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교회와 현장] 강연문
교회와현장 (2019년 12월호)

 

  동아시아와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건설하자
  

본문

 

* 이 글은 한국YMCA전국연맹, 아시아태평양YMCA연맹,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발전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한반도평화포럼’(2019. 11. 10-13, 한국국제협력단 KOIKA 연수센터)에서 발표된 강연문이다. - 편집자 주


동아시아의 전쟁 체제–한국전쟁과 미일 안보, 샌프란시스코 체제
일본의 대(對) 아시아 50년 전쟁이 끝난 후, 아시아에서는 세 개의 심각한 전쟁이 일어났다. 중국 내전, 6·25전쟁, 베트남전쟁이다. 이 중 중국 내전과 베트남전쟁은 승패의 결과가 분명하고 전쟁의 끝도 확실했지만, 6·25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무승부로 끝나 전쟁이 일시 정지된 상태가 65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동북아시아는 현재 6·25전쟁의 연장선상에 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었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조선은 미소 양쪽 군에 의해 분할 점령당했다. 그 결과 1948년에는 각각의 점령 지구에 자신이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국가라고 주장하는 두 개의 국가, 반(反)공산주의인 대한민국과 친(親)공산주의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두 국가는 모두 무력통일을 통해 국가 건설을 완성하고자 했다. 미국과 소련 모두 그들이 비호하는 국가가 무력통일로 향하는 것을 오랜 기간 허락하지 않았지만, 1949년 중국 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하자, 북한의 지도자인 김일성과 박헌영은 소련과 중국의 승인 및 지지를 받아 무력통일 전쟁을 시작한다.
북한군은 전쟁이 발발한 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파죽지세로 낙동강 수변까지 진출하여 부산을 목전에 두었다. 무력통일을 이루려는 북한의 꿈은 이내 이루어질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일본에서 날아온 미 공군의 맹렬한 폭격으로 북한군의 보급선이 끊겼고, 북한군은 끝내 한미 연합군의 최종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물러났다. 9월 15일에 일본의 고베와 요코하마에서 발진한 한미 해병대와 육군 부대는 일본인 선원에 의해 이동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고, 북한군에 괴멸적 타격을 입혔다. 인민군은 큰 혼란 속에서 북으로 퇴진하였다.
여기서 미군의 도움을 받아, 신 유엔 총회 결의하에 한국군이 북진하는 국면이 도래한다. 10월 20일에는 평양을 함락시키고, 23일에는 압록강이 바라다보이는 초산에 도달했다. 한국 측이 바라는 무력통일의 꿈이 눈앞에 실현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0월 19일부터 일주일 사이에 중국 인민지원군 26만 명이 참전하고, 한미 연합군은 바로 패하여 후퇴하였다.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에서 무력으로 분단 상태를 극복하고 통일민족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처음에 북한이 시도하여 실패했고, 이어 한국이 시도하여 실패했다. 그리고 한반도 내전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의 전쟁으로 전환되었다. 전선이 안정된 단계에서 1951년 6월에 정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일본과의 강화회의가 진행되어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체결되었다. 다음 날인 9일, 미국 덜레스 국무장관과 일본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미일 안보조약에 서명하였다. 이는 6·25전쟁을 수행하면서 이루어진 국가 간의 관계를 조약을 통해 고착화하고, 하나의 초국가적인 체제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북한과 공산 중국을 적으로 하고, 한국에서 미군과 한국군이 전위군을 맡고, 일본에는 미군사령부와 미군 주력기지, 비행장을 두는 형태였다. 일본은 미군의 명령에 따라 모든 지원활동을 하지만, 무력 조직을 전투에 참가시키지는 않는다. 평화국가를 계속 이어가면서 국토는 미군 기지화되고 있다.
