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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18년 12월호)

 

  오만, 고난, 겸손, 그리고 희망
  -한반도의 평화 및 화해 정착을 위한 근본적 패러다임의 시급한 전환

본문

 

* 이 글은 한국YMCA전국연맹이 주최한 세계평화대회(2018 World Peace Conven‐tion)에서 한 기조강연(인천 하버파크호텔)이다. 세계평화대회는 문화관광체육부의 후원으로 2018년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인천, 철원, 서울에서 열렸다. 강연자는 템플대학교 동경캠퍼스 초빙교수로 한국 및 동북아시아 정치학을 강의하고 있다. - 편집자 주

감사의 말
신사 숙녀 여러분, 존경하는 참가자 여러분, 먼저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도록 이 자리에 초대해주신 세계평화대회 조직위원회 측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부족한 제가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과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또한 이 자리에서 함께 대화하고 식견을 나눌 수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더불어 동북아시아, 특히 한반도의 평화를 모색하고 발전시켜 마침내 평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함께 인내하고 서로 길잡이가 되어주실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발표 내용의 범위 및 요지
저는 발표 내용의 제목을 “오만, 고난, 겸손, 그리고 희망”이라고 정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미국을 포함해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강대국들이 한국인의 삶과 운명을 결정하는 이 역사적인 시기에 현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방식, 나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국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고난을 딛고 일어나 진실로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한민족의 소망과 대화, 화해, 평화유지를 향한 열망에 기반을 둔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기회가 무르익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기존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태동되고 지속되었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와 화해를 바탕으로 도약하는 한국의 미래가 기존의 패러다임에 의해 좌절될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변화하는 순간 앞에서 우리는 역사를 이해해야 할 당위적 필요가 있습니다. 패러다임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한국인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결정을 함에 있어 더 강하고 보다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한국인의 의지가 외면당하는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면 우리는 “강한 자에게 진실을 말하는”(우리가 퀘이커 신앙서약에서 말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정착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이해 당사자들의 역할을 인식하는 한편, 미국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들이 지속적으로 행사하려는 오만함의 정도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들 강대국들의 말과 행동으로 볼 때 그들이 한국의 미래에 대한 결정을 한국인들에게 맡기고 싶어 하지 않으며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한다고 단정짓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역사를 알면 지금까지 확산된 패러다임은 여전히 “운전석에 앉는 것”, 즉 전략적 계산, 적대주의 그리고 전쟁 수행 능력에 초점을 맞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그 구성 요건들이 적절히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보다 효과적인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전략적 계획을 수립하고 시나리오를 구상해낼 수 있습니다. ‘신속 정확한 공격’(surgical strikes)이나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가 아닌 큰 틀에서의 전략적 계획과 시나리오를 만들어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가 지속되고 성장해갈 수 있는 구조를 정교하게 구축할 수 있습니다.
평화를 향한 한국의 비전은 전시체제의 종식을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담보한 채 위태로운 전시체제의 종식 또는 ‘적대세력의 부재’를 평화로 간주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현재의 패러다임에서 ‘안보’라는 개념은 왜곡된 불안을 양산시킵니다. 이를테면 양측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력은 이러한 무기의 필요성을 사전에 줄이는 정치력을 가진 외교를 대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를 오늘 이 자리에 있게 한 역사와 패러다임에 대해 말씀드린 후 저는 대안적 패러다임의 구성 요소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는 신뢰구축 조치, 다면적 교류, 외교적 관계, 한국전의 종식을 의미하는 종전 협약, 그리고 안정성을 증진시키고 일방적 위험을 방어하는 경제협력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독재를 타도하고 군부정권을 몰아내어 마침내 ‘서울의 봄’을 일구어내기까지 한국인들이 오랜 시간을 끈기 있게 인내해온 것처럼, 평화를 향한 우리의 열정은 승리할 수 있고 또 반드시 달성되어야 합니다. 엄청난 고난과 값비싼 희생을 치르면서 한국 국민들은–영예롭게도 제가 함께했던 분들의 리더십에 따라–포용적이고, 대의적 민주정치를 뿌리내렸고 이를 바탕으로 인권 신장과 법치주의를 대한민국에 공고히 세웠습니다. 우리는 한국 국민의 성취하려는 다음 목표–억지로 분단된 한반도와 한민족의 통일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속도와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에 적극 공감하고 있습니다.

