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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18년 10월호)

 

  『충청남도 선유문안』 (忠淸南道宣諭文案) (13)
  

본문

 

* 한자로 쓰인 『忠淸南道宣諭文案』은 감리교 목사 최병헌이 충청남도에서 했던 선유 활동을 기록한 글이다. 선유(宣諭)란 임금의 훈유(訓諭)를 백성에게 널리 알리는 것을 말한다. 최병헌(1858-1927)은 충북 제천에서 출생하여 과장(科場)에도 여러 차례 나갔던 한학자 출신의 목사로 교회 일을 현순 목사에게 맡기고 1908년 2월 6일부터 3월 10일까지 충청남도에서 선유 활동을 한 바 있다.
이번 13회차 연재는 10회에 시작된 ‘일록’(日錄)이 계속된다. 최병헌은 선유 활동을 하며 일어난 일을 날짜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으며, 기록 중간중간에 개인적인 감상을 더하고 있다. 한자 원문에는 없는 글자이지만, 이해를 위해 역자가 해설에 추가한 부분은 대괄호([ ])로 표시하였다. - 편집자 주


일록 (4)
3월 1일 일요일 상오 10시에 출발하여 20리를 가서 강경시장에 이르니 때는 정오 12시 반이었다. 본 군수가 그 면장 방준석(方駿錫)에게 거행하도록 지휘하였다. 하오 2시에 아랫시장 공터에서 선유할 때 모인 사람이 몇백 명인지 알 수 없지만, 오가는 사람들이 번잡하고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소리를 높여서 분명하게 연설했지만 지나치듯 건성건성 듣고 가버리니 한스럽고 개탄스러웠다. 백성들의 미개함이여! 하오 3시 50분에 폐회하였다. 하오 5시에 은진의 일진(日進) 지회장 송석기(宋錫基)와 총무 강세영(姜世永)이 내방하여 몇 마디 나누고 돌아갔다.
같은 날 하오 7시 반에 그곳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였다. 나에게 전도(설교)를 청하여서 사도행전 5장 1-17절을 읽고 “함께 성신을 속이지 말라”를 제목으로 삼고 크고 깊은 뜻을 변론하였다. 9시에 폐회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교우 박준하(朴準夏)와 네다섯 사람이 따라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갔다.

