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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19년 11월호)

 

  인터뷰-조향록 목사
  

본문

 

* 이 글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 지원으로 진행된 한신대 프로젝트 “한국 개신교가 한국 근현대의 사회 문화적 변동에 끼친 영향 연구”의 일환으로 진행된 조향록(1920-2010) 목사와의 인터뷰를 요약한 것이다. 2003년 10월 1일 남양주시에 있는 조향록 목사의 자택에서 박재순 박사(당시 한신대 학술원 연구교수)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 편집자 주


박재순 긴 생애동안 기독교 복음화와 사회선교에 헌신하신 조향록 목사님을 모시고 기독교 신앙이 이 땅에서 어떻게 뿌리내리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그런 이야기를 소상히 들어보고자 합니다. 목사님,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조향록 감사합니다.
박재순 먼저 조 목사님 가정에서나 조 목사님 개인으로 기독교 복음과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때 받아들이게 된 사회문화적 배경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조향록 저희 가정이 처음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제가 3살 때 우리 가정이 예수 믿게 되었다고 들었으니까, 1923년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에는 1919년에 독립만세사건이 일어나고, 잔혹한 일제 사람들의 압제가 극심해졌고, 그다음 해 1921년도에는 흉년도 들었어요. 그래서 아주 좋은 민족이 최하의 처참함 가운데 빠져 있을 때인데, 저희 가정도 완전히 몰락한 가운데서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면 우연히 예수 믿을 생각이 나더라고 해요. 예수 믿는다고 어디서 들었느냐고 하니까,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쟁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더군요.
예수에 대해서 배우려면 교역자가 있는 곳에 가야 하는데 한 70리 돼요. 걸어야 하는 길인데, 가는 도중에 큰 산이 있어요. 그 산을 넘어서 전도사님을 모시고 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전도사님은 3・1독립운동 때 아주 열렬한 애국투쟁을 한 사람인데, 그 자료가 독립기념관에 가면 있을 겁니다. 상해 일본 영사관 경무부 2과에서 수집한 자료인데 제가 기증했습니다. 제가 아는 친구가 동경에서 어느 고서점을 다니다가 그것을 발견해서 저하고 같이 가서 보게 되었습니다.
박재순 그 전도사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조향록 염학섭. 지금 국립묘지에 모셨습니다. 그분의 인도로 우리 가정이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한국 민족이 최악의 절망 상태에 빠졌을 때 예수 믿고 희망을 찾았는데, 기독교가 가진 큰 힘이 3・1운동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그 이후에 붙잡을 것은 이 기독교 신앙밖에 없다는 의식이 가득했지요. 저도 어릴 때부터 나라는 빼앗겨도 예수만 바로 믿으면 언젠가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아버지는 한글도 모르던 분이었는데 예수 믿어서 한글 배워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중병이 들어서 가정도 몰락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예수 믿고 가정이 일어난 겁니다. 우리 가정뿐 아니라 한민족이 한국 기독교인들이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었지만, 예수 믿고 전혀 다른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단칸방에서 애는 자꾸 낳으니까, 애들은 밤낮 울고불고, 성미 급하신 아버지가 당신이 아프니까 배운 것도 없는 분이 욕지거리 하고, 어머니한테 욕하는 것밖에 없어요. 죄 없는 어머니는 대답도 못하고 울기만 하셨지요.
그런 비극적인 가정, 옆 사람들이 봐도 며칠 가지 못할 것 같은 가정인데, 예수 믿고 나서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아버지가 어디서 힌트를 얻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철들어서부터 우리 큰아들은 집에서 가사를 돌봐야 하지만, 둘째 아들은 하나님께 바쳐야겠다는 생각을 아주 확실히 했어요. 하루 2끼면 2끼, 3끼 먹기 힘들지만, 날마다 15분씩 아이들 데리고 같은 기도를 했죠. 나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었어요. 운명적으로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팔자인가 보다 생각하고 자랐습니다.