“클라우제비츠를 거꾸로”–강대국의 경쟁, 간섭, 그리고 전쟁 역사의 종식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주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먼저 “오만 vs 겸손”이라고 제목을 붙인 내용에 대한 배경 설명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짚어보겠습니다.
이웃 나라 중국에서는 1849년에 시작된 아편전쟁에서부터 1949년 중국 내전이 끝났을 때까지 100년 간을 일컫는 ‘치욕의 한 세기’를 반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구호로 여겨집니다. 중국은 서구 제국주의의 침입, 영향력의 쇠퇴, 그 이후 국력을 재정비하고 자긍심을 다시 세우기도 전에 일본에 의해 자행된 악랄한 전쟁으로 인해 진정으로 치욕스러운 시절을 견뎌야 했습니다. 우리는 중국이 역사의 교훈을 성찰함으로써 당시 그들이 견뎌낸 고통과 수모를 자국민이나 다른 민족이 겪게 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서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채 되지 않는 과거인 ‘전쟁의 세기’에 대해 주의 깊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계속된 청일전쟁에 이어 1904년부터 1905년까지는 러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두 전쟁은 모두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강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 역사적 격랑 가운데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의 손아귀에서 고통받으며 문화적 치욕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에 굴하지 않고 저항했습니다. 민족 자결과 독립을 외치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던 3월 1일 만세운동은 잔인하게 진압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병이 되어 싸웠습니다. 그 후 한국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병참이 되는 비극적 숙명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식민 압제로부터의 ‘해방’은 아시아에서 냉전의 제1막으로 묘사되는 사건인 한반도의 분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미국이 제안했던 ‘일시적 분단상태’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이 참여하게 됨으로써 영속적인 ‘일시적’ 분단이 되고 말았고, 이 상태가 지난 73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남한이 미군 사령부의 통치를 받았던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내전이 계속되었고, 결국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도 끈질기게 지속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은 냉전이 열전이 된 첫 번째 사건이기도 합니다.
3년 동안 어마어마한 희생과 끔찍한 고통이 따랐던 한국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휴전협정으로 총소리는 멈추었지만 1953년부터 65년 동안 적대행위와 값비싼 군비 경쟁, 그리고 서로 다른 두 국가로 살게 되었고, 전시체계에 기반한 사회구조가 만들어졌으며 신뢰는 무너지고 서로를 주적으로 설정했으며 양쪽 모두 내부의 압제정치를 호전적 대치 상황으로 정당화하며 적대감을 고조시켜 갔습니다. 결국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상황까지 비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계속해서 긴장이 고조되고 실제 전쟁 가능성까지 고려되었던 1976년, 1994년, 그리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2017년의 상황이 그러한 실례가 되겠습니다. 요약하자면 한국인과 한반도는 거의 125년 동안 일종의 전쟁을 겪었던 셈입니다. 또한 많이 늦기는 했지만 이 비극적인 전쟁 상태를 끝내고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역사적인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프러시아의 장군이었던 그는 널리 읽힌 영향력 있는 저서 『전쟁론』(On War)을 200년 전에 썼습니다. 지난 40년 이상 한국을 알고 연구하면서 제가 자주 강조했던 것은 한반도의 전쟁 상태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미국의 안보 전략가들과 정책 결정자들이 수립하여 현실화된 것으로, “클라우제비츠를 거꾸로”(Clauswitz on the head)라는 표현이 적합합니다. 그 의미를 설명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왜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말을 인용하는지도 말씀드리겠습니다.
클라우제비츠는 자주 인용되는 그의 말 “전쟁은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외교의 연장”(War is but an extension of diplomacy by other means)과 “전쟁은 단지 정치적인 행위일 뿐 아니라 동시에 실제적 정치 수단이며 정치적 거래의 연속이며 다른 수단을 사용해 같은 목적을 실행하는 것이다.”(War is not merely a political act, but also a real political instrument, a continuation of political commerce, a carrying out of the same by other means)로 명성을 얻었습니다.(On War, Book 1, Chap. 1, 24, J. J. Graham 1873 translation)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외교의 연장”이라는 부분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에도 한반도는 지속적인 전쟁 상태, 즉 언제라도 적극적 호전행위를 개시할 수 있는 준비와 계산된 역량, 핵무기를 포함해 실제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안보역량에 집중하는 상태였습니다.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외교의 연장”은 지속적인 전쟁 상태이며 외교가 완전히 부재하는 것과 유사한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외교적 노력을 시도한다면 클라우제비츠가 했던 말과 정반대, 즉 ‘전쟁이 외교의 연장’이 아니라 ‘외교가 전쟁의 연장’이어야 합니다. 전쟁이 ‘운전자석에서 앉아’ 있었습니다. 전쟁이 지배적인 패러다임이었습니다. 외교는 단지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의 연장으로서 부분적인 노력을 하고 뒷북의 역할만 했을 뿐입니다.
‘오만과 겸손’이라는 제목의 제 발표가 패러다임과 연결되어 있는 만큼, 또한 한국의 준전시 상태에 대한 전략적, 정책적 의사결정을 고려할 때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의 패러다임을 건설하는 진정한 평화의 미래를 향한 우리의 노력이 이와 무관하지 않은 이유로 잠시 후에 패러다임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만 vs 겸손–패권주의 의사결정의 오만을 넘어서
2017년 내내 미국은 북한에 대해 선제공격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것이 멀지 않았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다 올해 1월부터는 이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극적 반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도발적인 전쟁광적 분위기에서 한국과 북한, 중국, 미국이 참여하는 여러 차례의 정상회담으로 방향이 바뀌자 우리들과 세계인들은 안도의 숨을 쉬며 보다 합리적인 접근법인 대화를 통해 한반도가 전시체제에서 보다 안정적인 위상을 갖게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1년 전에 걱정했던 상황의 급작스러운 전환을 조심스러운 낙관론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동시에 어쩌면 정말로 평화의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겠다는 바람도 가져봅니다.
우리는 현재까지 희망적인 대화가 진행되는 올 한 해를 축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거와 같은 패러다임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과 한반도를 둘러싼 관계에서 앞으로의 변화에 대해 반대하는 저항세력으로 인한 방해의 위험, 과거로의 후퇴 등에 유념해야 합니다.
조금 전에 저는 한국 역사에서 지난 125년 동안 우리를 가둔 전쟁의 프레임을 여러분께 상기시켰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렸던 “강자에게 진실을 말한다”는 정신으로 한국을 지배하고 결정권을 갖고 싶어 했던 주요 강대국의 태도에 초점을 맞춰서 한국 역사의 다른 측면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비난이 목적은 아닙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계속되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주변 강대국들의 태도를 볼 때, 이를테면 미국, 일본, 기타 다른 나라들이 한국을 대하는 자세는 패권주의적 의사결정이라는 거만함으로 특징지을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은 이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고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제정 러시아와 중국의 청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몇 년 전에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일본과 전쟁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그 결과 한국을 보호국으로 지정하는 을사보호조약이 1905년에 체결되었으며, 이어서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됩니다.
1905년은 또한 미국이 한국의 운명에 간섭하는 파란만장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해였습니다. 그날의 기억은 벌써 1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비극적 장면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미래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묵은 과거를 다시 들추어내기보다는 간략히 몇 가지 사건만 정리해도 충분할 듯합니다.

