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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20년 1월호)

 

  간도행(間島行)
  

본문

 

* 이 글은 목사이자 소설가인 전영택의 간도 방문기로 「기독신보」 1932년 8월 31일부터 10월 12일까지 6회에 걸쳐 게재된 것이다. 이 글은 전영택이 1932년 8월 13일 기차로 서울을 출발, 함경북도 회령에서 차를 갈아타고 두만강 건너 용정에 도착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여행에는 동대문교회 정춘수 목사가 동행하였다. 방문기는 용정과 국자가(현 연길)의 교회와 목회자, 기독교학교 모습과 북간도 지역 동포들의 애달픈 삶을 담고 있다. - 편집자 주


한참 내려쪼이는 오후 3시경 집을 떠났다. 땀을 철철 흘리면서 터덕터덕 걸어서 신봉산역(新鳳山驛)까지 나가 차를 타니 찻간 역시 화덕 속이다.
그러나 평소에 늘 그리던 간도의 우리 형제들, 우리 교회를 찾아보고 ‘하느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예수의 형제애’를 전하게 될 생각을 하니 넘치는 기쁨에 저절로 가슴이 뛰고 설렁거려 더위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서울에 와 내려서 춘해(春海) 집을 찾아 들어가니 조그만 집에 사방이 막힌 것이 어찌나 답답한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아아! 불쌍한 서울 사람이여!” 하고 탄식이 저절로 난다. 촌에 있다가 서울 같은 도시에 오니 참말 못 살 것 같다.
아침에 간도에 동행할 정춘수(鄭春洙) 목사를 동대문교회로 찾아보고 종로에 들러 몇 친구를 만나보고 서울의 이면 얘기를 좀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한도(漢圖)의 김진호(金鎭浩) 씨 댁에서 만찬 대접을 받고 돌아오니까 밤 10시가 넘었는데 김수철(金洙喆) 목사가 기다리고 있다.
공덕리 교회에 탁아소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 사진을 보고 나는 오직 감격의 눈물을 머금고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의 형제애의 끓는 마음으로 실제 운동에 나가는 이러한 친구가 있는 것을.
아침 10시 15분에 회령(會寧)행 열차를 탔다.
오래간만에 보니 한강물이 좋다. 자리를 정하고 「동광」(東光) 잡지를 좀 들여다보다가, 옆에 네 사람의 어린 여자들이 담배를 피며 아주 점잖지 못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필경 소위 ‘나까이’ 같은데,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어디 가는지 모른다고 한다. ‘너희들은 과연 너희 앞길을 모르는 사람이다. 가련한 사람들이다.’
다시 「동광」을 펴들고 간도를 소개한 글을 좀 읽다가 문득 잠이 들었다가 깨니 벌써 철원이다.
여기서 ‘위임스’라는 젊은 선교사가 올라타서 심심찮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궁예의 옛 싸움터 복계(福溪)도 지나고 세포검불랑(洗浦劍拂浪)의 시원한 고원지도 잠깐이요 어느새 삼방(三防)의 유협 굽이쳐 흐르는 계곡의 물은 바라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잠깐 뛰어내려 서울에서 묻은 홍진(紅塵)을 씻어버리고 싶다.
삼방역에서 찬 샘물을 마시고 앉았노라니 낯익은 석왕사역, 반갑기는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나 내려 보기로 하고 그윽한 그 송림을 시치미를 떼고 지나버렸다.원산역에서 행여나 아는 이가 있나 하고 플랫폼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뜻밖에 용정(龍井)까지 동행할 간도 친구 이호빈 씨를 만나서 반가운 손을 잡고 간도의 소식과 정형(情形)을 듣게 되었다.
처음 보는 함흥도 차 안에 씩씩한 부인네들, 길게 뻗친 시가를 바라만 보고 이미 날이 어두워 3등 침대에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북청, 성진, 길주, 명천은 꿈꾸는 사이에 지나버리고 아침 5시에 잠을 깨니 차는 방금 망망한 동해 바다의 흰 물결치는 바로 옆으로 달아난다.
여기가 관북의 명소 주을(朱乙) 온천이 있는 곳이다. 창송이 우거진 산모퉁이 바위에 부딪치고 백사(白沙) 언덕에 밀려오는 물결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저런 데서 한여름 지냈으면…” 하고 팔자에 태이지 않은 일을 생각하면서 바라보는 동안에 차는 벌써 나남(羅南)에 왔다.
나남을 지나 수성(輸城)에서부터는 도로 뒷걸음질을 쳐서 청진으로 가는 것이란다. 청진항은 역에서 고개 하나 넘어가서 있으므로 보이지도 않는다. 고개 넘어 자동차 다니는 길만 멀리 보았다.
이 근방은 주민이 대개 고기 잡아먹고 지내는 사람들이라는데 농사도 하는 모양이나 농사는 말이 아니요 그 집하고 사는 모양이 멀리서 보기에도 과연 참혹하다. 조선의 농촌 문제도 문제지만 삼면이 바다인 조선이라 어촌 문제도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차가 해변을 떠나서 바로 북으로 북으로 산지로 올라간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이라는 고무산(古茂山)을 지나니 철로 연변(沿邊)과 역 근처는 차차 한적하고 쓸쓸한 기분이 있어서 마치 미국 남방 사막 광야로 차를 타고 가던 생각이 난다.
10시 반쯤 되어 마지막 닫는 데는 회령이다. 국경에 제일 큰 도시다.
여기서 짐을 가지고 내리니 일본인 군인이 이리 좀 오라고 한다. 차 안에서도 여러 번 조사를 받았지만 대체 하는 범절이 꽤 수선스럽다. 국경의 경계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알고 본즉 군인 같은 사람은 군인이 아니라 순사다.
우리 세 사람은 회령 시가를 잠깐 들여다보고 상삼봉(上三峰)으로 가는 경편차(經便車)를 탔다.

