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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교회와 현장] 나의 목회 수기
교회와현장 (2020년 3월호)

 

  주님 사랑하며 말씀 따라 걸어온 길
  

본문

 

1.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외손녀와 함께 지내고 있다. 이름은 지아, 세 돌이 지났다. 그 아이가 태어난 후 우리는 씻기고 먹이고 함께 놀아주는 일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 일로 행복하다. 지아가 태어나면서 가족들의 모든 관심은 그 아이에게 집중되어 있다. 찬양을 들을 때도, 말씀을 읽을 때도 지아는 내 관심 밖으로 벗어나는 적이 없다. 외할머니인 아내 또한 시장에 가면 제일 먼저 지아의 먹거리부터 준비한다. 가장 좋은 것, 신선한 것, 아이가 좋아하는 것으로. 아이의 것을 다 준비한 후 다른 것들을 둘러본다. 아이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서 자라가는 과정은 한 영혼이 주님을 영접하고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과정과 비슷할 터인데,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현재 내가 외손녀를 바라보듯 나에게 맡겨진 생명들을 경외와 사랑으로 돌보았는지, 그들에게 전심으로 집중하였는지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부끄럽다. 또 마음이 아프다.

2. 나의 아버지는 농촌 교회의 자급 목회자였다. 논밭이 넓지는 않았지만 낮에는 농사를 짓고 또 마을 일의 책임을 맡아 마을을 돌보는 농부의 삶을 사셨다. 그러면서 밤에는 말씀을 준비하고 교인들의 일로 고뇌하고 아파하며 사셨다. 사는 것은 늘 궁색하고 어려웠지만, 어머니의 손은 늘 풍성하여 베풀기를 좋아하셨다.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그런 모습은 우리 가정의 일상이었다.
우리 가족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은 할아버지 때부터였다. 할아버지는 어려운 살림으로 인해 일을 찾아 이곳저곳 떠돌아다니시는 중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만나셨고, 그때부터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일생을 사셨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부터 손자들까지 벌써 5대째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할아버지가 개척하신 교회에서 자랐고, 이후 아버지께서 목회를 이어가시면서 교회당을 새로 건축하셨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처음부터 내 안에 싹튼 생각이 하나 있다. ‘복음이 이 땅에 전해진 지 몇십 년이 지났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저 예수님의 교회 한 가지면 될 터인데…. 우리 민족이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좋은 교회는 어떤 모습의 교회일까?’ 이런 마음은 오늘날까지도 내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간의 목회 여정에서 나의 일관된 관심사이자 소망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신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복무를 위해 휴학을 한 후 집에 머무를 때였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나에게 동일한 본문을 가지고 각자 설교 준비를 해보자고 제안하셨다. 그리고 설교할 기회를 줄 터이니 해보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첫 설교였다. 수요일 저녁인지 주일 아침인지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얼마나 떨렸던지, 당시 많이 떨었다는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사실 지금도 설교를 하려면 얼마나 긴장되고 떨리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일평생 같은 일을 반복하면 달인이 되던데, 나는 아직까지도 설교가 긴장되고 떨린다.
그렇게 집에서 아버지의 목회를 경험하며 함께하던 어느 날, 약간 떨어져 있는 이웃 교회의 한 청년이 우리 집을 찾아와 아버지에게 부탁을 했다. 그 교회는 목사님이 없는 상태이고 목사님을 정식으로 청빙하기에도 어려움이 많은 상황인데, 신학을 공부하는 내가 휴학중이라고 하니 나를 보내어 교회를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부모님은 아직 어리고 결혼도 안 한 총각을 목회자로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이유로 완곡하게 거절하셨다. 그런데 그 교회 분들이 재차 찾아와 간절한 마음으로 계속 부탁하자, 부모님은 마냥 거절할 수 없어 결국 허락하셨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렇게 나의 첫 목회가 시작되었다.
그곳은 역사가 오래된 교회였다. 당시 그 교회는 설립된 지 40년이 넘은 것으로 기억한다. 목회자의 간음 사건 때문에 교회는 근본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부임 후 첫 예배는 어린아이들까지 다섯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때 내가 매월 받은 사례는 쌀 두 말과 3,000원 정도로 기억한다. 그리고 교회는 점차 예배실이 가득 차도록 회복되었다. 7개월여의 시간이 흘러 입대를 목전에 두고 교인들과 눈물로 헤어졌다. 떠나는 날 장로님이 “전도사님, 나라 일보다 하나님의 일이 더 중요하잖아요. 가지 마세요.” 하며 우시던 모습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
이렇게 시작된 목회는 계속 이어졌다. 군에서는 군종병으로 복무했고, 제대 후 복학하면서 농촌 교회와 도시 교회를 두루 경험했다. 가장 보편적인 교회와 사회운동에 열심인 교회도 경험했다. 교회당을 새로 건축하는 일도 했으나 교회에 불화가 생겨 사임하기도 했다. 이후 새로이 교회를 개척하여 그곳에서 19년을 목회하고 얼마 전에 은퇴했다. 중간에 쫓겨나지 않고 은퇴에 이를 수 있어서 감사하다.
돌아보면,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께서 나에게 조심스럽게 당신의 마음을 내어놓으신 말이 내 목회의 여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석아, 나는 네가 학자가 되기보다 좋은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끝없이 학문의 길을 가고 싶은 내 안의 욕구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이 마음에 남아 일생을 목회자로 살아올 수 있었다. 일생 동안 나의 목회 모델 또한 아버지였다.

