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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아시아 기독교] 아시아 신학 순례 04
교회와현장 (2020년 7월호)

 

  중국 신학(2) 중국 본토 이외 지역
  

본문

 

중국 본토 이외 지역에서 전개된 중국 신학
선교 역사상 중국은 여러 차례 선교가 이뤄졌다. 중세시대에 정복 왕조인 원나라에 이어 등장한 한족 왕조인 명나라는 원나라의 잔재를 숙청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나라의 종교관용 정책 덕분에 활동할 수 있었던 그리스도교도 원나라 잔재의 일부로 간주되어 제거되었다. 그 결과 육로를 통한 중국 선교는 중단되었다. 이후 중국 선교를 비롯한 아시아 선교는 지리상의 발견으로 대표되는 대항해 시대에 서구 제국주의 및 선교의 아시아 진출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런 차원에서 중국 근현대 선교는 해안선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근현대 선교의 3대 흐름인 해안선 선교, 내지 선교, 종족 선교의 첫 번째 유형이 시작된 것이다. 해안선 선교는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의를 지닌다. 첫째, 해안선 선교는 이후 중국 선교의 원형이 되었다. 가령 선교사 주변 인물 중심으로 선교가 전개됨에 따라 생겨난 소위 ‘쌀 신자’(혹은 모식신자, rice Christians)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이후 중국교회의 역사는 선교사 의존적 교회와 삼자정책에 기초한 현지인 중심의 독자적 교회라는 두 가지 유형이 빚어낸 갈등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둘째, 해안선 선교는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중국 내지(內地)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이 교두보는 종교적으로는 그리스도교와 중국 전통 종교, 인종적으로는 중국인과 외국인(특히 서구인), 정치적으로는 중화주의와 서구 제국주의, 지역적으로는 중심과 주변 등 여러 요소가 조우하고 갈등하는 지역이었고, 따라서 혼종성(hybridization)과 정체성(identity)이 중심 주제가 되었다.
흔히 중국 본토 이외 지역의 교회를 논할 때, 규모나 중요성을 고려하여 마카오보다 홍콩을 먼저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선교 역사는 마카오에서 시작되었다. 마카오 및 홍콩은 역사상 몇 단계의 변화를 겪었다. 첫 번째 단계(1949년 이전)에서 두 지역은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 결과, 서구 제국의 일부가 되어 중국 본토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다. 두 번째 단계(1949년-20세기 말)에서 두 지역은 중국 공산화 이후 독자성을 지닌 지역으로 그 자체가 주목받게 되었다. 세 번째 단계(20세기 말 이후)에서 두 지역은 ‘한 국가 두 체제’라는 새로운 환경 가운데 중국의 일부로 중심과 주변이라는 관계를 재설정하는 중이다.
한편 타이완은 역사가 유구하고도 복잡하기에, 마카오 및 홍콩의 경우와 차이가 난다. 마카오와 홍콩의 경우 독자성 확보가 중요하다면, 타이완은 독자성을 넘어 독립, 즉 국가적 정체성 확보가 특히 20세기 후반 이후 첨예한 문제가 되었다.
