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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19년 6월호)

 

  「복음과 세계」 福音と世界 편집 동향
  : 2019년 2–4월호

본문

 

2019년 2월호-생체권력과 기독교
2월호 특집 주제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근대사회를 분석하기 위해서 이용한 ‘생체권력’ 개념을 둘러싼 최신 연구성과를 소개하기 위해 설정되었다. 이 주제의 근저에는 “생체권력에 대하여 기독교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있다.
텐리대학(天理大學)에서 가르치는 하코다 테츠(箱田徹)의 논고 “미셀 푸코와 기독교: ‘구원’을 둘러싼 싸움”에서는 우선 규율권력 및 생체권력의 기원이 기독교에 있다고 한 푸코의 주장이 소개된다. 푸코에 의하면,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피감시자를 순종하는 주체로 만드는 것이 규율권력인데, 그것은 위로부터 감시와 감독을 받으며 수양할 것이 요구된 중세 기독교의 수도원에서 기인한 것이다. 한편 생체권력은 기독교의 ‘사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 성직자의 역할은 ‘영혼을 인도’(통치)하는 것인데, 그것은 모든 신도의 안전을 확보함과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을 파악하여 모두를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하는 일이다.
이러한 사목권력은 17세기 이후 유럽이 주권국가 체제로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정치권력의 특징이 되었으며, 그 목적은 국력의 증대였다. 국가는 규율권력으로 개개인을 파악해 심신이 모두 ‘건전한’ 개인이 되도록 훈육하는 한편, 사람들이 집단으로서의 ‘건전성’도 유지할 수 있도록 조정했다. 여기서 ‘규율’과 ‘조정’으로서 작용하는 것이 생체권력이다. 푸코에 의하면, 사람은 이러한 통치(인도) 밖으로 나갈 수는 없으나, 지금 것과는 다른 통치를 끊임없이 추구한다. 생체권력이 뻗치는 ‘구원’의 손을 잡을 것이냐 아니냐의 판단은 받는 측에 의존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푸코의 질문에 대하여 하코다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논고를 끝낸다. 우리는 눈앞에 제시된 구원과는 “‘다른’ 인도, 혹은 ‘구원’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츠쿠바대학(筑波大学)의 준교수 시미즈 도모코(淸水知子)의 논고 “Face Value 시대의 삶과 윤리”는 21세기 디지털미디어 사회에 대해서 논한다. 시미즈에 따르면, 현재 디지털미디어 사회에서 사람은 분할 불가능한 개인이 아니고 분할 가능한 개체(分人, dividuels)로서 관리되고 있으며, 여기에서 ‘나’는 신체에 의거한 나와는 다른, 인터넷의 접근 이력 등 전자 데이터를 통해서 구축된 디지털 공간에서 ‘디지털의 삶을 사는 나’이다. 이렇게 관리되면서 인적 자본으로서 능동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참여할 것을 촉구받는 우리들에게는 거기에 함몰되어 버리는 미래밖에 없느냐고 시미즈는 묻는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시미즈는 “인간, 상품, 정보, 환경과의 관계성을 새로 만들어가는 윤리적 감성”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며, 그 시도로서 그녀가 예로 든 것은 포렌식 아키텍처(Forensic Architecture, FA)이다. 런던대학교를 거점으로 삼는 연구기관인 FA는 국가에 의한 범죄나 폭력에 대한 과학수사를 실시하고 있다. 그 방법은 어떤 사건에 관해서 일반 시민들이 투고한 사진·동영상이나 뉴스 영상 등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 및 해석하여 사건의 순간을 3차원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당시에 발생한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리츠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 교수인 미마 다츠야(美馬達哉)는 “스트레스 체크와 생체권력”이라는 논고에서 2015년부터 노동자 50인 이상의 사업장에 정부가 의무화한 ‘스트레스 체크’를 통해 푸코가 말하는 생체권력의 현재에 대해서 고찰한다. ‘스트레스 체크’가 스트레스를 줄임으로써 각 노동자의 자유나 자발성 등을 꽃피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미마는 ‘스트레스 체크’의 독자성이 있다고 보고,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복지국가라는 형태로 전개되어온, 즉 생체권력이 가지는 집단적 측면에 대한 환멸인 동시에 생체권력 아래 이루어지는 주체의 개인주의화라고 논한다.
자유기고가인 오오하시 유카코(大橋由香子)의 논고 “생식에 대한 권력의 개입: 우생보호법의 강제 불임수술을 둘러싸고”에서 고찰하는 문제는 인구정책의 발상, 곧 생체권력에 의한 집단 ‘조정’의 한 측면이다. 일본에서는 1948년에 제정된 우생보호법에 근거하여 ‘불량한 자손’을 낳을 것으로 규정된 사람들(장애인이나 생활빈곤자 등)에게 본인의 동의 없는 강제 불임수술이 자행되었다.(현재는 시행되지 않는다) 오오하시는 우생보호법의 근저에 인구정책이 있었으며, 그것은 1907년에 형법으로 제정되어 현재에도 존속하는 낙태죄와 한 세트가 된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늘려야 할 인구에 대하여는 낙태죄에 의해 중절을 금하고, 줄여야 할 인구에 대하여는 피임수술을 강요하는, 우생사상을 기초로 한 인구정책이 있었으며, 이러한 발상에 대해서는 반대를 표할 필요가 있다고 논하였다.
센슈대학(專修大學)에서 가르치는 고토 요시히코(後藤吉彦)는 논고 “패션과 ‘힘내라 힘내라 나!’의 미학: 생체권력과 저항에 대하여”에서 패션 및 치장과 관련되는 권력에 대하여 논한다. 고토에 의하면, 우리들은 ‘치장’을 통해 권력과 접촉한다. 즉 우리는 패션을 통해 패션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규범을 신체화·내면화하고, 이로써 그 규범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게 된다. 고토는 그 규범에서 빠져나가는 길이 없느냐 묻는다. 여기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푸코가 말한 ‘생존의 미학’이다. 푸코는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 자기의 됨됨을 ‘생존의 미학’으로 제시했는데, 그 ‘생존의 미학’은 사회의 규범이 아닌 스스로가 만든 윤리(자기에 대한 관계)를 통해서 삶을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고토는 그러한 ‘생존의 미학’에 근거한 자기 형성의 가능성을 젊은 층에 퍼져 있는 ‘분장’(扮裝, 로리타 패션 등)에서 발견한다. 여기서 젊은이들은 규범을 따라 온 자기를 ‘일단 떼고’(절단), 이와는 다른 ‘보다 더 나 같은 나’를 유사적·실질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분장을 벗은 후에는 다시 이전의 ‘나’와 ‘접합’하지만, 이러한 ‘자기의 절단과 접합’이 ‘자기에 대한 관계’로 향하는 문을 열고 인생을 예술작품과 같이 만드는 것, 즉 자기 형성의 실천이라고 보는 것이다.

