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교회와 현장
교회와현장 (2018년 11월호)

 

  미주 지역에서의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김동수 박사 인터뷰 (2)

본문

 

*이 글은 북미주기독학자회, 조국통일미주협회를 통해 남북통일운동에 참여한 김동수 박사와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인터뷰 당시 김동수 박사는 미국 버지니아주 노폭주립대(Norfolk State University)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류대영 교수(한동대)와 김흥수 교수(목원대)가 질문했다. 이 인터뷰는 2002년 12월 12일 목원대학교 김흥수 교수 연구실에서 이루어졌으며,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받은 한신대 프로젝트(“한국개신교가 한국근현대의 사회 문화적 변동에 끼친 영향 연구”)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한신대 학술원 신학연구소의 허락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류대영·김흥수 7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이제 자주운동으로, 통일운동으로 전환이 되는데 박사님께서 1981년부터 시작된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 간의 대화’에 참여한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김동수 제일 처음에 나왔던 비엔나에는 참석을 못 했어요. 두 번째부터 참석을 했지요. 가서 그 사람들하고 만나서 대담하던 거, 제 기억보다 기록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사람들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도 느끼고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도 느끼게 되고….
류대영·김흥수 그러니까 그때, 이미 81년에 기독교인들하고 북한 사람들이 만났다는 것을 뉴욕에서 들으셨겠지요? 어느 분으로부터 제의를 받으셨어요?
김동수 제가 기독학자회 일을 같이 했기 때문에 그 후부터는 선우학원 박사님하고 아주 가까이 지냈어요. 제가 총무가 되고 선우학원 박사님이 회장이 되었을 때, 누가 와서 저한테 조심하라고, 저분은 좌경 인사니까 앞으로 일할 때 걱정이 된다고 말씀하신 분들이 몇 분 계셨어요. 그래서 저는, 뭐 이건 학구적인 학회인데 그 사람 사상이 좌경이든 우경이든 그게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느냐 그랬는데. 또 그분은 그분대로 저를, 저희 아버님이 공산당에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굉장히 우파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일을 같이 하면서 발견하게 된 거예요. 아, 생각이 꼭 맞아떨어진다고.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그다음부터 굉장히 가까워진 거예요. 그래서 뭐든지 상의하고, 사실은 글 쓰는 것이라든가 하는 것을 제가 많이 했어요. 선우 박사님도 글을 잘 쓰시지만 문법이라든가 타자 치는 것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니까 제가 사무직을 많이 했지요. 제가 정확하게 기억을 못 하지만 아마 거의 틀림없이 선우 박사님이 가자고 그러셨을 거예요. 뭐든지 그분이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하면 저는 그대로 따라 했으니까요.
류대영·김흥수 그러니까 독일에서는 이영빈, 이화선 이런 분들이 북과의 대화를 주선하고 있었고, 미국 쪽에서는 선우 박사님이 중심이 되셨군요.
김동수 아시겠지만, 그 전에 선우 박사님하고 김재준 박사가 제네바 북한대표부에 가셨던 사건 아시죠? 그 사건이 있은 다음에 뉴욕 그룹에서도 문제가 생겼던 거예요. 필요하면 가서 만나자 하는 것까지 합의 본 다음에, 실제로 그렇게 갔다 온 다음에 문제가 된 거예요.
류대영·김흥수 제가 작년에 미국 갔을 때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 간의 대화에 참석하셔서 경험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다시 말씀을 들어야겠는데요. 참석하시면서 어떤 변화들을 보게 되었는지, 모임의 성격이 변해갈 수도 있고 참석한 사람들이 변해갈 수도 있는데, 특별히 대화의 내용도 변해갈 수 있고, 어차피 대화라는 것이 주고받으면서 변화하는 것이니까요. 그런 과정을 조금 설명해주십시오.
