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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아시아 기독교] 시리아 교회와 아시아 12 (마지막회)
교회와현장 (2020년 1월호)

 

  5-7세기 시리아 교회의 ‘페르시아인 학교’와 ‘니시비스 학교’
  

본문

 

그분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새 책을 가르치셨다.
그들을 어린이인 양 생각하고 그분은 글자 대신 소리를 쓰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읽으라 이르셨다. “빛은 생겨라.”
노래 형태로 그분은 그들의 눈앞에서 소리를 일러주셨다.
그들은 소리쳤다. “찬양 받으소서. 빛을 창조하신 분이여!”
- 나르사이, 창조에 관한 설교, Ⅱ 250-254


학교 운동은 이슬람 세계가 도래하기 전까지 5-7세기 시리아 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시리아 교회에는 적어도 세 종류의 학교가 있었다. 독립적인 학교와 수도원 학교, 그리고 마을 학교이다. 독립적인 학교로는 5세기의 ‘페르시아인 학교’와 6-7세기의 ‘니시비스 학교’가 대표
적이다. 또한 시리아 동방교회의 총대주교 마르 아바(Mar Aba)가 6세기에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크테시폰(Celeucia-Ctesiphon)에 세웠다고 알려진 ‘셀레우키아 학교’가 있다. 수도원 학교로 대표적인 것은 바바이(Babai The Great, 551-628)가 그의 고향 베트 아이노토(Bet Aynātā)에 세운 학교가 있다. 이외에도 시리아 교회는 여러 지역의 교회 내에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물론 각 학교를 수도원이나 개체 교회와 구분할 수 있는지는 명확치 않다. 다만 수도원 학교나 마을 학교에서는 주로 기초 교육이나 교리 교육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는 위에서 인용한 5세기 신학자 나르사이(Narsai)가 한때 책임을 맡았던 ‘페르시아인 학교’와 ‘니시비스 학교’를 소개하고자 한다. 나르사이는 두 학교의 학장으로 일하면서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많은 ‘운율 설교’(미므레)를 썼다. 위에서 인용한 ‘미므레’에서 나르사이는 교육자답게 천지창조를 설명하면서 하느님을 교육자로, 온 세상을 교육의 장으로 묘사한다.

우르하이(에데사)의 페르시아인 학교
‘페르시아인 학교’에서는 어떤 공부를 했을까? 이 학교의 역사에 대해서 책을 쓴 에스토니아 출신의 교회역사가 아르투르 푀부스(Arthur Vööbus, 1909-88)의 설명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1
기초과정으로는 시편을 읽는 것으로 공부를 시작한다. 특히 시편을 읽을 때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을 매우 강조해서 가르쳤다. 시편은 예배 때 자주 읽히는 성서 본문이고, 따라서 시편을 정확하게 잘 읽는 것은 신학원의 모든 학생에게 가장 기초가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글씨를 잘 쓰는 일도 중요했다. 정확하고 아름답게 시리아어를 쓸 수 있어야 교회에서 사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시리아 교회 사제들 가운데에는 동방전통과 서방전통 모두 글씨를 잘 쓰는 예술가들 곧 캘리그래퍼가 많았다.
그다음으로는 구약과 신약의 각 책을 읽고 해석하는 훈련을 했으며, 이어서 시리아 교회의 저명한 신학자들의 글을 읽는 과정을 거쳤다. 이런 교육 과정에서 성서 해석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였다. 성서 해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은 이 신학원의 학장을 부르는 호칭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페르시아인 학교에서는 학장을 ‘므파쉬카나’(mpašqānā’) 혹은 ‘므파쉬코노’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성서) 해석자’ 또는 ‘(성서) 해설자’라는 뜻이다.
사실 초기 시리아 교회의 중심지 우르하이에 언제 페르시아인 학교가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강도 회의’로 알려져 있는 449년 에베소 회의 회의록(Acts)에 나오는 언급이 이 학교가 있었다는 가장 이른 기록이다.2 당시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국경 지대에 자리 잡고 있던 우르하이는 교역의 중심지로서 주변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곳에는 각 인종별로 페르시아인 학교 말고도 아르메니아인 학교와 시리아인 학교도 있었다. 아무튼 페르시아인 학교라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당시 페르시아인들이 이 학교에 와서 많이 공부했거나 이 학교를 주도적으로 운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학교는 안디옥 학파 신학의 중심으로 알려져 있다. 안디옥 학파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Diodorus of Tarsus, 4세기 후반)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Theodoros of Mopsuestia, 352-428)의 저작을 그리스어에서 시리아어로 번역할 정도로 이 학교에서 안디옥 학파의 신학은 중요했다. 따라서 7-10세기에 꽃피웠던 시리아 교회의 그리스어 문헌 번역 운동3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히 이 당시 번역 운동은 히바(Hiba, 457년 사망)라는 인물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우르하이의 주교였으며 ‘번역자’라는 칭호로 불리는 인물이었다.4 또한 이 학교에서는 5세기 후반부터 쿠미(Kumi)와 프로바(Proba)라는 학자들의 주도하에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도 번역하여 연구했다.5 특별히 프로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학과 논리학을 번역하고 주해를 쓰기도 했다. 이렇게 시리아 교회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반을 둔 신학적 사고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 학교를 말할 때, 나르사이(Narsai, 500년경 사망)라는 인물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6 페르시아 사람 나르사이는 ‘성령의 하프’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한 시인이다. 동시에 그는 성서 주석가이자, 운율 설교를 쓴 설교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페르시아인 학교에 들어가 공부한 뒤 450년경부터 약 20년 동안 이 학교의 학장으로 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앞서 언급한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의 성서 주석과 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쓴 운율 설교 중에는 안디옥 학파의 대표적인 세 신학자(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 네스토리우스)를 변호하는 설교도 있다. 그만큼 그는 안디옥 학파의 전통을 잇는 시리아 교회의 설교가요 시인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특히 시리아 교회의 동방전통에서는 후대에 가서도 그의 성서 주석과 설교를 많이 인용하기도 했다. 8세기 중앙아시아, 중국, 티베트, 인도까지 선교 지역을 넓혔던 티모테오스 1세(Timotheos I, 727/8-823)뿐만 아니라 9세기 시리아 동방교회의 성서 주석 전통을 계승하여 종합한 메르브의 이쇼다드(Isho’dad of Merv)도 나르사이의 성서 해석 전통을 따른 것으로 유명하다.7
470년경에 그는 페르시아인 학교에서 쫓겨났다. 당시 우르하이의 시리아 교회를 장악하던 주교는 단성론자였고, 나르사이는 양성론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나르사이가 학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에서 쫓겨난 사건은 지난 호에서 설명한 대로 신학적 이유와 정치적 상황이 맞물린 사건이었다. 결국 489년 우르하이의 주교 퀴루스(Cyrus of Edessa)의 반대 운동과 황제 제노(Zeno)의 명령으로 페르시아인 학교는 강제로 폐교당하게 된다.

