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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나의 목회 수기]
교회와현장 (2020년 12월호)

 

  이해할 수 없는 인생, 그리고 마무리
  

본문

 

예언자는 선택되지만, 목사는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학위를 가진 목사, 그중에서도 유학파 목사가 인기를 독점하는 것 같다. 만들기의 대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그가 만드는 물건일 것이다. 어떤 이는 목사의 이름으로 존경을 받으며 교회를 짓는가 하면, 어떤 이는 저런 게 목사냐며 빈축을 사면서도 세상을 붙들고 피를 흘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선망의 눈망울로 전자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후자에 더 가까운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의 보편적인 지도자도 아닌 내가 어떻게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게 기적일 것이다.

전혀 주목받을 일 없는 아이

내 머리에 남아 있는 최초의 기억은 두 살 때이다. 아들이 없는 작은집에 양자로 갔다가 울며불며 돌아왔던 기억, 다섯 살 때 6・25가 발발해 대마밭에 숨은 일과 사람이 죽고 죽이는 걸 본 기억, 형과 동생과 함께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다. 그 후 도시로 이사를 하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다. 교회를 다닌 것은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 모든 일이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갔으니까.
주님의 영이 강력하게 임재하신 것은 중학교 다닐 때였다. 그동안 성경책도 없이 교회에 다니다가 성경전서를 구입하게 되었고,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세오경을 넘어가자마자 이해가 빨라지더니 몸이 뜨거워지고, 눈물 콧물이 쏟아지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는 몸이 가벼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일어나 펄쩍펄쩍 뛰면서 회개의 기도가 쏟아졌다. 듣도 보도 못한 황홀경이었다.
그 뒤로 교회에서는 어린 내게 구역 인도를 맡기고, 어린이부 교사를 맡기고, 성가대를 맡기기까지 했다. 나는 교회 절기 장식과 청소를 도맡아 했다. 큰 기쁨이었다. 중학생일 때 학생회 회칙과 입회원서를 만들고 회비를 정하여 중고등부 학생회를 꾸린 뒤 선배를 전도하여 회장을 맡기고, 섬기는 일을 계속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고등부 김제지부를 조직하여 지역의 한계를 뛰어넘어 에큐메니컬 기독학생회 동아리 학생운동에 눈을 뜨게도 되었다. 심지어 천주교 신부님이 사람을 보내 이후 모든 공부와 유학을 책임지겠다며 개종을 유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학교는 학교대로 나에게 대표나 학급 반장을 계속 맡겼다. 도서관과 과학관 열쇠를 맡겼으며, 학교의 도움을 받지 않고 교지 창간호를 내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쉽게, 그리고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영이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영이 나를 교회주의자로 만들지 않고 세상과 인간에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진보적인 속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입대하기 전까지 줄곧 섬긴 교회는 김제에 있는 신풍교회였다. 목사님은 학생회에 지원금을 주거나 지도자를 배치하는 대신 가끔 성경공부를 맡아주셨다. 목사님의 가르침은 성서가 말하는 지엽적인 내용이 아니라 성서의 언어를 풀어가면서 성서가 표방하는 세상에 눈을 뜨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학생회 연합활동을 같이했던 친구가 제대한 내게 한신대학교 입학원서를 들고 와 강제로 수속을 밟아주었다. 어쩔 수 없이 시험을 본 것이 합격으로 이어져 친구 따라 강남 간 꼴이 되었지만, 대학은 졸업 이후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며, 공인이 되는 길이기에 신중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시골 김제에서 도시 서울로 진입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가능성이었지만, 별천지는 아니었다.