80 먹은 지금 조금도 후회도 없고, 의심도 없고, 참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장관 10개를 줘도 난 그런 건 흥미도 없어요. 이것은 작은 내 가정의 문제이지만, 그 시기를 회상해보면 한민족이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서 그래도 살아야 하겠다, 바르게 살아야 하겠다, 그렇게만 하면 하나님은 언젠가 나라의 독립도 허락해줄 것이다, 그런 믿음을 줬어요. 그때 이동휘 선생 같은 이들은 군인 출신이었으니까 무력항쟁을 해서 싸워서 이기자, 우리도 하면 된다는 주장을 펴고 나갔고, 다른 지도자 이승만 같은 사람들은 미국에서 정치외교적으로 독립을 추구했고, 상해에서 있었던 사람들은 이왕가(李王家)를 극복하는 것이 독립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어요.
박재순 가족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은데요. 아버님, 할아버님 분위기 가운데 혹시 불교나 유교나 무교나 전통 종교문화에 영향을 받은 일은 없었나요?
조향록 우리 가정의 문화적인 분위기는 유교 분위기에요. 하지만 우리 가정에서 유교를 독실하게 믿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우리 고향이 북청군인데, 북청이라면 함경남북도를 거쳐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이조 중엽에 조광조를 중심으로 유학자들이 유교를 중심으로 이상세계를 구현하려다가 실패했는데, 그때 선비들을 벼슬 하나씩 줘서 북청으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북청이 아주 유교의 메카가 되었어요. 조광조의 사림파의 메카가 되었습니다. 이성계의 무단 세력과 선비 세력이 갈등을 일으키다가 조광조 때에 와서 철저한 도덕 국가를 형성하려고 시작했던 큰 운동이 일어났는데 민족사에서 중요한 운동입니다.
조광조 일파가 파멸하고 당쟁이 일어나니까, 똑똑하고 반항 기질이 있는 사람들은 전부 함경도로 보냈는데, 북청으로 보냈어요. 북청은 여진족들이 살고 있는 곳인데, 마을에 도청과 서당이 있고, 가난한 마을에서도 따로 집을 못 지으면 어느 집 사랑방이라도 정해서 이것은 서당이다, 이것은 도청이다 정해서 모였어요. 형편이 괜찮으면 훈장을 둬서 교육을 시켜요. 훈장이 먹을 양식을 집집이 모아서 거둬들였지요. 이렇게 제도적으로 확립되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제 말기에 한국에서 일본에 유학생을 많이 보냈던 곳이 바로 북청이에요. 한마을에 집이 200호 사는데 일본으로 보낸 유학생이 230명이 되었으니, 대단했어요. 유교 풍토가 발달했던 것이지요. 부모들도 알건 모르건 집에서 쓰는 용어들은 제사를 지낸다든가, 유교 때 나온 말이 보통 쓰는 말입니다. 저희 가정도 그랬습니다. 북청만은 철저히 유교 풍토가 지배했습니다. 이웃 군에는 큰 절이 있지만 북청군에는 큰 절이 없었습니다. 민족사적으로 이조 500년의 유교 선비정신과 도덕과 이상을 꿈꿨던, 어느 나라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자랑스러운 전통인데, 이조 말엽에는 그것조차도 거의 명맥이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빨리 들어올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 가정은 내가 3살에 고향을 떠나서 삼수갑산이라는 함남 풍산군 산골에서 자라면서 예수도 거기서 믿었어요. 그곳은 해발 1000m 이상 되는 고산지대라서 벼농사 하는 데는 몇 군데 없었습니다.
박재순 목사님은 간도 은진중학교에서 공부하셨던가요?
조향록 아니요. 중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았어요. 초등학교 마친 다음에는 제가 18살 때부터 함흥에 성경학원이라는 것이 생겼어요. 1년에 1달씩 공부하는 평신도 지도자 교육과정입니다. 그런데 평신도 지도자들이지만, 그래도 열심 있고 공부도 잘하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 후에 목사 된 분들도 여럿 있습니다. 각 교회와 캐나다 선교부가 지원해서 제가 21살까지 공부했습니다.
