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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나의 목회 수기]
교회와현장 (2021년 4월호)

 

  항상 선교가 먼저였던 '바보들의 행진'
  

본문

 

하나님과의 만남부터 개척까지

1) 하나님을 만나다
나는 거제도 한 농촌마을의 종가집 종손으로 태어났다. 유불선 전통 신앙을 유지해온 집안인지라 어려서부터 사찰, 굿, 점, 제사 등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중학교 2학년 때 한 친구를 따라 처음 교회에 나갔는데, 세 달쯤 다니다가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로 더 이상 교회에 갈 수 없었고, 얼마 후에 교회와 예수님을 잊어버렸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나도 언젠가는 죽을 텐데 죽음 앞에서 후회 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다가 대학교 1학년 때 나에게 닥친 폐결핵이라는 커다란 질병으로 인생에 관한 깊은 고뇌가 다시 찾아왔다. 그래서 1학년을 마친 후 휴학을 했 다. 고민과 갈등, 방황의 나날이 지속되었다. 심지어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교회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곳에서도 살아갈 만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교회에나 다시 나가보자. 하나님이 안 계신다 하더라도 밑져야 본전이다.’ 하는 마음으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교회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참 많이 울었다. 나는 하나님을 다 잊고 살았는데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으셨고, 내가 돌아오기를 팔 벌리고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울었고, 나의 죄를 깨닫고 울었고, 그런 나를 다시 불러 구원해주신 은혜를 깨달아 울었다.
하나님을 만난 후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 여전히 폐결핵은 그대로였고, 휴학생이라는 입장은 변한 것이 없는데, 내 마음과 나 자신이 변한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고뇌하며 방황했고, 심지어는 자살까지도 생각했던 내가 감사와 기쁨, 긍지와 소망의 사람으로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한 것이다. 그때가 1967년 5월 말경이었다.

2) 철저한 회개, 그리고 치유해주신 하나님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도, 사실 나는 수년 동안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폐결핵을 앓으며 수없이 복용한 항생제에 내성이 생겨 치유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렇게 죽게 되는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과 함께 염려와 불안이 갑작스레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이 찾아온 후 곧바로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 “하나님! 이 병으로 죽으면 더 좋은 천국에 갈 텐데, 불신자처럼 염려하고 불안해했던 저의 불신앙을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죽어도 염려하지 않겠습니다. 불안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철저히 회개했다.
얼마 뒤 병원에서 “깨끗해졌습니다”라는 치유 선언을 들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는 그때에 ‘하나님께서 내 삶과 죽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단계까지 믿음을 끌어올리시려고 이 병을 계속 머물게 하셨구나.’ 하고 생각했다.

3) 소명과 개척
그렇게 휴학 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기적처럼 폐결핵에서 벗어난 후,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다. 경영학 공부에 매진하며 대학 생활을 보냈는데, 졸업반 때에 내가 신학교에 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다. 사역자의 소명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돈을 벌어서 봉사하겠다는 핑계를 늘어놓으며 신학교 대신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1학년을 마칠 무렵에 하나님께서 또 신학교로 가도록 부르셨지만, 이번 에도 돈을 벌어서 봉사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하나님 앞에서 고집을 부 렸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나를 좋게 본 몇 분의 투자로 조그마한 식품회사를 세우고 사장이 되었다. 시제품이 막 나왔을 무렵에 갑자기 군대에 가게 되었고, 군 생활 3년 동안 하나님의 부르심은 계속되었다. 하도 괴로워 어느 날 “하나님! 왜 저를 경영학과에 보내셨습니까? 신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 평생 돈을 벌어서 신학생 100명을 뒷바라지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기도를 드렸다. 나는 내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철저히 십일조를 드리고 있고, 하나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경영학 공부까지 했다는 우쭐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나의 제안을 받지 않으셨다.
결국 나는 소명을 두고 갈등하던 6-7년 동안의 시간을 끝내고, 부르심에 따라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나님께 항복했다. 전역할 시점이 가까웠을 무렵, 휴가를 받아 집에 간 나는 아내에게 “여보! 나 하나님께 항복했소. 당신 어쩔 참이요?” 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내가 “여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기겠습니까. 신학교에 갑시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내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아내의 답변에 놀라서 이유를 물었더니, 두 달쯤 전에 기도 중에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했다. “내가 네 남편을 종으로 택했다. 너는 네 남편에게 복종해라. 제대 후 서울로 가라.”
그렇게 군 복무를 마친 후, 큰 뜻을 품고 서울로 간다는 말씀을 부모님께 드리고서 빈손으로 무작정 상경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음 해인 1977년, 서울신학대학원 석사(M.Div.) 과정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신학교 입학을 목전에 두고 기다리던 1977년 1월 16일, 나는 집사의 신분으로 교회를 개척했다. 서울 대림동의 한 건물 2층에 월세로 얻은 20평 정도의 작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개척예배를 드렸다. 그 교회가 내가 평생 섬겨온 수정교회이다. 피아노도 없이 헌 책상에 빨간 보자기를 씌워 강대상으로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멈추지 않았던 선교 사역

