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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18년 10월호)

 

  미주 지역에서의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김동수 박사 인터뷰 (1)

본문

 

* 이 글은 북미주기독학자회, 조국통일미주협회를 통해 남북통일운동에 참여한 김동수 박사와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인터뷰 당시 김동수 박사는 미국 버지니아주 노폭주립대(Norfolk State University)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류대영 교수(한동대)와 김흥수 교수(목원대)가 질문했다. 이 인터뷰는 2002년 12월 12일 목원대학교 김흥수 교수 연구실에서 이루어졌으며,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받은 한신대 프로젝트(“한국개신교가 한국근현대의 사회 문화적 변동에 끼친 영향 연구”)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한신대 학술원 신학연구소의 허락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류대영·김흥수 선생님은 지금 미국 버지니아의 노폭주립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선생님의 부친인 김예진 목사님이 지금 흑석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묻혀 계신 어른이고, 선생님은 그 둘째 아드님 되시지요? 선생님은 미국에서 7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그 이후에는 통일운동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관계되는 일들을 좀 듣고 특별히 북과 해외 기독자 간 대화에서 이루어진 여러 가지 내용들, 주체사상과 기독교와의 관계 문제, 주로 이런 내용에 관심을 가지고 말씀 여쭈어보려 합니다. 선생님, 일단 간단하게 약력 소개를 해주시죠.
김동수 네. 뭐 특별히 뛰어난 경력은 없고요. 그저 공부한 것은 대학을 숭실대학 나오고, 그다음에 미국에 와서 피츠버그신학교에서 M.Div. 과정 공부하고 피츠버그대학교에서 사회복지 석사 과정에서 공부하고 그다음에 시카고대학교에서 사회복지정책으로 Ph.D.를 받았습니다. 그 중간중간에 1년 또는 2년 또는 3년 이렇게 일한 적이 있고, 공부를 마칠 때 즈음 테네시대학교에서 4년간 가르치고 그다음에는 지금 있는 노폭대학교에서 24년째 가르치고 있습니다.
류대영·김흥수 선생님 선친께서 김 예자, 진자 쓰시는 어른이신데, 그 사모님[한도신, 즉 김동수 교수 모친]이 쓰신 책 『꿈 갓흔 옛날 피 압흔 니야기』(돌베개, 1996)에 소개된 바에 의하면 이분이 아주 애국적이고 감동적인 삶을 사신 것 같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조금이라도 말씀해주시고, 그런 기억이 선생님께서 나중에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참여하시게 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그 대목을 좀 말씀해주시죠.
김동수 네. 아버님이 6・25 때 돌아가셨는데, 제가 그때 나이가 열두 세 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아버님한테 사상교육을 받은 것 같지는 않고요, 또 어머님한테도 무슨 조직적인 의식화 교육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가정생활을 통해서 저의 삶에 어떤 깨달음 내지는 어떤 인식을 할 수 있도록 씨가 심어진 것 같아요.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저희 부모님들이 간간이 지나가는 말로 또는 그분들의 생활로써 상당히 민족주의적인 요소를 많이 심어주신 것 같아요. 그런 내용은 여러 종류의 경험으로써 느낄 수 있었는데요, 예를 들면 저희 아버님이나 저희 어머님은 상당히 민족의 자주성, 그 당시에는 독립운동이란 말로 표현을 했던, 자주성을 찾는 데에 상당히 정열과 힘을 기울이시고, 나라를 찾는 일, 자주 독립을 하는 일을 늘 평생의 지침으로 말씀하시고 실천해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마 제가 자라면서 그쪽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류대영·김흥수 예, 방금 말씀하신 것과 연관되는 내용입니다만, 어머님께서 쓰신 책 말미에 보면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요. 손정도 목사님이라든지, 김형직 선생이라든지 그런 얘기들이 있고, 특별히 북한의 김일성 주석 일가를 개인적으로 아시는 사이였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혹시 그에 대해 기억나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김동수 네. 김일성 생가가 지금의 만경대 있는 곳에 있었고, 그의 아버지 김형직 선생이 제가 알기로는 좀 부한 교회 장로님 묘를 지키는 묘지기로 계셨다고 하더군요. 김 주석의 어머님이 강반석이라고 하죠. 그분들이 평양 밖에 있는 칠골이라는 곳에 사셨는데, 저희 어머님 쪽이 바로 거기서 한 고개 차이 나는 곳에 사셨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고, 그 전에도 말씀하시길, ‘그 집안이 다 애국자 집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이 여러 분 되기 때문에 김일성 주석의 집안이 다 애국자 집안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얘기를 여러 번 하셨어요.
그리고 김일성 주석이 어렸을 때 이름은 제가 알기로는 성주라고 했고, 한때는 한별이라는 이름도 쓰셨고 그러다가 해와 같은 별이라고 해서 일성으로 바뀌었지요. 저희 어머님은 그분 어렸을 때 자라는 것들을 다 보았고 그 집안을 대개 다 알고, 그 친지 되는 분으로 강량욱 목사님이라고 있었는데 그분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합니다.1 김일성 주석의 어머님은 상당히 돈독한 기독교인이었던가 봐요. 김 주석도 교회에 어렸을 때 나오시고 그래서 어머님이 잘 아신다고 그러셨죠.
