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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18년 11월호)

 

  『충청남도 선유문안』(忠淸南道宣諭文案) (14, 마지막회)
  

본문

 

* 한자로 쓰인 『忠淸南道宣諭文案』은 감리교 목사 최병헌이 충청남도에서 했던 선유 활동을 기록한 글이다. 선유(宣諭)란 임금의 훈유(訓諭)를 백성에게 널리 알리는 것을 말한다. 최병헌(1858-1927)은 충북 제천에서 출생하여 과장(科場)에도 여러 차례 나갔던 한학자 출신의 목사로 교회 일을 현순 목사에게 맡기고 1908년 2월 6일부터 3월 10일까지 충청남도에서 선유 활동을 한 바 있다.
이번 14회 연재는 10회에 시작된 ‘일록’(日錄)의 마지막 부분이다. 원문에는 일록 뒤에 탁사의 선유활동에 관하여 탁사 자신과 지인들이 쓴 한시가 5쪽 정도 첨부되어 있다. 이것은 탁사 연구를 위하여 차후에 번역될 필요는 있으나 선유문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내용이기에 일록을 끝으로 연재를 마친다. - 편집부



일록 (5)
3월 7일 토요일 상오 11시에 대흥 지역 내 각 면장과 군 건물(郡邸)의 일반 인민 100여 명을 군 관아에 모으고 조칙을 포유(布諭)하였다. 시기의 절박함과 민정(民情)의 곤췌(困瘁)함을 거듭 알려 돌이키도록(申復)1 타일렀다. 권유문 한 통을 낭독한 후 조칙과 효유문을 전부 널리 나누어주어 알게 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널리 전파하도록 시켰다. 황상께서 애태우는 마음의 짐을 지시지 않도록 하고 그날 12시 반에 폐회하였다.
같은 날 하오 1시 10분에 출발하여 20리에 있는 예산군에 가서 왕길우(王吉禹) 집에 숙소를 정하였다. 본 수령 이범소에게 통지하였더니 말하기를, 병이 들어서(薪憂)2 바라시는 대로 전갈에 답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일의 이치와 당사자의 체면(事體)이 있는데(所在) 어찌 이와 같음을 용납하겠는가! 바야흐로 장차 시장에서 선유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므로(漸迫) 부득불 몸이 아픔에도 무릅쓰고 힘을 내어 일어났다.
여간(如干)3 일의 질서와 절차(凡節)대로 주선(周旋)하여 지휘하였으며, 선유할 장소에 궁색함이나 어긋남이 없게 하려고 [수령 이범소에게] 다시 통지하였다. 한참을 지나자 [이범소가] 비로소 숙소를 방문하여 여러 가지로 구차하게 변명하여 말하기를, “아까는(俄者) 아랫것들이 잘못 전달하여 이른 고로 어긋난 이유가 있는 듯하니, 일이 심히 미안하게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하오 4시 반에 본 군수와 함께 시장길로 나가서 일반 백성들을 모아 세우니 수가 3,000명은 넘었다(数三千名). 조칙을 선유하는데 허다한 술 취한 주정뱅이(酗酒之漢)들이 떠들썩하며 뒤숭숭하며(紛紛) 어지럽고(撓撓) 시끄럽게 뒤섞여 돌아다녔다. 관예(官隸)와 순사(巡査) 무리가 그들을 금지하나 듣지 않으니 단지 인민의 정도(程度)를 바라보건대 가히 개탄할 뿐이다. 비록 천만 번 큰 소리로 크게 부르짖을지라도 곧 소귀에 경 읽기와 같았다.
그러나 조칙을 선포하는 마당에 어찌 가히 중지할 수 있으리오. 정식에 의거하여 포유 후에 응용되는 문서들(文蹟)을 나눠주니 때가 이미 5시 반이었다. 그리하여 곧바로 관아로 들어가서 각 면장과 이장을 다시 초대하여 일장 선유하였다. 폐회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해가 이미 지고 캄캄해졌다. 계속하여 여러 날 빨리 달려온(驅馳) 나머지 오직 곤비하고 퇴당(頹唐)4할 뿐이었다. 온 몸의 뼈(百骸)가 함께 고통스러우니 진실로 몸과 마음이 괴로움을 깨닫겠도다(誠覺苦惱).
하오 8시 반에 순사 유광로가 내도(來到)하여 우리 일행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갔다. 이와 같이 정탐하고 살피는 행동이 있으니 극히 놀라고 괴이한 일을 겪은 것이다. 이것이 과연 경리(警吏)5의 본분이란 말인가?

