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자료 소개]
교회와현장 (2020년 7월호)

 

  봉천행(奉天行)
  

본문

 

* 이 글은 「기독신보」에 일곱 차례(1930년 2월 26일, 3월 12일, 3월 19일, 3월 26일, 4월 9일, 4월 16일, 4월 23일) 연재된 오문환의 중국 봉천(심양) 방문기이다. 오문환은 1929년 12월 27일 평양역을 출발하여 6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1930년 1월 2일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기에서 오문환은 압록강, 봉천, 고려문을 언급하면서 그 지역이 초기 한국 기독교사와 어떻게 관련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1903년 평양에서 출생한 오문환은 평양의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숭의여학교에서 가르쳤으며, 1920년대부터 평생 동안 선교사 토마스(Robert J. Thomas)를 연구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일에 헌신했다. - 편집자 주

봉천행(1)–「기독신보」 1930년 2월 26일
지난달 27일 새벽이다. 하늘 위의 무수한 별 떨기는 아직도 구주 성탄의 남은 기쁨을 즐겨 춤추는 듯하고 어둠에 휩싸인 평양성에서는 집집마다 달려 있는 축하 성탄의 휘황한 불빛으로 인하여 아직도 성탄의 기분이 농후하게 남아 있었다.
흰 눈이 온 땅에 가득하고 찬바람이 살을 베는 듯한데 피한(避寒) 여행을 떠난다면 몰라도 도리어 더욱 추운 봉천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너무도 이상한 것이 아니냐고 하는 친구의 비웃음도 있었으나 금번 여행의 목적이 팔자 좋게 동계 휴가를 이용하여 얼마 동안 휴양하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추위에 떨고 있는 동포도 찾아보고, 도서관을 찾아가서 사료(史紏)도 조사하여 옛날 선교사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금역(禁域)인 조선으로 들어오기 위하여 애쓰던 발자국을 찾아보려고 함이므로 꼭 합당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6시 24분발 봉천행 열차에 몸을 의탁하고 짧으나마 한 주간 예정의 봉천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_청천강아 여기냐, 을지공의 전첩지
기차는 빨리도 달아난다. 쉬지 않고 달아난다. 동편으로 보이는 먼 산 위에 붉은 해 돋아오고, 차 아래로 온 땅에 가득히 깔려 있는 흰 눈은 별스러이도 반짝거렸다. 문지르면 또 얼고 씻으면 또 흐려지는 차창에 얼굴을 대고 매분 매초마다 번갈아 들어오는 파노라마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 어느덧 기차는 밑으로 큰 소리를 내면서 철교를 지나고 있었으니,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우리의 용장 을지문덕이 100여 만의 청병을 거느린 양광(楊廣)을 깨뜨려 부수던 청천강이 아닌가? 멀리 동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강변의 백상루(百祥樓), 옛 일을 말해주는 듯하고 여기저기서 얼음 갈라지는 큰 소리 을지 장군의 전첩을 알려주는 듯했다.

_안동역(安東驛)의 오십분, 압록강변일행루(鴨綠江邊一行淚)
컴컴하여 채 밝기 전에 평양에서 떠났는데 지금은 오전 11시 50분이 되어 점심 먹기 10분 전이니 시간도 완전히 다섯 시간을 지나 퍽이나 오랫동안 왔거니와 리(里) 수로도 적지 않은 리 수를 왔다. 평소에 늘 다니면서도 멀어 보이던 곽산, 정주도 지나오고 신의주의 관문도 지나서 중국 땅에 제1족을 들여놓았다.
조선과의 사이에 그다지 넓지도 않은 강을 하나 두고 아침이나 주소(晝宵)로 왕래하는 이 안동(安東)으로서 갑자기 1시간이 늦어지는 것도 처음 안동을 지나는 사람의 주의를 끄는 바이거니와 자꾸 몰려들어오는 사람도 푸른 의복을 입은 중국인, 거리로 다니는 사람도 모두 중국인임을 볼 때 과연 내가 다른 땅에 왔나 보다 하는 생각이 내 머리에 가득했다.
여기서는 50분을 머문다는 차장의 말을 듣고 나는 이것을 기회로 차에서 내려 망대로 올라가서 압록강의 위와 아래를 훑어보며 옛날 선교사들의 유적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통군정(統軍亭) 아래를 스치며 포장같이 퍼져 있는 압록강수여.
사막같이 황량한 조선 반도로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들어가려다가는 내쫓기고 또 들어가면서도 낙망 실심을 하지 않고 용감하게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 힘 있는 기도를 올리는 장사들을 너는 얼마나 구경하였으며 또한 너는 그들이 탄 배를 이리 옮겨다 주고 저리 옮겨다 주다가 마침내 그들이 내리지 못할 때 마음의 답답함을 얼마나 맛보았는가? 그리고 너는 다시 네 몸을 얼게 하여 그 위로 그들을 건너게 하였지….
1794년 12월에 건넌 중국 신부 주문모를 비롯하여 류방제(劉邦濟) 모반월 샤스탄암벨, 김대건, 최도마를 차례로 네가 다 건네 주었지! 조선의 가장 긴 강으로서만 우리가 너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요단강으로 생각하여 너를 자랑하며 생각하는 바이다.
모반과 같은 이는 밤에 너를 건너가려다가 성문이 닫혔으므로 할 수 없이 물이 좔좔 흘러 내리는 수구(水口)를 깨고 들어갔고, 김대건과 같은 이는 이태, 삼 년을 만주 벌판에 두루 돌아다니며 들어갈 곳을 찾다가 마침내 너를 건너 들어갔다.


