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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교회와 현장] 나의 목회 수기
교회와현장 (2019년 1월호)

 

  맨발의 사제 이현필의 예수살기 운동과 나의 신학 역정 (1)
  

본문

 

예수말씀 공동체 큐(Q)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수렴된다. ‘복음 중 복음’(Gospel of Gospels)이라고 말할 수 있는 큐 공동체의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과 황금률 윤리는 한국 개신교 선교 역사에서 동광원의 수도공동체 운동과 귀일원의 사회복지운동에서 선구적으로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광원의 ‘동’(東)은 나무(木)에 해(日)가 걸려 있는 한자로 아침에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따라서 ‘동’은 빛, 밝음, 생명을 상징한다. 우리 민족은 동이족(東夷族)의 후손으로서 오천 년 배달 조선의 시원(始原) 사상이 동광(東光)이라 할 수 있다. 동학(東學)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서학(西學)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만 볼 수 없으며, 홍익인간 이념을 구현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생명(zwh.)과 빛(fw/j)으로 묘사한다.(요 1:4) 참 빛 예수가 세상을 비치되, 세상이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요 1:4-5) 허나 그를 알아보는 안목을 지닌 사람에게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특권(evxousi,a)이 주어진다고 했다.(요 1:12) 빛과 생명으로 오신 예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이다.
예수는 동광(東光)이다. 이 명제의 역 또한 진리이다. 동광원 수도공동체의 운동에서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영성과 배달민족의 홍익인간 영성이 만나 한 줄기로 합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동광원과 귀일원, 그리고 이현필

남원에 있는 동광원(東光園)은 1943년 맨발의 평신도 사제 이현필에 의해 시작된 영성수도공동체이다. 한반도 개신교수도원 영성운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어려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으로 돌보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1950년대에는 전쟁고아들, 걸인, 환자 등 600여 명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돌보는 일을 담당했다. 1980년부터는 본격적인 기독교동광원수도회로 거듭났고, 회원들은 수도생활에 전념하고 있다. 오늘날 동광원에는 이현필의 생애와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자료들이 단정하게 비치되어 있는 기념관과 오늘의 동광원을 있게 만든 주역들이자 신앙과 헌신의 삶을 살았던 수도사들의 묘역이 있다.
1951년 동광원은 산하에 귀일원을 설립하여 광주 시내를 배회하는 고아, 과부, 걸인, 병자들을 데려와 치료하고 따뜻하게 대접하는 귀일운동을 벌였다. 귀일의 명칭은 한 분이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 한마음 한뜻으로 소외된 이웃들과 하나 되는 생활공동체를 이루라는 뜻으로 이현필에 의해 지어졌다.
배달민족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이 귀일사상은 신라시대의 원효로 소급된다. 이 사상은 조선 후기 최제우, 그리고 근세에 이르러 유영모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유영모는 있음과 없음을 아우르는 절대자 하나님을 일컬어 ‘하나’라고 했으며, 만물은 ‘하나’에서 나와 ‘하나’로 돌아간다고 보았다. 바울 또한 천지만물과 하나님의 관계를 귀일사상으로 풀어 설명했다. 즉 만물(ta.pa,nta)은 하나님에게서 나와(evx), 그분에 의해 지탱되다가(diV), 그분에게로 돌아간다(eivj)고 보았다.(롬 11:36) 한마디로 만법귀일(萬法歸一) 사상을 피력한 것이다.
귀일원은 한 분이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 불우한 이웃과 하나가 되어 살아간다는 귀일사상을 실천하는 도량으로 창설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장애인을 예수로 섬긴다.”라는 귀일원의 설립헌장이 이를 잘 나타낸다. 현재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은 장애인 240여 명과 종사자 60여 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회복지법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현필의 생애

