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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18년 12월호)

 

  「복음과 세계」(福音と世界) 편집 동향
  2018년 8–10월호

본문

 

2018년 8월호–국가, 천황제, 그리스도교
바람에 휘날리는 저 깃발에 / 옛날보다 더욱더 펄럭이는 깃발에
왠지 모를 그리움 느끼고 / 솟구치는 이 기분은 뭘까
가슴에 손을 얹고 올려다보면 / 용솟음치는 피가 자랑스럽게
이 몸 안에 흐르고 있네 / 고귀한 이 나라의 혼
자, 이제 나가자! / 해 뜨는 나라의 그 이름 아래로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와도 / 아무리 높은 파도가 밀려와도
우리의 타오르는 혼은 / 절대로 꺾이지 않으리!
가슴에는 다정한 어머니의 음성 / 등 뒤엔 굳건한 아버지의 교훈
계승되는 역사를 이 한 손에 움켜쥐니 / 더 이상 두려울 게 뭐 있으랴
한시도 잊지 않으리! / 돌아가야 할 당신이 품을
비록 이 몸이 스러진다 해도 / 억겁의 세월 속에 다시 피어나리
자 이제 나아가자 / 지켜야 할 것이 지금 여기 있다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와도 / 아무리 높은 파도가 밀려와도
우리의 애끓는 결의는 /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


이 가사를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도 1940년대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 군가가 떠오르지 않을까? 하지만 이 곡은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록 밴드 ‘래드윔프스’(RADWIMPS, 줄여서 ‘랏도’라고 부름)가 지난 2018년 6월 6일 발표한 <히노마루>(HINOMARU, 일장기)라는 곡의 가사이다.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君の名は)의 음악 감독을 맡은 사람이 바로 이 그룹의 리드보컬 노다 요지로(野田洋次郎)이므로 그의 목소리는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랏도는 한국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리는 현충일에 이 곡을 세상에 내놓았다. 일본에서도 군국주의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논란이 일었는데, 이에 대해 노다는 “순수하게, 어떤 사상적인 의미도, 좌우의 문제도 없이, 이 나라에 대해 노래하고 싶었습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의 순수한 바람대로 ‘히노마루’는 노래될 수 있을까?
한국의 팬들 사이에도 ‘욱일기’(旭日旗)에는 문제가 있지만 자국의 국기에 대해 노래하는 것까지 비판할 수 있는가라는 옹호와 옛 군가를 연상시키는 저런 가사를 노래하면 그동안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노래하던 ‘랏도’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의 두 견해로 크게 나뉘었다. 최근 고조되는 일본의 우경화 현상 속에서 대중문화에까지 등장한 이런 국수주의 현상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태평양전쟁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종식된 8월을 맞아 「복음과 세계」는 히노마루가 상징하는 ‘태양’의 주인공인 ‘천황’과 그를 상징으로 하여 형성된 ‘일본이라는 국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특집 ‘국가, 천황제, 기독교’가 그것이다.
우선 예수회 학교인 조치대학(上智大學)에서 가르치는 시라이시 요시하루(白石嘉治) 씨가 “천황의 바로 앞, 그리고 헌법 저 너머에서–공공성에서 자연으로 내려가기 위하여”라는 글을 통해 ‘천황의 국가’나 ‘천황제’라는 형태를 지닌 통치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는 ‘신’, ‘사람’, 그리고 ‘물질’에 의해 이루어져 온 ‘지배’가 수명을 다해가는 이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가기 위한 대담한 시도와 용기를 요청한다.
『기독교의 자기비판』의 저자 우에무라 시즈카(上村静) 박사가 쓴 “퀴어적 디아스포라를 살아가다–국민국가의 종언을 바라보며”, 그리고 와세다대학 젠더연구소 및 문학학술원 교수인 스즈키 유코(鈴木裕子)가 쓴 “천황제와 페미니즘–메이지 150년을 생각하다”라는 글을 통해, 고대로부터 남성성을 지배 원리로 고수해온 ‘국가’에 대해서 디아스포라나 퀴어의 개념이 지닌 비판의 힘을 적용해본다. 즉 ‘남성으로서의 국가’(男性としての国家)가 주도해온 역사 속에서 구조화되어 온 성차별을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질문해보는 것이다. 특히 스즈키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페미니즘’이라는 장을 통해, ‘위안부’라는 용어를 거부하며 ‘성노예제’를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는 1990년 한일에서의 정치적 쟁점화 때로부터 2018년 3월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28년간 이어졌다. 결국 이 문제는 미해결 상태이다. 이는 전적으로 일본 정부 측의 불성실과 비겁한 수습책에 있다. …‘위안부’ 범죄가 국가범죄, 특히 천황제 국가가 범하였던 범죄, 권력의 범죄였음을 생각하면, 권력과 명확히 대치해오지 않았던 일본의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들의 책임을 새삼 묻지 않을 수 없다.(22쪽)

