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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20년 10월호)

 

  한반도통일문제협의회 개회 설교: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창세기 33:1-7)
  

본문

 

* 이 글은 1986년 8월 당시 한국기독교장로회 광주 무진교회의 강신석 목사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위원회와 국제위원회가 주최한 ‘한반도통일문제협의회’(1986년 8월 25-26일, 인천송도비치호텔)에서 한 개회 설교의 전문이다. 이 설교에서 강신석 목사는 “적어도 일제에서 해방되던 1945년을 기준으로 한다고 보면,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성서적으로는 희년에 해당하는 1995년에는 우리 한국교회가, 한국민족이 희년으로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해나갈 것을 촉구하였다. 1988년 11월 2차 글리온회의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표들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대표들의 동의를 얻어 1995년을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희년으로 정했는데, 이것은 강신석 목사의 설교에 호응한 결의로 보인다.‐편집자 주


야곱이 가족과 형과 헤어진 지 20여 년이 지났읍니다. 그 20여 년 동안 수천리 타향에서 갖은 수모와 역경을 겪으면서 살아갔었읍니다. 어쩌면 그는 모든 수모와 역경을 겪으면서도 일구월심 다시 고향에 돌아가서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보리라고 하는 한 가닥 희망으로 살아갔는지도 모릅니다. 고향에 다시 돌아가서 그리운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이 그의 삶을 지탱해 왔고 그 많은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그 마음을 붙들어 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타향에서 결혼을 했고, 열한 아들을 얻었고, 많은 종들과 재산들을 모으기도 했었읍니다. 이제 드디어 그는 많은 가족들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있었읍니다. 그리고 얍복강만 건너면 고향이 눈앞에 보이는 장소에까지 이르렀읍니다. 그 얍복강만 건너면 그리운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그는 마음이 두근거렸읍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떻게 형을 다시 만날 것인가라는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읍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에 이렇게 생각을 했읍니다. ‘형님이 아직 나를 미워하여 나를 칠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에 대비하여 계획을 세우자.’ 그래서 그는 먼저 많은 선물을 형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읍니다. 그 다음으로 종들과 종들에게서 난 자식들을 앞세우고, 그 뒤를 레아와 레아에게서 난 자식들이 따르게 하고, 그 뒤를 라헬과 요셉이 따르게 하고, 맨 마지막으로 자신이 형을 만나기로 작정한 후 얍복 나루에서 하루밤을 보내게 되었읍니다. 그는 돌을 베개 삼아 누워서도 형을 다시 만나는 장면을 상상해보며 갖은 상념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앞에 건장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와 씨름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마지막 시련의 모습이었읍니다. 그는 밤을 새워가면서 씨름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환도뼈를 쳐서 그 건장한 사람을 쓰러뜨립니다. 또 그 사람을 끝까지 붙들고 당신이 나를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라고 사정합니다. 이것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마지막 시련의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야곱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적인 방법들을 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얻기 위해서 14년간이나 고생을 했던 모습이라든지, 자기 재산을 늘이기 위해서 양을 교접하는 과정에서 잔꾀를 부리는 모습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야곱은 자기의 방법으로 삶을 살아가 보려고 무던히 애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얍복강을 건너기에 앞서 그에게 커다란 시련을 주십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네가 살아온 방법으로는 네 형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한 시련이었읍니다. 이제 야곱 앞에 한 건장한 사람이 앞을 가로막고 서서 네가 지금까지 간직해온 인간적인 모든 찌꺼기들을 버리지 않는 한 그리운 고향을, 그리운 가족을 만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방법들, 인간적인 계산과 방법들을 털어 버리고 새로운 마음, 새로운 심정으로 거듭나야 그리운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깨우쳐 줍니다. 지금까지 20년 동안 인간적인 지혜, 수단과 계교로 살아온 야곱, 그에게 하나님은 이처럼 마지막 시련을 안겨주십니다. 물질을 많이 가지면, 재산을 많이 가지고 많은 종들과 사람들을 몰고 가면 형을 압도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만 가지고는 얍복강을 건널 수 없다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참으로 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지혜에 따라 살지 않고는 형을 만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주신 시련의 교훈인 것입니다. 