일생에 걸쳐 화순, 광주, 남원, 해남, 진도, 함평, 서울, 능곡, 벽제 등지를 맨발로 순회하며 예수살기 운동을 펼쳤던 이현필은 1913년 화순군 도암면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영산포에서 우치무라 간조의 신앙을 계승한 어느 일본인으로부터 복음을 접하게 된다. 1927년에는 도암면의 수도사 이세종을 만나 성경공부를 하게 되고, 이세종의 삶의 방식에 매료되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1933년에는 광주YMCA 총무 어비손이 세운 농업실습학교에서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1936년 서울YMCA에서 영어공부를 하던 중 유영모, 현동완, 원경선과 친분을 맺으며 생애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1944년에는 남원 지리산 자락 서리내와 갈보리에서 성서를 가르쳤으며, 서리내에서 성경공부에 참여한 14명의 소년 소녀를 중심으로 1947년에 신앙공동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1949년 여순 민중항쟁으로 고아들이 늘어나자, 이현필은 그들을 돌보기 시작하여 이듬해 고아원 동광원을 설립한다. 같은 해 북한군이 남침하자, 유하례 외국인 선교사를 화순의 화학산으로 피신시켜 77일간 은거하도록 도왔는데 이 피난 과정에서 무려 8명의 신도들이 순교하였다.
1951년 이현필이 화학산 소반바위 밑에서 묵언수도(黙言修道)를 하고 있는 중에 정인세가 찾아왔다.(정인세는 당시 광주 YMCA 총무였다. 이현필은 그에게 원장직을 맡아 운영하도록 하였다.) 서로 필담을 주고받던 중, 이현필은 ‘귀일원’(歸一園)이라는 글자를 써주면서 정인세에게 귀일운동을 벌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귀일(歸一)은 한 분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 이웃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며,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지향점이기도 하다.
그때부터 귀일원 수도공동체는 오갈 데 없이 광주 시내를 떠도는 고아와 부랑인들을 데려와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일(귀일운동)을 시작했다. 공동체의 구성원 중에는 광주천 움막에 들어가 고아 및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십시일반(十匙一飯) 운동과 일작(一勺) 운동을 펼쳐 귀일원 사회복지사업의 재정적 기반을 닦는다. 이는 현재 광주에 있는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의 모체(母體)이다.
광주에는 무등산(無等山)이 있다. 인간 사이의 모든 경계와 차별이 철폐된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산이다. 1958년 이현필은 그곳 무등산에 폐결핵 환자 수용보호시설인 송등원(松登園)을 세워 환자들을 보살폈다. 또한 1961년에는 협동조합을 조직하여 가난한 사람들끼리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돋우었으며, 산에 유실수 심기 운동을 벌이고, 바르게 살기 위한 농촌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핵환자를 간호하다가 자신도 결핵에 걸리고 만다. 결국 이현필은 1964년 3월 18일 후두결핵이 재발되어 경기도 벽제 계명산에서 “오, 기쁘다!”를 외치며 별세했다. 향년 51세였다.
타율(他律)이 아닌 자율(自律), 이신칭의(以信稱義)가 아닌 예수살기로 신앙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한 시대를 살다간 이현필은 한국교회 제도권 내에서 공인된 사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며 그 시대에 예수의 화신(化身)으로 살았다는 점에서 ‘사제 중 사제’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현필 주위에 몰려든 전쟁 피해자들은 예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갈릴리의 민중(오클로스)을 연상시킨다. 예수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민중이 있었고, 민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예수가 있었다. 예수와 그 시대 민중의 불이성(不二性)이야말로 복음서들이 이구동성으로 증거하는 바이다.
하루는 한 제자가 이현필에게 와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잘 믿을 수 있습니까?” 이현필은 “걸인이 오장치를 짊어지고 나서듯 믿으라.”라고 했다. 너희가 걸인이 되어 그들을 섬기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이현필의 예수살기 운동을 한마디로 요약한 문장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걸인처럼 맨발로 살았다. 파송설교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휴대금령(携帶禁令)을 연상시키는 이 말은 걸인구제를 우회한 구원의 길이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참조, 눅 10:4Q)