이어서 이토 아사히타로(伊藤朝日太郎) 변호사의 “헌법을 둘러싼 공방이 있는 곳–개헌국민투표와 자위대 명기(明記)”라는 글에서, 헌법을 겨냥한 국가(일본 정부)의 전략을 재확인하며, 이에 대한 입헌주의로부터의 처방전을 모색해본다. 마지막으로 “천황주의자 선언에 대해 듣다”라는 제호로 고베여학원대학(神戸女学院大学) 명예교수인 우치다 다츠루(内田樹)와의 인터뷰가 소개되었다. 천황제를 긍정하는 철학자로서, 그의 입장을 들으며 천황제 국가의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재검토한다. 편집부는 어떤 국가나 통치의 형태가 이상적인가의 문제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와 어떻게 살고 싶은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삶을 해방시키기 위한 끝없는 노력, 거기에 기독교인의 사명이 있다고 진단한다.
이들 특집의 내용에서도 확인되듯, 일본에서 천황제는 여전히 국가주의, 권위주의, 가부장제, 신분제 등의 구시대적 유물을 잔존시키시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천황제 국가를 인접한 채, 과거 신사참배 강요의 역사 등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천황제 국가가 지닌 문제의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고민해 보아야 할까? 결코 쉽게 해결되지 않는 과제이다.

