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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19년 2월호)

 

  초기 기독교 큐(Q)공동체의 예수살기 운동과 나의 신학역정 (2)
  

본문

 

큐(Q)복음의 형성 과정

1980년 1월 5일 나는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하여 8년 만에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나는 한국신학연구소의 계간지 「신학사상」과 『국제성서주석』을 번역 출간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민중신학의 외연(外延)을 넓혀갔다. 1984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 함부르크대학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역사적 예수의 생애와 말씀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예수의 말씀들을 모아놓은 큐(Q)가 눈길을 끌었다. 나는 큐의 배후에 있는 교회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였다. 큐복음의 예수상(像)에 의거하여, 역사적 실존 인물 예수의 사회적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사회의 어떤 부류와 가까이 지냈는가? 무엇을 생각했고, 이루고자 했던 하나님나라는 무엇이었는가? 나는 “큐(Q)복음 전승집단의 사회적 제(諸) 관계”라는 논문을 함부르크대학에 제출했다.
성서는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 관한 기록이다. 성서에는 구약과 신약이 있다. 구약성서라는 명칭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약성서와 구분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원래는 ‘히브리 성서’(Hebrew Bible)라고 해야 옳다. 히브리 성서는 2,000년에 걸친 이스라엘의 민족사를 ‘하나님의 구원사’(Heilsgeschichte Gottes)라는 큰 틀에서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신약성서는 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바울의 예수신앙(케리그마)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복음서가 전자에 속한다면,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열세 편의 서신은 후자에 속한다.
신약은 2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 다른 문학 장르가 한데 모인 일종의 총서(叢書)인 셈이다. 예수의 생애를 담은 ‘복음서’, 사도들의 행적을 담은 ‘역사서’, 지역 교회에 회람된 ‘목회서신’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서로 다른 성격의 책들이지만 한 목소리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언한다는 점, 지역 교회들의 문학작품이라는 점, 무엇보다도 ‘대중적 그리스어’(koine Greeks)로 쓰여졌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초기 기독교 문서의 정경화(正經化) 작업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이다. 그가 376년 교구 산하 지역 교회들에 보낸 부활절 메시지에는 신약성서 27권의 목록이 최초로 소개되어 있다. 27권의 책은 그 후 오랜 우여곡절을 거쳐 397년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주교회의에서 정경(正經, Canon)으로 공인되었으며, 나머지 기독교 문헌들은 금서 목록에 올랐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도마복음서’는 폐기될 운명에 처한 책 중 하나였다. 이 책은 천년 넘게 땅에 묻혀 있다가 1945년에 아프리카의 나그함마디에서 우연히 발굴되어 비로소 햇빛을 보았다. 도마복음서는 초기 기독교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주는, 커다란 폭발력을 지닌 경전이다.
신약성서에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으며, 이들 중 요한복음서를 제외한 나머지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라고 부른다. 예수의 생애를 보는 시각이 서로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자료에 의거하여 작성되었다. ‘마가 자료’와 ‘큐(Q) 자료’가 그것이다.
예수가 죽은 후, 그를 따랐던 추종자들 가운데 두 집단이 있었다. 예루살렘교회의 사도그룹과 갈릴리교회의 평신도 제자그룹이 그것이다. 예루살렘교회가 예수의 고난을 중심으로 예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면, 갈릴리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예수가 죽은 후, 기원후 40년경부터 구전의 과정을 거친 예수 이야기들은 단편적으로 문서화되었다. 설교, 교훈, 격언, 비유, 선교훈령 등이 한데 수집되고 여러 단계를 거쳐 최종 편집된 것이 예수말씀복음(Jesus Sayings Gospel), 소위 ‘큐’(Q)이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의 병 고치는 이야기, 악령 추방, 급식 및 자연기적, 예수의 수난에 관한 이야기들을 한데 엮은 ‘예수이야기복음’(Jesus Narrative Gospel)이 최종 편집되었다. 마가복음이 대표적인데, 큐보다 20년 정도 뒤인 70년경에 작성되었다.
큐는 마가복음과 달리 독립된 책으로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잃어버린 복음서’(a lost Gospel)이다. 다행히도 90년경 마태와 누가복음 편자(編者)들이 큐 원본(original Q-Text)을 활용하여 그들의 복음서를 기록했다. 마태와 누가복음에 거의 일치되는 예수의 말씀을 복원하면 대략 200구절이 되는데, 이를 ‘큐(Q)복음’이라 한다. 분량은 마가복음의 3분의 1 정도이다.

사도교회의 신학

예루살렘 사도교회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고백한다. 성령 잉태, 동정녀 출생, 대속적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이 예수에 관한 이야기의 요체(要諦)로 소개된다. 사도교회 신앙전통에서는 신격화된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재할 뿐, 역사적 예수를 위한 자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바울 역시 사도교회의 신앙전통 위에 서 있다. 그는 다메섹에서의 회심 이후 율법신앙에서 예수메시아신앙으로 돌아선다.(행 9:3-9) 그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구원론을 주창한다.(롬 3:28) 이에 의거하여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를 구원의 절대 기준으로 내세운다. 바울에 의해 재구성된 기독교는 세계에 전파되었다. 2,000년에 걸친 기독교 역사는 바울의 기독교가 전파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정작 역사적 예수에 근거한 복음의 원형은 실종되었다.
예수의 신성(神性)을 중시하는 예루살렘 사도교회의 신앙은 니케아 주교회의(AD 325)를 거쳐 삼위일체 교리로 정착된다. 이후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주류에 의해서 정통과 이단을 가려내는 보도(寶刀)로 이용되었다.