이세종과 유영모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다

이현필에게 영향을 끼친 스승으로는 이세종과 유영모를 들 수 있다. 이 두 분은 역사적 예수의 청빈사상과 배달민족의 귀일사상(歸一思想)에 뿌리를 두고 토착적 기독교 영성운동의 새로운 장(場)을 열었던 선구자들이다.
이세종은 일찍이 녹스(Robert Knox)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했다. 그는 전 재산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천태산에 은거하며 청빈하게 살았다. 스스로를 ‘이공’(李空)이라 불렀다. 이는 ‘나 없이 나’로 살고, 가난한 이웃을 ‘나’로 삼아 살겠다는 신앙적 결단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의 성경공부 방식은 ‘파는 것’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말씀의 영적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 성서를 깊이 파는 공부를 하라고 가르쳤다. 부인과는 일찍이 해혼(解婚)하고 누이 관계로 지내면서 제자들에게 순결 사상도 가르쳤다. 또한 이세종은 길을 가다가도 개미 한 마리 상할까 늘 조심했다. 미물까지 형제자매로 돌보았던 그의 사상은 땅을 하나님의 살갗으로 알고, 만물을 하나님처럼 존귀하게 여기라는 동학의 경물(敬物) 사상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이세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유영모는 51세(1941)에 해혼을 선언한다. 맺으면 푸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했다. 해혼 후 부인과는 자매 관계로 지냈다. 그는 1일 1식을 했다. 아침은 조물주를 위해, 그리고 점심은 이웃을 위해 불식(不食)했다. 저녁은 ‘제 나’를 위해 먹었다고 한다. 그는 칠성판(널빤지) 위에서 자는 것을 습관화했는데, 잠자는 것을 죽음의 예행연습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동광원의 생활 신조인 청빈, 순결, 순명 사상, 그리고 우주 만물이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자매라고 보는 귀일사상도 두 스승에게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 중 하나이다. 이현필은 역사적 예수의 청빈영성(淸貧靈性)과 한국의 토착적인 귀일영성(歸一靈性)을 두 축으로 삼아 그가 서 있는 삶의 현장에서 예수살기 운동을 펼쳤다.
이현필의 신앙운동은 시대적 환경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는 태평양전쟁(1941-45), 분단 후 여순 민중항쟁(1948), 6・25동란(1950) 등 민족의 수난기에 청년 시절을 보냈다. 전쟁 직후 한반도는 전쟁고아, 과부, 걸인, 병자, 행려자 등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법의 사각지대에 버려진 사회적 약자들(social minorities)로 차고 넘쳤다.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이 이현필의 선교 현장이었다.

나의 신학 역정(歷程)

나는 충청남도 부여의 두메산골에서 태어났다. 열 가구가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4살 때 6・25전쟁이 터졌다. 내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면소재지인 대천에서 생활하셨고, 내가 10살이 되었을 때 온 가족은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이사를 갔다.
어느 일요일에 어딘가에서 ‘땡그랑, 땡그랑’ 종소리가 들려왔다. 교회 종탑이 보였다. 그때 교회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무엇을 하는 곳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안에 들어가 보니 내 또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고, 앞에서 어느 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아이들 틈에 끼어 귀를 기울였다.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하여간 누군가가 나를 위해 죽었다고 했다. 아마도 수난절 즈음한 어린이 예배였던 것 같다.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위해 죽었다니,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예수와 인연을 맺었는데,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 이렇게 지속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잠을 자고 있는데 부모님이 언성을 높여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장래 문제를 두고 두 분의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중학교까지 공부시켰으면 충분하니 공장으로 보내자는 입장이셨고, 어머니께서는 계속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어머니는 가난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는 서울에 계신 외숙부에게 편지를 썼다. 외숙부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영등포역 도로변에서 야간에 책장사를 하고 계셨다. 졸업하면 무조건 올라오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다. 낮에는 학교를 다녔고, 밤에는 외숙부를 도와 통행금지 시간까지 길거리에서 책을 팔았다.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몇 차례에 걸쳐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밀고 나갔다. 장기집권을 위한 계획이었다. 나 역시 잘살아보겠다는 포부를 안고 공과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3학년 때였다.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과로에 시달려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고,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허사였다. 그는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동료 노동자들과 더불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는 현수막을 들고 거리에서 시위를 했다. 기동경찰들에 의해 봉쇄당하자, 그는 자기 몸에 불을 댕겼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들의 희생 위에 10년 동안 추진했던 경제성장 정책의 모순을 보여주며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가져왔다. 특히 기독교 내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사는 길인가를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태일은 나와 동갑내기였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노동 현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죽음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시대인으로서 나는 그의 죽음에 일종의 도덕적인 책임감을 느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앞으로의 인생 진로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오랜 고민 끝에 엔지니어의 길을 포기하고, 신학의 길로 들어섰다. 1972년은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선포한 해이다.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고쳐 대통령종신제를 선포하고 유신헌법 제정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호도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신철폐, 민주회복을 위한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박정희는 대통령긴급조치법을 발령하여 유신 반대 세력들을 무차별하게 탄압했다. 당시 유신헌법은 민주주의의 종언을 뜻했다.
1972년 내가 다니던 신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권회복과 구속자 석방을 위한 신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교수와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몸짓으로 집단으로 삭발하기도 했다. 하나님나라의 정의 구현을 위해 학교 예배실에서 촛불을 켜놓고 100일 동안 학생과 교수들이 24시간 릴레이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당시 교수들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오직 ‘전체로서의 구원’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가르쳤다. 기독교의 역사 참여를 하나님나라의 정의 실현 차원에서 독려했다.