어느 지역 신학이나 마찬가지로 마카오, 홍콩, 타이완의 신학은 이런 시공간적 맥락에서 발생했고 발전해왔다. 이들 지역은 어떤 형태로든 간에 중국 본토와의 관계라는 거대한 틀 안에 있기에, 이 지역의 신학은 해당 지역 신학과 더불어 중국 신학으로서의 특징을 나타낸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적 차원에서 볼 때, 해당 지역의 신학은 마카오 신학인 동시에 중국 신학, 홍콩 신학인 동시에 중국 신학, 타이완 신학인 동시에 중국 신학의 특성을 보인다.
이와 더불어, 중국 본토 이외 지역의 신학에서 디아스포라 중국인 신학도 간과할 수 없다. 최근 들어 디아스포라 중국인 신학은 해당 지역의 이주민 신학을 넘어, 중국 신학의 세계화에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마카오 신학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로서 오랜 역사를 지닌 지역이다. 당연히 로마가톨릭의 선교가 이루어졌고, 로마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교의 주류를 이루어왔다. 한편 마카오는 서구 개신교 국가들의 조차지가 생기기 전까지 개신교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겸했다. 이런 상황에서 모리슨(Robert Morrison)에 의해 최초의 개신교 선교가 마카오에서 시작되었다. 마카오는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를 막론하고 그 자체로는 선교지로서 주목받지 못했고, 그 결과 그리스도교는 선교, 교회, 신학 등 전반적인 측면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카오는 근대 이후 가톨릭이 중국의 종교 및 문화와 최초로 다시 만난 곳이자, 동시에 개신교가 중국의 종교 및 문화와 만난 최초로 지역으로서, 양 종교의 조우라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가톨릭의 경우, 선교는 교황의 위임을 받은 보호권(Padroado 혹은 Padroado Real)이라는 국가 주도형 선교와 교황 직속 포교성성(布敎聖省, Congregation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 인류복음화성의 전신) 중심의 선교회 주도형 선교의 두 유형이 있었는데, 양자 간에 큰 분쟁(Padroado-Propaganda Schism)의 역사가 있다.
마카오에는 1576년 인도차이나, 중국, 몽골, 일본 및 한국 등을 포함하여 극동 전반을 관할하는 말라카의 관하교구(suffragan diocese of Malacca)가 설립되었고 위에서 언급한 분쟁의 역사도 있기에, 관련 역사의 연구가 필요한 곳이다.1 마카오는 한국 선교를 담당한 파리외방전교회(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M. E. P.)가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 김대건(金大建) 등 세 명의 신학생을 유학 보낸 곳이었다. 개신교의 경우, 마카오는 광저우에서 공행무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6개월 동안 모리슨 등이 거처하게 되어 그의 성경 및 사전 번역의 교두보가 되었고,2 말라카에서 중국 최초의 개신교 신학 토착화 작업을 하던 양발(梁發, Liang Fa)에게 필요한 사상과 물자를 제공하는 터전이 되었다. 이런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1988년에야 비로소 첫 중국인 마카오 주교가 탄생했다. 한편 성공회는 일본 침략과 관련하여, 1944년 플로렌스 리(Florence Li)를 중국 최초의 여성 사제(목회자)로 안수했다.3 마카오 신학의 토착화 발전은 아직 기다려야 할 형편이다.
마카오는 중국 반환 이전부터 중국 본토와의 관계가 친화적이라는 평가가 있다.4 이런 맥락에서 가톨릭교회가 2018년 바티칸과 중국 간의 주교 임명에 관한 협약을 했는데, 직제론 신학에 어떻게 기여할지 기대된다. 또한 개신교도 삼자[애국]신학에 어떻게 기여할지 기대된다.