1) 어려운 중에도 항상 선교부터
하나님께서 선교를 위해서 나를 부르셨고 선교를 위해서 수정교회를 세우셨다고 믿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강대상도 없이 이제 막 개척한 교회이지만, 어려운 농어촌 교회를 돕는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교회를 개척한 해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산모가 음식을 제 대로 먹지 못했다. 젖이 잘 나오지 않아서 아기가 배고파 울 때 보리차를 끓여 먹이는 형편에도 선교비는 꼬박꼬박 제때에 송금했다. 이렇게 개척 때부터 시작된 선교는 “이웃에 복음을! 농어촌에 선교비를! 온 세계에 선교사를!”이라는 슬로건 아래 내가 은퇴할 때까지 어떤 역경 속에 서도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매년 조금씩 변동이 있었으나, 대략 교회 재정의 50% 정도를 선교비로 지출했다.
매월 1억 원에 가까운 선교비를 지출하면서도, 1,000만 원 정도면 살 수 있는 설교자 모니터용 전광판을 수년 동안 마련하지 못해 애태운 적도 있다. 어느 주일에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일이 떠오른다. 자기 쓸 것은 못 쓰면서도 남을 돕고 선교하는 일부터 늘 먼저 하는 것은 세상의 기준에서는 바보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바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보이니, 우리들은 이 바보들의 행진을 계속하자는 내용의 설교였다. 그 설교대로 나는 어려운 때에도 언제나 선교를 멈추지 않았다.
은퇴하기 전에 나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수정교회가 지난 약 40년간 선교하지 않고 우리 교회만 챙겼다면 이보다 더 부흥했겠습니까? 또 그렇게 부흥했다고 한들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수정교회에는 우리 교회 안의 성도뿐 아니라 선교를 위해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수정 성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40년간 우리 교회가 총 선교비를 200억 원 정도 지출했는데, 인천 성전 터를 구입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200억 원보다도 더 많은 것을 한꺼번에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2) 성장의 동력이 된 이웃초청주일 행사
신학대학원을 막 졸업한 1980년 3월, 수정교회를 개척한 지 3년이 흘렀다. 3월 9일 주일 낮 예배에 처음으로 100명이 넘는 사람이 출석했다. 늘 전도를 쉬지 않았던 아내의 도움이 컸다. 수정교회는 이 날을 기념하여 전도주일로 정하고 매년 봄에 ‘이웃초청주일’을 준비해 전도 행사를 꾸준히 이어왔다. 이 일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자 예수를 믿지 않는 가족과 친척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일이 많아졌다. 믿지 않는 남편을 데려오는 경우가 특히 많았다. 그래서 수정교회는 대부분이 부부 신자였으며, 다른 교회에 비해서 남성 성도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이웃초청주일 행사는 신경써야 할 일도 많고 선물을 준비하는 비용도 많이 들지만, 교회의 전도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3) 인천으로의 교회 이전과 지교회 분립
교회는 점점 성장을 거듭했다. 대림동 내에서 더 넓은 곳으로 교회를 옮겼다가 교회당을 새로 건축했는데도, 점점 비좁아졌다. 대림동 성전의 확장을 위해서 기도하던 중 인천 검단 지역의 보일러 공장을 매입하여 인천 성전 시대를 열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림동에 있던 교회당을 매 각하여 건축비를 충당할 계획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서울수정교회’로 독립시켰다. 수정교회가 낳은 16번째 지교회였다. 인천 성전 건축과 이전 과정에서 반대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 더 많았고, 많은 간증거리를 주셨다.