3월 2일 월요일 상오 8시에 석농(石農)과 함께 경포(鏡浦)의 훌륭한 경치(勝槩)를 관람하기 위하여 봉수대(烽燧臺)에 올라 자유롭게 관람하였다. 강경은 포구로서 큰 들판이 편편하고 넓은데, 긴 강이 한가운데를 나누고 평야를 품고 거슬러 올라가다가 방향을 바꾸어 바다로 유유히 흘러 들어간다. 상선이 모여들어서 오가며 윤기선(輪汽船)이 내왕하였다. 강구(江謳)1와 월나라의 노래를 읊고, 오(吳)나라 상인과 촉(蜀)나라의 객들이 서로 물건을 사고파니, 진실로 호서(湖西)의 번화한 큰 시장이다.
푸르른 여러 봉우리는 들 가운데에 바둑판의 줄 같고, 떼를 이룬 물오리와 기러기가 날아서 언덕 위로 모여들었다. 지세의 형편을 살피며 한참 동안 방향과 위치를 찾느라 헤맸다. 혹 돌아다보고, 혹 손가락으로 가리켜 바라보니 강가를 따라 칠팔백 호의 일본인 가옥이 널리 차지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국인의 상점은 어찌 그리 조잔(凋殘)2한지 눈이 닿는 곳마다 마음 상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사군(使君) 이상만이 [우리가] 머무는 여관을 지나가는 길에 방문하였다. 관청 일(公事)을 처리할 것이 있는 듯하여 잠시 집 밖에서 머뭇머뭇하다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날은 경부(警部)가 어제저녁에 그 서(署)로 면장을 불러오게 하여 몇 마디 묻지도 않고 다그치면서 말하기를 “선유위원이 온 것을 왜 통지하지 않았으며, 선유위원은 어째서 내견(來見)하지 않았는가?” 하며 시시콜콜 말했다는 것이다. 이 사군은 벌어진 일의 소재(所在)가 부의 이와 같이 부당하고 방자한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면장에게 말해주었다.
슬프다! 이러한 수치와 모욕은 실로 국권(國權)에 달려 있는 것이니 말해보아야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즉시 숙소로 돌아왔다. 교우 박준하(朴準夏)가 찾아와서 우리 일행을 탁사(托事) 이관하(李寬夏)의 집으로 청했다(邀請). 음식을 정성껏 마련하여 대접하였으니, 이는 실로 서로 사랑하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같은 날 10시에 길을 떠나 북쪽으로 겨우 몇 리쯤 갔는데 작은 나루가 있었다. 이곳은 논산포 하류였다. 지나는 곳 도로에 빗물이 가득하게 넘쳐서 이리저리 구불구불 돌아서 석성군(石城郡)에 도달하였다. 거리가 20리였지만 지나는 데 3시간 이상 걸렸다. 수석 서기 강한익(姜漢翼)이 여관에 나타났다. 잠시 지난 후에 군수 강태현(姜泰顯)이 내방했다. 먼저 부근의 정황에 대해 물었다. 요즘에 귀순한 자가 11명이나 되었고 지경 내에는 경계가 없어졌다고 한다. 이 어찌 군수가 은혜로 교화하는 일이 아니라 하겠는가. 그렇지만 조칙과 효유문을 빠르게 보내어 반포하는 그 후의 일이다. 이렇게 서로를 위하여 돕는 의를 과연 무엇이라 하리요. 다시 더할 수 없는 다행함이었다.
같은 날 하오 3시에 군의 관아로 들어가서 황칙을 선양하고 권유문을 낭독하여 정성껏 선유했다. 각 면장과 [선유하는 일을] 들은 일반 인민은 모두가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나이 많은 부로(父老)들이 서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임금의 은혜가 이와 같이 감격하고 효유가 또한 이와 같이 진실하며 거짓이 없는데(逼眞),3 이후로 다시 외골수로 나아가 완악하여 사리에 어두운 자가 있으면 이는 짐승과 마찬가지로 조악(粗惡)4한 성품을 지닌 자들이라.”라고 하며, “감화를 받지 않은 사람은 누구리요!” 하니, 본 군수 역시 기뻐하는 낯빛이었다.
4시 반에 이르러 폐회하고 더불어 앉아서 이야기할 때, 언뜻 들으니, 조평해(趙平海)가 “본 군수는 과연 치리가 순량하고, 일본인 경부(日警部) 역시 자애롭고 어진 사람”이라 하며, 석성군 지경은 반드시 보존되어 염려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오 6시경에 자리를 파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하오 8시 시(時) 분(分)에 재무서장 이민녕(李敏寧)이 내방하여 내포 지방의 정세와 형편에 대하여 대략 의논하였다. 대저 의병의 형적(影迹)5은 끊겨 없어졌으며, 강도는 이따금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에 그 종적을 실제로 뒤쫓아 밟기는 어려우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그중에서도 비인(庇仁)과 남포(藍浦) 등지는 더욱 심한 모양이었다.

3월 3일 상오 9시 반에 부여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곳에 도착하였더니(臨行), 우연히 전부터 알고 지내던 임온상(林溫相)을 만나서 안부인사를 몇 마디 나누었다. 길에 올라 곧바로 20리 거리에 있는 부여군에 이르렀다. 비석거리에 있는 객사에 여관을 정하니 시간은 이미 12시 반이었다. 청양군에 보내는 공문서(公札)6를 사람을 특별히 전달하도록(專足) 하였다.
하오 1시 반에 군 주사 이중억(李重億)과 서천 재무서 주사 최익환(崔益煥)이 내방하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지방 형편을 상세히 물었다. 수삼 일 전에 저들 무리 몇 명이 청양군에 침입했지만 뚜렷하게 기이한 일은 없었다고 한다. 부여는 잠시 동안 안온한 상태에 있지만, 그 밖의 다른 군 중에서 산에 [인접한] 군은 간혹 좀도둑 떼가 있고, 바다에 [인접한] 군은 혹 수적(水賊)이 있다고 한다. 이들을 경계하고는 있지만 대부분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므로(閃忽) 그들의 종적을 쫓을 수가 없으며, 소위 의도(義徒)들은 자기들이 이미 패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하였다(風聲鶴唳).7
하오 4시 반에 본 군(郡) 읍(邑)에 도달하여 나이 많은 남자들과 각 면, 리의 대표되는 백성을 관아로 초대하여 황칙과 권유문을 낭독 선포하였다. 시기(時機)의 오해함을 설명하고 효유한 후에 고시(告示)와 권유문을 각 면장에게 한 건씩 내어주고(出給) 각 동리에 번역하여 베껴서 차례로 돌아가게 하였다. 조칙과 효유문을 똑같이 반포하여 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폐단이 없도록 한 후에 폐회하였다.
남모르게 군의 현황을 가만히 살펴보니(窃觀), 6개월 관아가 비어 있었고, 또한 서리군수는 한 차례도 군에 온 적이 없어서 제반 사무 모든 것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이른바 군 주사는 일에 붙잡혀서 채워가는 듯 할 뿐이었다. 수석 서기는 명령대로 행하는 것이 몹시 자랑할 만하였다.