그때보다 변함없는 산하(山河)를 바라보며 그들이 활약하던 귀한 자취를 더듬어볼 때 하염없는 눈물은 나의 뺨을 적시고 나는 혼자서 낮은 목소리로 반도를 향하여, “멀리 가서 이방 사람 구원얻지 못하되 / 네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 / 천사같이 말 못하고 바울같지 못하나 / 예수께서 구원함을 아무쪼록 전하세”의 찬미를 의미 있게 불렀다.

봉천행(2)–「기독신보」 1930년 3월 12일
남으로 반도의 산하를 바라보고 아래로 압록강의 긴 물을 굽어보면서 옛날 선교사들이 당하던 천신만고를 회상하는 동안 어느덧 안동역의 50분도 끝을 맺고 차는 슬금슬금 떠나가기 시작한다.

_우리가 손님이냐, 저들이 손님이냐
안동역에서 떠날 때만 해도 흰옷을 입은 우리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는데 한 정거장을 지나고 두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여기서 내리고 저기서 내려 점점 줄어가고 차가 머물 때마다 오르는 이는 푸른 의복을 입고 털 모자를 쓴 시커먼 중국 사람뿐이다.
차창으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인물 풍속이라든지 차 안에 퍼져 있는 모든 언어 자태는 의심 없이 나로 하여금 외국에 발을 들여놓은 손님의 감상을 가지게 하지마는 봉황산 앞에 위위(魏魏)히 솟아 있는 고려산(高麗山)의 높은 봉우리와 그 머리와 허리를 둘러 있는 것은 성벽은 수천 년 전 우리 조상이 이 땅을 차지하였으며 우리 조상의 해골이 이곳에 묻혀 있음을 나에게 말해주고 있으니 처음 이 땅에 발을 들여놓는 나나 이 벌판에 흩어져 사는 이백 만의 우리 동포가 과연 손님이 아니라 지금 주인 노릇하고 있노라 하는 저들이 도리어 손님이 아닌가!

_청(凊) 태조의 창업지, 석일심양 금봉천(昔日瀋陽 今奉天)
해는 지매 매일 저녁마다 조선에 드리우는 어둠의 장막이 만주 벌판에도 드리웠다. 안동에서부터 험한 산을 뚫고 달려오던 기차는 이제부터 험한 산은 없으나 어둠의 장막을 찢고 달아난다. 어렸을 때 부르던 세계 일주가의 한 구절을 부르며 차창을 내다보는 동안에 차장은 표를 달라고 하면서 내리기를 권하니 이것이 중국 동삼성(東三省)의 수부요 옛날 청 태조의 창업지인 심양성 곧 오늘의 봉천성이다.
평양보다 퍽이나 추운 봉천역두에 목도리 털수건으로 얼굴을 쳐 동이고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내렸다. 여기만 해도 아는 이가 많지 못한 곳에서 일부러 나와 맞아주신 이곳 교회의 백영엽(白永燁) 목사와 충남 공주 영명학교 교원으로 이곳에 여행 오신 한 선생의 손을 잡을 때 두 몸 사이에 서로 통하는 뜨거운 핏줄은 이역의 동포애를 웅변으로 설명하고 있다.