민주화운동에 가슴이 뛰고

농부의 자식이 땅이 아니라 세상에 저항의 눈길을 주게 된 데에는 1960년에 있은 3・15부정선거가 단초를 제공하면서부터다. 3인 1조로 투표를 마치고 오신 아버지와 형님은 안방에서 부정선거에 대해 분노하고 계셨다. 마루에 올라서려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기도하면 될 텐데 하면서도, 왜 그런 투표를 거부하지 않았느냐는 원망이 들었다. 중학생인 내게는 혁명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는 그 후 내 인생을 계속 지배하고 있었다.
1965년에 한일협정이 체결될 무렵, 고등학생이었을 때의 일이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이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진행하면서 굴욕적인 한일청구권 협약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를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교회 대표와 연합회 대표를 우리 집으로 불러 거부 시위를 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곧바로 시내 각 학교의 대표를 만나 3・1운동과도 같은 이 의거에 협력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노출되어 바로 가택수색이 이루어지고 나는 경찰서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으로 학교는 쑥대밭이 되었다. 선생님들이 좌천되거나 해고되면서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죄인이 되고 말았다. 나 때문에 학교가 망했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야만 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바로 군대에 갔고, 제대 후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여기에서도 나의 저항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학장이 학교 대지를 팔아 수익성 있는 사업을 한다고 해서 대립하고 있었다. 저지 운동이 격화되어 학장실을 부수고 들어가자 학장이 창문으로 도망치는 촌극이 펼쳐졌다. 결국 이 일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된 학내 민주화운동이 되고 말았다. 서대문구치소에서 구속적부심사를 받을 때, 재판장이 우리를 불러 세우더니 “자네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자의 길을 가겠다는 학생들인데, 스승 하나도 사랑하지 못해서 되겠는가?”라고 정중히 꾸짖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원수는 사랑해도 죄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재판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보내주었다.
1971년 10월에 위수령 사건이 있었다. 대학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자, 정부는 각 대학으로 하여금 문제 학생을 제적하고 교문을 닫게 했다. 한신대학 역시 학생은 제명했지만, 문을 닫지는 않았다. 이를 보다 못한 나는 친구와 함께 수업거부투쟁에 들어갔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불의한 힘에 의해 공부를 할 수 없게 된 그 학생들은, 우리가 목사일 때 우리의 설교를 듣는 평신도일 텐데, 만약 저들이 그때 당신들은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때 우리는 뭐라고 설교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이럴 때는 스스로 학교 문을 닫고 그들을 위로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신학교가 아니겠냐고 우겼다. 그때 학장이 찾아와 ‘나는 스스로 땅을 파고 들어갈 만큼 잘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남겼다.
결국 우리는 학점 미달로 제적당했지만, 이 판을 키울 필요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다. 위수령으로 학교를 가지 못하는 대학생들을 모아 내가 섬기던 명륜동 창현교회에서 대학교수들을 모시고 강의를 했다. 강의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몰려와 열기가 대단했다. 독재정권에 정면으로 맞서는 대학교가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일은 하나님의 계시였다고 생각한다. 그 일 후로 36년이 지나자 국가는 나를 졸업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나는 명예졸업생이 되었다. 참으로 먼 길을 돌아온 것이다. 명예뿐인 그 길을.
1974년 1월 8일 오후 5시에 발효되는 긴급조치 1호가 발령되었다. 유신헌법 반대나 개정을 거론하는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속, 구금할 수 있게 되었다. 긴급조치 2호는 위반자들을 군사법정에서 심판하고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분개하는 친구들이 바로 찾아왔다. 흔쾌히 거사를 동조하면서 성명서에 국민 정서를 거스르지 않는 진실을 담자고 모의했다.
1월 17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실에서 33명이 모이기로 했으나, 막상 모인 것은 6명이었다. 15년의 징역과 고문, 그리고 실직이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동대문경찰서를 거쳐 남산 정보부 지하실로 잡혀갔다. 지금도 그때의 일은 기억하기 싫은 일 중 하나이다. 놀라운 것은 서대문과 안양에 있을 때 서울대 의대생이나 연세대 의대생 등 많은 학생들이 들어왔는데, 이들은 내가 먼저 치고 나가는 용기를 보여주어 고맙다면서 깍듯이 존경을 표했다. 혈맹의 기분이 들었다.
1980년 5월 역시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전두환을 위시한 정치군인들이 정권에 야욕을 갖고 백성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오히려 대규모 작전으로 시민을 학살했다. 깨어 있는 백성이 조직화되지 못한 허점을 이들이 파고든 것이다. 아무리 조직적이고 무자비하다고 해도 불의한 힘은 새 나가기 마련인지, 광주의 학살 소식은 내게도 바로 전해졌다.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서울 미아리의 한빛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인데, 결혼을 축하한다고 찾아온 대학생들에게 다짜고짜 지금 이러고 다닐 때냐고 나무랐다. 진심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바로 몰려나갔다. 나가자마자 사람을 모으고,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고 다녔다.
당연히 나는 배후 조종자가 되어 다시 끌려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친다. 수경사로 조서를 받으러 다닐 때마다 군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들이 왜 이러고 다니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라면서 모욕하고, 폭행을 서슴지 않았다. 국가의 질서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혼란과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 답답했다. 주님도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