4일 수요일 상오 8시에 발행하여 북쪽으로 백마진(白馬津)을 건너서 겨우 10리에 있는 은산 저자에 도착하였다. 앞서 간 두 사람을 만나서 네 사람이 큰 개천을 건너고, 또한 큰 고개 하나를 넘으니 명하여 말하기를 강치현(畺峙峴)이다. 축치(杻峙) 가게에 도착하여 점심을 지어 먹고(中火) 곧 앞을 향하여 갔으며, 또 개천 두 개를 건너서 청양군에 도달하였다. 부여와 떨어진 거리가 누가 말하기를 50리라고 하나 노정(路程)이 가파르고 험하며(崎嶇) 또 멀어서 이미 하오 3시 반을 지났다.
여관에서 잠깐 쉬고 있었는데, 본 군수 황우찬이 내방하였다. 먼저 그 지역의 정황을 물었더니 지난 2월 25일 상오 3시에 폭도 100여 명가량이 군저(郡邸)에 침입하였다고 한다. 갑자기 총을 난사하므로 분파소(分派所) 순사 3명이 소리에 응하여 맞받아서 공격하였다(迎擊). 저쪽의 무리 4명을 그 자리에서 총살하니 저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였고 노획품은 화승총 5자루와 서양총 한 자루였다. 한 차례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이 일대가 잠시 편안하지만, 요즈음 풍설(風說)을 들어보면 저 무리가 공공연히 말하기를(聲言) 장차 다시 크게 일어나서 반드시 군 관아(郡廳)를 없앨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같은 날 하오 4시 반에 황 군수와 더불어 관아 가운데 들어가서 조칙을 선포하고 효유문을 낭독하였다. 그다음에 계속하여서 간절하게 효유하고 조칙과 효유문과 고시와 권유문을 일례(一例)로 나누어주었다. 당일 빗줄기가 그치지 않다 보니 와서 기다리는 인민의 숫자가 불과 20명이더라. 하오 5시 반에 숙소로 다시 와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시 누워 휴식을 취하였다. 7시 반에 본 군수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갔다.