국경을 넘어 용정(龍井)으로
장난감 같은 차가 콩콩거리면서 두만강을 따라 산협으로 굽이굽이 돌아 올라간다.(실상은 내려가는 것이지만 올라가는 것처럼 생각된다.) 강 건너편이 간도라 하건만 얼마 넓지도 못한 강 건너 보이는 산은 아무리 보아도 남의 땅 같지가 않다. 말로만 듣던 뗏목이 내려온다. 뗏목을 타고 천천히 저어 내려오는 것이 멀리 백두산서부터 내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문득 세상이 태평하고 한가해진다.
조선의 최종역인 상삼봉에서 용정까지 가는 차표를 사가지고 국경을 건너게 되었다. 호역(虎疫) 방지로 정거장은 소독과 경계가 대단하다.
두만강을 건너서 도문역에서 세관 검사를 마치고 잠깐 시가지를 일별하고 신만주국에서 내다 붙인 형형색색의 계시와 선전지(엎드린 개를 그리고는 마점산(馬占山)이라 하고, 그 옆에는 ‘積極的 反將 斃成了狗屍 滿洲的 新國際去了 害賊’이라고 쓴 것 따위)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발차 시간이 되었다고 하여 바삐 달려 나와 차를 탔는데 30분 이상을 기다리게 되었다.
오후 2시에 떠나서 바로 용정까지 가는데 어찌나 느리게 가는지 가는 동안에 이따금 사람이 차에서 뛰어내린다. 한 정거장에 온즉 역장이란 늙은이가 제법 제복은 입었으나 그 허리 굽은 것 하며 웃수염 늘어진 것 하며 거동이 느린 것이 과연 만주식이다.
평지 같으면서 꽤 높은 산이 많으므로 차는 개미 쳇바퀴 돌 듯이 그냥 뺑뺑 돌아간다. 한참 허덕거려서 한 곳을 지났거니 하면 다시 또 돌아오고 또 돌아오곤 한다. 과연 모든 것이 어디까지든지 ‘漫漫的’(만만적)인 중에 이것이야말로 가장 만만적이다. 정 목사는 퍽 재미있는 듯이 줄곧 내다보고 웃으신다. 연로(沿路)의 촌락은 거의 조선 사람의 것인데 대개 병란을 당한 곳이요 농작물도 매우 변변치 않다.
8시나 되어 용정에 닿으니, 아는 이 모르는 이 많은 형제자매가 나와서 반가이 맞아주신다. 배형식 감리사 댁에 둘어가 곤한 몸을 쉬었다.

