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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3·1운동 100주년]
교회와현장 (2018년 12월호)

 

  남장로교 군산스테이션과 3・1운동
  

본문

 

남장로교의 군산스테이션
남장로교의 군산스테이션은 1896년 4월 전킨(William M. Junkin, 전위렴)과 드루(Alessandro D. Drew, 유대모)에 의해 시작되었다. 전주(1895년 12월)에 이어 두 번째 선교 거점이 전라북도에 생긴 것이다. 특히 드루의 의료사역은 군산교회 성장의 기폭제가 되어 설립 1년 만에 40명 이상이 모이게 되었다. 1900년 당시 군산교회의 교인 수는 모두 110명이었고, 군산 부근에도 속속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자연히 이때부터 군산 교우 자녀들에 대한 학교 교육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교인 수가 모두 113명에 달했던 전주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1900년 9월 제물포에서 열린 제9차 연례회의에서 학교 설립을 주요 의제로 다루었다. 이미 그들은 내한 이전부터 “불신자는 전도하고 신자는 교육시킨다”(Evangelize the heathen and educate the Christians)라는 모토를 갖고 있었다. 즉 하나의 선교 구내에 교회와 병원, 그리고 학교를 모두 갖추어 전도 효과를 극대화시킨다는 것이 그들의 선교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남장로교 한국선교부는 군산에 구암교회・영명학교–멜볼딘여학교・군산예수병원, 전주에 서문교회・신흥–기전・전주예수병원, 목포에 양동교회・영흥–정명・프렌치병원, 광주에 제일교회・숭일–수피아・광주기독병원, 순천에 중앙교회・매산남–녀학교・알렉산더병원을 설치하고 운영했다. 물론 이것은 당시 서구 기독교 주류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선교 방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스테이션이 한국교회의 제도적 배후로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의 산실 역할을 담당했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군산의 3・1운동은 스테이션 구내에 있던 영명-멜볼딘의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주도했음은 물론 구암교회의 교인과 예수병원 직원들이 다수 참여하여 사실상 스테이션의 모든 구성원이 협력하여 이루어낸 항일운동이었다.
또한 군산과 더불어 익산과 서천, 그리고 강경의 3・1운동은 모두 군산스테이션과 긴밀하게 관련을 맺고 있던 교회와 학교의 구성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특징을 갖는다. 위 지역의 만세시위들은 ‘군산스테이션 경내(境內)의 민족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군산스테이션의 존재를 통해서만 그 운동들의 기원과 전개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에 주목하여 신앙을 통해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우국지사형 인사들이 스테이션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제시된 근대성에 매료되어 적극적으로 반응했던 결과이다.

군산 지역의 3・1운동
호남 최초의 3・1운동은 바로 군산에서 일어났다. 군산스테이션의 직영 학교인 영명과 멜볼딘이 그 주역이었다. 영명학교 고등과(2회, 1914년 졸)와 특별과(4회, 1916년 졸)에서 공부한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한 김병수는 세브란스병원 약제실에서 근무하던 이갑성을 통해 3・1운동 거사 계획을 알게 되었다.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었던 이갑성은 김병수를 군산 지방 연락책임자로 하여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군산에 내려온 김병수는 2월 26일에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를 만나 서울 지도부의 뜻을 전달하였다. 이에 박연세는 영명의 교사들과 상의한 후 이 운동에 적극 호응하기로 하였다.
영명의 민족운동은 김인전과 박연세, 그리고 문용기와 고석주 등 우국지사적인 교사들의 가르침이 그 배경이 되었다. 즉 김인전은 평양신학교 재학 중 영명에서 3년 동안 교편을 잡은 후에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로서 전주 3・1운동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저명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리고 을사늑약 때 호남에서 거병한 의병장 김준의 외손인 박연세는 군산 3・1운동의 주역일 뿐만 아니라 목포 양동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순국한 애국지사이다. 문용기(문정관)는 익산 3・1운동의 지도자로 1919년 4월 4일 만세운동 현장에서 희생된 독립운동가였다. 멜볼딘의 교사 고석주는 3・1운동과 관련해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요컨대 영명과 멜볼딘의 교사 대부분은 신앙을 통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전형적인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항일정신은 영명과 멜볼딘의 학생들에게 충분히 계승, 고취되었으리라고 본다.
군산의 만세시위는 원래 장날인 3월 6일에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전날인 3월 5일 낌새를 알아챈 일경 10명이 영명과 멜볼딘을 급습하여 학교 건물 안을 샅샅이 수색하고 박연세, 이두열 선생을 체포해 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제2선에서 보이지 않게 활동하던 영명의 김윤실 선생은 곧바로 학생회 임원회의를 소집하여 당일인 3월 5일에 시위하기로 긴급히 결정했다. 계획보다 하루 앞당겨진 것이다.
그리하여 영명과 멜볼딘의 학생 100명, 교사 및 예수병원 직원 40명 등 총 140여 명이 운동장에 모였다. 그리고 곧바로 전세종, 양기철, 송기옥, 이도준, 홍천경, 고준명, 유복섭, 강규언, 강인성 등의 영명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교사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모두 한 목소리로 만세를 외치며 대열을 이뤄 군산 시내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합세하여 500여 명의 군중이 군산경찰서까지 진출하였다. 당황한 경찰은 익산의 헌병대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헌병의 사격으로 대열 앞에 서 있던 3-4명이 쓰러지자 군중들은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때 만세운동 현장에서 검거된 사람은 고석주 선생 등 90여 명으로 대부분 영명과 멜볼딘의 교사와 학생이었다.
거의 모든 교사와 학생이 거사에 나섰던 영명과 멜볼딘은 3・1운동 이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두 학교의 수업은 전면 중단되었으며, 교사들은 만세운동과 관계가 있든지 없든지 전원 조사를 받았다. 예수병원 직원들도 전원 구속되면서 운영이 마비되었다. 최종적으로 박연세 선생 등 교사 4명이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의 실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양기철 등 학생 11명이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영명중학교의 특별과(전문대학 과정)는 3・1운동으로 인하여 전격 폐지되고야 말았다.

