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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교회와 현장] 자료 소개
교회와현장 (2019년 4월호)

 

  국제적 관점에서 본 3·1운동
  

본문

 

* 이 글은 “3·1운동의 의미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반도 미래 구상”이라는 주제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 국제 컨퍼런스(2019. 2. 25-27, 롯데호텔서울)에서 발표된 것이다. 이 컨퍼런스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여의도순복음교회 국제신학연구원, 평통연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YMCA연합회가 공동주최하고, 서울특별시가 후원하였다. - 편집자 주

1919년 한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처음부터 국제적 관계 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은 전 세계의 정치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변화시켰습니다.

1. 미합중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1918년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였다.
2. 1917년부터 1919년까지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진행되었다.
3. 1919년 1월, 세계 전후 질서를 확정한 ‘베르사유 평화 조약’이 시작되었다.
4. 이 베르사유 조약은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대 독일 전쟁에서 연합군의 편에 섰던 일본에 특권을 부여하였다.

3·1운동은 만주와 도쿄에 거주하는 재외 한국인들이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식민화된 한국의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활동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3월 1일 서울에서 대규모 집회에 뒤따라 발생한 전국적인 봉기였습니다. ‘만세’는 민중의 외침이었습니다. 이 민중봉기는 같은 해 베이징의 ‘5·4운동’을 일으키는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3·1운동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서 실패한 운동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일제 침략 정부는 폭력적으로 대응했고 그 결과 7,500명의 사망자와 4만 5,000명의 구속자를 남겼으며, 많은 집과 교회들이 불탔습니다. 일제 침략 정부는 처음 10년간 강력한 군사적 점령을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3·1운동 진압 이후에는 한국 민중들에 대한 문화통치 정책이 뒤따랐습니다. 모든 관공서와 학교, 대학에서의 공식 언어는 일본어였으며, 창씨개명도 시행되었습니다.
그렇다면 3·1운동은 정말 의미가 없을까요? 아닙니다. 제국주의 침략 세력에 대항하여 별다른 성과 없이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 저항운동들은 의미가 없지 않습니다. 제가 동유럽의 전후 시대에 소비에트 제국주의에 대항한 저항운동들에서 증명하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1. 1919년 3월 1일, 한국 민중들은 하나의 목소리로 외쳤다.
2. 그들은 자신의 자긍심을 증명하였으며, 자유와 연대를 위해 희생했다.
3. 실패와 고난은 한 민족의 문화적 기억에 승리보다 더 깊이 각인된다.
4. 1919년 3월 1일은 한국 민족 공동의 미래를 위한 하나의 정치적 약속이다.

Ⅰ. 동유럽 국가들은 동독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비에트연방의 지배를 받았으며,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 정부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당독재에 대항하여 민중들은 저항했습니다. 모든 저항은 희망이 없었고 실패했으나,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고, 모든 것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a. 1953년 6월 동독 정부는 노동 기준을 증가시켰다. 이것은 동베를린 스탈린거리의 건설노동자들을 분노케 했다. 그들은 저항하면서 시 중심의 알렉산더 광장으로 이동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담했고 일당독제에 대항했다. 민중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당 간부들은 청사 안에 몸을 숨겼고 소련군에 도움을 요청했다. 다음 날, 러시아(이하 소련) 전차가 동독 민중봉기를 진압했다.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수많은 구속자가 뒤를 이었다. 서독에서 1953년 6월 17일은 ‘독일 통일을 위한 추모일’이 되었다. 이러한 민중봉기는 계획되지 않았고 조직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건설노동자들의 분노로부터 촉발되었으며, 당과 민중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보여주었다. 공산주의자 시인 브레히트(Bert Brecht)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민중이 정부를 더이상 원하지 않게 된다면, 정부는 민중을 해체시키고 또 다른 민중/민족을 찾게 될 것이다.”