니시비스 학교
페르시아인 학교가 폐쇄된 이후 우르하이에 있던 시리아 교회의 학자와 학생들은 니시비스(Nisibis)로 대거 이주한다. 니시비스는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Shapur Ⅱ)가 363년에 점령한 이후로 페르시아의 영토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다시 학교를 세운다. 바로 ‘니시비스 학교’이다. 이 학교는 시리아 교회, 특히 시리아 동방교회의 교육 운동을 특징적으로 대변하는 학교이며, 첫 학장은 앞서 언급한 나르사이로 알려져 있다. 그가 쓴 300개 이상의 ‘미므레’8(운율 설교)는 주로 성서의 내용을 토대로 한 주석의 성격이 강한 경우가 많았으며, 신학이나 예배, 기독교 윤리, 당시 교회와 정치적 상황을 다룬 경우도 많았다. 이 모든 미므레는 니시비스 학교에서의 강의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학교는 재정을 어떻게 마련하여 건립되었을까? 나르사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학교의 초창기에 해당하는 502년에서 522년까지 약 20년간 학장직을 맡아서 일한 베트 라반의 아브라함(Abraham of Bet Rabban)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9

주님의 복을 받은 이분(아브라함)은 여러 사정을 살피고 나서 신자이며 왕실 주치의였던 카쉬위(Qašwī)에게 장소 하나를 마련해달라고 했다. 그가 장소를 마련해주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비용으로 80개의 방을 짓고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거기에 목욕탕도 지었다. 하나는 형제들이 쓰도록, 또 다른 하나는 ‘크세노도케이온’(형편이 어려운 이들이 머무는 곳)의 식구들이 쓰도록 했다. 하지만 ‘마크리요노’(고급과정 교수)와 ‘므하기요노’(기초과정 교수)가 사용할 방이 없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1,000스타테르를 주고 마을 하나를 사서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교수들에게 주었다. 남는 것으로는 ‘크세노도케이온’을 운영하는 데 썼다.