_재미있는 일 주간 도서관 통학 생활
원래 금번 여행이 봉천에 있는 신학교 도서관에 와서 사기 자료를 수집하며 옛적 책을 구경하고자 함이므로 하룻밤을 지내고는 즉시 백 목사와 함께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신학교를 찾아간다. 이 장로교회는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에 중국 선교를 시작한 중국에서 공헌이 많은 선교회뿐 아니라 일찍이 이 선교회 선교사 중에 윌리암손 목사는 토마스 목사를 조선으로 파견하여 조선 선교의 귀한 일을 시작하였고 또한 로스 목사는 조선문(文)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귀한 사업을 경한 관계로 우리 조선 교회와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신학교 교장 잉글스 목사를 만나 온 뜻을 말하고는 그의 친절한 인도에 의하여 이날부터 도서관 생활을 시작한다. 별로 크지 않은 신학교이고 도서관에 책이 그다지 많지는 않으나 나에게 필요한 서적이 적지 않게 많이 있다. 책을 보면 오금을 쓰지 못하는 나로서 퍽도 재미있게 한 주일 동안을 도서관에서 생활하며 특히 남경 금릉대학을 졸업하고 이 신학교 교수로 와 있는 중국인 손 선생과 더불어 이따금 쉴 시간을 이용하여 중국 교회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는다.
우리가 보통으로 단기간에 교회가 장족의 진보를 하였다 하여 사람을 대할 때마다 자랑하는 일이 많이 있지만 중국 교회에서 발행하는 신문잡지 수 삼십 종이 이 도서관 책상에 놓여 있음을 보고 우리의 기관지로 기독신보, 종교교육, 아이 생활, 유년신보진생, 신생 등의 몇 가지를 꼽아볼 때, 무거운 땀방울은 나의 이마로부터 책상 위에 소리를 치며 떨어지고 있다.
기독신보 한 부를 보라고 하여도 이리 핑계하고 저리 핑계하여 참으로 권하는 사람의 피를 마르게 하는 것이나 무엇하나 유익한 일을 해보자 하여도 코웃음을 하고 있는 우리 교회 형편과 비교할 때 과연 천양의 차가 있지 않은가. 30만!의 적지 않은 우리들은 반드시 이 점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한다.

봉천행(3)–「기독신보」 1930년 3월 19일
_봉천서탑일우옥(奉天西塔一隅屋), 만주문제좌담회(滿洲問題座談會)

하루는 도서관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은 후 백 목사를 비롯하여 교회의 직원 여러분과 청년 신자 몇 분이 모여 앉아 우리 민족 사활의 중대성을 띠고 있는 남만(南滿) 문제 좌담회를 열었다.
마디마다 서린 슬픈 사정과 골목마다 쌓여 있는 원한을 붓으로 다 그려내기 어렵거니와 복배(腹背)로 어려움을 당하여 진퇴유곡의 딜레마에 빠져 있음을 어느 누가 부정하랴.
각 사람의 남만 문제 해결책을 지면관계로 일일이 소개키 어려우나 백 목사의 고견만을 소개하여 여러분의 참고가 되게 하고자 한다.

_제일 해결책으로 중국 교회와 악수
역사상으로 남북만주가 우리 소유였다고 지금 도로 내놓으라고 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우리를 내쫓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면서 다시 우리는 이 땅에서 안 살고 나가겠다고 도로 짐을 싸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올 수도 없다. 그러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 문제 해결의 열쇠는 중국 사람에게 있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있지 않다. 전혀 우리에게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까 함이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생각한다. 이 문제 해결의 제1칙은 만주에 있는 조선 교회와 중국 교회의 악수에 있다고. 조선 교회와 중국 교회가 모두 만주에 있어서 일대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만이 이유가 아니라, 한 그리스도를 믿으며 한 십자가를 향하여 박애의 정신을 고취하고 있으므로 이 두 교회가 악수하는 때에는 중국 관헌의 조선인 구축 문제가 별일이 없을 것이다.