관제 간첩이 되다

신학대학원 시절이었다. 유학차 재일동포 학생이 학교 기숙사에 들어왔다. 그는 일본 동지사대학에서 역사신학을 공부했는데, 한국에 기독교 복음이 전래된 초기교회사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온 것이다. 나는 1년 정도 그와 같은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여러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1975년 10월 초 어느 새벽에 내가 잠자고 있는 방에 건장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잠깐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하였다. 나는 헝겊으로 눈이 가려진 채 검은 세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눈을 떠 보니,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정보부임을 직감했다.
나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한 달여 동안 잠을 자지 못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허리와 무릎의 통증 때문에 고생하고 있고,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취조를 받으면서 내가 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차츰 알게 되었다. 나와 한 기숙사에서 지내던 그 재일동포 유학생이 먼저 잡혀 와서 취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수사관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북에서 파견된 거물급 간첩이었다. 취조 당시 수사관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가 누구인가 물었을 때, 그가 내 이름을 대었던 것 같다.
수사관들은 이미 각본을 짜 놓고 거기에 맞추어 나를 심문하고 조서를 작성해나갔다. 평양에서 한국 사회에 불안을 조성할 목적으로 거물급 간첩을 한국신학대학에 파견하였고, 나는 그에게 포섭된 간첩으로서 당시 유신철폐와 인권회복을 위한 학생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각본이었다. 조서를 꾸미는 과정에서 그들은 이 각본에 응하지 않을 경우 폭행과 협박으로 나를 위협했다. 사실에 근거한 진술을 고집하다가는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존재의 불안감에 떨기도 했다. 당시 내 몸과 영혼은 갈기갈기 찢겨졌다. 억울함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해답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재일동포유학생 간첩단 일망타진!” 1975년 11월 22일 주요 일간지들 1면을 장식한 톱기사 제목이었다. 북한은 재일동포 유학생을 한국 대학들(서울대, 고려대, 부산대, 한신대 등)에 대거 투입하여 유신 반대 학생시위를 획책하였고, 국가전복을 꾀한다고 했다. 당시 대공수사국 책임자 김기춘이 직접 매스컴에 나와 이 내용을 발표했다.
중앙정보부에 한 달 동안 고문당하는 과정에서 나의 신분은 신학생에서 북괴 간첩으로 둔갑되어 있었다. 관제(官製) 간첩이 되었던 것이다. 1심 재판에서 나는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좌절과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2심 재판에서 10년으로 감형되자,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다. 이후 갑자기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정국이 급변했고, 나는 4년 4개월 만에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석방은 석방이 아니었고, 감옥생활의 연장이었다. 단지 창살 있는 작은 감옥에서 창살 없는 큰 감옥에로 이감된 것에 불과했다. 사회안전법과 보호관찰법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한국 사회에서 40년 이상을 간첩이라는 주홍글씨 팻말을 가슴에 단 채 기(氣) 한 번 펴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
4년 전이다. 40년 만에 국가를 상대로 재심을 청구했다. 죽기 전 간첩 누명을 벗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또 나같이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주권자 국민이 더 이상 나와서는 안 되겠다는 염원에서였다.
2017년 3월 30일 대법원은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 불법적인 상태에서 진행된 체포, 구금, 강제 조서작성 일체는 법적 효력이 없다고 선고했다. 사건이 발생할 당시 나는 스물여섯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칠십이 넘어서야 간첩 누명을 벗고 당당하게 자유로운 주권자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0.78평에서의 삶