류대영·김흥수 그것은 김일성 주석이 하는 말과 일치하는데, 그의 기독교적 배경에 관해서는 교회사적으로 더 규명해야 될 것으로 보입니다.
김동수 예. 그것에 대해서는 제가 자세히 듣지 못했어요. 제가 들은 것은 이제 항일운동을 많이 한 집안이라는 것이었죠.
류대영·김흥수 김 주석 회고록에 보면 교회에 다녔다는 얘기는 쓰고 있는데, 그 어머니도 쉬려고 갔지 신앙이 있어서 간 건 아니고 부친 김형직 선생도 숭실학교 다녀서 주위에 기독교인이 많이 있었지만 김형직 자신은 무신론자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랬던 것인지?
김동수 저도 그걸 자세히 모르겠어요. 근데 저희 아버님도 숭실학교를 다니셨는데 제가 생각하기로는 아마 저희 아버님이 [김형직보다] 2년 정도 후배가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그 당시에 제가 듣기로는 그 학생들은 상당히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또 선교사들의 횡포에 대해서 항의하는 그런 반미적인 색채도 많이 띠고 있었고, 그래서 숭실학교에서 스트라이크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요. 그 당시에는 왜 스트라이크 하는지 잘 이해 못했지만 저희 부친도 가담했죠.
제가 듣기로는 그 당시에 숭실학교의 전체 분위기가, 물론 기독교적인 사람들이지만은 또 반면에 상당히 반미적인 요소도 있었고 사회주의적인 요소도 지니고 있지 않았는가, 이렇게 생각돼요. 그래서 장로나 집사 같은 성도들도 교회에 대해서 상당히 반항적인 그런 태도도 보이고 기성교회에 대해서는 상당히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생각에는 이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불신자라고 자처하고 나설 만한 근거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이 정말 기독교인이었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어요.
류대영·김흥수 결국은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것은 최소한 김 주석의 외가 쪽은 신앙이 있는 집안이고 특별히 강반석 씨 같은 경우에는 신앙이 돈독한 분이었다는 것이죠?
김동수 앞에서 말씀하신, 강반석 씨가 교회에 쉬러 간 것이지 예수 믿어서 간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아마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여자분들 대부분 무학이었기 때문에 성경을 읽지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이고 그래서 설교할 적에 알아듣지 못하는 분이 많았고, 집에 와서는 죽으라고 일을 하고 그러니까 좀 심신을 쉬러 가는 그런 경향도 있었나 봐요. 그런 의미로 볼 때 쉬러 간다는 뜻도 될 수 있었을 거예요.
류대영·김흥수 그때가 김 주석이 아주 어렸을 때니까 그 양반 기억으로는 그렇게 들을 수도 있겠네요.
김동수 그리고 사실 많은 분들이 예배가 길고 알아듣지 못하는 얘기를 하고 그러니까, 좀 졸고 그런 경향이 있었으니 그렇게도 볼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린 김성주로서는 우리 어머니가 교회 가서 푹 쉬더라, 이렇게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류대영·김흥수 미국은 몇 년도에 가셨습니까?
김동수 1961년도에 갔습니다. 제가 대학을 마치고 군대를 2년 반을 하고 그다음에 곧 갔지요.
류대영·김흥수 5・16이 그해였지요?
김동수 네. 그때였지요. 제가 떠날 그때 박정희 씨가 지프차 타고 기관총 지닌 호위병들과 같이 다니던 걸 봤습니다.
류대영·김흥수 가셔서 결국은 시카고대학에 몇 년도에 가셨습니까?
김동수 71년도에서 74년까지 있었죠.
류대영·김흥수 시카고대학에 가신 직후에 유신이 들어섰죠?
김동수 그렇죠. 가자마자 유신이 난 거죠.
류대영·김흥수 유신이 계기가 되어서 시카고 지역에서 결국은 해외동포들의 민족운동이 일어났을 때 선생님께서도 거기서 활동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된 것인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김동수 예. 오래된 얘긴데, 물론 제가 사회복지학 공부를 하면서 인간의 권리, 자유, 사회정의, 이런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죠. 그런데 그때 소위 정치성을 띤 사회운동이라든가 이런 건 한 일이 없었고요. 시카고대학에 가서 공부하면서 유신이 날 때에 ‘아 이것은 아니구나’, 이런 것을 느꼈어요. 특히 남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쿠데타 같은 것을 보고서 한국도 그렇게 되는구나, 특히 미국의 지배를 받는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서 또 군사 쿠데타를 하는구나.
