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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20년 12월호)

 

  미국교회협의회 남북한방문단 보고회
  

본문

 

사회 김소영 총무 / 통역 노정선 교수
일시 1987. 6. 29. 14:00-16:00 / 장소 기독교회관

* 이 자료는 1987년 6월 19일부터 26일까지 북한을 방문한 미국교회협의회(NCCC-USA) 대표단(총무 등 10명)이 귀국길에 서울에 와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지도자 및 통일위원회 위원들에게 보고한 것이다. 미국교회협의회 대표단은 6월 27일부터 7월 2일까지 서울에 머물렀으며, 보고회는 6월 29일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진행되었다. 7월 2일에는 통일위원회 위원들과의 간담회도 있었다.
미국교회협의회 대표단의 북한 방문은 1986년에 이어 두 번째였는데, 대표단은 이 보고회와 간담회에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지도자들 및 주체사상 연구자들과 나눈 대화, 가정교회에서의 예배 경험 등을 이야기하였다. 이 자료는 평양에 봉수교회나 장충성당이 세워지기 직전의 북한교회의 현실과 상황, 북한에 대한 미국교회의 선교적 관심을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 ‐편집자 주


브라우어[Arie Brouwer, 미국교회협의회 총무]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오게 된 것을 미국교회를 대표해서 감사드린다. 우리는 미국교회의 여러 교단의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한국 문제에 대해 오랜 경험이 있는 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남한에 와서 며칠 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며 동시에 바로 얼마 전에 북한을 방문했던 그 시간도 매우 오랫동안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1984년 도잔소에서 세계교회협의회에 의해 열렸던 모임의 연속으로서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미국교회협의회 총무로서 방문하게 되었지만 그때에는 WCC의 한 스탭으로서 그 일을 추진하였었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평화와 통일을 어떻게 이룩하는지에 대해서, 미국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연구해왔다. 미국교회협의회를 위해서 우리는 정책 초안을 작성하고 그것을 각 교단들에 배포하였다. 각 교단들과 교회협의회에서는 이 초안을 매우 조심스럽게 검토하였다. 초안은 4월에 작성되었지만 깊이 검토한 후 11월에 채택되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남북한을 동시에 방문하여 양쪽을 전체적으로 다룬다고 하는 데 강조점을 두었다. 한국에 입국하는 다소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오늘 이렇게 보고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는 북한기독교도연맹[현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평화통일위원회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그 양 기구의 대표들이 공항에서 우리를 영접하여 주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대표로는 전금철 씨가, 총회 대표로는 고 목사란 분이, 기독교도연맹 대표로는 이 목사님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기독교도연맹과는 세 차례 회의를 가졌는데 그 까닭은 그들과 접촉하는 것이 우리가 북한문제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남한에 대해서 접근할 때도 남한교회를 통하여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과 같은 점이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서로 신뢰를 회복시키고 평화적인 통일을 이룩하게 하는 것이 한반도 전체를 통한 우리들의 관심이다.
방문한 여러 국면에 대해서 몇 분이 발표하겠다. 크리비 목사께서 방문 일정에 대해서, 로체스타 박사가 여성민주동맹에 관계된 일로 탁아, 교육, 의료 사업에 관해서, 드와인 엡스 목사가 종교기관과 가정교회에 대해서, 함성국 목사가 신학교육, 가정교회,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서 본인 자신이 이산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말할 것이다.
이런 모든 일들은 한반도에 있어서 평화와 평화적인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행해지는 것이다. 발표 후에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
겠다.

