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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20년 8월호)

 

  조선시대 전염병에 대한 피해상황 인식과 대처 방법
  

본문

 

지금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비상 상태와 흡사한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9일 “코로나19 백신 개발 등에 2,100억 원을 투자하고, 추경에 반영한 치 료 제 개발 R&D(연구・개발) 투자와 신종 바이러스 연구소 설립을 시작으로 치 료 제와 백신 산업의 경쟁력을 높일 것”이라고 발표했다.1 그런데 미생물의 존재를 이해하거나 파악하지 못한 조선시대에는 전염병(돌림병, 역병, 괴질)이 언제 창궐하여 어떤 피해를 입었으며, 조정과 백성들은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였을까? 궁금하기 그지없다.
전염병으로 인해 역사가 바뀐 세계의 여느 나라들처럼 조선 역시 전염병이 창궐하여 심각한 피해를 당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학자들마다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일제강점기인 1917년까지 526년간 조선에서 발생한 전염병은 대략 1,455건이다.2 연평균 2.77회의 전염병이 발병한 셈이다. 이 정도면 가히 ‘전염병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에서 전염병이 돌았던 해는 무려 320년이나 되기 때문이다. 전염병의 발생 횟수를 왕조별로 살펴보면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小氷河期)였던 숙종의 재임기간(재위 1674-1720)에 25회로 가장 많았고, 영조(재위 1724-76)때가 19회, 현종(재위 1659-74) 때가 13회로 그 뒤를 잇는다. 현종, 숙종, 영조가 재임하던 기간이 절정기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미생물이나 바이러스의 존재를 이해하거나 파악하지 못했지만, 현대인들도 깜짝 놀랄 만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필자의 전공 분야와는 거리가 있지만, 그간 틈틈이 공부하며 연구해온 내용들을 정리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해본다.