b. 1956년 10월 23일의 헝가리 봉기는 계획되었으며, 헝가리 군대와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기반으로 시작되었다. 소련의 군대는 헝가리에서 철수하고 임레 너지(Imre Nagy)를 수상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부다페스트는 해방되었고 스탈린 동상은 철거되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협상에 임했지만, 비밀리에 부다페스트 재탈환을 기획하고 있었다. 헝가리 군대를 이끌던 사령관은 곧 총살당했고, 민첸티(Minscenty) 추기경은 미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헝가리 봉기는 소련 침략에 맞서 일어난 국가적 저항이었다. 따라서 거대한 스탈린 동상이 쓰러질 수 있었던 것이다.

c. ‘프라하의 봄’은 결국 소련 전차에 의해 1968년 8월 21일 끝나게 된다. 프라하의 봄은 체코슬로바키아인의 지식과 문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알렉산더 둡첵(Alexander Dubcek)의 영향하에 있던 네오맑시스트들은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로 변모시켰다. 다시 말해, 그들은 ‘현실에서 실존하는 사회주의’를 대중화했던 것이다. 1967년 가톨릭 성바오로수도회는 체코 학술원과 함께 기독교와 맑시즘의 대화를 마리엔바트에서 개최했다. 여기서 메츠(Metz)와 몰트만(Moltmann)은 ‘정치신학자’로서 강연했다. 마치 동구권의 새로운 민주 사회주의가 서방의 사회 민주주의와 함께 새로운 유럽을 위해 연합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은 소련 전차로 인해 산산히 부서졌다. 네오맑시스트들은 박해당했고 사회적 곤궁으로 내몰렸다. 프라하의 봄은 하나의 문화혁명이었다. 그 이후 유럽의 맑시즘은 단지 일당독재를 위한 구실일 뿐이었다.

d. 폴란드의 ‘자유 노조 연대’는 그다인스크의 레닌조선소에서 시작되었으며, 당 어용노조들에 반발한 노동자 봉기였다. 1980년 이 거대한 동맹파업의 물결이 일어난 요인은 정부에 의한 생필품 물가 상승이었다. 이로부터 ‘독립적 자치 노동조합’이 레흐 바웬사(Lech Walesa)를 의장으로 하는 ‘자유 노조 연대’로 발전했다. 폴란드 정부는 소련 전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계엄령을 발표하고 ‘자유 노조 연대’를 금지시켰으며,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하지만 이들은 가톨릭 교회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지원하에 지하에서 계속 활동했다. 결국 1990년 레흐 바웬사는 국가 원수로 선출되었다. 그것은 소위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국가’에 대항한 노동자 봉기였다.

e. 그렇다면 소비에트 연방은 왜 실패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소련 인민들의 자기결정권에 있다! 고르바초프는 국제적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도 개혁을 원했다. 하지만 러시아 민족주의자 옐친이 1993년 모스크바에서 승리했고, 이로 인해 소비에트 연방은 10월혁명이 일어난 지 70년이 지난 시점에 러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이렇게 3개의 큰 국가와 그 밖의 작은 국가들로 분열되었다. 이는 그들 모두 자기결정권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를 향한 인류의 꿈은 1993년에 이르러 죽은 것이 아니라 1936-37년 스탈린의 ‘대숙청’과 강제노동수용소군도를 통해 이미 죽었습니다. 제 생각에 그 꿈은 인류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연대로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만약 인류가 생존하기를 바란다면 말입니다.
서방세계는 1956년 헝가리 봉기에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비단 헝가리인들만 원했던 게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동구권과의 핵전쟁을 의미했던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며, 그 전쟁은 결국 인류 전체의 전멸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저는 제 강연의 두 번째 부분에서 언급하려 합니다.