큐복음의 신학

◆ 큐에서 예수의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다. 그분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거머쥔 전지전능한 분이 아니다. 가정도, 고향도, 소유도 없이 민중과 동고동락하는 민중의 친구이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머리 둘 집 한 칸 없이 떠돌며 복음을 전파한다.(마 8:20Q)
큐는 ‘주여, 주여!’ 하며 예수의 명호(名號)를 부르는 신앙을 경계한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하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을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내세운다.(마 7:21Q) 다시 말해 믿음보다 하늘 뜻의 실천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7Q)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몫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는 것이다. 큐가 말하는 제자도에서는 내 십자가를 예수에게 떠넘기는 대속신앙을 찾아볼 수 없다. 제자들에게는 자기 십자가를 스스로 지는 주체성과 책임성이 강조된다. 구원은 타력(他力)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력(自力)으로 하늘 뜻을 실천하는 데서 주어진다.
◆ 큐는 예수의 죽음을 대속이 아닌 의인(義人)의 순교 지평에서 이해한다.(마 23:35-36Q) 그의 죽음은 사회정치적 스캔들이요, 사회적 불의에 대한 고발이다. 그런데 사도교회는 ‘십자가 처형’(crucifixion)을 ‘십자가 구원’(cross)으로 대체시켰고, 예수의 죽음은 역사적 뿌리(historical root)에서 단절되었다.
예수의 죽음은 사도교회와 바울에 의해 보편적인 인류의 구원사건으로 관념화되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구원의 패러다임은 개신교 신앙의 주류가 되었다. 개신교는 예수의 죽음을 실사구시(實事求是)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 죽음의 역사적 뿌리를 복원하는 일과 사회복음의 회복이 시급하다.
◆ 큐에서 사람의 아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삶의 ‘동반자’였고 ‘선각자’였으며 ‘안내자’였다. 큐공동체의 구성원은 주로 세리, 창녀 등 이른바 죄인으로 불린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탐식가(貪食家)였고 술꾼이었다.(마 11:19Q)
큐의 예수는 소위 죄인들을 단죄하거나 회개를 독려하지 않았다.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원죄의식’을 심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을 받은 수혜자임을 깨닫게 해주었다.(눅 6:20Q)
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반드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원죄설(原罪說)은 어떠한가? 하나님 앞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죄인으로 내세운다. 오늘날의 기독교에서 말하는 속죄론은 어디까지나 가해자 편의 구원론이다. 피해자 편의 보상과 인권회복에 대해서 속죄론은 왜 침묵하고 있는가? 예수는 본래 사회적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투쟁하다가 처형된 분이다. 예수의 죽음에서 가해자들의 속죄보다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큐복음의 핵심이다.