김동수 제일 처음에 제가 만났을 때 저는 별로 두렵거나 긴장하진 않았어요. ‘저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대할까’, ‘어떤 말을 할까’ 상당히 궁금하기도 했는데 제가 놀란 것은 만나고 나니까 별반 놀랄 것이 없다는 것이 놀라웠어요. 만나보니까 뭐 같은 사람이고 같은 말 쓰고, 뭐 이야기하다 보니까 나중엔 술 좀 마시고 하니까 농담도 하고 똑같아요. 소위 우리나라 사람의 근성도 그대로 나타나고 습관, 태도, 말하는 것 전부 다 같더군요. 괜히 지금까지 신경을 쓰고 그랬지. 그 사람들이 배지를 한 것 그거 하나 빼놓고는 별반 뭐….
공식 석상에서는 그 사람들 말할 때 조금 조심스럽게 말하죠. 그 변화 과정이라면 아마 이런 것이 있겠죠. 그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상당히 준비하고 나오는 것 같아요. 매번 나올 때마다 ‘우리가 합의해서 이번엔 무슨 문제를 다루자’ 이렇게 해서 합의된, 예를 들면 평화문제라든가, 남북통일을 위한 기독학자와 북과의 대화, 또 핵 문제라든가 하는 주제를 붙여서 하는데, 그때 보면 그쪽 대표들은 누가 오늘 이야기할까를 서열로 준비하고 전부 다 글을 써서 준비해서 와요. 그리고 글 쓴 것을 그대로 읽고요.
이쪽에서는 중구난방이죠. 사전 조율도 없었고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 건지 거기에서 다 만나서 했죠. 그때는 장거리 전화가 자유롭지 않아 사전에 이야기할 것도 없고, 거기서 만나서 그냥 사전에 대강 프로그램 이렇게 짭시다 그러는데, 그쪽에서는 준비를 많이 해와요. 선우 박사님이 공헌을 많이 했다고 보는데, 회의할 때 보면 그쪽은 아주 경직되고 상당히 준비된 텍스트를 가지고 와서 읽어나가는 형식이고, 우리는 그냥 그 자리에서 즉석연설을 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토론 시간이 되면 우리는 막 이것저것 묻고 우리끼리도 서로 의견이 갈려서 아 그거 아니라고 그러는데, 저쪽에서는 일사불란하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우 박사님이 이렇게 하면 토론에 진전이 없다고, 당신네들 다 준비해서 쓰고 훈련한 다음에 가져와서 그대로 줄줄 읽는데 그거 다 집어치우라고, 그냥 이야기하자고, 소위 자유로운 토론을 하자고 해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요. 그래서 그다음 올 때마다 그 사람들이 점점 더 나아지고, 토론을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사람들 발표할 때는 자기네들 글을 줄줄 읽지만 토론 시간이 되면 말을 못 해요. 왜냐하면 준비된 답이 없는 거예요. 이쪽에서는 뭐라고 그러면 즉석에서 나오고, 물론 개인의 의견이지만, 그 사람들은 어떤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해야 될까 하는 것은 공식적 입장이 서 있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조심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일 윗사람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류대영·김흥수 그게 주로 누구였습니까?
김동수 전금철, 여연구, 안병수 씨…. 전금철, 안병수 그분은 여기 몇 번 오셨죠. 그래서 특별히 안병수 씨하고는 가까워졌어요. 안병수 박사는 최근까지 조국통일서기국장을 했죠. 그 사람이 제가 알기로는 경기고를 나왔죠. 아주 명석하고 논리 정연하고…. 하여간 그분하고 나하고는 잘 맞아떨어졌어요. 그래서 예를 들면 대회를 마칠 즈음에 아무 때나 같이 성명서를 내곤 했는데 그것을 둘이서 했어요. 그 사람이 쓰고 내가 쓰고 해서 많이 알죠. 속을 다 알죠. 싸움도 많이 하고요. 저는 좋게 생각해요. 전금철 박사는 정말 호인이고 정말 신사적이고.
