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이슈] 코로나바이러스-19
교회와현장 (2020년 4월호)

 

  1918년의 대역병 인플루엔자와 조선총독부의 대응
  

본문

 

* 이 글은 필자의 논문 “1918년 독감과 조선총독부 방역정책”, 「인문논총」(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7) 74권 1호: 163-214를 발췌·요약하고,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여 보완·재구성한 것이다.


1918년 인플루엔자 범유행
흔히 ‘스페인 독감’(Spanish flu)이라고 불리는 ‘1918년 인플루엔자’(1918 influenza)의 범유행(pandemic)은 여러 연구자가 지적하듯이 단일 원인으로 발생한 20세기 최초이자 최악의 인구학적 재난이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여에 걸쳐 진행된 제1차 세계대전이 900-1,000만 명의 전사자를 낳았다면, 1918년 봄부터 1919년 봄까지 단 1년 동안 범유행한 인플루엔자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적게는 2,000만 명 이상, 많게는 1억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1918년에 범유행한 인플루엔자가 이른바 ‘스페인 독감’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당대 사람들이 스페인을 인플루엔자 유행이 처음 시작된 지역 또는 유행이 매우 심한 지역으로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이 유럽의 다른 교전국들과 달리 언론 통제를 하지 않아 자국 내 인플루엔자 유행 사실이 검열 없이 보도된 데에서 비롯하였다.
감염병의 과거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람들은 악성 유행병인 역병(疫病)이 발생할 때마다 특정 지역을 유행의 발원지로 거론하거나 특정 대상을 희생양으로 삼으며 남의 탓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 2015년 5월 신종 감염병의 명명에 대한 지침을 제시하면서, 특정 지명이나 인명, 동물명, 문화, 집단, 직업 등을 피하라고 권고한 데에는 모름지기 이러한 역사적 기억도 작용했을 것이다.1
1918년 인플루엔자처럼 바이러스 유전자가 대변이를 일으켜 비주기적으로 세계적인 대유행을 유발하는 범유행 인플루엔자(pandemic influenza)는 겨울철마다 주기적으로 유행하는 일반적인 계절 인플루엔자(seasonal influenza)와 달리 그 치명률이 매우 높다. 이러한 이유로 범유행 인플루엔자는 1918년 이후 지금까지 1957년(아시아 독감, 100-400만 명 사망), 1968년(홍콩 독감, 100-400만 명 사망), 2009년(돼지 독감, 우리나라에는 ‘신종 플루’로 알려짐, 28만 4,000여 명 사망) 등 세 차례 더 유행하면서 그때마다 수많은 사망자를 낳았지만, 1918년 인플루엔자 수준의 파괴성을 넘어서지는 못했다.2 최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COVID-19)에 대하여 세계보건기구는 범유행을 선언했으나, 현재까지의 상황만을 놓고 볼 때에는 1918년 인플루엔자의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1918년 인플루엔자 범유행의 역학적 특징