3. 목회하는 동안 있었던 일 중 기억나는 몇 가지를 나누려고 한다. 목회자로 일생을 살아오면서 일상 속 기쁨과 보람은 늘 있었지만, 작은 일 하나하나를 다 이야기할 정도로 기억할 수는 없고, 그저 마음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첫 번째는 청소년 교회 이야기이다. 참고로 나는 신학생 때부터 ‘청소년 교회’, ‘어린이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이 표현은 은퇴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어린이나 청소년들도 교인이며, 그들이 예배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면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와 목회를 함께하던 젊은 전도사님들을 ‘어린이 목회자’, ‘청소년 목회자’로 여기고 대했으며, 그들은 목회자라는 긍지와 책임감을 가지고 교회 일에 함께했다.
그런데 청소년 교회를 목회하면서 청소년들이 교회 안에서조차 사람이 지켜야 할 신뢰를 벗어나 세상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교회 재정을 사용할 때 가짜 영수증으로 처리하는 일, 청소년 교회의 학생회 임원들이 특권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모습 등을 경험하며 참 안타까웠다. 그래서 오랜 시간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올바른 방법을 선택하도록 돕고 의식을 바꾸어주려는 노력을 했던 일들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헌금을 드리는 교인들의 믿음과 교회 재정에 관한 일 역시 기억에 남는다. 그 당시 많은 교회가 작정헌금 제도를 통해 교회 재정을 운영했는데, 안정된 재정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이 택하고 있었다. 내가 부교역자로 일하던 교회도 작정헌금 제도를 택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교인들 중 40% 정도가 1년 동안 한 번도 헌금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담임목사님께, 1년 동안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리지 않는 모습은 건강한 신앙인의 모습이라 할 수 없고, 실제로 헌금 참여율이 너무 적은 것은 건강한 교회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말씀드렸고, 그동안 교우들의 삶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으니 초심으로 돌아가 헌금과 믿음, 재정에 대해 다시 한 번 점검해보자고 건의하였다.
나의 의견을 들은 담임목사님은 지금보다 헌금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셨고, 교회에 생길 여러 위험부담을 걱정하셨다. 그러나 뜻을 이해하시고 받아들이셨다. 긴 시간 제직회에서 논의한 끝에 연말에 교우들에게 설명하고 헌금을 작정했는데, 너무나 적은 사람들이 참여해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뜻에 공감하신 장로님들이 기왕 시작한 일이니 다시 한 번 도전하자고 결정하셨다. 교인들에게 작정헌금 참여율에 관한 실상을 알리고 다음 달에 다시 도전했을 때, 교인들의 헌금생활은 정상적인 모습이 되었고, 교회의 재정도 이전보다 넉넉해졌다. 이스라엘의 희년 제도처럼, 가끔은 우리가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농촌의 어느 작은 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일이다. 새신자가 왔는데 휠체어를 탄 형제였다. 그런데 교회의 출입문이 좁아 휠체어를 탄 채 교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형제는 주위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 어렵게 교회문을 통과하여 다시 휠체어에 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깝고 죄송했다.
해결책을 모색하던 나는 기존의 교회 출입문을 떼어내고 넓혀 휠체어를 타고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문을 만들었다. 혼자 결정한 일이라서 마음에 걸리기도 했으나, 그 형제를 위하는 일을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 후에 이 일에 대해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고, 우리 모두는 함께 들어와 예배드릴 수 있음에 행복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8)라는 성서의 말씀을 따라 행한 작은 실천이었다. 그 후 교회는 달마다 부흥했다.
대도시에서 목회할 때 바자회에 얽힌 사연도 있다. 여신도회가 자체적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바자회를 열겠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나는 그런 목적의 바자회라면 하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마침 그때가 서울올림픽(1988)이 끝나고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을 준비할 때였다. 그래서 이왕 준비한 바자회를 패럴림픽을 후원하는 바자회로 목적을 바꾸어 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바자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작은 교회로서는 나름 큰 금액을 후원할 수 있었다. 이 바자회에 관여한 집사님 한 분이 훗날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처음에 ‘여신도회 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라고 했을 때에는 여신도회의 일이니 당연히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짜증만 나고 의욕이 없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바자회에 오라고 권유하고 추천할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패럴림픽을 후원한다는 명분이 주어지자 그 일이 너무 자랑스럽고 신이 나서 여러 친구들을 초청하고 자신도 정말 즐겁게 일했다고 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이런 것 아닐까 생각한다.