5일 목요일 상오 7시에 본 군에서 부리는 일꾼을 시켜서 대흥과 예산에 공문을 발송하였다. 하오 1시쯤에 내각 보고서와 집에 보내는 서신을 써서 부쳤다. 본 군의 서하면장 진사(進士) 국영렬(鞠永烈), 서상면장 주사(主事) 채동제(蔡東濟), 동하면장 최흠옥(崔欽玉)이 같은 시간에 내방하여 몇 마디 주고받다가 돌아갔다. 채 주사는 곧 이미 고인이 된 교우 교리(校理) 채동섭의 6촌 형제이다. 분파소 경부(警部) 기요우다쇼조(脅田庄藏)가 와서 이르러 지방 형편을 논란(論難)하여 말하기를 “이후로부터 기꺼이 힐책하고 억누르는(彈厭) 수단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다. 오직 안전을 보장하는 방침을 사용하며 만약 귀순자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행동이 바르도록(到底) 감시하고 금하여(監禁) 안녕질서를 유지하기를 기다린다.”라고 말하였다.
하오 2시에 본 고을 수령이 잔심부름하는 사람(通引)8을 시켜서 우리 일행을 청하여 맞이하였다(請邀). 그리하여 관아 가운데 들어가서 밝히 대면하여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떡을 정성껏 마련하여 대접하였다. 그때에 지방위원 이보우(李普雨)가 자리에 있어 이야기를 나누다가 긴급한 일이 있다고 말하면서 먼저 인사하고 갔다.
살펴 들어보니 채동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근일 홍주 지방에 여자의 몸을 입은 요망한 여우가 허깨비로 나타나는 일이 있다고 한다. 이따금 거의 항상 나타나서 어떤 민가에 들어와서 어떻게 모양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없어지는지(變幻) 주인이 오인(誤認)하기를 누군가가 이웃의 예쁜 아이를 그 요물로 시켜서 그 아이의 머리를 빗어주도록 하였다고 알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두 아이는 무고하게 죽음에 이르렀다. 한 아이는 몸이 약하여 갑자기 생각지 아니하였던 질병이 생겨서 거의 구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니 심각한 일이다. 제동지야설(齊東之野說)이여!9 어느 곳에서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자가 이것을 지어내어 와전되고, 입으로 전하여 퍼져서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眩惑)하고 인심을 선동하는 것인가! 진실로 통탄할 일이로다.
본 수령은 상당한 정도로 옛것을 혁신하는 안목과 개명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잘못된 소문(騷訛)10을 귀 너머로 들을 뿐 옳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무릇 행정상에 백성을 깨우치기를 원하지만 일을 함에 있어서 어리석은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下愚不移)11 그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서로 더불어 개탄하였음이라. 하오 6시경에 숙소로 돌아왔다.
하오 8시에 채동제가 숙소로 찾아와서 이 지방의 풍속(土風)을 개략적으로 이야기하였다. 이전부터 전답(田畓)에 대한 조세(結稅)12가 헌납하여 처리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의례(依例)이 농사짓는 사람(作人)이 혼자서 감당한다는 것이다. 병작(幷作)13을 처리하는 것은 땅 주인이 농사짓는 사람이 더불어서 나누는데, 풍년을 만났다면(逢年) 그런대로 혹 가하겠지만 흉년이 들면(謙年) 그 소출로 전체의 수량(盡数)을 납세하여도 때때로 부족하여 탄식한다. 부자는 오히려 좋은 일일지 모르지만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은 괴로움뿐이다.
본 군수 황우찬은 백성들이 겪는 괴로움(民隱)14을 통찰하고 일체 개혁하여 병작하는 곳은 논 주인이 단독으로 마땅히 납세케 하였다. 무릇 논주인 되는 자들은 비록 대부분 말하기를 불가하다고 말하지만, 관(官)에서부터 엄하게 과정(科程)을 세워서 작년 가을 이래로 마침내 실시하였다. 그것이 농민에게 은혜를 입게 하니(蒙惠) 훌륭하도다! 그래서 모두 그 덕을 기리어 여러 사람이 비석을 세우자고 하였다. 그러나 혹 군수가 바뀌어 간 후에 나쁜 바람이 다시 불까 하여, 행하기로 했던 날 이후로 세금을 공평하게 거둔 것을 헤아려서 기념비를 건립하기로 하였으며, 일반 농민이 바야흐로 그 가부를 의논하는 중(擬議)15에 있다고 말하였다.

3월 6일 금요일 상오 10시 반에 청양군 시장에서 인민 수백 명을 함께 모아놓고 지극한 정성과 간절하고 측은한 마음으로 일장 효유하였으며, 조칙과 효유문 각 100장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모든 선비와 백성이 다투어 먼저 받으려고 하니 민심이 기쁜 마음으로 순종함(悅服)은 이를 추측하여 알 수 있었다. 상오 12시에 폐회하였는데 본 고을의 수령이 흡족해 하였다.
겨우 관아에 돌아왔는데 어떤 촌민 한 사람이 공당(公堂) 앞에서 따라 들어가기를 허락해달라고 하였다. 그 죄를 자복하고 문빙 받기를 원하니 금일의 선유는 과연 보건대 당장에 실제로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인의(仁義)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영향을 빠르게 받은 것은 우리 황상의 큰 은혜(洪恩)와 큰 덕이 멀리서 또 가까이서 두루 퍼짐(普洽)이 아닌 것이 없음이로다.
같은 날 오후 1시 반에 길을 떠나서 곧바로 40리에 있는 대흥군에 도달하니 시간이 꼭 하오 5시 15분이라. 그곳 군수 김윤수와 주사 이기완이 곧 숙소에 내방하여 날씨에 관한 인사의 예를 마치었다. 곧 본 군의 정세와 형편을 물은즉 지난해(客年) 12월경에 저 무리들 몇 명이 밤에 군저(郡邸)에 도착하여 총을 여러 발 쏘고 얼마동안 난폭하더니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러한 중에 자못 놀라운 움직임이 있었으나 손해를 입지 않았다. 어찌 불행 중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한 차례 그 일 이후로는 다행히 사방이 편안하다고 말하였다.
하오 7시 반에 순사 채계석(蔡桂錫)이 내도하여 인사의 예를 갖추었다. 8시 반에 순사 김창선(金昌善)이 와서 나타난 고로 그 사는 곳을 물으니, 채(蔡)는 천안의 용두리에 살고, 김(金)은 공주 팔풍정(八風亭)에 산다고 말하였다.