8일 일요일 상오 9시 반에 길을 떠나서 곧바로 40리에 있는 신창군에 도달하여 여점(旅店)에다가 숙소를 정하고 군 관아에 통지하였다. 잠시 후에 본 군수 서병익이 내방하여 마중 나와 환영하지 못한 것을 심히 미안하다는 뜻으로 여러 번 반복하여 말하기에 이와 같은 것은 필요치 않은 뜻으로 답을 하였다. 지역 안의 각 면에 화속(火速)히 거듭 타일러 훈계하여(申飭) 내일 상오 10시에 일반 인민을 함께 모이게 하였으며, 본 군의 심부름하는 사람을 시켜서 온양군에 보낼 공함(公圅)을 발송하였다.
하오 3시에 로마서 12장을 읽고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하오 3시쯤에 본 군수의 요청을 받아 관아에 들어갔다. 4시경에 관아 안에서 떡을 차려놓고 기다렸다.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데 지나온 일을 들은즉 과연 다른 사람이 겪은 일이 아니었다. 작년 가을 이래로 폭도가 수차례 침입하여 총탄을 함부로 발사하였으나 관아 밖에서 앉아 있었다. 급기야 난리를 일으키는 무리가 관아 안으로 갑자기 들어올 때에 마을의 문과 창을 열어놓고 길바닥에 걸터앉아서 문지방에서 조금도 요동하지 아니하였다. 저 무리들을 크게 꾸짖어(叱咤) 그 총질하는 것을 재촉하니 저들이 돌이켜서 멋쩍은 듯이(無聊) 물러서서 갔다는 것이다. 그 후 일본 군인이 내도하여 말하기를 남몰래 적과 통함(內應)6이 있을 것이라고 수도 없이 공갈(恐喝)하고 혹은 주뢰(周牢)7를 가하였으나 마침내 굴복치 아니하였다. 이와 같은 일이 수차에 있었는데 헌병 등이 마지막에 스스로 굴복(自服)하였으며 이제는 간격(間隔)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서 일본 군인으로 공연히 의심하게 하고 욕을 입고 매를 맞는 자는 추측컨대 아직도 존재(尙存)하여 이르고 있다.
황혼이 되어 숙소로 돌아와서 일본인 순사 와타나베 무네요시(渡邊旨吉)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酬酌). 과연 이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好辯)이어서 우리나라의 부패한 풍속을 훤히 알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하오 9시에 디도서(堤多) 2장을 읽은 후 기도하였다.
9일 월요일 상오 11시에 신창 6개 면장, 이장과 군저(郡邸) 일반 인민을 함께 군 관아에 모으고 조칙을 선포하였다. 시기(時機)를 설명하며 교육에 급히 힘써야 함을 효유한 후에 조칙과 각 항목의 문서를 가지대로 널리 나눠주었다. 순사 와타나베 무네요시가 역시 교육사상으로 일장연설한 후 폐회하고 숙소에 돌아왔다.
와타나베가 그 주재소로 요청하여 차를 내놓고(進茶) 정성껏 대접하였다. 나에게 붓을 휘둘러 글을 쓰도록(揮筆) 요청하면서 기념 운운하며 원하는 고로, 굳이 거절하기가 불가하여 청하는 바에 의거하여 글을 써서 주었다. 숙소에 돌아간다고 말하고 나니 시간이 이미 하오 2시 10분이었다.
바쁘게 길을 떠나 곧바로 20리에 있는 온양군에 도달하였다. 관아는 자못 환하여 보기에 좋으나 8개월 동안이나 고을의 수령이 비어있었다(曠官). 그 가운데 군(郡) 주사 정석호(鄭奭好)는 법도에 있어서 하물며(文况) 나이가 많고 길에 어둡고 멍하여 두서가 없다 보니 읍(邑)의 모양과 백성의 실정이 전혀 이치에 닿지 않았다(萬不成說). 관아 부근에 거처할 여관도 없어서 부득이 옛 시장 터에 숙소를 정하였다. 그 군 서기에게 분부하여 화속히 거행하여 선유할 장소를 준비하도록(排設) 시켰다.
하오 7시경에 비로소 오도록 알려서 앞에서 인도하여 관아에 들어오게 하였다. 본 군의 사방 근처의 면장들은 오히려 와서 기다리지 않는데, 다만 5개 면의 면장과 약간의 인민이 모여 있었다. 조칙을 선포하고 백성의 유익함과 근심(利病)을 낱낱이 들어가며 설명하여 논하니, 듣는 자가 마음으로 기뻐하고 진실로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하오 8시 후에 파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몸이 지쳐서 기운이 빠지고(脫氣) 목소리도 쉬고(失音) 입맛이 전혀 없었다. 비록 저녁밥이 나왔으나 입에 대었을 뿐이다. 짐을 꾸리고 앞으로 갈 길도 스스로 정한 날이 있으며, 실로 지체하여 머무는 것이 어려우니, 참으로 심히 답답하며 염려되었다.

10일 화요일 상오 9시에 출발하여 30리에 있는 천안역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곤비하여 잠시 누웠다가 하오 3시 15분에 아픔을 무릅쓰고 기차를 타고 경성으로 향하였다.