이미 잘 알려진 대로, 1918년 인플루엔자 범유행의 역학적 특징은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세계적으로 크게 세 차례의 만연(wave)이 있었다는 것이다. 1차 만연이 처음 시작된 곳이 어디인지는 지금도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1918년 초 미국 중서부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미국에서 시작된 1차 만연은 전쟁이 한창이던 유럽으로 빠르게 전파되었고, 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이어 7월에 이르면 호주까지 확산되었다가 8월에 그 기세가 약화되었다. 그러나 8월 말, 곧바로 더 치명적인 2차 만연이 시작되었다.
2차 만연 역시 1차와 마찬가지로 어디서 처음 시작되었는지 분명치 않으나, 전장이던 서부 유럽, 아마도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치명률이 낮았던 1차 만연과 달리 2차 만연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변이로 독력이 강화되고 세균성 폐렴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대부분의 희생자가 이때 나왔다. 그리고 호흡기 감염의 특성상 대규모 군대와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증기선이나 철도 같은 교통망을 따라 급속히 확산되어, 1918년 겨울과 1919년 봄에 이르면 일부 고립된 섬과 외딴 지역을 제외하고 사실상 인간이 거주하는 세계 모든 곳으로 퍼졌다. 1919년 초, 다시 3차 만연이 시작되었으나 이는 2차 만연보다 덜 치명적이었고, 전파 규모도 이전과 비교하여 불분명했다. 한편 일부 지역에서는 1920년에도 인플루엔자가 지속되거나 다시 만연하는 듯한 양상을 보였는데, 이를 1918년 인플루엔자 범유행의 4차 만연으로 보아야 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3
이상의 역학적 특징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그대로 재연되었다. 치명률이 낮았던 1차 만연은 추정컨대 바로 그 이유로 해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보도조차 되지 않아 조선 내 전파 양상을 확인할 수 없으나, 2차 만연은 1918년 9월경부터 이듬해인 1919년 1월까지 이어지면서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수많은 사망자를 낳았다. 특히 1918년 10월부터 12월까지 3개월간은 유행의 극성기로, 사태가 범상치 않음을 깨닫게 된 총독부도 11월부터는 「매일신보」를 통해 관련 기사 제목에 ‘대공포’, ‘전멸’, ‘비극’, ‘참화’, ‘참상’, ‘대공황’, ‘몰사’(沒死)와 같은 자극적인 용어를 붙여가면서 전국 각지의 인플루엔자 유행 현황과 급증하는 환자 및 사망자 발생에 대한 보도를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냈다.
1919년 1월, 진정 국면에 접어든 것처럼 보이던 조선의 인플루엔자가 재유행의 조짐을 보이자 “구주 대전란(제1차 세계대전)의 전사한 사람보다도 훨씬 많은 사망자를 낸 돌림감기”에 대한 기억으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4 다행히 이 재유행은 2차 만연보다 덜 치명적이었던 3차 만연의 역학적 특징을 보이며 1919년 따뜻한 봄 날씨와 더불어 사그라졌다. 인플루엔자는 1919년 11월 초순부터 다시 유행하여 1920년 봄까지 이어지면서 많은 사망자를 냈으나 1918년 수준은 아니었다. 이후 1920년 겨울에도 다시 유행하였으나 이때에는 사망자가 많지 않았다.