_양 교회의 악수는 어떻게 실현할까
그러면 이 다음에는 어떻게 두 교회가 만주에 있어서 악수할 수 있을까 함이 문제가 된다. 우리 내지에 있어서 연합공의회처럼 그런 형식으로 연합하며 교통할 수도 있으나 우리는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역자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부터 조국의 교역자와 함께 공부하여 참 친구가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참 형제가 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교회 사상(思想)의 통일로 본다든지 교회 정치의 일치로 보아 지금과 같이 남북만주의 교역자들이 평양이나 경성에 와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위에 말한 목적을 실현하며 만주에 있는 조선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도도 좀 낫고 어떤 면으로 보아 미비한 점도 있으나 동삼성(東三省) 교회를 지배하며 교역자를 양성해내는 봉천 스코틀랜드장로회신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봉천행(4)–「기독신보」 1930년 3월 26일
_만주의 장감(長監)교회 합하여 하나 되자

만주에 있는 조선 사람은 통어하는 기관이 없는 이만큼 하나가 되지 못한다. 사상 단체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그밖에 모든 것도 하나가 되지 못한다. 오직 교회만이, 장로회면 장로회, 감리회면 감리회가 각각 단합하여 한 발걸음으로 나아간다. 안으로 합(合)이 되지 못하고 밖으로는 중국 관헌의 구축이 있으니 만주에 있는 조선인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내지에서는 장로회와 감리회가 있어서 각각 잘 해나가기에 열중하는 것도 관계치 않으나 만주에 있어서 이백만이라는 동포를 구원하며 그들로 하여금 한 덩어리가 되어 같이 어려움을 당하자고 하는 교회로는 모든 이론과 조건을 일소해버리고 하나 돼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문맹타파, 풍속 개량, 사상선도, 그 밖의 모든 일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_내지(內地) 수재(秀才) 청년의 중국 유학을 요망
근일 내지에서 좀 쓸 만한 수재이면 전부 일본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더 문명한 나라로 가서 가진 지식과 가진 학술을 연구하는 것도 좋기는 하나 남만(南滿) 문제 해결의 한 수단으로 내지 수재(秀才) 청년들의 중국 유학을 크게 환영한다.
중국의 사정을 잘 알기만 해야 된다는 것보다 중국 학교의 교원이나 중국 법정의 관리나 변호사나 그 외 각 관청의 관리로 임명이 될 수 있다. 중국 관청의 관리가 되어야 만주에 있는 조선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깊은 산골에 있는 중국 소학교 선생만 되더라도 그 근경에 있는 중국 사람은 전혀 그를 숭배하고 그의 말이면 그대로 시행하지 않음이 없다.
예로 들자면 북만주 길림성에 있는 오(吳) 모라는 사람은 그곳에 있는 다섯 관청의 관리인데 그의 말이라면 동삼성을 통하여 대단히 힘이 있으며 동포의 어려움을 많이 도와준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사람이 봉천에도 한 사람 있다.
이제 만일 내지로부터 수재 청년들이 중국으로 들어와 상당한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고 만주 넓은 곳에 곳곳이 헤어져서 혹은 관청 혹은 학교에서 일을 볼 것이면 지금까지 어려움을 당하며 중국인에게 구축을 당하던 우리의 동포는 한 번 변하여 평안한 생활을 하게 될 줄로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 스스로의 해결책이 아닐까.

봉천행(5)–「기독신보」 1930년 4월 9일
_서탑대가(西塔大街) 아침종 누구를 오라느냐

29일은 주일이다. 새벽부터 자동차 마차 중국 인력거군이 싸우는 소리로 북썩끌는 서탑대가의 높은 종탑에서는 아침 하늘에 처량스럽게도 종소리를 울려보내고 있다. 물론 내지에서도 아침 하늘에 흐르는 예배당의 종소리가 듣는 이의 마음에 심히 유쾌한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더욱이 이역 하늘에 흐르는 이 종소리는 곤하고 번민하는 재류동포 5,000인에게 완연히 ‘곤한 자여 들으라 너를 오라 하신다 네게 힘을 주시려 오라 하신다.’라고 말하며 외치는 소리와 같이 들린다.