4. 이제는 마음이 상했던 이야기를 나누어보려 한다. 교회는 주님께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자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의 진리를 삶에서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진리를 삶으로 살아가기가 쉬운 일이겠는가? 진리는 삶이 되지 못하고 지식에 머물고, 말씀은 생명의 떡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현실의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여전히 사람들의 모임이요, 치열한 삶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현실의 상황을 도외시할 수는 없기에 교회의 이런 부정적인 모습을 일정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정도가 지나치고 경우가 아닌 때가 있다.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교회가 아닌 듯한 실망스러운 교회 말이다.
긴 목회의 여정 중에는 이런 아픔도 있었다. 어느 교회의 부름을 받아 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의 실상을 파악하고 크게 실망했다. 교회의 상황을 비유하자면 황무지 돌짝 밭이었다. 이 밭을 일구어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지도자인 척하는 사람이 교회의 주인 노릇을 하면서 교회를 사유화하고 휘젓고 있었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거나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온갖 언어폭력으로 괴롭혀 결국 교회를 떠나게 만들기도 했다.
내가 목회를 하는 동안 목회자를 중심으로 구심점이 생기기 시작하자 그는 그것이 못마땅해서 갖은 추태를 부리더니, 자신도 목회자와 똑같은 대우를 해달라는 요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교회에 믿는 자가 더하여져 점차 사람들이 많아지자 교회 내에 자기 사람을 만들려는 각축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부흥하면 오히려 교회에 독이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 교회는 사람이 주인이 된 교회였고, 그것이 그 교회의 한계였다. 하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내 생각일 뿐, 주님은 그 교회를 어떻게 보시는지 늘 궁금하다.
성전 건축에 얽힌 아픈 기억도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성전을 건축한 후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평소에 많이 보아온 터였다. 내가 있던 지역의 어느 큰 교회도 성전을 건축하다 중단하고 몇 년간 폐허 같은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주위에서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교회의 여러 성도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 자신이 살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그 일에 헌신했는데,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고, 가정도 파탄에 이르렀다고 한다. 골조 공사까지만 완성된 상태였는데, 최근에 그 부근을 지나다 보니, 교회를 완전히 헐고 교회가 아닌 다른 건물을 짓고 있었다.
나도 성전을 건축하고 교회를 떠난 일이 있다. 나 스스로는 떠났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쫓겨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표현에 대하여 굳이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성전을 건축하느라 부채가 많은 편이었으나, 내 판단으로는 교회가 한마음으로 힘을 합하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전 건축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탐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회의 한 중진이 교회를 자신의 생계 터전으로 만들려고 했다. 목사로서 그 일을 거부하자 나를 내쫓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결국 교회는 분열의 조짐이 생겨났다. 내가 교회를 지키겠다고 그들과 대립하고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은 결코 교회를 사랑하는 길이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교회를 사임했다.