크리비[William Creevy, 미국장로교 포클랜드제일교회 목사] 한국을 처음 방문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드린다. 북한 일정을 간단히 말씀드리겠다. 중공의 차이나 에어라인을 통하여 북경에서 북한으로 들어갔다. 공항에서 여러 대표들의 환영을 받았다. 토요일에는 김일성 생가를 방문하고 인류학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주체사상에 관해서 박 교수의 강의를 저녁에 들었다. 또 영화를 보았는데 전쟁시기에 관한 영화이었다. 일요일 아침에는 홍 스님의 인도로 불교연맹[조선불교도연맹]을 방문하였고 저녁 늦게 천도교 본부를 방문하였는데 우리에게 신앙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가장 중요한 우리들의 체험은 가정교회를 방문할 때였다. 평화통일위원회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강사의 어투는 웅변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것이었다.
월요일에는 평화통일을 위해 미국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안 선생을 통해서 미국의 정책선언서에 대한 평가를 들었다. 오후에는 산부인과 병동을 방문했다. 어린이공원, 주체탑을 방문한 후 저녁에 기차를 타고 개성에 갔다. 4-5시간 취침 후에 개성에 도착하였다. 화요일에는 판문점 비무장지대를 방문하였다. 우리에게는 매우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한반도를 갈라놓은 시멘트로 된 담장이 있는 그곳에 저녁 늦게 방문하였다. 개성의 기독교도를 방문하여 부의장의 인도로 5명이 보이는 가정교회를 방문하였다. 밤에 평양으로 돌아가서 여성민주연맹을 방문하였고, 인민연구소, 즉 도서관과 유치원을 방문하였다. 저녁에 진남포를 방문하여 개간사업을 하기 위한 거대한 댐 공사 현장을 보았다.
목요일에는 우리를 북한에 초청해준 사람들과 함께 사무처리를 하였다. 이것이 공식적인 마지막 모임으로서 북한의 부주석과 점심식사를 했다. 비공식적으로 식사시간, 자동차 혹은 기차여행 중에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일주일간의 일정이었다.