의서의 편찬
조선시대 선조들은 각종 병에도 신이 있다고 믿었으며, 전염병 또한 귀신의 소행으로 여겨 원인 불명의 돌림병이 돌면 으레 역귀(疫鬼)의 조화로 받아들였다. 전염병의 원인이 되는 ‘병원성 미생물’을 발견하기 이전이기에 기상이변, 음양의 부조화, 억울하게 죽은 자의 원기(元氣)와 잡귀(雜鬼)의 소행으로 여긴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 질병은 두창(痘篇, 천연두)과 마진(麻彦, 홍역)이었다. 천연두의 경우 이 병을 가져오는 두신(痘神,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천연두를 앓게 한다는 여자 귀신)을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불렀는데, 마마가 왕과 왕비 등에게 붙이는 극존칭의 언어임을 생각해볼 때 그만큼 치사율이 높은 두려운 전염병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사람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토속신앙・무속신앙을 활용(동원)하기도 하였다. 천연두에 걸리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한 것이다. 예로부터 무격(巫現, 무당과 박수)의 주요 기능은 치병(治病)이었으며, 구병(救病)은 귀신과 교제하는 무당들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믿었기에 전염병이 돌면 무당들을 동원하여 구병제(救病祭)를 드리며 병이 치유되기를 소망했다. 또한 전염병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무사귀신(無祀鬼神, 재앙으로 자손이 다 죽어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없는 사람의 귀신)이나 역신(疫神, 전염병을 퍼뜨린다고 믿는 신)에게 정해진 날짜에 제사를 드려 이들을 미리 달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이 전염병을 단지 미신적인 것으로만 치부한 것은 아니다. 전염병을 막기 위해 조선에서는 최대한의 의료 지식과 기술을 동원했다. 이와 동시에 공동체 문화로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우선 전염병의 치료와 예방을 위해서는 전염병의 발생 원인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다양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했다. 이러한 차원에서 특히 의서를 적극적으로 편찬하여 보급했다.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모르면 사람들의 인식과 대처는 자연히 미신적으로 흘러 백성들의 고통이 가중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존에는 중국의 의서를 수입하여 사용해왔다. 그러나 중국과는 자연환경, 자라는 동식물, 음식, 질병 등 여러 환경이 다를 뿐만 아니라 중국 의서 자체에 잘못된 내용이 많고, 문장도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이 책은 이렇게 말하고 저 책은 저렇게 말하는 등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실제 임상에는 사용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이를 인식한 세종은 ‘백 리나 천 리쯤 떨어져 있으면 풍속이 다르고, 초목이 생장하는 것도 각기 적당한 곳이 있으며, 사람의 좋아하는 음식도 습성에 따라 달라서 옛 성인들은 많은 초목의 맛을 보고 각 지방의 성질에 순응하여 병을 고쳤다.’고 말하며 일반 백성들은 값비싼 중국 약재를 구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환경이나 상황이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중국의 약재[唐材]만이 유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풍부하고 값싼 약재들을 활용하도록 향약(鄕藥) 장려 정책을 펼쳤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자생한 약초로 조선의 풍토와 조선 백성들의 체질에 맞는 우리만의 약재, 즉 향약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기존 약재와 보태고 효능의 종류를 구분하여 약재를 쉽게 구하여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독자적인 의서를 편찬 보급하여 백성들이 누구나 쉽게 활용하도록 한 것이다.3 그리하여 총 85권으로 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나오게 되었다.
1596년 선조는, 중국의 의서들이 모두 조잡한 것을 베끼고 모은 것이라서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으니 여러 의서들을 모아서 백성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한 권의 책으로 편찬하도록 허준(許浚, 1539-1615)에게 명하였다. 특히 궁벽한 시골에는 의원과 약이 없고, 향약을 잘 몰라 요절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약재의 중국 명칭이 아닌 우리나라 이름[鄕名]을 표기하여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 후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의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의서 편찬 작업이 중단되자 선조는 왕실이 소장한 고금(古今)의 의서 500여 권을 허준에게 내어주면서 이를 자료로 하여 혼자 찬집(撰集)하라고 하교(下敎)하였다.4 책의 절반을 편찬하기도 전에 선조가 승하였으나, 이후 광해군 때에 완성, 간행되었다. 이 책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이다. 『동의보감』은 권위가 있는 동양 의학서로 간행된 지 115년 만에 일본에서 전권이 출판되었으며, 1763년 중국에서도 출판되어 일본과 중국에서 모두 일곱 번이나 거듭 출판되었다. 2016년 6월 22일에 국보 제319-1호(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국보 제319-2호(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국보 제319-3호(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외에도 조선시대에는 많은 의서들이 편찬되었다. 당시는 종이와 인쇄시설이 귀하던 시절이었기에 임금의 지시가 아니면 책을 만들기 어려웠다. 오늘날 남아 있는 옛 의서들은 모두 왕명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편찬된 수많은 의서들이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지는 못하였다.
중국과는 다른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의학이 필요하였으나 당시 조선 사회에는 중국에 경도(傾倒)된 사대주의 사상이 만연하여 독자적인 의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사회 발전의 한계로 말미암아 미생물에 의한 감염의 원리를 알지 못하여 의서에 비과학적이거나 비위생적인 내용이 포함되기도 하였고, 당시 과학의 한계로 인해 전염병의 원인과 예방법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미생물에 대한 이해나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의 원리를 몰랐던 조선의 조정에서 전염병의 감염 원인을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한 모습을 읽을 수 있다.
1526년 중종은 8도에서 28건의 전염병으로 8,123명이 사망하고, 이외에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평안도 등 각 지역으로 의약품을 내려 보내 마음을 써 치료하도록 하고, 또한 중앙에서 제사지낼 것을 예조에 말하라.”라며 피해자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했다. 특히 1612년(광해군 4년) 12월 함경도에서 시작된 전염병이 강원도를 거쳐 전국 각 도로 급속히 퍼지면서5 함경도에서만 무려 2,9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6 광해군은 “전염병 재앙은 과인의 허물 탓”이라고 자인하면서 “그러니 과인이 책임지고 퇴치할 것”이라고 다짐했다.7 당시 전염병이 돌면 『간이방』(簡易方)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전국 고을에 나눠주어 백성들 모두가 이 의서를 읽고 병에 대처하게 하였으나, 이 책은 너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어 실질적으로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그리하여 광해군은 어의(御醫)인 허준에게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전염병을 대처할 수 있는 전염병 매뉴얼을 편찬하도록 1613년 2월에 명을 내렸다. 허준은 왕명을 받들어 두 달여 만에 『동의보감』의 내용을 보다 구체화하여 전염병 방지 및 퇴치 방안을 연구하고, 마침내 이를 정리하여 『신찬벽온방』(新纂辭溫方)을 편찬해 전국에 배포했다. 전염병이 발생한 지 두어 달 만에 편찬과 배포까지 마무리했으니 그 시대의 기준으로는 참으로 발 빠른 대처라 할 수 있다.
허준은 전염병이 나타나는 원인을 자연의 섭리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인간의 신체도 기의 균형이 깨지면 병이 나듯, 자연의 기운도 조화를 잃으면 전염병이 발생한다고 본 것이다. 쉽게 말해 여름에 더워야 하는데 서늘하거나, 겨울에 추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전염병이 생긴다고 하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그때의 성질에 맞게 운행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마도 16-18세기에 전 세계를 강타한 소빙하기의 기상이변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허준의 진단은 철학적으로 들리지만, 이치에 맞는 말이다.
허준은 “하늘이 인간에게 병을 주면서 그 병을 고치는 약도 주었다.”라며 “어떤 약은 나무뿌리에 숨기고, 어떤 약은 곰 발바닥에도 숨겼는데 사람들이 노력하여 찾아 쓰면 된다.”라고 기술하였다. 또한 전염병 치료를 위해 물은 반드시 끓여 먹게 하였고, 옷가지를 삶아서 입고, 몸을 깨끗하게 해야 하며, 고여 있는 물을 퍼내어 깨끗하게 하라고 말하였다. 고여 있는 썩은 물에서 전염병이 발생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러한 대처법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마늘과 생강 등을 많이 먹어야 한다고 했다.8 아마도 면역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 대해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 중 하나인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신찬벽온방』의 편찬으로 누추한 시골의 후미진 골목이라도 다 처방전을 의지하여 구해 살게 되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9