日錄 (4)
三月一日日曜上午十時에 發徃二十里江景市하니 時正十二点半이라 本郡守가 使該面長方駿錫으로 指揮擧行케하야 下午二点에 宣諭于下塲垈할새 會民은 不知幾百人이로대 來來去去에 諠嘩熱耳하야 雖爲高聲朗演이나 聽者邁邁而已니 可歎可恨이라 民之未開也여 同三時五十分에 閉會하다 同五点에 恩津日進支會長宋錫基와 摠務姜世永이 來訪하야 数語後辞去하다
同日下午七点半에 徃參禮拜于該處敎會할새 請余傳道故로 讀使徒五章一節至十七節하고 以欺同聖神으로 爲題하야 大旨奧意를 辨한 後九点에 閉會而敀舘하니 敎友朴準夏及四五人이 隨來來하야 暫時談話而去하다

三月二日月曜上午八点에 與石農으로 欲觀鏡浦勝槩하야 同陟烽燧臺縱覽하니 江景之爲浦大野平濶하고 長江中判하야 抱村溯洄하고 通海順流하야 啇船交集하고 輪汽來徃하니 江謳越吟과 吳啇蜀客이 互相市貨하야 誠一湖西之繁華塲이오
蒼蒼数峰이 棋列扵野中하고 陳陳鳧鴈이 翔集扵岸上이라 爲探地勢形便하야 故久彷徨에 或顧眄하며 或指點하니 沿邊七八百戶에 日人家屋은 無非廣点인대 韓民啇店은 何其凋殘고 莫不是觸目傷心이로다
敀路에 歷訪李使君尙萬旅舘則似有公事處理故로 暫時躕躇于戶外하야 聞其所言則乃是日警部가 昨夕에 招致面長于該署하야 無数詰迫曰宣諭委員行到를 何不通知며 宣諭委員이 何不來見乎아하고 縷縷言之云故로 李使君이 以事軆所在에 以若警部로 不當如是縱肆之意로 說明于面長也라
噫라 此等羞辱은 實係國權이니 言之何益가 仍卽敀舘矣러니 敎友朴準夏가 來到하야 邀請我一行于托事李寬夏家하야 設餐款待하니 果出扵相愛之意也러라
同十点에 發程하야 北行纔数里許에 有一小津하니 此乃論山浦下流也라 所經道路에 因雨水漲滿하야 逶迆屈曲하야 抵達于石城郡하니 相距二十里에 洽過三点餘라 首書記姜漢翼이 納刺來現于旅舘이러니 少頃에 郡守姜泰顯이 來訪故로 先問附近情况則近日敀順者乃至十一人而境內無警云하니 何非郡守惠化리오마는 亦爲 詔勅與曉諭文을 賁送頒布以後事也니 其爲相濟之義가 果何如哉아 幸莫幸焉이로다
同下午三点에 入于郡衙하야 皇勅을 宣揚하고 勸諭文을 朗讀하야 諄諄曉諭則各面長及一般人民來聽者無不咸悅하야 父老相與嗟歎曰 皇恩이 若是感激하고 曉諭가 又如是逼眞하니 自此以後로 若復一向頑迷者는 禽獸一般이니 粗具人性者아 孰不感化云云而本郡守亦有喜悅之色이라 至四点半에 閉會하고 因與坐語할새 試聞趙平海之言則本郡守는 果是循良之治오 日警部가 亦爲慈諒之人이니 石城一境은 必保無虞러니
同六点頃에 罷席敀舘하다 同八点時分에 財務署長李敏寧이 來訪하야 畧論內浦地方情形하니 大抵義兵은 影迹이 絶無하고 强盗는 間間有之而閃忽踪跡을 實難追躡하니 奈何오 其中에 庇仁藍浦等地에 稍甚한 模樣이러라