교회는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운동의 터전

신학교를 졸업하고 10년이 넘도록 전도사로 살았다. 그런데도 그때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나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 목사가 되는 통과의례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기성 교회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개척을 하느냐를 놓고 함께 살았던 창현교회와 한빛교회 청년들과 상의를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기성 교회의 틀을 벗어나 21세기에 필요한 새로운 교회를 주문했다.
그래서 찾아나섰다. 수도권에서 가장 열악한 지역이라는 청계천과 답십리, 안양천변과 정릉 골짜기를 뒤졌다. 그런데 이런 곳은 가난하기는 해도 자신을 지켜낼 의지가 강렬하다는 것을 알았다. 위기를 극복하고 상황을 유리하게 선택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가진 것이다. 그러다 의정부를 답사했다. 주님은 죽음의 도시처럼 보이는 그곳에 계셨다. 역사적으로도 3・1운동 의거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도시답게 사람들은 무언가에 짓눌린 듯했다. 미군부대가 도처에 깔린 도시, 공권력이 범죄를 저질러도 속수무책인 도시였다.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접어버리는 희망이 없는 동네였다. 더는 다른 곳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의정부에서도 가장 낙후된 곳을 찾아 서울에서 전세금을 빼고 결혼반지를 팔아 건물을 임대하고 십자가를 세웠다. 역사 발전의 기반이 되고 주체가 되어 어둠을 깨우는 자가 되라는 마가복음의 오클로스 신학을 명분으로 ‘무리교회’라고 이름을 짓고 예배를 드렸다.
놀랍게도 창립예배를 드리는 날부터 그 지역의 교회로부터 공격이 들어왔다. 무리교회는 이단이라고, 거기 목사는 운동권이고 빨갱이며 간첩이라는 등의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래도 나는 대응하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해야 할 일들을 찾으면서 전도를 했다.
그러자 이제는 모함이 박해로 바뀌었다. 4년의 세월이 지나자 건물주는 압력을 견딜 수 없다면서 건물을 비워달라고 했다. 반정부적인 교회는 용납돼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인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가 시민사회의 의식화운동을 전개하면서 의정부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정치적인 시위를 한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박해는 전방위적이었다. 교인들의 사업을 트집 잡아 지역 밖으로 몰아내고, 공무원들은 지방으로 발령을 내는가 하면, 직장에 압력을 행사하여 책상을 빼는 등 교인들에게 비인간적인 처사를 내리며 교회를 박해했다. 게다가 동장은 목사의 월간 동향보고서를 썼노라고 고백하고 이민을 가버리는가 하면,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집에 정보원이 들어와 상주한다거나, 도청과 미행이 감지되는 등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지하 창고에 있는 도서와 서류를 쓸어가고, 주민들이 이유 없이 폭언을 행사하기도 했다. 산 밑에 작은 교회당 하나를 매입해 두었는데, 그것마저 공시지가로 빼앗아가고 말았다.
1990년에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에 대해 폭로했다. 개인 카드 번호 545번에는 내 이름과 함께 아래와 같은 사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74. 1. 17. 동료 목사 5명과 함께 개헌 반대 서명 청원운동 기도회 개최 및 선언문 낭독 등 반정부 활동 / 80. 5. 18.-83. 5. 23. 서울 도봉구 소재 한빛교회 목사로 재직하면서 대학생부 신자들을 교사, 광주사태 관련 전현직 국가원수 모독 유발 궐기문을 제작 배포토록 배후조종하는 등 반정부 활동 / 87. 7. 19. 의정부시 가능1동 소재 신촌교회에서 결성된 의정부 인권선교위원회에 가입(위원장 최창수 목사) 총무직을 수행코 있는 자로 / 87. 9. 21. 서울 종암교회 목사 김윤식(KNCC 증경회장)을 초청, 동 교회에서 지역 내 재야 문제 인물 및 신도 등 120여 명 참석하에 “인권과 민주화”란 제하에 현정부 비방 강연을 실시한 바 있고 / 87. 8. 29. 경기북부 민통련(의장 장영달) 창립대회 시 발기인 및 운영위원으로 참여, 동 조직의 활동을 배후에서 지원해 왔음 / 87년도 대선 시인 / 87. 12. 5.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의정부시 지부 감사단 공동대표로 재야활동 참여 / 89. 3. 28. 개최된 경기북부 전민련(김용화) 대의원으로 배후에서 음성적인 지원활동 중 / 의정부역 서부광장에서 회원 및 근로자 학생 200여 명 참석리에 의정부민련 “창립대회 및 가요제” 개최 / 목사직을 겸임하면서 12대 및 13대 국선 시 인권운동 및 각종 문제단체 요원들과 대정부 투쟁 활동 주도 / 지역 내 각종 민권운동을 전개하는 관계로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무리교회 교인 수가 150여 명에서 50여 명으로 감소됨에 따라 표면적인 활동은 하지 않고 교회 일에만 열중.