드디어 야곱은 그 하나님에게 항복하고 해가 뜨는 다음 날 형을 만나러 얍복강을 건너게 됩니다. 그리고 20년 만에 지금까지 품고 있던 걱정과 근심과 계교를 넘어서서 가슴과 가슴을 마주대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고 야곱은 형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1945년 해방을 맞은 이후 이내 분단의 고통을 맛보았고, 그 고통은 41년 동안 계속되었읍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면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형과 아우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부모와 자식이 다시 얼굴을 대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고심하는 간절한 심정, 찢어진 심정으로 이 자리에 모였읍니다. 우리는 40여 년 동안 외쳐 왔읍니다. 우리는 다시 만나야 된다고. 5천 년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염원과 한을 가슴에 품고 우리는 지금껏 살아 왔었읍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과 북은 입으로는 만나야 된다고 외치면서도 참으로 만날 준비는 하나도 하지 못한 채 살아온 것 또한 사실입니다. 양쪽 다 외세를 등에 업고 군대를 양성하기에 여념이 없었읍니다. 또 무기를 증강하기에 여념이 없었읍니다. 한쪽에서는 민방위대와 예비군을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노농적위대를 만들어서 전쟁을 연습하기에 여념이 없어 왔읍니다. 서로를 비방하고 간첩을 파송하고 교란작전을 펴 왔읍니다. 한쪽에서 북진통일을 이야기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혁명통일을 이야기하고 남조선 해방전선을 운운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과 북은 독재체제를 강화하면서 민중들을 억압했고, 그 결과 백성들은 고난에 허덕이게 된 것이 오늘의 남과 북의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40년을 살다 보니 우리는 5천 년의 역사를 공유해 온 민족답지 않게 서로 다른 문화를 갖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서글픔을 넘어서서 정말 큰일났구나 하는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읍니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적인 방법, 힘의 논리에 따라, 자기 계교에 따라, 자기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작전에 따라 서로를 욕하면서 서로를 지탱해 왔읍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오늘에는 남과 북의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시점에 이르러 있읍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만나야 된다, 그 만남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과 북은 각기 외세를 의지하고 남북통일을 이야기했었읍니다. 그러나 이제는 외세가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 형과 아우가, 가슴과 가슴이 통하는 가족들이 함께 의논하고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통일의 의지를 쌓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이 땅에서 핵무기를 철수해야 하고 군축회담을 속히 이루어 가야 합니다. 또 세 번째로는 전쟁을 하는 연습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 간에 전쟁연습하는 것을 그만 그쳐야 합니다. 네 번째로 상호비방과 중상모략을 중지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로 남과 북이 지금까지 해온 전쟁교육을 중지하고 평화교육을 실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남의 문화, 분단을 극복하는 만남의 문화를 창출해 가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새 언어까지도 달라진 비극을 체험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5천 년을 이어온 공동의 문화가 있읍니다. 우리는 다시 우리의 감정, 우리의 정서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서로 만나야 합니다. 민족의 감정, 민족의 정서 속에서 서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목을 얼싸안고 기쁨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감격을 위해서 준비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어도 일제에서 해방되던 1945년을 기준으로 한다고 보면,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성서적으로는 희년에 해당하는 1995년에는 우리 한국교회가, 한국 민족이 희년으로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우리는 해 나아가야 합니다. 1995년에 희년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 위한 계획성 있는 준비를 우리 교회는 해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계획들을 체계 있게 진행시켜 나아가야 할 의무와 책임이 한국의 교회들에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NCC의 통일위원회의 사명은 지대하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그리고 이번의 한반도통일문제협의회를 통해서 참다운 통일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 그것을 책임성 있게 진행해 나아가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기어이 다시 만나야 하고, 같이 살아야 합니다. 못났어도, 가난해도, 가진 것 없어도, 서로 돕고 사랑해 온 5천 년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힘 주시고 능력으로 역사해 주실 것을 기원합니다. 기도합시다.