• 1905년 가쓰라 테프트 밀약–일본이 (1898년부터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대한 대가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고 궁극적으로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의도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든 일본을 인정함.
•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미국은 1905년에 맺은 보호조약에 따라 한국의 외교 관계에 대한 권리를 일본에 넘겨주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 민족주의자 대표단 파견을 거절함으로써 일본과 공모.
• 미국의 제안–소련이 8월 8일부터 일본과 새롭게 전쟁을 시작하여 한국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을 것임을 인지한 미국은 스탈린에게 미국과 소련이 “일본의 항복을 수락하고” 북위 38도를 경계로 남, 북으로 한반도를 “일시적으로 분할하여” 주둔하자고 제안.[딘 러스크(Dean Rusk)와 찰스 보네스틸(Charles Bonesteel) 대령은 한국에 적절한 선을 고르라는 명령을 받은 후 8월 10-11일 수도 워싱턴에서 위도 38도 선을 제안함.]
• 미국 군사정부 수립(1945-48), 극우 보수주의자 이승만을 세워 진보 및 좌익성향의 정치 성향을 가진 진영을 적극적으로 탄압, 초기의 자치정부 수립 요구 거절.
• 1961년 박정희 장군의 쿠데타를 암묵적으로 용인. 유신헌법(1972-79) 체제에서 갈수록 심해지는 독재통치 시기조차도 박정희 정권을 지원.
•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이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군사적으로 진압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당시 광주 시민위원회 측이 미국이 평화적 해결책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개입 거절.
• 광주 항쟁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전두환 정권을 지지. 1981년 전두환을 국빈 자격으로 레이건 대통령을 방문하도록 초청함.