류대영·김흥수 그 모임이 81년부터 시작되고, 지금 남쪽의 많은 글들이 그 모임은 북한 정부가 기독교인들을 이용해서 조종한 거라고 말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저희가 궁금한 게, 제가 이영빈 목사님한테도 경비를 누가 댔느냐 이런 것도 여쭈어보고 그랬는데, 이영빈 목사님 말씀은 첫 번째 모임은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기통회)에서 댔고 두 번째 모임은 북한에서 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때 기억나는 것 있으시면 말씀 좀 해주시죠?
김동수 제가 정확한 내막은 몰라요. 근데 선우학원 박사님이 그 당시에 그래도 일하시고 그래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어요. 저는 근데 사실은 상당히 어려웠어요. 외국 여행을 자비로 할 만큼 경제적 여유가 없었어요. 제가 알기로는 첫 번째도 아마 그래서 못 갔던 것 같아요. 지금 정확한 이유는 생각이 안 나는데, 제가 국내에서도 많은 회의에 못 갔어요, 돈 때문에. 제가 처음 갔을 때는 선우 박사님이 차비를 마련해줄 테니 가자고 그래서 그 돈이 어디서 났는지를 몰라요. 제 생각에는, 제가 그때 알기로는 선우 박사님이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몇 사람을 그렇게 도와준 걸로 알고 있어요. 돈을 낸 사람도 있고 안 낸 사람도 있는데, 저는 안 낸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죠. 회의 비용은 북쪽에서 댄다고 분명히 들었어요.
류대영·김흥수 숙식이라든지 장소 빌리는 데 드는 비용 뭐 이런 거 말이죠?
김동수 그러면서 여러 번 만나면서 차차 우리가 내기 시작했어요. 끝에쯤 가서는 우리가 저쪽 사람들을 도와서 했지요.
류대영·김흥수 아, 이제 모금이 되고 그래서요?
김동수 예를 들면, 어디 식사하러 가면 그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니까 술 같은 것을 사고 뭐 이런 것들…. 한 10년 미만일 텐데 그렇게 경제적으로 바뀌더군요.
류대영·김흥수 그해 81년에 시작해서 90년대 초까지 계속되는데, 홍동근 목사님이나 이영빈 목사님 말씀으로는 북과 해외기독자 간 대화가 10년이라고 말씀하시는데, 3차 대회부터는 기독자가 아닌 분들도 참여를 하잖아요. 이제 성격이 기독자 간의 대화가 아닌데, 그러면 실질적으로 이 대화는 두 번 하고 끝난 것 아니냐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아요?
김동수 원래 제가 아는 바로는 북쪽에서 기독학자와의 대화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처음부터. 그런데 이제 해외동포 또는 해외동포학자들과의 대화 이런 식으로 하자 그랬는데 결국 백 프로가 기독교인이니까, 이영빈 목사님도 기독교인이 아니면 여기 무서워서 못 나온다고 해서 ‘기독교’ 자를 붙였던 것 같고, 그다음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니까 ‘기독교’ 자가 빠졌는데, 사람들은 다 그 사람들이죠. 거기에 몇 사람이 더 붙은 것뿐이죠.
류대영·김흥수 그래도 명칭이 3회 때부터는 ‘기독교’ 자가 빠지고 그래서….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 되나요?
김동수 그래서 제 생각에는 범위를 넓혀야 된다고 보는데, 예를 들면 북경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여러 사람이 갔는데 그중에서 기독교인 아닌 사람도 꽤 많이 갔거든요. 그래서 그쪽에서보다는 우리가 생각할 때 좀 더 개방적으로 폭을 형성해서 다가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독교’ 자를 뺐지, 그 중심인물들은 기독교인이었지요. 심지어는 우리가 가서 대부분의 경우는 예배도 보고 새벽기도회도 하고, 심지어는 북측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를 우리가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니까 당신네들도 협조한다는 의미로 참여해달라고 하니까 기도회에 다 왔어요. 그런 경우도 있고, 이름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그 주동 인물이라고 할까 또는 주목적, 그것을 미는 인물들은 다 기독교인이었죠.
류대영·김흥수 처음에 그 기독자 간의 대화라는 이름이 붙었을 때는 고기준 목사도 발표를 하고 북한의 교회 상황을 이야기하고 했지만 ‘기독’ 자가 빠지고 나서 3회 대회부터는 북한의 기독교에 관한 무슨 주제 발표나 이런 게 있었어요?