전쟁은 그 상태로 2년 더 이어져,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전투는 정지되었다. 그 사이에 정치회담을 열어 통일을 위한 방안, 외국 군대 철수에 대한 합의를 포함하는 평화협정을 만들기로 되어 있었으나, 1954년 4월부터 6월까지 열린 제네바 회의는 성과 없이 끝나 정전협정 체제가 끝없이 이어지게 되었다. 북측에서는 중국 인민지원군이 1958년을 끝으로 완전히 철수했지만, 남측에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의해 미군이 머물러 북미 적대관계는 계속됐다.

북미 대립에서 동북아시아 전쟁 위기로
1965년부터 미국은 베트남에서 전쟁을 시작했고, 그 전쟁에 한국군 5만 명을 끌어들였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만들어진 체제는 그대로 이 전쟁을 위해 활용되었고, 효과적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의 진상이 뚜렷해지자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패배했다.
그 일이 최종적으로 확실해지기 전에, 중국과 미국이 움직여 6·25전쟁에서의 무승부를 확인하고 화해했고, 중국은 더 이상 6·25전쟁의 적이 아니게 되었다. 15년 후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어 냉전 시대가 끝났다. 동유럽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체제는 해체되어 갔다. 북한은 1990년 소련으로부터 한국과의 수교 의향을 통보받았다. 소련으로부터의 경제적 혜택과 핵우산을 잃은 북한은 완전한 고립과 경제적 곤경에 빠졌다.
이때 북한 지도자는 궁지를 벗어나기 위해 세 가지 옵션을 생각했다. 첫 번째 옵션은 소련의 핵우산이 사라졌으므로 미국의 핵무기에 대처하는 자신의 핵무기를 갖는 것이다. 북한의 김영남 외무상은 1990년
9월에 방북한 소련의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에게 각서를 전달하고 북한-소련 동맹 조약이 유명무실하게 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동맹관계에 의거한 약간의 무기를 스스로 조달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아사히신문」 1991년 1월 1일)
두 번째 옵션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이었다. 배상이든, 경제협력이든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자금과 기술을 얻어 경제발전을 도모한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1990년 9월 가네마루·다나베 방북단이 평양에 와서 자민당 전 부총재 가네마루 노부 씨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표명한 것을 근거로 3당 공동성명을 내고 북일 국교협상 개시의 길을 튼 것이다.
세 번째 옵션은 한국과의 국가적인 공존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일은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으로 실현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문제는 첫 번째 옵션이 미국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더욱이 첫 번째 옵션은 두 번째, 세 번째 옵션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미국은 북한의 핵 개발, 핵 무장에 강력히 반대했고, 북한과 일본이 국교 협상을 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북일 국교 교섭은 1991년 1월에 시작되었지만, 1991년 11월 제8차 회담에서 결렬되었다. 그 이유는 납치된 일본인 여성 문제를 일본 대표가 따진 것에 북측이 반발했다는 것과, 일본 대표가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는 것을 회담을 계속하는 조건으로 요구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북일 회담은 8년간 결렬 상태였다. 1990년에 겨우 재개되었으나, 세 번의 회담을 끝으로 또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그 사이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해서도 미국과의 사이에서 다양한 충돌과 교섭이 반복되고 있었다. 두 번째 옵션이 성과를 거두지 않는 한, 북한은 첫 번째 옵션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2002년 9월에 이루어진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과 북일 정상회담, 그리고 북일 평양선언 합의는 놀라운 전진이었다. 이는 미국과 총리 관저, 외무성 내의 반대파들에게 비밀로 계속되어온 일본 외교의 필사적인 노력의 성과였다. 그러나 이 정도의 전진도 일본 내 반대파의 캠페인과 미국의 개입, 관저 내 반대파에 의한 획책에 의해 저지되어 국교 교섭은 한 번 이루어진 후 결렬 상태에 빠져버렸다.