이 밖에도 인용할 수 있는 것이 많지만 앞에서 열거한 역사적 사례만으로도 미국은 한국 국민의 국익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면서 가시적인 자국의 이익을 추구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면 최근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를 참여시키지 않은 채 한국 땅에서의 심각한 군사행동에 대해 검토했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1994년 미국은 북한에 대해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취하기 일보 직전까지 긴장을 몰고 갔으며, 최근 사태로는 2017년 미국이 북한에 대해 선제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언급으로 비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국의 전쟁 가능성은 분명히 실제로 존재했으며, 만약 미국이 북한에 대해 독자적 군사행동을 감행했다면 현 문재인 정부는 이를 거절할 수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같은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오만’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미국의 국가 이익을 위해 한국 국민이 바라는 것을 무시하는 미국의 태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동맹국 한국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표명하는 한국인의 희망이라고 해도 미국의 결정이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반도의 두 나라인 남한과 북한이 대화를 모색하고 화해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강대국의 오만함이 여전히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앞으로 몇주, 몇달, 혹은 몇년 동안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한쪽에서는 문 대통령을 ‘미국과 북한 간 협상의 중재자’로 높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세 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대북 압박을 가하는 문제에 대한 타협책을 찾는 과정에서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경제지원을 비롯한 기타 조치를 통해 화해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한다는 합의에 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그리고 조금 후에 말씀드릴 일본)은 북한에 대해 ‘최대한의 압박’을 지속하겠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의 역사와 문화적 전쟁을 일으켜 온 장본인으로 ‘오만’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일본 정부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강제로 동원한 소위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회피와 공식적 책임의 부인이 아니라 정직하게 인정하는 일을 포함하여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응하는 것이 그 출발점일 것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납북자 문제는 일본에게는 당연히 중요한 문제이겠지만, 그 문제가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을 피할 수 있게 하는 평화정착과 화해에 걸림돌이 되게 하는 일은 일본 정부의 오만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만의 반대는 ‘겸손’입니다. 오만은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국제 관계에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반면에 겸손은 밖으로 부각되지는 않지만 그들의 결정이 잘못될 수도 있고 따라서 재검토를 통해 수정되어야 함을 진실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그 나라의 약점으로 인식되기보다 오히려 국격을 보여주는 힘의 상징으로 높임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만한 태도는 공허한 오만의 상징으로 인식될 뿐입니다. 일본이 평화로운 미래를 염원한다면 한국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숙고해야 한다고, “강자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아슬아슬한 역사적 기회를 앞에 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외침에 일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우리의 노력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비핵화된 한반도를 향한 발걸음–역사적 맥락과 미래를 향한 현실적 방안
2018년 판문점 그리고 평양 선언의 정신에 따라 평화적인 화해를 모색함에 있어 한국전 종식과 같은 중요한 문제의 진행 방향은 북한의 핵문제 해결 방식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북한이 핵무기 제조 능력을 획득하고 핵무기 발사 수단의 소형화에 성공함에 따라 주변국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세계는 우려의 시선으로 이를 지켜보았습니다. 이제 전 세계는 이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희망에 동참하며 그 노력의 일환으로 전쟁의 역사적 맥락과 자국의 미래를 한국인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옳다는 관점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또한 시급한 핵문제에 대해서 전후관계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더불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간단한 질문과 배경 설명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왜 국가들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하려고 노력할까요?
둘째, 1970년대 중반에 한국이 자체적으로 핵 보유를 추진했던 배경은 무엇인가요? 한국은 왜 그 계획을 중도에 포기했을까요?
셋째, “핵으로 가려고” 했던 한국의 시도를 숙고해보면 1990년 초반 북한이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도입한 이유를 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넷째, 핵무기의 전격적인 개발을 방지하고자 체결된 미북 간의 핵동결 협약(1994)과 이에 관한 여러 노력이 깨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북한이 비난받아야 할 일입니까? 그 일련의 과정과 실패에 대하여 두 나라의 정책 변화와 노선 철회를 양측의 입장에서 공정하게 다루기보다는 북한의 행동만을 강조한 언론의 설명은 정확합니까?
다섯째, 유엔이 채택한 국제적 제재조치는 북한을 일방적 비핵화과정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으며 많은 국가들이 그와 같은 제재를 통해 북한이 결국은 비핵화를 천명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정확한 주장일까요? 아니면 북한에 새로운 젊은 지도자가 집권함에 따라 한국이 실제로 역사적 기회의 순간을 맞고 있다는 인식이 있었을까요? 나아가 ‘최대한의 압박’을 지속한다는 전략이 실제로 의도했던 성과를 달성하고 있을까요?
여섯째, 북한이 핵무기 보유 능력을 추구하고 성공하게 된 근본 원인에 대해, 또한 최근에 북한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철저한 비핵화 과정을 이행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을까요? 비핵화를 실천하고 성공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요?
일곱째, 미국이 보유한 세계 최고의 선진 핵 능력이 지속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선제공격은 없다”는 정책적 선언을 거부하는 방침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이 위협적이고 공격적인 무력 과시를 계속하는 가운데 북한이 일방적 비핵화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 북한의 안보와 안전에 대해 어떤 보장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핵화를 향한 의지와 그에 상응하는 호혜적 조치가 있을까요? 미국은 그들이 보유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이나 핵무기를 줄이거나 완전 폐기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덟째,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유엔 제재조치에 대한 팽팽한 의견 대립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북한이 현재까지 보여준 노력에 대한 대가에 상응해 유엔의 제재조치를 점진적으로 완화시켜 앞으로 북한이 선의에 기초해 비핵화 과정으로 이행해간다는 약속을 계속 추진해나가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가 검증될 때까지 ‘최대한의 압박’ 기조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북한이 보여준 명확한 의지와 선의를 어느 쪽이 반영하고 있을까요? 만약 대북 경제지원에 암묵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제재조치의 완화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한국이 주장한다면, 다른 쪽에서는 계속해서 그럴 수 없다고 주장할까요?
이 각각의 의문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시간은 없지만, 우리 모두가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에 대하여, 특히 북한 핵 프로그램의 성공적 완성에 따른 영구적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이는 핵심적인 질문들입니다.
첫째, 일반적으로 국가는 대체로 타국의 공격 위협을 견제하는 잠재적 억지 수단으로 핵 능력을 개발하고 강화합니다.
둘째, 한국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 당시 패전의 기미가 확실시되고 결국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남베트남을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빼앗기게 되었을 당시, 핵심 우방국인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과 안보에 대한 신뢰가 깨어졌고 그 당시 자체적인 핵 능력을 보유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만약 한국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계속 추진한다면 미국에 의한 안전 보장은 번복될 것이라는 미국에 의해 이 같은 한국의 핵무기 개발 노력은 결국 저지되었습니다. 여기서 ‘안전 보장’이 갖고 있는 의미를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간 것은 1989년 후반부터 1991에 걸쳐 구소련과 그 동맹국들이 붕괴된 시점이었습니다. ‘핵우산’을 상실했다고 판단한 북한은 미국이 갖고 있고 한반도에 배치한 공격적인 핵 능력에 대한 억지력을 확보할 당위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한국전쟁 기간을 포함해 1950년 10월부터, 즉 북한 정권의 존립 초기부터 핵 공격에 대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위협에 직면해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인지했던 위협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포함됩니다.