Ⅱ. 저는 한국의 통일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외부로부터의 현명한 조언들 또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저 독일의 통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서독이 동독에 대한 위협을 그치고 자주적 국가로 인정했을 때, 비로소 통일은 시작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외부로부터의 위기는 내적 통일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독일을 위한 평화협정은 ‘2 플러스 4’, 즉 양측 독일 정부와 제2차 세계대전의 네 승전국이 함께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이 아닌 사실에 근거하여 현실주의적으로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적인 희망들이 미래에 이루어집니다.
이를 통해 저는 이제 ‘국제적 관점’에 다다르고자 합니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패권을 둘러싼 경쟁구도 안에 서 있는 국가들 안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경제는 국가경제였고 자급자족을 지향했습니다. 공동의 위험들에 대해 국가들은 쌍방 간의 계약을 통해 대처했습니다.
1945년 이후, 초국적 기구들인 ‘국제연합’(UN)과 ‘안전보장이사회’가 인류 공동의 정치적 행위 주체로서 등장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류의 위험들은 더 이상 민족국가들에 의해 저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a. 1945년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단지 제2차 세계대전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가 종말로 진입했다는 것을 또한 의미했다. ‘세계 종말’은 인류의 종말이 언제나 가능한 시대를 말한다. 핵전쟁 프로그램은 곧 ‘인류의 자살 프로그램’(사하로프)이다. 하지만 핵무장의 시대는 또한 민족들의 첫 공동 시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희생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생존은 모든 민족이 세계평화질서를 약속하기 위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각 국가들의 개별 관심사는 인류의 생존에 종속되어야만 한다. 국가의 대외정책은 ‘지구적 공공정책’(폰 바이체커)이 되어야만 한다.

b. 2015년 파리 국제기후협약에서 유엔은 처음으로 ‘지구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였고, 2050년까지 기온 상승을 2% 이내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후는 돌변할 것이다. ‘기후 변화’는 육지를 살지 못하는 곳으로 만들고 해수면을 상승시키며 온난화 시대를 초래한다. 우리에게는 인류의 생존을 확고히 하기 위한 국가들 간 ‘공동의 지구 정책’이 필요하다. 패권을 둘러싼 국가들 간의 경쟁은 삶의 공간으로서의 지구를 파괴함으로 그 끝을 경험할 것이다.

c. 인구과잉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회적 불의와 기후 변화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이주하도록 내몰고 있다. 우리에게는 인류의 조직적인 연대와 국제적 사회질서가 필요하다. 벽은 국가들을 돕지 못한다. 미국이든 ‘유럽 요새’가 되었든 간에 말이다.

간단히 말해, 인류가 생존하고자 한다면, 그 미래는 인권-민주주의에 달려 있습니다. 인권-민주주의는 인류국가를 목표로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류국가는 임마누엘 칸트에 의하면 ‘영원한 평화’를 약속합니다.
이를 통해 저는 기독교 신학자로서 교회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1. 만약 우리가 기독교의 신앙고백을 믿는다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 현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비록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둘러싼 논쟁이 보여주듯, 기독교적 국가종교들이 계속해서 나타났고 나타나고 있지만, 하나의 ‘국가종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나치 시대에 우리는 ‘독일 기독교인’과 ‘고백 교회’ 사이의 교회 투쟁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독일의 국가종교에 대항한 투쟁이었습니다. 1945년 개신교 교회는 그 이름을 ‘독일 개신교 교회’(Deutsche Evangelische Kirche: DEK)에서 ‘독일 안의 개신교 교회’(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EDK)로 변경했습니다. 독일은 단지 전 세계적 그리스도의 교회가 현존하는 장소일 뿐, 결코 정체성을 나타내는 명칭 자체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2. 그리스도의 교회는 에큐메니컬을 추구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전 지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결코 특정 민족의 교회가 아닌, 인류 전체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모든 국가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법과 정의를 대리합니다. 예수는 국가 혹은 민족에 소속되지 않은 가난한 민중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 참 인간됨의 가치, 즉 자비와 연대의식, 진실함과 정직함, 신뢰와 희망을 전파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국가와 민족들 사이에서 화해와 평화를 대변합니다.

3.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우주의 화해자로 섬기며, 따라서 단지 이 땅 위의 평화뿐 아니라, 이 땅과의 평화에도 관심을 갖습니다. 창조세계의 생태적 평화는 자연 파괴와 기후 변화의 시대에 교회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리고 전쟁과 빈곤은 가장 나쁜 환경파괴입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2019년 4월호(통권 7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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