사회적 격리
조선시대에는 전염병에 대처하기 위해 사회적 격리에도 애를 썼다. 전염병은 왕족과 고관들도 피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정종은 등극 첫해인 1399년에 3개월 동안 이질을 앓았고, 마찬가지로 이질에 걸린 태종은 1411년 7월 2일 조회 때 신하들의 보고를 받지 않았다. 신하들에게 이질이 전염될까 염려되어 거리두기를 한 것이다. 정조의 첫 아들인 문효 세자도 6세에 전염병(麻彦, 홍역)으로 훙서(薨逝, 왕공·귀인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했다.10
세종은 1434-35년 사이에 전염병으로 죽은 함경도 백성이 3,262명에 이른다는 보고를 받고, 여름 한더위에 열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부순 얼음을 보내주었고, 각 도의 섬에 의원을 보내고 면포 5,000필을 급히 하달하여 당사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1437년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한성부 내 두 곳에 마련된 진제장(賑濟場,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내어주거나 죽을 쑤어 먹이던 곳)에 천여 명씩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한두 곳에 집단수용을 한 것이 후에 화를 자초하게 되었다. 해가 바뀌어 봄이 되면서 전염병이 이 급식소에 모인 백성들을 휩쓸었고, 이곳에서 사망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가슴을 치면서 “대체 지금 이곳에서 사망자가 왜 속출했는지 그 사유를 낱낱이 기록하라.”라는 명을 내렸다. 7년 후인 1444년에 또다시 전염병이 돌자, 세종은 7년 전의 전철을 밟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백성들을 분산 수용하고, 역병을 얻은 자는 다른 사람과 섞여 살게 하지 마라.”라고 전염된 자들을 격리시킬 것을 지시했다.11 또한 분산 수용소의 관리를 중앙 및 서울의 5개 관청 관리(官吏)에게 맡겨 책임 소재를 분명히 했으며, 관리들이 전염병 환자들을 제대로 구호하는지 감찰단을 파견하여 낱낱이 파악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구질막’(救疾幕, 감염병 환자를 격리시켜 치료하는 공익 시설) 또는 ‘병막’(病幕, 감염병 환자를 격리시켜 수용하는 임시 건물)을 설치하였다. 1732년(영조 8년)에 한성 지역에 역병이 돌자 1,000곳이 넘는 격리소가 세워졌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최고의 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마과회통』(麻科會通)에서 천연두의 예방을 위해 종두를 시행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병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 태도를 보여주었다. 또한 『목민심서』(牧民心書)의 “관질”에서는 “전염병은 콧구멍으로 그 병의 기운을 들이 마셨기 때문에 생긴다. 전염병을 피하려면 마땅히 그 병의 기운을 들이마시지 않도록 환자와 일정한 거리를 지켜야 한다. 환자를 문병할 때는 바람을 등지고 서야 한다.”라고 언급하였다. 외부 사람들이 함부로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문 밖에 금줄을 치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의 용어로 ‘사회적 거리두기’와 매우 유사한 예방법이었다.