• “허드슨 하버 작전”(Operation Hudson Harbor)에서 미국의 B-29 전폭기가 북한의 수도인 평양 상공에서 ‘모조 핵탄두’를 투하하였는데 이는 북한을 위협하기 위한 계산된 작전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지 5년 후였고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몇 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음.
•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비롯한 인접국인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소련 극동에 원자폭탄을 사용할 계획을 수립하고 미국 본토에 위치한 시설물에 있는 원자폭탄을 괌과 오키나와로 수송하였음. 당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였는데, 이는 맥아더 장군이 북한과 주변 공산국가에 대해 핵무기 공격을 선호하며 사용할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함.
• 미국의 방어체제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의혹과 우려는 수천 개에 달하는 북한의 주요 정부시설 및 안보시설이 깊은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임. 이는 아마도 미국의 원자/핵 무기 공격의 위협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일 수도 있을 것임.
• 대략 1957년부터 1993년까지 한반도에 배치된 유일한 원자/핵 무기는 미국의 것이었고 모두 북한을 목표로 하고 있었음.
• 미국이 보유한 무기는 수량도 많고 지상, 해상, 공대지 미사일에서부터 휴대할 수 있는 ‘데이비 크로켓’과 같은 2-3인용 전장무기에 이르기까지 발사 메커니즘도 다양함. 만약 무력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면 데이비 크로켓은 사용될 가능성이 훨씬 높음. 전투 현장의 지휘관은 그 핵무기를 적군에게 빼앗기느니 사용하라고 명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임. 따라서 전쟁터에서 핵무기 사용의 문턱이 훨씬 낮아지게 될 것임.
• ‘중성자 폭탄’의 제작자는 한국에서 그가 직접 본 지형에 따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음.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폭탄은 향후 사용될 구조물은 파괴하지 않고 생명체만을 살상할 수 있다고 함. 이 폭탄은 북한의 지하시설에 대해 사용될 가능성이 있음.
• 2017년 미국 정부 및 군사 발표에서 보듯이 미국의 전략군 병력은 북한을 목표로 근접 비행 시간 이내로 상시 배치되었으며, 미국 총사령관의 말을 빌리면 북한 전역을 초토화할 수 있도록 “바로 공격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고 함.