이 사태 속에서 혼란스러운 납치 문제 수습을 맡은 아베 신조 관방 부장관이 정계의 새로운 스타로 부상해 2007년에 자민당 총재, 총리가 되었다. 총리가 된 아베는 납치 문제야말로 일본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선언하고, 내각 차원에서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고 했다. 거기서 그가 내놓은 주장은, 납치된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으니 즉시 전원을 귀국시키라는 것이었다. 북한은 13명을 납치해 8명이 사망하였고 5명이 살아 있다며 5명을 가족과 함께 귀국시킨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베 내각의 주장은 교섭 중단, 최후통첩에 이르는 막다른 길이었다. 북일 교섭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이 직후인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마침내 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아베 내각은 즉각 북한으로부터의 수입을 금지하는 제재 조치를 취했다. 그 이후 미국의 지도자는 부시에서 오바마로 바뀌었고, 북한에서도 2011년에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뒤를 이었으며, 일본에서는 2007년에 사임한 아베가 2012년에 다시 총리로 복귀했다.
그러는 동안 북미 대립은 시간이 갈수록 험악해져 2016년에는 새 지도자 밑에서 미사일 발사가 맹렬한 기세로 연속해서 진행되었다. 핵 개발은 이미 수소폭탄 실험의 경지에 이르렀고,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하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2017년 미국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한다. 그해 9월, 북한은 6차 핵실험을 하였는데 수소폭탄을 소형 탄두로 만들기 위한 실험이라고 발표했다.
급격히 고조된 북미 대립 속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가장 충실한 동맹자로서 북한에 대한 제재의 극한화, 군사적 위협의 시위를 추진한 사람은 아베 총리였다. 9월 유엔 총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도발을 멈추지 않으면 북한을 전적으로 파멸시키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없어진다.’고 선언하자, 아베 총리는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모든 선택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있는 대통령의 결단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귀국 후 아베 총리는 ‘국난돌파 해산’을 단행했다. 기자회견에서 아베는 ‘북한의 위협에 대해 국민의 생명과 평화로운 삶을 지켜낼 것이다. 국난이라고 불러야 할 이 문제를 나는 온 힘을 다해 돌파해나가겠다.’고 결의를 밝혔다. 아베 총리는 위기의 내용도, 자신이 하려는 일도 전혀 설명하지 않고 그저 트럼프 대통령과의 100% 공동 행동으로 나아가는 자신에 대한 신임을 요구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때 아베 총리는 자위대 제복조 수장에게 미군이 북한에 대해 군사작전을 취할 경우 ‘안보법제하에서 자위대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검토, 준비시키고 있었다. 당시 자위대 통합막료장 가와노 가쓰토시 씨가 미군 총수인 던포드 합참의장, 해리스 태평양군사령관과 상시 연락해 자위대의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에서야 밝혀졌다.(「아사히신문」 2019년 5월 17일)
11월에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과 한국을 방문하여 도쿄 요코타 미 공군기지에서 미군 병사와 자위대원 2,000명을 모아 ‘압도적인 능력을 행사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했다. 아베 총리는 또다시 ‘미국과 일본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100% 함께라는 점을 강력하게 확인했다.’고만 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귀국하자 동해에서 미국 항모 3척이 참가하는 한미 해군 합동훈련이 시작되어 북한에 대한 극한적 위협을 드러냈다. 이에 북한은 1월 29일에 ICBM을 발사하여 ‘핵전력 완성의 대업’을 이루었다고 선언했다. 동해에서 북미 전쟁의 위기가 최대로 커진 것
이다.

전환–북미 평화프로세스의 시작
북한과 미국의 전쟁 위기가 정점을 향해 높아지는 과정에서 아베 총리와 대조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문 대통령은 8월 15일 연설에서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어떤 나라도 군사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결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문 대통령은 위기의 절정 속에서 북미 사이에 들어가 전쟁을 막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 무기가 된 것이 11월 13일 유엔 총회의 결의 ‘스포츠와 올림픽의 이상을 통해 평화로운,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한다’였다. 이 결의는 2018년 평창올림픽이 2020년 도쿄, 2022년 베이징올림픽으로 이어지는 3연속 아시아 개최 올림픽의 첫 번째 대회이며,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평화, 발전, 관용, 이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뜻깊은 기회가 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 결의가 유엔 사무총장과 문 대통령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전달되어 촉구가 주효하게 되었을 것이다.