홍콩 신학
홍콩 신학의 주요 시기는 위에서 언급한 세 단계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두 번째 단계는 중국 공산화가 시작되는 시기로, 당시 중국인과 중국 그리스도인들은 난민 형식으로 홍콩에 몰려들었다. 홍콩은 조용한 항구도시에서 폭발적인 도시화가 이뤄진 거대 도시로 변모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국가에 대립하는 자본주의형 도시국가로 변모했다. 세 번째 단계는 중국 반환이 시작되는 시기로, 홍콩은 마카오와 달리 ‘한 국가 두 체제’에서 중국 본토와의 갈등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홍콩교회는 양적・질적으로 성장했다. 홍콩교회는 대내적으로는 홍콩 자체가 중요한 선교지가 되면서 교회 발전에 힘썼다. 특히 피난민 교회가 정착민 교회로 바뀌어갔다. 홍콩교회는 중국 본토에서 철수한 교회와 선교단체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새롭게 몰려온 교회와 선교단체들로 인해 극심한 교파주의를 나타냈지만, 동시에 홍콩기독교협의회를 통해 중국교회의 유산 중 하나인 연합의 정신을 이어나갔다. 또한 대외적으로 홍콩교회는 정부와 더불어 홍콩의 도시화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복지 동역자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홍콩 신학은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첫째, 이전부터 진행되던 중국 본토의 토착화신학을 더욱 활성화했다. 대표적인 것이 도풍산(道風山, Tao Fong Shan)에 소재한 여러 그리스도교 기관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토착화신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도풍산은 역사적으로는 라이헬트(Karl Ludvig Reichelt) 선교사가 그리스도교와 불교 간의 대화 신학을 추구하고 그리스도교 수도원을 구상했던 전통과 연결되고, 최근에는 한어신학의 중심지로 부상한 한어기독교문화연구소(漢語基督敎文化硏究所, Institute of Sino-Christian Studies)와 연결된다. 이 연구소는 서구 신학의 고전과 현대물을 번역·소개하는 한편 독창적인 연구물도 내놓고 있으며, 산하에 학술용 서적과 보급용 서적을 위해 각각 도풍출판(道風出版)과 명풍출판(名風出版)을 운영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최근까지 한국의 한국신학연구소와 동경의 도미사카그리스도교센터(富坂キリスト敎センタ)와 더불어 동아시아 신학 연구와 서구 신학의 번역 및 소개에 힘쓴 대표적인 연구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사회참여신학을 발전시켰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홍콩교회는 정부의 파트너로서 홍콩 복지 문제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감당했고 신학적 입장도 발표했다. 따라서 홍콩 신학은 교회의 사회사상 및 교회와 국가라는 전통적 주제를 연구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교회가 정부 지원으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들을 운영하면서, 교회와 국가 간의 건전한 균형과 견제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도 중요하다.
셋째, 이주민신학이다. 두 번째 단계 초기에는 중국 본토로부터의 난민 문제가 중요했다면, 최근에는 세계화의 일환으로 이주노동자의 문제가 심각하다. 한 통계에 의하면, 홍콩에는 필리핀에서 이주한 가톨릭 신자만도 무려 17만 명을 상회한다.5
넷째, 선교신학과 에큐메니컬신학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 홍콩은 마카오와 더불어 중국 본토 선교의 교두보였다. 특히 중국의 개혁개방 조치를 전후하여 중국 선교를 목적으로 한 선교단체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왔다. 이와 더불어 홍콩은 아시아 에큐메니컬운동의 중요 거점이기도 했다. 홍콩은 아시아 에큐메니컬 선교를 시작하는 다양한 흐름의 시원지였고,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등 주요 기관들의 소재지였으며, 나아가 중국 본토 교회를 국제교류의 마당으로 불러내는 장소가 되었다. 그 결과 1991년 중국기독교협회가 세계교회협의회에 재가입했다. 또한 신학교는 교파성을 지닌 독립 신학교도 많지만, 에큐메니컬 협력을 통해 운영되는 신학교도 많다. 가령 중문대학교의 충치신학교(崇基學院,Divinity School of Chung Chi College)가 대표적이다.
다섯째, 홍콩은 우수한 대학교가 많은 교육 도시로서, 일반 학문과 더불어 신학도 상당 수준에 이르렀으며, 그 결과 우수한 신학자들을 배출했다. 가령 홍콩 출신의 재미 신학자인 곽패란(郭佩蘭, Pui-lan Kwok)의 신학에는 홍콩적 특징이 압축적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서구 여성신학과 구별되는 아시아 여성신학을,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 경험을 극복하기 위한 후기식민주의(post-colonial)신학을 추구하면서, 신학 소재로 성서를 활용한다. 아시아 여성신학적, 후기식민주의신학적, 성서신학적 연구를 특징으로 하는 그녀의 대표작은 『후기식민주의적 상상력과 여성신학』(Postcolonial Imagination & Feminist Theology)이다.6 그녀는 중국 그리스도교 여성운동사(“Chinese Women and Christianity, 1860-1927”; 박사학위 논문으로 후에 단행본으로 출간) 연구에서 출발하여 학문 영역을 넓혀나갔고, 최근에는 자신의 시각을 아시아계 미국 여성 관점에서 디아스포라 관점으로 넓히고 있다. 존경하는 인물로는 나일스(D. Preman Niles), 러셀(Letty M. Russell), 피오렌자(Elisabeth Schuessler Fiorenza) 등 신학자와 사이드(Edward Said) 등 후기식민주의 학자를 손꼽는데, 이들의 면면이 그녀의 학문적 성향을 짐작하게 한다.7 그녀는 미국종교학회(American Academy of Religion) 회장으로 출마할 때, 아시아 여성들이 신학과 학계에서 더욱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지도자로서 우리는 종족을 대동해야만 한다. 선구자인 우리는 뒤따르는 자들에게 문이 더 넓게 열릴 수 있도록 만들 책임이 있다.”8 아시아 신학을 세계화해야 할 책임이 있는 모든 학자가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다. 최근에는 기존의 저명 학자들을 뒤이어 후기식민주의 연구가인 시몬 관(Simon Shui-Man Kwan) 등 2세대 학자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9