0.78평의 감방이 4년 4개월 동안 내가 살아온 세계의 전부였다. 옥살이를 하면서 교도관들에게 이유 없이 구타당하는 일이 허다했고, 부패된 음식으로 식중독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다. 영양실조로 실명의 위기를 맞기도 했고, 대구교도소 시절에는 교도관들의 재소자 구타에 저항하여 열흘 동안 단식하다가 졸도한 적도 있었다.
1540일! 나의 감방살이 날수이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고,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잠자리에 누우면서 내일 아침에 눈을 뜨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감방 생활에서 두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은 건강을 챙기는 것이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 일과가 곧 기도, 명상, 요가였다. 비좁은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때 들인 습관이 지금까지 남아 수기(修己)의 수단으로 명상요가를 생활화하고 있다.
감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책 읽기였다. 신학과 철학의 기본서적, 동양 사상에 관한 책들을 탐독했다. 감옥 밖에서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 읽지 못한 책들이었다. 어학공부도 치열하게 했다. 그리스어 원어 신약성서를 여러 차례 읽었고, 독일어와 일본어 성서도 읽어 성서에 대한 시야를 넓혔다.
인생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시기였다. 이 저주와 악몽의 시기를 나는 내면적 성찰과 학문의 내공을 쌓는 계기로 전화시켰다. 이를 통해 인간은 주어진 환경의 지배를 받기도 하지만, 환경을 활용하여 영적 성숙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되었다. 행복과 불행은 양심의 결에 따라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경영하느냐의 문제임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갖가지 시련을 포함하여 인생살이에서 겪게 되는 모든 사태가 종국적으로는 협동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바울의 낙관적 신앙관을 좌우명으로 삼게 되었다.(롬 8:28)

그곳에서 얻은 소중한 두 가지, 무기인(無棄人) 그리고 민중

감옥살이를 하면서 소중한 것 두 가지를 얻었다. 하나는 이분법적 세계관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개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물은 근원적이고 전체적인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면 상의상관(相依相關)된 하나의 ‘온 생명체’라는 지혜를 얻게 되었다.
고정된 ‘나’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은 무엇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생멸(生滅)을 거듭한다. 바람결에 따라 파도는 생멸을 거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다는 바닷물의 출렁임만이 있을 뿐이다.
노자는 선악의 이분법을 해체했다. 노자는 선(善)의 반대를 악이 아니라 불선(不善)으로 보았다.(도덕경 27장) 불선은 지금 선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불선도 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존재를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소통 가능성(communicability)으로 보았던 것이다.
노자는 무기인(無棄人), 무기물(無棄物)에 대해 말했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나 물건은 없다는 선언이다. 존재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무위자연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물이 지닌 그럴 만한 고유한 결을 따르는 것이다.
세계 만물의 창조를 끝마친 다음 하나님의 첫 탄성은 무엇인가? ‘토브 메오드’(daom.bwOj)이다.(창 1:31) 영어 성경에는 ‘it was very good’으로 번역되었다. 자연 만물의 본래 모습이 매우 좋다는 선언이다. 피조물 전체에 대한 절대긍정이 창세 설화의 골자이다.
세계의 근본 문제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있다. 나와 너, 좌익과 우익, 남과 여, 진보와 보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기독교와 타 종교를 갈라놓고 차등화하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의 실상이다. 바울은 유대인의 선민사상과 차별신앙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롬 2:11)
감옥에서 내 옆에 ‘사람’이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 또한 소중한 경험이다.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대부분은 사회의 밑바닥 계층이었다.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민중과 함께하며 내가 살아야 할 삶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고, 추구해야 할 신학의 목표가 분명해졌다. 예수와 민중을 양 날개로 삼아 예수 휴머니즘 신학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8년간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나는 강단에서 신약성서를 가르치면서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다. 예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은퇴 후 현재 나는 충주 남한강변에 위치한 작은 규모의 노인요양시설 ‘예함의집’에서 치매성 노인질환으로 고생하는 어르신들을 보살피며 살아가고 있다.[다음 호에서는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가장 충실하게 따랐던 갈릴리 지역 큐(Q) 교회의 예수살기 운동과 인류의 보편윤리인 황금률을 비롯한 주요 신학사상을 살펴봄으로써 나의 신학 역정 이야기를 마치려고 한다.]

김명수 |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초기 기독교 예수말씀 큐(Q)복음을 연구하였
다. 큐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큐복음서의 민중신학』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경성대
학교 명예교수이며, 충주에 있는 노인요양시설 ‘예함의집’에서 치매 어르신들을 돌보고 있다.

 
 
 

2019년 7월호(통권 7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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