이런 정보를 어떻게 수집하였는지 모르지만,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간첩단사건 하나쯤 엮어낼 수 있는 치밀함이 엿보인다. 분명히 경기북부 간첩단사건으로 언론을 장식할 만한 것을 준비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나의 사회참여는 독일의 본회퍼 목사와 마찬가지로 불의한 정권에 대한 신앙고백이었지 개인의 영달을 위한 행위는 결코 아니었기에 엮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목사는 양들이 다치는 상황에서는 물론 앞장을 서야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교회가 깨어 있는 힘, 조직된 힘으로 언제든지 쓰일 준비를 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국가의 정상적인 조직에 들어가 주어진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구약성서 사사기가 제시하는 국가의 위기대처 방법론에서 배우면 될 것이다. 국가기구에서 봉사하는 모든 구성원은 특권과 대가 등에서 군살을 과감하게 빼고 공공재의 정신을 갖고 그 역할을 하면 된다.
한국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며 전도와 나눔과 섬김을 강조하고 제법 큰 공동체를 이루어냈다. 그 100년은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조직된 힘이 비축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런데 모든 것이 인사에만 집중되어 있는 기독교의 힘을 어떻게 자료화하고 역사로 기록되게 하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올바른 것이 바로 좋은 것이라는 행정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인적 교류, 물질적인 연대, 사업의 교류 협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내가 속한 교단 내의 경기북노회, 서울북노회, 서울노회를 하나로 묶는 3개 노회연합회를 만들었다. 거기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 이야기는 통일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만큼 여유와 자유를 나누며 살았던 때도 없었다. 일치와 협력의 큰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래는 교회를 창립하여 섬기면서 한 주도 빠지지 않고 36년 동안 드린 공동기도문 중 하나이다.

하나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살고 싶은 사람이나
불타는 가을 단풍처럼 살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내게 있는 부족함이나 연약한 것을 원망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펼쳐 나가는 놀라움에 이끌리면서도
자신이 되어주시는 어떤 힘에 감격하고 놀라면서
영원을 내어다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를 해방시키신 분,
정복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시는 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까지 개혁하시는 분,
하늘 아래 누구라도 똑같은 죽음으로 불러가시는 분,
오늘은 그 하나님을 겁없이 외쳐 부르고 싶습니다.
전쟁을 거두어들이신 것처럼
낙원을 파헤치는 더러운 욕망을 거두어주시라고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무리할 수 없는 일, 배움