가정이 자립할 만하니까, 아버지가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해서, 북청군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지 모르겠어요. 고향에는 교회가 없어서 큰 교회가 있는 신창읍으로 이사를 갔어요. 농토는 촌에 있어도 거기 다니면서 농사는 지을 수 있으니까요.
그 교회에 수산업을 하는 집사님이 계셨는데, 송창근 목사님을 아버지처럼 모시던 분입니다. 이분이 수산업을 해서 일본도 왔다 갔다 하며 돈도 많이 벌었어요. 이분이 친구들을 모아서 지역은 다르지만 송 목사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때 송 목사님은 김천 황금동에서 목회하던 시기인데) 늘 김천에 들리고, 일 년에 한 번씩 조용한 해변에서 경찰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송 목사님 모시고 와서 한 4-5명 훈련하였습니다. 여자분들도 있었는데, 그 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공덕귀 여사라고 해요. 이명하 씨와 이병욱 씨(목사됐지만) 그때 만주 목단강에서 백화점 했던 사람인데, 그 두 분이 송 목사님을 재정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송 박사님이 김재준 목사님께 연락해서 나는 서울 신학교로 공부하러 갔지요. 1940년에 한신이 정식으로 학원인가를 얻어 처음 시작할 때죠. 돈 걱정은 안 했지요. 죽으면 죽지 이 일에서 살길이 있겠지 믿고 지냈어요. 고향 선배한테 이 이야기를 하니까 편지가 하나 왔어요. 일제시대 때 「동아일보」에서 동화, 동시 부문에서 2등 당선했던 사람이에요. 인물도 잘 생겼는데, 나보고 동생 동생해요. 자기는 공부하려고 했는데 맏아들이니까, 아버지 어머니 모셔야 하니까, 장가도 일찍 가서 아이들도 있어서 공부를 못하게 됐으니까 내 대신 동생이 공부하되 3년 동안 학비는 대겠다고 하면서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죠. 그 가족도 모르고, 부인도 모르고. 그렇게 해서 공부를 했어요.
박재순 캐나다 선교사들하고 초기에 접촉하시거나 그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으신지요?
조향록 저는 캐나다 선교사들과 아무런 접촉도 없었습니다. 일제 시대에는 기회도 없었고, 접촉할 마음도 없었어요. 캐나다 선교부의 선교지역은 북한의 관북지역, 만주, 일본이었습니다.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은 관북지방과 긴밀한 관계가 있지요.
그런데 선교 초기에 그곳에 복음의 씨를 심은 사람은 선교사가 아니고, 이동휘 선생입니다. 이동휘의 영향이 퍼졌어요. 이동휘는 독립운동가로서, 고려공산당 당수도 지냈지만 기독교 정신을 간직한 분으로 압니다. 그가 레닌을 만난 다음에 러시아 공산당 기관지나 신문기자들이 묻자, 레닌이 “그 사람(이동휘)은 공산당의 공 자도 모르지만, 원동에서 온 정치지도자들 중에서 최고의 지도자다.”라고 했답니다. 스탈린주의에 동조하는 한국계 사람들이 만든 독립운동단체가 이르쿠츠크파입니다. 그들이 이동휘 선생파를 모함해서 이동휘 선생이 9개월 동안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레닌이 죽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동휘를 연구한 어떤 학자는 그분을 초기에 한국 공산당을 만든 사람이라고 했지만, 1917년 이후 1923-24년 무렵에 대한민국 주변에 있던 나라들 가운데 약소국가를 돕겠다고 깃발이라도 들고 나왔던 나라들이 소련 말고 있었느냐고 묻고 싶어요. 당시의 열강들은 다 제국주의로 흘러서 아시아의 땅을 자기들이 나눠 먹으려고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독립운동하면 나라도 이동휘처럼 했을 겁니다. 소련이 기독교 국가로서 천년을 지켜온 나라가 아니냐? 함경도에서 우리 할머니가 옛날에 공산당하고 논쟁할 때 너 이놈들 너만 공산당이냐? 기독교도 공산당 더 잘한다고 그러셨어요.