(기도) 40년을 넘는 분단의 비극의 역사 속에서 이제까지 우리는 남과 북이 서로 갈리어 힘을 겨루며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아왔었읍니다. 그러나 이제 이 협의회가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 하나님의 방법을 수용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 거기에서 말씀하시는, 함께 사는 방법을 다시 한 번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통일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민족의 역사에 관여해 주시기를 기원하는 기도의 모임이 될 수 있도록 함께해 주시옵소서. 굽어 살피사 우리의 충정을 보시사 이 땅에 통일을 허락해 주시고, 이를 위해서 부름받은 사명을 한국의 교회가 감당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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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의 대화 <개회사> _ 이화선 목사
* 이 글은 6・25전쟁 이후 첫 통일대화 모임인 “제1차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의 대화”에서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회장 이화선 목사가 한 개회사이다. 1981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비엔나 교외 하더스도르프의 슈바이처하우스에서 열린 이 대화에는 해외에 거주하면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남한 출신 기독교인들, 이북의 통일 부서에 속한 정치인들과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지도자들이 참석하였다.
이 개회사에서 이화선은 여섯 가지 통일 방해 세력을 언급하는데 “가장 통일을 주장하고 노력하면서도 통일을 저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남북의 양 정부요 당국자들”이 그중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북한 정부도 통일 방해 세력이라는 이 주장은 그날 밤 북측 대표단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로 표시했으며, 편집자의 첨언은 대괄호[ ] 안에 표시하였다.‐편집자 주


친애하는 이북동포 여러분과 해외교포 여러분
1. 오늘 우리는 36년간이라는 긴 조국분단 역사에 있어서 한 역사적인 전환점에 서 있읍니다. 막연하다고만 생각했던 조국통일의 길이 바로 우리 눈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더 이상 조국통일의 필요성이나 가능성 여부에 대하여 토론할 것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열려진 통일의 길을 일로매진해야 할 처지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앞에는 통일을 방해하는 세력과 요소들이 있어서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고 산적해 있는 그 방해세력과 요소들을 제거하고 통일의 길을 평탄하게 하는 선구자적인 작업을 아직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국내 국제적인 정치판도에 있어서, 개인과 집단적인 이해관계에 있어서, 물적과 인간적인 상관관계에 있어서, 외적과 내적인 경화상태에 있어서, 조국재통일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통일을 반대하면서가 아니라 통일을 찬성하고 ‘통일은 민족의 숙원이요 민족 전체의 지상과업이라’고 주장하면서 직접 간접으로 통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이번에 새롭게 경험했읍니다. 그들은 통일의 이유와 근거, 필요성, 긴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도대체 통일이 가능하느냐’고 묻는 가운데서 통일이 아니라 재통일 불가능을 주장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지적한 것과 같습니다. 즉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놓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갈려는 사람도 못 들어가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통일의 문을 닫아 놓고 자신뿐 아니라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는 그와 같은 회의론자와 소극적인 사람들을 삼가야 합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나 사상, 이념에 있어서 조국분단과 밀접한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직접 큰 이해관계는 없으나 음과 양으로 □□□ □□□ □□을 알고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 직접적으로 이해관계를 갖는 경우와 간접적으로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와를 나누어서 전자와는 대결을, 후자와는 연대관계를 발휘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와 같은 저해세력은 우리 자신의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잠적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는 일이 바로 내일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남북의 화해와 대화’라는 오늘 이 역사적인 첫 모임에서 그와 같은 모든 마음의 장벽을 헐고 그 의의와 중대성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민족화해와 세계평화를 구체적으로 추궁[추구]하는 이 마당에서 본인이 이 중차대한 개회사를 하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며 ‘통일의 문은 열렸다’는 전제 밑에서 장해물을 극복해 나갈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앞에 가로놓인 장해물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우리의 외부와 내부의 잘못을 시정해 나갈 것을 다짐하는 바입니다.

