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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이슈] 코로나바이러스-19
교회와현장 (2020년 4월호)

 

  신천지와 코로나19
  

본문

 

* 이 글은 코로나19의 확산 이후 작성한 아래의 글들을 편집·보완한 것이다. “데자뷰, 세월호·구원파 vs. 코로나·신천지”, 「현대종교」(모바일)(2020. 2. 22); “신천지도 국민이라면”, 「한국기독공보」(2020. 2. 25); “신천지 없는 신천지를 꿈꾸며”, 「국민일보」(2020. 3. 3); “이만희의 목소리”, 「한국기독신문」(2020. 3. 10).

코로나와 세월호 데자뷰
그때도 지금처럼 사순절 기간이었다. 부활절을 앞둔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하루하루였다. 코로나19가 위협하는 오늘을 바라보면, 마치 2014년으로 시계가 되돌아간 듯하다. 세월호 사건과 함께 구원파가 언급되기 시작했고, 구원파에 대한 동시다발적 이슈화와 사회적 비판이 이어졌으나 용두사미로 끝났다. 이후 구원파는 수많은 언론을 대상으로 정정·반론 보도를 신청했고, 언론사들은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를 쉽게 받아들였다. 그 후 결국 구원파는 대부분의 법적 소송에서 승소해왔고, 세월호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숙제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오늘날 코로나의 확산과 함께 신천지 이슈가 언론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신천지의 몰락을 앞당기기 위한, 정확하고 공신력 있는 비판과 대안 제시가 필요한 시점이다. 또 다시 시행착오를 범해서는 안 된다. 부정확한 비판과 감정적인 접근은 언제든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신천지의 교리적·조직적 특징으로 인해 코로나의 대규모 확산이 발생했다는 점을 우리는 사회에 설득력 있게 전달해야 한다. 이미 신천지가 교회에 침투해 문제를 야기했던 것처럼, 사회에도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
공권력은 어떤 문제가 발생해야 개입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언론 또한 마찬가지로 어떤 문제가 발생해야만 공론화가 가능하다는 한계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신천지의 실체를 사회에 올바르게 알리고, 추가적인 피해가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편 사회는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찾고, 언론은 손익계산을 하며 시청률에 집중하고, 총선을 앞둔 정치권은 이 사태를 이용하여 약삭빠른 표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된다. 만약 그렇다면 신천지는 ‘세월호와 구원파’처럼 수많은 정정·반론 보도의 홍수 속에서 재기를 모색할 것이다. “역사는 기억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교회는 신천지에 대한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 신천지를 맹공하는 언론들 중에는 신천지에 대한 (광고도 아닌) 긍정적인 기사들을 작성해 수차례 보도하고, 이를 통해 국민의 여론을 호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언론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언론의 사명은 ‘시청률’이 아니라 ‘사실과 진실’을 알리는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2014년 세월호와 구원파의 아픔과 시행착오를, 2020년 코로나와 신천지로 인한 좌절과 분노 속에서,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코로나19 공포 속의 온라인 예배
근래에 영상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일이다. 영상 예배에서는 <어려운 일 당할 때>라는 찬송을 함께 불렀다. 교회마저 갈 수 없는 낯선 상황을 경험하면서, 14세기에 발생하여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의 공포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월 지나 갈수록 의지할 것 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합니다”라는 가사처럼, 비록 사이버 공간에서의 예배와 교제였지만 회복의 소망을 마음속에 새겨보았다.
당황스러운 사실은, 정체를 감추고 가만히 숨어들어와 교회를 무너뜨리려던 신천지가 코로나19 확산의 근원지로 사회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신천지 다대오지파 대구교회에서 코로나 전파 및 감염이 이루어졌고, 흩어진 신천지 신도들로 인한 대규모 감염 확산의 공포가 아직 남아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단지 감염이 일어난 곳이 신천지의 거점 중 하나라는 이유만을 근거로 부정적 선입관과 부정확한 정보에 기초하여 무분별한 비난과 혐오를 나타낸다면, 이는 오히려 부메랑 효과로 돌아올 수 있다. 문제의 본질은 ‘어디서’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신천지가 ‘어떻게’ 접근하고 있느냐이다.
거액 기부가 아니라 신천지 지도부의 정직한 협조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도 의혹은 여전하고, 신천지는 점점 현대판 ‘양치기 소년’이 되고 있다.