1918년 인플루엔자 범유행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망했을까
1918년 인플루엔자로 사망한 전 세계 인구 규모에 관한 서구 학자들의 연구는 일찍이 192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현재까지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통계 결과는 1927년 미국에서 나온 것으로 1918년 인플루엔자로 인한 전 세계 사망자 수를 2,160만여 명으로 추정하였다.5 보수적인 통계를 선호하는 의학이나 미생물학 관련 교과서들은 대체로 지금도 여전히 이 수치, 즉 ‘2,000만 명 이상’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인플루엔자를 유발하는 원인 바이러스가 규명되기 이전이었던 당대의 진단 오류, 기록 누락과 같은 통계상 변수에 대한 고려와 함께 세계 각 지역별 연구 결과들의 누적으로, 관련 연구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총사망자 수를 점점 높게 잡아가는 추세이다. 그 결과 최근에는 추정 사망자 수가 5,000만-1억 명으로까지 증가하였으며, 연구자들은 기존 2,000만 명과 최근 1억 명 사이에서 각자 견해에 따라 사망자 수를 취사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만 모든 연구자가 동의하는 바는 1918년 인플루엔자로 죽은 정확한 총사망자 수를 집계해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망자 대부분이 1918년 8월부터 불과 6개월간 이어진 2차 만연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즉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사망해버렸기 때문에 1세기가 흐른 지금 사망자의 정확한 총수 집계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당시 시체들이 며칠씩이나 매장되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되었고, 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관이 부족하여 사망자들을 집단으로 매장해야 했다.
그렇다면 당시 일제 치하에 있던 식민지 조선에서는 2차 만연 시기에 해당하는 1918년 9월부터 1919년 1월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인플루엔자로 사망했을까? 1919년 3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휘보」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전년도인 1918년 조선에서는 인플루엔자로 755만 6,693명의 환자가 발생하였고 이 가운데 14만 527명이 사망하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조선인은 환자 739만 414명 중 사망자 13만 9,137명, 일본인은 환자 15만 9,916명 중 사망자 1,297명, 중국인은 환자 6,079명 중 사망자 93명, 기타 외국인(선교사 등)은 284명의 환자만 발생하였고 사망자는 없었다.6
이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관련 자료들을 검토해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여서 당시 총독부가 1918년 인플루엔자로 인한 총사망자 수를 14만 527명으로 공식화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1918년의 인구 추정치 1705만 7,032명의 거의 1%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이를 다시 환산하면 인플루엔자 감염에 의한 사망률은 0.82%로서, 1918년도 인구 1,000명당 8.2명이 인플루엔자로 사망한 셈이다. 1918년 인플루엔자에 의한 전 세계 사망률을 추정한 서구의 연구들을 보면, 최소 0.25%에서 최대 2.17%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은 결과들을 산출하고 있는데, 이와 비교해보면 조선에서는 공식적으로 평균 수준의 사망자가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사망자 수는 조선총독부의 공식 통계 기록을 상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총독부 통계는 1919년 초의 3차 만연 결과를 반영하지 않은 것이고, 후술하겠지만 당시 식민지배를 받던 조선인들은 경찰이 직접 가가호호 순시하면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감염병 환자를 적발해내는 과정에 비협조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조선인들은 식민지의 지배자로 있던 일본인들과 달리 가족 중 감염병 환자가 발생해도 자진해서 신고하기보다는 숨기는 경우가 많았던 까닭에 총독부의 공식 통계 역시 실제를 정확히 반영한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1918년 인플루엔자는 식민지 조선에 어떤 경로로 유입되었을까
1918년 당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세균학 교수로 재직한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는 이듬해인 1919년 발표한 공동연구 논문에서 1918년 인플루엔자가 식민지 조선에 유입된 주 전파 경로로 남만주철도 선로(line of the Southern Manchurian Railway)를 지목하였다. 그리고 인플루엔자가 이 경로를 통해 유럽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 북부로 유입되었음을 사실상 확실시하였다.7 스코필드가 언급한 남만주철도란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지는 이른바 시베리아횡단철도(Tran-Siberian Railway)의 만주 구간인 동청철도(Chinese Eastern Railway) 남만주 지선(支線)을 가리킨다.