김동수 3회 때 무슨 주제로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매번 주제가 조금씩 바뀌었어요. 어느 때인가는 WCC 문제도 나오고 그랬는데요. 안병수 씨하고 싸운 기억이 나기 때문에 그 기억이 나는데, 예를 들면 WCC에서 한국의 인권문제나 통일문제에 대해서 지원하는 성명서가 나왔는데, 우리 성명서에 그 WCC의 선언문을 환영한다는 말을 집어넣느냐 안 넣느냐 하는 문제로 싸운 적이 있었어요. 그런 내용을 거론한 적은 있지만 그 전체 모임의 성격이라든가 발표한 내용, 발표한 사람들은 제가 정확히 기억을 못 하겠군요. 그런데 그건 확실해요. 저희가 점차 좀 더 넓고 포용성 있게 다양한 인원들이 포함되고, 북쪽도 목사님 아닌 다른 분들이 많이 오게 되고, 그건 사실이에요.
류대영·김흥수 그런데 그런 변화가 3회 때부터 나타난 거죠?
김동수 그런데 그것을 왜곡해서 볼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이용해서 시작해서 결국은 내용이 바뀌었다.’ 이렇게 볼 수 있었는지 모르죠.
류대영·김흥수 지금 이쪽에서 자꾸 그렇게 보려는 사람들이 있지요.
김동수 그러나 처음에 시도한 사람이나 내내 주동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다 기독교인이에요.
류대영·김흥수 이영빈 목사님과 김순환 선생님, 이화선 목사가 81년 6월에 북한을 방문하죠. 그게 「로동신문」에 나요. 가서 접촉하고 ‘올가을에 회의를 하자’ 그래서 첫 번째 회의가 비엔나에서 열리는데, 그때 합의문서가 「로동신문」에 나요. 그 합의문서에 보면 ‘기통회의 발의로 우리가 이런 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주도권을, 서독의 기통회 발의에 의해서 모임을 가진 걸로 나왔는데, 그런데 『향도의 태양 김정일 장군』이란 책이 동경에서 나온 건데, 여기 보면 지금 말씀하신 이 통일대화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김정일의 발기와 조치에 의해서 81년 11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 통일대화가 있었다’ 이렇게 나와요. 모든 80년대 이후 해외 교포들과의 관계는 이 책에서는 ‘김정일 장군이 주도를 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북쪽 사람들이 그 모든 공적, 이런 것을 이쪽으로 돌린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표현들을 어떻게 봐야 되나요? 이게 사실이라면 모든 행위의 주도권을 북한 정부가 한 건데 또 합의문 보면 서독 그룹이 먼저 하고 북한이 동조한 걸로 되어 있단 말이죠.
김동수 그런데 저는 이렇게 봅니다. 북한이 체제로 보나 또는 그 사람들이 관례에 의해서 모든 것은 다 김정일 동지에게 돌리는 관례가 있고, 심지어는 그분의 창시라든가 그분의 지시에 의해서거나 그분의 따뜻한 배려라든가 또는 그분의 노력으로 되었다고 말하죠.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의 문구상의 독려에 따른 것이지 반드시 그 사람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역사적 증거가 되기에는 어려운 것 같아요. 저희들 모여 있을 때에도 늘 그런 말을 해요. 이번 모임은 주석님의 특별한 배려에 의해서 하게 된다고, 예를 들면 식사를 하면서….
류대영·김흥수 그렇죠. 북한에서 음식까지 비행기로 공수를 했는데 다 김정일 지도자가 제공한 것이라고 하겠죠.
김동수 그건 뭐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도 끝날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무엇이든지 다 갖다 붙이니까요. 그것이 없으면 주소가 없는 것이 되니까요.