2. 첫째로 말씀드릴 것은 미국과 일본을 위시한 서방측의 침해세력과 지배세력인 외세입니다. 전체주의보다는 독재가 낳고[낫고] 인권보다는 안보가 앞선다는 미제국정책이 동서 긴장의 방파제로 분단된 우리 반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일본을 위시한 서방공업국가들은 미국의 침략정책을 시인 협조하며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이존[의존]정책을 써서 민족의 자주성과 자결권을 침해하며 동서의 긴장과 대립 속에서 한반도의 분단을 합리화시키고 고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자유 민주 평등이라는 것은 내실 없는 껍데기로서 민도가 얕아서 안 되고 북의 남침 때문에 안 되고 공산화 때문에 안 되고 사회불안정 때문에 안 된다는 식으로 군사독재를 옹호지지하면서 민주화와 통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원조개발정책이라는 미명하에서 의존과 부패를 초래시키고 특권층을 만들어 빈부의 격차를 크게 하며 지배자와 피지배자, 압박자와 피압박자라는 불평등, 무자유, 비민주라는 정보정치, 경찰국가, 군사독재 등 폭력세력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김대중 씨와 이름난 정치인의 야당세력을 꺾고 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며 언론의 자유를 박탈하고 데모하는 학생들을 탄압하며 양민을 학살하는 현 정권을 인정 지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말씀드릴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그 외세를 업고 반공, 승공, 멸공을 부르짖으면서 자기들의 부귀영화와 이익을 추궁하는 권력자들입니다. 민중에게 봉사한다는 허울좋은 간판 밑에서 관과 군과 경찰과 정보원의 모든 기관의 힘을 총동원하여 그들의 권력과 부와 지위와 명예를 확보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통일의 길을 막고 있는 사람들은 적극적이든지 소극적이든지 이상에서 지적한 외세와 국내의 매판세력의 도구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매판세력은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의 머리와 손발 역할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무시할 수가 없읍니다. 그들은 ‘어용’이라는 딱지가 붙을 수 있는 모든 직업, 모든 범위, 모든 활동을 총망라할 수 있는 해외 해내의 단체들과 개인들입니다. 우리 기독교단체나 교회도 이 범주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슬픈 실정입니다. 그들 속에는 정치와는 무관하게 순수한 종교활동에 국한한다는 잘못 인식된 수다한 무리들이 포함되어 있읍니다. 이번 회담방해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이용되어 있읍니다. 공사 간에 사물을 흑백으로만 보려는 이들은 공산주의와 기독교를 양극화시키고 대립시켜 민족도 화해도 아랑곳없다는 식으로 이북기독교인들과 만나는 것은 붉은 물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와 신념에 사로잡힌 무리들은 복음선교라는 원래의 사명은 포기하고 “무지의 열성”이라는 광적인 종교성과 경건성에 날뛰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는 소위 선민후통이나 선민주론을 주장하는 민주화투쟁 속에서 통일활동을 공격 비난하는 반공주의적 기독교인과 민주인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민족의 화해와 대화와 교류를 남북통일의 선행조건으로 보고 그것에 심혈을 기울여 성취된 이번 모임을 ‘북한지지’니, ‘친북’이니, ‘앵무새’니 하고 비방하며 방해한 것입니다. 이들은 내용적으로는 교회를 교묘하게 일치 혹은 분리시키면서 미국의 반공주의 정책과 정부의 반북주의 정책에 호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화와 통일활동을 별개 것으로 분리시켜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의 눈에는 남북 간의 화해와 대화의 노력만도 벌써 ‘공산화통일’의 활주로로 관주[간주]하고 결사적으로 반대합니다.
자유와 민주와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우선 남한에만 민주화운동을 국한시키므로서 북과의 대결을 암시하고 있읍니다.
이번 회담을 방해한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분명한 태도 표명이 단순한 침묵이 아니고 민족화해의 복음적인 평화회의를 공적으로 방해한 것입니다. 기독교 보수세력의 반공주의는 그래도 이해할 만하지만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반공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단순한 반공주의가 아니고 반민족적이고 감정적인 반북주의입니다. 이와 같은 반이북적인 요소는 기독교 복음에 배치되는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이기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다섯째로 언급해야 할 것은 우리 대부분이 그것에 속하고 또 우리가 다분히 동정해야 할 절대 다수의 민중의 입장입니다. 이들은 위에서 말한 세력들의 영향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잘못된 반공주의와 반북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무력하고 대세에 휩쓸리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연약한 무리들입니다.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는 여기에 속하는 무리들입니다. 우리는 인내와 단념, 겸손과 허약, 자포자기와 무능력에 스스로 신음하고 고통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러나 이 약한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고 역사를 변화시켜 갈 주인공들입니다. 우리가 강한 외세를 물리치고 그 외세에 의존하는 국내 매판세력에 저항하는 주된 세력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끝으로 가장 통일을 주장하고 노력하면서도 통일을 저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남북의 양 정부요 당국자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길게 논의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확한 것입니다. 이상에서 지적한 모든 방해요소들이 이 정부의 정책과 태도에 호응하고 반영되어 나온 것입니다.
7・4공동성명과 실무자회의가 단기간 있기는 하였으나 진실한 의미에서 한 번도 통일을 위한 진지한 정치협상이 없는 것입니다. 서로 맞서서 욕하고 공격하면서 그래도 입으로는 통일을 자기들만이 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현재 이남 정부에 대하여 우리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북 역시 너무나도 비난과 공격에만 치중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노동신문, 통일신보, 혁명전선이나 선전물들을 접하면 이남 비난과 이북 칭찬이 대조적으로 강조되어 있읍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사람이 나올 수 있겠는가’고 의심하는 다니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빌립은 대답했읍니다. 너무나도 악선전이 많이 되어 이북에서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하고 의심하는 우리에게는 ‘와서 보시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읍니다. 욕설과 비난에 차 있는 선전으로는 역효과밖에 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고, 정중하고 존대하는 태도로 화해와 대화의 길을 우리는 찾아야 할 것입니다.