말씀드렸듯이 북한 정권은 집권 기간 대부분에 걸쳐 원자/핵무기 공격에 실제적으로 직면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이 절대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북한과 같은 약소국가가 ‘국부 공격’을 통한 정권교체나 전면 공격에 의한 북한의 초토화를 견제하기 위해 억지력을 개발해야만 한다고 판단한 근거를 공정한 시선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북한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또 직접적으로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에게 ‘안전 보장’이라는 단 하나의 조건하에 비핵화 의지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핵 시설의 해체 전이든 후든, 이에 대한 보답으로 북한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안전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평화 정착’을 위한 진전된 발걸음–검증 가능한 화해 맥락에서의 비핵화와 평화구축 패러다임
주요 강대국(주로 미국과 일본)이 한반도를 인식하고 분석하는 패러다임은 상시적인 전시체제 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전략적 안보 우선의 관점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 패러다임은 몇 가지 핵심 전제에 기초하고 있으며 여타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그렇듯이 그 전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핵심 전제 조건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북한의 비적대적 의사에 대해 의심하는, 극단적 불신에 기반한 ‘적의 이미지’
• 북한을 ‘예측 불가능’하고 ‘불량한 국가’로 묘사
• 미국과 일본, 여타의 모든 정부가 정권 유지를 당연하고 명백한 정치적 권리이자 국가적 우선순위로 여긴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북한만이 ‘정권 유지’를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으며 이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다는 인식
• 북한을 공격 목표로 한국 인접 지역에 미리 배치되어 있는 핵무기를 포함하여 미국 무기를 사용하여 전쟁을 개시할 준비 태세
• ‘적의 속임수’라는 인식에 집착해 그 어떤 외교적 시도나 대화를 비겁한 유화책이나 약점 때문이라고 본능적으로 의심하는 경향
• 북한의 일방적인 비핵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북한에 대한 안전 보장과 같은 호혜적 조건 제시 없는 ‘최대 압박’과 비타협적 제재조치
• 한국 국민이나 정부가 선호하는 정책이나 관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한국의 미래에 영향을 주거나 미래를 결정하는 관점이나 의사결정권을 정당화하는 미국(과 일본)의 패권주의적 신념


이런 맥락에서 ‘클라우제비츠를 거꾸로 하는’, 그리고 ‘전쟁 지향적 태도’가 주도하는 미국의 대북 정책이 수십 년간 이어지면서, 2018년 한반도 정세 변화에 대한 대응이 실망을 일으켰고 반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비판과 저항에 대해 기존의 패러다임 신봉자들은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들이 ‘적’으로 간주하는 기만적인 북한의 유일한 목표가 한반도의 안정과 질서를 파괴하고 한국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다고 확신한다면, 북한에 의사에 대해 결코 신뢰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의미 있는 대화의 성공이라는 방향과 그 궤적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와 같은 패러다임이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며 영구적 평화를 훼손하며 적대적 행위의 재발이나 비화로 악화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과 또한 한국인이 자국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심각하게 무시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는 균형 잡힌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만약 화해 및 비핵화를 포함한 검증 가능한 긴장 완화가 진정으로 원하는 ‘종착점’이라면 신뢰 구축, 자신감 고취, 상호 이해 및 대화 증진, 비군사적 해결책 강조, 한국인이 동의하는 궁극적인 통일을 위한 단일한 한국의 비전 공유를 위한 자유로운 의사 소통으로 이어질 수 있는 메커니즘을 적극적으로 탐색해나갈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입이 필요합니다.
그 패러다임의 시작은 다음 내용을 담아야 하고 평화 구축 의사를 반영하는 일련의 구체적 단계로 이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북한, 미국, 그리고 일본 간의 완전하고 호혜적인 외교적 인정
2.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조약 체결을 지향하는 시의적절하고 체계적인 단계
3. 군사, 문화, 사회 및 정치적인 분야에서 신뢰를 구축하는 조치
4. 북한의 빈곤을 퇴치하고 한국과 북한 경제의 궁극적 통합을 위한 기초 형성을 위해 합의에 기초한 한국 및 제3자[아시아개발은행(ADB)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투자를 통한 북한 경제 인프라 재건 촉진과 더불어 시의적절한 경제 제재조치 완화
5. 북한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와 북한의 안전 보장에 핵심이 되는 미국의 ‘선제 사용 불가’(No First-Use) 선언 및 호혜에 입각한 북한 및 한국의 공격적 군사 역량의 감축
6. 한국 국민이 자유롭게 한민족과 한반도의 평화로운 통일을 이룩하는 미래를 결정하는 구도하에 장기적 협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공동 운영 기관의 설립