12월 북미 핵 전쟁 광경을 들여다본 김정은 위원장은 2018년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전환 의지를 전달했다. 평창올림픽에 온 북한 대표는 남북 정상회담의 뜻을 전달했고, 문 대통령의 특사가 방북해 김정은 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정상회담 개최가 결정됐다. 대통령 특사는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북미 정상회담 제안을 듣고 곧바로 미국으로 떠나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 내용을 전달했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승낙하겠다고 즉답했다. 3월 8일의 일이었다.
남북 정상회담은 4월에 개최되었고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이 나왔다. 북미 정상회담은 늦춰졌지만 6월 24일 싱가포르에서 개최되었다. 북한과 미국 두 정상은 전 세계인의 눈앞에서 전쟁 회피를 서약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의 안전을 보장하라’고 했고,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굳건하고 확고한 결심을 재확인’하며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은 평화 프로세스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북미 협상을 시작하려면 먼저 이것이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대등한 외교협상임을 전제해야 한다. 테이블 위에서 제재와 위협의 수단은 뒤로 물리고, 설득과 양보, 대화와 타협의 정신을 앞세워야 한다. 협의를 정리하는 방식으로는 2005년 9월에 합의한 6자 회담의 방식이 지적되었다. ‘약속 대 약속,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단계적으로 실시해나가기 위해 조정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의 핵 시설, 미사일 시설, 핵무기, ICBM을 하나하나 철거 또는 폐기하는 일을 계속 진행하려는 데 반해, 북한은 그에 합당한 신뢰를 나타내는 조치, 안전을 보장하는 조치를 요구할 것이다. 북한은 우선 제재 완화, 부분적 정지, 전면적 중단을 요구할 것이 확실하지만, 핵무기 폐기에 맞추어 한국 및 일본과 관련된 미국의 핵우산 철거를 요구할 것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주한미군, 주일미군이 핵무장된 미군의 일부인 이상, 미군의 존재도 틀림없이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더욱이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은 재래식 무기의 분명한 열위를 보완하는 수단이므로, 한미일 측의 스텔스 전투기, 무인기 등을 포함한 고도의 무기를 그대로 둔 채 북의 핵과 미사일을 폐기하는 것은 불평등하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그러한 주장이 나오면 미국 정부의 논의도 어려울 수 있지만, 한국이나 일본 내에서의 논의도 격렬하게 분열되어 큰 사태가 될 수도 있다. 그러한 국론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불가침·공존·평화협력 체제가 절대적인 것으로 확립될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면 이 같은 조치가 가능한가?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어떻게 다른 쪽에서 북한에게 줄 수 있는가? 북미 불가침조약, 북미 수교만 있으면 충분한가?
북미 평화 프로세스는 참으로 어려운 협상이 될 것이다. 최초의 정상회담이 열린 지 벌써 1년 반이 지났고, 겨우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이 인정되어 최초의 협상이 이루어진 단계에 이른 상황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더라도,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이 길을 가야 하는 수밖에 없다. 다른 길은 모두 전쟁으로 통하고 있다.

아베 정권의 대(對) 북한·한국 정책
북미 평화 프로세스가 어렵다면, 관련 국가들이 참가하여 도와야 한다. 이 점에 대해 가장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다. 그러나 북한 정부는 지금 한국 정부의 노력이 부족하다며 트집을 잡고 있다. 한국 정부는 최대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일본 아베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이 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2019년 3월 8일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의 정상회담 제안을 즉각 승낙함으로써 아베 총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우선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을 주선한다는 움직임을 취한 것에 충격을 받았고, 트럼프 대통령이 맹우(盟友)인 자신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정상회담을 실시하겠다고 대답한 것에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이다.
아베 총리는 이 뉴스를 듣고 3월 9일 아침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회담을 통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를 향해, ‘최대한의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며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을 요청했다. 4월 6일에는 미국을 방문한 아베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을 찾아가 ‘최대한 압력을 계속 가할 방침’을 확인하는 동시에 정상회담에서 납치 문제를 제기할 것을 요청했다.