2019년 3월호–‘핵 시대’는 지금
2019년 3월은 동일본 대지진 및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가 발생한 지 8년이 되는 날이다. 지진 당일 발령된 ‘원자력긴급사태선언’이 아직 해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원전사고를 둘러싼 상황을 ‘제어’하고 있다며 원전을 재가동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이렇게 핵을 고집하는 원인으로는 경제적 이익 외에도 핵무장을 하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된다. 3월호 특집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핵 시대’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본평화학회 이사인 다카하시 히로코(高橋博子)는 “‘글로벌 히바쿠샤’라는 관점”이라는 제목의 논고를 실었다. 여기에서 ‘글로벌 히바쿠샤’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포함하여 세계 도처의 ‘히바쿠샤’(핵 피해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카하시에 의하면, 냉전 이래 핵군비 확장경쟁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많은 핵 피해자가 생겨났지만, 국가의 안전보장 등을 이유로 그 피해가 가시화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가시화의 관점에서 다카하시는 2017년 유엔에서 제정된 핵무기금지조약이 글로벌 히바쿠샤의 고통과 피해를 중시하고 있는 한편, 원전에 대하여는 긍정함으로써 핵무기 피해자와 원전 피해자 간의 단절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명한다.
아이즈(會律)방사능정보센터 대표인 가타오카 테루미(片岡輝美)는 “이 나라의 원자력긴급사태선언은 아직 발령 중입니다.”라는 제목의 논고에서 원전을 둘러싼 후쿠시마의 현 상황에 대해 보고한다. 현재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는 약 6,000명의 작업자가 일하고 있다. 폐로 작업에 100년 이상 걸린다는 말은 다음 세대의 사람들도 동원된다는 뜻인데, 가타오카는 우리들이 폐로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명과 권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동시에 핵과는 공존할 수 없음을 호소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에 의하면, 아직 수습되지 않은 후쿠시마 원전 핵 사고 피해를 은폐하려는 움직임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학교나 공원 등에 설치된 방사능 측정기의 철거, 강제 피난구역 해제, 피난자 지원 중단, 귀환 재촉 등) 이러한 현상을 바탕으로 가타오카는 미가 6장 8절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끝마친다. “부활한 주 예수가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한 사람의 목숨이 존중되는 삶이지, 생명을 위협하는 핵을 선택하는 삶이 아니다. 주님이 요구하는 삶은 이미 알려져 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교수인 와다 요시히코(和田喜彦)의 논고 “시마네(島根) 원자력 발전소를 둘러싼 과제들”이 고찰 대상으로 삼는 주고쿠(中國) 전력의 시마네원전은 일본에서 유일하게 현청(縣廳) 소재지에 존재하는 원전이다. 원전에서 시마네현 중심지인 현청까지의 거리는 9km이며, 원전 반경 30km 이내에 46만 명이 생활한다. 와다에 의하면, 방재 대책이 충실해야 할 지역의 범위를 나타내는 ‘긴급방호조치계획범위’가 미국은 약 16km인 것에 반해 일본은 8-10km로 되어 있는데, 일본에서는 시마네원전의 존재를 고려해서 범위를 좁혀 설정했다는 지적이 있다고 한다. 와다는 주고쿠 전력의 안전 경시(정기점검 누락 등) 및 지역 간의 차별적 구조(원전의 위험은 지방이 떠안고, 전력 공급의 시혜는 대도시의 주민이나 기업이 얻는 구조)를 비판하면서, 일본의 에너지 문제를 둘러싼 논의는 안전성이나 경제성 등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차별적 구조의 해소나 차세대에 대한 책임이라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일본성공회 성직후보생인 아이하라 타로(相原太郞)는 논고 “성공회가 기증한 릿쿄의 원자로”에서 미국성공회가 릿쿄대학에 원자로를 기증하게 된 경위 등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원자로를 릿쿄대학에 기증하게 된 출발점은 1955년 5월에 개최된 미국성공회 워싱턴교구회의에서 극동의 대학이나 병원에 연구용 원자로를 기증하자는 안이 제기된 것이었다. 