류대영·김흥수 결국 그 대화를 10년 넘게 지속했는데, 그 대화가 양쪽에 준 이득이 있을 텐데 그런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를 들어서 그 대화를 통해서 선생님이라든가 선생님이 계신 미주 지역에 있는 기독학자들에게 준 영향, 특히 통일과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 그리고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그 대화를 통하여 북한에 도움을 준 것은 어떤 게 있는지 그런 것들을 한번 말씀해주시죠.
김동수 우선 제가 받은 영향이랄까 제가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은, 막연하지만 같은 민족 같은 동포로서 언젠가 화해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생각은 늘 하고 있었지만, 그 사람들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나누고 같이 웃고 같이 자면서 느낀 게 정말 하나가 되어야겠다는 아주 절실한 감정을 느꼈고, 그러니까 좀 더 절박한, 사람을 만나고 나니까 정말 함께 살아야 되겠다 하는 것을 느꼈고….
또 한 가지는 제가 그 사람들이 주는 선전 책자라든가 또는 그 여러 가지 자료들을 보는 가운데 주체사상에 대해서 상당히 매혹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주체사상에 대해 꽤 탐구를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주체사상 자체는 상당히 휴머니스틱한 그런 게 많은 것 같아요. 그러나 마지막에 수령론에 가서는 잘 맞지는 않은 것 같고, 사상 체계로 봐서는 수령론이 거기에 맞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법이나 시행령이 있는지…. 아무튼 저는 주체사상 보면서 상당히 매력을 느꼈어요.
이게 기독교 사상과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무슨 공통점을 밝혀낼 수 있겠는가? 또는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에 대해 구상을 했는데 그것에 대해서 연구는 못 했어요. 그 대신 제가 아는 젊은 사람들, 학생들에게 그 주체사상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이해시키는 강연도 몇 번을 하고, 사실은 제가 주체사상에 대한 강연을 서울에서 했습니다. 80년 말이나 그때에. 아마 홍근수 목사님이 주선을 해서 새벽 7시인가, 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하여간 그때 홍근수 목사님이, 알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 좀 이야기해 달라고 해서 한 20명이 모여서 대략적으로 설명을 했어요.
그 무렵에 박승덕 교수라는 분이 나타났어요.
류대영·김흥수 어디서 처음 만나셨습니까? 박승덕 교수님을.
김동수 기억을 잘 못 하겠어요. 유럽에서 만났을 거예요. 그분이 주체사상에 대해서 설명을 잘하셨어요. 우리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시거든요. 그때 강희주[강희남으로 추정됨–편집자 주] 목사나 이런 분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그분한테 이야기하기를 당신 같은 사람이 기독교를 알면 참 주체사상 설명하는 데도 이해가 잘 될 거라고, 성경을 읽으시라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분이 한동안 아파서 병원에 몇 달 간 적이 있어요. 그때 성경을 세 번을 읽었다는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주체사상을 발표하는데 기독교 관점에서 보는 주체사상을 설명하고 기독교와의 대화 이런 데에서 주체사상을 설명하니까 굉장히 사람들이 혹했지요.
류대영·김흥수 그러니까 처음에는 주체사상 전문가로서 회의에 나왔군요. 그분이 황장엽 씨 매제 되잖아요. 황장엽 씨가 주체사상연구소를 만든 후에 자기는 노동당 비서로 가면서 아마 박승덕 씨가 소장파들하고 연구소를….
김동수 그분이 반(半) 사조직을 만들었어요. 민족문제연구소라는 걸 만들었어요. 어떻게 미국에서 그런 단체를 만들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하여간 그분이 민족문제연구소라는 것을 만들고서 황장엽 씨의 보호를 받으면서 활동을 하셨는데 사실 그 당시에 저는 몰랐어요. 그 관계를 나중에 알았죠.
류대영·김흥수 황장엽 씨가 이쪽으로 망명을 하고 박승덕 박사가 일종의 숙청을 당하고, 그 후에 아시게 된 거죠?
김동수 또 한 가지는 박승덕 교수도 그렇지만 제가 83년, 84년에 북쪽에 갔었는데 그때 황장엽 씨를 만났어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류대영·김흥수 그때 그 양반이 무슨 직책이었나요?