박재순 이동휘 선생이 끝까지 기독교 신앙을 간직했을까요?
조향록 그러니까 간도에 가서도 독립운동 할 때 송 박사님이 끝까지 따라가겠다니까 “넌 목사 되어야 한다.”면서 소년 송창근을 돌려보내고 자신은 소련으로 들어갔는데, 신앙의 뿌리가 없으면 그런 말을 하겠어요?
박재순 이동휘 선생 이야기는 오늘의 기장을 이해하는 데도 그렇고, 기장의 뿌리와 선교적인 비전을 이해하는 데 새겨들어야 할 말씀으로 귀하게 생각합니다. 한국 역사에서 선교사들이 어떤 구실을 했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조향록 미국 선교사들은 자기 본국의 정치적인 향배에 대해서 거부감을 표시하는 일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3・1운동 때 한국을 도운 건 미국 선교사들이 아닙니다. 거의 캐나다 출신이거나 미국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아일랜드 출신 선교사들이 도왔습니다. 어윈(M. MacDonald Irwin) 목사 유골이 와서 내일 장례를 지냅니다만, 아일랜드 출신이고 어머니는 독일 출신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여기 와서 싸운 겁니다.
미국의 앵글로 색슨 피를 받아가지고 미국 건국의 기초를 쌓은 사람들은 미국 정부의 정책을 충실히 따릅니다. 그러면서 미국 선교사들에게서 독립이니 민족의 자존이니 하는 말은 들을 수 없게 되고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부흥운동으로 전환합니다. 그런 부흥운동으로 몇 해 동안 지냈기 때문에 1938년에 한 사람의 피 흘림도 없이, 장로교 총회가 만장일치로 신사참배를 결정했어요. 3・1운동에서 피 흘리고 싸웠는데, 20년도 채 안 지나서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정치・사회 문제에 불간섭주의로 나가게 되었어요. 예수 믿고 천당 가자는 구호가 나왔어요. 민족의 고민을 안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일이 교회에서 사라졌어요.
그런 속에서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은 달랐습니다. 송창근은 이동휘 선생 밑에서 어려서부터 민족정신의 훈육을 받았고, 또 한국의 민족 지도자 조만식 선생이 계시던 교회를 맡기도 했으니까. 송창근과 함께 그들은 선교사 지배에서 벗어나서 자주 민족의 자립교회를 추구했습니다.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하고는 선교사들이 딱 관계를 끊었어요. 그들은 아주 인색했습니다. 그러고 또 선교사 밑에서 지도받은 이들이 교계의 교권을 가지고 정치적인 야망을 대리 충족시킨단 말이요. 그렇게 야합이 되었어요.
박재순 그때 민족문제와 사회에 관심이 많았던 젊은 지성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사회주의 계열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었겠네요.
조향록 그래요. 그런 사람들, 교회에 머문 이들은 선교사 굴레에서 벗어나 농촌운동을 한다든지 그러다가 잡혀 들어가기도 했지요. 그러나 소수에요. 그중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분이 송창근 목사입니다.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으니까 송창근 박사가 곧장 시작한 것이 신학교 설립이었어요. 그런데 수양동우회 사건에 걸려 들어가서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수양동우회는 이광수가 회장인데, 복심 법원에서 마지막 재판하는 날, 내가 하루 종일 참관했어요. 송 박사님이 재판을 받고 있으니까. 이광수 씨가 최후변론을 일본말로 2시간 했어요. 내가 그 말 안 들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송 박사님은 더 움직일 수 없이 되고 교회 일도 못 보게 했어요. 그러다 나중에 교회라도 보게 하니까 김천 황금동교회 목사로 가서 교회 목회를 열심히 했지. 물론 신학교에는 올 수 없었어요. 그러나 송 박사님이 뒤에서 조정을 했지요. 그러니까 분위기 만들어가는 것은 송 목사님의 영향이 절대적입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착실하지만 일찍이 예수 믿은 분이 아니니까. 서울 와서 있으면서 20살이 넘어서 예수 믿고 그랬으니까. 교회 생활에 젖어보지 못했단 말이에요.