1918년 인플루엔자가 남만주철도 선로를 따라 한반도 북부에서 남부로 퍼졌다는 스코필드의 견해는 이후 서구와 한국의 관련 연구자들에 의해 타당한 논거 제시 없이 부정되었다. 대신 인플루엔자가 대서양 횡단 선박들을 통해 북미에서 동아시아로 유입되었다거나 중국에서 목포와 같은 남쪽 항구를 통해 한반도로 유입되었다는 식의 추정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들 추정은 현재로서는 사료의 직접적인 뒷받침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반대로 당대 사료인 「매일신보」의 관련 기사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오히려 스코필드의 견해를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1918년 인플루엔자에 관한 「매일신보」의 첫 기사는 한반도 북부인 평안북도 강계군에서부터 시작한다. 10월 11일 자 지면에 실린 이 기사는 “몹시 아픈… 유행성 감기”가 “9월 23일경부터” 강계군에 발생하였으며 “그 전파력이 자못 맹렬”하여 “각 관청과 같은 데도 약 반수의 결근자가 생기고 지금도 자꾸 환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8 이후 보도된 기사들의 내용 추이를 보면 인플루엔자가 만주를 기점으로 철도망을 따라 한반도 북부에서 빠른 속도로 남하하여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는 스코필드의 당대 견해가 후대 연구자들의 추정보다 더 타당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1918년 인플루엔자 범유행에 조선총독부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식민지 조선과 만주를 일체화하여 러시아를 견제하면서 대륙으로 나아가려는 북진정책을 확립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일본 육군의 대륙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로 전락한 식민지 조선의 치안 확보와 이를 통한 식민지배의 안정을 위해 조선 의병 진압의 주력이었던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을 군사경찰화한 강력한 헌병경찰제도를 도입하였다. 1910년대 일제 무단정치의 핵심 기구였던 헌병경찰체제는 그 성격상 조선인에 대한 일상의 폭력성을 수반하고 있었다.
이러한 헌병경찰제도를 주관한 기구는 총독부 산하 독립 관서인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였다. 경무총감부는 1912년 이후 식민지 조선의 공중위생 및 방역과 관련한 사실상 모든 행정을 총괄하면서 헌병경찰의 고압적인 무력을 앞세워 의식주는 물론 조선인들의 일상 전체를 통제하는 거대한 권력기관으로 성장해나갔다. 특히 위생과 방역에 관한 한 경무총감부와 헌병경찰의 위세는 전문기관인 병원이나 전문직인 의사보다 높아 오히려 이들을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다. 민족사적 사건이었던 3·1운동의 여파로 1919년 8월 경무총감부가 폐지된 뒤에도 경찰이 위생행정을 주관하는 경향은 일제강점기 내내 유지되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의 위생행정은 기반시설 확충과 전문인력 확보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한 장기적인 투자보다는 한정된 경찰력을 동원하여 피해를 차단하는 데 급급한 단속 위주의 사후 처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도 경무총감부가 가장 중시한 방역 수단은 경찰이 가가호호 순시하면서 직접 감염병 환자를 적발해내는 검병호구조사(檢病戶口調査)였다. 이론상 급성감염병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환자의 조기발견이라 할 수 있는데, 경무총감부는 경찰의 검병호구조사가 이러한 조기발견에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1910년 병합 직후부터 계속 사무분장규정을 개정하고 위생 및 방역과 관련한 법규들의 입안을 주도해나가면서 경무총감부가 구축해놓은 방대하고 무단적인 방역체계는 1918년 전 세계를 휩쓸다시피 한 신종 인플루엔자의 출현 앞에서 일거에 무력화되고 말았다. 경무총감부가 공들여 입안하고 1915년부터 시행에 들어간 전염병예방령과 그 하위법인 전염병예방령시행규칙, 선박·기차·여객검역규칙 등은 헌병경찰이 방역의 주체임을 명시해놓았음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요컨대 1918년 인플루엔자 유행 시기 경무총감부의 신속하고 체계적인 대응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인플루엔자가 “감기라는 이름을 가져 전염병에 관한 법률을 적용할 수도 없는 터”였기 때문이다.9 인플루엔자는 일제가 전염병예방령 제1조에서 규정한 법정감염병인 콜레라, 홍역,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두창, 발진티푸스, 성홍열, 디프테리아, 페스트 등 9종에 속하지 않는 감염병이었다. 하지만 인플루엔자가 법망을 벗어난 감염병이었던 까닭에 당장 적용하여 조처를 취할 마땅한 법적 수단이 없었다 하더라도, 당시가 북진 대륙정책을 우선시한 무단정치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무총감부가 보인 방역의 난맥상은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매일신보」의 보도 추이로도 짐작할 수 있듯, 경무총감부는 인플루엔자가 남만주철도와 연결된 경의선을 따라 만주에서 신의주를 거쳐 경성, 그리고 전국으로 확산된 정황을 이미 포착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무총감부가 국경인 신의주역에서 기차 검역을 시행했다거나 또는 이후 중국에서 입항하는 선박의 검역을 시행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인플루엔자로 인한 세계 멸망의 조짐까지 기사화하고 있던 급박한 상황에서 산하의 일선 경찰서와 헌병분대 등을 동원하여 경무총감부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결국 그들 스스로 환자 조기발견에 가장 유효하다고 인정한 호구조사에 집중하면서 이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집계하는 것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선 경찰이나 헌병 역시 이환자와 사망자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해 정황상 속수무책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반면 “경성에서도 매일 15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해 화장장이 부족해지자 어쩔 수 없이 노천에서 화장하는 상황”10에 이르렀을 만큼 인플루엔자 창궐로 인한 죽음이 일상화된 조선인들에게 이전부터 일상적인 폭력의 주체였던 헌병경찰의 무능한 대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를 자아내게 했을 여지가 충분하다.