위 기록에서 보듯, 베트 라반의 아브라함은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세웠으며, 또한 자신의 재산으로 학교 건물과 기숙사를 지었다. 특이한 점은 마을 하나를 통째로 사서 학교를 운영했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머물 공간(‘크세노도케이온’)을 학교 안에 두었다는 점이다. 서방교회의 수도원 전통과 맥을 같이하는 전통으로 평가받는다.
이 니시비스 학교에는 특이하게도 학교의 ‘지침’(Canon)이 지금껏 남아있다.10 ‘나르사이 지침’(Canons of Narsai)으로 알려진 이 지침은 496년에 제정되어 베트 라반의 아브라함이 학장으로 일하는 기간에 법제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

지침 1-‘랍바이타’(학장, steward)의 선택에 대하여
지침 2-학장은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한다. 마음대로 운영해서는 안 된다.
지침 3-퇴교와 퇴촌에 해당하는 죄에 대하여: 결혼, 간음, 도적질, 주술행위, 비정통 견해, 그리고 허영심(비방, 음모, 분규, 거짓말, 계략)과 모반
지침 4-형제들은 형제들과 학장의 훈계나 명령 없이는 로마인의 땅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기도한다거나 또는 어떤 물건을 사거나 팔기 위해서도 안 된다.
지침 5-어떤 형제도 영업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아브월(8월)과 테쉬리월(10월) 사이에 니시비스 바깥 지역에서는 허락한다. 니시비스 안에서 노동자로는 일할 수 있지만 영업 행위는 금지한다.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자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므로 세 달 동안 일할 수 있다.
지침 6-고리대금업 금지에 대하여
지침 7-공동체 입교에 대한 가르침에 대하여
지침 8-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급한 용무가 없는 한 학교에서 쓰기와 읽기와 해설과 합창단 내의 암송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지침 9-저녁 시편을 암송하는 ‘마우트보’(mawtbā’) 시간에는 각자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간다. 닭이 울면 각자 와서 자기 자리에 앉는다. 저녁 때에 차지했던 자리는 무효이다. 닭이 울 때 온 이들은 선배 형제들에게 맨 앞줄을 남겨두고 다른 자리에 앉는다.
지침 10-형제들은 혼자 지낼 수 없다. 꼭 다른 형제와 같이 있어야 한다.
지침 11-방을 같이 쓰는 형제는 아픈 형제를 돌봐야 한다.
지침 12-공동체 내에서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허락이 있지 않는 한 바깥 법정에서는 같아야 한다.
지침 13-말을 함부로 하여 혼란을 야기하는 자는 공동체와 마을에서 추방한다.
지침 14-잃어버린 물건이나 잊은 물건에 대하여
지침 15-어떤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지도를 했는데 그 형제가 고치지 않았다고 하자. 그런데도 지도를 한 형제가 학장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 경우 지도를 한 형제는 지도를 받은 형제와 똑같이 지도를 받는다.
지침 16-거짓 고소에 대하여
지침 17-유언에 관한 증언에 대하여
지침 18-폭력 행사에 관한 징벌에 대하여
지침 19-공동체와 마을에서 추방당하는 또 다른 경우
지침 20-‘마크리요노’(고급과정 교수)와 ‘므하기요노’(기초과정 교수)가 아프지도 않거나 ‘라반’(교수)의 허락이 없는데도 ‘헤기요노’(음절)과 ‘케리요노’(독법)의 순서를 바꾸거나 무시하는 경우 징계를 받아야 한다. 또한 받기로 되어 있는 보수를 받을 수 없다. 학교가 내리는 판단을 들을 수 없다.
지침 21-징벌을 받지 않으려고 외부의 사제나 교인의 도움을 받으려 하는 자는 마을에서 추방한다.
지침 22-이러한 규칙을 따르지 않는 ‘랍바이타’는 학교에 금 10디나를 내고 공동체와 학교를 떠나야만 한다.