日錄 (5)

三月七日土曜上午十一点에 大興境內各面長及郡邸一般人民百餘名을 會于郡衙하고 詔勅을 布諭後에 時機의 切迫함과 民情의 困瘁함을 申復說諭하고 勸諭文一通을 朗讀한후 詔勅及曉諭文을 一軆頒布하야 使之廣播하야 毋負 皇上如傷之念케하고 同十二点半에 閉會하다
同日下午一点十分에 彂徃二十里禮山郡하야 舘于王吉禹家하고 通奇于本倅李範紹則云有薪憂하야 不可以風之意로 荅傳喝하니 事軆所在에 豈容若是乎아 方將宣諭于塲市而時間이 漸迫하니 不得不冒病强起하야
如干凡節을 周旋指揮하야 宣諭之地에 俾無窘塞岨峿케할 事로 更爲通知矣러니 良久에야 始訪于舘하야 呶呶說明曰俄者에 下隷輩가 誤傳之致로 似有岨峿之端하니 事甚未安云云이러라 因問該郡情况則姑爲無事云이라
下午四点半에 與本郡守로 出徃于市街하야 一般民庶를 聚立하니 不下数三千名이라 詔勅을 宣諭할새 許多酗酒之漢이 紛紛撓撓하고 遝沓喧嘩에 官隷與巡査輩가 禁之不得하니 苐觀人民程度컨대 可歎可慨라 雖千萬番高聲大呌라도 便同牛耳誦經이나
然이나 其扵宣 勅之地에 何可中止리오 依正式布諭後에 應用文蹟을 頒給하니 時已五点半이라 仍爲直入郡衙하야 各面長及里長을 更爲招待하야 一塲宣諭後에 閉會敀舘하니 日已昏黑이라 連日驅馳之餘에 非但困憊頹唐이라 自数日來로 百骸俱痛하니 誠覺苦惱也로다
下午八点半頃에 巡査兪光老來到하야 錄去我一行之氏名與住地而似有貞察之擧하니 極涉駭怪라 是果警吏本分乎아

八日日曜上午九点半에 彂程하야 直抵四十里新昌郡하야 定舘于旅店하고 通知于郡衙矣러니 少頃에 本郡守徐丙益이 來訪하야 有失迎迓하니 心甚未安한 意로 屢屢言之라 以不必如是之意로 荅之하고 境內各面에 火速申飭하야 明日上午十点에 一般人民을 會同케하고 溫陽郡公圅을 使本郡隷로 彂送하다
下午三点에 讀羅馬十二章하고 誠心祈禱하다 下午三点量에 被本郡守之請邀하야 入于衙中矣러니 至四点頃에 自衙內로 設餻款待러라 因與談論할새 聞其所經事則果非他人所及이라 自昨秋以來로 暴徒가 数次侵入하야 亂彂銃丸而坐扵外衙라가 及其亂黨이 突入衙中之際에 洞開門窓하고 露面踞坐하야 于閾少不搖動하고 叱咤彼徒하야 促其放銃則彼反無聊而退去러니 其後에 日兵이 來到하야 云有內應하고 無数恐喝하며 或加周牢하대 終是不屈하야 如是者数次矣러니 憲兵等이 末乃自服하야 今則少無間隔云이라 然이나 大抵使日兵으로 空然致疑하야 受辱被打者는 推髺尙存之致也러라
乘昏敀舘하야 與日巡査渡邊旨吉酬酌則果是好辯客而我國腐敗之俗을 無不通曉러라 下午九点에 讀提多二章後祈禱하다
九日月曜上午十一月点에 新昌六面面長里長及郡邸一般人民을 會同郡하야衙 詔勅을 宣布하고 時機를 說明하며 敎育에 急務로 曉諭한後 詔勅及各項文蹟을 件件頒布함애 巡査渡邊旨吉이 亦以敎育思想으로 一塲演說後閉會敀舘할새
渡邊이 請邀于該駐在所하야 進茶款接하고 要余揮筆하야 願爲記念云故로 不可牢拒하야 依所請書給하고 辞敀于舘則時已下午二点十分이라
忙忙彂程하야 直抵二十里溫陽郡하니 官衙는 稍爲通暢하나 八朔曠官之中에 文况郡主事鄭奭好는 年老事昧에 茫無頭緖하니 邑樣民情이 萬不成說이라 官衙附近에 無處定舘하야 不得已 舘于舊塲垈하고 分付于該郡書記하야 火速擧行하야 宣諭塲所를 使之排設矣러니
至下午七点頃에 始爲來告하야 前導入衙則本郡四面面長은 尙不來待하고 只有五面面長及若干人民이 聚會라 詔勅을 宣布하고 生民利病을 枚擧論說하니 聽者莫不心悅誠服이라
同八点後에 罷敀于舘하니 脫氣失音에 全無口味하야 雖進晩餐이나 接口而已라 前程行李는 自有定日하야 實難遅畄하니 誠甚悶慮로다

十日火曜上午九点에 彂行하야 抵泊于三十里天安驛하야 困憊暫卧라가 至于下午三点十五分에 冒病搭汽車하고 向京城하다


* 탁사 최병헌의 『충청남도 선유문안』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번역을 맡아주신 한규준 목사님, 감수를 맡아주신 오세종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부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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