북미 정상회담 5일 전인 6월 7일에 아베 총리는 다시 미국을 방문하여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구체적 행동을 취할 때까지는 제재를 해제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하고 정상회담에서 납치 문제를 거론할 것을 다시 촉구했다. 이번에는 아베 자신도 납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날 생각이라고 덧붙여야만 했다. 사실 북일 정상회담은 북한으로부터 이미 거부당한 사안이다. 5월 6일 「로동신문」은 “여행 준비를 하기 전에는 마음을 먼저 고쳐라”라는 논설을 내걸었다.
그러므로 북미 전쟁을 회피하는 평화 프로세스의 시작과 함께 아베 총리가 납치 문제 해결을 주장한 것은 자신의 세 가지 원칙에 의거한 것이었다. (1) 일본은 납치라는 북한의 범죄 행위를 잊지 않으며, (2) 이 문제를 폭로 고발하고, (3) 북한을 여전히 추궁하겠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의 주장은 ‘납북자 전원의 즉각적인 귀국’인 만큼, 이를 트럼프 대통령이 진심으로 주장한다면 북미 정상회담을 결렬시킬 수 있었다.
아베 총리는 북미 교섭이 난항을 겪는 가운데 방관자적 태도를 계속 이어나갔다. 평화 프로세스를 진행하기 위해 일본에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와 같은 자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9월에 방북하여 세 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하는 등 남북의 접근으로 사태를 개선하려고 했는데, 아베 총리 주변의 인물들이 문재인 대통령은 친북이 아니냐고 거세게 반발한 듯하다. 게다가 10월 이후 강제징용 소송에 관한 대법원 판결, 2015년의 합의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치유재단의 해산, 자위대 비행기에 대한 한국 해군 함선의 레이더 조사 문제가 연속으로 일어났다. 한국 측의 태도에도 문제를 느꼈지만 아베 정부의 강경한 반응은 놀라웠다.
마침내 2019년 1월 28일, 국회 첫 시정방침 연설에서 아베 총리는 ‘지구본 부감외교 총마무리’를 말하고, 중국, 러시아, 북한에 대해 관계 개선을 목표로 한다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며 한국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여 충격을 주었다.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자, 아베 측은 오히려 더 기세가 올랐다. 5월 3일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는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이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선은 현재의 북일 간의 상호 불신의 껍데기를 깨기 위해 나 자신이 김정은 위원장과 직접 마주보는 것 이외에는 없다. 그래서 조건 없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 솔직하게, 또 허심탄회하게 대화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는 만나지 않겠다고 하는 김정은 위원장은 만나고 싶다고 하며, 정작 만나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는 문재인 대통령은 무시하는 이상한 자세이다. 6월 오사카의 G20에서는 문 대통령을 무시하는 태도가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7월 초 일본 정부는 세 가지 품목의 반도체 원료에 대한 수출 특별조치를 정지하는 결정을 한국에 표명했다. 한국 경제에서 반도체 제조가 갖는 중요한 의의를 생각하면, 이 조치는 한국 경제에 치명적인 위협을 줄 수 있는 적대적 행위임이 분명하다. 이런 조치들이 마침내 한국의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로 이어진 것이다.
아베 총리의 자세에 대해 우려하는 일본 시민들은 “한국은 적인가?”라는 성명을 발표해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의 보수 언론 「문예 춘추」는 9월호에 특집 “한일 비난댓글 쇄도-문재인 정권이 적국이 되는 날”을 실었고, 10월호에는 특집 “한일 단절・분노와 배신의 한반도”, 11월호에는 특집 “한일 상극”을 편성하여 문정인 씨의 논문 “아베 총리여, 왜 한국이 적대국인가”를 실었다. 아베 총리는 10월 3일 국회 소신표명 연설에서 ‘한국은 중요한 이웃나라입니다’라고 마침내 한마디를 해야만 했다. 이로써 일본 총리가 한국을 적으로 보는 일이 허용되지 않음이 확실해졌다.