4) 성경적 교육을 위한 수정비전학교
공교육의 여러 문제점이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되고 조기유학 붐이 일어나는 등 교육에 관한 관심이 전 사회적으로 대두되었을 때였다. 주일 낮 예배에서 ‘성경적 자녀 교육’을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그 후에 20여 명의 성도가 설교 말씀의 취지에 공감하여 성경적 자녀 교육을 실시할 대안학교를 설립하자며 각자 1,000만 원에서 2,000만 원의 특별헌금을 드렸다. 2010년, 이 특별헌금을 기금으로 하여 글로벌 크리스천 리더를 양성하고자 수정비전학교를 설립했다.
현재 수정비전학교는 약 100명의 학생이 초등, 중등 과정에 재학 중이다. 학생들은 “나라를 위하여! 온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교훈 아래 믿음 안에서 두 가지 언어(영어와 한국어)로 교육받고 있다. 학생들은 잘 성장하고 있고, 학교를 매우 사랑한다. 학부모들로부터 좋은 학교를 세워주어 고맙다는 말도 자주 들었다. 혹자는 수정교회 의 많은 선교 사역 중 가장 잘한 일이 바로 이 학교를 세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위기를 극복하고 은퇴하기까지

1) 위기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었지만, 사역이 모두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41년간 오직 한 교회에서만 목회를 하다 보니 다양한 고비가 찾아왔다. 첫 성전 건축 과정에서도, 첫 임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위기가 있었다. 선교와 빚 청산 중 무엇이 우선인지 논쟁하느라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인천으로 이전할 무렵에도 위기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것은 몇 차례나 들이닥쳤던 경제적 위기였다. 20평으로 시작한 첫 예배당에서 110평의 두 번째 장소로 이전할 때에도, 이후 성전을 신축하여 이전한 뒤에도, 선교교육관을 건축한 뒤에도, 인천 성전을 건축한 뒤에도 경제적 위기가 계속해서 교회를 위협했다. 사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선교를 결코 중단하지 않고 선교에 매진하다 보니 교회 재정은 항상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성전 건축을 하기 위해 빚을 냈기 때문에 건축 후에는 거듭 위기가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첫 성전을 건축한 뒤에는 이자 때문에 계속 빚이 늘어나는 위기 상황이었다. 선교를 중단하고 빚부터 갚아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점점 커 졌다. 그 시기를 보내던 어느 연말, 집사님 한 분이 찾아와서 “목사님! 이러면 교회 떠내려갑니다.” 하고 소리쳤다. 그때 나는 곧바로 “집사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교를 중단하면 교회가 안 떠내려가고 선교를 계속 하면 교회가 떠내려간다는 이야기는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위기 속에서도, 그다음 위기 속에서도, 심지어 수정교회가 부채로 인해 아예 없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위기 상황에서도 선교는 계속되었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위기를 극복하게 하셨다.
그밖에 이런저런 위기가 들이닥칠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살폈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동시에 이 위기 속에서 목회자인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았다. 그래서 몇 차례나 책이나 옷을 뺀 모든 재산을 툭 털어 하나님께 드리곤 했다. 몇 푼 되지 않는 재산이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를 잘 넘기도록 역사하셨고, 지금은 이 위기들이 결국 멋진 간증이 되도록 보호하셨다. 이 모든 고비를 잘 넘을 수 있게 하시고, 이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2) 은혜로운 은퇴
목회를 하는 동안 나 자신을 위한 은퇴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현재 나에게 주어진 일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는 은퇴 준비가 필요하기에 위원회 셋을 조직했다. 첫째는 수정교회 40년사 및 은퇴식 준비위원회, 두 번째는 담임목사 청빙위원회, 세 번째는 은퇴목사 예우위원회이다.
담임목사 청빙의 경우, 은퇴를 1년 넘게 앞두고 연말 당회에서 청빙 방법을 미리 결정했다. 담임목사 청빙 과정에서 갈등과 혼란이 생기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내가 3인의 후보를 선정하고, 선정된 후보자를 검증하고 선택하는 것은 당회가 맡자는 나의 제안을 당회가 받아들였다. 담임목사 청빙위원회는 이 절차대로 후보 3인 중 1인을 선택했고, 당회의 인준을 거쳐 후임 목사를 최종 확정했다.
은퇴목사 예우위원회는 나에 대한 은퇴 예우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하고 당회에서 이를 인준받기 위한 조직이었다. 어느 날 위원장을 맡은 장로님이 찾아와, “목사님! 어떻게 예우해드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고, 위원회와 당회에서 알아서 결정하시라고 대답했다. 가이드라인이라도 제시해달라는 장로님의 말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가이드라인도 없습니다.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 제가 그것을 위해서 목회를 해온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회했습니다. 그러니 당회에서 알아서 결정하십시오.”
얼마 후에 그 장로님이 나를 다시 찾아왔다. “목사님! 교회가 빚을 좀 내야 하겠습니다.” 나는 “왜요?” 하고 되물었다. 그는 “교회 재정이 어려워서 빚 없이 은퇴 예우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건축으로 인한 부채가 많아서 교회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훤히 알기에, 빚을 내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하시라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나는 아무런 잡음 없이 은혜롭게 약 41년간의 수정교회 사역을 잘 마칠 수 있었다. 2017년 7월 9일, 수정교회는 나를 원로목사로 추대했다.