유신이 나자마자 저는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공약이라든가 하는 것도 읽어보니까 허위 같고, 처음부터 이것은 장기화될 것이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뭔가 해야 할 텐데, 학생으로서 뭘 하겠습니까? 학생들 좀 조직해서 활동을 해야 되겠다 마음먹고서 거기서 박사과정에 있는 분들 몇 분, 지금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홍영 박사, 또 현순호 목사 등 몇이서 만나 무엇을 좀 해야 되겠다 해서, 사실은 유신 나고 한 일주일쯤 된 후에 저희가 유신 반대하는 선언문을 작성했습니다. 그래서 전국에 있는 한인 학생들에게 호소하는, 유신을 반대하자는 운동을 전개하자고 선언문을 만들고 행동요강을 몇 개 정하고 어느 날은 전부 다 금식을 하자고 하고, 이런 반대 운동의 파급효과를 위해서 서로 연락하자고….
류대영·김흥수 그분들이 주로 기독교인들이었나요?
김동수 아니요. 이홍영 박사도 아니고…. 그래서 행동요강을 작성하고 한 서너 가지 문서를 만들었어요. 그것을 한 3,000장 정도 찍어서 돌리려는데 다들 나서서 못하는 거예요. 잘못하면 중앙정보부에 의해서 납치되어 간다느니, 흑인 시켜서 죽인다느니 하는 루머가 많이 돌 때입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못하고, 그 선언문을 어떻게 돌리느냐가 또 문제였지요. 별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하룻밤은 모여서 문 다 잠그고 커튼 다 내리고 3,000장을 전부 다 접고 봉투에 넣고 우편으로 보내기로 했어요. 지문이 묻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손에다 스카치 테이프를 붙이고 3,000장을 전부 다 봉투에 써 보냈는데 이걸 다 한군데서 보내면 학생 주도자가 드러날 테니까 일단은 제가 책임지기로 했지요. 왜냐하면 그전에 이승만 때에 미국에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써서 보낸 일이 있었는데 그 지역의 학생들이 수난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학생활동을 많이 하는 리더급 학생을 골라낼 수 있으니까, 대사관에서 그걸 색출해서 여권 연장을 안 해줘서 수난을 당했다는 그런 얘기가 있었죠. 그런 경험도 있고 그래서 이것을 시카고에서 보내면 빤히 드러날 거다 그래서 누군지 모르게 단체 이름을 만들어 가지고 보냈지요.
류대영·김흥수 이름을 뭐라고 하셨어요?
김동수 글쎄요. 제가 정확하게 기억을 못 하겠어요. 사실 문서가 어디 있을 거예요. 무슨 재미유신반대학생투쟁위원회 그런 이름을 적당히 지었어요. 이제 3,000장을 어디서 붙여야 할 텐데 겁이 나서 시카고에선 못 붙이고, 미시건에 칼라마츠라는 조그만 동네가 있는데 그때 마침 거기서 정치학자들이 유신 문제에 대해서 세미나를 하기에 거기에 갔지요. 거기에 가서 동네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한군데가 아니라 우체통 200개쯤에 나누어서 넣었죠. 저녁 때 컴컴할 때 돌아다니면서 그 동네 우체국 통에다 그걸 다 집어넣었어요. 그것을 넣고 그 심포지엄에 참석했지요. 참석했는데, 거기 가니까 미국 정치학자들도 좀 오고 한국 정치학자들이 많이 왔어요. 그래서 ‘유신, 이게 뭐냐’ 논하는데 얘기가 갈라지더라고요. ‘이건 안 된다’, ‘이건 옳지 않다’, 주로 미국 교수들은 ‘이건 나쁜 것이다’, ‘이건 민주화를 죽이는 것이니까 안 된다’ 그러고, 한국 학자들은 대개 논조가 ‘이건 불가피 할 거다’, ‘좋은 건 아닌 줄 아는데 지금 형편으로 봐선 아마 이것이 불가피 할 거다’ 뭐 이런 논조로 나오더라고요.
류대영·김흥수 그럼 그때 한국 학자들이 한국에서 온 분들인가요?
김동수 아니요. 다 미국에 있는 재미 정치학자들이에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한 40명이 왔었어요. 그때 온 미국학자 중 한 사람이 화가 나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나가니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독재자하고 너희들하고 똑같다. 왜냐하면 그걸 받아들이는 너희나 독재자나 결국은 손 맞아서 그런 것이니까’ 그렇다는 것이죠.
재밌는 건 제가 뒤에 가만히 앉아서 말 한마디 안하고, 정치학자들은 [서로] 다 아는데 나만 엉뚱하게 나타난 거죠. 나중에 안 얘긴데, 그 사람들이 제가 정보부에서 온 사람인 줄 알고, 전혀 모르는 친구니까요, 제가 중앙정보부에서 온 사람인 줄 알고 떨었다는 거예요. 서로 무서워하고 저는 또 말을 잘못하면 본색이 드러날 것 같아서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었죠.
