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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나의 목회 수기]
교회와현장 (2020년 9월호)

 

  하나님의 편애-가난한 사람들, 정의와 평화를 사모하는 사람들
  

본문

 

나는 아시아의 중심인 인도차이나를 섬기는 현장 선교사이다. 선교사로 파송받은 2005년 이후 지난 15년간 태국을 중심으로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를 드나들면서 나름 이들 국가에 대한 전문가를 자처하며 각국의 교회는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변동을 계속 모니터링하고 미래를 전망하면서 선교사역을 펼치고 있다.
나는 선교사로서의 활동 외에도 국제개발 프로젝트 실행자, 국제개발 현장 활동가로도 일하고 있다. 유엔과 각국 정부, 관련 분야 학자들, 국제적 개발 기구들이 광범위하게 합의하고 2015년부터 2030년까지 추진 중인 ‘지속가능 개발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의 17대 과제를 보편적인 선교적 과제로 삼고,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의 삶의 자리–하나님의 돌보심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태국과 미얀마 국경 지역에는 약 100만 명의 미얀마 난민들이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국적이 없다. 그래서 어떤 정부의 보호도 없고, 기본적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가난의 한복판에 놓인 채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스스로 보듬으며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다.
선교는 하나님이 편애하시는 가난한 이들을 껴안고 정의와 평화를이루어가는 사회발전(social development)운동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다양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1) 공교육 지원–학교를 세워 운영함으로써 학습 적령기의 학생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고 집에 가지 못하는 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장학금을 준다.
(2) 의료 지원–병원을 세워 주민들을 치료한다. 또한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활동과 보건교육을 실시한다.
(3) 빈곤퇴치 사역–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위해 암소은행, 양곡은행을 운영한다.
(4) 지도력 개발–마을 주민들을 교육하여 지도력을 개발하여 주민자치력을 키운다.
(5) 농업 개발–농사법을 가르치고 공동농장을 만들고 생산물 유통, 판매를 도와준다.
(6) 청년 포럼 조직–민주주의, 인권, 정의와 평화 등 보편적 가치의 실현과 시민의 사회적 책임과 권리, 양성 평등 등의 큰 주제에 관해 훈련시켜 청년들에게 사회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고 사회 변화와 발전에 헌신하도록 가르친다.
큰 틀에서 나는 위와 같은 여러 사역을 통해 마을 단위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면서 영적, 정신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삶의 질을 높여주는 통전적인 선교적 돌봄을 하고 있다.

유년, 청소년 시절–농촌, 가난하지만 신실한 사람들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던 중에 부모님을 따라 이농한 이후 서울에서 자랐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주도한 군사쿠데타 이후 추진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산업화, 도시화를 기반으로 했다. 이 정책은 수천 년간 이어온 농촌 사회를 급속하게 붕괴시켰고, 수많은 가족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공장으로 몰려들도록 하였다.
어린 시절의 짧은 기억이지만,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얻게 된 시골의 감성, 농촌 공동체의 심성은 내 일생을 관통하고 있다. 나는 푸르른 산과 들, 흐르는 개울 등 목가적 풍경의 자연 환경과 평화롭게 서로 도우면서 순수하게 살아가는 전통적인 공동체가 주는 의미를 알고 있다. 땅에 씨를 뿌리면 뿌린 것 이상의 생산과 소득이 그 땅으로부터 난다는 소중한 사실을 알고 있다. 가난하지만 옹기종기 모여서 정겹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모습이 진실인 것을 알고 있다.
서울에 올라온 우리 가족은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를 겪으며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느라 큰 혼란과 고통을 겪었다. 우리 가족은 용산의 이태원, 해방촌에서 살았는데, 그 당시에도 삼각지에는 육군본부와 국방부가 있었고, 미군과 미군 부대로 이미지화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미군과 관계된 부정적인 사건・사고에 대한 소식을 많이 듣고 보고 자랐기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우리에게 미국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심오한 의문을 품기도 했다.