예수의 첫 설교

큐가 전하는 예수의 첫 설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축복으로 시작된다.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눅 6:20Q) 큐가 전하는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οἱ πτωχοί)과 직결되어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축복은 큐복음 전체의 주제이며, 예수의 말씀을 풀기 위한 열쇠이기도 하다. 기독교 복음은 원래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이고(Gospel of the πτωχοί),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이며(Gospel for the πτωχοί),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 전파된 복음이다(Gospel by the πτωχοί). 반면에 큐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회하는 구원의 길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큐에서 하나님 나라는 천당도,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도 아니었다. 예루살렘 성전 정화(淨化)도 아니었고, 율법이 실현된 왕국도 아니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 실천된 처소였다. 가난한 사람들도 존엄성을 인정받으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휴머니즘 사회가 큐가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였다. 큐는 온갖 종류의 차별과 사회적 불평등이 지양(止揚)되고 모두에게 이로우며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휴머니즘 사회 건설을 위한 최상의 윤리 덕목을 제시한다. ‘경천애인’(敬天愛人)과 ‘황금률’(Golden Rule)이 바로 그것이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께 와서 율법 중 최상이 무엇인지 묻는다. 예수께서 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예언서의 강령이다.”(마 22:34-40Q; 막 12:28-31 참조)
마태는 큐의 경천애인 사상을 온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라고 선언하고 있다. 큐는 인간의 기본 도리를 하나님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맺음에서 찾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경천(敬天)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자명한 윤리이기 때문에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 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은 바로 애인(愛人)에 있다.
경천과 애인은 서로가 서로를 해석한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웃을 미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천지부모인 하늘 아버지 앞에서 이웃은 한 형제자매이다. 이웃은 나의 연장(延長)이요, 나의 또 다른 분신(分身)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 묵자는 천하무인(天下無人)을 말했다. 세상에 타자(他者)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시인기신(視人其身)을 말했다. 남을 네 몸처럼 여기라는 말인데, 큐에 나타난 예수 말씀의 동양적 버전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경천(敬天)은 무엇인가? 동방문화권에서 보면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孝)에 해당한다. 유교는 육신의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지만 큐는 보다 근원적인 효를 강조한다. 인간을 비롯하여 천지만물을 낳고 기르시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효를 말한다.
무형지형(無形之形)의 하늘 아버지는 성령을 통해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마 3:16Q) 성령은 하늘 아버지의 현존 양식이다. 따라서 하늘 아버지에게 효를 다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계신 성령과의 소통(κοινωνία)이 필요하다. 성령은 나를 나 되게 하는 ‘본래의 나’이다. 늘 깨어서 성령의 음성에 경청하는 삶이 경천의 삶이다.
인간세(人間世)에서 성령은 일반적으로 양심을 통해 작용한다. 바울은 산헤드린 재판관들 앞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이날까지 ‘양심의 법에 따라’(συνειδήσει ἀγαθῇ) 하나님을 섬겨왔습니다.”(행 23:1) 바울은 사람들 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들어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롬 1:19) 그래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양심이다. 바울은 율법과 양심을 동일시하기도 한다.(롬 2:15)
바울은 ‘선한 양심의 결’을 따르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천명(天命)으로 주신 보편적 양심이 유대인에게는 율법(십계명)으로, 유교에서는 인의예지로, 불교에서는 팔정도(八正道)와 육바라밀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큐에서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예수의 황금률이다. 황금률은 자리이타적인 상호성의 원리(reciprocity principle)에 근거한 인류의 보편윤리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 7:12Q)
공자의 제자 안회가 스승에게 물었다. “평생 마음에 담고 살 만한 한 마디가 무엇인지요?” 이에 공자는 ‘서’(恕)라고 대답하며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라는 부연설명을 붙인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해주기 원하는 바를 상대방에게 해주라는 점은 둘 사이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큐가 전하는 예수의 황금률이 말하는 행위의 중심은 ‘나’인데 반하여, 공자에게는 ‘남’이 중심이 된다. 자신이 좋아한다고 해서 남도 좋아하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남에게 해 주라는 예수의 적극적인 황금률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공자의 소극적 황금률이 보다 보편성을 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세대, 지역, 성별, 빈부, 이념 갈등의 주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남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은 채, 자기 주장만 옳다고 하는 데서 비롯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지 않아서이다. 나를 살펴서 남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내 생각에 남을 맞추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에서 하늘 아버지의 뜻을 펼치는 것이다. 그것은 양심에 따른 황금률 실천과 연관이 있다. 황금률이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사회가 된다면, 아마도 이 세상은 보다 더 청정해질 것이다.

한국교회의 희망

기독교수도회 동광원과 사회복지법인 귀일정신요양원의 창시자 이현필의 예수살기 영성운동은 큐공동체의 예수살기 영성운동의 맥(脈)을 잇고 있다. 큐의 경천 사상이 동광원의 영성운동으로 계승되고 있다면, 애인 사상은 귀일원의 사회복지선교 사업으로 맥을 이어가고 있다. 귀일원은 정신요양시설, 장애인거주시설, 장애인직업재활시설의 운영을 통해서 큐가 말하는 애인 계명과 황금률을 펼쳐나가고 있다.
이현필은 ‘예수 믿기’를 넘어 ‘예수 살기’를 복음의 원형으로 삼았다. 이현필에게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은 전쟁고아, 과부, 걸인, 장애인, 병자들이었다. 큐의 예수처럼 이현필은 이웃을 자기 삼아 천하무인(天下無人)의 삶을 살았다. 그는 전쟁의 희생제물이 되어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당대의 가난한 민중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동반자로 살면서, 그들의 존재를 통해 현존(現存)의 예수를 만났다. 그가 몸담고 있는 ‘오늘 여기’에서 예수살기 운동을 펼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았던 것이다.
이현필은 이 땅에 묻힌 한 톨의 씨알이었다. 그 씨알 속에 배태된 예수의 생명이 발아하여 싹이 텄다. 그리고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지금 예수살기 운동에 동참하고 계신 분들이 그 꽃이요 열매들
이다.
나는 지금 동광원, 귀일원, 삼온회 여러분의 예수살기 운동에서 한국교회의 희망을 본다. 2,000년 전, 갈릴리의 평신도 제자집단으로 형성된 큐공동체의 소박한 예수살기 운동이 시공을 초월하여 21세기 동아시아의 한반도 남부 동광원과 귀일원의 예수살기 운동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본다. 예수살기 운동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새롭게 거듭나고 변화되어 ‘제2의 종교개혁’의 횃불로 타오를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할 것이다.

김명수 |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초기 기독교 예수말씀 큐(Q)복음을 연구하였다. 큐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큐복음서의 민중신학』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경성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충주에 있는 노인요양시설 ‘예함의집’에서 치매 어르신들을 돌보고 있다.

 
 
 

2019년 4월호(통권 7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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