서대문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읽은 책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영국의 한 사회운동가가 어려서부터 남몰래 해온 자선봉사 활동으로 인정을 받았고, 그가 펼친 운동이 모범적인 사업으로 정착되었을 때 정작 그는 자신이 주도한 사업에서 배제되었다. 학위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0.75평 독방에서 날이면 날마다 벽을 보고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각 사람이 가진 선한 뜻이 사회의 제도로 녹아들지 못하는 일이 실제로 발생한다. 나 역시 빈민운동에서 경험한 일이다.
사람은 일하기 위해서 배워야 하지만, 더 큰 세상을 엮어내기 위해서도 끝없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를 모색하다가 방송통신대학에 눈을 떴다. 이 학교는 졸업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닐뿐더러 졸업 후 얼마든지 다른 과에 입학이나 편입이 가능하며, 국립대학으로서 학비가 저렴한 것은 물론 교재와 교수진도 좋다. 정해진 출석수업에 따라 스스로 공부하면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 된다. 게으른 학생의 영원한 공부로는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입학했다. 불경과 논어와 성서가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가 지나고 법이 중심이 된 세상이기에 먼저 법학과에 입학했다. 법철학에 눈을 뜨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졸업을 하자마자 국문과에 들어갔다. 내 나라와 우리 민족의 유산을 읽어낼 수 있다면 그만큼 더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졸업 후 다시 문화교양학과에 입학했다. 한반도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보편적이고 특수한 문화와 역사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이 되자 가슴이 넓어지고 자신감이 생겼다.
문화교양학과까지 졸업을 했지만,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고 싶은 마음에 다시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한 인간의 생존에서부터 지구촌의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알면 마음 놓고 현실에 대처할 힘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속셈을 본 것 같다. 졸업 후 이번에는 농학과에 입학원서를 냈다. 햇빛과 거름과 물로 만들어지는 먹을거리의 소중함과 세계의 식량 전쟁이 보였다. 그리고 1차 산업의 문제는 한 국가가 아니라 유엔이 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는 먹을거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은 미디어영상학과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다. 현재 지구촌을 달구는 것은 미디어와 영상의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독재자는 언론을 손에 쥐어야 한다는 말도 옛말이다. 미디어와 영상이 재주를 부리고, 그에 따라 세상은 요동을 치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행복과 불행을 증폭시킬 힘이 무한하게 잠재되어 있음을 실감한다. 예를 들자면, 얼마 전에 교통사고가 있었는데 버스회사가 덮어씌우기를 하는가 하면, 경찰도 기업의 편을 드는 것이다.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해결책으로 정보공개청구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검증을 했다. 위조된 영상이었다. 이를 토대로 회사와 경찰을 징계하는 문제를 놓고 목사의 인격이 가슴앓이를 하는 중이다.

목회는 내게 참된 행복이었다

나에게 다시 인생이 주어진다면 역시 목회를 하는 목사가 될 것 같다. 그것은 목사가 가장 포괄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 열린 공간에 근접해 있으며, 가장 숭고한 사랑이나 이상을 실천할 수 있는 사명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회개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로부터 끝없이 요청을 받는 좌표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경쟁이라는 발전 요인에 길들여지면서 이웃이 없는 경쟁체제에 돌입한 지 오래다. 태풍전야와 같은 살벌한 고립에 처해 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버티는 것뿐이다. 무한경쟁이 목적과 방법이 되어 이웃을 잃어버린 결과일 것이다. 이 죽음의 무대를 바꾸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유능한 조력자가 필요할 것이다. 유능한 조력자란 인간의 체온을 잃지 않는 자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얼마 전에는 국가에서 민주화운동 배상금이 나와서 그것을 예배 중에 내가 섬기던 교회의 모든 교인에게 현금으로 나누어주고 기도해주었다. 담임목사님과 상의하지 않고 갑작스레 한 일이지만, 코로나19 상황에서 만나를 먹는 신앙을 모두가 공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모든 삶에 관심하면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발버둥치는 목사로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은 분명 멋진 인생일 것이다.
예언자적인 삶을 추구하며 한평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조용하셨고 그 침묵은 죽음보다 싫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라를 통하여 국가유공자라는 이름을 주시더라. 어찌 침묵하셨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를 따르던 자들이 투옥을 당하고, 부모 형제가 해직이라는 불이익을 당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뼈를 깎는 아픔은 어찌한단 말인가?
내가 책임을 지지 못하고 바라만 보아야 했던 저주의 시간이 끝없이 나를 괴롭힌다. 나는 이 세월을 얼마나 더 살아야 할지 그것이 문제다.


박윤수 |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이다. 1971년 한신대학에 입학한 후, 독재정권 시절에 민주화운동으로 제적을 당했고, 이후 두 번의 투옥을 겪었다. 민주화운동 관련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뒤인 2008년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창현교회와 한빛교회 부교역자를 거쳐 의정부에 무리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한 후 은퇴하였다.

 
 
 

2020년 12월호(통권 7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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