용정의 첫날
첫날이 주일이라 여러 날 여행에 시달린 몸이지만 일찍 일어났다. 반양식(半洋式)으로 새로 꾸며놓은 감리사 주택은 객실과 주방을 꾸민 것이나 뜰을 차려놓은 것이나 다 상당하다. 방에는 유리창 철망창이 깨끗하게 달려 있고, 뜰에는 화단이 얌전하고 과일나무와 백양나무가 은근한 그늘을 지은 것이며, 우물 옆에 목욕간이 있는 것이며, ‘할빈’에서 사시던 주인의 솜씨가 드러나고 모두가 규모 있고 정갈한 것이 주인의 성격을 말하는 듯하다. 지난밤 식후에 어두운데도 손녀 만실(滿實)이와 더불어 노리(추리)를 따서 우리에게 맛을 보이는 것도 그럴듯하였다.
아침 식전에 교역자 여러 분이 찾아오셔서 반갑게 만났다. 키 크고 걸성걸성하신 신광현(愼光顯) 씨, 얌전히 말 없는 이인선(李仁善) 씨와 웃기 잘하는 이호빈(李浩彬) 씨는 모두 전에 여자신학교 재직 시절에 신학교에 계시던 이요, 체소(體小)하나 단단하신 한국보(韓國輔) 씨는 평양의 옛날 친구라 모두 타향에 봉고인(逢故人)으로 반갑고, 검고 튼튼하신 서영복(徐永福) 씨, 연세가 그리 많지 않아도 백발이요 마음 착하신 이용정(李容政) 씨, 얼굴 좀 길고 유순하신 최세환(崔世煥) 씨, 카이제르 수염에 풍채 좋고 상냥하신 장죽섭(張竹燮) 목사는 다 처음 만나지만 알던 이같이 반갑다.
이 지방 부인전도사로 일 보시는 이살렘, 방마리아, 오마리아, 정인태 제씨도 반갑게 만난 중에 내가 친히 가르치고 멀리 러시아에서 와서 신학교에서 많은 고생을 당한 申엘나 씨를 만날 때에 피차에 반가움은 비할 길이 없다.
오전 예배에 연장자이신 정춘수 목사가 설교하셨는데 만당(滿堂)한 회원들과 교우 수백 명은 변변치 않은 우리 두 사람을 데려다 놓고 여간 기뻐하지 아니하는 형색이 얼굴에 완연히 드러난다. 각 구역에서 모인 여러 회원들, 특히 남녀 청년들이 모두 이번에 시국사건으로 재난을 당한 이들이지만, 오히려 믿음 가운데 태연자약하여 튼튼하고 씩씩한 그 태도와 순진한 인상이 눈물겹도록 반가웠다. 이런 느낌들은 지난 밤 정거장의 출영(出迎)을 받을 때부터 얻은 것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점심으로 냉면을 먹으러 나가는 길에 용정의 시가를 잠깐 구경하게 되었다. 워낙 우리 조선사람의 이주지로, 옛 문화로나 신문명으로나 문화적 역사적 기초가 없고 시정(市政)으로서의 주인이 없었던 곳인지라, 시가의 건물이나 도로가 정돈되지 못해 보잘 것이 없어서(마른 날은 먼지가 심하고 비 오는 날은 질기가 심하여), 아직 본국의 신흥 장거리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치고, 제일 우스운 것은 거리 모퉁이 모퉁이 서 있는 지나(支那) 순경이다. 흰 테 두른 모자에 누런 복장, 팔에는 마치 인부들의 표 모양으로 흰 헝겊에다 ‘무슨 공안(公安) 제 몇 분국(分局)’이라고 먹으로 쓴 것을 두르고 총알도 없다는 총을 붙들고 멍~ 하니 서 있는 것은 아무리 참을래야 참을 수 없이 우습다.
오다가 이춘식 전도사 댁에 들려서 그 목장에서 친히 짠 우유를 대접받았다. 이 집에는 아무 때나 가기만 하면 우유를 준다고 해서 말이 아니라, 사실 천성이 착하고 정다운 인연 깊은 그 내외를 만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고마운 기회였다.
저녁 예배는 내 차례라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생과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약 50분간 졸변을 토했다. 회중은 아침보다 훨씬 많은 듯했다. ‘세상에서도 가장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조선 사람, 그중에도 만주 간도의 동포를 우리 예수교와 예수교인은 어찌하려는가’ 하고 나는 간절히 호소하였다.
예배를 마치고 피로한 머리를 식힐 겸하여 몇 친구와 더불어 잠깐 거리를 돌았다. 밤거리에는 일본 군인의 무거운 발자국 소리, 무서운 칼 소리, 급히 달리는 자동차 소리, 경계한다고 이상스럽게 흘겨보는 지나 순경의 꼴, 아침부터 요란스럽게 들리던 비행기 소리, 사람의 내왕이 드물고 무시무시한 것이 간도는 전장 기분이 농후하다.