2018년 9월호–먹는 것과 ‘동물의 권리’
프랑스 혁명기의 법률가로서 희대의 미식가(美食家)이기도 한 브리야 사바랭(Brillat Savarin)은 먹는 것이야말로 예술이라면서 『미식 예찬』(La Physiologie du Goût, 1848)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어떤 것들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겠다.”(Dis-moi ce que tu manges, je te dirai ce que tu es.)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먹는 것의 미와 기쁨을 즐기는 주체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에 의해 먹임을 당하는 존재, 즉 ‘식재’(食材)가 될 대상을 향해서는 그다지 배려가 없는 말이다. 하지만 무엇을 먹는가의 문제가 한 사람의 됨됨이를 의미한다는 그의 관점은 오늘날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 모두는 동식물의 생명을 거두어 그들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지탱시켜주는 이 순환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는 것은 일반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인간 중심, 혹은 경제성장 중심의 대량 소비 시스템에서 인간 이외의 생명은 가볍게 다뤄지고, 그 존재가 함부로 짓밟히고 있지는 않을까?
도올 김용옥 선생의 딸로도 유명한 사진작가 겸 행위예술가 김미루 씨는 2011-12년에 “돼지, 고로 나는 존재한다”(The Pig That Therefore I Am)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에서 ‘나는 돼지를 좋아하고, 돼지는 나를 좋아한다’(I Like Pigs and Pigs Like Me)라는 제목의 퍼포먼스가 소개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작가가 돼지우리 안에서 104시간 동안 동물들과 함께 지낸 모습이다. 인간의 본질이 과연 그들(돼지)과 다른지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과연 대중은 얼마나 깊이 성찰하고 받아들였을까? 특이한 대중 학자의 특이한 작가 딸이 보여준 괴짜 행태로만 여기고 쉬이 넘어간 것은 아닐까?
수년 뒤 봉준호 감독은 <옥자>(2017)라는 영화를 통해 육식에 중독된 현대인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풍자했다. 하지만 과거의 호응과는 달리 이 영화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그에 비해 TV의 각종 채널에서는 온갖 ‘먹방’ 프로그램이 홍수를 이루며 현대인의 식탐 본능을 자극하고 있다. 먹는 주체로서의 달콤한 맛에 중독된 나머지 먹히는 객체, 특히 동물들에 대한 깊은 성찰을 회피하는 현대인 가운데 자신은 예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복음과 세계」 9월호는 이러한 현대인의 초상을 곱씹으며 ‘먹는 것과 동물의 권리(食と 「動物の権利」)라는 특집을 다루었다. 먼저 도요다공업대학의 아사노 코지(浅野幸治) 교수는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기독교적 시점에서 육식을 생각하다”라는 글을 통해 기독교의 긍휼과 연민의 시점으로 육식의 문제를 처음부터 성찰해보았다. 그는 기독교의 정신이 생명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재검토하며, 공장식 사육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먼저 동물들을 향한 ‘긍휼의 실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요청했다.
나가노공업전문대학의 키토 요코(鬼頭葉子) 교수는 “살아가는 것과 먹는 것–현대 기독교 신학과 동물윤리”라는 글에서 철학 및 윤리학은 물론 기독교 신학에서 동물을 어떻게 배려하고 있는지를 고찰한 후,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도 현재 식습관에 대한 윤리적 결단을 촉구받고 있으며, 동물들을 어떻게 배려하며 살아가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제언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미가서의 성서 구절을 인용한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서 6:6-8, 새번역)

『동물복지』(animal welfare)의 저자 사토 슈스케(佐藤衆介) 토호쿠대학 명예교수는 “축산 동물의 복지를 생각하다”라는 글을 통해 그 구체적 실천의 가능성을 소개했고, 인류학자인 노바야시 아츠시(野林厚志) 국립민족학박물관 학술센터 교수는 “먹거리 선택의 문화적 배경을 생각하다”라는 글을 통해 우리 식생활의 문화적 배경을 고찰했다. 그는 먹는 동기와 함께 ‘먹지 않는 것인가? 먹지 못하는 것인가? 먹고 싶지 않은 것인가?’라는 다양한 질문 속의 함의를 고민해보았고, 그 안에서 부지불식간에 ‘제도화된 먹거리의 선택지’ 문제를 논하였다.
와세다대학의 쿠사야나기 치하야(草柳千早) 교수는 “살아 있는 것을 먹는 것–푸드 액티비티즘의 가능성”이라는 글을 통해 관성화된 우리의 먹는 행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며, 특히 살아 있는 것을 먹기 때문에 그 생명과의 ‘인연’을 소중히 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이 질문은 현대인에게 작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새나 그 밖의 동물들은 나무 열매 등을 먹고, 이동할 수 없는 식물들을 대신하여 씨를 멀리까지 옮겨준다. …동물이라는 숙명으로 인해 사람은 살아 있는 것들을 먹으며 살아간다. ‘살아 있는 것’(생물)이란 다른 생물에 의지해 그 생을 유지하며, 거역할 수 없는 서로의 먹고 먹힘으로 이어져 있다. 인간은 동물이며, 식물도 생물이다. 동물의 권리(animal rights)란 무엇인가? 동물을 타자(他者)로서 선긋기 한 뒤에 인간이 규정하는 그 권리란 무엇일까?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휩쓸어버리는 그 강권적(强權的) 행위들은 어디를 향해 질주하고 있나?(35쪽)