익산 지역의 3・1운동
익산의 3・1운동은 남전교회와 그 부속 도남학교와 깊은 관련을 맺으며 전개되었다. 남전교회는 1900년 봄에 오산면 남전리 이윤국 영수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1901년에 초가 5칸의 예배당을 마련했고, 또 1910년에는 도남학교를 운영하여 마을 아이들을 교육했다. 당시 남장로교 선교부는 개교회 부속의 초등과정 학교(church school 또는 other school로 표현) 설립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한편 그 학교 교사의 봉급 절반을 지원하고 있었다. 또 교사들은 대부분 스테이션 직영의 미션스쿨 고등과 출신이었다.
익산의 3・1운동, 즉 4・4솜리만세시위는 단일 교회가 주도한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이다. 1878년생인 문용기는 남전교회의 초기 교인으로, 24세에 영명학교의 한문 교사로 재직한 바 있다. 아마 윌리엄 전킨이 그의 성리학적 소양을 눈여겨보았다가 학교 운영에 동참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 그는 이례적으로 영명학교의 교사이면서 동시에 학생으로 보통과 과정을 이수하였다. 역시 영명학교 보통과 초기 졸업생인 박연세의 재학 기간이 1904-05년인 것으로 보아 문용기가 그에게 한문을 가르쳤을 가능성이 크다. 박연세는 그 후 학업을 계속해 1913년 영명학교 특별과를 2회로 졸업한 후에 모교의 교사로 근무하면서 제자 김병수를 세브란스의학교로 보내 군산 3・1운동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김병수는 후에 익산 만세시위에도 직접 참여하였다. 1919년 당시 남전교회에 출석하며 도남학교 교사로 일하던 문용기는 이러한 남장로교 군산스테이션의 네트워크를 통해 3・1운동에 대한 소식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문용기는 먼저 거사일을 4월 4일 솜리[裡里] 장날로 정한 후 남전교회의 직분자와 도남학교 학생 중 상급생 수명을 선발하여 동참시키기로 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미 3월 초에 김병수로부터 전해 받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가 있었지만 그에 더해 수천 장을 더 만들기로 하고 극비리에 교회 가까이에 있는 교인들 집에서 숙식까지 하면서 꼬박 사흘 동안 작업했다고 한다.
4월 4일 오전, 하얀 한복을 입은 성도들이 교회 안마당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정오 무렵 이리역 광장으로 진출하였다. 그 사이 군중의 수는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12시 30분 흰색 두루마기 차림의 문용기가 그 앞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난 후 문용기의 선창으로 독립만세 구호의 함성이 외쳐지고, 이어서 시가행진이 전개되었다. 그러자 헌병들의 실탄 사격이 시작되었다. 대열의 앞에 섰던 남전의 교인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이때 문용기는 일본 헌병의 긴 칼에 의해 태극기를 흔들고 있던 오른팔이 먼저 절단되었고, 다시 왼팔마저 잘려나갔다. 그리고 쓰러진 그를 향해 재차 무차별 폭력이 가해져 결국 그 자리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당시 문용기가 입고 있던 두루마기와 저고리는 선혈의 자국을 남긴 채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때 남전 교인이었던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역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그 외에도 김병수와 장만준 등 다수의 교인이 총상을 입거나 곤봉과 갈고리 구타로 인해 부상을 입었다. 살아남은 교인들은 일제의 집요한 체포 압력으로 모두 몸을 피해 멀리 떨어진 친척집이나 만경강의 무수한 갈대숲, 강 건너 김제 땅 번드리로 뿔뿔이 흩어져 은신해야만 했다. 남전교회는 그 후 거의 1년 동안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지금 익산에는 그들을 기념하는 추모비가 오산면사무소와 익산시장, 그리고 익산역 광장 등 세 곳에 조성되어 있다.