김동수 비서. 노동당 대외담당비서. 그때 이야기를 했을 때 별별 이야기를 다 했어요. 김정일 계승 문제 등을요. 그때 받은 인상이 상당히 이야기를 조리 있게 잘하시고, 그분이 아마 서양철학을 하신 것 같은데, 주체사상을 설명하면서 상당히 서양철학사의 입장에서 설명하더군요. 저도 서양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이해가 빨리 되더군요. 이야기를 오래 하고 나서 받은 느낌이 ‘아, 이북에도 이런 사람이 있는가’ 할 정도로 놀랐어요. 그리고 상당히 솔직하다고 할까, 열려 있는 마음으로 말을 하고요.
류대영·김흥수 주체사상이라는 것이 사실은 뭐 철학적인 것은 그분이 주도하여 만들어낸 것이죠. 그걸 갖다 나중에 이데올로기와 합해서 만든 것은 상당히 정치적인 것이고요. 그런 면에서 아마 공통점을 찾으셨던 것 같은데…. 아까 질문을 드렸습니다만 결국 북한에서도 그 대화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을 만나면서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 같거든요. 그분들도 뭔가 배운 것이 많이 있었을 텐데 그것이 아마 정책에 어떤 식으로든지 적용이 되었을 것 같고요. 그런 것은 느낀 것이 없으신지요.
김동수 자연히 우리가 느끼고 배운 것처럼 그 사람들도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데 촉매 역할을 했으리라고 믿는데요, 우선 그 사람들도 밖의 세상을 보고 알게 되고 또 남쪽 출신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사라진 것 같아요. 나중에 4-5회쯤 지나고 나니까 인간적으로 친숙해지고, 그리고 경계한다든가 불안해한다든가 이런 것은 다 없어지고, 참 인간적으로 친밀해지는 것이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데 도움이 된 것 같고요.
또 하나 분명한 것은 그분들이 기독교인과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한 것 같아요. 그건 뭐 여러 면에서 저희가 볼 수 있었어요. 예를 들면, 저희가, 물론 저희 간 사람들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희들이 말할 때 기독교 사상이 이렇고 기독교 역사가 이렇고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독교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할 때, ‘아, 그렇구나’ 하면서 자기네들도 상당히 놀랍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가 그분들을 만나서 이야기한 것 중 하나가 바깥 사람들과의 대화가 그분들에게 도움이 많이 된다는 것을 강조했어요. 우리가 뭐 필요해서 이야기한 것이라기보다도 ‘북쪽에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없을까’, ‘또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을 많이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예를 든다면 북쪽 사람들이 미국을 대하는 태도라든가, 또 미국에 선전물을 보낼 때 기대하는 것이 그만큼 현실과는 맞지 않고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영향력을 주기 위해서는 미국 언론이나 교회에 적극적으로 접촉하고 교류하고 서로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좋다는 것을 많이 강조하고…. 그게 어느 정도 먹혀들어 간 것 같아요.
류대영·김흥수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죠?
김동수 예.
류대영·김흥수 그러니까 북한의 종교단체, 기독교단체들하고 북미 지역의 교단들하고 교류를 한다든지….
김동수 물론 그 후에 교류가 있었지요. 물론 북쪽의 기독교 전체는 아니었습니다만 기독교에서 10명을 초청해서 미국 일부를 여행한 적이 있었지요. 상당히 좋았고 캐나다에도 왔었고 몇 번을 왔었죠. 한번은 박승덕 씨 혼자 온 적도 있었어요. 그때 토론토에서 주체사상을 대담한 적도 있었죠.