로체스타[Mattilyn T. Rochester, 아프리카감리교 시온교회 평신도지도자] 여성민주연맹[조선여성민주연맹]을 수요일에 방문한 보고부터 드리겠다. 우리는 미세스 오라는 이름을 가진 부의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는데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해서 이 연맹에서 얻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유치원과 유아보호소, 11년 동안의 의무교육과 자유롭게 교육받을 수 있는 제도에 관해서 들었다. 미국 돈으로 7,500불 가량의 학비가 드는 대학교육이 정부에 의해 부담되고 학생 선발은 능력에 따라 한다고 했다. 여름에는 가정들이 바캉스를 간다고 한다. 여성, 어린이, 노인을 위한 사회적 보장이 잘 되어 있으며, 세금제도가 없고, 미세스 오의 말로는 이 모든 것은 정부가 부담한다고 한다. 노인들은 노후보장 금액을 돈으로 받는다. 여성들은 병원의 혜택을 받으며 어린이는 탁아소의 혜택을 받으므로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전국에 20군데에 나누어져 있는 모자병원에서 무료로 혜택을 주고 있다고 했다. 평양에서 우리가 방문했던 병원은 약 2,000개의 병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아기를 낳으면 5일간 입원할 수 있고, 산전에 20차례 진찰을 받을 수 있으며, 산후조리가 잘 안 될 경우에는 필요에 따라서 여러 차례 더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모자병원에서는 일반적인 치료도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혹을 수술하는 것도 보았다.
2,800개의 탁아소, 15,000개의 유치원, 중학교, 국민학교, 유치원생이 도합 100만 명이 좀 넘는다고 한다.
당원이 총 200만 명인데 그중 34%가 여성당원이라고 한다. 평화와 군비축소를 위한 국제모임인 나이로비 회의에 여성이 대표로 참석하였다고 한다. 여성들은 국제적 활동에 참여하는데, 특히 국제여성민주연맹에 가입되어 있다. 여성들은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도 참석한다. 정부 조직 가운데에는 여성이 부수상직에까지 올라가 있다. 재무부장관도 여성이고 당의 서기장에 해당하는 직책에도 여성들이 포함되어 있다. 여성의 48%가 노동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있는데 지방의 농업 종사자 중 54.7%가 여성, 교육계 종사자 중 58.2%가, 공장 활동에도 여성이 활발하게 종사하여 그들이 남자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국가발전에 관한 그들의 철학에 의하면 국가는 두 개의 바퀴에 의하여 움직이는데, 하나의 바퀴는 여성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이라고 말한다. 정부가 어린이들과 여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복지시설, 병원시설을 운영해 줌으로써 여성들은 사회활동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다고 그들은 느끼고 있었다. 여성들의 활동과 당의 발전을 위해서 교육을 시키고, 교육에 동원하는 일을 여성연맹이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엡스[Dwain C. Epps, 미국교회협의회 부총무, 국제부장] 두 번째 방문이었기 때문에 기독교도연맹 사람들 중에는 낯익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은 북한에 있는 사람들과 서로 만나서 토론할 수 있었던 기회로는 세 번째이다. 왜냐하면 작년 10월 스위스 글리온에서 북한 대표들을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이런 관계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심각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공통적인 언어가 무엇인지 지금 찾고 있는 단계이다. 첫 번 우리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편안한 가운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 기뻤다. 이런 모든 과정을 통해서 성령께서 밀어주시고 끌어주신 데 대해 감사한다. 여러분들의 기도가 북한 동포들에게 들려지고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이 도와주신 대로 여러 가지 신학서적들을 그들에게 전달하였다. 또 우리 스스로 한국어 서적을 구입해서 추가로 전달하였으며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요청한 최근의 현대신학을 전달해주었다.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프로그램들에 대해서 북한 사람들이 친숙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기뻤다. 우리가 함께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단순히 통계적 자료만 교환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사고의 내용을 교환할 수 있어서 기뻤다.
평양에 있는 4개의 가정교회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우리가 첫 번째 방문했던 가정교회에 다시 한 번 갔다. 크리비 박사가 개성에서 가정교회를 방문했던 일을 이미 말했지만 평양 밖의 지역에서 우리가 교회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이 첫 번째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갈라져 있었던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 예배를 드렸던 것이 어떠했는지를 한두 마디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나는 모든 것을 신비적으로 관찰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대단히 신비적인 경험을 하였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셨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평화에 대한, 성서적 기초를 가진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스위스 글리온 모임의 목적이었다. 이 평화문제를 소개하기 위해 양측에서 한 번도 서로 의논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똑같은 성경구절을 가지고 나오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김윤식 목사의 교회에서 주일설교를 하게 되었다. 김 목사가 1, 2부에서 이미 두 번 사용했던 성경본문과 제목을 나도 그대로 사용했다. 북한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우리를 하나로 묶는, 눈에 보이는, 만질 수 있는 그런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북한에 있을 때 네 군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예배순서는 대단히 단순하고 명백한 것이었다. 예배의 부름으로 시작되었다. 개회기도, 개회찬송, 성서봉독, 설교, 기도, 찬송, 헌금, 마지막 찬송의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예배 중의 기도는 간절하고 진실된 것이었다. 사용된 본문에 대한 주해는 매우 깊었으며 근본적으로 성서적이었다. 설교는 대개 평신도 가운데 전도사 같은 분이 했고, 때로는 안수받은 목사가 설교하기도 했다. 설교는 분명하게 글로 적은 것을 가지고 했다. 그러나 이따금 원고를 떠나서 자유롭게 말을 추가해서 설교했다.