아베 총리에게는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평화 프로세스에 참여하고자 하면 일본이 나아갈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북일 국교정상화의 길이다. 북일 국교정상화는 다년간에 걸친 일본의 외교 과제였다. 지금 현실적으로 가능한 길은 북일 평양선언에 의거해 무조건 국교를 수립하고 평양과 도쿄에 대사관을 여는 것이다. 무조건적이라는 것은 제재를 그대로 두라는 뜻이다. 무조건적 수교는 오바마 대통령의 2015년 쿠바 수교가 그 예이다. 대사관을 열면 핵미사일 문제, 경제협력 문제, 제재 해제 문제, 그리고 납치 문제 협상을 동시에 시작할 수 있다. 국교를 개방하면 독자 제재의 완화, 문화 교류, 인도적 지원, 선박과 사람의 왕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북일 국교정상화에 의해, 북한은 국제관계에서 스스로의 지위를 확실히 바꾸고 안전을 위한 의미 있는 보증을 얻어, 비핵화 방향으로 확실히 몇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북미 평화 프로세스를 진행하기 위해 일본이 필요하다. 일본을 이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려면 일본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면 국민끼리의 교류, 우호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갈등의 씨앗을 없애려면 시간이 걸린다. 내년 초에는 대법원 판결에 따른 집행으로 인해 일본 기업의 압류된 재산이 경매 절차에 들어갈 것이다.
이미 시작된 정부 간 대화가 상황을 바꾸는 것은 늦다. 일본은 올해 12월부터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의 기간을 올림픽 휴전 기간으로 선언하고, 모든 현상 변경 조치를 동결하고, 협상을 위해 노력하게 한다는 식으로 합의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새로운 비전
북미 평화 프로세스는 어떤 지평을 목표로 할 것인가? 그것은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공동의 집’이라고 말하고 싶다. 동북아시아의 장래 비전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안이 논의되어 왔다. 1990년 7월 「동아일보」의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나는 미국을 비롯한 동북아 6개국에서 ‘인류 공생의 집’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 밝혔다. 2003년 2월에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동북아시아 공동체’, ‘평화와 번영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소원이라고 취임 연설에서 말했다. 대통령의 제안에 용기를 얻은 나는 그해에 도쿄에서 『동북아 공동의 집: 신지역주의 선언』을 출간했다. 하지만 이런 제언들은 모두 상상력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는 지금, 새로운 지역공동체에 관한 적극적인 구상이 나타나고 있다. 우메바야시 히로미치 교수는 1996년부터 동북아시아 비핵지대 구상을 꾸준히 설명해왔다. 이 구상은 일본, 한국, 북한 세 나라가 핵무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미국, 러시아, 중국이 이 세 나라에 핵 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 구상도 그 당시에는 꿈일 뿐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상황이 변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자체적으로 보유하기에 이르렀고, 미국과의 합의가 이루어지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실현하겠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일본과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에 의해 지켜지고 있지만, 핵무기를 가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나라를 둘러싼 러시아, 중국, 미국은 핵으로 무장한 초강대국이다.
그러므로 북미 평화 프로세스가 한반도와 일본 열도, 거기에 오키나와의 완전한 비핵화에 도달하면 남한과 북한, 일본 이 세 나라는 완전한 비핵화를 이룬 중립국이 된다. 세 나라는 통상적인 혹은 최소한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겠지만, 그때는 일본뿐만 아니라 아마 한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헌법에 전쟁 포기 조항을 추가하였을 것이다. 세 나라는 평화국가 동맹을 구성하고 있을 것이다.
이 세 나라는 주변의 세 강대국과 동북아시아 안전보장 공동체를 구성한다. 핵으로 무장한 세 강대국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침략하지 아니하며, 간섭하지 아니하며, 세 나라 간에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으로 맺어져야 한다. 남북한과 일본은 세 강대국을 연결하는 핵심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동북아시아의 바람직한 미래상이다. 북미 평화 프로세스의 긴 여정을 거쳐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완전히 뛰어넘는다면 동북아시아 시민들은 이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2019년 12월호(통권 732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