타이완 신학
타이완은 여러 차례에 걸친 이주와 더불어 여러 국가의 식민지가 되는 등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타이완인(광의)은 원주민, 초기 한족 이주민들로 구성된 타이완인(협의), 1949년 중국 공산화 이후의 한족 이주민인 본토인 등 크게 세 부류로 구성된다. 따라서 ‘타이완인’이라는 용어는 세 부류 중 두 번째를 가리키거나 총칭으로 사용되어, 혼란을 초래한다. 이와 동시에 타이완은 중국과 일본의 식민화와 뒤이은 중국 국민당의 입국 등 외부 세력에 의한 통치라는 독특한 정치구조를 장기간 경험했다. 1987년 계엄령 해제 이후 타이완인(협의)에 의한 정권 창출이 가능했기에, 최근 중국과 타이완의 관계는 ‘중심과 주변’이라는 기존 구도에서 두 개의 독립국이라는 새로운 구도로 이행하려고 한다. 한편 1949년 이후의 후발 이주민인 본토인의 역사도 한 세기 가까이 이어지면서, 타이완인(협의)과 본토인의 구도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타이완의 갈등 상황은 이런 복잡한 역사와 인종적 정체성과 맞물려 있다. 타이완의 교회와 신학은 이런 맥락 가운데 놓여 있다.
타이완 복음화는 제국주의 시대의 포르투갈 선교와 네덜란드 선교로 시작되었지만, 최근 역사는 크게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19세기 말 이후의 타이완인(협의) 복음화이고, 둘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원주민 복음화이며, 셋째는 1949년 이후 중국 본토 그리스도인의 타이완 유입이다. 타이완교회에는 다양한 교파가 있지만, 사회참여의 관점에서 두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곧 타이완인(협의) 중심이자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타이완기독장로교회(臺灣基督長老敎會, Presbyterian Church in Taiwan)와 여타 교회들이다. 이 과정에서 전자는 양심적 소수자 혹은 반정부인사 역할을 했고, 후자는 현상유지적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타이완인(협의)과 본토인, 진보와 보수, 에큐메니컬과 반(反)에큐메니컬, 반정부와 친정부 등의 집단적 양극화 현상이 나타났다.
타이완교회의 규모에 비해서, 타이완의 신학은 아시아 신학의 관점에서 상당히 발전했고 대외적 영향력도 크다. 첫째, 유수한 아시아 신학자들을 배출했다. 쇼키 코(C. H. Hwang/Shoki Coe, 黃彰輝)와 송천성(宋泉盛, C. S. Song)은 상황화와 스토리신학을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송천성은 스토리신학을 통해서 중국 문화를 다루는 문화신학을 하면서도, 타이완 정치 현실에 응답하는 아시아적 해방신학을 추구했다.
둘째, 타이완 신학은 복음주의적 신학, 토착 교회의 토착신학도 나타났지만, 특히 타이완 정치신학 혹은 저항신학의 모습을 나타냈다. 이런 정치신학은 타이완교회의 정치참여를 신학화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타이완교회의 사회문서(1971, 1977, 1979년)와 신앙고백(1986년)이 가지는 신학적 의의는 매우 크다. 또한 민주화운동의 중심 인물인 타이완기독장로교회 총무 고준명(高俊明, Kao Chun-ming/C. M. Kao)의 옥중경험 등 민주화 관련 문건도 중요하다.10
한편 이런 맥락에서 공산주의 비판 신학과 반공신학 등도 연구되었다.11 이런 점에서 20세기 후반 유사한 상황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한국교회와 타이완교회에 대한 비교 연구도 시도해 볼 만하다. 타이완의 다양한 정치신학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초기 시도로는 쇼키 코의 “M-kam-goan”(毋甘願)신학(타이완적 ‘한’ 신학, theology of comfortlessness)을, 후기 시도로는 정아옥(鄭兒玉, John Jyigiokk Tin/Cheng Erh-yu)의 본토신학(Homeland theology), 황백화(黃伯和, Po-Ho Huang)의 “Chhut-thau-thin”(出頭天)신학([민족]자결신학, theology of self-determination) 등이 있다.12 특히 황백화는 [민족]자결신학과 같은 타이완 신학 구성에 힘썼을 뿐 아니라, 아시아 신학 교육에 다방면으로 참여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선교”(Mission from the Underside)라는 개념을 통해 아시아 신학 및 아시아 신학 교육에서 상황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3
한편 타이완 신학은 한국교회와도 교류가 있다. 가령 타이완 출신 주방란(周芳蘭, Carol Chou-Adams)은 남편 애덤스(Daniel J. Adams, 夏達理)와 더불어 미국장로교 선교사로 타이완을 거쳐 한국의 한일장신대학교에서 오랜 기간 사역하면서 아시아 신학 연구와 제3세계, 특히 아시아 신학생 교육, 그중에서도 기독교교육에 힘썼다.14 애덤스도 아시아 신학 서적을 다수 출간했다.15