나오는 말
1918년 인플루엔자 범유행은 일제 무단정치기의 막바지인 1918년 9월부터 1919년 1월까지 5개월 동안 식민지 조선에서만 전 인구의 거의 절반 가까이 이환시켜 이 가운데 14만여 명 또는 그 이상의 사망자를 낳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제는 인플루엔자로 특히 조선인이 많이 죽는 이유가 무모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조선인들의 치료 방법에 있다면서 조선인의 무지만 탓하였다. 위생과 방역을 명분으로 특히 지방 농민들에게 구타와 모욕을 동반한 강압적인 청결검사와 검병호구조사를 주기적으로 시행하고, 심지어 매장까지 간섭하며 의식주와 죽음 등 조선인의 일상 전체를 지배했던 자신들의 오만과 무단성에 대한 성찰은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1918년 인플루엔자 범유행은 무단정치 10년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경무총감부와 헌병경찰의 해체를 초래한 1919년 3·1운동의 한 도화선이 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후대 조선총독부의 한 일본인 관리의 “조선인은 위생 사상이 유치하므로 그 불결한 것을 관변에서 간섭하였더니 그것에 반감을 많이 가졌었다. 그리하여 그 반감이 삼일운동의 중대한 한 원인이었었다.”11라는 평가가 이를 일부 뒷받침한다.
1918년의 식민지 조선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인하여 쌀값 폭등과 같은 물가 등귀 현상이 나타났고, 이어진 기근에 의해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그 결과 전국 단위의 소요와 파업이 발생하였다. 이에 더하여 이 글에서 살펴본 신종 인플루엔자로 인하여 수많은 사망자까지 발생함으로써 한계 상황을 넘어선 심각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12 헌병경찰을 앞세운 기존의 무단적 대처로 인플루엔자 방역에 실패한 경무총감부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도처에서 죽음의 일상화를 목격하게 된 조선인 피지배자들은 이에 절망감을 넘어 분노까지 느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쌀값 폭등과 기근, 그리고 이어진 인류사적 역병인 1918년 인플루엔자의 창궐과 총독부의 무능한 대처가 맞물리면서 식민지 조선에는 우연히도 인류 멸망의 환난을 현실화한 것 같은 종말론적 무대가 제공되었다. 따라서 1918년 인플루엔자 유행이 가라앉자 곧 터진 3·1운동에서 구시대의 종말과 현세적 유토피아의 도래를 동시에 읽어내려는 후대의 시도가 있음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다.13 그러나 그렇다 하여 3·1운동이 가지는 민족사적 의미와 자발적 역동성이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역경 속에서도 한국인들이 의식적으로 일제 식민통치의 무단성에 맞서 전국적인 저항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1 WHO, World Health Organization Best Practices for the Naming of New Human Infectious Diseases(World Health Organization, 2015).
2 WHO, Report of the Review Committee on the Functioning of the International Health Regulations (2005) in relation to Pandemic (H1N1) 2009(World Health Organization, 2011), 37; Fatimah S. Dawood et al., “Estimated global mortality associated with the first 12 months of 2009 pandemic influenza A H1N1 virus circulation: a modelling study”, The Lancet Infectious Diseases 12/9(2012).
3 Howard Phillips・David Killingray eds., The Spanish Influenza Pandemic of 1918-19: New perspectives(London&New York: Routledge, 2003).
4 “目下의 感氣도 업시 역이지 마라, 악성의 병균이 아직도 남엇다”, 「每日申報」, 1919년 1월 10일, 3면.
5 Edwin Oakes Jordan, Epidemic Influenza: A Survey(Chicago: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1927).
6 “流行性感冒”, 「朝鮮彙報」 大正八年 三月號: 82-89.
7 Frank W. Schofield, H. C. Cynn, “Pandemic influenza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 to its etiology”, The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72/14(1919).
8 “平北 江界郡에 惡性의 流行病, 몹시 압흔 감긔”, 「每日申報」, 1918년 10월 11일, 3면.
9 “流行前에 豫防라”, 「每日申報」, 1919년 2월 5일, 3면.
10 『京城府史』, 第3卷(京城府, 1941), 704.
11 “朝鮮人과 衛生, 惡宣傳의 一例”, 「東亞日報」, 1927년 2월 1일, 1면.
12 이정은, “《매일신보》에 나타난 3·1운동 직전의 사회상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집(1990).
13 권보드래, “‘만세’의 유토피아: 3·1운동에 있어 복국(復國)과 신세계”, 「한국학연구」 38집(2015).



김택중 | 인제의대를 졸업하였고, 의사학(醫史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 “1918년 독감과 조선총독부 방역정책”, 저서로 『한국전염병사 Ⅱ』(공저) 등이 있다. 현재 인제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주임교수,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대한의사학회(大韓醫史學會)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게시물은 대한기독교서회님에 의해 2020-04-28 15:22:41 특집에서 이동 됨]

 
 
 

2020년 4월호(통권 736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