위의 지침에는 학생들이 지켜야 할 지침도 있고, 교수들이 지켜야할 지침도 있다. 교수의 경우 전해 내려오는 읽기 방식에 따라 가르쳐야 하고, 학생들은 끊임없이 읽기와 쓰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학생들은 8월부터 10월까지 세 달간 노동자로서 일을 하여 자신이 사용할 비용을 벌 수 있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도 로마인들의 땅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규정은 특이하다. 아마도 니시비스 학교가 당시 동로마제국과 경쟁 관계에 있던 페르시아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지침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니시비스는 두 나라가 맞닿아 있는 국경 지대에 있었다.
이 학교에는 세 부류의 교수가 있었다.12 먼저 학교 행정의 책임을 맡고 있는 학장(‘랍바이타’)이 있고, 기초과정을 가르치는 교수(‘므하기요노’)와 고급과정을 가르치는 교수(‘마크리요노’), 그리고 성서 및 다른 문헌의 해석에 관한 책임을 맡은 주석가(‘므파쉬코노’)이다. 이것은 학생들이 세 단계의 교육, 즉 기초과정과 고급과정, 그리고 주석을 포함한 심화과정을 거쳤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기초과정과 고급과정을 가르치는 교수의 호칭이 각각 철자법이나 독법과 관련된 호칭이다. 성서를 정확하게 쓰고 읽는 일 이 두 가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성서 사본을 그냥 베껴 쓰고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확하게 읽는 지식이 예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예배 때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연히 정확한 철자법을 알아야 가능한 일이다. 위의 ‘지침 8’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학생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쓰기와 읽기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주석하는 일에도 매일 참여했다고 했는데, 아마도 ‘므파쉬코노’라고 부르는 주석의 권위자가 이 과정을 이끈 듯하다. 그리고 므파쉬코노는 합창단을 이끄는 책임도 맡고 있었다. 합창을 하는 일 역시 예배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 학교에서 성서 연구와 예배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학교는 나르사이의 영향하에 안디옥 학파의 기독론을 확립한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의 성서 해석을 따랐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어 문헌도 공부했을 것이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문헌을 공부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을 뿐이다. 또한 이 학교의 성서 해석 전통에서 특이한 점은, 당시의 시대적 흐름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미므레’라는 문학 장르로 성서를 주석했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르사이가 성서에 대한 많은 미므레를 남겼으며 이 학교에서 가르친 6-7세기의 학자들도 이 장르로 많은 성서 주석을 남겼다. 다만 그 주석이 개별적으로 많이 남아 있지는 않고, 9세기 메르브의 이쇼다드(Ish’dad of Merv)가 쓴 성서 전체의 주석에 다수가 인용되어 있다.13
나르사이의 성서 주석과 관련하여 꼭 언급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나르사이는 특별히 창세기 1장의 미므레에서 천지창조를 학교 교육과 관련하여 설명한다.14 시리아 교회의 두 신학원을 오래도록 이끈 교육자 나르사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르사이에게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교육자이시다.

손가락으로 그분은 당신의 본질 속 능력을 보이셨다.
“보라, 천사들아! 모든 힘보다 뛰어난 나의 능력을!”
펜으로 그분은 그들 마음속에 책을 쓰셨다.
그리고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은 쓰신 것을 한 음절 한 음절 읽게 하셨다.
스승의 모습으로 그분은 교실 맨 앞줄에 서 계신다.
그분은 반복하신다. 감춤의 의미에 어떤 능력이 있는가를!
- 나르사이, 창조에 관한 설교, II 352-357


[연재를 마치며] 지난 1년 동안 기원후 2세기에서 6세기까지 시리아 교회의 성서와 몇몇 문헌, 그리고 신학자들을 소개했다. 이후에 활동한 수많은 시리아 교회 신학자들과 중국의 시리아 교회인 경교(景敎)를 소개하지 못하여 아쉬운 마음이 크다. 다만 이 짧은 연재를 통하여 시리아 교회의 생명 신학과 그 영성이 우리 한국교회와 신학에 조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이환진 교수님의 ‘시리아 교회와 아시아’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부


1 Arthur Vööbus, History of the School of Nisibis. CSCO 266(Louvain: Secrétariat du CorpusSCO, 1965), 13-14.
2 Adam H. Becker, Fear of God and The Beginning of Wisdom: The School of Nisibis and Christian Scholastic Culture in Late Antique Mesopotamia(Philadelphia, Pennsylvan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06), 64.
3 시드니 H. 그리피스, 서원모 옮김, 『이슬람 세계 속 기독교』(새물결플러스, 2019), 191-226 참조.
4 L. Van Rompay, “Hiba. Ibas”, Sebastian P. Brock et al. eds., Gorgias Encyclopedic Dictionary of The Syriac Heritage(Piscataway, New Jersey: Gorgias Press, 2011), 195-196.
5 Arthur Vööbus, 위의 책, 17-21.
6 L. Van Rompay, “Narsai”, Sebastian P. Brock et al. eds., 위의 책, 303-304.
7 L. Van Rompay, 위의 글, 303.
8 Arthur Vööbus, 위의 책, 71, 76.
9 Barh・adbeˇ
sˇabba-, Ecclesiastical History, 623.10-624.4. Adam H. Becker, 위의 책, 82.
10 Adam H. Becker, 위의 책, 82-86.
11 590년에는 아디아베네의 허노노(H・
eˇna-na- of Adiabene) 학장이 21개의 지침을 추가했다. Adam H. Becker, 위의 책, 84-86 참조.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나르사이의 지침’만 소개한다.
12 Adam H. Becker, 위의 책, 87.
13 L. Van Rompay, “Isho’dad of Merv”, Sebastian P. Brock et al. eds., 위의 책, 216-217.
14 Adam H. Becker, 위의 책, 123-125.



이환진 |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로 구약을 가르치고 있다. 아시아교회의 토착화에 관심을 기울여 한중일(韓中日) 성서와 시리아 교회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2019년 1월호(통권 7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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