디아스포라 중국인 신학
디아스포라 중국인 신학자의 약진도 주목할 만하다. 가령 미국 출신으로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교수인 초우(Alexander Chow, 曹榮錦, Cao Rongjin)는 ‘세계기독교’ 담론의 일환으로 중국 신학을 연구하면서, 중국 신학의 미래에 시사점을 제공하였다.16 그는 한어신학의 2세대 신학자로서, 중국 신학을 20세기 초인 5・4운동기(제1차 계몽주의기)의 신학과 개혁개방이 시작된 1980년대 이후(제2차 계몽주의기)의 신학으로 나눠 비교하고, 교회사가 곤잘레스(Justo L. González)의 유형과 선교학자 베반스(Stephen B. Bevans)와 쉬뢰더(Roger P. Schroeder)의 유형 등 서구교회에 익숙한 담론을 통해 중국 신학을 분석하면서 세계 신학과의 접촉점을 마련하려고 했다. 특히 그는 중국 신학에 더 적합성이 있는 신학으로 서구 신학이 아닌 동방정교의 신화(神化, theosis)신학을 제시하면서 신학적 전망의 폭을 넓히고 있다.

중국 본토 이외 지역의 중국 신학의 전망
중국 본토 이외 지역은 해당 지역 자체의 신학을 발전시켜야 할 과제와 더불어 문화적 뿌리가 되는 중국 본토의 신학도 고려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해당 지역은 중국 본토와의 새로운 관계 정립과 그에 따른 신학적 응답을, 또한 중국 본토와 더불어 후기근대주의와 세계화의 도전에 대한 신학적 응답을 요청받고 있다. 특히 중국 본토와 본토 이외 지역이 모두 자본주의(특히 신자유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공산주의의 대화에 이어 그리스도교와 자본주의의 대화에 관한 새로운 모델을 창안할 필요도 있다. 소위 후기근대주의적 아시아의 번영신학(theology of prosperity in the postmodern Asia)의 도전에 응답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 중국 그리스도교 연구가 본격화되고 있다. 미국 해외사역연구소(Overseas Ministries Study Center, OMSC)가 진행한 데이터베이스 구축 프로젝트인 “아프리카 그리스도인 전기 사전”(Dictionary of African Christian Biography, DACB)에 이어, 이것을 모델로 삼은 “중국 그리스도교 전기 사전”(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Christianity, BDCC)의 웹사이트가 2006년 6월 개설되었다.17 이것은 중국 그리스도교 연구에 기폭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신학–중국 본토 및 중국 본토 이외 지역 모두–의 발전을 기대해본다.