박재순 해방 후에 기독교에 속한 인물들 가운데 중요한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조향록 남북의 거물 지도자 가운데 다수의 인물들이 교회 출신들이에요. 해방 후에 나는 동지 두세 사람이라도 얻어서 일생을 고향에서 살면서 한국에 낙원을 만든다는 꿈을 가지고 글도 쓰고 그랬어요. 그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내가 맹세를 하기도 했어요. 북청 선배로서 김교신 장로라는 분이 있었어요. 서울에서 경신학교 교사, 보성학교 교사, 경기고등학교 교사를 한 분인데 신당을 창설할 때 창설멤버고 간사였습니다. 8・15 해방 직후에 북청 위원장이 됐고, 그 위에 함경남도 도위원회 총무국장 되고 했어요.
박재순 크리스천이면서도 도위원장까지 된 것은 맑시스트여서 그런 건 아니었나요?
조향록 그렇지는 않고, 신간회는 좌우 합작을 해서 만든 기관이었으니까. 허헌 씨도 그런 사람이지요. 최문식 목사는 평양신학교 출신이고 조선인민당 대구지부 위원장이었는데, 서울에 와서 우리 집에 있다가 잡혀갔어요.
최 목사는 강원용 목사 선생으로 간도 은진학교 김재준 목사님 후임으로 가르쳤어요. 최 목사님은 거의 한 달을 신사동교회 사택 우리 집에서 같이 지냈어요. 같이 식사하고 지내며 별 이야기를 다했어요. “선생님이 혁명운동 하느라고 예수를 다 내버리시진 않았소” 했더니, “이 집에 한 달 있으면서 내가 영 마음이 달라진다”고 그래. 6・25사변 나고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숨어 지냈는데, 벽보에 최문식 선생 찾는 벽보가 많이 붙었어요. 다음에 같이 만나서 내가 돼지, 개 한 마리 사서 고아가지고 가서 대접하며, 같이 앉아서 이야기도 많이 했습니다.
대구폭동 사건에 이분이 직접 책임은 없어요. 그 책임은 부위원장이 지고 사형을 당했어요. 그리고 이분이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자타가 다 공인하는 인물입니다. 인물도 잘생겼고, 사람도 신사고. 그리고 그때 NCC 총무인 남궁혁 박사가 제일 사랑하는 제자가 이분이었어요. 최 목사가 은진중학교 제자인 강 박사에게 어디 조용히 쉴 수 있는 데가 없느냐 해서 강 박사가 나한테 부탁을 한 거지. 나는 그분을 직접 모르는데, 강 박사가 모실 수 있는 사람이면 내가 모셔야 되지. 우린 형제 같은 의리를 평생 지키자고 했으니까. 그래서 우리 집 뒷방에 와서 주일예배, 삼일예배를 함께 보면서 우리 집에서 밥 자시고 한 달 같이 있었어요.
최문식 목사는 2년 몇 개월인지 형을 받고 마포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그때 마포교도소 군, 형목실장 주채원 목사가 그이하고 평양신학교 동기동창이에요. 그래서 거기서 목사님하고 식사도 같이 하고 편안히 지냈어요.
박재순 목사님이 보시기에 최문식 목사는 교조적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거군요?
조향록 사회주의자는 맞는데. 이걸 알아야 해요. 해방 이전까지 국내에서 독립운동의 총수는 여운형입니다. 국민들도 여운형을 다 알았어요. 이 사람이 일제 말기에 라디오를 통해 바깥 소식을 듣고 일본이 거의 망한다고 생각하고 만든 것이 건국연맹입니다. 건국연맹의 농촌운동 책임자가 김용기 장로고, 나하고 조선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박학수는 관청을 접수한 거에요. 2-3년 사이에 비밀 조직을 하고 나가다가 큰일도 못하고 잡혔으나, 해방된 때에는 총독부가 여운형 씨 불러서 정권을 맡으라고 그러니까 자기 혼자 무엇 때문에 맡겠느냐고 거절했습니다.