한편 9월호에는 토호쿠가쿠인대학의 교수인 후지와라 사치코(藤原佐和子)가 쓴 아시아교회협의회(CCA)의 ‘아시아 에큐메니컬 청년총회’ 참가 보고서가 “젊은이들을 섬기는 곳으로 초대하기”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어, 아시아 교회와의 연대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2018년 10월호–아나키즘과 그리스도교
아나키즘(Anarchism) 혹은 아나키스트(Anarchist)라는 말은 한국 대중에게 여전히 낯선 용어이다. 특히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한 묶음으로 처리되어 생겨난 레드 콤플렉스(혹은 적색공포, Red Scare)가 한국 사회를 70년 이상 지배하였기에 아나키즘에 대해서 충분히 논의될 수 없었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버(David Graeber)는 아나키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 번째로 평등주의적인 실천의 여러 형식이 존재한다. 둘째로 앞의 첫 번째 요소들을 통해 가능해진 권력이나 권위의 구조화에 도전한다. 마지막으로 유토피아적 이상이라는 차원이다. 평등주의적 사회실천의 경험은 우리에게 강요된 그 어떤 권위의 형식도 틀린 것임을 실감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이상(理想)하는 것이다. -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위하여: 새로운 아나키즘의 시좌(資本主義後の世界のために: 新しいアナーキズムの視座)』(以文社, 2009)