이러한 제안을 접한 릿쿄대학은 적극적으로 유치 활동을 펼쳤고, 미국성공회 총회는 원자로를 릿쿄대학에 기증하기로 결정하였다. 원자로는 1961년부터 가동하기 시작했지만, 재정 압박 등으로 인해 2001년에 가동을 정지하였고 2012년부터 원자로 폐쇄 공사가 시작되었다. 아이하라에 의하면, 자신이 1995년 최초로 문제를 제기하면서부터 일본성공회 안에서 릿쿄의 원자로가 문제시되었으며, 그 후 2012년부터 원자로 유치 과정에서 일본성공회가 행한 역할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었음을 널리 알리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2019년 4월호–인류학과 기독교
인류학은 기독교의 세계선교 및 식민지배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생긴 학문이다. 초기 인류학은 ‘문명’을 대표하는 기독교적 세계와 ‘미개’한 비서구 세계라는 서구 중심적 도식을 통해 타자를 관찰·기술했다. 그러나 인류학은 그 발전 과정 속에서 자기비판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상대화시키고 변혁을 이루어왔다. 4월호 특집은 이러한 인류학의 성과들을 소개하였으며, 여기에는 인류학으로부터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배우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비기독교인인 사토 타케히로(佐藤壯廣)는 “필드 워커로서의 예수: 예언자적 정신의 현재”에서 예수의 행위를 인류학자의 필드 워크라는 관점에서 살피면서, 예수를 초인류적 필드 워커로 보았다. 릿쿄대학의 종교인류학자인 사토에 의하면, 훌륭한 필드 워크에 근거하는 인류학의 보고서에는 관점이나 가치관의 전환을 촉진시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예수의 가르침도 그러했다고 말한다. 갈릴리 땅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예수는 이를 통해서 당시의 권력과 사회적 약자의 빈곤·역경을 관찰하였고, 사회구조를 분석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에 새로운 가치를 제시했다고 한다.
도쿄의 여러 대학에서 가르치는 마에타케니시 카즈마(前嵩西一馬)는 그의 논고 “공동체의 두렁에서 잠시 멈추어 서다: 자기문화 연구의 몸짓으로서”에서 자기문화 연구의 몸짓에 대해 논하는데, 그는 그것을 ‘약한 연구’, ‘약한 교육’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에타케니시는 이에 대해 몇 가지 이미지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지도 밖이 아니라 안쪽에 자기 자신을 두면서 지도의 작은 부분을 계속해서 수정하는 작업이며, 자신 속에 “여러 소리로 울리는 다른 의견을 경청하는 행위”이다. 또한 “시스템=세계=환경=세상=국가 등의 큰 틀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과 자신의 관계성 속에 일종의 독자적인 운동을 가져오는 지혜나 말을” 찾고, 그 속에서 “자기의 존재 방식 자체를 바꾸어 나가는 작은 운동”이다. 오키나와 출신의 마에타케니시는 오키나와의 표면에 드러난 문제를 통해 자기문화 연구의 몸짓에 대한 이미지를 한 번 더 제시한다. 그는 오키나와에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비정치적인 오키나와의 이야기로서 밝고 가벼운 이미지이며, 다른 하나는 미군기지문제 등의 무거운 이미지이다. 마에타케니시는 “그 어느 쪽도 아닌 오키나와를 그려낼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중성을 우선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이런 불안정한 틈에서 엿보이는 ‘현실’을 헤집어 꺼내는 지성을 발견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진정한 것으로 만드는 표상의 장치를 해독하면서, 혹은 그것 자체를 시도하면서, 조금 다른 보편을 목표로 삼는 루트를 모색하는 것이 자기문화 연구의 몸짓이라고 논한다.