절대자 하나님, 신(神) 인식의 체험
우리 큰 누님은 어릴 때부터 시골 동네에 있는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이어서 할머니, 어머니가 믿게 되었는데 집안 남자들에게 큰 핍박을 당했으나, 여성들은 끈질기게 신앙을 지켰다. 이런 연고로 서울에 와서도 우리 형제들은 교회를 잘 다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큰 체험을 했다. 소위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서 신(神) 인식을 한 것이다. 그로 인해 믿음을 고백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중요한 소명과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게 되었다. 이는 나의 삶에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 후 예수를 믿는 것이 너무 감격스럽고 좋았다. 당시 나를 지도하던 전도사님의 가르침대로 기도도 많이 했다. 예배 때마다 듣는 설교가 귀에 콕콕 박혔고, 어떤 설교는 지금까지 내 가슴에 감동으로 남아 있다.
학생회 임원과 교회학교 교사를 하면서 회의 진행법, 연설하기, 소통하기, 행사 기획과 계획 세우기 등 지금의 능력이 그때 개발된 듯하다. 당시 교회의 여러 장로님들, 권사님들이 신학교에 입학해서 목사가 되라고 권했기에,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소명으로 알고 그 길을 갔다.

그리스도인의 현존, 시대와 역사를 만나다
나는 유명한 부흥사가 되어 민족 복음화에 앞장서야겠다는 신념으로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입학 후 또 다른 커다란 경험을 했다. 1학년 때, 학문적으로 신학을 대한 나에게 그때까지 알지도 못했고 생각도 하지 않은 새로운 예수, 새로운 신앙, 새로운 세계가 내 속에 들어왔다.‘역사적 예수’라는 말, ‘하나님 나라의 실재-정의, 평화, 평등의 나라’, ‘복음과 인간화’, ‘그리스도인의 현존과 증언’, ‘가난한 사람과 고난받는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와 국가’ 등의 주제였다.
이때 한국사와 세계사를 공부하며, 현대 신학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고, 당대 최고의 신학자들인 문동환, 안병무, 서남동, 한완상, 김동길, 김용복 교수 등의 강의와 강연을 많이 들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의 현실을 인식하고 사회적 모순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한국교회가 이런 사실에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태도로 그 책임을 감당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반성과 절망감이 들었다.
당시 민주주의는 유린되어 있었다. 서민들은 처절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학생들은 왜곡된 근현대사를 배우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 인식에 더하여, 남북의 분단과 통일 문제의 본질 등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과 사고체계, 앎과 삶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엄청난 세계관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거의 1년 동안 무엇이 진실인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나의 소명은 무엇인지 등에 관해 고뇌하고 또 고뇌하는 시간을 보냈다. 좋은 그리스도인의 현존을 살기 위해 시대와 역사를 만난 것이었다.