서천 지역의 3・1운동
1903년 봄부터 충남 서천 지역 선교를 시작한 군산스테이션의 선교사들은 그 후 15년간 화산교회를 포함하여 모두 18개의 장로교회를 세웠다. 서천의 3・1운동은 바로 이 교회들의 교인들이 주도하였다. 그 시작은 금당리교회 집사 조남명이었다. 군산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그는 3월 4일 유재경에게 독립선언서를 빌려 보았고, 6일에 화양면 구동리 이근호의 집에서 구동교회의 이근호와 한백희, 최경진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면서 어린 학생들이 국사(國事)를 위하여 지금 군산경찰서에 유치되어 조사를 받고 있으니 자기들도 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7일에는 이들과 함께 기산면 화산리 이경욱의 집에서 화산교회의 이경욱과 정희석에게 동일한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곧 일경에 발각되었고, 그는 3월 8일에 붙잡혀 서천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다시 서천의 마산 신장리에서는 3월 29일 송기면(완포교회)의 주도하에 기독교인 유성열(종지교회), 이근호(구동교회), 임학규(완포교회), 이동홍(완포교회) 등이 새로 생긴 장터에서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중 송기면, 임학규, 이근호는 김인전이 화양면 와초리에 세운 한영학교 출신으로, 이 학교는 1916년 폐교되어 군산 영명학교에 흡수된 바 있다.
송기면은 3월 23일에서 27일 사이에 자택에서 태극기 200장을 제작한 후, 28일에는 유성열, 이근호, 임학규를 방문하여 29일 장날을 이용해 독립운동을 실행하기로 논의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29일 오후 1시경 송기면과 유성열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송여직(완포교회)과 다른 인사가 군중에게 연설을 하여 독립만세운동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이에 이한규 등 몇 명의 순사보는 송기면과 유성열을 체포하고 이어 송여직을 연행하였다.
그러자 나상준과 이근호가 군중을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부르며 경찰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일경들은 이들마저 체포하면서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중은 2,000여 명까지 불어났다. 일경에 체포되지 않은 나머지 인사들은 구금된 인사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주재소를 공격하자고 설득하였다. 고시상, 양재흥, 박재엽, 김인두는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로 가서 창문과 유리창을 부수었고, 정일창은 군중의 뒤편에서 주재소 파괴를 적극 격려하였다. 또 이승달은 군중의 후미에서 옥에 갇힌 인사들을 탈출시킬 때까지 해산하지 말도록 군중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 결과 송기면 등 체포된 인사 6명은 탈출할 수 있었지만, 종래에는 모두 다시 잡히고 말았다.
이 만세운동으로 두 건의 재판이 시행되었다. 송여직(31), 나상준(20), 고시상(36), 이동홍(29), 양재홍(26), 박재엽(26, 완포교회), 정일창(21), 김인두(23, 구동교회, 일광학교 교사), 이승달(22, 한산 송곡, 기독교인)은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송여직 징역 1년 6월, 나상준 징역 1년, 고시상과 이동홍 징역 5년, 그 밖에 양재홍 등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중에서 송여직, 나상준, 고시상, 양재홍, 정일창은 곧 다시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고시상 한 사람만 3년 3월로 감형되었을 뿐 나머지는 그대로 판결을 받았다.
다른 재판에서 송기면(25), 유성열(60), 이근호(30), 임학규(22)는 공주지방법원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경성복심법원에서는 송기면 징역 1년
6월, 나머지 세 사람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다시 상고하였으나 역시 기각되고 말았다.

<서천군의 장로교회 상황>
그림파일 참고

강경지역의 3·1운동
부여의 장로교회는 양화면 초왕리의 고내수에 의해 1905년 봄에 시작되었다. 그는 1903년부터 40리 길을 걸어 서천의 화산교회에 출석하다가 군산 선교사 윌리엄 해리슨(William B. Harrison, 하위렴)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당시 교인은 65명에 달했는데, 바로 그 해에 새로운 예배당을 지었을 뿐 아니라 7월에는 무려 51명이 세례문답에 참여했다. 그리고 1906년에는 초왕교회에서 청포리교회가 나오게 되었고, 그 후 13개의 장로교회가 부여군에 세워졌다.