전 사회적 대응
마지막으로 언급할 중요한 대목은 바로 전염병의 공포와 불안을 없애기 위해 사회적으로 노력했다는 점이다. 1525년 7월 7일 자 『중종실록』에 의하면 “용인(龍川) 경내에 여역(癘疫)이 매우 치열하여 죽은 사람이 670명이나 된다. 예전부터 역기(疫氣)가 전염하여 사람이 많이 죽으나, 어찌 이처럼 참혹한 일이 있는가? 곧 감사(監司)에게 하서(下書)하여, 여러 가지로 구원하여 다시 죽는 사람이 없게 하고, 사람이 죽은 집에는 산 사람이 있더라도 굶주릴 걱정이 없지 않으니 진제(賑濟)하고 구휼(救恤)하도록 아울러 이르라. 용인군수 김의형(金義亨)은 그 백성이 많이 죽었으면 곧 감사에게 치보(馳報)해야 할 것인데 감사가 탐문한 뒤에야 비로소 그 죽은 수를 신보(申報)하였으니, 부지런히 돌보는 뜻이 아주 없다. 추고(推考)시킬 것도 감사에게 아울러 이르라.”12라고 교지를 내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1799년 1월 13일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경외(京外)의 사망자가 모두 12만 8,000여 명에 이르자 정조는 “성 안팎의 가난하고 잔약한 백성으로서 자력으로 병을 치료하기 어려운 자나 죽어서 장사를 치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각부(各部)에 엄히 신칙하여 진휼청에 뽑아 보고해서 연교(筵敎)에 의거해 거행하도록 하라. 삼남(三南) 및 제도(諸道)에 대해서도 또한 엄히 신칙하여 막(幕)을 짓고 굶주림을 구하는 일과 기타 돌보아주는 일들을 일체 경청(京廳)의 예(例)에 의거해서 거행하도록 하라. 또 고을 소재지와 거리가 조금 멀어서 미처 두루 살필 수 없는 곳에 대해서는 해당 동리(洞里)에서 힘을 모아 서로 돕도록 하라. 그리고 몇 사람을 구활하고 몇 사람을 거두어 장사 지냈는지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조사해서 장문(狀聞)하도록 하라.”라고 전교하였다.13
『조선왕조실록』의 언급처럼, 조정에서는 굶주리고 병들어 자력으로 살아갈 수 없는 백성들에게 음식을 무료로 나눠주는 진제장을 전국에 설치하여 그곳에 오는 자는 출신지와 신분을 묻지 않고 먹거리를 공급했다. 자기 관할이 아니라고 하여 진휼(賑恤)을 거부하는 관리는 엄중 처벌했으며, 수령들의 지방행정을 평가할 때에는 얼마만큼 많은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구제했는가를 반영하기도 했다. 또한 사회적 약자를 위한 구휼(救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구제함)과 진휼(賑恤, 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도와줌)을 통하여 구호에 힘을 기울였다. 각 고을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재물을 풀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병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는 가정을 위해 대신 농사를 지어주는 등 공동체 문화를 한껏 강화하며 장려하였다.
이 외에도 가난과 질병으로 죽은 백성들을 위하여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 억울한 원혼을 없게 하여 전염병을 막고자 하였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미신적인 행위이지만, 오래전에 죽은 귀신들이 전염병 귀신을 막아 살아 있는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병을 이길 수 있다는 마을 공동체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긍정적인 방편의 하나로 작용했다.