간도의 우리 동포
나는 더 딴소리를 늘어놓아 간도에 있는 지금 우리 동포가 당하고 있는 정형(情形)을 말하기를 지체할 수 없다. 나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지금 간도의 조선 형제들이 당하고 있는 일을 들었다. 피난민이 5만 명 이상으로 그 수를 모른다 하고, 더구나 이곳저곳에서 병란과 화재로 참혹히 죽은 이는 그 수를 알 길이 없으며, 이두구(二頭溝) 같은 곳은 총과 불로 전멸을 당하였다 한다. 오지의 어떤 곳은 교통까지 끊어져서 그 생사존망을 도무지 알 수 없다 한다.
추수하게 된 밭의 곡식도 내버리고 기르던 소, 돼지, 닭도 내버리고 몸만 피해 도시로 밀려 들어오는데 도시로 찾아온 그들은 갈 데가 어디랴? 용정에는 지난 7월 초순부터 한동안 민회(民會)에서와 민간에서, 각 교회에서 피난민 구제회를 만들어서, 혹은 대성(大成)학교 교실 한 방, 혹은 명신(明信)학교 기숙사, 혹은 중국인의 사가(私家)를 얻어가지고 수용하고 구제하였다 한다. 한 집에 45명, 혹은 7-8호에 30-60여 명씩 들어 있다니 그 지내는 정경(情景)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다가 길에(벌써 새벽바람이 꽤 쌀쌀한데) 흰옷 입은 이들이 짐을 이고 지고 어린아이 떼를 지어 줄레줄레 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얼른 ‘촌에서 피난 오는 우리 형제들이구나’ 했다. 지난밤에 동불사(銅佛寺)라는 곳에 비적(匪賊)이 습격을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거기서 밤을 새며 오는 것이 아닌가 했다.
일전에 묵은 예배당에 들어 있는 피난민들이 마당 이 모퉁이 저 모퉁이에서 밥을 끓이느라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대단히 좋지 못하였건만, 이렇게 당장 무서운 화를 피해서 오는 이들을 몸소 보게 되니 참 기막혔다.
나는 그들이 지나가는 뒷모양을 바라보고 형언할 수 없는 생각으로 돌아와서

아버지 등에지고 어머니도 잔뜩이고
앞에는 올망졸망 어린것들 갈팡질팡
간도서 이정경보고 눈물겨워 하였소


이런 서투른 시조를 끄적거려 놓았다.
나는 정 목사와 더불어 뒷산으로 식전 산보를 갔다. 바른편에는 장로교 선교사 주택지가 있고, 왼편에는 감리회에서 사놓은 기지(基地)가 있는데 그 사이에 있는 골짜기는 공동묘지다. 이역의 묘지를 보기만 해도 이상한 생각이 나는데 하물며 이렇게 어려움 중에 있을 때이리오. 마침 어떤 젊은이가 어린애 송장을 묻으려고 끼고 간다. 피난민의 아이 아닌가.
용정의 시가는 꽤 크다. 총영사관, 중앙학교, 의리(宜理)교회 같은 큰 집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본즉 산 같고도 편편한 평야요 들 같고도 산인 것이 왜 그리 모두 컴컴하고 쓸쓸해 보이는지! 지금 조선 형제들이 당한 처지는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저녁에는 달이 밝기에, 여러 친구들과 같이 보지도 못하고 짐작으로 소설을 썼던 해란강(海蘭江) 구경을 갔다. 어두컴컴한 버들 수풀, 그 위에 어스름 달빛과 좔좔 고요히 흐르는 물소리는 구슬프기도 하였다. 저 철교 위로 쫓겨 다니는 동포가 얼마나 허둥지둥 건너 다녔을까? 이 강물에 빠져 죽은 이는 얼마나 될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들어왔다.