三月三日上午九点半에 發向扶餘할새 臨行에 偶逢舊知林溫相하야 寒暄数語後에 登程하야 直抵二十里扶餘郡하야 定舘于碑石街店舍하니 時已十二点半이라 靑陽公札를 專足發送하다
下午一点半에 郡主事李重億과 舒川財務署主事崔益煥이 來訪故로 坐定에 詳問地方形便則数三日前에 彼徒幾名이 侵入靑陽郡云이나 然이나 未有的奇오 扶餘則姑爲安穩하고 其他列郡에 山郡則或有鼠窃之輩오 海郡則或有水賊之警而擧皆閃忽에 踪跡을 莫追則所謂義徒는 風聲鶴唳而已러라
下午四点半에 本郡邑邸父老와 各面里頭民을 招待于衙舍하야 皇勅與勸諭文을 朗讀宣布하고 時機의 誤觧함을 說明曉諭한 後에 告示與勸諭文을 各面長의게 一件式出給하야 各洞에 翻謄輪回케하며 詔勅及曉諭을 一軆頒布하야 俾無一民不知之獘케한후 閉會하다
窃觀郡現况則曠官六朔에 署理郡守도 亦無一次到郡하야 諸般事務가 萬不成樣之中에 所謂郡主事는 裒如充已로대 首書記는 擧行이 頗爲可尙이러라

四日水曜上午八点에 彂行하야 北渡白馬津하야 纔到十里銀山市에 遇雨前進할새 四涉大川하고 又踰一巨嶺하니 名曰薑峙峴이라 到杻峙店中火하고 仍卽前徃할새 又涉二川하야 抵達于靑陽郡하니 與扶餘相距가 雖曰五十里나 路程이 崎嶇且遠하야 已過下午三点半이라
少歇于旅舘하새 本郡守黃祐璨이 來訪故로 先問該地情况則去二月二十五日上午三点에 暴徒百餘名可量이 侵入郡邸하야 突然放銃故로 分派所巡査三名이 應聲迎擊하야 彼徒四名을 即地銃殺함이 彼徒는 四散逃走하고 鹵擭品은 火繩銃五柄과 洋銃一柄이라 一自以後로 一境이 姑爲安息이나 然이나 近聞風說則彼徒가 聲言曰將復大擧하야 必無郡廳乃已云이
러라
同下午四点半에 與黃郡守로 同入衙中하야 詔勅을 宣布하며 曉諭文을 朗讀한 後因爲繼(→綱)續하야 切切曉諭하고 詔勅과 曉諭文과 告示와 勸諭文을 一例頒給하다 當日因爲雨勢不絶하야 人民來待者不滿二十人이러라 同五点半에 還到于舘하야 晩餐을 畢了하고 暫卧休息이러니 同七点半에 本郡守가 又來談話而去하다

五日木曜上午七点에 大興與禮山公文을 使本郡隷로 專足彂送하고 下午一点量에 內閣報告與家書를 彂付하다 本郡西下面長鞠進士永烈과 西上面長蔡主事東濟와 東下面長崔欽玉이 同時來訪하야 数語酬酌而去하니 蔡主事는 乃是已作古人한 敎友蔡校理東燮之再從也러라 分派所警部脅田庄藏이 來到하야 地方形便을 論難曰自此以後로 決不用彈厭手段하고 專用保安方針하야 若有敀順者면 極力保護하고 到底監禁하야 安寧秩序를 期乎維持云云이러라
下午二点에 本倅가 使通引으로 請遙我一行故로 因入衙中하야 晤談良久에 設餠款待러라 時에 地方委員李普雨가 在座閑談이라가 云有緊急事故하야 先爲辞去러라
試聞蔡東濟所傳則近日洪州地方에 有妖狐幻成女身하야 徃徃有垂常之迹而入于一民家하야 何樣變幻이던지 主人이 誤認爲孰知之鄰娥하고 使該妖物로 櫛梳其幼兒러니 未幾에 該兩穉兒는 無故致死하고 一兒는 身嬰無妄之疾하야 幾至難救云云하니 甚矣라 齊東之野說이여 何處好事者做此訛言하야 因口傳播하야 眩惑愚民하고 扇動人心乎아 誠可痛歎로다
本倅는 頗有革舊眼目과 開明思想하야 此等騷訛를 耳外聽之할뿐 不是라 凡扵行政上에 務欲牖民而其扵下愚不移에 何오 相與慨歎不已라가 同六時頃에 敀舘하다
下午八時에 蔡東濟來舘하야 槩論土風曰自前以來로 田畓結稅가 納暏處則依例이 作人이 獨當하고 幷作處則土主與作人 分當에 逢年則猶或可也어니와 歉年則以其所出로 盡数納稅라도 徃有不足之歎하니 富猶哿矣로대 貧弱이 猶困일새
本郡守黃祐璨이 洞察民隱하고 一切改革하야 幷作處則使沓主로 獨當稅納케함애 凡爲沓主者雖擧皆曰不可而自官으로 嚴立科程하야 昨秋以來로 終乃實施하니 其爲蒙惠扵農民이 大矣라 故로 咸頌其德하야 萬口成碑然이나 或恐郡守 逓去後에 惡風이 復肆하야 欲爲日後訂據物하야 記念碑를 竪立할 次로 一般農民이 方在擬議中云이러라