그분들이 저희들하고 만나고 접촉하는 과정에서 소위 신뢰관계를 설립한 것 같아요. 저희들을 믿는 마음, 저희들이 싫은 소릴 해도…. 그 사람들은 비판을 잘 못받아들여요. 특별히 체제나 수령님에 대한 이야기나 비판은 굉장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하더군요. 그런데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왜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그것을, 왜 그 사람들이 아는 것이 좋다는 것들을 설득할 때 어느 정도 설득이 먹혀들어 간 것 같아요. 그래서 예를 들면, 우리가 교회를 몇 개 지으라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대답이 무엇이었냐면 ‘아,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인민들이 얼마든지 신앙을 가질 수 있고, 또 실질적으로 가정교회 같은 것을 많이들 믿는데 교회는 혁명 과정에서 우선순위가 아니고 가정에서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하는데… 저희는 이랬어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외부에서 볼 때 종교 탄압하는 국가라고 낙인이 찍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외형적으로라도 그런 것이 있는 것이 당신네들한테 좋다. 조선민주인민공화국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설득을 많이 했어요.
그랬더니 몇 년 후에 한번 만났을 때, ‘기쁜 소식 있습니다. 수령님께서 교회 지으라는 허락이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그래서 공식 교회로 봉수교회, 장충성당, 칠골교회가 생겼지요. 저희는 사실은 몇 개 더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바랐어요. 결국은 전시 효과를 내는 정도로 끝나고 말았으나, 그러나 없는 것보다는 나았거든요.
류대영·김흥수 북한 사람들 중에 주체사상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종교인이 있습니까? 김영철이라는 분이 있던데 혹시 만나 보셨어요?
김동수 몇 사람 되지요. 제가 아는 분은 황장엽, 박승덕 씨.
류대영·김흥수 우리가 질문을 하니까 그분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진지하게 고심하고 그분들이 얘길 하는 건가요?
김동수 제가 기억하기로는 처음에는 종교와 거의 결부시키지 않고 하나의 체제적인 이념으로서의 주체사상을 말한 것처럼 발표되거든요. 그리고 그다음에 황장엽 씨를 만났을 때는 이것이 얼마나 철학적인, 인간중심주의적 철학사상이라는 것을 많이 강조했는데, 그다음에 대화를 하면서 우리가 자꾸 기독교 사상의 결부 문제를 이야기하니까, 그다음에 박승덕 씨가 발표한 것이 ‘기독교와 주체사상’이라든가 또는 관련해서 발표를 하시더라고요. 다른 분들은 그다지 그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다룬 것 같지는 않아요. 박승덕 씨가 가장 뛰어나게 기독교와 주체사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그분이 성경을 또 많이 읽었으니까 성경을 많이 인용하고, 나중에는 별명을 붙였어요, 사석에서. 박승덕 장로, 목사라고 불렀지요. 그런데 그분이 태도가 상당히 겸손하고 목사님 같은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식사 기도할 때 ‘박승덕 목사님께서 기도하시겠습니다’라고 농담하고 그랬죠.
류대영·김흥수 결국은 직・간접적으로 적어도 북한의 종교 정책에 관한 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 간의 대화가 영향을 미친 것 같군요.
김동수 그렇죠.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영향을 미쳤는지 안 미쳤는지, 말하자면 헌법이 바뀌었죠.
류대영·김흥수 네. 92년에.
김동수 우리가 바뀌기 전에 많은 걸 지적했어요.
류대영·김흥수 북한 헌법의 문제를요?
김동수 네.
류대영·김흥수 어떤 말씀을 하셨어요?
김동수 그러니까 거기서 우리가 종교 탄압을 한다고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비난하면 그분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그러나 종교를 반대할 자유도 있다’ 이렇게 꼭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래서 당신네들이 이해하는 기독교가 구라파에서 한때 잘못된 또는 가톨릭에서 잘못된 옛날 썩은 기독교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전반적인 기독교의 정신은 아니고, 또 전반적인 기독교의 상황도 아니고 기독교의 중심 사상도 아닌데,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일부 썩은 기독교를 말하는 것인데,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그리고 당신네 헌법에 있는 그건 잘못된 것이다, 종교 탄압한다는 밖에서의 이해를 불식하기 위해서는 당신네들이 바꾸어야 도움이 되는 것이지, 당신네들을 헐뜯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도울 친구로서, 동지로서, 같은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로서 돕기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지 우리가 무엇을 챙기기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런 이야기를 자꾸 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 먹혀들어 간 것 같아요.