달아 해란강에 비친 달아 말 물어보자
이 물에 백의인(白衣人)의 원루고혼(怨淚孤魂)이 그 얼만가
두어라 무심한 달이니 대답할 줄 있으랴


수양회를 마치고
수양회는 꼭 11일 만인 25일에 마쳤다. 나는 아침 성경연구 시간에 구약을 공부시켰다. 히브리 민족을 채찍의 훈련과 광야의 시험으로 그리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마침내 그들이 바라고 꿈꾸는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보아서 비록 많은 사람이 중간에 희생을 당하였으나 그 희생의 음덕으로(설혹 소수나마) 그 후손은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에 들어가게 된 도리를 배우고 따라서 우리 조선 사람도 현재의 쓰라린 시련의 시대를 지나서 마침내 새 나라를 발견할 때가 있을 것을 배우고 많은 위로를 얻었다. 다음에는 선지자들의 교훈을 공부하여 그 엄준한 사회 비판과 지독한 책망으로 그것이 현대 사회상과 꽤 비슷하니만큼 우리 지도자, 특히 교역자가 많은 교훈과 자책함을 받게 되었다. 시간이 부족함을 청자(聽者), 강자(講者), 다 같이 느꼈다.
마지막 날, 전별회에 이호빈(李浩彬) 군이 나와서 예물로 북포를 내놓고, 간도의 우리 생활은 밤낮 맞기만 하는 ‘북’의 생활이요,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포’(包)의 생활이라고 하면서 목멘 소리로 감격에 사무친 말을 할 때는 나는 눈물겨움을 금치 못하였다. 한마디 답사를 하면서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헤매이더라도 주께서 같이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선한 목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튿날 정 목사는 먼저 떠나고 나는 국자가(局子街)를 갈 양으로 묵었다. 두도구(頭道溝)에도 가자고 이 목사와 거기서 오신 남녀 청년들이 간청을 하건만(처음에는 가기로 약속하였던 것을) 사정에 의해서 못 가게 되니 퍽 섭섭하였다.
이번에 은진(恩眞)중학에 계신 이와 그 밖에 몇 분 동지를 지난주일 아침에 조용히 만나볼 기회가 있게 된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요, 마침 명신여학교가 일찍 개학해서 나와 종씨(宗氏)인 전(田) 선생님의 인도로 아침기도회에 한 말씀으로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자”고 권고하게 된 것도 반가운 일이었지만, 불행히 장로교회에는 중앙교회 목사 문재린(文在麟) 씨를 반가이 만나보고 3일 기도회에 동산예배당에 잠시 참여하였을 따름이요, 좀 더 친밀한 사귐이 없는 것은 무엇보다 큰 유감이었다. 옛 친구로 은진에서 일 보고 계시는 박찬빈(朴贊彬) 씨를 만나 씨의 호의로 공원 구경을 하고 당지(當地) 문학애호가 제씨의 이야기를 재미롭게 듣게 된 것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오후에 좀 한가히 앉아 있을 틈이 있으므로 백초구(百草溝) 근방 대두천구역에 계신 서영복 목사에게 당신이 당하신 일과 동포들이 당한 일을 더 자세히 들었다.
서 목사는 대도회(大刀會)에 잡혀서 결박을 당하고 사흘을 끌려 다니며 꼭 죽을 것을 중국인들의 극력 변호로(같이 잡힌 이는 죽고) 참말 하느님의 도움으로 천행(天幸) 살아났다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서늘한 느낌이 있다.
듣건대 훈춘이나 백초구 지경에는 우리 피난민이 5,000명 이상이 되는데 중국인의 토방(土房) 하나에 어른, 아이 수십 명이 한데 있으면서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므로 날마다 죽는 사람이 많고 매장 허가 수속에 돈이 들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어른이면 부대에 넣어 짐차에 실어다 버리고 어린애면 산 아이처럼 어머니가 업어다가 몰래 버린다 한다.
서 목사의 말씀을 듣고 마침 자혜의원에 호열자[콜레라–편집자 주] 예방주사를 맞으러 와서 여기저기 맥없이 앉아 기다리는 우리 형제와 자매들을 보고 나는 다시 한 번 간도와 만주 동포의 기막힌 정상을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은 요행으로 살았으니 사나보다
내일은 어느손에 죽을지 어찌 알랴
이것이 만주형제 당하시는 설은 운명이라오
간도는 우리 땅을 우리 조상 일러놓은 땅
세상이 어지러워 여기서도 못 살 지경
어디로 가오리까 예도 제도 못 살 진대