三月六日金曜上午十点半에 靑陽郡市塲에셔 人民数百名을 會同하고 至誠恳惻之意로 一塲曉諭後에 詔勅及曉諭文各一百度를 分布于衆할새 諸般士民이 爭先祗受하니 民心之悅服은 推此可知러라
同十二時에 閉會하고 本倅洽纔還衙에 何許村民一名이 隨入于公堂前하야 自服其罪하고 願受文憑하니 今日之宣諭는 果見當塲實効하니 仁義之感人이 捷扵影響은 莫非我 皇上之洪恩大德이 普洽遠邇也로다
同日午後一点半에 彂程하야 直抵四十里大興郡하니 時正下午五点十五分이라 該郡守金允秀與郡主事李起完이 即爲來訪于舘하야 寒暄禮畢에 即問本郡情形則客年十二月頃에 彼徒幾名이 夜到郡邸하야 放銃数彂하고 多少間作梗而去하니 自然中頗有驚動而別無損害하니 豈非不幸中大幸乎아 一自以後로 四境이 頼安云이러라
下午七点半에 巡査蔡桂錫이 來到致禮하고 八点半에 巡査金昌善이 來現故로 問其住地則蔡居天安龍頭里하고 金居公州八風亭云이러라

1 강구(江謳): 강소(江蘇). 절강(浙江) 일대의 민간 가요.
2 조잔(凋殘): 마르고 쇠약해짐.
3 핍진(逼眞): ① 실물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몹시 비슷함. ② 사정(事情)이나 표현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음.
4 조악(粗惡): 거칠고 흉악함.
5 영적(影迹): 형적(形跡). ① 남은 흔적. ②형상과 자국.
6 공찰(公札): 공함(公函). 공무에 관하여 주고받는 문서.
7 풍성학려(風聲鶴唳): ①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라는 뜻으로 싸움에 패한 병정이 바람 소리나 학의 울음소리도 적군인 줄 알고 놀라서 두려워함. 곧 겁을 집어먹음. ② 아무것도 아닌 조그만 일에도 놀람을 이르는 말.
8 통인(通引): 조선시대 관아의 관장(官長) 앞에 딸려 잔심부름하던 이속(吏屬), 지인(知印), 토인.
9 제동야인(齊東野人): 중국의 제(齊)나라 동부(東部)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그 말을 믿을 것이 못 된다는 뜻으로, 의(義)를 분별(分別)하지 못하는 시골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10 소와(騷訛): 잘못 전(傳)하여 소동(騷動)을 일으킨 소문.
11 하우불이(下愚不移): 어리석고 못난 사람의 버릇은 고치지 못함. 22 신지(信地): ① 규정된 위치 또는 순행(巡行) 구역. ② 규정된 일정한 위치나 구역, 범위.
12 결세(結稅): 토지의 결복(結卜)에 따라 매기던 조세(租稅).
13 병작(幷作): 땅 임자와 소작인이 소출을 똑같이 나누는 제도. 배메기.
14 민은(民隱): 백성이 시달려 생활하는 데 겪는 괴로움.
15 의의(擬議): 일의 시비곡직(是非曲直)을 헤아려 그 가부를 의논하는 일.

 
 
 

2018년 10월호(통권 7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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