글을 마치며
조선시대의 전염병에 대한 대처 방법은 미생물에 관한 것을 제외하면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한 우리 조상들은 전염병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문제로 받아들였으며, 공동체 문화를 강화하여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오늘날의 코로나19가 몰고 온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전주에서 시작된 착한임대료운동,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서 추진한 재난기본소득 지원금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부, 피해 지역 의료봉사, 사회적 거리두기, 예방수칙 지키기 등 사회 전반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움직임과 유사한 대응들이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기술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여러 공동체 문화는 코로나19를 이겨내는 데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고통을 받는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는 이유이다. 우리는 이 위기를 잘 이겨내고 소중한 일상으로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설령 코앞에 삼재팔난(三災八難)의 위기가 밀려온다 할지라도 이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대처해야 할 것이다.


1 “문 대통령 ‘코로나19 백신에 2100억원 투자… 신속한 임상 승인・정부 비축도’”, 「경향신문」, 2020년 4월 10일.
2 강문갑, “역려유행(疫癘流行) 2”, 「서울데일리뉴스」 오피니언, 2020년 3월 4일.
3 『세종실록』 60권, 1433년(세종 15년) 6월 11일, 壬辰 세 번째 기사(태백산사고본 19책 60권 39장 B면).
4 허준, 『동의보감』(1613) 서문; 김두종, 『韓國醫學文化大年表』(탐구당, 1982), 326.
5 『광해군일기(중초본)』 61권, 1612년(광해 4년) 12월 22일, 辛亥 첫 번째 기사(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17장 A면).
6 『광해군일기(중초본)』 61권, 1612년(광해 4년) 12월 24일, 辛丑 첫 번째 기사(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19장 A면).
7 이기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오피니언, 2020년 3월 10일.
8 김준혁, “조선시대 역병대치법”, 「수원화성신문」 오피니언, 2020년 2월 13일.
9 허준, 『신찬벽온방』(1613) 서문.
10 『정조실록』 21권, 1786년(정조 10년) 5월 11일, 癸丑 첫 번째 기사(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2장 B면).
11 『세종실록』 103권, 1444년(세종 26년) 2월 3일, 癸未 첫 번째 기사(태백산사고본 33책 103권 14장 B면).
12 『중종실록』 51권, 1524년(중종 19년) 7월 7일, 庚午 두 번째 기사(태백산사고본 26책 51권 15장 A면).
13 『정조실록』 51권, 1799년(정조 23년) 1월 13일, 壬申 첫 번째 기사(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1장 B면).



우창준 |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목사이다. 연희제일성결교회를 담임한 후 은퇴하였다.

 
 
 

2020년 8월호(통권 7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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