페기 빌링스[Peggi Billings, 미국감리교 세계선교국 부총무]와 그랜트[Claudia Grant, 미국제자교회 부총무] 목사와 같이 방문했던 가정교회에서는 마가 1:16-18절을 주제로 설교했다. 설교 제목은 “우리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자”였다. 설교한 전도사님은 성서를 가지고 열심히 외쳤다. 그는 선한 복음의 메시지를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점 일곱 가지를 지적했다. 그들이 예배드리는 자리 가운데서 다른 기회에 개인적으로 어떤 체험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개성에서 예배드릴 때의 경험이다. 하루 일과 전에 우리는 호텔에서 만났다. 조선기독교도연맹 개성지부의 부회장이 그 모임을 인도했다. 개성의 3개 가정교회 가운데 한국교회에서 5명의 교인이 참석했다. 우리가 방문했던 가정교회에는 대체로 9-11명이 참석했다. 개성의 가정교회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를 만나러 온 형제자매들은 눈물을 흘렸다. 매우 오랫동안 그 나라 각계에 있었던 기독교인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가 처음 만난 경험이었던 것 같았다. 우리가 이야기한 후 같이 기도했다. 찬송을 같이 부르고 사진도 같이 찍었다.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된 2-3가지 점을 말하겠다.
첫째, 기독교도연맹은 가정교회와 연결은 되어 있으나 양자가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기독교도연맹의 총무와 세 번 만났다. 우리의 공통적 관심사를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가정교회의 교인들은 개인적으로는 기독교도연맹과 관계를 갖고 있지만 가정교회 자체는 어떤 의미에서 독립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54년에 개성의 가정교회가 조직되었다. 1954년에 처음 조직했던 교인이 우리와 같이 이야기했다. 1954년 이래 계속적으로 예배를 드렸는지 우리가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받은 인상으로는 그때부터 계속해서 예배드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둘째, 가정교회의 생활이 매우 정상적이었다. 예배드릴 때 아파트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도드리고 찬송하였으므로 그 소리가 밖에서 충분히 들릴 수 있었다. 거기서는 기독교인임이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회에서 매우 요직에 있는 사람들도 가정교회에 와서 예배드렸다. 내가 가정교회에서 만난 세 사람 중의 하나는 평양수도국의 부위원장이었다. 또 한 사람은 대학교수였고, 세 번째 사람은 인쇄소의 노동자였다. 사회복지 문제를 다루는 행정기관의 중요직을 맡고 있는 여성도, 유치원 선생도 있었으며 가정에서 수공업품을 만들어 팔 수 있도록 수공업조합을 조직했던 여성도 2명 있었다. 그들 중에 교육과 중요한 직업에 있어서 거부당한 사람이 없는 것 같은 것이 우리가 경험한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상황과 다른 점이었다.
끝으로 남한에서 예배를 드렸던 공동체에서 느꼈던 것들이 여러분들의 기도를 통해서 북한에서도 같은 예배를 드리는 데에서 경험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함성국[미국연합감리교 세계선교국 아시아총무] 이번 미국교회협의회의 한 대표로 북한을 방문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먼저 기독교도연맹이 운영하는 신학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 언제 시작했는지 확실치 않지만 70년대 초에 기독교도연맹이 신학원을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방문한 교회에 강 목사가 있는데 신학원을 나와서 76년에 안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대개 70년대 초부터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신학원은 매년마다 학생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한번에 한 20명 정도 학생을 받아서 3년 동안 교육을 시켜서 졸업시키고 다시 신입생을 받아서 3년 동안 교육을 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오는 7월에 8명이 졸업을 하고 9월부터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다고 한다. 교육 과목은 대개 여기하고 비슷하다. 성서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 교회사 등. 가르치는 분은 대개 연맹에 속한 분들이다.
저희가 4군데 가정교회에 가서 들은 바를 종합하여 얻은 결론에 의하면, 그곳의 목사들의 설교가 질적으로 상당히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 설교는 당장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하여도 조금도 손상될 것이 없는 것으로, 정치적 냄새가 조금도 없는 것이었다. 슐츠 주교와 같이 당에 가서 보았는데 미국연합장로교회에서 현재 시무하는 이승만 목사와 제가 1940년대 말에 함께 평양 성화신학교에 다닐 때 동창이었던 오사문 씨가 바로 제가 참석한 가정교회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오사문 씨는 나의 20대의 친구로서, 신학교 동창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 확실히 여러분들께 확인해드린다. 바로 그분의 아파트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남편도 역시 기독교인이며 미술대학의 부교수로서 활동을 하는데 그날은 학생들과 같이 스케치를 하러 나갔기 때문에 교회에 불참했다고 하였다. 