마음을 종잡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문득 어떤 모임에서 들은 젊은 여목사의 말이 떠올랐다. 나이든 목사 한 명이 조금 일찍 물러나주면, 그 파급 효과로 오갈 데 없는 목사 세 명의 목회 자리가 생겨난다는 말이었다. 또한 마라톤이라면 42.195km를 끝까지 달려야겠지만, 목회는 기를 써서 정년을 채울 건 없지 싶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지만 하찮은 자존심은 세우자고 다짐을 했다. 두 장로에게 알렸다. “나는 목회를 접는다. 후임자 선정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 어떤 음성적인 거래를 하지 않는다.” 그렇게 물러났다. 친구의 말마따나 그런 내 처신이 바보 같다는 핀잔이 맞기는 하다. 그때도 친구에게 말대꾸를 하기는 했다. 나 같은 바보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제아무리 드러내고 싶어도 내세울 거라고는 전혀 없는, 누가 알까 봐 부끄럽기까지 한 교회 밥을 근 마흔 해 동안 먹었다. 어찌 보면 이름 없이 사는 것도 만만치 않다. 별 볼 일 없이 사는 것도, 내세울 것 없이 사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렇게라도 억지로 스스로 위로해보는 거다. 남산골딸깍발이 샌님만도 못한 걸음걸이를 말하는 나도 사람이 되기에는 한참은 멀었다.

권오무 | 기독교대한감리회 은퇴목사이다. 저서로 『바보 예수를 꿈꾸다』 등이 있다. 현재 신앙과지성사에서 편집을 돕고 있다.

 
 
 

2021년 8월호(통권 7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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