목회 사역에는 은퇴가 있어도, 천국 사역에는 은퇴가 없다

은퇴를 하게 되면 ‘그동안 열심히 목회했으니 이젠 푹 쉬다가 하늘나라에 가자.’라는 생각이 들 줄 았았다. 하지만 목회 사역에서는 은퇴가 있어도, 천국 사역에는 은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건강하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까를 고민하고 기도했다.
그래서 은퇴한 후 ‘목자재단’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했다. 예배당에 비가 새도 방수 공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려운 교회들, 페인트칠만 새롭게 해도 교회 분위기가 확 달라질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어려운 교회들을 찾아가 리모델링 공사를 해주고 있다. 그리고 올해부터는 작은 규모라도 ‘2·3·4 부흥운동’을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준비하고 있다. 내가 성결교 총회장으로 일하던 때에 작은 교회를 살려야 한다는 차원에서 교단에서 8억 원을 모금하여 약 150명의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8개월간 실시했던 운동이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주일과 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최소한 2시간 기도하기, 3시간 성서 읽기, 4시간 전도(사역)하기를 실천하자는 운동이다. 이 운동을 통해 목회자도 변하고, 성도도 변하고, 교회도 변할 것이고, 그 모습을 좋게 여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돕고, 하나님도 우리를 도우셔서 부흥하리라는 것이 2·3·4 부흥운동의 취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교회는 성령 운동을, 교단은 2·3·4 부흥 운동을, 교계는 실추된 한국교회의 위상을 회복하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턴업(turn up) 운동’을 힘차게 펼쳐야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나는 은퇴 4년째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은 것에 감사할 뿐이다. 만일 과거로 돌아가 다시 목회를 한다면, 오직 교회를 돌보는 일에만 내 모든 것을 쏟아붓기보다는 가정에도 어느 정도 관심을 두고 목회해야겠다는 생각 이 든다. 가족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많기 때문이다. 특별히 제자사역에 더욱 관심을 쏟고 싶다. 제자사역을 더욱 지혜롭게, 더욱 집중해서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큰 결실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많다. 그 외에도 지혜로운 은퇴를 위해서 더 준비하고 기도하고 싶다.
부족한 나를 유불선 가정에서 불러내시고 오늘날까지 이끌어주시고, 지난 40여 년간 목회자로 사용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할렐루야!

 
 
 

2021년 4월호(통권 7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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