우리가 참석한 교회에서 부른 찬송을, 녹음을 잠시 들려 드리겠다. “눈을 들어 산을 보니”, 그 찬송이다. 엡스 목사가 함께 예배드리던 자리에서 저희들에게 기도하라는 부탁을 받고 기도를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중국교회에서도 허락되지 않는 사례이다. 이것이 평양에서 지난주에 일어난 일이다.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서 말하겠다. 나는 1950년 12월 4일에 평양에서 피난을 내려왔다. 내가 떠날 때 6살이 된 누이동생과 아버님을 평양에 두고 내려왔다. 나는 평양 사람으로서 37년 만에 방문하였다. 나는 동생을 언제 만날 수 있을까 매우 애타게 기다렸다. 금요일 평양에 도착 후 월요일 오후까지 만나지 못하다가 월요일 오후 5시 반에 누이동생과 매부와 세 조카와 같이 호텔로 찾아와서 만났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후에 얘기 들었지만 아버지는 58년에 세상을 떠나시고,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기 때문에 누이는 고아의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고아로 자라서 이제 43세가 된 누이동생을 만났을 때 오빠로서 감개무량했다.(이때 한동안 함 목사는 눈물이 복받쳐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누이동생을 통해 들은 말이지만 우리가 1950년 12월 4일에 평양을 떠났을 때는 평양이 그렇게 많이 파괴되지 않았는데 우리가 떠난 후 폭격이 아주 심해서 다 파괴되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나의 친척들도 많이 죽었다.
나의 가족이 평양에서 15리 떨어진 역포에서 살았는데–나의 누이는 지금도 역포에서 살고 있다–어떤 날에는 100명씩 폭격에 의해 죽어서 그때 피난가던 사람들은 모두 폭격에 의해 죽었으리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누이동생은 역포협동농업단지에서 유치원과 탁아원 선생을 하고 매부 된 사람은 농장 전체에 물을 공급하는 기술자이고, 맏아들은 트랙터 조립하는 기술자로, 맏딸은 농협 사무실에서 일을 하며, 막내딸은 중3이라고 한다.
월요일 5시 반부터 호텔에서 식사를 함께하며 5시간 정도 함께 이야기를 하고 10시쯤 그들은 돌아갔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 단장이 북한 사람들에게 계속 요구한 것은 내가 꼭 동생 집에 한 번 가볼 것을 주장했다. 그랬더니 다시 올 것이니 좀 생각해보자고 하더니 목요일 3시쯤 제 동생과 가족이 와서 저희 단원들과 함께 서커스를 구경하고 호텔에 와서 저녁을 먹고 내가 가져갔던 선물도 주고 그날 저녁에 다시 돌아갔다가 내가 떠나던 날인 금요일에 다시 와서 비행장까지 같이 갔다.
37년 만에 고향에 찾아가서 동생을 만나고 친구를 만났을 때 나는 한 사람이지만 천만이라는 이산가족을 생각하면서, 이산가족찾기운동이 국가적 차원에서 보나 종교단체의 입장에서 보나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앞으로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사실 이번 미국교회협의회가 가서 하려고 했던 일은 우리 교포 이산가족들을 도와서 그들이 이북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확인하고 가서 방문할 수 있는 길을 열어보려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점을 많이 취급했는데 이산가족 문제는 이번에는 별 진전이 없었다. 한 가지 이유는 가족찾기 문제는 평화통일위원회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해외교포원조위원회에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들 말에 의하면 수천 명의 캐나다 교포들이 북한을 방문했으며, 당시 방문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았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 교회가 그 위원회와 연결을 해서 작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보고를 마치기 전에 몇 가지 첨언하고자 한다. 우리가 며칠 동안 북한을 방문하고 이 자리에 선 것은 북한에 무엇이 있는지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만났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깊은 감동을 서로 나누는 시간들을 가졌다는 말은 이미 했다. 북한에 있는 형제들이 여러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고, 여러분 또한 기도 속에서 북한에 있는 형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 자리에 섰다. 남북한이 서로 갈라진 것에 대한 미국 정부의 역할이 무엇인가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북한에서 본 것을 충실히 전하고 또한 남한에서 본 것을 충실히 전하는 증거자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본국에 돌아가서 남한과 북한에서 본 것과 받은 사랑을 전하고자 한다. 우리가 이 일을 하고자 할 때 여러분께서 기도해주시기를 바란다.

질문 첫째, 북한에서 가정교회를 보았는데 기성교회를 본 적이 있는가? 둘째, 여러분이 본 가정교회의 교인 수는 9-11명 정도로 전부 비슷한데, 북한에 종교자유가 있다면 어째서 그 수가 비슷한지?

답변 기성교회를 보았는가라는 의미를 교회 건물을 보았는가라는 질문으로 알고 답변하겠다. 북한에는 전쟁에 의해 모든 건물이 파괴된 후로 교회 건물은 거의 없으며 직접 우리가 본 것은 없다. 우리도 왜 교회 건물이 없느냐고 질문했더니, 건물을 짓자는 제안이 있었는데 거절했다고 한다. 그 까닭은 가정 단위로 모이는 교회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큰 교회가 필요없다고 한다.
또한 기독교인의 숫자가 아직 대단히 적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때로는 일 년에 두세 번 몇몇 가정교회가 함께 모여서 연합예배를 드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파트 내에서 모일 수 있는 작은 교회이기 때문에 건물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성찬식을 행할 때, 크리스마스 예배 때 같은 때에만 안수받은 목사가 예배를 인도한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단순히 보고했을 뿐이다.

 
 
 

2020년 12월호(통권 7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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