그래서 그렇게 보내고 그 후에 이제 김대중 씨가 시카고로 왔어요. 그래서 처음 유신을 반대하는 강연을 했어요. 그분이 공공연하게 나선 처음이죠. 72년 10월 유신체제 직후예요. 저는 누가 주최를 하며 어떻게 그분이 왔는지 몰랐는데, 저는 또 그것을 이용해서 유신 반대운동을 해야겠다 생각해서 팜플렛을 잔뜩 만들어가지고 가서 또 거기다 그걸 다 뿌렸죠. 근데 그때 굉장히 많이 왔어요. 처음으로 한 1,200명이 왔어요. 아마 시카고 역사상 최초로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모였다 그러데요.
류대영·김흥수 주로 다 한인 교포들이겠네요.
김동수 네. 교포들이죠. 김대중 씨가 아주 굉장히 강렬하게 나오더군요. 그러니까 굉장히 신이 났죠. 한 1,200명 모였으니까 굉장하죠. 그런데 거기에서도 막 또 야유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네가 뭔데 그러냐고. 그래도 대세가 그러니까 거기서 굉장히 신이 나서….
그런데 거기에서 제가 최명상이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분은 서울대학 상과대학을 나왔죠. 굉장히 명철하신 분인데 독일 광부로 가셨다가 이제 결혼하고 시카고에 와서… 그분 호남 사람인데 아마 김대중 선생하고 친분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분이 그 강연을 주선한 거예요. 저는 모르고 간 거죠. 가서 저는 저대로 그걸 뿌렸죠. 그러니까 그 사람은,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 사람 나름대로 어떤 프락치가 와서 이상한 삐라를 뿌렸는데 이게 또 누군가 그걸 의심하고, 나중에 이제 운동 같이 하다가 알게 됐습니다만….
류대영·김흥수 돌아가는 얘기이긴 하지만 아까 3,000장 뿌린 것은 반응이 뭐 좀 있었습니까?
김동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있을 수가 없죠. 아무것도 없는 엉터리 이름도 갖다 붙이고 일방적으로 보냈으니까요. 받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받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달라고 그랬으니까요.
류대영·김흥수 행동강령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김동수 별거 없었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제 어느 날 다 같이 금식을 하고 그다음에 이것을 받는 대로 복사해서 다른 사람에게 돌리자. 그다음에 교회에, 그 당시 한인사회라는 것은 한인교회였으니까요. 한인교회에 전하고 목사님들한테 설명을 하고 이걸 좀 널리 알리자고 하고, 그다음에 각지에서 학생회가 이걸 토론하고 이 문제를 생각하고 투쟁하자 뭐 이런 정도의 것이죠. 저도 그때 뭐하는지 모르면서 그냥 흥분이랄까 울분에서 한 거니까 무슨 뚜렷한 행동강령에 대한 철학은 없었어요. 그냥 그저 무언가 해야 되겠다는 정도의 내용이었죠.
류대영·김흥수 김대중 씨 강연회에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최명상 씨는 그분 나름대로, 결국은 이제 일을 하는데 우연히 만나시게 된 거죠?
김동수 그래서 거기서 만나서 서로 알게 된 거죠. 그 당시에 독일에서 광부 하다가 시카고 온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제가 알기로는 몇백 명 되는 걸로…. 그 사람들이 굉장히 단결력이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은 대학까지 나온 사람들인데 광부를 한 거죠. 그때 한국에서 나갈 길은 유학 아니면 아마 중동의 노동자로 가거나… 독일의 광부로 가는 게 해외 영역으로는 처음이죠. 그때 대학 나온 분들도 많이 가시고 그랬는데, 그래서 그분들이 거기 갔다가 독일 그냥 있을 수도 없고, 한국에 돌아오긴 그렇고 그러니까 이제 미국으로 많이 넘어 왔어요. 합법적으로, 불법적으로 많이 넘어오고, 그리고 간호사들이 많이 갔잖아요. 그 당시에 미국의 간호사 수가 절대 부족했기 때문에 간호사면 무조건 들어올 수 있을 때거든요.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이 광부 남자들이 여자 간호사들하고 결혼해서 미국을 굉장히, 수백 명이 들어왔어요. 아마 수천 명 들어왔을 거예요. 시카고에만 수백 명이 들어왔어요. 이제 서로 도와주고 상부상조하는데 그분은 알고 봤더니 그분 밑에 동지, 친구들이 많았어요. 많으면 한 30명, 보통 모이면 20명 정도 됐어요. 그래서 시카고 대학생들하고 이분들하고 손을 맞잡은 거예요. 일이 잘 되는 거예요. 우리는 작전 같은 것을 세우고 무슨 글 쓰는 것 이런 걸 하고, 그분들은 행동 대원으로 예를 들면 무슨 삐라 같은 걸 붙인다면 그분들한테 맡기면 쫙 다 붙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분들하고 활동을 잘 했지요.
류대영·김흥수 그분들도 나이가 많지 않았죠?