_백 목사의 열심과 완비(完備)한 교회 기관
아침을 필하고는 즉시 종소리를 따라 예배당을 향해 간다. 동포들의 붉은 정성을 모아 지어놓은 얌전한 벽돌 예배당도 보기에 심히 아름답거니와 흰옷 입은 그대로 250명이나 가득히 모여 있는 동포들의 사랑하는 얼굴을 대할 때 얼굴에는 즐거움이 뿜어 나오고 입으로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감사와 기쁨이 서로 얽힌 중에서 한 시간의 예배를 지내고 돌아와서는 다시 백 목사로부터 교회의 형편을 듣는다. 본래 거친 바람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세운 교회니만큼 무엇에든지 빈약하리라는 것이 누구나 가질 바 생각인 듯하나 백 목사의 열성 있는 지도에 의하여 실상은 그와 정반대로 모든 기관이 완비되어 있다. 청년면려회를 비롯하여 유치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완전하여 재류동포 5,000인의 운명을 지배해 나가겠다는 굳은 생각으로 목표를 삼고 나아가는 중이다. 지금 궁상(窮狀)에 빠져 신음하는 그들도 마침내는 이들의 힘있는 팔뚝과 이들의 튼튼한 손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빛에 목욕을 하며 단샘의 물을 마시게 될 날이 머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_청(淸) 태조는 안재(安在)오, 동북능변풍소소(東北陵邊風蕭蕭)
30, 31일 두 날밖에는 봉천에 더 머물 수가 없다. 그러므로 30일 하루 동안은 부지런히 책을 보고 31일 정오에는 스코틀랜드장로회신학교 졸업식에 참예한 후 오후 1시 반에는 친구 몇 사람과 함께 북으로 10리가 훨씬 넘는 북릉을 찾아간다. 이 북릉이란 청 태조의 아들 효종(孝宗)의 능이고 청 태조의 능은 동릉이라고 하여 봉천에서 동편으로 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웅대한 건축과 기묘한 조각은 200년을 지난 오늘에 있어서도 관람객으로 하여금 혀를 두 치 이상이나 빼어 물게 하지만 청 태조와 효종은 지금 어디 있는고. 능 주위에 둘러 있는 울창한 송림은 처음 얼굴을 대하는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에 흔들거리면서 소소한 소리만 발하고 있다.

봉천행(6)–「기독신보」 1930년 4월 16일
5일간의 봉천 두류(逗留)도 재미있게 끝을 맺고 31일 밤 10시 차로 이제는 고국을 향하여 떠나게 되었다. 잡답한 봉천역두 더군다나 보통이 메고 말소리 크게 하는 중국 사람의 틈에 끼어서 간신히 침대에 자리를 정하고는 봉황성 정거장에 이르기까지 별로 깨지 않고 깊은 꿈나라로 들어가 며칠 동안의 곤한 다리를 평안이 쉬었다. 험한 봉황산이 차창을 통하여 어른어른 비치며 이제는 내가 내렸다 가려는 고려문(高麗門) 정거장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할 때 어느덧 차는 머물고 차장은 꺼리멘 꺼리멘을 연하여 부른다.

_고려산하 고려문(高麗山下 高麗門), 이것이 책문(柵門)인가
차에서 내리니 이날은 바로 1월 1일 오전 5시. 정거장을 비롯하여 부속지대에 있는 일본 사람의 집 문에는 집집마다 우리 세력이 이만큼 팽창되었다고 말해주는 듯이 국기가 아침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다.
역장실을 찾아 들어가 역장과 더불어 신년 인사 겸 성명을 통하고는 조선교회사기(史記)의 한 페이지를 점령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고려문을 찾아보러 왔다고 하매, 역장은 친절하게도 사무원 중 한 사람을 명하여 나를 데리고 고려문을 찾아간다.
고려문 시가의 집 문은 아직도 굳게 닫혀 있고 먼 동리로부터 개 짖는 소리는 은은히 들리는데 고려산 기슭 길 옆에 서 있는 늙은 소나무와 밭 가운데 우두커니 지키고 있는 오랜 버들나무는 먼 데서 온 손님을 영접한다는 것보다도 자기 혈족을 맞는 듯이 가지에 안고 있던 눈송이를 우수수 떨치고 있다.
정거장에서 얼마 가지 아니하여 나를 인도하는 역부는 이것이 고려문자라고 하면서 아직도 앞산 중허리에 남아 있는 이전의 울타리를 가리키고 있으니 이것이 옛날의 유명한 소의 책문인가.