최근 한국 사회는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부하직원 폭행에 경악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한항공 3세 경영인들의 갑질이나 아시아나항공 회장의 부당한 승무원 동원, 현대와 종근당, 교촌치킨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벌의 권력 괴롭힘(power harassment)을 목격하고 있다.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유치원, 어린이집 비리 사건이 그동안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없었던 것에도 유치원장과 공무원들의 관료주의적 권력 지배와 횡포가 존재했기 때문임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이 사회를 구성해가면서 ‘지배’나 ‘종속’의 관계를 형성해왔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관성에 조금씩 저항의 움직임이 일어나며, 권위와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는 사회로의 발아가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타인이나 나이 어린 사람 등이 어떤 행동을 하든 소위 ‘꼰대적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내버려 두는 모습의 증가가 그런 현상일 수 있다.
이런 모습에 대해 지나친 개인주의의 만연이라 말할 수도 있다. 훈계의 실종으로 사회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거라고 개탄하는 기성세대가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존의 권위나 지배와 종속의 방식이 아니더라도 사회를 유지해갈 힘은 존재하지 않을까? 실은 그 힘이 충분히 잠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국가나 자본주의가 은연중에 그 힘을 짓밟아왔으며, 지금도 그 억누름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회 현장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처럼 권위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개인’의 힘에 대한 깨달음이 개인의 자유를 고양시켜나감에 따라, 나 또한 타자를 지배하거나 종속시키지 않는 가운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이 시대의 새로운 시대정신은 아닐까? 지난 촛불혁명도 구시대의 명령과 동원에 의한 운동이 아니라, 개개인의 각성과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뭉쳐진 결과임을 생각할 때 말이다. 바로 그러한 방식의 무수한 실험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아나키’(an-arche) 곧 무지배(無支配), 무기원(無起源)의 정신이다.
일본은 의외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의 역사적 흔적이 짙게 배인 곳이다. 1910년 5월 메이지(明治) 덴노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다는 혐의로 검거되어 26명이 처형된 이른바 ‘대역사건’(大逆事件)에도 일본 각지에서 수많은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가 관련되어 있었다. 특히 이 사건의 주동자 몰린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 1871-1911)는 기독교인이었던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尚江)나 이시카와 산시로(石川三四郎), 오키노 아와사부로(沖野岩三郎)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쳐 그들이 아나키스트로 살아가도록 이끌었다. 특히 이 대역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오키노 아와사부로 목사는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목사의 메이지가쿠인(明治学院) 선배로서 절친한 사이였으며, 이후 기독교사회주의의 실천가로서 서로를 격려했다.
1,000만 영화감독 이준익이 지난 2017년에 내놓았던 <박열>(朴烈)이라는 작품의 영어 제목은 ‘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Anarchist from Colony)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오스키 사카에(大杉榮)에게 영향을 받았던 박열은 일본의 여성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부부의 연을 맺고,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에 저항하며 천황제 국가의 부당한 권위와 지배를 향해서 근원적 질문을 던진 인물이다. 그는 이처럼 최근이 되어서야 ‘아나키스트’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조명되었다. 그러면 우리의 역사 속에서 아나키즘은 어떻게 존재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런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복음과 세계」 10월호는 ‘아나키즘과 기독교’라는 특집을 다루었다. 아나키즘과 기독교 사이에는 어떤 접점이 있을까? 먼저 토호쿠예술공과대학에서 가르치는 쿠리하라 야스시(栗原康)는 “그리스도 말살론–나사렛의 예수와 아나키스트”라는 글을 통해 앞서 소개한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의 저작 『基督抹殺論』(기독말살론)을 이 시대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고자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예수를 아나키스트로서 바라보며 성찰한 기독교 아나키즘의 가능성을 논한 것이다.
이어서 아나키즘 연구자 고이 겐타로(五井健太郎)가 “‘아직도 분리되어 있지 않은 세계’를 추구하며–기독교 아나키즘에 대하여”라는 글을, 평론가 코소 이와사부로(高祖岩三郎)는 “아나키즘의 임계점”이라는 글을 통해, 현대 세계에 눈을 돌려 지금 이 시대의 아나키즘이 직면해 투쟁 중인 임계점의 상황이 무엇인지를 고찰했다. 아울러 리츠메이칸대학의 오가와 사야카(小川さやか) 교수가 쓴 “자생적 질서를 만드는 법–홍콩의 탄자니아인에 의한 SNS를 통한 마당 형성”이라는 글은 아나키즘이 일상 속의 실천으로 자리매김하는 가운데 어떻게 자생적 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지를 사례를 들어 확인시켜주었다. 여성학자인 고토 아유미(後藤あゆみ) 씨가 쓴 “아나키즘과 페미니즘에 대한 깨달음”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아나키즘의 본질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면서 역사상의 여러 기독교 여성 아나키스트들의 투쟁들을 소개했다.
이러한 고찰들을 통해 기독교는 ‘아나키’(an-arche) 곧 무지배(無支配), 무기원(無起源)의 정신 바로 그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이며, 복음 안에 깃든 해방과 자유, 평등과 나눔에서 비롯된 치유의 공동체 실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자신 안에 깃든 ‘아나키’의 본성을 망각한 채, 아니 오히려 버린 채, 그것을 배반해 살아오지 않았는가를 되묻게 하는 특집이다.
한편 10월호에는 주목할 만한 책도 소개됐다. 최근 교토대학의 박사논문을 책으로 펴낸 야쿠시게 요시(役重善洋)의 『근대 일본의 식민지주의와 비유대 시온주의: 우치무라 간조, 야나이하라 타타오, 나카다 쥬지의 내셔널리즘과 세계인식』(近代日本の植民地主義とジェンタイル・シオニズム: 内村鑑三‧矢内原忠雄‧中田重治におけるナショナリズムと世界認識, インパクト出版会, 2018)이 그것이다. 시오니즘을 우리 안에 강하게 내면화한 적이 있는 우리의 기독교사를 돌이켜 볼 때, 참고할 만한 최근 연구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에 대해 메이지가쿠인대학(明治学院大学)의 와타나베 유코(渡辺祐子) 교수가 “일본 기독교사 연구에서의 중요한 질문들”이라는 제목으로 서평을 썼다.

홍이표 |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교토대학(京都大学)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공부하였다.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 탄고미야즈교회 주임목사, 교토대학 강사 등을 거쳐, 현재 메이지가쿠인대학(明治学院大学) 그리스도교연구소 협력연구원으로 있다. 『믿음의 흔적을 찾아: 일본 간토 간사이 편』(공저), 『신학을 다시 묻다』(번역서) 등의 저서가 있다.

 
 
 

2018년 12월호(통권 7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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