코로나19에 비친 신천지의 왜곡된 세계관
신천지 신도들은 자신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감염 상태에서도 거리와 실내에서 거침없이 포교활동을 진행할 정도로 이만희 교주와 신천지 교리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생명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설령 대규모 확산이 일어나 사회가 위태로워지더라도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이웃의 안전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소위 ‘강제 개종’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위치추적과 동향파악에 탁월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감염과 확진의 위험을 안고 어디론가 잠적한 신도들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천지의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특히 코로나 사태를 “마귀의 짓”으로 바라보는 이만희 교주의 ‘특별편지’는 신천지의 왜곡된 세계관과 반사회성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분명한 사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교회와 사회에 지울 수 없는 부정적 이미지로 각인된 신천지의 몰락과 소멸을 앞당길 수 있도록 모두가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천지의 고립을 지켜보면서도, 떠오르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세월호와 구원파’뿐만 아니라 ‘최순실과 최태민’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오늘날의 ‘코로나와 신천지’ 사태처럼 똑같이 좌절하고 분노했다. 하지만 구원파는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거의 패소한 적 없이 여전히 건재하고, 국론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은 채, 오히려 피해자인 국민들만 양분되었다. 혹시라도 ‘코로나와 신천지’ 문제도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역설적으로, 불안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소망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기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불안정안 시국의 구한말에 전래되었고, 압제의 일제강점기에 뿌리내렸고, 고난의 6・25전쟁을 통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를 요동치게 하나, 우리에게는 최후 승리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이 있다. 그렇기에 “너 어려울 때 힘주시고 언제나 지켜주시리”라는 첫 영상 예배의 마지막 찬송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신천지 없는 신천지를 꿈꾸며
이단 신천지 없는 신천지, ‘새 하늘 새 땅’(계 21:1)을 꿈꾼다! 코로나19의 감염 확산을 방관하고 방조하는 듯한 신천지의 모습을 보며 처음에는 화가 났고, 지금은 점점 지쳐간다. 신천지의 특징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국민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신천지의 계속되는 거짓말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다.
자신이 신천지 신도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창피하고 괴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분이 탄로나는 순간까지 정체를 감추며,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 교리적으로 합리화된 이기적인 선택일 뿐이다.
신천지의 거짓말에는 멈춤이 없다. 첫째, 코로나19의 발원지는 중국 우한으로 알려져 있는데, 신천지 측은 우한의 신천지 교회가 2년 전에 폐쇄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부산 야고보지파가 제작한 집회 동영상을 보면, 우한에 신도들이 있다는 배너가 걸려 있고, 지파장은 설교를 통해 우한의 신천지 신도들은 한 사람도 감염되지 않았다고 언급한다. 우리 정부는 신천지 신도 일부가 우한을 방문했다고 발표했고, 중국 정부도 현재 신천지가 중국에서 활동 중이라고 확인했다.
둘째, 신천지는 소속 교회와 부속기관을 모두 합쳐 1,100개이며, 이를 모두 폐쇄조치했다는 대변인 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2020년 신천지 총회의 현황 보고자료에는 모임 장소가 총 1,529개로 나온다. 알려지지 않은 신천지 모임 장소들은 지금도 매일매일 속속 드러나고 있다.
셋째, 신천지 측은 연락이 닿지 않는 신도들의 소재를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신천지가 신도들을 통제하고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동향 파악 시스템의 우수성은 자타가 공인한다. 소위 ‘피드백’이라고 불리는 교신을 수시로 주고받으며, 때로는 위치추적기까지 동원해 신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신도들의 소재를 알 수 없다는 신천지의 해명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넷째, 모임 장소의 총 숫자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에 관하여 당국과 언론의 질타가 계속되자, 신천지는 신도들의 개인적인 모임 장소들은 파악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역시 거짓말이다. 신천지 지도부는 신천지 포교가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모든 장소를 파악하고 있다. 지도부는 육하원칙에 따른 상세한 포교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제출받고, 이를 기초로 후속 활동을 지시한다. 보고서에 기반한 등록신도 및 교육생들의 정확한 통계도 가지고 있다. 신도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신천지의 설명을 납득하기 어렵다.
다섯째, 신천지 이만희 씨는 자신을 불로불사(不老不死)하는 보혜사로 신격화한다. 그리고 신천지 신도 수가 14만 4,000명이 되면, 신도들도 불로불사하며 세상을 다스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2015년에 이미 신도 수가 14만 4,000명이 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 씨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신천지는 ‘거짓천지’이다. 매일매일 업그레이드되는 신천지의 거짓말은 이제 분노를 넘어 한숨과 한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 거짓말의 끝은 어디일까? 다종교 사회인 우리나라에서는 각 종교가 가진 자유를 존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신천지를 비롯하여 사회적 역기능이 예상되는 이단 단체들에 대한 관련 정부의 관리와 감독은 강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신천지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신천지의 대응 방식을 우리는 불신한다. 염려와 분노가 교차하는 오늘, 이단 신천지가 사라진 진정한 신천지,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꾼다!

시행착오를 지나 예방과 대처로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사회와 교회는 이단/사이비 종교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해오지 못했다. 다종교 사회인 한국 사회에서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뛰어넘어, 위법적이지 않은 유사 종교단체를 사전 관리하거나 감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공권력과 언론은 사후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고, 피해자들과 가족들은 거리로 나서야 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신천지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단/사이비 단체의 피해자들은 거리로 나가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지난 3월 2일 이만희의 기자회견이 있던 날, 이만희가 무어라 해명하는지 들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한 피해자 어머니의 카랑카랑한 메가폰 목소리로 인해, 이만희의 말은 더욱 알아듣기 어려웠다. 회견이 끝난 다음에 시위를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내가 들어야 할 목소리는 ‘이만희의 목소리’가 아니라, 회견 내내 메가폰을 잡고 절규하던 ‘피해자의 목소리’였다. 어눌한 이만희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쓰기보다는 딸을 신천지에 빼앗기고 애통하게 울부짖던 그 어머니의 외침을 들어야 했다. 애절한 ‘피해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아전인수식의 ‘이만희 목소리’에 집중했던 내가 잘못한 것이다.
이만희의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애타게 딸을 찾던 어머니의 모습은 신천지의 사기행위에 속아 집을 나간 딸을 찾기 위한 ‘평범한 엄마의 모습’이었다. 코로나 전염병이 신천지 신도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신천지에 속한 딸의 안전과 행방을 알려달라고 외치던 피해자 어머니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단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보게 된다.
이단 문제는 피해자의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들을 때, 그 본질과 위험성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이단 문제는 고상한 교리적인 논쟁이 아니고, 교권 장악을 위한 정치도 아니며, 정적 제거를 위한 수단도 아니다. 이단 문제는 이해관계와 교파를 초월해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거룩한 싸움이 되어야 한다.


탁지일 | 교회사를 전공하였다. 저서로 『이단』, 『교회와 이단』, 『다르게 다가서는 역사』 등이 있다. 부산장신대학교 교수이며, 「현대종교」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4월호(통권 7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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