국자가(局子街)를 다녀서 간도를 떠나면서
간도를 왔다가 다른 데는 그만두어도 수부(首府) 되는 국자가는 아니 볼 수 없다 하고 장 목사의 간청으로 교회도 찾아볼 겸 나는 26일 아침에 자동차도 말고, 기차도 말고, 마차를 타고 국자가를 향해 떠났다. 마차라니까 안동현 같은 데서 보는 따위의 한 번 채찍질을 하면 잘 달아나는 사람 타는 차가 아니고 차라리 짐구루마 같은 마차였다.
옅은 궤짝 같은 데 흰 휘장을 둘러씌운 마차간에 장 목사, 이 전도사, 신엘나 씨, 또 한영복이라는 학생, 어린애 하나와 나까지 여섯 사람이 바짝바짝 끼어 앉아서 가는데 어찌나 몹시 흔들리고 들치우는지 꼭 엉덩이가 깨지는 것 같아서 나는 ‘아이구, 아이구’ 소리를 연발, 모두 웃었다.
수수밭 사이 우거진 수풀 사이로 갈 때는 금방금방 비적(匪賊)이 총을 쏘며 달려드는 것 같은 의심도 났으나 설마 어떠랴 하고, 일동이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되시니’ 찬미를 부르며 너덧 시간 무서움과 아픔을 참고 가노라니 나중에 허리가 아프고 골치가 아파서 헹뗑하다.
40리밖에 안 된다는 것을 오전 11시에 떠나서 오후 4시가 거진 되어서야 국자가에 닿았다. 우리 교회에 들어가서 잠깐 쉬어서 중국인 거리 구경을 대강하였다. 빈부의 현격함이 과연 대단하다. 대상(大商)의 차림은 상당하나 하층민의 생활은 사람의 그것이라 할 수 없다. 일본 사람과 그 군대가 벌써 꽉 자리를 잡았다.
밤에는 내가 가르침을 받던 한과 그 남편 정(鄭) 씨를 찾아서 반갑게 얘기를 하고, 이튿날 주일 아침에 ‘새 사람과 옛사람’이란 문제로 말씀하고, 정 씨의 점심 대접을 잘 받고 곧 떠나서 도로 용정으로 왔다.
비가 쏟아지는 것을 무릅쓰고 와서 저녁에는 용정교회에서 ‘깨끗한 마음’이라는 문제로 간절히 힘써 말하였다.
이튿날 아침에는 이호빈 씨, 한국보 씨, 방마리아 씨와 용정을 떠났다. 몇 분으로 더불어 섭섭한 손을 논아 용정을 등지고 떠나서, 편편하고 널따란 들로 가노라니 감개한 생각이 슬그머니 일어난다.
광막하고 쓸쓸한 간도 벌판에 울고 헤매는 우리 형제자매들, 그 가운데서 주의 복음을 가지고 허덕이고 돌아다니는 교역자 여러분 형제와 자매에게 주의 두터운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면서 간도 땅을 작별하였다.

 
 
 

2019년 1월호(통권 7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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