맺는말
패러다임의 전환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영구적이며 심도 깊은 변화를 이루어낼 한국인의 역량을 믿습니다. 이러한 저희 믿음은 지난 45년간 한국과의 개인적이고도 긴밀한 인연을 통해 뿌리내렸습니다.
저는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존중이라는 오랜 투쟁의 역사에서 조용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었음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생계를 위협받았지만 시민권, 인권, 대의제, 법치주의, 그리고 한국 국민의 존엄에 대한 숭고한 확신을 지켜나가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렀고, 마침내 세계 무대에 자랑스럽게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그분들과 한국인들은 험난한 역경을 참고 인내하며 끝내 극복하여 대의민주주의가 숨쉬는 사회 건설에 성공하였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 큰 영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저는 깊이 뿌리 내린 미국의 원칙과 가치가 깊게 공명됨을 느끼는 미국인임에 긍지를 느낍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 문제에서 진리, 정의, 평화, 화해를 굳게 지켜온 한국인들에게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에도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미국의 오만함을 목도하면서 부끄러움도 피할 수 없습니다.
지조 높은 한국의 지도자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함께했던 일은 저에게 영광입니다. 함석헌 선생,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훗날 청와대에서 두 분을 다시 만났지요), 김관석 목사, 박형규 목사, 문익환 목사, 문동환 목사, 안병무 교수, 한국 최초의 여성 법률가 이태영 변호사, 윤보선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이희호, 공덕귀 영부인을 비롯하여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여성운동가들, 지명관 교수, 그리고 나의 벗 오재식과 또 안재웅을 비롯해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는 제 친구들과 동료들, 제 인생은 이 멋진 사람들을 만나 함께하는 놀라운 특권과 영광을 누렸습니다.
1975년 여름 명동성당에서 열렸던 존경받는 지식인 고 장준하 선생의 장례식에 참여한 일, 1976년 3월 1일 ‘명동구국선언’으로 기소된 18명 피고인에 대한 재판이 열렸던 법정과 1976년 3・1 구국선언 관련하여 광주에서 열린 네 분 목사님이 연루된 재판 참석, 역시 1976년 시인 김지하 선생의 재판 당시 그의 담담한 최후진술을 함석헌 선생 곁에 앉아 들었던 기억, 시인 김지하 선생이 민주주의가 꽃 피는 ‘서울의 봄’을 외쳤을 때에 내려진 사형 선고, 1976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매섭도록 추운 언덕 위에서 서대문 형무소를 바라보며 명동 사건으로 구속된 18인의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에 대한 화답으로 부른 크리스마스캐럴, 이 모든 순간 하나하나가 제게는 영광으로 각인되어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비전을 오늘날의 현실로 이루어낸 것은 이들의 굴하지 않는 기개와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을 포함하여 수천 명의 훌륭한 지도자들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그들의 강인함, 용기, 헌신을 제가 직접 봤고 경험했기에 저는 감히 오늘 우리가 함께 열망하는 그 비전, 평화가 넘치는 한반도의 화해와 미래라는 꿈이 성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역사가 분수령에 서 있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권희정 |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국제회의 통역과 다양한 분야의 번역을 하고 있다.

 
 
 

2019년 2월호(통권 7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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