김동수 아니죠, 그 당시에 30대 중반, 아주 젊진 않았고요. 그분들 대부분 고생들 많이 하시고 의분을 지녔고, 대부분 사람들이 호남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무슨 이념적으로 정립된 사람들이라고 볼 수는 없고요, 그저 저 군인놈들 나쁜 놈들 하는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다음에 시청 앞에서도 데모를 여러 번 하고 그때 같이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서 또 하나는 맥코믹신학교에서 거기 이제 한국 학생들이 많이 와 있었어요. 그때 거기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 열 명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호응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전 또 그분들하고 합쳤지요. 그리스도인 동지회, 민주화를 위한 그리스도인 동지회, 그래서 그분들하고도 활동을 많이 했지요. 거기서 선언문을 많이 만들었죠.
류대영·김흥수 어떤 분들이 있었지요?
김동수 김중기 목사, 고재식 박사 등 여러 분 계셨어요. 미국에 계신 분 중에 안마태 신부님이 계시죠. 차현희 목사님도 계셨고요. 그래서 그리스도인 동지회 이분들하고 활동했는데 한때 20명 정도 되었어요. 그런데 특색이, 주로 모여서 공부를 하고 토론하고 선언문을 발표했죠. 독일 광부 그룹하고는 행동을 하고 데모하는 일 등을 했죠. 그런데 저는 양쪽 일을 다 하다 보니까 어떤 땐 어려운 일들이 있었어요. 사실 제가 합치려고 했었는데 그게 잘 안 되더군요. 그리고 또 저는 엘리트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오히려 순수하고 활동하기 좋다고 느꼈기 때문에 늘 그 사람들하고 모여서, 설명만 잘해주면 되거든요. 그분들이 설명만 잘 해주면 오히려 더 호응을 하니까 좋은데, 오히려 많이 배운 사람들은 쉽지가 않지요. 행동은 못 하고 그냥 선언만 하고 내가 좀 불만을 가졌지요. 이분들도 좀 행동을 해야 할 텐데, 발표야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두 그룹이 잘 합치지 못하고, 저는 양쪽 다 활동을 하고 있어서 자꾸만 어느 쪽으로 낄 건지 결정하라는 독촉도 받고 양다리 걸치고 있다는 소리도 듣고 그랬죠.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건 시카고에서는 그 당시 ‘핑크 포스터 사건’이라고 유명합니다. 반독재 활동을 한다는데 별 성과가 없잖아요. 저희는 데모할 때는 신문에라도 한 번 날 것 같고 그랬는데, 그게 잘 안 돼요. 데모하고 활동해도 누가 거기에서 반응도 안 하고 한국교회도 반응도 안하고 오히려 냉담하고요. 그래서 좀 더 과격한 행동을 하자 그래서 포스터를 좀 붙이자.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면, ‘현상수배 민주주의 살해범 박정희’ 하고는 사진을 붙였어요. 이런 사람을 보면 살았거나 죽었거나 잡아오라 하고 좀 과격하게 썼죠. 그다음에 무슨 민주투쟁전선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그랬죠.
그런데 한글 타자기가 없었던 게 힘들었죠. 교회에서 빌리려 했는데 활자체를 보면 어디 교회 것인가를 안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도 거절당하고 할 수 없어서 목사님 모르게 타자기를 썼지요. 그다음에 대학교 출판사에 가서 그것을 수백 장 찍었어요. 그런데 그때 마침 눈에 잘 띄는 오렌지색이 떨어졌대요. 그리고 핑크색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로 찍기로 하고 표구 만드는 전문가가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잘 만들었죠. 그리고 한 20명이 밤에 나가서 종이 붙이는 데에다가, 전선대에도, 한인교회 앞에도, 심지어는 교회 문에다가, 한국 사람들이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데다 붙였어요.
그런데 핑크색에다가 박정희 사진 있고요, 그걸 보고 사람들 전부 다 쇼크를 받게 된 거예요. 토요일 밤에 그렇게 했는데 그다음 날, 주일날 사람들이 와서 보니까 교회 문 앞에 그 포스터가 있는 거죠. 사람들이 쇼크를 받았어요. 사람들이 면도칼로 긁고 그랬어도 그래도 눈에 띄는 거예요. 총리가 오는데 대사관 앞에 그것이 다 붙어 있으니까 대사관 직원들이 곤란을 겪었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은 큰 조직이 한 짓이라는 계산도 했다더군요.
류대영·김흥수 그런데 지금 1970년대 초반 유신체제 직후 시카고 지역에서의 민주화운동 태동 과정을 말씀하고 계신데 그런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시카고 지역 교회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김동수 극히 일부의 목사님들 빼고서는 무관심 내지 거부였지요.
류대영·김흥수 그러면 미국 교회들이 민주화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지난 후의 일입니까?
김동수 처음에는 반응이 없다가 교회가 탄압을 받는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소위 정치[참여] 목사님들이 감옥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그 후에는 미국 교회들이 더욱 적극적이었죠. 노회에 가서 소송을 하라고 하기도 하고 그랬죠.
류대영·김흥수 그 시기에 시카고에 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한인들이 살고 있는 LA나 뉴욕 같은 데서도 일어났을 텐데, 다른 지역하고 민주화운동이 연결된 것은 언제부터였습니까?