3. 물론 우리는 여기에서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교육, 종교라는 각 분야와 차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구체적인 모든 통일저해 세력이나 요소를 일일이 지적할 수는 없읍니다. 이제 우리는 이상의 여러 통일방해 요소들을 인식하고 의식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전진을 해야 하겠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상의 방해세력과 저해요소들을 어떻게 극복하며 통일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것을 지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는 해외의 통일세력을 규합 확장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남북 양 정부와 같은 크기는 될 수가 없으나 적어도 기능면에 있어서 남북을 중개, 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이번 모임에 남한정부가 부정적인 태도로 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이북과 이남 양 정부가 다 같이 우리의 해외세력을 인정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까운 자기를 비판할 때는 건설적인 자기비판이 될 수 있지만 먼 남을 비판할 때는 쉽게 오해와 비난이 되기가 쉽습니다. 이북사람이 아니라 이남사람들인 우리는 36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던 이북과 오늘 이렇게 자리를 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중요하고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만남을 긍정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을 보내준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반면에 이 모임을 부정하고 방해를 한 남한정부에 대해서는 유감의 뜻을 표시할 수밖에 없읍니다.
둘째로 중요한 것은 통일문제를 두고 남북 양 정부와 해외가 합동하여 해외에 통일연구원을 설치하여 통일의 방해요소와 공헌되는 일들을 연구, 분석, 비판, 종합하고 나아가서는 감시, 조절,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으면 합니다. 이것은 남북통일기구가 구체화되어 국내에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통일기구가 성립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존재하는 기구인 것입니다. 이것은 자율적이고 □관 □□□ 남북회의의 공동체가 되□□□□ 그 민간인 단체들과 협력하여 남북의 사상, 학술, 문화, 신앙, 체육등 각 분야에 걸친 협의 활동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남북 정부가 제시하는 가장 가능하고 현실성 있는 통일기구를 남과 북과 해외가 합동하여 창설하는 일입니다. 이것의 좋은 예로서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같은 것을 7・4공동성명의 3대 원칙에 따라 구체적으로 추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보다 더 좋은 안이 이남에서나 해외에서 나오는 경우는 그것도 실현성 여부를 검토 연구하여야 하며 또는 절충안 같은 것을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통일에 대한 기독자의 존재와 역할입니다. 과대평가를 해서도 안 될 일이지만 현실적인 민족적 기독교와 세계적인 기독교를 무시하고 통일을 성취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우리 남한의 기독교인들은 이북의 기독교 성쇠에 대한 역사적인 책임과 복음선교의 과제라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통일문제를 등한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북에서도 국내 국외에 있는 남한의 기독교 세력이나 세계기독교기구를 무시하고 통일문제를 취급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민족의 화해와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발벗고 나선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이 모임이 한 번만의 일이 되지 말고 실제로 통일이 될 때까지 거듭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4. 결론
우리는 지금 원자시대에 살고 있읍니다. 온 세계는 원자전쟁의 위험성에 불안을 갖고 있으며 국부적인 원자전이 가능하다고 계속 위협을 주고 있읍니다. 이와 같은 불안과 공포는 어디보다도 우리 한반도에서 더 큰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민족의 살길은 오직 남북이 화해하고 대화와 교류를 통하여 평화통일을 실현해야 하는 일일 것입니다. 세계평화가 우리 민족의 분단과 대립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에서 보더라도 우리 조국의 통일문제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희의 첫 대화는 민족의 구원과 살길을 찾는 중차대한 의의가 있읍니다. 이것을 우리 기독자가 담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복음선포라는 기독자의 책임이요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악하고 불신의 세대를 탓하시고 요나의 기적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말하였읍니다. 하루의 일기는 볼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볼 줄 모르는 사악하고 불신한 세대가 문제인 것입니다. 세계평화와 민족의 화목을 위협하고 방해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함께 뭉쳐 조국과 민족의 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2020년 10월호(통권 7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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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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