<부여군 장로교회 상황>
그림파일 참고

강경 3・1운동의 주력은 바로 1906년 부여군 세도면에 세워진 청포리교회이다. 원래 청포리 사람 백공덕, 오기선, 정영태 등은 30리 떨어진 초왕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기 마을 사람들을 전도하여 신자들이 늘어나자 1906년 3월부터 장만종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청포리에 교회가 설립되자 신자는 금세 20여 명으로 늘어났고, 1년 후 교인들의 헌금으로 망개마을 언덕에 6칸짜리 초가집 예배당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예배당 건립 직후 청포리교회 교인들은 군산스테이션의 지원을 받아 교회 부설학교로 창영학교를 설립하였다. 근대 교육을 실시하여 복음 전파의 품질을 한 차원 제고시킨다는 선교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것은 민족 계몽을 통해 구국의 길을 걷고자 했던 당시 민족주의자들의 절절한 호응의 결과이기도 했다. 군산스테이션은 1912년 당시 서천과 부여에 모두 9개의 교회 부설학교를 설립 및 지원하고 있었다. 교육 과정과 교사 인력, 그리고 그 임금의 절반은 스테이션의 몫이었다. 창영학교 설립자는 정영태, 교장은 윌리엄 불(William F. Bull, 부위렴) 선교사였고, 소학교 과정으로 정원은 50명이었다. 창영학교는 1909년 가을 강경 황산교회의 창흥학교를 비롯한 인근의 9개 학교와 어울려 연합운동회를 하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했듯 강경 3・1운동은 금강 건너 부여 땅의 청포리교회가 주도했다. 강경에서 황산나루로 강을 건너면 바로 부여군 세도면 청포리 망개마을이 나오고 그곳에 있는 청포리교회의 창영학교에서 구체적인 모의와 준비가 진행되었다. 그 중심에는 창영학교 교사 엄창섭(1892-1973)이 있었다. 그는 본래 금강 하류에 위치한 익산군 웅포면 대붕암리 소재 대붕암교회(현 제석교회) 출신으로 군산스테이션의 추천을 받아 청포리 창영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1919년 3월 5일 저녁에 고향 대붕암리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대붕암교회 교인이자 군산 영명학교 학생이었던 강금옥을 만나 당일 오후에 있었던 군산 3・1운동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튿날 청포리로 돌아온 엄창섭은 만세시위의 뜻을 굳히고 바로 동지를 포섭하여 고상준과 추병갑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들은 청포리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큰 강경 읍내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고, 3월 10일 강경 장날을 거사일로 하였다. 엄창섭은 3월 8일 강경시장에 직접 가서 태극기를 제작할 조선종이 60매와 염료를 구입하였다. 3월 9일 저녁 엄창섭과 고상준, 추병갑 등이 창영학교 교실로 사용되던 청포리교회 예배당에 모여 태극기를 제작하려는데,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태극기를 그릴 수 있는 김종갑, 추성배, 백칠용 등을 포섭하여 태극기 200매를 제작하고, 그것을 가마니에 넣어 서삼종으로 하여금 거사 당일 오전 강경 옥녀봉에 숨겨 놓도록 하였다.
만세운동을 위한 사전 준비를 마친 엄창섭 등은 3월 10일 아침 일찍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 강경읍에 도착하여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때 정근섭과 한규섭이 동참하였다. 이어 엄창섭, 고상준, 추병갑, 정기섭, 서삼종, 강세형, 윤동만 등과 군중은 오후 3시경 옥녀봉으로 집합하였다. 엄창섭은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흔들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만세를 외치면서 옥녀봉에서 내려와 강경읍 웃장터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많은 사람이 그들 쪽으로 몰려왔다. 또 시장에 있던 김종갑, 추성배, 한규섭도 다시 가세하여 군중이 수백 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한국독립만세’라고 쓴 종이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일본인 거주지인 본장통(本場通)을 경유하여 시장과 읍내 각처를 행진하였다.
이 만세운동으로 엄창섭(28), 고상준(20), 추병갑, 강세형(21), 윤동만(22), 정기섭(22), 서삼종(22), 김종갑(24), 추성배(19), 한규섭(22)은 공주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고(1919. 4. 14.), 경성복심법원에서 엄창섭 징역 2년, 고상준과 추병갑 징역 1년, 강세형, 윤동만, 정기섭 징역 8월, 김종갑과 추성배 징역 6월, 서삼종과 한규섭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당시 청포리교회 장로 김진규는 만세를 부르던 중에 체포되었는데 “한국이 독립된 줄 알고 만세를 불렀다.”라고 해서 석방되었다.


송현강 | 한남대학교와 전주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공부(문학박사)하였다. 저서로 『대전・충남 지역 교회사 연구』, 『미국남장로교 한국선교역사 연구』, 논문으로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부’의 목포 스테이션 설치와 운영(1898-1940)” 등이 있다. 현재 한남대 인돈학술원 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2018년 12월호(통권 7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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