기독청년으로의 자각–정의와 평화를 세워가는 운동
내가 속해 있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의 청년회전국연합회는 1975년 이후 교회 청년들을 의식화・조직화하면서 반독재 민주화와 인권운동, 민중권리 회복과 교회갱신운동으로 정체성을 확립해가고 있었다. 교회를 기반으로 청년들이 대중적으로 각성하여 사회현실에 참여하면서 운동의 큰 물결을 만들어가고 있던 때였다. 나는 장청(長靑)이라는 이 조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노회 단위, 서울지역 단위, 전국 단위의 임원을 맡으면서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에서도 지도력을 발휘하며 책임을 맡아갔다.
이 운동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다. 당시 청년들은 용감하게 결단했고 어떤 희생과 고난도 감내하겠다는 자세로 이 운동에 투신했다. 교회와 총회 어른들의 지지와 성원도 받았지만, 동시에 많은 오해와 불신, 탄압과 핍박도 감수해야만 했다. 때로는 투옥되기도 하고, 수배도 내려졌고, 체포되어 고문도 당하고, 교회에서 내쫓김도 당하고, 학교에서 제적도 당했다.
나 역시 구속될 것을 각오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단행했다. 여러 번 대중집회를 주도하기도 하고, 당시 법으로는 금지된 자료를 출판하여 모든 책임을 지는 등의 위험도 감수했다. 이런 일들로 인해 경찰과 관계 기관의 조사를 수차례 받았으며, 잠깐 동안이지만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재판을 받고 구류를 살기도 했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경험하고 입대하여 만기 전역한 후 장청의 상임총무가 되었다. 당시는 이제 단순히 ‘반독재・민주화’라는 구호만이 아니라 더 분명한 이념과 논리를 가지고 선도적인 조직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올 때였다. 이때 장청은 훈련된 중간 지도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장청, 평화의 사도 훈련’을 시작했다. 매월 1회, 전국 노회에서 선발된 12-15명의 중간 지도력을 일주일간 강하게 훈련하는 집체교육이었다.
성서를 근거로 한 사회운동의 영성과 이론, 현대신학과 민중신학, 상황화신학, 세계교회사와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민중운동의 역사, 정세 분석과 대중조직운동론 등을 강의와 토론으로 교육하여 매년 100명 이상의 중간 지도력을 확보하였다. 이후 이 훈련의 영향으로 각 노회별 청년연합회가 활성화되었고, 매년 열리는 장청대회는 1,000명 이상이 모이는 대중집회가 되어 운동을 수행하는 주체가 되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와 평화, 평등, 생명 존엄이 구현된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하지는 않아도 이 땅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고난받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 예수를 보내심으로 그들을 그 고난에서 자유케 하고 해방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그 길에 동참하였다. 그 길이 그리스도인의 현존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목회–가난한 이들, 정의와 평화를 사모하는 목회
1986년 10월, 장청 상임총무를 끝내고 30세의 나이로 안산에 있는 성빛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여 개척과 같은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해 12월,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아내와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영등포에서 한 시간에 한 대씩 있는 안산행 버스에 올랐다. 연립주택 1층을 개조한 15평의 작은 교회였다. 교인은 5명,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5만 원을 내는 형편의 교회였다.
당시 안산에 있던 반월공단에는 공해를 많이 발생시키는 중소기업 공장들이 대거 이전하여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노동집약적 공장에는 시골에서 온 청소년 노동자들이 마구 몰려들고 있었다. 그곳에서 약 18년간 목회했다. 가난하여 시골에서 올라온 노동자들, 지역 주민들, 위장취업으로 수평 이동을 한 지식인 노동자들을 구성원으로 하여 정기적인 예배는 물론 성경공부, 심방, 교회학교 등 일반적인 목회활동을 펴나감과 동시에 교인들과 지역 현장 상황에 맞는 특별한 목회를 전국 단위 또는 지역 단위로 활발하게 해냈다.
상가 교회의 뒤편을 교실로 꾸며서 ‘그루터기 노동자 야학’을 개설해 영어, 역사, 시사를 가르치고 노동 3법을 가르쳤다. ‘그루터기 독서회’를 만들어 약 500명의 회원들에게 독서를 권장하고 각종 소모임 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특별히 이 독서회에서 정기적으로 주최한 ‘저자와의 대화’에 응해주신 박완서 작가, 도종환 작가, 윤정모 작가, 정지영 감독, 권낙기 선생 등과의 만남은 귀한 경험이었다. 당시 강사로 오신 분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당신들의 책을 읽고 예리한 시대 정신과 바닥의 민중 정신으로 자기 주장을 펼치며 함께 살아갈 길을 제시하는 것에 감탄하고 놀랐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노동자의 고달픈 삶을 함께 나누고, 서로 어께를 걸고 온기를 느끼며, 삶을 익혀가고 역사의 진보를 외치던 그때 당시의 청년 성도들이 그립다.

에큐메니컬운동–정의와 평화를 위한 여정
나의 삶 속에는 에큐메니칼 신학, 정신, 운동이 체화되어 있다. 나는 1984년에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아시아기독청년대회와 1985년 미국 인디애나에서 열린 미국장로교회(PCUSA) 청년대회에 참가했다. 그리고 1989년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총회의 준비위원회 국장으로 참여했고, 1991년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세계선교협의회(CWM) 총회 한국준비위원회 책임자로 섬기는 등 여러 에큐메니컬 국제회의를 주도적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아시아위원회(ARG)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아시아교회와 세계교회의 폭넓은 네트워크에 참여하였다. 1991년 가을부터 1992년 봄 사이에는 스위스 제네바의 WCC 보세이 에큐메니컬훈련원에서 공부하는 기회를 가졌다. 전 세계 23개국에서 온 60명의 친구들과 함께 ‘다양성 속의 일치’, ‘일치 속의 다양성’을 경험하는 꿈같은 시간이었다.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세계화 시대가 열리던 역사적인 때에 각국에서 모인 우리는 ‘새로운 국제질서와 거대한 변화 앞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에 응답하기 위하여 각자의 경험을 토대로 그 가능성을 토론하면서 깊은 우정과 연대를 쌓았다.
보세이에서의 경험은 다시 한 번 세계를 품고 세계인으로 살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나에게 더 넓은 선교의 지평을 선사했다.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주의 복음에 헌신하고 있을 그들이 그립다.