김동수 김대중 강연회 끝난 다음에 포스터 사건 난 때부터 이미 워싱턴에서는 한국민주화통일촉진회라는 것이 조직되었죠. 김대중 씨가 참여했고 거기에 관여했던 분들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장승남 씨가 워싱턴에서 정치학 하신 분인데, 그분이 「자유공화국」이라는 신문을 냈는데, 그 신문이 오래 못 갔지만 민주화운동에 상당히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매개체가 되어서 한국민주화통일촉진협의회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전국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죠.
그런데 어느 날 포스터 남은 것 붙이다가 우리 조카가 체포된 적이 있었어요. 나는 그때 붙이다가 피했는데, 나중에 찾아가서 보호자로 행세해서 찾아가서 보니까 별 법적인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경찰에서는 특정한 목적이 있던 거예요. 핑크 포스터의 정치적 배후를 빨갱이로 의심해서 이런 포스터를 붙이는 사람들을 잡으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잡았는데 잡아놓을 법적 근거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백 몇 년 된 공공 재산에다가 [포스터] 붙이는 것으로 손상을 입혔다는 혐의 등으로 잡아넣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보석을 해서 빼내고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재판을 할 때 벌써 한민통 사람들이 워싱턴에서 FBI와 교섭을 해서 좌익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정치적 타협을 통해 좋게 해결했죠.
나성에 계신 분들이 차상달, 전 서울시장 김상돈, 홍동근, 노의선 목사님 등이 계셨죠. 차상달 선생님은 퀘이커교 지도자였죠. 그리고 좀 젊은 층에 속한 분들 중에 김은하 선생이 있었고 그분이 「신한민보」라고 ‘월드 코리아’라는 잡지를 냈는데 그것이 민주화운동에 기여를 했죠. 시간이 가고 차차 운동이 연결되면서 그런 분들과 알게 되었죠.
류대영·김흥수 그러니까 사실은 시카고에는 선생님과 동기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LA는 LA로 대로 또 그런 운동이 있었을 것이고, 뉴욕이면 뉴욕, 이렇게 점점 알려지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조직이 된 것이군요.
김동수 네. 그 당시에는 김대중 선생이 일본에 가기 전까지는 그분의 정치가 반체제적으로 공격적으로 나갔으니까 그분을 중심으로 뭉치는 경향이 있었지요.
류대영·김흥수 기독학자회 조직이 언제 되나요?
김동수 67년쯤이죠. 조직은 손명걸 목사님, 김용복, 이승만 목사님, 이 세 분이 주로 중심이 되어서 조직되었던 것 같습니다.(“김용복이 학술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설립 주도는 이승만 박사와 손명걸 목사였습니다. 두 교단의 행정지원과 재정을 얻어내었으니까요.”–2018년 9월 14일 김흥수의 추가 질의에 대한 답변) 그런 분들이 조직을 하고, 모이는 것은 신학교에서 모였어요. 그때 서광선, 한완상, 김병서 이런 분들을 알게 되었죠. 그 이름은 이승만 박사가 붙인 것이죠. 이승만 목사님과 손명걸 목사님이 재정적인 뒷받침을 많이 했어요. 그때에는 학생들이 오는 게 문제였어요. 돈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 목사님들의 후원으로 계속될 수 있었지요. 그 당시에는 아마 그 단체가 학생 단체로서는 유일했지요.
류대영·김흥수 미국에서 기독교인들의 민주화운동이 기독학자회라는 이름으로 결집되는 것이죠?
김동수 그 당시에는 아니었죠. 모여서 늘 연구하고 교류하는 정도로 모였는데, 중반을 넘기고 무슨 목적 같은 것을 세우자, 그래서 목적으로 그 당시에 가장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반독재라는 목소리가 상당히 높아지고 공공연하게 반대하고 나섰지요.
류대영·김흥수 회원이 얼마나 되었지요?
김동수 한때 많았을 때는 한 150명이 모이기도 했었어요. 시카고에서 모일 때가 75년, 76년에 손 박사님이 회장이 되시고 제가 총무가 되었지요. 손 박사님이 활동하기 어려운 동네에 있어서 제가 모든 잡일을 다 했고 제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류대영·김흥수 그 당시 회의록이나 회지는요?
김동수 제가 넘길 때에 박스로 세 박스 정도였어요.
류대영·김흥수 어느 분이 가지고 계신가요?
김동수 지금 이상현 박사가 회장인데 그분이 아마 가지고 계실 거예요. 20주년 때 그것으로 책을 쓰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힘들더라고요. 그 자료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 이상현 박사가 가지고 있죠. 자료를 누군가가 정리할 것으로 기대하고 모아놓은 거죠. 기독학자회가 반정부 내지 민주화운동을 하고, 그다음에 광주혁명 이후로는 통일 문제로 넘어갔거든요.
거기에서 또 기독학자회가 굉장히 활발하게 통일 문제를 들고 나왔어요. 특별히 북한의 기독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교류를 시작하고, 가장 큰 공을 한 건 이북 사람들을 [해외로] 데려온 것이죠.