박재순 강원용 박사님도 여운형 밑에서 무슨 일을 하셨나요?
조향록 김규식 박사와 일했지요. 김규식 박사가 상해 임정 때 민족혁명당 당수가 되었는데 그이도 새문안교회 장로 출신이지만 사회주의적인 영향도 받았지요. 중국 공산당이나 한국 공산당이나 같은 시기에 조직되었어요. 중국 공산당은 1923년에 조직되었어요.
이동휘 선생이 고려 공산당을 조직했지만, 그건 공산당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여운형 선생은 사회주의 계열이라고 생각됩니다. 여운형 선생의 영향이 크니까 해방되자마자 건국동맹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여운형 선생이 위원장이 되어서 좌익우익 다 합해서 했는데, 그때에 벌써 박헌영은 다른 길을 준비했고, 그 밑에 이강국이 있고 또 우익은 송진우가 있었는데 상당히 신중한 사람이에요. 송진우는 상해 임시정부 들어오는 거 보고 거기에 발을 맞추자 우리가 따로 하면 또 갈라지지 않느냐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인식을 가졌는데, 이걸 막은 게 미군, 하지 장군, 미국 정책이거든. 여운형 선생을 바라보고 나온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이지, 공산주의자들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공산주의자들은 200-300명도 안 된다고 봅니다.
이에 비해서 한국 기독교는 조직과 세력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아무 힘도 없이 맥없이 지내고 말았어요. 미군이 들어오고, 이승만이 들어와서 더 그렇게 만들었지. 저는 이승만을 많이 미워해요. 강 박사도 그렇고 우리들은 김규식 박사를 제일 존중해서 그이를 중심으로 해서 중간 계통의 여운형과 좌우합작 위원회를 만들고 강 박사를 거기 비서진에다가 넣었어요. 이북하고 이남, 공산 계열하고 비공산 계열 가운데 지도적 인물들의 상당한 부분이 교회에서 자라고 교회에서 교인으로서 행세하던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졌어요. 당시는 이쪽보다 저쪽이 더 많았어. 조병옥 박사도 연전 교수하던 분인데 난 일제시대엔 참 존경했습니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일제시대 말기와 해방 후에 순기능, 역기능 다 합해서 민족사에 큰 충격을 줬어요. 그리고 그 충격은 3・1운동에서 시작이 됐다고 봅니다. 기독교 박해사가 있었고 불교, 유교로 다져진 종교 국가인데. 서양 종교인 기독교가 들어와서 2-30년도 안 되어서, 그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어요. 기독교가 한국 민족사의 중추적인 자리에 들어가서 그 운명을 짊어지고 삽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는 이 민족의 운명에 대해 무관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신사를 훑어보면 세계가 공백입니다. 휴머니즘이 죽지 않았습니까? 르네상스를 통해서 얻은 가장 큰 깃발이 휴머니즘의 깃발인데, 20세기 와서 다 멸종했어요. 나는 휴머니즘이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시스티나 천장에 그림을 그릴 때 하나님을 사람으로 그리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봐요. 사람을 높인 건 고맙지만 하나님은 사람으로 떨어져서 없어진 거예요. 하나님이 죽으면 사람도 죽는 거고, 휴머니즘도 같이 죽는 겁니다. 마지막에 그걸 공산당하고 세속주의가 휩쓸었어요. 지금 정신사에 뭐가 남았어요? 지금 정신사에 철학이 있나요? 정신사 공백기가 아니오. 과학? 철학이요? 우주 물리학이나 이런 데서 상당한 시사를 많이 받습니다마는, 그것은 과학일 뿐이지요. 대량 생산에 대량 소비, 먹고 놀자, 섹스(sex)…. 어디 여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 없어요. 인간을 안고 씨름하는 일이 없어요. 자기를 안고 씨름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정신이 살아납니까?

 
 
 

2019년 11월호(통권 7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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