1 말라카 교구는 1558년 설립되었다.
2 모리슨과 그의 가족들은 마카오의 구 개신교 공동묘지(Old Protestant Cemetery)에 함께 묻혀 있다.
3 Louis Ha, “Macau”, Christianity in East and Southeast Asia, edited by Kenneth R. Ross et al.(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20), 88-89.
4 Ibid., 87.
5 Fuk-Tsang Ying, “Hong Kong”, Christianity in East and Southeast Asia, 83.
6 Kwok Pui-lan, Postcolonial Imagination & Feminist Theology(Louisville, KT: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5).
7 Ibid., x, 1.
8 https://en.wikipedia.org/wiki/Kwok_Pui-lan(접속일자 2020. 5. 2.).
9 Simon Shui-Man Kwan, Postcolonial Resistance and Asian Theology(London; New York: Routledge, 2014).
10 고준명이 1989년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WCRC의 전신) 서울 총회에서 한 연설문. “The Lord turned my grief to joy”, https://bit.ly/37z146y(접속일자 2020. 5. 2.).
11 조천은(趙天恩, Jonathan Chao), 『中共對基督敎的政策』(臺北: 中華福音神學院出版社, 1986); 증경표(曾慶豹), 『約毖和他的兄弟們: 護敎反共, 黨國基督徒與臺灣基要派的形成』(臺南: 臺灣基督長老敎會臺灣敎會公報社, 2016). 기요파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를 의미한다.
12 John C. England et al, eds., Asian Christian Theologies: A Research Guide to Authors, Movements, Sources, Vol. 3(Delhi: ISPCK; Claretian Publishers; Orbis Books, 2004), 684-698. 출두천(出頭天)의 대만 민남어 표기는 ‘tshut-thâu-thinn’이다.
13 Huang Po Ho, Mission From the Underside: Transforming Theological Education in Asia(Bangalore: PTCA/SATHRI/SCEPTRE, 2010).
14 Carol Chou-Adams, Teacher’s Manual for Early Childhood Curriculum(n.p.: Taiwan Presbyterian Church Press, 1979).
15 Daniel J. Adams, Christian Ethics in Chinese Context(Taipei: Taiwan Theological College/Zion Press, 1976); Korean Theology in Historical Perspective(Delhi: ISPCK, 2012).
16 Alexander Chow, Theosis, Sino-Christian Theology and the Second Chinese Enlightenment: Heaven and Humanity in Unity(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3).
17 http://www.bdcconline.net(접속일자 2020. 5. 2.) 이 프로젝트의 영어판 및 중국어판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About BDCC, Stories of Chinese Christianity: Recording the life stories of significant figures in Chinese Christianity across the centuries and around the world. 關於《華典》, 基督教史人物傳記: 這是一部記載數世紀以來普世華人基督教歷史人物的傳記辭典.



안교성 | 교회사를 전공하였다. 『한국교회와 최근의 신학적 도전』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0년 7월호(통권 7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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