류대영·김흥수 그건 이제 나중이죠.
김동수 예. 80년대 후반.
류대영·김흥수 7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고 그 과정에서 기독학자회도 생겨나고 이렇게 된 거죠?
김동수 아니, 기독학자회가 있었는데….
류대영·김흥수 아, 60년대부터 있었는데, 기독학자회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도 하게 된 거죠. 논의도 하고….
김동수 사실 한때는 기독학자회가 가장 강력하고도 잘 알려진 민주화 내지 통일 운동체였지요.
류대영·김흥수 그러면 70년대 중반부터 기독학자회가 많이 알려졌겠군요.
김동수 네, 그렇죠. 뭐 전국적으로 한국 학생들이 모이는 데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다른 건 없었으니까요. 학회가 좀 있었어요, 특히 정치학회 같은 데서는. 뭐 그렇지만 한국 사람들이 모이는 데는 없었어요. 왜냐하면 비용 관계 때문에 우선 불가능했어요. 지금처럼 뭐 자기 비용으로 올 수 있는 것은 굉장히 못 됐으니까요.
류대영·김흥수 방금 말씀하셨지만 결국은 이제 광주항쟁이 기점이 되어서, 과거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이제 통일운동으로 넘어가는 거죠? 그 전이되는 과정을 한 번 설명해주십시오. 어떻게 해서 통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고 어떻게 해서 통일운동으로 넘어가는지.
김동수 예. 기독학자회가 그렇게 되는 그 이면에는 또 다른 계획이 있었어요. 뉴욕에 임순만 박사님 계시고요, 그다음에 임창영 박사 있었고요, 뉴욕을 중심으로 해서 그 민주화운동을 하던 분들이 한 10명 내지 15명이 결속이 되어 있었어요. 이건 기독학자회와는 별도로. 그 사람들이 목요기도회도 했고 단체 이름이 기독교동지회인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네요.
류대영·김흥수 기독자동지회라고 일본, 한국, 유럽,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만든 조직이 있었지요.
김동수 네. 아마 그 명칭일 것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대개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때 선우학원 박사님이 교환교수로 뉴욕에 가 있었어요. 이승만 박사도 뉴욕에 있었어요. 이승만 박사, 선우학원 박사, 임순만 박사, 사실 임창영 박사는 좀 후에 있었고, 하여간 그런 분들이 10명 내지 15명 정도 있었는데, 김상호 목사도 맥코믹신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분이 이승만 박사보다 나이가 몇 살 아래죠. 그런 분들이 중심이 되어서 내 생각에는 기독교동지회라는 것을 세웠어요.
그분들이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셨어요. 그러니까 기독학자회는 시카고에 있는 단체고 이 사람들은 뉴욕에 있는 로컬 그룹이죠. 로컬 그룹인데 그분들이 목요기도회라고 해서 민주화운동을 위한 기도회도 했었고, 늘 모여서 친교도 하고 그러니까 이제 한반도의 새로운 변화가 와야 된다고 늘 느끼면서 했는데, 그게 이제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분들이 몇이 있었는데, 그중에 이승만 목사, 선우학원 박사, 이분 배경을 보시면 알겠지만 상당히 좌경 학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이제 이런 분들이 얘기하는 중에 우리가 필요하다면 북한 사람들하고도 만나자… 그 당시에 북한 사람들을 만나겠다는 발상 자체가 벌써 용납 안 될 때인데, 그 그룹에서 우리가 필요하면 그 사람들하고 만나자 접촉하자 대화를 해보자. 그러니까 마치 그 전에 있었던 동백림 사건처럼 그 사람들하고 접촉한다는 것 자체가 범죄 행위처럼 느낄 땐데, 그걸 하자고 내적으로 의논이 된 거죠.
류대영·김흥수 그게 언제쯤인가요? 70년대 후반인가요? 아니면….
김동수 후반이죠. 근데 광주항쟁 훨씬 전이죠.
류대영·김흥수 이승만 박사가 북한에 갈 무렵….
김동수 그 전이죠.
류대영·김흥수 이승만 목사님이 78년에 가시거든요. 처음으로. 그러니까 그 이전이라고 봐야겠네요.
김동수 네. 그 전일 거예요. 이것은 저도 잘 모르는 거예요. 저도 잘 모르는데, 저야 뉴욕에 안 살았기 때문에 그 그룹에 끼질 못하다가, 어떻게 가서 만나고 또는 김상호 목사님을 통해서도 알고 이승만 박사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알았지 저는 그 그룹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김재준 박사님이 토론토에 계셨는데, 뉴욕을 자주 드나들면서 결국은 이 그룹의 장 격이 되었죠. 김재준 목사가 이 그룹의 정신적인 지도 역할을 하고, 선우학원 박사가 손발 노릇을 했다고 볼 수 있죠. 그 그룹에서는 우리가 필요하면 사탄도 만날 수 있다, 북한도 만날 수 있다, 접촉하자 이런 얘기가 나온 거예요. 그러다가 이제 한번은 기독학자회에서, 선우학원 박사님께서 공공연하게 제안을 한 거예요. 기독학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원수도 사랑하고 그래야 할 텐데 우리가 기독교 지식인이라고 하면서 한반도의 분단을 이렇게 모른 척하고 살 수 있느냐, 이렇게 우리가 희생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나서서 어떻게 대화할 길을 열어보자 그래서 그것을 제의한 거예요.