사회발전운동–다시 가난한 사람들, 정의와 평화의 길로
1994년에 나는 한국기독교사회발전협회(KCCSD) 총무로 선임되었다. 이 협회는 독일 개신교해외지원처(EZE)로부터 기금을 지원받아 한국의 사회발전운동에 재정을 지원하는 단체로 당시 김관석 목사, 박형규 목사, 이효재 교수, 강문규 총장, 오재식 원장, 이삼열 박사, 조화순 목사, 정희경 박사, 신혜수 교수 같은 인사들이 이사로 참여하고 있었다. 내가 총무가 된 후에는 단순히 재정 지원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민주화, 주민자치 시대를 맞아 새로운 사회 이슈와 대중의 관심에 맞는 대안적 운동을 찾아내고 이끌어가기 위한 정책세미나, 협의회, 연구와 훈련,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협회는 사회운동 활동가들과 전문가들과 함께 주민자치운동, 시민사회와 생활정치, 생산자협동조합, 소비자협동조합, 환경과 생태보전운동, 교육운동 등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이 성과를 모아서 기존의 동사무소를 주민자치센터로 전환하고 주민자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주민자치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동시에 우리가 진행하던 여러 지원사업을 생산성과 지속성이 있는 협동조합으로 전환하였다. 한편 활동가들은 우리나라보다 사회운동이 발전된 필리핀 등지에 연수를 가기도 했다. 한국 사회와 교회의 재원으로 베트남에 암소은행, 동티모르에 지역운동, 미얀마에 지역개발사업, 인도에 어린이 교육, 중국에 상수도 개발과 CCA에 메콩프로젝트 등 아시아 지원사업도 시작했다.

아시아로 부르심–아시아 민중들을 편애하시는 하나님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왜 아시아 선교지로 오셨나요?” 그 질문에 장황한 답을 할 때도 있지만, 대답의 핵심은 이렇다. “현장에 서 있고 싶었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있는 현장, 내가 도움을 주면 큰 힘이 될 어린이들이 있는 그런 현장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지난 2005년 우리 가족이 함께 아시아의 선교현장으로 존재의 터전을 옮길 때, 오랫동안 에큐메니컬 우정을 나눈 친구들의 초청과 환영이 있었다. 특별히 CCA 총무 푸라윗 키드안(Prawate Khid-arn)의 초청과 WCC 아시아 담당 매튜 추나카라(Mathews G. Chunakara)의 적극적 동의와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참된교회 박창하 목사의 지원과 김순권 증경총회장 등의 격려, 장청을 통해 오랫동안 선후배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의 응원과 기도 또한 커다란 힘이 되었다.
2005년 12월 태국의 치앙마이로 파송받은 나는 미얀마 양곤을 첫 방문지로 정하고 그곳에서 열흘 남짓 머물렀다. 지독한 군사독재의 고통을 겪고 있던 미얀마를 방문하여 이 나라의 민주화와 인권, 민중의 생존권을 위하여 기도하는 동시에 앞으로 아시아를 잘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방문했다. 그리고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남은 생애를 아시아 선교현장에서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확인했다.
메콩 지역, 인도차이나의 여러 나라는 서구의 오랜 식민 지배, 전쟁과 내전, 사회주의와 군사독재, 군주주의를 경험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민주주의, 인권, 생존권, 시민의 자주성은 억압되거나 제한되어 있다. 기독교는 전체 인구의 1-3% 정도를 차지하는 소수종교로서 현실적으로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극히 미미하다. 하지만 아시아의 중심, 인도차이나에 부름을 받은 나는 하나님의 편애에 근거하여, 가난한 사람들, 정의와 평화를 사모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리라는 다짐을 실천해왔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될지 알 수는 없으나 마지막까지 이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우리 아이들이 보고 싶다. 메솟의 카렌족 아이들, 라오스와 캄보디아, 미얀마에 있는 우리 아이들이 너무나도 보고 싶다.


허춘중 |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고, 보세이 에큐메니컬 훈련원을 수료하였으며, 미국 갈릴리대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목사이며, 태국기독교회총회(CCT) 에큐메니컬 선교동역자로 총회의 파송을 받아 인도차이나를 순회하는 선교사로 일하고 있다. 한・메솟협력센터 소장으로 태국과 미얀마 국경의 난민들을 위해 카렌 자치주에 ‘난민 재정착 마을 만들기’(코이카 지원) 사역을 하고 있다. 또한 라오스복음교회총회(LEC) 자문위원과 캄보디아에 세운 선교병원 ‘사랑의 병원’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20년 9월호(통권 7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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