_고려문 옛터 둘러 반반(斑斑)한 눈물 자취
역장 도변(渡邊) 씨가 기록해둔 「고려문(高麗門)과 변장(邊牆)」이라는 기록을 보면 이 고려문은 청 태조가 만주에 나라를 세우자 조선 방면에 방비를 하기 위하여 장책(長柵)을 치고, 위원(威遠), 영액(英額), 왕청(旺淸), 성창(城廠), 애양(靉陽), 고려의 6문을 두었다.
이 고려문은 이 6문 중 하나로 지금 그 문은 없어졌지만 아직도 그 자취는 남아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개무량한 회포를 자아내게 한다.
정치적 의미로서의 이 문은 내가 지금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으며 또한 본보(本報)를 통하여 소개하려고도 하지 않으나 조선교회사 상으로서의 이 문은 우리가 주의를 일으켜 한 번 더듬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은 본래 두 나라의 교통을 조절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니만큼
1년에 세 번씩 조선과 중국 사람이 이곳에 시장을 개설하며, 조선의 동지사(冬至使)가 중국으로 갈 때 외에는 도무지 열지를 않았다.
그러므로 옛적 선교사들이 복음을 가지고 이 문을 깨서 조선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깨지 못하고 한 해 이태를 문 옆에서 기다리다가 그만 죽기도 하고 혹은 이 문을 깨고 들어오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후 긴 세월을 만주 벌판에서 헤매기도 하였다.
모세가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가나안 복지를 바라만 보고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이 책문을 깨지 못하여 들어오지 못하고 고려산과 봉황산 봉우리에 올라 멀리 반도를 바라만 보면서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던 옛 선교사들의 형편을 회상하며 그들의 활약하는 발자취를 더듬어 생각하니 과연 이 문을 둘러 있는 반반한 눈물 자취는 오랜 시일을 지난 오늘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심각한 교훈을 주고 있다.

봉천행(7)–「기독신보」 1930년 4월 23일
_낯익은 우물들과 남아 있는 무더기

다섯 시 차에 내렸다가 여덟 시 차로 곧 떠날 경영이므로 본래는 고려문의 옛터만을 구경하고 돌아올 계획이었으나, 아직도 차 시간이 한 시간 이상 남아 있고, 또한 왔든 바에는 고려산성과 성문 자리를 구경할 생각이 간절하다. 그리하여 역부와 함께 달음질로 성의 남문을 찾아간다. 튼튼한 성곽의 쌓은 구조가 조선에 있는 그것과 같음으로도 조선 사람이 여기서 살고 그들의 땀을 여기에 흘린 줄로 알 수 있지마는 더군다나 큰 돌로 덮은 우물과 길게 놓여 있는 빨래돌은 우리 조상의 유적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단숨으로 이 산성 남문자리에 이르니 황무한 풀밭과 흐트러진 돌짝밭이 둘러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디에 남문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게끔 되었으나 오직 길 한편에 남아 있는 돌무더기가 보는 사람의 주의를 이끌어 여기가 문 자리임을 알게 하여 준다.

_선천교회 찾아서, 대목산하 선천(大睦山下宣川)에
성문에서 돌아오매 차는 벌써 도착하여 오래지 않아 떠나려고 한다. 도변역장과 인도하여 준 역부에게 인사를 필하고는 다시 차 위에 몸을 싣고 평북교회의 중심지요 인구비례로 보아 신자 많기로 유명한 선천교회를 찾아보려고 대목산하 선천으로 작행한다. 이날이 마침 삼일예배일이므로 예배시간이 되기 전에 모든 기관을 구경하고 예배시간에는 남북 양 교회에 참석하여 교회 형편을 보기로 하였다. 일찍이 전문학교 시대의 동창생으로 지금 명신(明信)보통학교의 교장인 장애경(張愛敬) 선생의 친절한 인도로 해지기 전에 신성보성량남녀학교를 비롯하여 명신학교, 유치원병원, 그 밖의 모든 기관을 차례로 구경한 후 두 교회 예배에 참석한다. 1월 1일이니만큼 두 교회에서는 다 기념회로 모여 지난 1년간의 경과 상황을 보고하며 앞으로 1년 동안을 위한 예산을 통과시킨다. 보고에 의하면,

1. 북교회
(1) 직원 231, 교인 1651
(2) 경비 6,173원 27전
(3) 재산총액 28,095원 67전
2. 남교회
(1) 직원 206, 교인 1957
(2) 경비 5604원 91재
(3) 재산총액 2850원 56전


한 시간 동안에 두 교회를 찾아보게 됨으로 두 교회의 목사를 고로히 찾아보지 못하였으나 교회를 떠메이고 이만큼 나오기에는 그들의 흘린 땀이 얼마나 되었을까. 그중에도 량전백 목사의 공적은 조선교회에 대하여도 적지 않거니와 특별히 이 선천교회에 대하여서는 심히 크다. 대목산에서 홀로 내려오는 큰 시냇물이 이 선천 남북 양 교회의 사이를 꿰여 흐르는 것처럼 앞으로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의 물이 이 두 교회를 꿰어 통하기를 빌면서 이튿날 아침 차로 많은 친구의 전송리에 평양을 향하니 이로써 동경하고 기다리던 봉천 여행은 무사히 끝을 맺었다.

 
 
 

2020년 7월호(통권 739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