류대영·김흥수 기독학자회가?
김동수 기독학자회에서 발표한 거예요.
류대영·김흥수 선우학원 선생님이….
김동수 네. 하자 제의를 한 거예요. 그걸 제의했다는 자체가 사건이에요. 그래서 거기서 막 논란이 많았어요. 그때 거기에 상당히 많이 모였는데, 기독교인 아닌 사람들도 꽤 많이 오고 그럴 땐데, 와 보니까 뭐 이북 사람들하고도 접촉하자 어쩌자 그러니까, 그래 이게 뭐냐 그랬지요. 제가 총무 할 때, 제 생각으로는 76-78년 땐데, 민주화운동 너무 지나치게 한다고 해서 명단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빼달라고 요구했던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왜냐하면 뭐 좀 이상하고, 그때에는 통일 문제 하지도 않을 땐데, 민주화운동 할 땐데, 지나치다고 그래서 자기네들은 멤버였던 것에서 빼달라고 그런 거예요. 한때는 명단에 한 500명 있었어요. 기독학자회에는 한 150명. 물론 다 멤버라고는 볼 수 없지만요.
류대영·김흥수 논란이 있다가, 이승만 목사님은 78년도에 북한을 가시거든요. 그것이 거의 처음 아니었습니까?
김동수 아마 그 전에 갔다 온 사람도 있어요.
류대영·김흥수 누가 갔다 오셨나요?
김동수 임창영 박사가 갔다 왔고요.(임창영의 첫 방북은 1979년이다.
- 편집자 주) 그다음에 양은식 박사가 갔다 오고. 근데 다 비밀리에 했어요.
류대영·김흥수 그러니까 78년 이전에?
김동수 예. 이승만 목사도 갔다 올 때 몰래 갔다 오시고, 그때는 갔다 왔다 하는 것 자체가 범죄였으니까요. 노광옥 선생도 갔다 왔지요.
류대영·김흥수 성직자 층에는 없었죠? 78년 이전에….
김동수 음, 대강 몰라요.
류대영·김흥수 당시 양은식 선생은 학교에 계셨습니까?
김동수 그분이 전임 직장은 없었고, 무슨 학회 같은 것을 하고, 고려연구소라는 것을 만들어서 하고, 그다음에 남캘리포니아대학에 강사로 나가시고 그랬죠. 그때 갔다 오신 분들은 후에까지 전부 다 비밀로 했죠. 임창영 박사는 분명히 정치적인 색채를 띠고 갔다 오신 것이죠. 결국 김일성 초청을 받은 사람이 또 있었던 모양인데 못 간 분들도 꽤 있고….
기독학자회에서 비판이 있었던 것은, 아까 소그룹 사람들이 기독학자회도 핵심 멤버였기 때문에 회장도, 총무도 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중심으로 해서 강압적으로 밀고 나가자 하는 그런 것 때문에 암암리에 그런 생각이 있었겠지요.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 기독학자회에서 처음으로 선우학원 박사님이 북한하고 접촉을 하자 제의를 했고, 거기에서 난리가 나고, 그다음부터는 더 난리가 된 거예요. 그다음에 광주항쟁이 난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그다음에는 기독학자회가 아주 친북 통일 단체로 낙인찍힌 거예요.
류대영·김흥수 이영빈 목사님 글에 보면 1978년에 미주와 캐나다에 있는 동감하는 기독교인 34명 이름으로, 즉 유럽에 있는 기독교인하고 미주 지역에 있는 기독교인 34명의 이름으로 북한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만나자고 편지를 썼단 말이죠. 그 무렵이네요. 뉴욕에서 북한과 접촉하자는 얘기가 나올 때가요.
김동수 그렇죠. 아마 그때가 뉴욕 그룹이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류대영·김흥수 그러니까 미국에서도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고 70년대 후반에 나왔고 독일에서도 나오고….
김동수 독일은 제가 보기에 훨씬 앞섰던 것 같아요. 그 당시만 해도 우리가 선뜻 통일운동 하자고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웠을 땐데, 그 사람들은 상당히 과감하게 그런 걸 얘기한 걸 보면 그분들은 선각자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분들하고 만나면서 이쪽 그룹들이 더욱더… 또 만나게 된 것도 그 사람들이 주선을 했고. (다음 호에 계속)

1 강량욱 목사는 김일성 주석의 외할아버지 강돈욱과 6촌 형제였고, 김 주석을 도와 북조선 건설에 기여했으며, 부주석을 지냈다.

 
 
 

2018년 10월호(통권 7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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