5. 마지막으로 교회를 개척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교회 개척은 어려운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즐거웠다. 헌 집을 고치는 것보다 새 집을 짓는 것이 더 즐거운 일 아닌가. 교회를 개척한 초창기에는 참 즐거웠고 가슴이 벅차기도 했다.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새 교회를 꿈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를 세우고 싶다는 나의 소망을 하나하나 실천해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소망이 주는 기쁨에 비하면 현실의 어려움은 지극히 작은 것으로 여겨졌다. 다들 개척 초기에 경제적인 문제로 고생을 하는데, 나 또한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때를 따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히려 이만하면 넉넉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인들에게 나의 입장을 밝혔다. 교우들을 붙잡는 일보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늘 우선을 두겠다는 뜻이었다. “사람이 주인이 되는 목회는 하지 않으렵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는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교회,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를 이루어갑시다. 그런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저도 모릅니다. 다만 기도하며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려 합니다. 함께 갑시다. 이런 발걸음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다른 교회를 찾아가십시오. 본인 스스로 말씀을 듣고 아멘 할 수 있는 교회, 주님을 사랑해서 헌신할 수 있는 교회로 가서 은혜를 누리십시오. 그리고 떠나실 때는 인사를 나누고 가십시오. 우리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킵시다.” 하고 선언했다.
또한 우리 교회를 다른 교회와 비교해서 말하지 말자고 교우들에게 이야기했다. “‘다른 교회는 이렇게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합시다.’라고 말하지 말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다른 교회가 했던 일도 할 것이며 그들이 하지 않았던 새 일도 할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능력되는 대로 해나갑시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규약을 만들어 공동의 약속으로 삼고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이런 과정에서 겪는 많은 아픔과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우려는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고, 이해하려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하다가 통하지 않으면 목회자를 비난하며 떠났다. 교인 수가 늘어 조직과 일꾼이 필요한 경우에는 일꾼을 세우는 과정에서 늘 공정하려고 노력했으나, 회의 중에는 아무 말 없이 침묵하다가 회의가 끝난 후 목사가 누구를 편들었다느니 하며 험담하는 모습은 무척 역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들의 내면에 인간의 교만이 섭정하고 있음을 보았다.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주님의 이름보다 자신의 이름이 더 소중했고, 주님의 명예보다 자신의 명예가 더 소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진정 교회가 세워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의 믿음 없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주님 중심으로 교회를 이끌어가겠노라고 선언했지만,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반성을 하였다. 바울 사도의 말처럼 목회는 십자가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는 길임을 세삼 깨달았다. 교회를 사랑하며 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을 늘 기다리며 느끼는 외로움은 주님 나라에 가서나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목회자로서의 내 믿음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내 믿음이 뭐 그리 완벽하다고 생명길을 걷겠다고 함께한 사람들을 떠나게 했는가. 내 시각에서는 좀 부족하더라도,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면, 시간이 차차 지나면서 그들도 깨달을 날이 있을 텐데…. 아니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주님이 친히 하시는 일이 있을 텐데…. 내가 여전히 속좁은 놈이라는 생각이 들어 늘 미안하고 늘 아팠다. 그래서 나는 말을 버리기 시작했다. 할 말이 없었다.
교회는 여러 가지 부족한 점도 있었지만, 또한 좋은 점도 많이 가진 교회로 세워져갔다. 은퇴 후 한발짝 물러나 교회를 보면서, 그래도 교회로서의 기초는 놓였다는 작은 안도감이 든다. 그러나 동시에 이 또한 미완성이라는 마음이 들어, 또 한 발 앞으로 나아가려는 동역자들의 발걸음을 유심히 바라보며 응원한다.

6. 은퇴하고 나서 교회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고난의 역사 속에서 복음을 지켜온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들을 보면,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교회를 섬겨온 수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교회는 설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도 목회의 길을 걷는 모든 분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끝까지 소명자의 길을 걸어가기를 소망한다.


박이석 | 한신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강교회 은퇴목사이다.

 
 
 

2020년 7월호(통권 7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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