류대영·김흥수 종교에 대해서 하나는 예배당 지어라, 두 번째는 헌법의 종교 조항을 바꾸라. 또 다른 조언을 하신 것은 없습니까?
김동수 제가 제안한 것이 있지요. 그걸 거의 다 했어요. 제가 점검해 보니까요.
류대영·김흥수 그러면 교회가 세워지고 헌법이 바뀌고 92년 이후에….
김동수 그런데 조심해서 말할 것이, 우리 그룹이 대화를 해서 그렇게 바뀌었는지 그건 알 수 없죠. 그러나 제안한 것은 확실하고 그쪽에서 그것을 신중하게 받아준 것은 확실해요. 녹음하고 기록하고 쓰고 그다음에 자기들이 고려해보겠다고 이야기를 했고, 그러니까 우리가 영향을 어느 정도 주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바뀌는 데 어느 정도 공헌했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동기 요인은 주지 않았을까요?
류대영·김흥수 그 이외에 직접적으로 또 이야기한 분들이 없었습니까? 92년 이후에 교회가 세워진 걸 보시고 헌법이 개정된 걸 보시고 나서 또 다른 조언을 하신 게 있습니까? 종교와 관련해서. 자꾸 ‘교회가 가짜다’ 이런 이야기가 막 나오고 그러니까요.
김동수 그 후에는 글쎄 제가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네요. 제가 한 10년간의 공백이 있어요. 제가 90년 초부터 98년도까지는 거의 모든 일을 전적으로 못하고 글도 못 쓰고 아무것도 못 했어요. 그러니까 거의 10년간의 공백이 있었죠. 제가 그다음 모임에는 거의 못 갔어요.
류대영·김흥수 최근에 북한을 다녀오신 게 언제입니까?
김동수 96년에 한 번 다녀오고 98년에 한 번 다녀오고….
류대영·김흥수 최근에 가보시고 어떤 느낌을 받으셨어요?
김동수 박승덕 씨를 잘 아는, 같은 동네에 사는 여자분을 만났는데, 그분 말이 박승덕 씨가 황장엽 씨 떠나온 후에도 서너 해는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제 없어졌는데,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봤어요. 박 씨가 어떻게 되었느냐? 물어봤는데요, 보통 안 죽인대요. 그런데 대개 잘못되면 다른 부서에서 훈련을 받고 그러는데, 그분의 경우는 여자분이 그래요, 무사할 수 없었다고. 왜냐하면 그 사람 밑에서 일했다는 것, 그런데 그것까지는 괜찮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조금 혼나고…. 그런데 친인척이라는 것 때문에, 거기서는 친인척이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그 밑에서 일을 했고 가까운 친척이라는 것 때문에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 물으니까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해요.
류대영·김흥수 마지막으로 기독교인들이 통일을 위해서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 어떤 일들이 있을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동수 제가 아는 기독교는 화해의 종교니까 두말할 것 없이 우리의 동족, 비록 사상과 체제는 다르지만 우리의 동족과 대화를 나누고 화해를 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통일을 해야 되겠죠. 기독교인이나 교회의 역할이 아주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기독교가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더 그럴 수 있고, 그럴 능력도 있다고 봅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늘 이야기합니다. 내가 공산주의자들하고 떳떳이 나가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내 원수니까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내가 피해자니까 그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화해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보수적이고 이런 민족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못 가진 건 참 불행하지만, 또 최근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북쪽이 상당히 어려운 사태에 처하면서 교회들이 구호활동을 하는 것은 보기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민족 화해의 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가 좀 더 적극적으로 민족 화해와 통일에 커다란 기여를 했으면 좋겠어요. 또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께서 같이 하시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보수적인 교회도 일단 신앙적인 결단을 하면 큰일을 하거든요. 또 당부하고 싶은 건 꼭 진보적인 교인들만이 통일운동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가만히 보면 상당히 보수적인 사람들이 통일운동을 꽤 많이 해요. 또 구호활동도 활발하게 하고요. 그래서 전체적으로 낙관적입니다.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류대영·김흥수 오랫동안 귀한 말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