나고야공업대학(名古屋工業大學) 교수인 가와하시 노리코(川橋範子)의 논고 “‘페미니스트’로서 인류학을 하는 것”에서는 페미니즘 인류학의 중요성과 과제를 논한다. 가와하시에 의하면, 페미니즘에 입각한 젠더의 관점은 타자를 착취·지배하지 않는 관계의 구축을 위해 빠뜨릴 수 없는 것이며, 페미니즘 인류학의 목표는 남성 지배형 인식의 틀을 쇄신하는 것에 있다. 예를 들면, 페미니즘 신학자들이 성서의 정경화 과정에서 남성에 의해 자행된 여성의 주변화 시도를 비판하듯이, 인류학에서도 남성 연구자들이 자신이 연구 대상으로 삼는 사회에 존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 및 현실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왔다고 비판한다. 가와하시는 페미니즘 인류학자는 자신이 선 위치를 인식하면서, 연구 대상으로 삼는 사회에 존재하는 여성의 역경을 개선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한편, 자기 문화의 가치들을 타 문화에 강요하는 자기 문화 중심주의적 태도를 회피해야 하고, 또한 타 문화를 향하는 비판의 눈을 자기 문화 속에 있는 폭력으로도 향하도록 해야 한다고 논한다. 나아가 가와하시는 사회적 강자인 페미니즘 인류학자가 연구 대상의 사회에 있는 여성들에게 안이하게 자기 동일화하는 것을 주의시킨다. 그것은 인종·민족·계급·성적 지향 등이 만들어내는 차이를 무시한 ‘보편적인 여성’을 상정하는 것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많은 여성들에게 억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한다, 산다: 『숲은 생각한다』와 인류학의 장래”에서 릿쿄대학 교수인 오쿠노 가츠미(奧野克巳)는 콘(Eduardo Kohn)의 저작 『숲은 생각한다』를 통해 21세기 인류학에 대해서 전망한다. 오쿠노에 의하면, 콘에게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기호 과정’이다. 기호 과정이란 어떤 것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 경우 ‘누구’란 반드시 인간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호 과정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자는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이며, 그 과정 속에서 이는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를 사고하는 ‘자기’라고 부른다. 콘은 숲 등에서 전개되는 생명 현상을 모두 ‘자기 생태학’이라고 부르는데, 이 생태학에서는 정신 혹은 자기가 기호 과정으로부터 생긴다고 본다. 오쿠노가 지적하기를, 콘은 인간만이 사고나 정신을 소유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함으로써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넘은, 세계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기했다. 또한 20세기의 인류학은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콘의 『숲은 생각한다』는 그러한 인류학의 껍데기를 부수고 21세기에 인간을 포함하면서도 인간을 뛰어넘는 보다 큰 틀을 가진 인류학을 제시한다고 평가한다.
마지막 글인 “코르코바도”는 시인이자 메이지대학(明治大學) 교수인 수가 케이지로(管啓次郞)가 쓴 시(詩)이다. ‘코르코바도’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그리스도상이 서 있는 산이며, 시 자체도 라틴 아메리카를 그 주된 무대로 삼고 있다. 이 시는 인간의 ‘탐욕’을 비판하면서, 마지막은 병자의 신(神)이며 떠돌이 개들의 보호자인 성 나사로(쿠바의 민간신앙인 산테리아의 신명에서는 바바루아에)와의 다음과 같은 대화로 마무리된다. “그 뒤를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 온 성 나사로=바바루아에가 / 어두운 눈으로 나를 가만히 보고 있다. / “걱정하지 말라”고 그가 무언의 말을 건네준다. / “나의 일은 한없네, 병이 있고 상처가 있는
한. / 잔학한 일, 도리에 어긋난 짓을 당했다 / 모든 자들을 위해서 / 나는 그저 걷는다. / 나의 이름은 나사로, 바바루아에, 모든 약자. / 거기서 부들부들 떨고 있을 것이면 / 너도 같이 걷지 않겠는가?”

이상훈 | 재일 코리안 3세이다. 연세대학교에서 선교학을 공부했다. 박사학위 논문은 “기독교 선교를 위한 디아스포라의 비판적 아이덴티티 형성”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전문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2019년 7월호(통권 7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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